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스가랴35강-감람산(슥14;1-5)이근호140420

아빠와 함께 2014. 4. 21. 08:23


감람산(스가랴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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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4-20 15:57 
감람산  

2014년 4월 20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1-5 

(14: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14:2)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14: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14: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14:5)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지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특정 산을 지목해서 메시아의 임재를 알리신다는 것은 여전히 지상에 국한된 표현으로 구원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적인 입장에 부합되는 상황입니다. 신약에서는 특정 공간점은  의미 없습니다. 왜냐하면 땅 자체가 이미 전부 심판의 대상으로서 불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베드로후서 3:12) 

그래서 땅이 없어지더라도 건질 의미는 충분히 건지고 땅이 소실되어야 합니다. 즉 땅을 소실시킨 그 원리와 원칙이 새로운 땅 건설의 기본 요소로서 전이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땅은 생존에 필수적 요건입니다. 땅이 없으면 발 디딜 곳도 없습니다. 이점 때문에 사람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땅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문제는 이 땅에 사는 이상, 계속해서 문제가 유발된다는 점입니다. 그 때마다 땅은 계속 분리되어야 하고 소제되어야 하고 청소되어야 합니까? 원리와 원칙을 건져내면 되는 겁니다. 그 원리와 원칙을 뽑아내는 방식은 바로 예루살렘과 감람산의 관계성입니다. 열왕기하 23:13에 보면, “또 예루살렘 앞 멸망 산 우편에 세운 산당을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산이 마지막 때에 부각되어야 하는 걸까요? 왜 하나님의 구원에 우상이나 우상숭배가 전면에 등장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장차 완성될 천국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12에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이 그냥 천국이 아니라 ‘침노당하는 천국’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빼앗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천국 백성’이 정립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이 곱게 하늘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의 본질은 심하게 공격당하는 와중에서 비쳐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천국관이 잘못되었으며 가짜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18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쉬운 비유로, 지구 공중에 괴물체 모선이 떠있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비행체 따로 분리되어 인간이 사는 도시 바닥까지 공격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이처럼 모선이 되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분리되어 이 인간 세상에 투입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전혀 모른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나타나신 독생자 예수님을 맞이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이상하고 생소한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이 염두에 두었던 하나님상 하고는 전혀 맞지를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기대치에 맞아야 믿든지 할게 아니겠습니까? 전혀 맞지 않았고 도리어 너무 일방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도무지 상종할 바가 못되는 존재로 등장하신 겁니다. 

따라서 이 지상이 이상한 곳에 되고 말았습니다. 생존하던 사람들이 참 하나님과 전혀 접촉점을 맺을 수 없는 정도로 다른 신과 관계 맺고 있었음이 들통 나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감람산과 예루살렘을 연관시키는 이유입니다. 이 지상에서 감람산이 예루살렘을 이기게 되는 겁니다. 

감람산도 깨어지고 예루살렘도 깨어져야 합니다. 이 ‘깨어짐’이 바로 이 땅에 마지막으로 해야 될 도리를 다 한 겁니다. 이 깨어짐은 곧 이스라엘의 깨어짐입니다. 이 깨어짐을 노리고 메시아의 두 발을 그곳에 딛게 됩니다. 즉 메시아의 임재는 땅이 제 구실을 더 이상 하지 못함을 확실하게 단정 짓는 취지를 보여주게 됩니다. 

이같은 취지는 신약 때에 초림과 재림의 연속적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즉 예수님이 오셔서 이 지상의 속성을 충분히 드러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세례 요한이 등장하므로서 그 허실이 노골적으로 밝혀졌다는 겁니다. 천국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상에서 고정된 채 살아가는 인간이 죽어서 폴짝 뛰어 들어갈 고정된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루살렘과 감람산의 연관성이 요동치고 그 요동치는 활동력 속에 말려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즉 땅이 문제가 아니라 그 땅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문제가 됩니다. 인간은 자진해서 자신을 깨고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앞으로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희망을 위하여 하나님이 자기 일에 개입해주실 것이 간곡히 기도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솔로몬이 우상을 번창시킨 이유가 됩니다. 지금의 넉넉함이 축소되지 않고 유지되면서 더욱 확장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깨뜨림’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깨어짐은 예수님 자신의 몸의 깨트림과 세례 요한의 몸의 깨트림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따라서 천국은 ‘침노’를 당하게 형국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침노했던 자들이 도리어 그 작용으로 인하여 천국 백성이 되는 현상이 유발되도록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일에 일찍이 가담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세례요한의 희생과 순교는 천국의 낯설음과 특이한 천국 백성의 생성을 말합니다. 깨어지는 자리가 곧 구원의 자리로 열린다는 겁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감람산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있습니다. 감람산이 깨어지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가 우상숭배와 관련됨이 밝혀지고, 이로 인해 새로운 예루살렘이 둘로 깨어지고 그 깨여졌음을 인식하는 ‘남은 자’로 하여금 새롭게 구성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감람산의 존재는 곧 천국 발생의 필수 요건이 됩니다. 이 절차는 신약에서는 두 개의 구분된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초림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초림은 깨어짐이요 재림은 이 세상에서 구별되게 건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는 이 둘의 요소를 품고 사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옹호하는 우리 자신의 우상적 속성을 늘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5강 슥14장 1-5(감람산)1404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4장 1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5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하시리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지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성경을 대하면서 그냥 기본적인 원칙들을 제가 때마다 수시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없이 제가 성경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을 언급해드릴께요.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것이 해석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이 영화에 보면 외계인들이 비행선을 타고 오잖아요? 그 예를 들면 적당합니다. 비행접시가 날라올 때, 보통 LA나 뉴욕에 뜨는데 큰 모선(母船 :어떤 작업의 중심체가 되는 큰 배나 비행기)이 있고 거기에서 사람을 공격해서 잡아가는 작은 비행물체가 또 지상에 내려옵니다. 이게 분리가 되거든요. 이 분리를 생각해줘야 돼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그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가 분리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이게 성경 해석의 기본이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쪽에서 하나님! 하나님! 그 하나님 아니다 하는 이야기예요. 하나님 뭘 해드릴까요? 제가 어떤 마음 자세를 하면 됩니까? 제가 어떤 태도를 가지면 구원받습니까? 저를 구원해주세요.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되고. 공연히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다 우리 도와줄려고 오신 거예요. 우리를 구원하실려고 분리되거든요. 이렇게 분리될 때에, 하나님이란 그 모선에서 분리된 독생자가, 원래 하나님은 처음부터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뭘 이야기해도 거짓말이 돼요. 그런데 우리가 유독 하나님과 접선할 수 있는 것은 그 모선에서 분리된 독생자를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과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행세가 초라해요. 이거는 예상밖입니다. 예상밖. 사람들이 성당 크게 짓고 예배당 크게 지으면 뭐 많은 사람 모였으니까 설마 하나님께서 버리시겠는가 하는데, 물에 빠지는 것은 숫자 많다고 안 빠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인간의 숫자와 관계 없어요.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시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면 영생을 얻는다 요한복음 끝부분 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마이야기 나오면서 뒷부분 이야기가 너희가 나를 알면 영생 얻는다 끝. 깨끗하게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알면 영생을 얻는데 문제는 예수님이 너무 초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초라하고 행색이 변변치도 못하고 그리고 우리의 행복이나 성공이나 출세에 아무 도움과 유익이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씀도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세상 영광과 출세에 아무 보탬이 되질 않아요. 니가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리라 이게 무슨 보탬이 돼요. 그래서 우리는 딱 듣기 싫은 거예요. 지금 이대로에서 어떻게 내가 잘 되느냐 이것이 관심사지 오신 주님을 위해서 몸 받치겠다 그것은 좀 두고 봅시다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왜냐하면 사람은 손해보기 싫어하거든요. 내가 아프기 싫어하고 손해보기 싫어하고 그런 겁니다.

 

제가 십자가마을에 <시선>이라는 이장호 감독, 별들의 고향 영화 만들고 19년 만에 개과천선해서, 술 먹다가 다 포기하고 이제는 예수믿기로 작정하고 이제 부터는 선교영화만 찍는다고 나온 그 유명한 별들의 고향 만든 유명한 이장호 감독이 만든 영화가 시선이라는 영화거든요.

그 영화에서 거의 주인공급으로 나왔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박용식이라고 전두환 전 대통령 닮았던 그 사람이 그 선교 영화를 캄보디아에서 찍다가 병에 걸려서 죽었어요. 그 영화 안 찍었으면 안 죽었어요. 나이 67세인가 65세인가 그런데 65세면 청춘이지. 요새 같으면 청춘이잖아요? 겨우 경로우대권 받았는데. 선교 영화 찍다가 죽어버렸어요. 그게 뭐 주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를 도와주실거다 하는 그 예상을, 모선에서 떨어져 나온 그 예수님은 달라요.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지? 미처 우리가 그것을 감 잡기도 전에 그것을 뒤엎는 식으로 오셔요. “저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 하고 나왔는데 “니같은 인간이 뭘 하나님 섬겨?” 라고 치고 들어온다니깐요. “제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애썼습니다.” “애쓰기는 뭘 애써? 니가 니 구원방해 했어.” 라는 식으로 오히려 치고 들어오신다 이 말이죠. 항상.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그 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하여야 된다. 우리가 그 대목을 보면서 왜 세례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았나? 그 분이 흥하므로써 우리도 같이 흥한다. 왜 이런 소리를 실제로 만난 그 분 앞에서 왜 세례요한이 못했을까? 하는 거예요. 주 하나님이 흥하면 우리도 같이 흥한다 라는 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너나 나나, 개나 소나 다 믿는 그런 하나님이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등장한 독생자를 만난 순간, 아! 그게 엉터리였다는 겁니다.

 

주님! 주님! 하지만 사실은 그 내면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주님 덕 좀 봅시다” 가 도무지 우리 속에서 평생가도 지워지지 않네요. 이게. 이게 무슨 마귀의 흔적 같애. 마귀가 남긴 최후에 버팀 같애요. 주님 덕분에 나 좀 덕 좀 봅시다. 우리 가정 내가 못한거 주님 덕분에 잘되고 말리라 하는 그러한 요구조건 같은게 언제쯤 부서지겠어요? 언제쯤? 순간순간 찢어지면서 없어지는 순간, 다시 말해서 내가 있는 한 없어지지 않지만 깜빡깜빡 내가 여기 있네 라는 생각이 안 들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나이야가라 폭포에 도취되어 “아이구 나같은 인간 여기에 뛰어들어서 죽어버릴까? 이 땅에 사는거 힘들어 죽겠네 고만 저 시원한 폭포에 뛰어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내 이익이라는 것이 그 짧은 순간에 없어져 버리고. 다시 정신차리면 “아이구 바보야 왜이래? 니가 그런 무서운 생각하면 안 돼.” 하고 다시 정신차리면 “이익봅시다.” 로 되돌아와요. 내가 있는 한 가짜 하나님에 대한 미련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참 성령께서 찾아 오셔서 세상이 내 뜻대로 내 기도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 그런 고마운 일들이 늘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특히 우리교회 같은 경우는 감사하게도 늘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늘 우리 뜻대로 우리 기도대로 안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요.

 

독생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상상하는 그 모선의 하나님과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 손에 죽었잖아요? 아마 지금 계셨으면 우리 손에도 죽었을거고. 그 정도로 독생하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신 것을 알리고 위해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오늘 본문 스가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람산입니다. 둘로 쪼개진다는 거예요. 아, 이 감람산이야기 때문에 기도원마다 좋은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감람산에 주께서 재림하기 전에 돈 바쳐라.” 뭐 이런 식으로. “감람산에 주님 재림하시는데 너희들 뭐 하느냐? 너희들 돈만 좋아하지?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돈을 땅에 묻어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할 때에 흔히 등장하는 것이 감람산. 그리고 우리나라 이단치고요, 우리나라 교회 자체도 이단이지만. 하여튼 이단치고 감람산 거론하지 않는 이단이 거의 없어요. 감람산.

 

그러면 감람산이 도대체 무슨 산인지. 높이가 801m. 이게 금호산이 970여미터. 금오산보다 한 100여미터 낮은 산인데 그 감람산이 유명하게 된 계기는요, 그래서 감람산기도원도 있잖아요? 이게 뭐 기름짜는데라는 거예요. 무슨 기름 짜는데? 겟세마네 동산, 감람산에서 기도로 쥐어 짜는 거예요. 어디까지 쥐짜는가 보면 땀이 피가 될 때까지. 저는 아무리 기도해도 땀이 피가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안 되지만 인간의 오기가 그렇잖아요? 이왕 기도하는 거 땀이 피가 되어야 하는데. 물론 기도하다가 엎어져서 무릎에서 피가 나는 경우는 되지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것은 없어요.

 

어쨌든 감람산의 의미는 여기 스가랴에서는 주께서 재림하는 곳인데요. 왜 재림하는 곳이 중요하냐면 감람산 그곳이 이스라엘이 멸망당해야 하는 이유가 감람산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솔로몬 때부터 일이 벌어졌어요. 솔로몬이 감람산에다 우상을 만들어서 거기에 세웠습니다. 감람산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4키로지점에 있는 거예요. 4키로 같으면 걸어가면 한 시간 차로가면 한 5분. 금방 가는 곳이예요. 감람산 800미터짜리 돌산이 보인다는 것은 서울에 청와대에서 관악산 보이고 북한산 보이는 것하고 마찬가지거든요. 보면 보인다 이 말이죠. 보이는 곳에 솔로몬이 거기에 우상을 세운 겁니다. 이유가 뭐냐, 이만하면 나라가 됐다는 거예요. 이만하면.

 

그러니까 우상이라는 것은 딴게 아니고 현재 이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집념에서 나온 것이 우상이예요. 이 수준을 유지하겠다. 이 우상이라는 것이 꼭 바알 섬기고 부처 섬겨야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섬기고 여호와를 섬기고 삼위일체를 섬겨도 섬기는 이유와 목적이 이 상태로, 이 수준대로 그냥 쭉 손해 안 보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이미 내게 있는 것은 내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것이 있는 이상은 그게 예수가 됐든 성령이 됐든 부처가 됐든 오면 전부다 우리 안에서 우상으로 다 변질되는 겁니다. “주께서 나라도 다루어 주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주님이여 요까지만.” “아이구 고맙습니다.” “요이상은 손대지 마시고 너무 왕창 망하게 하지 마시고 뭐 요정도로도 제가 감사히 유지할테니까 너무 심하게 저를 때리시거나 깨시면 참 곤란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감람산이라는 곳은 우상이 있는 곳이고 그 때부터 나라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감람산에 우상이 있고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섬겼기 때문에 멸망의 산이라는 표현도 있어요. 감람산이 멸망의 산. 벌써 이름이 아주 으스스하죠. 수상쩍죠. 이스라엘은 이처럼요.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 모선입니다. 거기서 떨어져 나오는 독생자, 이러한 우상숭배의 증거를 감람산이라는 산도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이미 파멸과 멸망의 요소를 품고 있었다는 이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전략이고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예요. 오늘날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상숭배의 장소, 따라서 사람들은 거기에 몰려가서 빌었던 겁니다. 하나님이여 너무 심하게 현재 있는 것에 감사할테니까 이보다 더 나쁜 상태로 악화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감사히 기도하는 것, 또는 번창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그들은 하나님의 뜻은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현상유지만 해달라고 버틸라고 그들은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 먹을 때에 선악과 따먹은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이 절대라면 인간의 출생 이후는 그 죽음,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이 뭔가를, 그 절대성을 절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증거로써 인간은 태어나서 기어히 그 선악과를 따 먹어야 하는 겁니다.

 

조금도 우리는 아쉬워해서는 안 돼요.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다루어 주신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되지 그것을 섭하게 너무나 가슴아프게 생각하지 맙시다. 어떻게 보면 조그만 발상의 전환인데 그거만 바꾸면 세상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모든 되어진 것이 주의 뜻대로 되었다 하면 얼마나 편한 겁니까? 제가 심방을 가기 전에 성경 본문을 생각을 해요. 저 가정이 새로운 가정인데 어떤 본문이 있을까? 벌써 몇 주 전부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몇 달 생각해도 안 간 가정도 있지만. 히브리서 9장 27절을 늘 생각합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다 무슨 토를 답니까? 우리의 입을 닫게 만드는데.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끝.

 

우리가 도대체 뭐라고 토를 답니까? 결국 세상에 80평생, 90평생, 그야말로 요양사 붙여서 살려가면서 밥 해대가면서 그렇게 살도록 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아무리 애써도 죽는다는 것을. 살려볼려고 아무리 애써도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렇다면 심판의 요소를 미리 안다면 그것은 땡잡은 사람입니다. 로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돈 쓰면 그만이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심판받는 것만 알고 죽을 때 죽으면 되는 거예요. 어떤 기준에 의해서 심판 받는가. 그것은 심판 받아야 할만한 요소가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는 겁니다. 내장되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내 위주로, 오늘 본문 같으면 예루살렘 위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십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상당히 어려운 용어가 딱 하나 나와요. 남은 자, 남은 백성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렵기 때문에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남은 자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전쟁에 의해서만 남게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전쟁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너희는 몰라도 지금도 주께서는 전쟁 중인데, 전쟁 중에서 그때마다 빠져 나오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남은 자예요. 고추 넣으면 고춧가루 나오죠. 쌀가루 넣으면 떡이 나오잖아요? 분명히 들어 갈 때는 쌀가루 넣었는데 나올 때는 떡이 나오더란 말이죠. 주께서 독생자를 보냈는데 뭔가 나오는 것이 있어야, 떡가래처럼 나오고 고춧가루처럼 나오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도가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모선에 분리되어서 독생자를 보냈는데 튀어나오는 영생 받을 자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것은요, 도마가 잘해서도 아니고 열 두 제자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도마나 열 두 제자가 구원받을 때, 그 구원받은 심정이 뭐냐 하면 “아이구 제 힘으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었네요.” 하는 그런 고백과 탄식과 자책과 더불어서 그들이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구원받읍시다. 진짜 정말 부탁해요. 독생자가 이 땅에 오셨고 지금도 활동하신다면 반드시 독생자의 활동이 있다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어떤 업적이 나오고 실적이 나와요. 나오는 실적의 종류가 어떤가 하면 “내 힘으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처음부터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이런 고백들을 외치는 자들이 이렇게 자꾸 방앗간에서 뭔가 나오듯이 정미소에서 뭐가 나오듯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그게 남은 자예요.

 

그 남은 자는 주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자기는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제가 바다에 빠진 사건 보면서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거예요. 자식 보면서 “아이구! 야야 다행이다.” 제가 꼭 구태여 이야기 할 필요 없죠? 우리는 TV보면서 “야야 다행이다” “안녕하십니까?” 하는 인사 밑에 보면은 우리는 다행이다 이런 뜻이거든요. 우리는 살아나서 다행이다 이런 고백 말고. 망대 무너져서 18명 죽을 때에 그들이 죄 지어서 죽은 것이 아니잖아요? 아, 죽을 때 죽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것을 우리가 미리 땡겨서 알게 하시는구나.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주님 보시기에 어떤 인간도 살아 있어야 될 가치가 있는 인간은 없었다는 것을, 그 모선에서 분리된 독생자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만끽하는 겁니다. 매일같이 그것을 즐기는 거예요. 살 자격이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좀 더 이야기를 끌어 봅시다. 그 남은 자가 신약의 성도가 되는 겁니다. 성도가 되면서 신학자들끼리 이야기 하는, 성경에서 어려운 대목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하나 어려운 대목이 마태복음 11장 12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요 대목입니다. 그 뒤의 말씀 13절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이 예언할 것이 요한까지니” 이 말씀과 오늘 본문 말씀과 연관시키면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재림하시고 나타나시는 그 것, 감람산이 깨지는 이 모든 것은 바로 장차 오실 가짜 천국과 진짜 천국의 마주침에서 똑같은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감람산이 깨어져야거든요. 감람산은 멸망의 산이고 우상을 만들던, 솔로몬이 우상 만들어서 온 국민으로 우상 섬기게 만들어 가지고 그래서 나라가 둘로, 북쪽 남쪽으로 갈라지게 만든 그 감람산, 우상의 산이예요. 그것이 예루살렘과 마주 있습니다. 감람산이 예루살렘을 이긴거예요. 덮은 거예요. 우상의 산이 예루살렘을 이긴 겁니다. 예루살렘은 그 앞에 죽도 못썼어요. 사람이라는 것은 다 자기 편하고 자기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기 존재만 살면 그만이예요. “아이구, 다행이다!” 이 본심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고 유지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앞에 심판받을 이유가 되는 거예요.

 

그 감람산에 주께서 오십니다. 그런데 그 혜택은 누구한테 가는가? 예루살렘이 혜택을 입어요. 감람산 오시면서 지진이 일어나가지고 예루살렘이 깨지면서 오늘 본문 그대로입니다. 깨지면서 그 다음 감람산 때문에 도망하지 못한 사람들이, 북쪽, 남쪽으로 산이 갈라지면서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감람산에 오신 그 분께서 “빨리빨리 와 이게 살 길이야! 이리 빠져나와!” 건질 자만 건져가지고 주께서 따로 새로운 예루살렘에서 천국을 이룬다. 새로운 예루살렘을 이룬다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이거든요. 오늘 본문 말씀에 한계가 있다면 주께서 오셔가지고, 사실은 재림이라 했는데 초림, 재림 합쳐있는 거예요. 메시야가 오실 때에 남은 자를 건지고 건지고 난 뒤에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고 역시 이 지상에다 새로운 예루살렘을, 완벽한 예루살렘을 세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이라는 것은 하늘나라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된 일을 땅으로서 그 완벽한 상태를 묘사해주고 표현해주는 겁니다. 그게 신약에 가면 땅은 없어지고 거기서 있는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로 가버려요. 하늘로 갑니다. 그러면 재림은 뭐냐 하면 이 땅에 주님이 오신다는 이야기인데, 재림의 본 뜻은, 하늘로 가신 예수님과 재림사이가 계속 지금도 교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걸 저는 달리 표현해서 미래가 현실을 갉아 먹는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미래가 현실을 갉아 먹는다. 고구마를 놔두었는데 다음 날 보면 고구마가 갉아 먹어 있고. 또 갉아 먹어 있고. 그래서 새로운 고구마를 쟁반에 놔두었는데 고구마가 없어지고. 보니까 쥐가 먹었다 이렇게 되잖아요? 우리는 모르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쥐가 잘 때 와서 고구마를 갉아 먹은 거예요. 주님께서 이미 승천하시고, 사도행전 이야기입니다. 승천하시고 주가 되셔가지고 계속 재림하실 주님으로서, 재림하실 때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전부터, 재림하실 그 전부터 우리의 모든 것을 갉아 먹는 겁니다. 그게 틀려먹었다. 그건 잘못됐다. 그건 니 욕심이다. 그거는 니 자존심이고. 그건 니 잘남이고. 계속 우리 영혼을 갉아 먹는 겁니다. 왜? 우리는 나만 섬기는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에. 감람산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은 그 때, 재림 때 본 사람 뿐만 아니라 이미 주님이 재림했다는 미래의 일이 도달된 사람에게 우리는 내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되었군요. 라는 고백으로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천국은 침노를 당하면서, 가짜 천국은 진짜 천국에 의해서 갉아 먹힌 채로 침노를 당하면서. 결국은 그 침노가 뭐냐, 갉아 먹힌 그들이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백성이라는 이 이야기입니다. 참, 말을 어렵게 하니까 꼭 거짓말 같아서.

 

천국은요, 세례 요한부터 시작되거든요.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할 때에 그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여 버렸습니다. 이미 가짜 천국에 의해서 진짜 천국을 공격을 했고 그들이 진짜 천국을 막아섰지만 결국에 그들은,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이 있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방식, 이것이 고난의 방식이고 십자가 방식입니다. 이것이 모선에서 분리된 독생자의 방식이고. 그리고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항상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뭔가 비행접시 생각해 가지고 모선 따로 있고요. 거기서 품속에 있는 독생자가 떨어져 나왔는데 아무도 그 분이 진짜 하나님인줄 상상도 못했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아픔과 죄를 품고 오셨거든요.

 

따라서 곧 그 분이 재림하실 분이고. 이 땅에서 먼저 십자가 지신 분이고. 그 분이 천국을 이루실 천국의 본 당사자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감람산이라서 나밖에 모르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산 주인. 감람산으로 존재하고 있을 때, 미리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들이닥친 사람에게는 그것이 남은 자가 된다는 그 예언을 오늘 본문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상 안 섬긴다고 자부했는데 사실은 돌아보면, 역시 돌아보면 우리 자신밖에 모르는, 나만 다행스럽게 살면, 현상유지 되면, 행복인줄 알았던 저희들을, 주님 재림이고 주님 초림이고 사실은 늘 관심밖에 벗어나 있는 우리들을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고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떻게 용서하시고 지적하시는 것을, 그런 주님의 움직이는 장(場)으로서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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