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웃사랑과 윤리(3) ] (TAPE 4)
십자가마을 수련회 / 2001,8,13-16 경남 양산
강의(이근호) / 정리(구득영)
먼저 교재를 살펴보자.
** 5. 형제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국한한다. - 이웃 사랑이 형제 사랑에만 국한되느냐 아니 되느냐의 기초는 역시 예수님의 속죄 사랑이 온 인류의 전부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제한된 대상에 머무느냐를 먼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2장 9절에서 16까지에서 명확하게 논증되고 있다.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히 2: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 형제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국한한다 !!
여기에 보면 "형제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국한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 근거가 히브리서 2장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10절과 11절을 보면, 읽어보면 표현이 참으로 어렵게 되어있는데 말이다. 이것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모든 만물은 아들이 원인이 되어서 나왔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 아들과 형제라는 말인가? "예수님과 같이 나올 때만 그의 형제가 될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야 아들과 형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만물의 원인이 되시고, 만물을 붙드시고, 만물을 창조케 하신 분과 형제가 되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나온 뿌리와 동일한 뿌리에서 나올 때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형제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한 뿌리에서 나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왜 사라의 태가 죽어야 하는가?
그러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늘에서 나와야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땅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에게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상식인데,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사라의 태가 그만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서 나올 자식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라가 임신이 가능한 경우에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면, 한 뿌리에서 난 형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을 차단시킬 경우에만 형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교회에서 설교하기가 참으로 힘든데, 왜냐하면 교인들은 자기가 바쁜 가운데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알아서 나온 것이지, 즉 자기가 성도가 된 것은 자기 행동에 의했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여러 교회가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저 교회를 선택해서 가게 되었는데, 그래서 내가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성도가 되었는데,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3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런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도저히 알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그런 어려운 것은 치우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즉 기도를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으니, 그것은 해야지. 십일조를 하라고 하니, 하면 되지. 남들은 어려울지 몰라도, 나는 어렵지 않아" 라고, 그렇게 자기는 균형을 맞춘다고 한다는 말이다.
◈ 나는 몰라. 그냥 교회만 열심히 다닐래 !!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히브리서 2장을 설교하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오지 않으려다가 억지로 내가 왔는데, 그런데 어떻게 성도가 된다는 것이 한 뿌리에서 나와야 된다고 할 수 있는가? 사라의 태가 죽고 안 죽고 하는 것이 옛날 이야기인데, 그런 것을 지금 왜 끄집어내는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분은 "우리가 남의 역사인 이스라엘 역사를 굳이 왜 배워야 하는가? 우리나라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말이야"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사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솔직한 사람인데, 그게 아니라 "목사님, 신약을 보세요" 라고 하는 사람은 음흉한 사람이라는 것이다(ㅋㅋ).
교회에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는데, 우리 조상이 불교에 젖어있었기에, 그 심성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 만들기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교회를 없애버리자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손에 잡힌 교회가 날아가 버리면, 그러면 무엇만 남겠는가? 그동안 교회에 가리웠던 예수님만 남는다는 것이다. "아하, 교회에 다녀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않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일인데, "교회에 다니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예수님을 잘 가르치면 되지" 라고 변명을 늘어놓는다는 말이다.
◈ 거룩케 하시는 분이 거룩하게 하면, '끝'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형제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문제가 아니고, 교회에 잘 다니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한 뿌리에서 나왔을 때만 형제라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히브리서 2장 11절에 나오는 그대로, 즉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룩케 하시는 분이 거룩하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서 로마서 8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곧 "아들로 하여금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함이라" 라는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장자는, '거룩케 해주는 자' !!
여기에서 '장자'의 개념이 나오는데, 즉 '거룩케 해주는 자' 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세주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형제라고 하니 막 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아니고 여기서 형제라는 의미는 "당신이 없이는 나도 없다" 라는 것이다. 즉 "당신의 거룩케 해주심이 없으면 나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예속이 됩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라는 것은, "나는 당신에게 붙잡힘 바가 되었습니다" 라는 것인데, "당신의 운명 속에 나는 일체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고, 당신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이고, 당신의 부활이 나의 부활입니다. 당신이 도착하는 거룩한 세상이 나의 세상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끊어짐이 없고, 이별이 없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당신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이 없는 것인데, 이게 곧 사랑이고 말이다. 이렇게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행동하게 될 때, 그러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형제를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이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목사님, 너무합니다 !!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믿음이 없는 자들이 듣게 되면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면 목사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면 나중에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됩니까? 힘이 들어서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만약에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신자도 아닙니까? 지옥에 가게 됩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저는 아직 신자도 아니라는 말입니까? 저는 십일조를 내는 것도 무척 힘이 드는데 말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제가 믿음이 없는 줄은 잘 알지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곳까지 가려고 하면 아직도 까마득합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것을 요구하기는커녕 일년에 한 번만 절에 가면 된다고 하는데, 그런데 교회에서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하니 너무합니다. 하나님도 양심이 있으면,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고, 선교비를 내는 정도로 봐주면 참 좋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액땜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형제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남남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 자식놈이 "엄마, 밥을 비벼주세요. 입에 넣어주세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어이쿠 귀여운 놈아, 엄마가 그렇게 해줄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엄마,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주세요" 라고 해도, "알았어. 엄마가 바쳐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엄마에게 과연 무거운 계명이냐는 말이다.
◈ 그것이 과연 무거운 계명인가?
실제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그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심지어 운동회를 하면 자기 아이를 대신해서 엄마가 뛴다는 것이다. 자기가 무슨 미국의 육상선수인 조이너스도 아니면서 말이다. 부모가 왜 일을 하는가? 자식을 위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억지로 하는가? 자진해서 기쁜 마음으로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먹지 못해도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데, 그것이 과연 무거운 계명이냐는 말이다. 물론 수녀에게는 무거운 계명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것은 바로 "내 쪽에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라는, 그런 식으로 구원이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인품과 성품과 노력으로는 말이다. 그런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짐이 된다는 말이다.
◈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여기 히브리서 2장에 나오는 형제라는 개념, 또 장자라는 개념, 그리고 사라 이야기도 했는데, 그것은 어렵기 때문에 조금 뒤로 미루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는데, 여기 히브리서 2장 14절에 보면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아닌가? 그것을 마귀가 잡았는가? 언제부터 사망의 세력을 잡았느냐는 말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욥기를 보면, 마귀의 욥의 모든 것을 다 빼앗으면서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욥의 생명에는 손을 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는 하나님이 아니냐는 말이다. 우리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는 말이다.
◈ 두 연놈들의 짓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이것은 바로 창세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즉 창세기의 선악과 문제가 여기서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참으로 어려운데 말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엇이 연관되는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간에 누가 개입을 하는데, 그가 뭐라고 하는가?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데, 그래서 말씀으로 지배를 받아야만 하는데, 그런데 인간이 오히려 마귀의 말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때부터 인간은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세력에 그만 잡힘 바가 되었다고, 하나님은 그렇게 간주하시고 그것을 기정사실화를 시키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마귀의 앞잡이가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하나님께서는 "너는 현실을 몰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죄 안'과 '그리스도 안' !!
마귀는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죽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으면 되는데, 그런데 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죽지 않으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이것은 "따먹어도 된다. 혹은 안 된다" 라고 하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미 그것을 마귀의 세계에 포함되었다고 보신다는 말이다. (오우, 디피컬트!)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 인간과 마귀, 하나님은 이 두 연놈들에게 어떻게 하시는가? 마귀의 행동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되지 않는데, 이것을 두고 '죄 안'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립되어야,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 이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에 있다는 말은, 독립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속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 안' 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통제 안에 들어가서, 그 죄를 은혜로 용서해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구조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죄를 짓고 있는데, 그런데 그 죄가 은혜 안에서 용서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불신자들은 무엇인가? 은혜가 없는데, 그래서 '예수 안' 이라는 것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 무섭고, 무섭고, 무서워요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라고 하는 것은, 사망의 세력자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귀로 보는데, 그런데 두 연놈들이 결탁을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유효하다는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따먹고 말았으니, 두 연놈들을 다 쳐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는 이 세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죽기를 무서워하는데, 왜냐하면 사망의 세력에 사로잡혔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죽는 것이 무서워서 따먹었기 때문에, 죽기를 무서워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기를 무서워하는 상태에서 제 아무리 발광을 해도, 여전히 두려워하고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라고 하면, "그러면 저는 뭡니까? 정말 무섭습니다. 형제만 중요합니까? 저도 중요합니다"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말씀을 계속해서 율법화를 시키고 있는 인간들 !!
그러니 그렇게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었는데, 즉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말씀을 율법화를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말씀을 율법화를 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목사가 저에게 덤벼들듯이 하면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것만 율법이고, 신약시대의 사도바울의 말을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일 믿고 지키라고 주신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신자 목사에게는 이것도 역시 무엇이 되는가? 율법화가 된다는 것이다. 불신자에게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분명히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고 했는데, 그것은 3시간을 기도하고 10분을 쉬라는 것이 아닌데, 그야말로 논스톱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쉬지 말고 어떻게 기도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무슨 성경구절을 봐도 율법화를 시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계명을 주시는 것은, 신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도 없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라는 것이다. 그 전제가 말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도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받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왔구나. 이것도 두렵지 않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형제는, 만남을 통해서 생성이 !!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지 궁금한데, 정말로 두려움이 없는지 말이다. "목사님, 그러면 지금 옆 사람을 위해서 죽어야 합니까?" 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는 거의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ㅋㅋ). 왜냐하면, 형제라는 것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경우처럼, 만남을 통해서 생성이 된다는 것이다. 교인을 붙들고 그냥 죽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돈을 빌려주려고 하면, 받을 생각은 하지 말고 빌려주어라" 라는 말씀을 가지고 고민을 하는데, 하필이면 QT를 하는데 그 말씀이 걸렸다는 것이다. 지금 김 집사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말이다. "야, 큰일이네.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 집사님이 밥을 먹고 살 정도가 되면 빌려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ㅋㅋ).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일에도 상관없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일이 아무리 크든, 사소하든 간에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식인데, 즉 예수님과 형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행동을 잘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마치 사라의 태가 죽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천사와 마찬가지인데, 육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늘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이다.
◈ 베드로야, 니 아버지가 아닌 내 아버지니라 !!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무엇이라고 하셨는고 하니, 매우 어려운 말씀을 하셨는데 말이다. 17절을 보게 되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 하셨는데, 즉 이것은 결코 베드로의 육신의 아버지가 알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러니 여기서 예수님은 한 형제임을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그래서 예수님 자신의 아버지가 그것을 알게 하셨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는 고백에 대해서 말이다. 여기서 '그리스도' 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하신 분을 의미하는데, 즉 죄를 담당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마시고, 또한 몇 달을 다니지 못했다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헌금을 적게 했다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헌금은 보통 많이 해서 두려워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두려움이 없어야,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를 이웃에게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두려움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
예를 들어서, 전도를 함에 있어서 두려움을 가지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내가 하는 말이 먹혀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4시간이나 기도하고 준비했는데 말이야"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두려움인데 말이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마귀가 시켜서 뭐라고 하겠는가? "계속해서 지껄여봐라. 내가 믿는가?" 라고 약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그만 초조해져서 "어떻게 하지? 벌써 오늘 하루가 다 지나가는 구나. 이렇게 빈손으로 가면 목사님에게 야단을 맞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지?" 라고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두려움이 생기면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와 베드로를 한번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중매를 서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넬료를 만나기 위해서 베드로가 사전에 준비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고넬료, 저 인간을 내가 전도해야 하는데 말이야" 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주께서 만나게 해주셨다는 말이다.
그것은 사도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내가 저 아시아 쪽을 전도해야 하는데 말이야" 라고 하니, 주님께서는 말리셨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아, 그곳으로 가지마. 너는 유럽 쪽이야" 라고 말이다. 그렇게 '무시로' 만났다는 것이다. 무시로 말이다.
◈ 주인도 아닌 주제에 무슨 두려움인가?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누가 쥐고 계시는고 하니까, 우리의 형제가 되시는 예수님이 쥐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무엇이 되는가? '아니오'가 아니라, '예'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전도에는 실패가 전혀 없는데, 즉 미리 아신 자를 모두 다 구원하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구원자가 너무나도 완벽하시니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함에 있어서 종에 불과한데, 종이 왜 걱정을 늘어지게 하느냐는 것이다. 주인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리고 구조조정을 당할 염려가 없으면 되었지 않느냐는 것이다. 농띠를 쳐도 쫓겨나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한번 위임목사는 영원한 위임목사가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이러한 두려움을 누가 유발시키는고 하니, 자기가 자기 힘으로 돈을 벌겠다고 하는데, 독자적으로 말이다. 즉 자기가 이런 직업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지를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와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래서 자기 가족은 자기가 먹여 살려야 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두려움이 생기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서 교회에 나와서 십일조를 하고 봉사를 통해서 보충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교회에 다니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가서만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직업에 있어서도 두려움이 없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 자기의 과거행동을 되새기지 마세요 !!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과거행동을 되새기는 것인데, 그야말로 불쌍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데, 실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실수라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또 무슨 실수를 논하느냐는 것이다. 먹물에 먹물을 뿌리면 먹물이 되지, 무슨 다른 것이 나올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실수를 해도 실수이고, 실수를 하지 않아도 실수라는 것이다.
시어머니들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며느리 앞에서 밥을 먹을 때 아무리 흘리지 않으려고 해도,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 이미 밥알이 세 개나 흘러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며느리 앞에서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라고 하면, 벌써 방귀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말이다(ㅋㅋ). 보이지 않는다고 시침을 뗄 수 있겠는가? 냄새는 어떻게 하고 말이다. 그렇게 폼을 잡는 게 시어머니의 품위가 아닌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품위에 손상이 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언제 거지 나사로가 품위에 신경을 썼는가? 핥으라고 하면 그냥 핥았다는 것이다. 핥아도 개고, 핥지 않아도 개인데, 여러분도 그런 멋진 인생을 살아볼 의향이 없느냐는 것이다. 주께서는 두려움이 없는 인생을 살라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는데, 그 사랑을 도대체 어디에 써먹느냐는 것이다. 어디 박 마담에게 써먹을 것인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내가 준 사랑을 간직하면 된다" 라는 것이지, "니가 대단한 존재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너는 실수도 없고, 완벽할 것이다" 라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는 사랑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너는 언제 나를 사랑할 거야" 라는 것이다.
◈ 제발 실패한 목회자가 되자 !!
이 세상에서 목회에 성공한 사람이 과연 있는가?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보라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가 그렇게 목회에 성공했다고 착각하는 놈들이 진짜로 목회에 실패한 놈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지옥으로 갈 줄은 상상도 못할 것이니 말이다. 매일같이 교회부흥이나 외치고, 그런 놈들은 지옥에 가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제가 쓴 글 중에서 '제발 실패한 목회자가 되자' 라는 글이 있는데, 목회에 실패해야 목사가 산다는 것이다.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목사가 죽어야 목사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당연히 궤변이라고 할 사람들이 많지 싶은데, 하지만 정말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성도에게는 두려움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출처가 하늘이기 때문에, 즉 사라의 태가 죽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면, 그러면 죽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하는데, 하지만 자기 육체가 하늘로서 태어났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그 어떤 짓을 해도 흙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 경외의 대상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라 !!
물론 몸은 죽일 수가 있는데,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죽을 수 있는데,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서 두려워하라는 것은, 겁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즉 경외의 대상이 누구인지, 그 대상을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정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해서 성공했다" 라는 말을 하지 않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실패했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라는 것이다. 그런 두려움이 있다고 하면 올바른 증거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복음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실패자로서 살아가게 되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어린이 집이나 식당이나 직장이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이고, 너무나도 과분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것이 실현되는 현장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일을 억지로 하면 어디 범사에 감사하게 되겠는가? 감사할 것만 골라서 감사하게 되지 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일부러 자기 몸이 아픈 것을 감사하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너는 이런 것에는 감사하지 못하지? 나는 신앙이 너무 좋아" 라고 하면서 어디 약을 올릴 일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런 뉘앙스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몸이 건강할 때는 감사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자기 몸이 아프든 아프지 않던,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것이다. 시시한 문제인데 말이다.
건강문제를 시시하다고 하니,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지는데(ㅋㅋ),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감사하지 말라" 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조성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 실체를 올바로 알자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데, 우리의 뿌리만 제대로 박혀있으면, 아픈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죽으나, 저렇게 해서 죽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태어났다고 하면, 그것으로 만사형통이라는 것이다. 신앙이 무엇인고 하니, 뿌리가 다르다는 것이 곧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다른 놈들은 뭐라고 하든 우리는 예수님만 자랑하면 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결론' 부분을 살펴보자.
** Ⅲ 결론 - 소유의 반대말은 봉사요, 봉사의 반대말은 소유이다. 같은 말로, 소유의 반대말이 무소유가 아니라 섬기는 자세를 뜻하며 봉사의 정반대 되는 태도는 자존심이다. 인간이 봉사할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단박 자기 소유 자랑으로 돌아선다.
◈ 이것도 역시 은혜입니다 !!
벌써 결론인데, 여기에 "소유의 반대말은 봉사요, 봉사의 반대말은 소유다" 라고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소유는 끌어 모으는 것이고, 봉사는 나누어준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나누어준다는 것은, 양식을 퍼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이것도 역시 은혜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에서 하는 게 봉사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소유의 반대말은 법정 스님의 주장처럼 무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를 가도 은혜라는 말이다. 여기에 매실음료가 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매실이면 미국에 가서도 역시 매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매실이라는 것은 변하지를 않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환경이 어떻게 변하던 간에 여전히 계속해서 은혜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여기 글은 어렵게 표현되어있지만, 간단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환경에 따라서 적응하고 달라질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들과는 뿌리가 다르니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신앙이 없으니 두려움이 생기고, 종교 안으로 숨어서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에게 전혀 맞지 않는 힘들고 고달픈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종교생활은 다 두려움에 나오는데, 그것이 곧 '우상' !!
그러니 이런 종교생활은 다 두려움에서 나오는데, 이것을 두 글자로 '우상', 혹은 '우상숭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 우상숭배의 특징을 뭐라고 하는가? 누구를 위해서 한다는 말인가? 우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참된 하나님은 이런 자기를 위하는 인간을 창조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또한 이사야 43장 11절에 보면,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들 때, 즉 사라의 태에서, 그렇게 없는데서, 하늘에서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시겠다는 것이다.
(사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그러니 이것은 행동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경우만 영광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가 이미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죽어도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니 말이다. 비록 썩어질 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대상으로, 즉 기뻐하심을 입은 자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를 하나님은 이미 귀한 존재로 보고 계신다는 말이다.
◈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 손이 아파요 !!
구약성경에 '아가서' 라는 것이 있는데, 그 아가서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을 거닐다가 우연히 그만 한 눈에 뽕 간 여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흑인인데, 술람미 여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여자를 수소문해서 찾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드디어 그 여인의 집까지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다가 그만 손이 찍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에 여인이 준 몰약을 바르게 되는데, 너무 너무 좋아하면서 말이다.
(아 5: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아 5: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그런데 솔로몬이 놀랍게도 이 여인을 뭐라고 부르는가?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라고 하는데, 물론 신부는 이해가 되는데 누이는 왜 나오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누이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너를 만나기 이전에 원초부터 우리는 하나의 뿌리였다" 라는 것이다. 즉 "지금 만나는 것은, 우리는 원래 하나의 뿌리였는데, 그것을 실체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
(아 5: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그리고 마지막 8장에 보면 "내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죽음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즉 영원하다는 말이다. 그것이 "내 사랑은 변함이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 남자가 여자를 집요하게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라고, 즉 "우리는 한 형제이고 한 뿌리이다" 라고 하면서 끝까지 포기함이 없이 찾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아담을 찾듯이, 즉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아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그러니 이 사랑은 그 누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거기에 구애를 받지 않는데, 그렇게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랑을 니가 좀 알아다오" 라고 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요한일서에도 나오듯이 "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를 사랑한 사랑이기에 더 이상 두려움이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제가 그렇게 설교를 했는데도 교인들이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게 무슨 말이지?' 라고 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래도 그런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또 하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받아들이는 것이 기적인데, 원래 모르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성도도 아닌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도, 그것도 역시 그들에 대한 배려이고 사랑이라는 것이다.
◈ 오늘 설교는 조졌다 !!
그렇게 그들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한 것 자체가 무엇을 유발시키는고 하니, 설교자에게 설교의 두려움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설교자가 많아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지 싶은데, 설교를 할 때 제일 큰 방해가 무엇인고 하니, "오늘 설교를 망치면 어떻게 하지? 멀리서 온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면 어떻게 하지? 분명히 다음주일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텐데, 그러면 나의 존재는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그러니 오늘 설교를 잘해야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두려움이 설교를 다 망치고 마는데,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내가 무슨 설교를 한다고 이렇게 설치지? 오늘도 조졌다. 잘해봐야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오늘 나의 설교는 없다. 그저 내가 알고 있는 주님만 소개하고 끝내자" 라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그래서 "주여, 오늘 이 자리에서 그냥 죽게 하소서" 라고 한다면, 그것을 교인들이 먼저 눈치를 챈다는 것이다. 그런 겸손한(?) 자세를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오늘 설교를 잘해야지. 나의 이 감정을 그대로 전달해야지. 두고 봐라. 내가 얼마나 설교를 잘 하는지" 라고 한다면, 교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오늘 당신은 완전히 기능인이야. 당신은 당신의 지식을 전달할 뿐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설교를 하기 이전부터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설교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님, 오늘 설교를 왜 그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나오고 말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설교자에게 설교를 시키면서 그 설교자에게 목회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 즉 정작 본인에게는 두려움이 있으면서도 교인들에게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 그게 무슨 망발이냐는 것이다. 설교를 잘하지 못해도 천당에 갈 수 있는데, 무엇을 그리 걱정을 하느냐는 말이다. 설교를 잘해서 인기를 얻어서 어디에 써먹을지 몰라도, 그 허망한 인기를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영생을 주는가? 그러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10분을 쉬고, 다음에는 로마서를 하겠습니다.
2014,5,5 재정리함.
공명현상으로 인해서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녹취하는데 방해가 되었지만,
주께서 더욱 더 집중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쉽게 말해서, 고생한 것을 좀 알라달라는 것이죠. ㅋㅋ
첨부파일 : 01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이웃사랑과윤리)1,2,3.zip (147.4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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