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이웃사랑과 윤리010523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4. 25. 18:18

 

[ 이웃 사랑과 윤리 ]

2001,5,23 이근호

 

Ⅰ 서 론

 

인간의 활동 분야가 복잡해지고 부터 윤리도 각 분야에만 합당하도록 자체적 윤리관으로 변형되고 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다른 윤리와 마찰을 일으키고 모순되는 대로 방치된 채 적용되기도 한다. '이웃 사랑'이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서 움직이더라도 이웃에게 해악을 끼치고 그 증세를 도리어 굳혀주는 유사 '이웃 사랑'이 번식될 수밖에 없다. 이는 '이웃'이라는 개념과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잘못된 인식이 있기에 이런 결과가 초래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이웃 사랑'이 어떠한 개념인지, 그리고 과연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실현시킬 수 있는 내용인지를 검토하는 것이 본론이 된다.

 

Ⅱ 본 론

 

1. 여러 분야에 있어 '이웃 사랑'을 위한 노력

 

①흔히 과학과 기술은 세속적인 영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미국이라는 초우량 기술 국가는 동시에 가장 세속적이고 퇴폐 문화의 선봉에 선 나라처럼 인식되기 십상이다. 사실 과학과 기술이 발달이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와 정신과 여타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를 고갈시키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속도는 증가될 것이다. 대학 진학에서 과(科)를 선택할 때도 역시 인기 있는 학과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 속한 학문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모순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재물과 물질을 얻고자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경향을 스스로 천박스럽게 여긴다. 돈과 재물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항시 그런 것들은 희망사항만 남겨두고자 한다. 그래야지만 뱃머리 같은 신비로움이 저만치 존재하므로서 자기 인생에 일정한 품위를 제공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비성 간직'은 어디까지나 일단 몸이 건강하게 받혀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당장 재물이 아쉬울 때는 신비로움이나 인생의 품격도 뒷전이 된다. 개 같았다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개 같은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경멸스러운 생활을 마다하지 않는 겸손함에 있다고 믿고 있다. 이웃 사랑이란 우선 내 몸부터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때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는 이웃 사랑도 보류이다. 이처럼 이웃 사랑이 긍정되려면 우선 개 같은 물질적 생활도 더불어 긍정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만약 물질 가치가 기초로 되지 않는다면 고상한 정신적 이웃 사랑도 허물어지는 것이 현시대의 구조이다.

예를 들면, 루게릭이라는 병(ALS)이 있다. 감각과 신체의 틀은 그대로이나 온 몸이 너무나도 무기력해져서 심지어 입술조차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무너져 내려버리는 질병으로서 치료약이나 예방법도 없다. 그저 죽는 날을 기다리면서 인공호흡기로 생명이 연장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병에 대한 치료제 계발을 과연 어느 나라가 담당하는 것이 합당할까? 앓고 있는 환자의 입장에서 가장 큰 이웃 사랑이라면 어떤 것은 말하는가? 그것은 일시적인 고통을 완화하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시중들어주고 사랑하고 위로 격려해 주는 것보다 아예 치료제를 계발해서 자진해서 우뚝 서서 걷고 일할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도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어느 나라가 의료 기술에 있어 가장 축적된 상태에 있을까? 그리고 막대한 실험 실습비나 연구비를 조달할 수 있는 나라가 어디일까? 그것은 가장 돈이 많은 나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 많은 나라가 돈이 많아질 때까지 그들의 경제 활동은 과연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돈 없고 무식한 나라들을 자기와 같은 입장에서 우대하고 존경해주어서 얻어진 재물과 자본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의 착취가 항상 수반되지 있지 아니하면 다른 나라보다 더 큰 재산을 모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되니 경제 분야에서의 비윤리가 의학 분야에서는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는 참 윤리 실천의 없어서는 아니 되는 필연적인 바탕이 된다. 즉 경제적인 면에서 비윤리가 없었다면 의학 발전이나 재산 축적이 성사되지도 못하고 인류는 수많은 난치병 속에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 볼 뿐이며 이것만이 최상의 이웃 사랑이라고 스스로 위로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는, 휴대폰 회사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기간을 간격으로 하여 쉴새없이 신제품을 계발하고 쏟아내고 있는데 이는 소비자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그래서 과소비를 유발시키게 된다. 하나를 만들더라도 오래 쓰고 식상되지 않는 디자인을 계발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따질 때 참된 절약에 부합되는 기업 윤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적으로 신제품을 계발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공포하는 것은 그렇게 아니하면 기술 축적이 되지 않게 되고, 이런 결과로 대외 경제적이 뒤떨어지게 되고 기술 경쟁력이 가속되지 아니하면 해와 자본 투자가 이 나라에 유입되지 않을 것이고, 해외 자본이 없으면 기업을 설비 투자나 기업 확장을 하지 못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고용 증대에 실패할 것이요, 이는 후손들에게 자기 노동의 대가마저 얻을 기회조차 박탈하는 것이 된다. 온 국민이 거지꼴을 못 면하게 되는 지경이 이런 순서로 이루어진다. 경제가 가난하다는 것은 국민 개개인의 육체적 쇠약을 낳게 된다. 넉넉하고 못 먹고 여가 활동을 제 때에 즐기지 못하고 육체의 허약만을 가져 올 뿐만 아니라 교육받을 재정 부담이 늘어나서 양질의 고급 기능과 기술을 익히지 못하게 된다. 총체적인 퇴보를 가져온다. 정신적으로 온 국민이 겸손해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상호 도와주는 정신을 피어날지는 모르지만 아까 언급했듯이 그것이 근원적인 이웃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이는 것이 더 큰 이웃 사랑이라는 주장이 온 국민에서 얼마나 큰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마치 이웃 나라를 가난에서 해방시키고 보다 더 질 높은 문화혜택을 누려준다는 대승적 관점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차라리 그 나라를 정복해서 그 이웃 나라 재산과 백성을 우리 것으로 삼을 때 그 이웃 나라가 우리나라로 더불어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것이 과연 진정 '이웃 사랑'이 아니고 무어냐는 논리를 과연 제 정신으로 용납이 되는 이론일까? 따라서 새로운 모델의 휴대폰이 나오면 국민들은 그 기업의 기술 향상에 대한 격려해준다는 차원에서 소비를 시켜 주어야 되고, 그것이 결국 국가 경제력의 번영의 길로 이어진다. 하지만 없는 사람에게는 물건 욕심이 결코 '이웃 사랑'으로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특정 분야의 윤리가 결코 전체적인 윤리에 도움된다고 말할 수가 없고 반대로 전체적으로 합당한 윤리라는 이유 때문에 그 분야에 같이 합당하게 적용될 윤리라고 주장하기가 곤란하다.

②교육 현장에서의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 간의 경쟁력을 도입하지 아니하면 학생들은 학문을 이해하고 그 학문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학습 능력을 갖출 의욕을 유발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국가 경쟁력이 남의 나라보다 뒤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경쟁력이란 보다 높은 보상이 마련되어야 가장 큰 효과를 보는데 그것에서 파생된 것이 인류 대학 합격을 위한 입시 경쟁이다. 물론 국가적 입장에서는 모든 분야에서 골고루 인재가 요구된다. 하지만 이런 취지의 공교육은 일선 학교장에게는 전혀 먹혀 들어갈 수가 없다. 누가 자진해서 나서서 이류 고등학교 되겠다는 학교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인원수를 일류 대학에 진학시키므로서 그 고등학교는 교육 능력에 있어 사회적으로 보장받게 되어 있고 보상받게 되어 있다. 그 학교에 보다 더 많은 인재들과 자본이 들어온다. 그렇지 아니하면 도태되게 되어 있다. 공교육 관점에서 보면, 돈 없는 아이들도 돈 있는 아이들처럼 교육 평등의 혜택을 입게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갖고 있는 타고난 적성이 낭비되는 일이 없이 나중에 균형 잡힌 국가 발전에 위해 적재적소에 써먹을 있는 유능한 사회인 양성을 목표로 하게 된다. 그러나 돈 있는 집안에서는 엄청난 과외비를 뿌려서라도 그런 공교육만 받고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는 아이들과 차별화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소수만 혜택을 보는 일류 사회인 되기 위한 기대감에 충족될 방도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선 학교장들은 이런 돈 많은 학부모의 말을 수용하지 아니하면 자신의 위상 또한 일류 교육자가 되지 못하게 된다. 소위 말해서 교육을 열심히 한다, 혹은 잘 한다는 학교가 과연 전체 공교육 입장에서 윤리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이 학생들에게 이웃 사랑인가 하는 것은 모든 학교나 가정마다 지닌 사정에 따라 천차별 나게 된다. 그래도 나라에서 강제적으로 공교육을 확신시켜 나가겠다면, 돈 있는 집안에서 애들을 조기 유학 보내어 기어이 차별화 교육으로서 교육 승리의 티를 내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학부모들의 극성이 먼 장래로 볼 때 국가 발전을 앞당기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무엇이 진정 이웃 사랑인가? 다같이 못살게 되는 게 이웃 사랑인가? 아니면 자녀 교육을 위해 국가마저 버리고 일가 친척마저 버리는 그것이 도리어 자기 조국의 장래를 건지는 대승적인 차원에서의 이웃 사랑인가?

③가정 내의 윤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뒤 자식들은 장례식을 치르면서 귀찮고 번거럽다는 생각보다는 보편적으로 죄송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대가없이 내리 사랑을 받아서 오늘날 자신의 존재가 형성되었는데 거기에 대해 부모님에게는 변변한 보답도 제대로 못했기에 무척 아쉽고 살아 생전에 진작 좀 편하게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해서 괴로워한다. 그래서 공자는 3년 상을 치르기를 요구하고 있다. 자식은 적어도 3년 동안은 부모가 아무 일도 못하고 전적으로 매달리며 키워내어야 3년 후 인간다운 형태를 제 모습을 갖추는 법이다. 자식이 어릴 때 부모로부터 그런 무조건적인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부모님에게 마지막 길에서 어떤 배려라도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를 더 오래 살게 해드리지 못하고 일찍 죽게 한 죄인이라는 의식을 느끼면서 3년 동안 자책의 기간을 지킬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

부모가 아니라 남에게서라도 은택을 입었으면 그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 사람다운 도리이다. 만약 그 사랑 받은 것을 모른척하고 계속 상대방의 사랑을 이용하려고만 들면 그런 인간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이다. 그래서 성경에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이 말씀에 보면,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 사고가 얼마나 악한 것인 것을 잘 지적하고 있다. 말세의 고통은 딴 게 아니라 이런 사상이 팽창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를 공경하고 은혜를 갚는다는 사고 방식 자체도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 사고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즉 부모가 되었던 누가 되었던 나에게 잘 해 주었으니까 그 은혜를 보답하는 식의 인식은,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만큼 어떻게되든 흠집이 나지 않고 깨끗하게 유지하겠다는 집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완벽한 자존심과 체면의 표출이다. 이것도 극도의 자기 사랑의 한 단면이다. 나의 훌륭함이 깍기는 것을 그 어떤 경우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의 끝은 결국 구세주와의 결별이다.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18-20, 22) 이 청년은 자기 존재의 우수함을 신봉하면서 자기 존재 형성에 도움이 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를 기준점으로 삼아서 선과 악을 구분하고자 했다. 그리고 선에 대해서는 보답으로 보상을 하고자했고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에는 결별하는 식으로 자기 의사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결코 이웃 사랑이 아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절대성이 하나님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고 있다.

④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성도의 구별된 삶을 요구하다보니 청년들은 아예 교회 안으로 도피해서 자기들만의 폐쇄된 문화에 빠진다. 마치 하나님께 영광되는 문화를 수행하기 위해 특별히 택함받은 종족이라도 된 양 자부심을 누린다. 하지만 그 문화의 질이라는 것은 폐쇄된 체제만큼이나 기능적인 면으로나 기술적인 면에서 날이 갈수록 세상 문화와는 확연하게 뒤떨어지기 마련이다. 교회 안에서 찬양 보컬팀을 만들어 공연하는데 있어 음악적 재능이 결코 기존 재즈 대가들의 연주 수준에 못 미친다. 이는 그들과 어울려서 그들의 기술을 전수 받는 기회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능의 발달은 상호 협력하고 배우는데서 보다 나은 기능이 나온다. 이렇게 되려면 그들의 생활에 합류해야 한다. 따로 독자적인 수련만으로는 새로운 정보에 참여하거나 공유하기 힘들다. 그들의 사상과 생활 습관과 삶의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들과 접촉해야 한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더 나은 기술을 습득을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그들 집단의 동료가 되든지 제자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다. 억지로 참아가며 참여하는 것으로 효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인정과 합당한 예의와 존경심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기술 습득뿐만 아니라 그 기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마저 그들의 소개가 힘이 된다는 것이다. 기술이란 그 기술을 사용하는 가운데 스스로 터득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런 발전의 기회조차 박탈당한다면 항상 뒤쳐질 수밖에 없고 전문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색스폰를 잘 연주 할 수 있는 비법을 불신자로부터 배우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 그 색스폰을 매일 같이 공연할 수 있는 공간 확보와 숙달 할 수 있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 이런 기회의 조달이 단독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법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담임 목사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세속과 합류하여 죄를 같이 먹고 마시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 아닌가? 혹시 고린도후서 6:14-16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이 아닐까? "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꼭 음악이나 그림이나 요리나 농축산업과 관련된 기술이나 출판업이나 체육이나 디자인 분야 같은 기예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사업 경영 수완이나 행정이나 외교 분야 같은 곳에서의 더 나은 경험 획득을 위한 모든 기회를 모두 포기하고 마냥 교회 활동에만 매진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자폐적 행동이다.

목사가 교인들을 진정으로 '이웃 사랑' 한다면 그 교인들이 사회에 나가서 경제적으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배려는 못할망정 도리어 그들의 교류를 죄악시하면서 능력 발휘의 기회마저 박탈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과연 그 영혼을 사랑하는 것일까? 차라리 교회 자체가 사회와 격리된 채 자급자족을 위한 공동체로서 운영될 수는 있겠지만 그 공동체는 여전히 또 다른 세상 공동체와 집단 대 집단의 경쟁 관계에 돌입하게 되어 있다.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결코 면제될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합당한 노동수임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결정짓게 되는가? 천성적으로 알뜰한 가족과 게으른 가족 간의 소비성과 생산성을 놓고 불평등 시비는 생기지는 않을까? 판매 부진에 따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책임자가 따로 없다는 상황을 감안해서 알아서 스스로들 선뜩 책임지겠다고 나설까? 보다 많이 희생하는 사람 쪽으로 다른 희생까지 은근 슬쩍 넘겨버리는 구심점 형성 경향에서 과연 손쉽게 벗어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일방적으로 부모의 뜻에 끌리어 이 집단에 들어온 후세들의 의견을 나중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사회적 변화에 대해 속도를 같이 내어서 제 때에 따라붙지 아니하면 나중에 큰 인식 차이로 뒤쳐지게 된다. 결국 뒤따라붙을 엄두조차 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포자기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데 사회가 인정하는 그 어떤 자격증도 거부하고 (교사 임용고시를 비롯해서 개인의 장래가 달려 있는 모든 국가 공인 자격증 시험이 주로 일요일이 치러진다. 목사 딸, 목사 아들이라고해서 나라에게 특혜를 베풀어주지 아니한다. 그리고 국가가 '주일성수'라는 특정 종교의 교리를 특별 대우해주어서 강제권을 갖고 지탱시켜 줄 그 어떤 의무도 없다. 만약 그렇게되면 그 종교 단체는 권력 단체의 일부가 되어 종교단체가 아니라 정치단체로 변모된다.) 토익이나 토플 시험도 마다하고 가진 재산도 거의 없어 심지어 미국 이민조차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을 때, 조그마한 땅뙈기만 돌아가며 개간하는 집단이 되는 길이 과연 교회가 최종적으로 제안하는 이웃 사랑의 귀착 지점인가?

 

2. 윤리적 '이웃 사랑'의 한계

 

이웃 사랑에 있어 제일 큰 문제점은 각자의 기호에 따라서 선택성이 개입되어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삭과 리브가가 자기 취향에 따라 쌍둥이 자식 사이를 갈라 세우며 편애하듯이 선택적 의지가 의식적으로 부각되지 않는 인간 행위란 있을 수 없다. "왜 그것을 선택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의 성립이 가능하다. 여기에 대해서 누구나 할 말을 갖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선택에 대해서 내놓는 이유라는 것이 과연 보편적인 사랑의 격에 합당하냐 하는 점이다. 즉 상대를 위하여 강요받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사랑으로 굳혀서 자기 선택의 타당성을 확보해놓기 위한 동기로서 결의한 행위이다. 자기 행위를 사랑하는 느낌이 없는 자가 어떻게 사랑을 알겠으며 그것을 남에게 분배하고 시도조차 할 수 있겠는가. 먼저 자기가 자신을 향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돈독해야 사랑과 비사랑과의 차이점에 늘 민감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자기 사랑에 충만한 자만이 여분의 느낌을 타인에게 희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좋은 느낌 아래서 말이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사랑에 대해 타박하거나 무시한다면 그런 심적 상태에서 어떻게 그 사람에게 순결한 사랑이 줄 수 있을까. 내가 나의 사랑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표하는 공감대 안에서만 그 타인은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 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타인을 사랑한다는 현상이 발생되기 이전부터 내가 갖고 있는 그 사랑을 같이 사랑해주는 조건이 먼저 성립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먼저 나를 사랑해 주어야 비로소 이웃 사랑이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냐 아니면 자기 사랑의 연장에 불과한가? 성경에 나오는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도 이런 차원에서 오해되어 해석될 공산이 많다. ①남을 사랑하기 이전에 철저히 자기 사랑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받아드리게 되는 것이다. ②그러나 성경의 이 말씀의 뜻은, 그 누구도 이웃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웃 사랑이 성립하려면 진정한 자기 사랑이 하나님에게 먼저 정당함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죄로 인해 근원적으로 이점이 차단되어 있다. 즉 사랑 자체가 인간에게 생길 수 없는 입장에서 자기 사랑도 옳지 않고 더 나아가 이웃 사랑도,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성립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과 연계시키면서 결국 행위에 나설 그 인간의 죄성을 들추어내고 죄가 확산되는 근거지가 바로 너 자신임을 지적하기 위한 조치였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인간이 자기가 옳을 수 있고 옳은 결정과 옳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과연 그러한가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게 살기는커녕 죄악이 터져 나오는 진원지 구실을 하면서 산다고 보고 계신 것이다. 이점에 있어 핑계치 못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분의 인생과 여타의 인생을 상호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성령님조차 예수님의 편을 들어버린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이 본문에 보면,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성령님과 우리 인간들은 어떤 관계로 이어지는 것입니까?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라고 되어 있는 것을 봐서 우리들은 책망 받는 입장에 있게 되고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근거로 우리를 책망하시는 위치에 계시다. 결코 성령님이 성령님 자신을 왜 인정 안 하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점이다. 성령님은 자신을 알아 달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님 자신만으로는 인간의 본질을 정죄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늘 예수님과 그의 죽으심을 내어 거시는 이유는 인간의 죄악은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에서만 전모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인간들이 주장해오고 있는 "우리도 선을 행할 수 있음, 사랑도 행할 수 있음, 옳은 선택과 결정도 가능함"이라는 의지들을 유감 없이 정죄 하는 근거가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라면 당연히 '이웃 사랑'의 완성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완성하신 게 된다. 문제는 이 완성이 마땅히 우리 인간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즉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영원토록 머문다는 이야기이다. 그 나라와 의는 인간들이 예수님이 못다 한 미진한 잔일들을 마무리 지어주므로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의 행함에서 새삼스럽게 추가될 의(義)는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여전히 인간은 자기 행함으로 율법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였고 그 뒤를 따라 2차적으로 성도가 그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비로소 의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가 되어서도 자기 행함으로 새삼스럽게 의를 얻게 되는 경우는 생길 필요조차 없다. 왜냐하면 성도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사로잡히지 아니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6) 따라서 일의 결과를 놓고서 성도가 했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다.

빌립보서 2:13에서는 이 점을 분명히 못박아 둔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되어 있는 것을 봐서 일의 주체를 놓고 인간 선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전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라는 말씀이 나타내는 것처럼 최종 작용자를 연결시켜 나타내는데 성경은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그분만을 증거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취지이기 때문이다. "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3.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은사로 성도에게 주어지면 지금까지 사랑했던 것들에 대해 미워하기 시작한다. 주님의 사랑은 아무런 변화 없이 조용히 성도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들이닥치면 그 때부터 성도에게 있어 사랑해야 될 대상까지 고정된 사실까지 알게 된다. 그 때까지 사랑했던 것을 도리어 미워하게 되면 주님의 사랑이 작동되었다는 증거이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라도 말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미워한 것에 대해 주모자이던 자기에 대해서조차 아예 미워하게 되므로 말미암아 사랑치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해 왔다는 죄도 아울러 드러나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의 사랑 행위 자체를 믿지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말아야 한다. 성도에게는 이제 사랑하는 대상이 있으면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될 것이 없어진 것이다. 도리어 미움의 대상들이다.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자신을 향한 애착과 집착이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관을 역시 사랑하게 된다. 따라서 형제를 사랑하는 방법은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먼저 미워해야지만 그 자기 미움이, 자기 사랑으로 인해 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그 이 이웃까지 파급되어 이웃을 미워하게 된다. 그래서 진정한 '이웃 사랑'이란 자기 파멸뿐만 아니라 이웃 파멸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파멸을 통해서 이웃 사랑은 인간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확연해진다. 이 파멸의 근원지는 따로 있다. 이 근원지를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그 동안의 이웃 사랑이 곧 이웃 미움이었음을 그 근원지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있다는 그 가능성과 의로움까지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웃을 필히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그 가능성이 이웃 사랑의 시작이다. 그 근원지는 어디일까?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가인의 행위를 같이 미워하도록 말씀으로 요청하고 계신다. . 비록 직접 가인의 살인행위에 참예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그 최초의 살인사건에 모든 성도를 참여시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계속해서 아벨의 의로운 죽음을 가지고 압박을 가하시는 것이다. 세상을 살인 현장화 시키는 것이다. 모든 인류를 살인자와 살해당한 자의 구조로서 엮어 놓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이다. 그 때 가인 시대에 있어 의로운 자는 아벨뿐이었다면 오늘날 시대의 의로운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그런데 그 의로우신 예수님은 아벨과 같이 역시 죽음으로서 세상이 마감하셨다. 그렇다면 누가 가인족인가? 그것은 의롭지 않는 모든 인간들이다. 그들이 의로우냐 의롭지 않느냐 하는 판단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최종 증거물이 되어 밝혀진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동시에 십자가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결국 사랑이란, 범죄한 우리를 향한 사랑이기에 과연 사랑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은 과연 우리가 우리 범죄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와 관련된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아벨이 아니라 가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가 관권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하나님은 사랑은 여기서 표가 난다. 의로운 아벨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의로운 아벨같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리어 희생시켜 화목제물로 삼으므로 죄 있는 가인을 의인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필히 그 형제도 가인처럼 간주해야만 한다.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아벨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자기 죄를 자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로 해서 나타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가 나타나면 그 형제는 곧 대단히 잘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 안에 거하고 휩싸여져 있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사랑 안에서 어찌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리요!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문제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가짜 형제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을 정죄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자기 미움'으로 상대방에게 다가서지를 못하게 된다. 그렇게되니 주님의 사랑이랍시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기껏 죄악 된 자기 사랑을 적용시키려든다. 상대를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죄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필요한 존재로 인식케 한다. 이렇게 되니 상대로 하여금 아들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사한다는 자신을 시인케 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아들을 제대로 시인하게 하자는데 있다. 이렇게되려면 하나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죄인 됨을 고백하고 자기에게는 그 어떤 사랑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기 부인이 계속 유지가 되어야 한다. 자기 부인이 선행되지 않는 사랑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속한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랑을 알게 만드니 이는 제대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우리 죄'에 대한 인식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사랑이다. 이 '우리 죄'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소위 사랑이라는 것도 필연적으로 죄악된 것이 포함된다. 다른 모든 것은 죄이지만 우리가 행하는 사랑만큼은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위의 본문에 나오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 것도 사실이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이 안고 있는 죄는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 독생자의 그 사랑만이 성도와 함께 있어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그런데 성령께서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려고 하신다.(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만을 증거하시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요일 5:9) 즉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통해 오로지 아들에 관한 증거를 얻고자 하시는데 그 나타난 사랑의 내용이 다름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4. 참 사랑과 거짓 사랑의 구분

 

죽음과 심판은 항상 인간에게 두려운 것이었다. 성경은 죽음과 심판이 죄에서 나온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 즉 예수 그리스가 죄를 없애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시인한다면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요일 3:5) 더 이상 심판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두려움도 없어야 마땅하다. 죽음은커녕 생명만 주어진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반면에 여전히 심판과 죽음에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죄가 주는 심판 아래에 놓인 자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사랑이 없기에 두려움이 추방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이웃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다음의 말씀은 대단히 무거운 계명이 될 것이 뻔하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자에게는 이러한 목숨 바침이 결코 무거운 계명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3-4) 왜 이것이 무엇운 것이 아닌가? 요한복음 10:18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계명'이란 곧 아버지의 뜻이라는 취지만으로 얼마든지 과감하게 죽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질서를 뜻한다. 즉 성도의 죽음까지 하나님께서 지정할 수 있는 권세가 활동하는 영역 속에 성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곧 새 계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요 13:34)

계명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본인의 사랑으로 그 계명을 준수하려고 하니까 먼저 자기 목숨부터 걱정되는 것이다. 과연 저 형제가 귀한 내 목숨까지 소비시킬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먼저 따질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이웃 사랑이란 곧 거짓 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의 사랑이 들어 있는 형제에게만 관계시키기 때문에 그 형제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곧 그 형제 안에 계시는 주님의 피에 합류해서 서로 사귀기 위한 사랑이요 목숨이 된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그러니까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안에서 형제와 사귀기 위한 사랑이냐 아니면 자신의 사랑 안으로 형제를 끌어당기기 위한 사귐이냐로 구분된다. 예수님의 피 안에서의 사귐이란 계속 용서하시는 자와 계속 용서하심을 받는 자 사이의 확정된 구분을 계속 지속시키는 것 가운데서의 사귐이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사랑은 물과 피로서 나타내셨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요일 5:6) 그런데 이러한 물과 피는 오직 예수님의 것으로서 종결된다. 다른 이는 물과 피는 소용없다. 사랑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물과 피를 근거로해서 계속해서 인간들의 죄를 들추어내는 것을 통해서 늘 사죄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한다. 성령께서 이 토대 위에서 증거하시는 분이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7) 성령께서도 이처럼 십자가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이유는, 이 사죄의 물과 피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어떤 자의 행위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증언하려는 것이다. '피 안에서의 사귐'을 전제하지 않는 그 어떤 증언도 증언으로서 의미가 없는데 오로지 의미 있는 증언은 성령님의 몫이다. 만약 면 '피 안에서의 사귐'의 의의를 무효화 시키고 더 이상 예수님의 피의 증거성을 철거해 버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랑 행위' 안에 머물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되면 예수님은 인간들의 '이웃 사랑'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또다시 무의미하게 희생당할 분으로 처리된다. 십자가 사건은 이런 경위로 일어났다.

인간들의 '내 것화' 시도 때문에 그 어떤 외부의 관여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내가 했다'는 것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해서 생긴 결과인 그 십자가 사건과 예수님의 피를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됨을 증거하는 근거로 삼아 버리시는 것이다. 이 점이 인간들의 자기 행위 증언과 차이나는 점이다.

분명 이 피가 성도에게는 용서의 화목제물로 적용된 것이기에 이 '피 안에서 사귐'을 고수하는 성도는 더 이상 '내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아닌 자들은 그래도 '내 사랑으로 소유화된 사랑'이 따로 있어야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성령께서 사랑의 능력을 소지하라고 자기들에게 능력을 주었다고 우긴다. 이것은 성령의 증언과 배치되는 정신 자세이다. 이 사람들은 '피 안에서의 사귐'이 더 이상 원치 않는 자들이다. 단지 사죄의 피라고 간주되는 예수님의 피를 자기 구원을 위해 잠시 이용하고서는 곧장 그 자리를 떠나버리는 자이다. 그리고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흉내내면서 독자적인 '사랑 행위'가 가능하다고 믿고 사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빙자해서 벌리는 '자기 존재 과시'이다. 이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이다. 예수님의 육체에서만 가능한 그 물과 피를 부인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업그레이드된 사랑 행위로 채우려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예수님이 왜 구태여 육체로 오셔야만 했는가? 자기 백성의 죄로 인해 죽기 위해서이다. 그 죄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즉 죄라는 것은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요 그 세상에서 좇아 온 것은 육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이 세상에서 찾는다든지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면 되지 않는가? 사도 요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로 본건데 인간의 육체로서 합당한 이웃 사랑을 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러한 죄에서 이탈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그 자 만큼은 예수님의 물과 피가 쓸데없는 자일 것이다. 그런 자가 없다는 말은 오직 하늘에서 오신 육체 속에서만 나오는 물과 피로서 자기 백성을 용서하고 구원하려는 화목제물로서 오셨다. 그렇다면 그 육체를 참된 사랑의 육체로 고백하는 자라면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육체에게도 사랑이 나온다는 것을 아예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한 때, 예수님의 사죄의 은총을 잠시 고마워했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성도라고 말해 주어서는 아니 된다. 이제 자칭 거듭났다고 자부하는 자신을 더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참으로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육체의 능력을 신뢰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자기 육체를 증거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계속해서 용서해 주신 사죄의 피 안에서만 같이 머물 형제를 찾고 있게 된다. 그래서 성도는 형제를 대하든지 하나님을 대하든지 늘 용서하고 또는 용서를 받고자 하는 자세로 다가서게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성도에게 찾으시는 것은 '용서해 주심'이 여전히 작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형제를 대할 때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할 수 있는가 라는 사실과 동일하다. 형제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 전달이 곧 그 형제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게 한다.

그런데 누가 이 사실이 진리라고 감히 장담하고 나서시는가? 그 분은 오직 물과 피를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님 뿐이다. 그러면 누가 성령 받은 자인가?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해 준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사도는 늘 '주 안에 거하라'고 일러주는 대상은 성령을 받은 자에 한한다. 다른 사람이라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형제만 이 말을 알아듣는다.

 

5. 형제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국한한다.

 

이웃 사랑이 형제 사랑에만 국한되느냐 아니 되느냐의 기초는 역시 예수님의 속죄 사랑이 온 인류의 전부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제한된 대상에 머무느냐를 먼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 히브리서 2:9-16에서 명확하게 논증되고 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우선 예수님의 고난이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인류의 총 숫자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종족이나 신분이나 윤리나 도덕성에 구애받지 않고 각처에서 교회로 불림을 받는 사람을 두고 언급하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거룩하게 하시는 분에 의한 능력이 자신의 같은 동일한 거룩에 참여되기 위한 '거룩하게 함은 입은 자들'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내 형제'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다. 이들 만큼은 죽음가지고 협박하고 지배하려는 악마의 손에서 벗어나는 자들이다. 이들이 죽음의 세력에서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누군가 붙들어주는 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이 예수님의 은혜의 대상이 되는 자는 모든 인류가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 자손'들이다. 이들의 위상은 천사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이 본문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즉 주님의 고난은 하늘의 천사를 위함도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택되어진 언약민에게만 은혜로 돌아가겠금하는 대신 죽음을 위한 고난이다. 따라서 이들 주님의 형제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찬양한다. 바로 예수님과 이들의 관계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이웃 사랑이다.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자신과 상대를 볼 때에 자체적인 윤리나 도덕성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당신을 거룩케 했느냐 아니면 아직도 악마의 권세에 그대로 놓여 있느냐?"를 가지고 형제와 비형제를 구별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자들이다. 심지어 상대방이 그리스도 배후를 갖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빚진 것까지 대신 갚아 줄 용의가 되어 있다.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몬 1:18)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모습도 보여주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4-46) 이런 행위는 결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기 위한 그 어떤 노력이나 시도가 아니다. 다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여기기에 나온 현상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물기 위한 노력을 그들이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자신을 계속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형제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제를 한다고 해서 형제 아닌 자가 형제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관심사가 '형제 만들기'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가 있을 때만 형제를 비로소 눈에 띄는 법이다. 참된 형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일임하는 자이다. 자기가 임의로 이웃을 만들어 사랑한다든지 자신이 사랑해야 될 사람이나 단체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자가 아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46-50)

이처럼 이기주의적 구원관에도 빠지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참 형제인 줄 알아 혈육의 형제조차 달리 보는 눈도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부인이 되지 아니하는 자는 '이웃 사랑'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4-39)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대한 평가에서 출발하시면서 가까이에는 둘러서 있는 가족 관계를 건드리고서는 개인이야기로 귀착하시는데 끝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네 스스로 죽어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이웃 사랑'을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라서 죽어야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죽은 자를 가지시고 이루시는 것은 예수님과 성령에 의한 '이웃 사랑'의 성취이다.

 

Ⅲ 결 론

 

소유의 반대말은 봉사요, 봉사의 반대말은 소유이다. 같은 말로, 소유의 반대말이 무소유가 아니라 섬기는 자세를 뜻하며 봉사의 정반대 되는 태도는 자존심이다. 인간이 봉사할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단박 자기 소유 자랑으로 돌아선다. 인간들은 예수든, 성령이든, 십자가이든, 사랑이든, 지식이든, 교회이든, 예수님의 의라든지 심지어 봉사하고 순교하려는 동기까지 무엇이든지 내 것으로 일단 만들어놓고 그것으로 나의 세계의 확장이나 확대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래야지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우기게 된다. 이는 곧 지난 온 생애까지 모두 다 '나의 것'이라는 범주 속으로 집어넣어 열심히 '자기화' 구축에 매진한다는 말이다.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자신의 존재성을 남에게 과시하고 그것을 의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이런 식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 내놓을 수 있는 단지 정이요 욕심일 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인간들의 이러한 보편적 죄악된 심성을 겨냥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섬김이요 봉사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이러한 섬김을 성사시키기 위해 성도는 자신의 정과 욕심을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다. 마치 예수님의 죽으심에 본받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더 이상 자기화 될 것이 자기에게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하는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제 자기 것이 없는 입장에서 주님의 섬김으로 형제를 섬기도록 성령께서 조치하시는 것이다. 모든 죄는 '자기화 경향'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거짓 증거나 도적질이나 하나님에 대한 훼방이나 모두 다 그 토대는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 '자기화'에 기인된다. 영생은 이런 탐심을 거부하는데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서 어찌 이웃 사랑이 아니 나올 수 있을까?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감 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십자가 안에서는 개인의 정과 욕심을 못박게 하는 능력의 십자가이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만으로 제공되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곧 이웃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