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연대연합강의 제1강

아빠와 함께 2014. 3. 22. 17:29

201403 연대연합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피]라는 책의 중요한 내용들을 보면서 핵심은 성경 전체 해석을 어떻게 일관되게 해석해야 되는가?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일관되게. 어떤 특정 구절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볼 때 어느 대목을 설교해도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 방법에 대해서 그동안 한국교회나 세계, 개신교 말고 천주교를 포함해서 교회사 말고 신학사라고 합니다.

 

신학사가 뭐냐 하면, 작년에 제가 대전에서 50시간을 강의했는데, 기독교 들어오고 이후부터 신학이 어떻게 발달했느냐는 정도가 아니고 그 전에 헬라의 탈레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왜 그들을 거론해야 되느냐 하면, 이미 그들이 신에 대해서 언급을 했거든요. 그래서 단출하게 이야기해서 교회의 신학은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의 결합이다.

 

그러면 단출한 것만 외울 게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란 말이죠. 그들도 지식인들은 성경을 알고 있거든요. 사도의 편지도 알고 있고. 구약성경은 옛날부터 신성시해서 알고 있고. 특히 유대교는 교육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백성이라는 것은 구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인간이 만든 헌법이고 이런 것은 뒷전이고 중요한 것은 성경 법이란 말이죠.

 

그래서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권위는 구약성경입니다. 그걸 통할해서 율법이라 하고 나누면 지혜와 율법 또는 더 보태면 선지서 등 나오지만 어쨌든 전체를 합해서 법, 그리고 전통적으로 법을 해석한 추가된 주석, 신앙 있는 선배들이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연구해서 토를 달아놓고 거기에 대해서 해석을 가미한 그것도 일절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까지 합류해야 된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유대교 신학자들의 특징이 이거 하나거든요. ‘역사성’입니다.

 

역사는, 인간의 지식은 누적 될수록 진리에 접근한다. 이겁니다. 인간의 지식은 역사 흐르면 흐를수록 진리에 접근하게 돼있다고 그들은 믿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무엇인가는 시간이 흘러가면 인간의 지혜가 더 발달할 것이고 잘못된 것은 소거해버리고 진리에 부합된 엑기스만 모으는 겁니다.

 

모은 것은 후손들에게 물려줘요. 물려주면 그 다음 차례의 신학자들이 더욱 더, 지식이란 언어지식을 포함해서 어법, 문법, 역사적 상황들을 고려해서 “이것은 우리 선배들이 오해했네. 그것은 이 시대와 안 맞아.” 지금보다 지식이 발달하지 못해서 오해한 부분은 제거하고 충실하게 진리에 가까운 것만 따로 모으고 추가해서 그들은 역사적 해석법을 구축해서 이것을 전승이란 이름으로서 가르쳤습니다.

 

이 전승에 대해서 시비 거는 사람들은 역사적인 신학적인 작업을 거치고 난 뒤에 비로소 가타부타 이야기하라. 자기 마음에 안 맞는다고 성경해석 틀렸다고 일방적 주장을 할 수 없고 이 말씀이 옳다는 것은 그저 이 시대에 사는 신학자들의 권위가 아니고 아브라함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권위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감히 아마추어가 프로한데 시비 걸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의 해석법은 일단 역사적 해석법이 구축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뭘 하느냐 하면, 양육, 훈육이고 교육입니다. 전반적인 교육이지요. 잠언서에 보면 어린아이들을 가르쳐야 되니까. 아비는 가정의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부모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계시전달 노선에서 이탈 돼요. 이것은 아버지의 권위 정도가 아니고 대대로 아버지에게 부여된 가정의 영혼을 책임져야 될 가정의 목회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일년에 세 차례씩 세미나에 가야 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제사장들이 있어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하는 일은 방금 이야기한 역사적 권위가 어떻게 구축 돼왔는가? 그 신학역사를 공부하는 거예요. 지금 신학교에서는 신학역사 공부를 못해요. 왜냐하면 시간도 없고 급조해서 목회자를 양성해야 되기 때문에. 헬라철학부터 시작해서 터툴리안, 천주교 신학까지 섭렵해서, 개신교란 다른 게 아니거든요. 천주교에 반발해서 나왔잖아요. 반발했다면 반발한 정답만 쥐고 있으면 그 정답이 의미가 없어요. 어떻게 해서 반발했는지 그쪽 이야기를 다 들어줘야 돼요.

 

그리고 1517년 루터만 개신교라고 하는데 그전에 천주교에 대해서 반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의 등장했고 많은 이단들이 있었지만 정치적인 조치에 의해서 한 우산 속에 포용시킨 거예요. 정치적으로 안 되니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신학이 갈라지지 않습니까. 나중에는 서로 다른 삼위일체가 등장하고요.

 

그런 과정들을 놓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는 개신교라고 한 우산을 썼는데 그 개신교에 대한 반발의 요소가 이미 개신교 이전에 천주교에서 나온 반발의 요소를 반복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단이라고 했다가 정치적으로 자기편이라고 한 그러한 정치적 조치를 개신교가 똑같이 하는 거예요. 안 맞는다고 했는데 갑자가 교세가 커지고 그 교회가 숫자가 많으니까 역시 하나님이 저렇게도 역사하네 하고 수용이 된다고. 순복음교회가 대표적인 경우잖아요. 교인이 수십 만 되니까 무시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의 교회는 진리다. 왜 진리가 한결 같지 않지요. 진리라고 해놓고 왜 양적 부흥에 쉽게 굴복하는지. 진리라고 했으면 끝까지 진리여야 되지, 무엇이 무섭고 무엇이 실용적이고 무엇이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겠어요? 안 되지요.

 

그래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적 해석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까 이야기한 신학사, 신학에 관한 역사입니다. 여기에다 권위를 부여해요. 제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신학 자체에 권위를 부여했지요. 그럼 물어봅시다. 신학 자체에 권위에 있습니까? 그 신학을 다루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겠습니까? 전자는 분명히 신학 자체에 권위가 있겠지요.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도 만약에 자기가 옳다고 했는데 위반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권위를 박달하든지 존중할 필요가 없겠지요.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너희가 왜 지키지 못하느냐?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단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육신의 할례는 했는데 마음에 할례는 안 했다. 따라서 너희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진짜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이스라엘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런데 로마서 2장의 이 문제는 로마서 10장과 외형적으로 충돌해요.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 거냐? 아니면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거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는 문제냐, 아니면 둘 다 해야 되느냐? 아니면 하나를 했으면 하나는 없어도 괜찮으냐는 새로운 문제가 부각이 된단 말이지요.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쉽게 이야기하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 성경에서 그 말씀 외에 다른 말씀들은 안 해도 구원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수 이름을 부르면 그것으로는 모자라고 플러스 마음속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의 완성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건 또 문제가 있어요. 육신의 할례 같으면 문신 같이 한 번 해놓으면 지워지지 않아요. 마음은 심리거든요. 심리는 시간의 흐름에 저촉을 받게 돼있어요. 오전 10시에 믿음이 있다고 여기다가 오후 2시에 갑자기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날 때 천사가 와서 마이크 대면서 “당신, 믿습니까?” 물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의 할례를 유지하려면 새벽 3시든, 오전 11시든 언제 들이대도 항상 마음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해야 되느냐는 문제가 발생되겠지요. 누가 와서 약을 올려도 온유하고 약을 안 올려도 온유해야 되는데 마침 주께서 내가 짜증낼 때 재림해버리면 마음을 찍은 엑스레이 시커멓게 될 수도 있는 문제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로마서 10장에서 이야기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주의 이름을 얼마마다 불러야 합니까?

 

그러면 나중에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할머니,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몰라.” “할머니, 사도신경은?” “나 그런 것 다 잊었어.” “할머니, 찬송가?” “나훈아 노래 틀어줘. 찬송가는 질색이야.” 이럴 때 그 사람이 50년 섬겼던 권사라면 구원받겠어요? 이것이 목사님들이니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일반 신도들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정신 있을 때 마일리지 바짝 쌓아야 되겠어요? “정신없을 때는 내가 정신 있을 때 고백 많이 했으니까 그걸로 때웁시다.” 이렇게 거래, 흥정에 나서야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유대교는 아주 명쾌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권위가 역사적이에요. 역사가 진리입니다. 역사가 계시에요. 논리적으로 이렇게 돼요. 그들에게 구약성경이 있잖아요. 백이면 백 해석이 다 달라요. 다 다르니까 권위가 없어서 역사에서 믿음이 정말 좋은 출중한 사람의 깨끗한 이성과 깨끗한 오성, 그리고 욕심 없는 마음으로 깊이 평생을 성경을 연구해서 얻어낸 놀라운 신앙적인 경건하고 고상하고 거룩한 누가 봐도 감동할만한 희생적이고 봉사적인 은사처럼 보이는 해석을 끄집어내요. 거기다 역사적 권위를 부여합니다.

 

이 문제가 뭐냐? 옛날에 유명했던 랍비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그야말로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하다시피 성경을 해석했던 놀라운 지혜거든요. 문제는 그걸 가르치는 사람, 본인은 금식을 별로 안 했단 말이지요. 금식도 안 한 상태에서 금식한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를 속마음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이걸 일반인들이 의심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한경직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이 훌륭했다. 교인들이 너는? 그분들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살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정치적이고 돈 좋아하고 그러느냐. 목사들이 그걸 대비한 멘트들, 여러 버전이 있어요. 교황도 마찬가지고. 나에게 주신 것은 나의 개인적인 권위가 아니고 주께 주신 권위입니다. 이게 천주교 주교와 교황의 멘트에요.

 

혹시 교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거든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나의 권위는 나의 개인적인 성실도와 신앙도에서 나온 권위가 아니고 주께서 주신 권위입니다. 그걸 성령으로 기름 부은 권위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지도 않은 사찰이 성만찬 만지고 떼고 하면 안 되고, 천주교 같으면 평신도가 복장 갖추고 향 뿌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적어도 인간 속은 더럽지만 깨끗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졌기에 할 수밖에 없는 권위라고 해서 테두리를 쳐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누가 지적질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지 감히 네가 지적질하고 그래. 주의 종은 주께서 다루시고, 너는 섬기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1517년 루터가 외쳤던 만인제사장 이론은 어떻게 됩니까? 그거는 그런 뜻이 아니고. 아마추어가 프로의 깊이도 모르면서 들은풍월로 아는 척해. 루터가 그런 이야기했지만 천주교를 의식한 것이고 그 뒤에 갈빈 대에 들어가면 분명히 만인제사장이라 했고 성령 받은 사람은 모두 성도라고 했지만 교회 내에 딱 계급이 져버리지요. 3대 계급으로 정해버렸어요.

 

설교하는 권위는 신이 주신 권위인데 함부로 나대지 마라. 성만찬도 마찬가지고. 특히 성만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치리권. 그것이 만약에 구비되지 않으면 교회의 고상한, 거룩한 질서 자체가 무너진다. 그렇게 해서 목사와 장로직이 있는 것은 구약 때부터 내려오는 장로라는 특별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에 의거한 합당한 권위 있는 질서가 된다고 칼빈은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당신이 정말 교회에서 뭔가 일이 있으면 당신도 우리가 받은 교육 받고 특히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가르치는 은사를 받아서 하라고 나오지요.

 

현대에 칸트 이후에 리츨, 신학사에 보면, 개신교가 시작한지 미처 100년도 안 되서 개신교 스콜라 신학이 됩니다. 스콜라 신학이란 학자적인, 이론적인 것으로 개신교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풍토를 말하는 거예요. 마치 천주교가 생기를 잃어버리고 교리가 이론으로 치우친 것처럼 개신교도 안착이 되면서, 개신교가 안착된 것은 국가 권력과 함께 한 거예요. 네덜란드 같은 경우 개신교 국가거든요. 루터가 개신교로 성공한 것은 국가가 영주가 보호해서 그래요. 그전에 루터 이상으로 외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다 실패했어요. 동조자가 없었고 특히 경제적인 후원자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타이밍이 맞아서 성공한 거고.

 

루터 성공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 칼빈입니다. 프랑스 사람인데 스위스로 도망가서 했고, 스위스는 정치적 독립을 바라면서 종교를 이용한 거예요. 나중에 칼빈 죽고 난 뒤에 스위스는 중립적인, 어정쩡한 위치에 처하지만. 그 당시 교회 역사를 보면 종교는 교회를 이용했고 교회는 종교를 이용한 겁니다. 왜냐하면 유럽의 국가개념은 19세기 들어오면서고. 그 당시에는 영주 개념이 있었어요. 영주 개념은 땅에서 나는 생산물을 다 차지하겠다는 경제적인 욕구가 우선이었던 겁니다.

 

개신교에서 신앙고백을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유대교 해석법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이라는 큰 역사적 이슈를 전통적으로 유지하려면 여기서 확정된 신앙고백서가 수십 개가 쏟아져 나왔어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백년도 못 되어서 신앙고백서 수정하기 시작해요. 수정하는데 두 가지를 수정했습니다. 하나는 예정론을 수정했고, 또 하나는 성경무오설을 수정했습니다.

 

왜 수정했을까요? 예정론이 예지론으로 바뀝니다. 여기 감리교 목사님도 계시지만 예정론과 예지론의 차이를 잘 아셔야 돼요. 예정론이 깊겠어요, 예지론이 신학이 깊겠습니까? 상식 밖으로 예지론이 더 깊어요. 예정론은 그 사람이 태어나서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로마서 9장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는 거지요. 에서는 미움 받기로 결정되었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결정된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에서가 천국 가기를 애써도 그것이 다 괜히 헛짓이고 소용없는 짓인 거예요. 자기가 구원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모독과 모욕이 되는 겁니다. 지금 어른이 결정했는데 쫄다구가 변경하려고 해. 어른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게 아니야. 네 운명을 네가 결정해. 이미 결정했는데. 태어나기도 전에. 착해도 안 돼. 네가 착하려고 하는 짓이 나쁜 짓이야. 이게 예정론이에요.

 

예지론은 그것보다 더 깊이 나갑니다. 이걸 사후적, 또는 소급적이다. 그 사람은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 미 확정적이에요. 그래서 전도나 선교에 있어서 외부인이 장담을 하면 안 됩니다. 너는 천국 가게 돼있어. 너는 지옥 가게 돼있어. 그렇게 확정지으면 안 돼요. 목회자가 신이 아니니까. 그런데 분명히 천국 간다고 생각했던 알렉산더와 후매네오처럼 사단에 빠졌다고 해서 마지막 때에 배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다고 뒷담화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 아셨구나. 감리교의 예지론은 사실은 라이프니치의 예정조화론이라는 겁니다.

 

신학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그대로 아무 오류 없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채 성경구절만 뽑았는데 세상에 그 안에 철학이 담겨있을 줄이야 그들은 상상도 못했지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철학적 존재기 때문에. 어떤 성경구절을 볼 때에 빈 마음에 볼 수 없어요. 가다머가 이야기한 것처럼 선입견, 선이해. 선이해는 역사적 전통,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변에 둘러 쌓여있는 모든 환경이 역사적으로 이미 무엇이 옳다, 그르다고 장착돼있는 것이거든요. 마치 붉은 단팥죽에 떡 알맹이 집어넣은 것처럼.

 

인간의 생각은 이미 기존에 확립돼있는 의식에다가 담갔다고 빼내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영향 줬던 그것은 자기와 상관없는 남이라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본인이 살아가면서 계속 내놓는 것이 어디서 들은 것이고, 누구의 주장이고 그런 것이 나오는 거예요. 자기는 순수하게 기도 가운데서 신의 응답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도서관에 가서 보니까 수백 년 전에 벌써 누군가 다 이야기한 것이고. 이야기한 정도가 아니고 나보다 더 정리가 잘 돼있고 나는 성경구절 서너 개 뽑았는데 저쪽은 250개나 뽑아서 그걸 확립해놓았을 때 그럼 내가 그 사람에게 신학적으로 종속돼야 되는가 하고 자존심 상하는 기분도 더러운 거예요.

 

그래서 예지론을 겸허하게 수용하자는 겁니다. 당신은 천국 가기로 예정돼있어. 당신은 지옥 가기로 예정돼있어. 그렇게 하지 말고 관찰해보자. 끝까지 어떻게 가는지 지켜보자. 다만 우리 할 일은 다 하고. 맞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결국 주께서는 다 알고 계시는 이야기를. 그래서 선교도 의미를 살리고, 로마서 9장 의지도 같이 살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리 예정돼버리면 그 다음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께 예정된 사람이라면 미쳤다고 선교해요, 미쳤다고 전도합니까? 입 다물고 있어도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는데 내가 왜 귀찮게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 전도해야 돼요. 전도 의지가 팍 꺾이면서 사명감이 성경적으로 발생되지 않지요. 성경 자체가 모순되는 거예요. 예정 돼있다고 해놓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한다면, 그럼 뭐예요? 하나님은 우리와 동업자인데 하나님 본인만 알고 있고 우리한테 전혀 내막은 알려주지 않을 때에 우리가 전하는 것이 과연 확신 있게 전했다고 내가 확정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사라지잖아요.

 

신학사에게 두 가지가 있어요. 유대교도 마찬가지지만 개신교도 역사적 해석으로 들어가서 양육과 훈육과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일반 교인들의 영혼 상태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8년)에서 인간은 전적 타락했다고 돼있을 때 그것도 나중에는 손질하지만,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양육과 훈육, 교육이 아무 의미가 없어버려요. 타락했다면 에스겔 37장에 의하면 해골이잖아요. 해골한테 주님은 살아계신다고 해봐야 말이 안 먹히잖아요. 그러니까 넓은 범위에서 타락했지만 아직도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어떤 약간의 접촉점은 있어야 선교할 가능성이 성립되는 거예요.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루터의 주장에 의하면, 전적 타락이에요. 인간은 죽은 자에요. 전적 타락했어요. 그러나 루터교는 천주교 다 됐지만 개신교 칼빈의 후예들도 전적 타락은 교리만 이야기할 뿐이에요. 전적 타락은 어디에 써먹느냐 하면, 우리가 겸손해야 은혜가 높아진다는 그러한 취지에만 써먹지 실제 모든 교회 교육에는 전적 타락이란 성립이 될 수 없어요. 타락된 사람이라면 타락된 상태로 놔둬야지 만약에 내가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이 알아먹는다면 전적 타락이 아니잖아요. “이해되네요.” 이러면 전적 타락이 아니라니깐요. 그럼 덜 타락된 것이고 영이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척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죽은 척하고 있었는데 말씀을 주니까 그때 정신 번쩍 들어서 이제 깨어났습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역사적 해석법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쭉 가는 것은 아니다. 옛날 시대에는 맞는 것이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은 추려내고 이 시대에 그야말로 누가 봐도 믿음이 있다는 사람, 기도에 열심이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의 신앙적인 고백과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여 새로운 해석법으로 추가시키고 거기에 하나님의 계시라고 권위를 입히는 거예요.

 

그리고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권위가 확장이 되고,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주의 말씀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가르칠 때 배우는 사람한테는 양육과 훈육과 교육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교육학이라는 있잖아요. 교육, 가르침이 성립된다는 거예요. 그럼 가르침 성립이 되려면 전적 타락, 예정론, 성경무오설 이런 것은 옛날에는 루터, 칼빈이 주장했는데 지금 이 시대에는 안 맞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강의 줄거리입니다. 손질을 해야 되는 거예요.

 

성경무오라는 걸 봅시다. 성경무오라면 설교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제가 만약에 창세기 1장을 한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만 이야기해야 돼요. 40~50분 설교할 때 시간이 남잖아요. 그럼 또 해야 돼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만약에 창조라는 것은 ‘빠라’인데 무에서 유를 말하는 것이고, 창조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만들어진 것에서 변형되는 것과 등등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떤 청년이 원어를 더욱 더 연구하는 거예요. 이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까지 연구하는 거예요. 목사님은 빠라가 그런 뜻이라고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다른 뜻이 섞여 있었는데 기독교 신학에서 일방적으로 주목 되는 것은 의미를 남기고 나머지는 배제해서 전통이 됐습니다. 새로운 이론에 의하면 그게 아니었다고 나오면, 무엇에 어긋나요? 성경무오설과 관련 되면서 그렇다면 그 자료가 어디 있느냐?

 

그 자료가 원래 있던 히브리 성경 원판에 가장 가까운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까운 건 뭐냐, 덜 가까운 건 뭐냐? 이것 알려면 성경은 어떻게 편집 되었으며 어떻게 짜깁기 되었는지 다 나와야 돼요. 그렇게 되면 성경 번역서에 성령이 임하느냐는 문제가 생겨요. 쉬운 성경에 성령이 임할까요? 아니면 전통이 80년 된 개역 성경에 성령이 임할까요?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무오설이 생기면 그 다음에 계시가 뭐냐 하는 거예요. 전통적 칼빈 문서는 성경이 계시였습니다. 더 이상 빼지도, 더하지도 말라.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사도 열두 명이 다 죽은 이유가, 계시가 확정됐다고 사도들이 다 죽었거든요. 사도가 있는 이유는 성경을 확정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방언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고 오직 이게 전부라고 해서 끝내버렸는데 만약에 지금 예수님의 어릴 때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새롭게 발굴 되었을 때 예수님이 어릴 때 갖고 놀던 장난감, 마굿간이라든지, 입었던 옷, 창 자국, 성배, 그런 것들이 발견되었다면 계시에 집어넣을까요, 말까요? 더 우습게 말해서 예수님 7살부터 16살까지 찍은 비디오가 있다면 그 비디오가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제가 예전에 총신대 강의하면서 이 질문을 했어요. 많은 학생들이 그것도 계시라고 했어요.

 

그게 신의 계시라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성경책이 신의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이 신의 계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수들의 일관된 주장이 성경책이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이 계시라는 거예요. 칼 바르트에 의해서. 그런데 신학사에 보면 문제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계시일 때 신의 계시가 예수님만이 계시겠는가? 삼위일체에서 성부와 성령이 있을 때 예수님만 계시가 되면, 성령이 하는 일은 계시이냐, 계시 아니냐가 돼버려요. 성령이 하는 일이 계시가 되면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으면 계시가 돼버려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성령의 계시에 속한 사람은 주 예수를 안 불러도 구원이 되는 거예요. 신의 계시를 받았으니까. 그런 계시가 어디에 있는가? 시편 103편에 보면,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신이 다스리지요. 저 들에 있는 백합, 공중에 있는 새, 달, 별, 이 모든 것이 신의 솜씨지요. 그뿐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만 신의 자녀가 아니고 지금 절에 가는 사람도 신의 자녀가 되지요. 하나님의 신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기 때문에. 이사야도 그 비슷한 대목이 나와요.

 

그러면 예수를 꼭 믿을 필요가 있어요? 예수교라 하면 안 되고 하나님교라 해야 돼요. 그래서 순복음 교단이름이 하나님의 성회잖아요. 버전을 업그레이드한 거예요. 너희는 아래 단계에 머물러있지, 우리는 위 단계로 성숙돼있다는 겁니다. 성령을 통한 계시는 율법과 예수님이 하는 모든 기적과 관계없이 그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결국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인간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천주교는 불교와 악수하게 돼있지요.

 

옛날 천주교 신학이 다른 종교를 용납했습니까? 한국에 천주교 처음 들어왔을 때 제사 인정했습니까? 처음에 한국에서 순교자들이 제사 반대하다가 순교했다고요. 지금의 천주교는 어떻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괜찮아요. 갑자기 역사적 해석법이 왜 달라졌어요? 그것은 오직 하나 선교 때문에. 그걸 신학의 토착화, 삶의 정황 속에 신은 계신다. 그 신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신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자. 비록 예수를 모르고 교회를 안 다니더라도 하나님이 만든 자녀라면 그 속에 하나님의 품성이 이미 들어있다. 이게 바로 양육과 교육을 성사시키는 새로운 이론으로 첨가가 되는 겁니다. 신앙고백서를 반드시 손질하게 돼있어요.

 

그러면 선교를 왜 하느냐? 항상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거든요. 교회의 확장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권위자고 나 홀로 있을 수 없고 나와 더불어 많은 성도들이 발생하고, 그걸 성령 공동체라 하지요. 성령 공동체가 발생될 때 과연 나는 주의 종 맞는다고 확인이 되지요. 교인들도 자기 교회에 헌금을 했는데 옆에 교회는 쪼그라들었는데 내가 헌금하고 헌신하고 새벽제단 쌓은 교회가 커질 때 그 안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의 신앙감이라는 것은 점점 더 확신에 확신을 더할 수 있는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버리지 않았어.”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지요. 거기에 나온 신앙의 반열에 속한 사람들이 특징이 뭐냐 하면, 모범 답안이 없어요. 자기 주변에.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주변에서 만들면 따라하겠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누굴 흉내 내거나 모방할 수 있는 어떤 에프엠이 전혀 없었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한테 일부러 어긋맞게 축복하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양쪽으로 축복할 때 어떤 전통이 없었던 거예요.

 

이걸 사건이라 합니다. 이건 새로운 거예요. 오년 전에 느꼈던 감동과 달리 지금의 감동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남들이 다 따르는 자체가 이상하게 넓은 길처럼 느껴지고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될 같은 느낌이 들고. 프로스트의 시처럼 숲 속의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남이 가지 않은 길로 갔다. 요새는 남의 가지 않은 길로 가면 분명히 되돌아와야 돼요. 길도 없고 해서.

 

신앙인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똘아이에요. 사람이 정상이냐 할 때는 보편적인 상식으로 정상이냐, 아니냐 하거든요. 그게 권력의 힘이라 하는 거예요. 다수의 힘이 진리가 되는. 그런데 신앙인들의 특징은 다수가 아니고 낯설어, 이상해. 혼자다. 분명히 사람들은 안 알아줍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처럼. 분명히 무화과나무에서 혼자 있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나다나엘에게 “너 무화과나무에서 기도하던데?” “어떻게 알았지요?” 어떻게 알기는 기도를 받으니까 알았지. 나다나엘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네 속에 간사한 게 없구나. 네가 참 이스라엘이다.”

 

그 규정은 주님 보시기에 일방적으로 규정했지만 제삼자가 보기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어요. 남 따라 하지 않는다는 것. 일부러 특이하게 수염 기르고 도사처럼 하는 그것도 유행이지만 그게 아니고 전혀 자기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주님만 생각하다 벌어진 일에 대해서 자기 공로나 자기 행함을 찾을 수 없는 상태로 주님께서 집어넣었을 때 본인 자체가 당황스럽기 짝이 없고 사람에게 위기를 줘도 피할 길을 주든지 하지 이렇게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가 있습니까.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런 고백을 사건 만들어준 당사자, 주님에게 말할 수 있는 상황. 그런 상황이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났어요.

 

사람이 홍해를 건너고 또 홍해가 나타나면 옛날에 역사적 해석법에 의해서 홍해 건널 때는 지팡이만 있으면 되더라. 이미 입력이 돼있어요. 그런데 요단강에서는 지팡이 있는 사람을 일부러 없애버렸잖아요. 이제는 모세 없이 가봐라. 모세 대신할 사람이 없어요. 여호수아는 자기 계시 받은 적이 없어요. 여호수아가 고백한 것이 있어요. 내가 한 것은 내가 받은 계시가 아니고 모세가 받은 대로 움직일 뿐이라고 했어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장관이었어요. 꿇어! 이제부터 전쟁은 나의 전쟁이다. 그 전쟁을 신학적으로 붙여주는 전쟁, 여호와의 전쟁이라 하는데 말이 그렇지요. 완전히 도박과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이미 알고 있어요. 전설로. 이미 해본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방이 되고, 그것은 양육이고 교육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끄 엘룰 같은 사람은 천주교는 시작하자마자 망했다는 거예요. 시작하자마자 권력의 맛을 봤다는 거예요. 교회가 권력의 맛을 보면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사건화 돼야 되는데 사건이 아니라 존재가 돼버렸어요. 주께서 어떻게 뒤집어놓는가는 사절이고 있는 교회 우리끼리 친목을 도모하세. 어떤 결속을 다지세. 이런 쪽으로 나선 거예요. 거기에 필요한 것이 교육이었고, 교육에는 역사적 해석법이 먼저 있어야 되고 그것에 권위를 줘야 되고 가르치는 사람에게 권위를 주고 권위에 복종해야 되고 교회 질서가 있어야 되고 교인들은 섬겨야 되고 밑에 사람은 무조건 그것을 믿으라고 단속해놓고 권위자가 판단해야 되고 판단자는 하나여야 되고. 교회에 태양이 둘이면 안 되거든요. 한 사람이 판단해서 너는 이단이야, 너는 삼단이야 하고.

 

이런 식으로 할 때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인간이 전적 타락하면 안 된다.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형상은 잠재된 상태지 죽은 상태는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에 신의 계시가 오게 되면 깨어나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잘 가르치면 되겠지요. 잘 가르치면 구원받는다. 잘 가르친다는 말은 설득력이라 하는 겁니다.

 

설득력은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위반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성령의 나타남이라 할 때 앞의 말, 내 말과 내 전도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이 자리에 다른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성령의 나타남은 어떤 어르신네거든요. 내가 생명을 대신할 자가 아니란 말이죠. 나 따로 있고 성령 따로 나타나고 나는 성령 앞에서 쪼다가 되고 나는 무익한 종이 되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죄인 중의 괴수고. 여러분은 안 보입니까? 저 말고 다른 분 안 보이냐고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열두 제자를 보내면서 하는 말이에요. 앞으로 너희에게 성령을 줄 테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20절) 얼마나 위험한 발언입니까? 누구나 차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발언일 수도 있고 위험한 만큼이나 그게 진리잖아요. 악령 받은 사람도 그런 소리 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말씀이니까 함부로 하지 말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말씀의 취지는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거든요. 네가 얼마나 못 났으면 못난 너를 성령께서 사용하겠느냐? 성령께서 사용했기 때문에 덩달아 권위자라고 주장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요한일서 2장 27절, 28절에 나와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친히 모든 사람에게 직접 가르칠 것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에베소서나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치는 은사 받은 것과 대충돌이 일어나요. 분명히 은사 중에서 가르치는 은사가 있단 말이지요.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는 말은 배우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에 대들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쪽이거든요. 성령의 은사에서. 제 말 맞잖아요. 다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요한일서 2장 27,28절은 왜 나오느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네 안에서 성령이 친히 가르친다는 거예요.

 

이 충돌에 대해서 기존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것은 초대교회 때 신학이 이미 세분화되었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 계통 따로 있고, 베드로 계통 따로 있고. 초대교회가 세파로 나눠졌다는 겁니다. 각각 다른 소리한다는 겁니다. 요한파 따로 있다는 거예요. 현대신학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보수 말고 통합측, 감리교에서.

 

그렇게 되면 뭐가 깨져요? 사도바울 말이 다 계시가 아니구나. 사견, 개인적인 의견이구나.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 올 때 여자들이 구태여 머리에 수건 쓸 필요가 없고 여자라고 남자한테 복종할 필요 없구나. 그것은 그 당시 사회적 문화구나. 그렇다면 그 당시 문화를 하나의 계시로 사용했다면 오늘날 뭘 사용하든지 뭐가 나쁘냐? 까짓 것 우리 교회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면 된다는 아이디어가 여기저기서 올라올 때 그것을 되고, 안 되고를 누가 결정합니까?

 

 

그것은 10분 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