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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33강-선지자의 상처(슥13;1-6)이근호140406

아빠와 함께 2014. 4. 6. 19:59

선지자의 상처(스가랴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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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4-06 15:42 
선지자의 상처

2014년 4월 6일                     본문 말씀: 스가랴 13:1-6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13: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13:3)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13: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13: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13: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이방민족에서의 사상이란 그 집단에서 유발된 것입니다. 전통과 관습으로 형성되어서 줄기차게 대대로 이어가는 사상은 그 집단에서 출생한 모든 자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합니다. 그리고 개인이 그 집단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 세상의 일부로 편입되어 개인의 의미는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사로운 의견이 있더라도 전통적인 사상(思想)에 주눅들여 눌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이방민족의 사상과는 달리,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사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언을 주십니다. 예언은 싫다고 해도, 반기지 않더라도 차질없이 매사가 이 내용대로 줄기차게 형성되어집니다.

즉 사람이 예언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언이 그 내용에 합당한 현실을 자체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사실입니다. 이 자체적 생성과 인간들이 이 예언에 맞추려고 하는 시도 사이에서 상반된 인식이 도출됩니다. 이 도출된 결과를 놓고 갈등이 유발되면서 십자가 죽음이 일어나고 그 십자가 죽음이 곧 스가랴가 말씀하시고 하는 그 예언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 두 가지 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방인들의 관점이요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의 관점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4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방인의 관점, 곧 인간들이 납득하는 지혜에 의하면 인간이 사는 목적과 이유는 행복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있어 영원한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는 쪽으로 지혜를 다듬는 겁니다. 데모크리토스라는 철학자는 (기원전 460-371), 우주란 원자와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상을 이어받은 기원전 300년 경,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몸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기에 죽으면 몸의 원자들이 흩어지기 때문에 사후의 세계가 아예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사상에 준해서, ‘살아생전에 수단껏 행복을 만끽하기’가 삶의 목표로 정립됩니다.

이번에는 유대인들의 관점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예언을 믿고, 모든 게 예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구원되지 못하는데 바로 이 사실이 오늘 본문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예상하고 이해하는 식으로 구원하시지 않는 겁니까?

이 사실을 알기 위해 우리는 요한복음 3장을 살펴봐야 합니다. 니고데모라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다름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연히 다음과 같이 대꾸합니다. “어떻게 늙은 사람이 다시 부모 뱃속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이로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곡해하고 있음이 발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니고데모가 이해 못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이해는, 자신이 자신에게 손질하므로서 자기 구원을 성사시킬 마음으로 궁금증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요한복음 3:14)

즉 구원이나 거듭남이란 구원받을 당사자가 작업해야 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제 3자처럼 여겨지는 예수님 본인에 의해서 성사될 일이라는 겁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기본 사상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구원이 마무리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서 ‘목자’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즉 장차 거짓 목자들은 그 거짓됨이 들통 나서 심지어 자기 부모로부터도 칼로 죽임을 당하고 친구로부터 ‘두 팔 사이’에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거짓 목자가 악마의 사주를 받아 거짓 예언을 하는 경우를 찾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참 선지자, 참 목자라고 여기는 자들이 곧 거짓 목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부모나 어느 친구라도 자기 아들이나 자기 친구가 거짓 목자라는 이유만으로 칼로 죽이려고 선뜻 나설 그런 위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언이 예언받은 당사자들에 손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언을 기다린 그들에 의해서 예언 성취가 방해받는 겁니다.

인간은 그 정도로 존재 자체가 왜곡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해석도 반대가 됩니다. 거짓 목자들을 자신들이 숨겨주고 감싸주고서는 도리어 참된 목자를 죽이고 친구가 상처를 낼 줄이야 그것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그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전형적인 거짓 목자의 길을 합니다.

자기네들 입장에서 스가랴 이 본문 해석을 해대는 겁니다. 그러나 스가랴의 예언은, ‘예언 완성’ 자리에서 해석되어야 하고 그 완성이 자리는 예수님께서 참된 목자로서 ‘두 팔 사이에 상처 난 그 자리’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 무리에 나타나십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한복음 20:19-20) 하나님의 말씀이 집중적으로 ‘두 팔 사이에 난 상처’로 치닫는 것은, 그 자리가 곧 인간의 곡해로 유발된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처를 시작해서 거꾸로 스가랴 오늘 본문을 해석하게 되면, 부모와 친구라는 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언을 고대하고 잉태된 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이란 인간이 아무리 탐구해도 알아 채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그 이유는, 모두 상처 자체가 곧 예언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울어도 소용없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3강 슥13장 1-6(선지자의 상처)1404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3장 1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4페이지입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邪鬼)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憑藉)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보통 도덕책이나 교훈책을 보게 되면 이렇게 살벌한 내용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을,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것을 이렇게 대하게 되면 사상과 예언이 이런 차이가 나요. 사상이라는 것은 점잖게 나가는 반면에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것은 우리가 듣기에 살벌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로 이렇게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 읽었던 본문을 보아도 우상, 사귀, 악귀죠. 악마. 그 다음에 거짓말, 칼로 찌르리라, 얼마나 평소에 일상생활 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용어가 나옵니다. 거기에다가 털옷, 그 다음에 두 팔 사이에 상처, 오늘 제목이 선지자의 상처인데. 상처, 칼로 찌르리라, 악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우선 해석이 어떻게 되는지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꼭 이런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할 정도로 우리가 기피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요.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을 이스라엘 보고 이야기한 거거든요. 여기에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 날에 죄와 더러움, 벌써 용어 자체가..그 다음에 샘, 다윗의 족속, 예루살렘 거민, 다윗이라는 족보도 이것은 단군 족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족보죠. 예루살렘, 이것은 서울도 아니고 부산도 아니고 목포도 아니예요. 이것은 예루살렘, 결국 그 당시의 특수성에 해당되는 지명이고 그 특수성을 조립해서 하나님께서 예언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들을, 여기 스가랴에 예언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예언대로 안 되는 겁니까? 이게 중요해요. 동떨어졌다. 기피하고 싶다. 뭐 알고 싶지도 않은 내용이다. 그것은 좋은데 그래서 예언이 안 이루어진다는 말이냐 라는 이 말입니다. 우리가 듣기 싫고 거부한다 할지라도 예언은 예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하나님쪽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언서로 기록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참혹, 고난, 전부 다 부정적 용어 잖아요? 긍정적인, 삶의 활기를 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이 본문들을 이해할 때 그래 한번 해석해보자 하고 이렇게 달려들면 안 되고요. 이 유대인들에게 준 해석은 반드시 해석할 때 출발점이 이방인들, 전혀 예루살렘하고도 관계없고 다윗도 관계없고 그거는 남의 이야기다 여기는, 일상의 자기 나름대로 평범한 자기 역사를 갖고 있는 그 사람 안목에서 이 예언을 다시 한 번 봐야 해요.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 그거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들의 사상같은 것이 나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은 예언이죠. 그런데 방금 제가 사상이라고 했습니다. 사상, 철학, 과학, 이것에, 사상 정신에 의하면 데모크리스토라는 BC 한 300년 전에 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다. 원자와 공간으로 되어 있다.” 아톰, 원자와 공간으로 되어 있다. 현재 20세기의 물리학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예요.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분해되지 않는 어떤 입자가 있고, 입자 주변에는 진공이 있고 , 진공과 입자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것은 구성되어 있다 했어요. 그 사상이, 그것은 하나의 과학적 사실과 맞잖아? 한다면 저는 사상을 이야기한 겁니다. 그 당시 실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상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그 사상이 뭐냐 하면 그것일 나중에 에피쿠루스 학파로 이어지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원자로 회귀되기 때문에 사후의 세계가 없다는 거예요. 앞에 제가 분명히 과학으로 이야기 했으니까 과학으로 끝날 줄 알았지요?

과학이 일상적인 사상으로 이게 전파가 된다는 거예요. 전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라는 것은 그냥 원자로 되어 있다. 따라서 죽는다는 것은 원자가 조각조각 다 파편되어서 분해되어 버렸다면 결국은 인간이 다시 조립되어서, 떡하니 다시 몸체가 되어서 살 수 있는 세계라 하는 것은 이것은 험악한 인간의 상상에서 나온 그러한 상상의 세계고 조작된 것이고 살아 있으면서 어떤 원한, 원통, 분함 그런 것이 맺혀서 나온 기대정도 밖에, 희망사항 밖에 안 되죠. 과학적으로서는.

신이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예요. 신이 있으면 신이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겁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선한 분인데, 선한 분이 만든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은, 그거는 신이 솜씨가 없다는 거고, 솜씨가 없는 신은 결국은 신이 이 세상을 자기가 만들어 놓고 처치 곤란해 한다면 그거는 신도 신 값을 못 하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한 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선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악한 악인이 활개치고 완전범죄가 있는 것을 봐서 신이라는 것은 없고 그저 이 세상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되는대로, 그것을 내추럴(natural)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 자연 그대로 스무스하게. 뭔가 종잡을 수 없고 우후죽순으로, 그냥 되는대로, 되는대로 흘러가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이 전부 다 사상화 되는 겁니다. 아까 스가랴서 예언하고 다르죠? 그런 입장에서 필요한 것은 뭐냐, 신이 뭐냐 진리가 뭐냐 찾지 말고, 현재 살아 있는 우리에게 어떤 것이 유효 하냐? 얼마나 우리에게 써 먹을 것이냐? 지금 돈을 버는데 얼마나 보탬이 되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게 진리예요.

예를 들면 이순재 보험 같은거. 거기에 만기 없이 몇 개월 넣으면 몇 개월 타먹느냐?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광주 강의에 가니까 어느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부부싸움하기 두 시간 전에, 광주인지 아닌지 잘 헷갈리는데. 부부싸움하기 두 시간 전에는 반드시 토마토를 먹으라는 거예요. 두 시간 전에 반드시 토마토를 먹어야 하는 이유가 부부싸움 하게 되면 분명히 화가 나니까 열을 내어서 독소가 퍼진다는 거예요. 두 시간 전에 미리 토마토를 먹어 두면 독소가 싹 빠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집에서 부인이 토마토를 썰 때부터 이미 두 시간 후에 한판 하겠다는 뜻이거든요.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 뭐냐 하면 오십대, 육십대부터 생각하는 것 전부가 자기의 건강문제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진리예요. 그게 필요한 진리가 되는 것이고 정보가 되는 겁니다. 예언, 스가랴 관심 없어요. 의사들이 직업도 포기할 정도예요. 건강매니저가 의사보다 더 많이 아니까. 등 푸른 고등어가 어떻고 저떻고. 등 푸른지 배 푸른지. 중국 가니까 그 목사님도 그 이야기에 관심 많이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 사상, 예언이 아니고 사상이죠. 그러면 이 사상 중에 서양 사상 말고 동양 사상에 보면 공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자가 사람이 뭐든지 성실하게 되면 형태가 생기고 형태가 생기면 뚜렷하게 되고 뚜렷하게 되면 그것이 밝아지고 밝게 되면 움직이게 되고 움직이면 바뀌게 되고 바뀌게 되면 교화가 된다는 겁니다. 공자한테는 귀신이 있느냐 신이 있느냐 아무 관심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전통이고 전통을 한 이유는 그게 예의가 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 존중이 전해 내려오는 관습과 전통을 유지하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인간을 바꿀 것인가 교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하단 말이죠. 교화시키는 것이 뭐냐 본인이 각자 있는 자리에서 성실하게 되면 나름대로 요령이 생기고 형태가 생기고. 형태가 점점 더 성실하게 되면 아,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뚜렷함이 생기고. 뚜렷한 것을 밝아진다고 했고 밝아지게 되면 남한테 감화를 시켜서 뭔가 움직이게 되고 움직이게 되면 그게 바뀌게 되고 바뀌게 되면 원래 목적했던 교화, 교육이 성립된다는 거예요.

부모교육, 자식교육, 모든 교육도 마찬가지고. 이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다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성실한 이것이 인간된 도리라는 이러한 것이 이방 민족에게 나온 거예요. 이방 민족에게. 그 이방 민족의 입장에서 유대교에 나오는, 또는 하나님의 예언에서 봤을 때 오늘 나온 본문 말씀은 정말 이상하고요. 아무 쓰잘데기 없는, 아무 쓸데없는 것을 예언으로 한 거예요.

그게 예언의 특징이 뭐냐 쓸데없는 내용을 가지고 예언하십니다. 누구도 눈치 못 채게 하기 위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원래부터 인간을 살라고 하는 목적이 아니고 인간을 죽일려고 하는 목적이예요. 인간을 죽이고, 그럼 살 사람은 누구냐? 하나님께로 난 자를 따로 꼬불쳐 놨어요.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의 보따리에, 산타크로스 올 때 그 보따리 메고 오잖아요? 그 보따리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 있어요.

그것을 이 땅에 퍼뜨리기 위해서는 지상에 있는 모든 자를 다 죽여 버리고 그 자식으로 교체를 해나가는 겁니다. 교체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듭남이라고 하는 거예요. 거듭남. 안 죽이고 교체하는 것이 아니고 죽여 놓고 교체하는 거예요.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 간다고 할 때, 그 당시 니고데모가,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제대로 이야기했어요. 내가 지금 이 나이에 부모 몸에 다시 들어가서 어떻게 태어납니까? 라고 자기가 아는 대로 이야기했어요. 주님께서 이야기 하기를 너가 모르는 방식으로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너가 지금 아는 방식에서 내 말을 접수를 했는데, 내 말은 접수는 접수대로 하되 그 접수에 대한 완성은 너가 알지 못 하는 방식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방식이 뭡니까? 하니까 그 방식이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거예요. 정말 신기해요. 분명히 처음에 시작 자체가 뭐냐 하면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다시 태어난다고 이야기 했으면 인간들이 아는 방식으로 해야 돼요. 어느 산부인과에 가서 어떻게 태어나든지. 이 방법이 아니고 너는 가만히 있어라 내가 이 땅에서 죽었다가 십자가에서 다시 부활해서 하늘로 들리리라. 그거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 있다는 거예요. 왜 관계가 있느냐?

예수님이 죽었을 때, 그것을 예수님의 단독 죽음으로 본다면 그것은 아직도 이방인이고. 예수님이 죽었을 때, 목자의 자격으로 죽으면, 그것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다는, 그것에 감 잡는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척 어렵게 이야기해요. 매사를. 왜 하나님께서 무척 어렵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쉽게 이야기를 하실 것이라는 예상들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알아먹게 구원을 하실 것이라는 예상들을 하기 때문에, 내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실 것이다는 그 예상 자체를 품고 있는 너 자신이 꼽표요. 꼽표. 이 꼽표는 경상도 사람만 아는 암호랍니다. 가위표. x표. 그것을 경상도말로 꼽표. 가위표해야 되는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구원하실 것이라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이것은 주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너만 살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위표 하는 거예요. 니가 못난거 나도 아니까 못난게 잘난척하지 말고 못나면 못난대로 그냥 있어라 말이죠. 니는 그냥 있고 니 주변에서 내가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므로 말미암아 그 죽음의 의미를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게 되면 너는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근데 그 죽음이 뭐냐 바로 목자의 죽음이예요.

4월달에 영화가 한편 온 답니다. 노아같은 쓰레기 같은 영화도 오지만 또 무슨 쓰레기 같은 영화가 올지 모르겠지만.  선 오브 갓(Son of God), 인자라는 영화가 온 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외국영화인데. 제가 보고 또 평을 해야 해요. 또 그것을 요구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평을 보고 영화를 봐야 된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꼭 봐야 되는데.

예수님의 오심의 목자가, 이것을 남의 이야기로 여겨 버리면 그거는 구원이 안 돼요. 김동리나 사람의 아들 썼던 사람, 이문열. 이런 사람들은 구원이 안 돼요.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와 상관없는 어떤 아저씨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이 온 사람은 바로 내가 예상한 것을 하나님께서 진짜 능가해서 구원할 수 있는 방주, 구원의 방법이 저 방법 밖에는 없다고 믿어지는 사람은 이미 연관되어 있는,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이런 사상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든지 그냥 가만히 있어. 원자가 됐든지 뭐 공자가 됐든지 맹자가 됐든지 그냥 가만히 있어. 어쨌든지 구원은 너 사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바로 목자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윗과 예루살렘은 뭐를 생산하느냐? 목자를 생산합니다. 목자를 생산하는데 어떤 목자를 생산하느냐? 인간들이 알아먹는 목자같으면 생산을 안 해요. 절대로 인간이 알아먹는 방식으로 목자를 생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알아먹지 못하는 목자라면, 인간이 알아먹는 목자가 뭔가가 먼저 등장해야 돼요. 그 등장의 역할을 맡은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유다나라의 목자입니다. 그 목자를 이제는 아주 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 2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 그 다음 3절에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찌르리라”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제가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면 목자가 있을 것이다. 목자가 나타난다. 목자가 나타나는데 인간들이 이해하는 방식이 뭐냐 자기 가정에서 목자가 등장하면 그 부모는 무조건 자기 아들, 자기 목자를 편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언이 어떤 예언이냐 하면 부모가 자기 자식이 목자라도, 목사라도 죽여 버리는 그 때가 올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느 부모치고 자기 자식을 칼로 찔러 죽이는, 칼이라는 구체적인 도구까지 언급을 했어요. 칼로 찔러 죽이는 그런 부모는 없는 거예요. 

제 말은 이런 뜻이예요. 아무리 목자가 거짓 목자라고 해도 부모 손에 죽는 그런 목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왜? 어느 부모도 자기 자식을 안 죽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 계통을 밟아 오실 분이 진짜 목자예요. 거짓 목자라고 평 받으면서 오시는 분이 진짜 목자인데, 왜 그래야만 되는가? 그래야만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분인 진짜 목자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세상에 어떤 상처라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잡고 드라마가 시작된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보통 드라마는 재벌 3세 하고 복도에서 부딪혀서, 재벌 3세인지 모르고 그냥 부딪혔는데 “아가씨 힘들죠?” “흥 작업걸기는.” 그런데 나중에 재벌 3세인줄 알아가지고 막 드라마가 되잖아요? 그게 썸이라고 해서 썸씽이 일어나는데. 둘이 결혼이 성사돼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이것이 목적인데, 문제는 어떤 두 팔 사이에 난 상처가 목적이 되는 어떤 글이나 드라마가 인간 세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인간의 예상 속에서 나올 수 없는 이상한 시나리오다. 이런 시나리오는 없어요.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로 되는 그런 시나리오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작업이지 인간의 드라마에선 그런 것이 없어요.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 제자들에게 왔을 때에, 제자들이 문 닫고 있었는데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 왔어요. 비밀번호 누르지도 않고 그냥 들어 왔어요. “누구십니까?” 하니까 제일 먼저 보여 주신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두 팔 사이에 난 상처, 창 자국을 보여 주었습니다. “봐라” 그때 도마는 없었죠. 그래서 제자들이 우리는 창 자국을 보고 믿었다 하니까 도마는 나는 못 믿겠다. 그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친절하시게도 다시 오셔서 믿으라고 손에 있는 못 자국과 옆구리 창 자국을 보여 주면서 “자 어떠냐?” 하니까 “주는 그리스도 하나님이십니다.”

진짜배기 명품 목자 맞습니다. 가짜 명품 아니고. 진짜 구찌(gucci) 맞습니다. 진짜 목자 맞습니다가 상처 난 걸로 아는 거예요. 왜냐? 모든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그 친구들이, 그 부모된 유대인이, 그 친구된 유대교가 메시야를, 자기를 구원한, 부모를 구원하고 친구를 구원한 그 메시야를 가짜 목자로 취급해서 죽여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예언은 뭐냐? 스가랴서에서 예언은 뭐냐? 그 날에 가짜 목자가 등장할 것이고 그 가짜 목자는 부모같은 유대인으로부터 칼로 죽임을 당하고 가까운 친구로부터 상처를 입게 될 것인데, 그 목자가 바로 너희 눈에는 가짜로 보이지만 가짜로 위장된 진짜 목자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어느 누구라도 자력으로 구원 받았다는 소리를 일체 못하게 만든 나라, 그 나라가 아들의 나라요 천국입니다.

해석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해석은 상처로부터 시작해서 상처로 되돌아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해석은 없어요.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울어라” 사람이 사는 목적은, 공자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사는 목적은 딱 그겁니다. 해피, HAPPY 행복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모든 드라마나 모든 강연하는 사람들이나 모든 종교의 최종 목적은 뭐냐 행복이예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그 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학문입니다. 행복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 세상의 모든 목적은 오직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주님이 증거되기 위해서 우리는 천국에 가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야기 합니다. “울어라” “우는 자가 복되다” 그저 인생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울다 울다 지칠 때. 울다 울다가 지쳐서 그때 웃을 때 그 웃음. 그 웃기 위해서는 울다 지쳐야 비로서 생겨나는 웃음이예요. 울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울어보면 나중에 울어야 될 이유가 사실은 마땅히 울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죠. 목자로 인하여.

그래서 5절에 보면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이것은 아모스의 선지자를 예언한 것이고. 6절에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예언이라는 것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게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더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바로 너무 코앞에 있기 때문에. 이 글자를 보세요. 글자. 이렇게 떨어져서 봐야 보이지. 너무 코앞에 들이대면 글자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검은 잉크의 모자이크에 불과해요.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요.

주님께서 구원의 방법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입장이예요. 너무 가까이 있는 거예요. 가까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속에 파고 들어와야 해요. 주님이,
상처받은 목자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그 때부터 웁니다. 울다가 울다가 지쳐가지고 너무 울어서 나중에는 허허 웃어버리죠.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허허 웃어버립시다. 울 자격도 없음을 깨닫고. 울 가치도 없고 이 땅에서 탄식하거나 슬퍼하거나 원망할 가치도 없어요. 울 입장도 못되고 울 만한 의미를 가진 존재도 아니예요. 우리는. 그저 허허 웃기만 해야 될 존재입니다.

운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애쓴다고 해서 세상형편 살림살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예요. 왜냐하면 내 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 선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내가 들려야 하리니” 주님께서 들리면 들리는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주님의 들림이 나의 들림이라면 이미 그 사람은 거듭나있는, 주님과 같은 통속이 되어 있고, 주님과 같은 세계에 있는 겁니다.

친구, 형제, 부모 이것은 옛날에 우리가 있었던 그 자리인데 오히려 우리로 인하여 상처받은 분이 등장했다면, 그리고 우리 앞에 헐러덩한 난닝구 들쳐가지고 봐라 니 때문에 당한, 니 죄 씻어준다고 십자가 보일 때에, 우리는 다 이루었군요 하고 외치기만 하면 돼요. 정말 다 이루었군요. 내가 그동안 무슨 부질없는 짓들을! 교회다니면서 수십년간! 번쩍번쩍 융나는 모태신앙! 백날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게. 상관없이 구원되었는데. 그 십자가가 보이는데. 끝으로 한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살아볼라고 살아볼라고 주님 주신 재산과 자식들 지켜볼라고 주님 주신 복이라고 지켜볼라고 그렇게 애썼는데 얍복강가에서 야곱은 신나게 얻어터지고 결국은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살려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살려낼 때만 내가 산다는 사실을 얍복강가에서 받았어요. 그동안 내가 나를 살리려고 하는 이 짓이 무슨 개 같은 짓입니까? 그동안. 주님이 살려준다는데 왜 쓸데없이 내가 나를 살리려고 부질없는 짓을 했습니까?

선한 목자들로 가장된  사람들, 훌륭한 세상의 목자라고 우기는 사람들, 수 천명, 수 만명 집회하면 모이는 사람들, 그 목자들 보세요. 공통점이 있어요. “여러분 하기 나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행복해집니다.” 라는 말. 행복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기 나름도 아니고 행복도 아니예요. 주께서 이 모양 만든 것은, 이 모양 가지고도 주께 주의 신앙인 되라고. 그 자체도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웃게 하기 위해서. 너 같은 인간도 이 십자가 창 자국으로 이미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해 주실 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떼구르르 하고 다 떨어져 나갈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상처 난 목자가 나타났을 때에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오늘날 우리도 엉뚱한 생각에 있다가 십자가 놓치지는 않았습니까? 성령께서 십자가로 다시 상처 난 자국을 볼 때에 그동안 부질없던 것들로 마음속에 한 맺혔던 모든 것들이  다 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3강 슥13장 1-6(선지자의 상처)140406-이 근호 목사.hwp (50.5K), Down: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