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 슥14장 9-11(왕이신 여호와)1405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4장 9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5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저주가 없는 곳이 있다는 말은 그게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따로 있기 때문에 저주 없는 곳이 아니면 저주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주 없는 곳이 있습니다. 하면 굉장히 좋게 들리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빨리 너 나와! 라는 뜻이예요. 우리에게. 너 저주하고 같이 사귈 일이 없잖아? 심판받을려고 아주 작심을 했는 모양인데 나와! 거기서 나와! 라는 강력한 지시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여호와께서 하시거든요. 여호와는 신이시다. 위에 계신다. 보통 우리가 이렇게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왕이 되신다고 하거든요. 여호와가 신이라는 뜻은 무슨 뜻이고 여호와께서 왕이 되신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신이라는 것은 그냥 하늘에서 지켜본다는 뜻이고 왕이라는 것은 이 땅에 일했다는 겁니다. 이 땅에 침투하는 분이다 이런 뜻이예요.
왕이 이 땅에 침투해서 등장을 해버리면 그때부터 그 분은 왕의 행세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왕이 그냥 폼만 왕이 아니라 왕답게 행세를 나서시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이 되어야 해요. 물어봐야 됩니다. “왕이시여, 제가 이래도 허락이 됩니까?” “허락 안 돼.” “이거는?” “허락 돼.” “왕이시여, 이거는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안 돼.” “이거는?” “해야 돼.”
왕이 있다는 것은 내가 나의 자존심을 그 분에게 반납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 분의 조치에 따라서 제가 놀아나겠습니다 라는 이 관계를 저는 아주 다행스럽고 정말 만족스럽게 여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는 것이 왕에 대한 태도입니다. 늙은 신하가 있는데, 신하의 며느리가 임신했다고 해서 “감축드리옵니다.” 이런 소리를 안 하거든요. 그런데 왕에게 아들이 생겼다 하면 온 신하가 대전에 모여서 “왕이시여! 감축드리옵나이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너희 집에서나 해라. 왜 나보고 이야기 해?” “왕이시잖아요.”
왕은 내가 기뻐하는 것 보다 더 기뻐해야 하고 나의 슬픔도 그 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나의 모든 것을 몽땅 거덜내는 거예요. 다 가져가서 그 분에게 주고 우리가 받는 것은 그 분을 경유해서, 그 분의 것으로, 나의 것을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드렸지만 받는 것은 왕이 하사 하신 겁니다 하고 납작 엎드려서 그걸 도로 받는 그런 관계가 왕입니다. 참 현대인에게 전혀 맞지도 않고 부합되지도 않는 그러한 제도, 정치적 시스템이라고 그렇게 봐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 왕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면 문제가 달라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홀로 하나라는 말이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시작과 끝이 만난다는 뜻입니다. 시작과 끝이 하나. 시작도 하나요 처음도 하나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 그 분의 것이 된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도 그 분으로부터 달아나거나 벗어나거나 도피할 수 없는 그것이 우리가 미처 몰랐던 현실이었다는 겁니다.
홀로 하나이다 라는 것을 약간 더 어렵게 한다면 숫자로 하면 1이거든요. 1. 그 분이 홀로 1이라면 우리는 1이 아닙니다. 우리는 뭐가 되느냐. 잠시 1인 것처럼 되었는데 다시 제로, 0으로 돌아가야 돼요. 이것을 수학에서는 공집합이라고 합니다. 집합론에 보면. 하나인 것 같은데, “내가 여기 하나 있습니다.” 라고 말할 자격은 안 돼요. 말할 자격이 안 되고 “제가 여기 몸이 하나 있더라도 하나, 둘 이렇게 셀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를 누가 빼앗아 갔느냐 하면 왕이 빼앗아 갔기 때문에. 내가 너를 하나라고 불러 줄 때만 비로소 하나가 되고 니가 스스로 여기 하나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예요.
하나가 있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이거든요. 존재 할려면 계속 존재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계속 존재할 보장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라고 주장할 이유가 없다는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복음을 잘 전하는 어떤 목사가 있다 합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복음 잘 전하는 목사가 누군고? 찾고 싶다. 왜 찾고 싶은데? 그 분 찾아서 그 분과 함께 뭔가 교회하게 되면 그 교회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가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잘 전하는 목사를 교인들이 붙들고 교회를 제대로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은, 그러면 그 목사 붙들고 교회하겠다는 그 교회가 계속 옳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런 보장이 없지요?
사람들이 복음 전하는 목사를 붙들고 교회하겠다는 말은, 교회 자체를 숫자로 1이라고, 계속해서 영원한 1로 존속시킬려는 의도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스가랴 14장 9절에 어긋나요. 스가랴 14장 9절은 영원한 것은 오직 알파와 오메가이신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이 왕으로 족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만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내가 속해 있는 이 집단이 하나라고 자부하면서 유지하고 싶은 그런 충동이 있었던 겁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좋은 교회다. 그 말은 뭐냐 그 안에 있는 내가 좋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숫자 1은 하늘에 있는 주님의 숫자 1과 대결 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너야? 나야?” “너는 너를 믿을 거야? 아니면 나를 믿을 거야? 확실하게 태도 분명히 해.”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좋은 목사 모시지 말고 나쁜 목사 모시고 교회 할까요? 아니면 목사 모시지 말까요? 이게 예민한 문제거든요. 어떤 목사 자살해서 문제가 되거든요. 목사 모시지 말까요? 할 때 성경에는 뭐냐, 교회는 이미 끝났어요.
성경에서 교회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 교회는 주님이 계시는 교회로 끝나 버렸어요. 그 교회를 바라보지 않고 따로 괜찮은, 건전한 교회를 유지한다는 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목사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를 쳐다보느냐.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목사 없이도 교회 간다는 소리 하면 그게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지금 말 잘 들으셔야 돼요. 앞뒤 논리가. 지금 예민해요. 우리는 목사 없이도 교회 잘 돌아간다 하는 그 자체가 우상숭배고. 너희들은 목사 없지? 우리는 목사 있는데 교회 잘 돌아간다 하는 이것도 우상숭배가 되는 거예요.
항상 왕은 그냥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대책이 없는 왕이 아니예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자기에게 모두 포함시켜 버리는 왕이고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왕입니다. 이미 영원한 것이 하나있고 우리는 그 분의 지체가 되었으면 딴생각하면 안 돼요. 목사를 모시더라도 목사도 우리같이 하나의 지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어떤 지도자급으로 생각하면 그거는 딴생각하는,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겁니다. 마치 그 사람 없으면 안 돌아가는 것처럼. 그러면 우리는 목사 없이도 잘 돌아간다 이것도 이상해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가 왕이고 왕이 홀로 있다는 말은,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왕이 이 땅에 개입했다는 이 말입니다.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하늘에서 하나 된다는 것이 아니고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뭔가 활동한 그것이 하나로서 활동한다는 것이 돼요. 따라서 어느 곳에는 저주가 있고 어느 곳에는 저주가 없다는 것은 결국은 내가 고르거나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저주가 없다는 왕이 어디에 계신가를 찾아봐야 되겠죠. 어디 계신가를 찾아봐야 합니다.
그 왕이 이 땅에 오셔서 그냥 여기 계시기만 하면 되겠는데 그 왕이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처음이요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요 나중도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도 자기가 동의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중간에 이러한 난데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니가 거기서 탈출해야 한다. 구원돼야 한다는 것을 왕이 하십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요 전에부터 계셨고 영원토록 계신 분이 하나님이다 라고 이렇게 자부하니까 우리는 구원받는 것 맞죠? 할 때 갑자기 낯선 이야기가 나와요. 너는 탈출을 해야 한다. 구원이 돼야 한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이 없어 버리면 생긴 대로 살면 그냥 그대로 천국에 가는 것처럼 되는데 이게 출애굽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버리고 십자가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십자가와 출애굽이라는 것이 현재 하나님은 영원토록 하나님이요 끝까지 하나님입니다 하고 이거하고 지금 탈출을 감행해라. 탈출하지 않으면 안 돼. 십자가, 죽음, 죄. 이 문제와 이게 섞일려고 하니까 이게 잘 섞이질 않네요. 저 아는데요. 하나님은 영원부터 하나님이고. 지금도 하나님 사랑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다 된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탈출하라니요? 지금 정상인데. 내 믿음이 정상이고 내 모든 게 정상인데. 탈출을 감행하라니요?
그 탈출하는 모습도 굉장히 처참해요. 좋게 탈출하라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 잡아서 피 바르고 죽음의 피를 아주 떡칠을 하듯이. 그렇게 탈출을 할 때, 어디에서 탈출을 하라는 그 탈출이라는 지시와 지금 나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정상이라는 이게 조인트가 연결이 안 된다는 이 말이죠. 이게 문제 있죠? 문제 있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번에 진도에 배 침몰하는 사건에 마지막 동영상이 공개되었는데, 동영상에 애들한테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들어라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을 그전에 연습한 적이 있습니까? 수학여행 가면서 배 타고 갈려고 했지 헤엄쳐서 제주도에 갈려고 생각을 안 했죠?
자기들은 뭐냐 하면 지금은 여기는 인천이고 나중에 자고 나면 제주도다. 알파와 오메가예요. 시작과 끝이 하나로 만나고 우리는 그것이 즐거운 수학여행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어떤 이벤트도 배를 버리고 바다에 빠지라는 이벤트는 생각도 못한 겁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언젠가 제주도에 도착한다는 것을. 이거만 믿었지. 이걸 믿다보니까 뭐가 들어갈 자리가 없느냐 하면 배를 버리고 바다에 빠지라는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네요. 이게 바로 교리의 문제점이예요. 교리와 신학과 신앙 전부가 문제가 돼요. 성경에 있는 것을 달달 외워도 한방에 다 와르르 소용없는 것으로 들통 날 그 시점이 와요.
교회 보게 되면, 우리교회는 그런 것이 없지만. 진짜 교회 보게 되면 목사가 와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목숨 바치겠습니다 매일 할 때는 참 좋은 목사 같다고 하더니만 그래서 전부 교리공부 하고 신앙공부 해가지고 오직 말씀으로 말씀으로...아무 일 없는데 갑자기 누가 목돈 가지고 헌금을 한다든지 예배당 돈 문제 들어가 버리면 그동안 자기들에게 누적되었던 모든 신앙과 신학 하던 것이 돈 앞에서는 한방에 확 다 날라가요. 그저 우리는 목사를 위해서 기도할 뿐입니다. 장로님들이 모여 가지고 주여! 주여! 우리 목사님이 말씀만 말씀만...이렇게 하다가 무슨 사건이 일어나 버리면 그래, 목사님 얼마면 되겠습니까? 얼마면 나갈 수 있습니까? 결국 쌓아 놓았던 모든 신학과 성경 지식이 마지막에는 돈 문제로 깔끔하게 끝나 버려요. 돈 문제로 끝.
도대체 그동안 액세서리였어요. 교회다니고 헌금하고...전부 다 액세서리지 진짜는 배를 안 버리는 거예요. 왜냐? 배 버리고 파도로 빠진다는 것은 죽는 짓이거든요. 그런 것을 사전에 상상도 못했지요. 설마 주님마저 배 버리고 바다에 빠질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는 끝만 바라고 있는데. 지금부터 시작. 요이땅 해서 마지막에 저 천국에 도착되어 있음. 우리는 중간 과정은 다 까먹어 버리고 시작은 지상에서 하늘로. 거대한 프로젝트. 거장한 파노라마 같은 것만 생각했지 중간에 배를 버리고 바다에 빠지라는 것은, 이거는 터무니없는, 이거는 사전에 언급하지 않은. 이거는 완전히 사람 이상하게 하고 있다는 강한 거부감이 일어나는 겁니다.
왕이신데, 그 왕이 십자가 죽으셨던 왕이고. 그 왕이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 손에서 작살나 버리신, 살해당한 그런 왕이라는 것을 도대체 이 사실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서 이 대목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예를 들면 됩니다. 남자들은 다 군대에 갔는데 또 군대이야기 해서 미안합니다만 군에 가서 훈련을 할 때 하여튼 짜증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군에서 한 백 명이 모여 있으면 조교가 하는 말이 “기준.” 기준을 이야기합니다. “어이, 거기 키 큰 사람 기준.” “기준.” 기준 중심으로 헤쳐모여를 할 때, 있는 자리에서 기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키 큰 애만 나오게 해서 백미터쯤 따로 세워놓고 “너희들이 훈련하는 꼬락서니 보니까 이래가지고 전쟁 이기겠어? 저기 보이나? 저쪽에 병사 보이나? 저 기준으로 헤쳐모여!” 그러면 죽어라고 달려가서 기준 기준 해가지고 우왕좌왕 하면서 모이죠. “아직 멀었어. 다시 나와. 저쪽으로 보내서 기준.” 하면 또 그쪽으로 죽어라 헉헉 숨 쉬면서 달려가 모이고. 그러면 그 훈련병들 생각하는 거 하나밖에 없어요. 제대 며칠 남았는지. 식사시간은 몇 시쯤인지 이거만 생각해요. 지금 이게 뭐예요? 달리기 시합하는 것도 아니고. 왜 자꾸 기준이 바뀌냐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가지고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저기 따라와 따라와 기준 하니까 아무도 갈 사람이 없네요. 아무도 갈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할 때는 자기들끼리 회의해 가지고 이번에 예수님을 왕으로 삼읍시다 라고 했는데 이 기준 되신 주님이 도망치고 말았어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너희가 배부른 까닭이다 이래 이야기하고 도망치고 말았어요. 도망치니까 사람들이 떡을 먹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달려가거든요. 달려가니까 주님이 또 도망가 버려요. 나를 왜 따라 왔느냐? 정말 천국 갈려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셔야 된다 이렇게 하니까 그제야 사람들은 한명도 남지 않고 전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 분이 왕이예요. 뭐 하늘에서 그냥 관찰만 하는 줄 알아요. 지상에서 직접 활동하시는 이 분이 바로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왕을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분의 왕이 힌트를 줘요.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사건에서 주인공이 바로 오실 구원자다 라고 이렇게 힌트를 줘요. 그러면 어디닙까? 어디닙까? 하겠죠.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눅13:33) 하시면서예루살렘을 하나님이 죽는 장소로써 이미 기준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예루살렘을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인간의 모든 영광과 찬양을 기도와 헌금을 받으시는 그런 장소로 드린 거예요.
요새 말하면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장소라고 여긴 것은 유대인이고. 교회가 오히려 메시야가 밉상 받아서 살해당하는 그 장소로 보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이고. 어쨌든지 저쨌든지 간에 구원받는 장소는 이미 장소로 정해졌습니다. 예루살렘입니다. 그 예루살렘인데, 그 예루살렘에서는 바로 저주가 없다는 거예요. 참 희한하죠. 분명히 예루살렘을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통계에, 이게 구라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옛날 요세푸스의 교회사에 보게 되면 예루살렘 유월절 할 때 백 만 명이 모였다는 거예요. 엄청난 숫자예요. 주로 많이 모인 곳이 이집트에서 모였을 것이고. 온 천지, 이란에서, 전 세계에서 성지순례 할 때 다 모였습니다. 많겠지요? 하여튼 백 만 명이라고 쳐주고. 그 백 만 명이 모여서 무슨 짓을 했습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서 메시야 기다렸죠.
그런데 그 백 만 명 중에서 진짜 예루살렘의 그 취지, 진짜 이 가운데 진짜 왕이 이 안에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몰랐죠. 그리고 예수님의 몇 안 되는 제자들. 정말 그 많은 숫자에 비하면 몇 안 돼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주인공이니까 추종자들이 많을 줄 알지만 전혀 많지 않습니다. 경상도 말로 센나께이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경상도의 특허한 방언입니다. 센나께이. 일본말 아닙니다. 몇 안 된다 라는 그런. 진짜 센나께이 같이. 극한 소수만. 그 센나께이도 다 떠나고 말았어요. 도무지 왕인데, 구원자인데 알아서 배 버리고 바다에 뛰어든 사람이 센나께이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거의 없어요. 이제 성령이 와야 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성령이 뒤늦게 오시는 것은요, 성령이 뒤늦게 오시는 것은 바로 너희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에 입각해야 니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니가 배를 버려? 니가 배를 버리면 손에 장을 지진다. 인간은 절대로 이 딛고 있는 땅의 영광과 부귀영화를 버리지 않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그런 바보는 없습니다.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오신 것은 천국에 아무도 가지 못한다는 뜻이예요. 기껏 와야 천국에 보낼려는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문제 있는 속성이 이미 내장되어 있는 채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고장났어요. 그 고장 난 것이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메시야에 대해서 곡해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종교적인 행함으로서는 구원받지 못하고 이미 다 해놓고 성령이 와서 우리를 초대해 보니까 우리는 오직 부끄러움 밖에는 없습니다. 아하, 참 내가 화려한 것을 원했더니만 주님은 화려한 분도 아니고. 내가 내 행함을 자랑했더니만 그것도 부끄러운 일이고. 옳소이다. 이것을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에게 숨기시고 이런 철없는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시니. 센나께이 같은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시니. 우리 가운데 똑똑한 사람 누가 있었나? 다 가버렸다. 성령받았다는 말은 제가 문제성이 애초부터 있었다는 자백하게 되는, 그럴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오늘 본문에 바로 베냐민이라고 하는 열 두 지파에 해당되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에서의 문이 있는데, 에스겔서 48장에 나오는 문이 있는데 시간관계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하게 하면 새로운 예루살렘이 오는데 그 예루살렘에 모집한 사람은 이미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이미 뼈다귀가 된 입장에서 다시 여호와가 왕이 되셔서, 목자가 되셔서 성신을, 에스겔서에서는 성신이고. 신약에서는 성령을 주셔서 온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건져 주시니 제가 입이 열 개라도 유구무언입니다. 제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으리다 하는 삭개오의 고백처럼. 이 향수인데 이 향수로도 주님 앞에서는 빛을 잃죠. 향수를 다 깨버리고 울면서 발을 씻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이 찾아 주신 그것 자체에 감사할 때, 그것이 바로 거기에만 저주가 없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만 드린다면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참, 혼인문제 할 때, 신랑, 색시 고를 때 저주가 머무른 자를 신랑, 색시로 구한다는 것은 보통 배짱이 아니면 안 되는데 배짱이 아주 센 모양이라. 성경 말씀에 보면 바로 안 믿는 자에게는 저주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벌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집안 거덜난다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성령받지 않은 그 상태 자체가 여전히 저주가 있는 곳에서 머물러 있다는 거예요.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들면 먼저 뛰어든 예수님이 바로 바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서 지켜보는, 그냥 관찰하시는 왕이 아니라 이 땅에 손수 오셔서 예루살렘을 제대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 그 속에서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