[ 이웃사랑과 윤리(2) ] (TAPE 3) 먼저 교재를 살펴보자. ** 하나님의 사랑이 은사로 성도에게 주어지면, 지금까지 사랑했던 것들에 대해 미워하기 시작한다. ◈ 우리가 지금까지 사랑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제 교재 '3.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하겠는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은사로 성도들에게 주어지면, 지금까지 사랑했던 것에 대해 미워하기 시작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먼저 자기가 지금까지 사랑했던 것을 알아야만 하는데, 성도는 그것을 미워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에게도 분명히 미움이 있는데, 그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왜 이리도 허무한 것에 애착을 가졌던가?" 라는, 즉 '자기 미움' 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라고 묻지 말고, "저에게는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내 목숨을 미워한다든지, 과거의 것들이 다 미워진다든지 하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래야 솔직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 나는 왜 내가 밉지 않는가?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가? 여기에 대해서 누구도 답변을 내놓지 않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 속에는 악을 자체적으로 처리하려는 장치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죄와 악의 담당자가 따로 있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담당자가 따로 있음이 분명한데,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알아서 자기의 죄와 악을 자체적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장치를 만들고 있고 가지고 있고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장치를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어제 밤 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하면,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양대 진영을 다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즉 예수님의 생각도 알아야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신학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했는데, 세례요한도 그렇고 말이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율법을 모르는 이단이라고 했다는데, 즉 "우리는 당신이 필요가 없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차라리 바라바를 원했으면 원했지 예수는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필요가 없다고 했겠는가? 바리새인들의 신학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들은 악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죄를 지은 완전하지 못한 인간임을 인정하겠는데,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장치를 이성으로 자기들이 만들 수 있고, 이미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바리새인들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는데, "너희의 의가 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말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거론하셨는데, 물론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과거의 인물로 여기고, 이제 한물 갔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를 들어서, 어디 일본에서 사무라이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들은 과거에 한물 간 무사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신종 사무라이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곧 여전히 사무라이 정신이 일본에서는 계속해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즉 사무라이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후배들이 선배들을 왜 공경하는가? 때로는 무식하고 미련하게 보여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후배들이 미쳐 모르는 것을 선배들은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알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런 것이 후배들에는 신비스럽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것을 알았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똑같은 인간인데 그것을 왜 모르겠느냐는 말이다. ◈ 바리새인들은 우리의 선배 !! 우리는 생각하기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했다" 라고 여기겠지만,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겼는지 말이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겠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QT를 해도, 그것도 역시 바리새인들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은 우리의 선배라는 것이다. ◈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신학과 싸운 결과물 !! 지금 이것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그런데 십자가가 무엇인가? 바로 그런 바리새인들의 신학과 싸운 결과물이 아니냐는 말이다. 즉 싸운 상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들의 신학을 가로막아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스크린 반을 가려버린다면, 그것이 어떻게 영화를 제대로 감상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쉬리' 라는 영화를 보는데, 화면의 반을 가리고 보면, 그러면 주인공이 기관총을 쏘는데 있어서 그것이 누구를 보고 쏘는지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반을 가리면 나머지 반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북한군 전사와 싸운다고 하면, 그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별 없는 아침' 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물론 저는 알다시피 TV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지만 말이다(ㅋㅋ). 거기서 의사가 아침부터 화를 내고 하는 것은, 음식을 잘못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드기처럼 붙어있는 약혼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상대가 있는 법인데, 그런데 그런 것들은 다 무시해버리고 무슨 실제 내용이 나타나기를 바라느냐는 말이다. ◈ 십자가는, 반드시 상대방이 있어 !! 그러니 '십자가' 라는 것은 누군가와 싸웠던 흔적이자 결과물인데, 그러면 그러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십자가를 지신 분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싸우셨는가?" 라는 것을, 그것도 함께 파악을 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문제이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라고 무시해버린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소위 우리 신앙생활의 선배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체적으로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장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바리새인들의 주장처럼, 인간 스스로가 알아서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였다면, 왜 하나님께서 늙은 모세를 애굽의 바로왕에게 보내셨으며, 그리고 에스겔을 해골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겠는가? 그냥 "얘들아,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해라" 라고 하셨지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도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가 말씀만 줄게. 바리새인들을 봐라. 그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모른다. 그들이 땅에 있으니, 그들의 반만 따라가도 천당에 갈 수 있다" 라고 하시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악을 제거하는 장치를 고수했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피' !! 하지만 이러한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반대편에서 보여주시는 것은 단 한 글자인데, 그것은 바로 '피' 라는 것이다. 인간들이 기도하면서 흘린 피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 라는 것이다. 바로 이 예수님의 피가, 언약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했다는 말이다. 그게 히브리서 9장에 나오는데, 즉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는 것이다. (히 9: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오직 자기 피만을 내세우시고, 반면에 저쪽에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악을 제거할 수 있는 묘수가 있다고 하는데, 즉 자기들 의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이런 둘 사이에 벌어진 전투가 바로 이 땅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십자가 전투' 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로 가시면 던지신 것 !! 제가 여기에서 하나 물어보겠는데, 예수님이 공생애 때 말씀을 하시고 설교하신 모든 것을 요약하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바로 '피'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로 가시면 던지신 것이니 말이다. '헨젤과 그레텔' 이라는 동화에 보면, 계모가 아이들을 떼어놓으려고 하자 그 아이들이 산 속의 길에 돌을 하나씩 던져놓는데, 그것이 집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던지신 말씀들이 결국은 어디로 이어지는고 하니, 십자가에 자기의 피가 흘려져야만 한다는 것이고, 그 피는 바로 '새 언약의 피' 라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에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그런 옛 언약은 이제는 더 이상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옛 술을 옛 부대에 담는 방식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방식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과거 옛언약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서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마련해주신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이라는 것이다. ◈ 기존 인간들의 틀을 거부하시는 예수님 !! 그러니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라. 내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라고 하시는 것은, 그 배경에는 반드시 무엇이 놓여있는가? "너희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만든, 그렇게 악을 의로 전환을 시키는 장치는 내가 거부하겠다" 라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만든 길과 진리는 거부하신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이 이미 스스로 우리 자신의 의를 만들려는 틀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칭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뭐라고 했는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 자들이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그들을 비난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은 십자가 속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고후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그리고 사도바울이 선배인 베드로에게 왜 그렇게 면박을 주는가? 같이 합류하면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이 아니기에, 즉 "선배님,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라는 것이다. 이런 사도바울의 행동이 남들이 보기에는 선배도 모르는 안하무인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제일 중요한 십자가를 놓치고 있는데, 반을 그만 잘라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나머지 반도 맞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ㅋㅋ). 즉 악을 자체적으로 제거하려는 장치가 있음을 놓치고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무엇인가? '예수' 라는 새로운 힘의 존재가, 즉 한국교회에 그만 새로운 바리새인들이 등장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바리새인화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나님의 사랑이 은사로 성도에게 주어지면 지금까지 사랑했던 것들에 대해 미워하기 시작한다. 주님의 사랑은 아무런 변화 없이 조용히 성도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들이닥치면 그 때부터 성도에게 있어서 사랑해야 될 대상까지 고정된 사실까지 알게 된다. 그때까지 사랑했던 것을 도리어 미워하게 되면 주님의 사랑이 작동되었다는 증거이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라도 말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 사랑의 대상은, 예수님으로 고정 !!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 오직 예수님으로 고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교회성장이 들어가고,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지,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물론 "목사님, 성경에 이것 말고 다른 것도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성경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분명히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것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만을 믿게 해달라는 것인데, 그러니 새 언약의 피가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래도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도 맞지만, 성만찬도 행해야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이미 피로 끝났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냐는 말이다. 십자가마을 게시판에서, 미국에 계신 어느 목사님과 성만찬 논쟁을 하면서 마산의 구 목사님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복음만 있으면 되었지 왜 또 다른 것을 더 집어넣으려고 합니까?" 라고 반박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은혜를 유발시키려고 하는 어떤 방법이 투입된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성만찬이든 뭐든 말이다. ◈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복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함을 두고 복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모든 행함의 초점이 바로 '피'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는 말이다. 그분의 흘리신 그 피, 바로 그 피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초점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든 것은, 자기 것을 주려함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하면 된다" 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것으로 어떻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베드로가 아무리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해도 말이다. 오직 예수님의 기도하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 '예수님의 피'와 '인간의 장치'와의 싸움 !! 다시 정리하면, 모든 인간은 악을 자체적으로 처리해서 의로 만들려는 장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피'와 '인간의 장치'와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장치를 하는데 있어서, 바로 이 장치에 동원된 것이 '이웃사랑' 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이웃을, 자식을, 부모를,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바로 이런 모든 행동들이 예수님의 피와는 반대되는, 그런 자기의 의를 만들어내는 장치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를 대속물로 주려고 하는 것을, 그것을 두 글자로 '사랑' 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과 예수님이 말하는 사랑이 어떠한가? 서로 같은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서로가 대치구조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따라서 두려움도 없어야 마땅하다. 죽음은커녕 생명만 주어진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 참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어 !! 요한일서에 보면 참 사랑과 거짓 사랑이 나오는데, 참 사랑에는 무엇이 없다고 했는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경우에 두려움이 없는가? 자기 신분이 보장될 때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던지 간에 말이다. 자기가 지금 존재하는 공간이 주님과 함께 하는 공간인 경우에는, 자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차후에 전혀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때, 즉 신분의 변화가 생길 때는 두려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제가 어제 저녁에 "자기 중심의 드라마를 만들지 마세요" 라고 했는데, 즉 상상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누가 시켜가 아니라, 매일매일 열심히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TV 연속극을 보든지 안 보든지 간에, 항상 자기 드라마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어야 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그런 드라마를 만드는 행동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영역에 소속되어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요한일서에는 사랑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무엇이 없는가?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예레미야서 13장을 살펴보겠는데,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누가 5절에서 11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렘 13:5)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 무슨 내용인고 하니, 여기에 보면 예레미야가 자기 허리띠를 유브라데 강가에 감추는 대목이 나오는데, 물론 하나님이 시켜서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파보니까 그만 그 띠가 어떻게 되었는가? 7절에 보면,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없이 되었더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예레미야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하셨는가?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 역할을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여기 10절에 보면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 없음 같이 되리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허리띠의 역할이 무엇인가? 띠는 단독적으로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인데, 즉 띠는 허리에 속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허리는 하나님이고, 또한 띠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 즉 "너희들이고 싶다" 라는 말이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띠가 자기 혼자서 "나는 허리띠가 아니라 밧줄이다" 라고 하면서 돌아다니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주인을 놓치고 만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부터, 인간이 자기 독자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찾도록 허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만든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허리띠와 같이 주인에게 예속이 되도록, 그런 피조물로서 이 땅에 창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민족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경우인고 하니, 자기 주인이 대단할 경우에는 없는 것이 정상인데, 자기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주인이, 그분이 그야말로 천하의 모든 권세를 쥐고 있을 경우에, 거기에 예속이 되어있는 우리는, 우리가 차후에 어떤 행동을 하든지 상관없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 십자가 사건, 그 이상의 신비는 없어 !!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 가운데 '신비롭다' 라는 말이 있는데, 하지만 진짜 신비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비라는 말이다. 자기 중심의 드라마를 쓰니 신비가 많이 나타나지만, 즉 "내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죽지도 않고, 너무 신비로워"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망상에 불과한데, 그런 이 땅의 신비는 다 없애버리라는 것이다. 요한일서 1장 1절에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더 이상의 신비로움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비로운 생명을 손으로 만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신비는 다 끝났다는 것이다.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물리학이 신비롭다고 하는데, 그러나 !! 요즘 현대물리학에서는 신비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물리학은 모든 과학의 선두 주자라는 말이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요즘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물론 어중간하게 과학을 공부하면, 과학에서는 유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고 하겠지만, 요즘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무에서의 유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빅뱅' 이라는 이론이 있지만, 지금은 한물 갔다는 것이다. '초끈 이론' 이라고 해서, 물리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성경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물리학이나 수학은 더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자기는 수학시간을 영어시간으로 알았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칠판에 영어가 가득해서 말이다(ㅋㅋ). ------------------------------------- ◈ 잠시 이근호 물리학 교수님을 모시고 !! 전자라는 것은 마이너스 전하를 가지고 있는데, 양자는 플러스이고 말이다. 그것이 상식인데, 보어라는 사람이 이런 구조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합쳐서 원자를 이루고, 그런 원자가 모여서 분자를 이룬다는 말이다. 그런데 마이너스 전하가 아니라 플러스 전하를 가지고 있는 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양전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핵은 세 가지 색깔로 되어있는데, 그게 코크인데 말이다. 거기에 보니 입지와 반입자가 있다는 것이다. 입자와 반입자가 붙으면 반드시 소멸하게 되어있는데, 이상하게도 추가적으로 하나가 더 남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모여서 물질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면 물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바다에 파도가 치는 것은 바람이 불어서 그러한데, 바람은 보이지 않고 출렁이는 물질만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의 움직임은 바다의 파도와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파도만 붙잡으면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파도를 움직이게 하는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지금 물리학이 그곳으로 나가고 있는데, 그러니 그들은 신비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신비인데, 심지어 두뇌를 연구해보면, 남자는 운동을 잘하고 그리고 여자는 수다를 잘 떠는데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각각 좌우의 뇌 기능이 달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남자와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서로 구조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보면, 놀랍게도 한 쪽을 잘라내도 나머지를 가지고서 수다를 잘 떤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그것이 곧 공명상태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홀로그램, 즉 모든 두뇌는 서로 떨어져있어도 자기들끼리 이미 다 서로 연락이 되어서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가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구석이 마치 바다의 물결처럼 배출을(?) 한다는 말이다. 알다시피 방광이 배설기관인데,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배설기관이 방광이 아니라, 우리 두뇌가 배설기관에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자율신경이 두뇌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배설하고 땀을 내고 하는 모든 자율신경이 두뇌와 연관이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모든 신체와 연관이 되어서, 서로 공명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요즘 수지침이 유행하는데, 그게 무엇인가? 작은 것 속에 전체가 포함되어있다는 것인데, 제 아내가 수지침을 배워서 박사교회에서 많이 했는데 말이다. 물론 저는 그것을 믿지 않는데, 심리적인 것으로 보는데 말이다. 어떻게 거기 작은 손에만 침을 놓아서 병을 낫게 하느냐는 것이다(ㅋㅋ). 만약에 그런 것이 놀라운 신비라고 하면, 왜 연구를 하겠는가? 돈이 안 되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슨 진리에 관심이 있는가? 돈에 있지 말이다. 아무튼 요즘은 물리학이나 수학이 다 신비로움으로 나아가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진리가 있는데, 그것이 반드시 기독교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너무 독선적으로 기독교만 주장하지 말고, 불교도 공부하고, 김용옥이 주장하는 노자도 공부하자는 것이다. 즉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 만약에 인간이 진리를 안다고 하면, 왜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것 중에서 하나가 이웃사랑인데, 즉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이 곧 우상숭배이고, 바리새인들의 모든 행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행동으로 남을 즐겁게 하고 사랑하게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내 죄가 무엇인가?" 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이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하면 굳이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느냐는 말이다.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라고 하셨느냐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모세를 숙소에서 죽이려고 하셨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노아 홍수가 일어나야 하느냐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가치가 있다고 하면, 왜 그렇게 모두 다 죽이려고 하시느냐는 말이다. 더러 빼주는 사람도 좀 있고 해야하는데 말이다. 분명히 우리가 보기에는 그래도 쓸모가 있어보는데, 왜 그렇게 깡그리 다 없애버리느냐는 것이다. ◈ 하나님은, 창조를 양보하신 적이 없어 !! 하지만 노아홍수를 통해서 그렇게 다 죽인다는 말은, 하나님은 원래 자기가 창조한 그 창조를 결코 양보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그 어떤 것을 추구해도, 하나님이 원래 창조된 것만 있어야 하나님이 안식을 하시는 것이지, 인간들이 제 아무리 뇌물을 바치고 아부를 떨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안식으로 받지를 않으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는 모든 언약을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신비는 없다" 라는 말은, "기도해서 은혜를 받았다" 라는 것도 제거한다고 말이다. 이런 소리가 이성적으로 들릴지 모르는데, 악을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종교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런 종교자체를 제거해버리자는 것이다. ◈ 인간들의 악을 제거하는 장치를 살펴보면 !! 이제 물을 한 잔 마시고 본격적으로 들어가겠는데, 악을 제거하는 장치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그림으로 그려보겠는데 말이다. 인간은 69조의 세포로 되어있다고 하는데, 그리고 기관은 10만개라고 하다가 요즘은 그냥 만개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몇 개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60조 개나 되는 세포가 무엇을 원하는가? 양식을 원하는데, 에너지를 말이다. 옛날에는 농사만 지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과학이 발달해서 대량생산이 되니까, "니는 농사를 지어라. 나는 신발을 만들겠다" 라고 해서 서로 물물교환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 바꾸게 되는데, 그렇게 '바꾸자' 라고 하는 매개체가 돈인데, 그래서 마르크스는 돈이 무엇인고 하니, 그 물질의 대한 가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되면서 자본 자체가 곧 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밀밭과 여자 !! 다음과 같은 동화가 있는데, 즉 어느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남자는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남편을 붙들고 매일같이 비싼 것만 사달라고 조른다는 말이다. 어느 날 하루는 남편이 밀을 가득히 사왔는데, 그러자 이 여자는 화가 나서 그만 밀을 들판에 모두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남편이 그만 죽어버리고 회사는 망해서 문을 닫고 말았는데, 그래서 이 여자는 졸지에 거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들판에 나가보니, 그 들판이 그만 밀밭이 되어있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이 남편이 사다준 밀을 바로 자기가 싫다고 버렸는데, 그 밀이 그렇게 들판에서 풍성하게 자라났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한 보물은 기본양식을 제공하는 밀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바치라고 하는가? 부흥사들처럼 돈을 바치라고 하는가? 소산물인 곡식을 바치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치는 곡식이,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이름 하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하나의 기금이 된다는 것이다. 십일조가 그러한데, 땅이 없는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돈보다도 물질이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의 몸은 양식을 원하고, 그 양식은 탄수화물과 지방과 단백질을 제공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이 시대에는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 장사도 하고, 회사에도 다니고, 목사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직업인데 말이다. ◈ 교회 다니기 !! 그러니 이런 직업도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런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죄가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처리해주는 처리 전담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교회 다니기' 라는 말이다. 지금 제가 그것을 이야기고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악을 제거하는 장치가 무엇인고 하니, 무엇과 병행시키는고 하니, 현재 자기의 세포가 요구하는, 즉 "배고프다. 밥을 줘!" 라고 하는 것도 충족하고, 그리고 돈을 번다고 하면서 생긴 여러 가지 죄도 처리할 수 있는 처리 전담반도 교회 다니기로 해서, 그렇게 둘 다 하는 것이 곧 인간들의 실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을 번다고 죄를 짓는 것, 그것을 무엇으로 보상한다는 말인가? 이웃사랑으로서 보상한다는 것이다. 이웃사랑으로 땜질을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그 유명한 액땜목회(?)가 아니냐는 말이다. 학교를 다닐 때는 그렇게 순수하고 믿음이 좋던 학생들이, 그런데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면 이렇게 돌아가더라는 말이다. 약국을 운영하던 그 믿음이 좋던 장로가, 평소에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약도 공짜로 나눠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만 의사와 약사가 서로 의약분업으로 인해 분쟁이 일어나게 되면, 모두가 문을 닫고 만다는 것이다. 약이 없어서 환자가 아프든지 말든지 말이다. 왜냐하면, 약국조합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자기에게 엄청난 불이익이 오니 말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자기가 해온 이웃사랑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싫어 !! 그것이 바로 우리의 선배들인데, 젊었을 때는 선교단체의 간사를 하면서 그래도 믿음이 좋다고 하던 자들이,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교회에 나가면서 제일 싫어하는 목사가 어떤 목사인고 하니,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쪽을 다 치니 말이다. 자기들은 이렇게 양쪽을 처방으로 내놓았는데, 그렇게 둘로 갈라진 것 자체를 말씀을 가지고서 공격하게 되니, 그것이 그렇게 싫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 그렇게 다 했는데,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목사님을 성경만 보니 그럴지 몰라도,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여자는 아이만 낳아도, 복음과는 거리가 멀어져 !! 여자의 경우에는 아이만 낳아도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구경하기 힘든데 말이다. 아이는 커가고, 집안 일은 점점 늘어나고, 남편은 수상하고(?) 말이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끝이 없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의 생활은 알던 말씀과는 점점 더 차이가 나고, 그래서 악을 제거하는 장치로서 교회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니, 하필이면 복음을 아는 전도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물론 전도사님의 말이 맞지만, 하지만 그렇게만 하면 안 됩니다. 저도 아이를 낳아보니 알겠는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면 곤란합니다. 다 예수님을 믿자고 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제가 악을 제거하는 장치를 계속해서 고정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왜 시비를 겁니까? 왜 저의 생활에 간섭합니까? 당회장 목사님은 우리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주는데, 당신은 전도사가 되어서 그렇게 시비를 걸면 됩니까? 전도사님도 앞으로 자식을 낳고 할텐데 말이죠" 라고, 자꾸만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자기 의' 라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피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자기도 피로 용서받는다는 것을 안다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원래의 인간이 되는 것인데, 그러면 원래 인간은 무엇인가? 예레미야서 13장에 나오는 허리띠가 되는 것인데, 그러니 띠가 되어서 주인의 허리를 두르면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 부모 밑에 있을 때는 두려움이 없는데, 직업이 없어도 부모가 먹여 살려주니 말이다. 그래서 그때는 학교를 다니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라고 했다는 것이다. 믿음이 좋아서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고, 돈을 대주는 출처가 있었기에 말이다. 자기의 사랑이 아니라,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있었기에 말이다. 마음껏 교회에도 다니고 말이다. ◈ 목사님, 미안합니다 ?? 그런데 취직을 하고 또 결혼을 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여러 가지 바쁜 일이 생기다가보니 교회에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 미안합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무엇이 미안하냐는 것이다. 사실은 따지고 보면 미안하다는 것도 거짓말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찜찜하니, 그래서 벌을 받을까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돈을 버는데 지장이 있을까 싶어서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다. 왜 공장을 짓든지, 개업식을 할 때 보면 무엇을 하는가? 웃는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하지 않으면 찜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회장 목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목사를 비판하면 벌을 받을까 싶어서, 그래서 찜찜해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것 자체가 아직도 마귀의 놀림감이 되고 있는데, 그러니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 교회를 폭파시키면 어떻게 될까? 이런 현상을 보면, "차라리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면, 교회라는 단체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를 만들어놓고, 그 교회가 우상숭배를 하는 곳이 되고 말았는데, 그 교회를 통해서 자기의 두려움을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것 자체로 자기 두려움을 해소하려고 말이다. 그래서 "교회를 폭파시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성도에게 교회를 폭파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업을 폭파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즉 자기 아들을 죽여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종교와 직업을 폭파시켜버리는데,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게 하시는데, 즉 "양다리를 걸치면 안 되는구나" 라고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종교라는 것은 악을 제거함으로서 힘을 싣게 되는데, 그런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아직 본론에 들어가지를 않았는데, 즉 인간들은 악을 제가하는 장치를 따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만드는고 하니, 그것은 성경에 나와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자기를 정화하는 장치를 만든다는 것이다. 자기 피와 자기 희생과 자기 땀을 골고루 반죽해서 말이다. 그것을 두 글자로 '종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것을, 자기가 행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전도라고 하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말이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기가 기도한 것, 자기가 방언한 것을 전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 그런데 자기 자랑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 언제나 다 빼앗기는 즐거움을 !! 예수님의 한 평생은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런데 언제나 다 빼앗겼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말이다. 즉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빼앗겼는데, 그런데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반대로 빼앗기기는커녕, 이것도 모으고 저것도 모으려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찾고 끌어 모아서 두려움을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없어질까 싶어서 겁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시간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동안 고수한 것이 나의 허락도 없이 사라지게 되면, 그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이다. "에이, 시원하다. 왕창 다 날아가 버려라" 라고 말이다. 그 홀가분함을 누릴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피만 있으면 돼. 그것도 모르고 저런 것들을 보물이라고 끌어 앉고 있었다니, 그러니 나는 바보였어" 라고 말이다. 서 목사님의 경우에 참으로 존경스러운데, 그 소중한 목사직을 날리고도 저렇게 기뻐하고 있으니 말이다(ㅋㅋ). 그래도 그것을 따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이것이 나를 보호하고 지켜준다" 라는 것이 날아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성경에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말씀도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우리를 마음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잃으면 찾으리라" 라는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라는 말이다. 즉 주님이 원하시는 내용물이 무엇인지를 보라는 것이다. 10분만 쉬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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