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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36강-예루살렘 생수(슥14;6-8)이근호140427

아빠와 함께 2014. 4. 28. 07:52


예루살렘 생수 (스가랴 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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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4-04-27 15:41 
예루살렘 생수 

2014년 4월 27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6-8 

(14: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14:7)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14: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어떤 세상을 만들어내시네요. 사람은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창세기 2장에서 들어서면서 우리는 에덴동산의 존재를 만납니다. 당연히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동산은 아닙니다. 친히 곳곳에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담겨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요청하거나 수정을 요구할 수 없는 동산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동산의 구성에 대해서 인간은 감사하므로서 그 취지를 알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왜 천국에 물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물이 왜 있는지도 모르면서 “와 맛있다”고 하면서 성급하게 마시는 것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던 그 행세를 발휘한 바가 됩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인간 본인 중심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천국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국에 가야 될 사람은 천국의 삶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동산은 애초부터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 좋아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 위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천국에 물이 나오니, “왜 하나님을 위해서 물이 천국에 필요합니까?”는 식으로 물어야 합니다. 그게 그 나라에 살아야 될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만약에 ‘천국에 물이 있거나 말거나’ 그런 식으로 살면, 천국 생활 속에서 감사나 고마움이 전혀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천국에 물이 나오는 이유는 스가랴 13:1에 나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물은 죄를 씻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죄씻는 물의 존재 의미를 위해서 이 지상에서 미리 죄인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죄인이 죄는 아는 일은 자동적이지 않습니다. 

죄 씻는 작업과 병행해서 죄를 아는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죄 씻는 작업이 실시되지 아니하면 죄를 알지를 못합니다. 스스로 죄라고 들고 나온 것은 실은 자기 자랑일 뿐입니다. 천국은 죄 용서와 관련된 모든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죄인으로서 용서받아 의인된 자들이 들어가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천국에 있는 그 물이 미리 이 지상과 연결되어서 나타나야 하겠지요. 그 지점이 바로 ‘다윗 언약’ 곧 다윗왕이 기거한 예루살렘이라는 겁니다. 과거에 다윗왕이 살았던 그 지상의 환경을 동원하여 장차 천국을 묘사해주십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언약에서 새롭게 쏟아지는 죄를 밝혀줄 기준에 추가적으로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에스겔 33장에 나옵니다. 초반부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파수꾼을 세워놓으시겠다는 겁니다. “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그 사람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그가 경비를 하였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파수꾼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겔 33:2-6) 

파수꾼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서 이미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왜 파수꾼을 제대로 자기 역할을 못하신다고 단언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파수꾼이 대중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는 이야기를 함부로 발설하지 못할 정도로 움츠리게 만드는 시대에 돌입되기 때문입니다.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음을 근거로 구원받을 그런 파수꾼도 없습니다. 파수꾼과 그리고 그 당시 파수꾼의 말을 들어야 될 그런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충족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따져 있었습니다. 

사실 에덴동산이나 천국은 모두 사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다 준비해놓으신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 들어서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미미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대단하게 평가한다면 상대적으로 천국이 별 볼일 없는 곳으로 전락됩니다. 즉 인간은 자신으로 인하여 자기 구원이 훼방되는 겁니다. 

천국에서 인간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님은 따로 있습니다. 이 주인님이야말로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수행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겠다는 모든 수고가 다 부질없는 일임을 밝혀내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본성상 죄인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집어던질 수가 없습니다. 

그저 죄인된 입장에서 천국에 숟가락 하나 언진다 는 심정으로 감격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악의 본성도 만만치 않습니다. 쉽게 자신의 먹잇감을 내어주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나와있는 것을 바탕으로 ‘종교 행위’를 갖추려고 합니다. 종교 의식이나 종교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은 자신의 죄성을 그런 의식 밑으로 감추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에스겔 47장을 재현하기 위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실로암 호수에서 물을 길러다가 성전에 부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물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성령입니다. 성전의 물이 곧 성령이 된다면 성전의 나머지 부분도 지상의 건축물이라고 우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용서의 근거를 십자가에서 마련되고 난 뒤에 성령님을 사람들에게 흘러 보내셨다는 말은, 자신의 재주로는 도저히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식으로도 자신의 죄를 감출 방도는 없음을 자인할 때, 이런 사람만 천국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장만된 세상에서 겸손하게 들어가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6강 슥14장 6-8(예루살렘 생수)1404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4장 6절부터 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5페이지입니다.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창세기부터 성경을 보신 분들은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이 있다는 것에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에덴동산, 에덴동산이라 이 말이죠. 에덴동산을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셨다는 말은 우리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느냐 하면 에덴동산보다 더 나은 동산을 마지막에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실려고 이미 벌써 그런 언질을 내리셨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서 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동산이라 할 때, 동산이 만약에 작지 않고 크다면 거기서 우리 존재는 왜소해질 것입니다. 너무나 화려하고 잘되어 있는 동산 앞에서 “나는 참 별게 아니구나!” 하고 느낄 거예요.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만들어 주셨다 이 말은 “니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이런 뜻이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신앙생활 어떻게 하느냐? 간단하죠. 

  

내가 갈 곳은 넓고 크고 화려한데 그 가운데서 나라는 존재는 미미하다. “미미하다”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나 미미해. 김미미. 박미미. 최미미. 나 미미해. 나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그런데 동산이 없고 내가 동산을 만들어 간다면 결국은 내가 시도하고 노력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없는 동산을 내가 만들려고 하니까 그거 고역입니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고 너무 힘들어요. 내가 만들려고 하니까. 

  

이왕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넓은, 멋진 동산에 미미한 존재로 그냥 숟가락 하나 얹어 놓는 것처럼 그냥 들어갈 뿐이라는 생각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그 동산은 내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고역스럽게 살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다 만들어 준 거예요. 성경 내용은 이런 겁니다. 인간이 에덴동산 요구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요구하지도 않는데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모든 귀한 것들은 우리 쪽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미 일괄적으로 총체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다만 네가 들어 올 때는 너 자신을 으스대지 말고 그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미한 존재입니다. 라는 마음으로 들어와서 마음껏 누리면서 살면 되는 거예요. 마음껏 누리면서....., 

  

그런데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겨 버리면 내가 뛰어 놀아야 될 그 넓은 동산과 정원이 그것이 오히려 시시하고 미미하게 되어 버리면 이거는 도저히 그 동산에서 뛰어 놀 수가 없죠. 거기서 자기는 매일 찡그리며 살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스가랴든 창세기든 뭐든 간에 하나님께서 뭔가 먼저 만들어 놓고 다 만들어 놓은 곳에 인간을 하나의 장기알처럼 딱 하나 놓은 거예요. 따라서 그 동산을 우리 쪽에서 만들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내 구미에, 입맛에 맞는 천국은 애초부터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는 주님의 입맛에 맞으면 그 입맛으로 우리가 바꾸면 되는 거예요. 자꾸 아내보고 반찬 뭐라고 하는데 자기가 입맛을 바꾸면 되는 거예요. 우리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고 하는데 엄마하고 살 것이 아니고 이제 아내하고 사는 거니까 아내 입맛에 바꾸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에덴동산이 되는 겁니다. 자꾸 반찬 가지고 타박할 것이 아니예요. 모든 것이 주께서 이미 마련했다는 그 점을 생각해야 돼요. 

  

오늘 본문에 보면 8절에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거 생수 나오라고 누가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주문서 넣은 적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아담에게 미리 만들어 주셨듯이 하나님께서 앞으로 살 그 세상에 생수가 터져 나오도록 미리 한 거예요. 그럼 우리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생수 있음 앞에서 우리는 미미한 존재예요. 

  

내가 미미하다는 것은 나의 계획, 나의 기대한 거 이것도 미미해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나는 뭐 에덴동산에 게임기 같은 거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하는 이런 생각은 미미한 우리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예요. 나는 에덴동산에 광대역, 넓게 퍼져 가지고 잘 생겼다 잘 생겼다 해서 스마트 폰 했으면 좋겠다. 그것도 미미한 거예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작품이 아주 깨끗한데 거기에다 우리 것을 자꾸 집어넣으면 흠이 될 뿐입니다. 왕이 베푼 혼인 잔치에 그냥 우리는 옷만 입고 참석하는 것처럼 괜히 거기 가서 내가 여기 왔노라 하고 티내시면 들어가기 전에 발길로 차내어져 “너 티내려거든 지옥에 가서 티내라” 해서 들어가지도 못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만드신 것 뿐만 아니라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워하고 있습니다. 합당한 사람을 주께서는 만들어 내죠. 낮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건 새로운 출생을 의미하지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개조해서 될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에덴동산에, 천국에 왔다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해가지고 저거는 왜 있을까? 저거는 왜 만들었지? 이거는 우리 인간들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 분명히 하나님 아이디어인데. 저거는 왜 있지? 라고 물으면 되는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나온다? 저거는 왜 나오지? 목마를까봐 나오나? 생수를 왜 먹지? 자꾸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원해서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해서 주신 겁니다. 자꾸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는데 우리가 원해서 준 생수가 아니고 하나님이 원해서 주신 생수니까 우리는 생수를 마셔야 할 존재로 출생해야 되는 거예요. 개조되는 거예요. 주께서 미리 준비한 것에 의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주님만 미리 아시는 그것에 맞추기 위해서 지상에 있는 우리를 주님의 설교에 맞도록 개조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볼 때에,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만 다 만들어 졌는데 우리는 숟가락 하나 올려 놓는 정도로, 참 뻔뻔스럽지만 그냥 놀이동산 구경하듯이 아이 잘 만들었네 하는 식으로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들어가는 것도 사람들이 싫어해. 그냥 빈 몸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이미 다 갖추어져 있으니까. 

  

그러면 들어가서 뭐 할 거냐? 탄복하고, 감사하고, 그 만드신 취지에 대해서 영광을 돌리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뭐 들어가서 하지. 지금부터 해야 되는 거예요. 사람 자체가 바뀌기 때문에. 지금부터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에 하신 조치에 대해서 미리 감사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물이 있다는데, 물이 있는 이유를 모르죠. 하여튼 천국에 물이 있음을 감사하고 고마워하기 위해서 지상생활에서 그 물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접선이 되느냐 그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스가랴 13장 1절에 보면 힌트가 나와요. 물이 왜 있느냐. “그 날에 죄의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되어 있거든요. 아하, 물이 있는 이유가 있었네요. 물이 있는 이유는 뭐냐, 우리의 죄와 더러운 것을 씻어내기 위해서 물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물이 나오는 장소는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에 발생된 다윗 족속에 의해서 오는데 그 다윗이 살던 동네가 예루살렘 동네거든요. 그래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가지고 묘사하기를,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가지고 미래에 일어난 일들을 미리 땡겨서 묘사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정리해 보면 동산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지 않았다. 주께서 미리 다 만들었다. 우리는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거기에 물이 있더라. 물 왜 있을까? 물 필요 없는데. 보니까 천국은 죄 씻어 주기 위해서 물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나온 우리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죄 있는 자는 천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 죄 있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죠? 그러면 천국에 있는 물이 지상부터 효과가 발휘가 되어야 하는데, 발휘가 될려면 죄를 씻어 주는 물이거든요.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는 뭐가 되느냐 놀랍게도 반전이죠. 죄가 있어줘야 되는 거예요. 죄가 있어 주고 죄가 있게 하는 그 작용과 동반해서 씻어주는 작업도 같이 이뤄지는 겁니다. 

  

죄 짓는 것 따로 씻는 것 따로가 아니라 죄 씻어 주는 물이 등장하므로써 우리가 몰랐던 죄도 새롭게 발굴이 되는 거예요. 발굴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 생전에 계속해서 죄인으로 발굴이 되면서 동시에 씻음도 같이 병행해서 그 작업이 이루지면서 이것은 바로 우리가 들어갈 천국의 작용이 미리 우리에게 맞닥뜨렸다는 사실을 우리가 세상에서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선 참 치밀하고 고맙죠. 

  

아무도 천국에 간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계시는 것을 본 사람도 없는데 언약이라는 그런 것을 통해서 천국에 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물이 왜 있는지 몰랐는데 그 물이 죄를 씻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물로서 씻어질 죄에 대해서 우리 속에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발생을 시킴으로 말미암아 성도로 하여금 주님 때문에 용서 받아서 이렇게 죄 없이 갑니다. 

  

죄는 죄인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죄 없는 자로서 당당하게 살게 만드시는 하나님. 이게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죠. 간음한 것이 분명하지만 간음하게 해놓고 그 간음한 현장에서 죽지 않고 주님 앞에 데려 나오게 만들어서, 그것도 바리새인이라는 아주 충실한 일꾼들을 통해서 그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 여인은 졸지에 너를 위해서 천국이 마련되어 졌다는 사실을 앞당겨서 용서라는 모습으로 느끼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자, 그런 혜택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이 사실을 이야기 하면 그냥 믿으면 되는데, 문제는 바리생인들, 사두개인들 이 사람들이 우리하고 동떨어진 사람들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 선배들이예요. 하나님을 알았다는 선배들의 행세가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오순절 날 보면 유대인들이 실로암 못에 가서 행세하는데 방금 우리가 봤던 스가랴,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에서 물이 나오거든요.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종교 행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대중들에게 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식으로 그들은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서 성전에다가 붓습니다. 그러면 물이 졸졸 흐르겠지요? 그런 이벤트를 벌이는 거예요. 

  

자, 사람들이 왜 그런 식으로 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걸 생각해 봐요. 방금 제가 설교 쭉 하면서 그래 숟가락 얹어 놓듯이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돼. 그냥 들어가면 돼요. 들어가면 되는데 왜 사람들은 종교 행위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제가 따지는 거예요. 왜 종교 행위를 하느냐? 왜 그걸 해야 뭔가 하나님께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왜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 그게 다 이유가 있어요. 이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싫어해요. 하나님 앞에 나와야 천국가고 구원받고 하는데 나오기를 싫어해요. 숨고 싶은 거예요. 그 숨는 방법 하나가 종교입니다. 숨는 방법 하나가 종교예요. 

  

어떤 철학자가 기독교를 놀리면서 이런 소리를 했거든요. 착한 사람은 착하게 살면 되고 악한 사람은 악하게 살면 되는데 착한 사람이 착한 일을 못 하고 악한 일을 할 때에 그 악한 일을 숨기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 종교라고 했어요. 아주 예리하죠. 비팟이라는 미국의 현대 철학가인데 그렇게 허를 찔렀어요. 종교라는 것은 뭐냐, 교회다니는 것은 뭐냐, 그거는 자기를 숨기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물론 교회 안 나오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숨기고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냥 죄인인 채로 노출되어서 그 천국 갈려고 하니까 미안해서 못 가겠다는 거예요. 본성상 그런 거예요. 아까 태민이가 방귀 꼈잖아요? 본인이 방귀 껴놓고 오바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린애도 뭘 아느냐 하면 방귀 뀌는 것이 냄새나니까 부끄럽다는 것을 본인이 아는 거예요. 자기 깨끗한 몸체에서 안 좋은 냄새가 났다는 자체가 자신을 그 순간 나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여튼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어쨌든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악을 누르고 감추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장점만 드러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방금 쭉 이야기한 복음을 방해하니까 문제고 그러한 요소를 너나 할 것 없이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스가랴에 이렇게 백날 나와도 이거는, 사실 유대인들이 이것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알아도 본인이 그냥 숟가락만 얹을려고 하는데 숟가락을 닦아서 광내서 얹을려고 한다니까요. 이런 작업을 해서는 안 되거든요. 그것 때문에 지옥가거든요. 그들이. 자꾸 ~인체 하는 거예요. 믿는 체 하고. 믿음 좋은 척 하는 거예요. 그냥 노출되기가 싫은 거예요. 

  

여기서 이 대목을 설명을 하고 제가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에스겔 3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는데, 긴 말씀인데 제가 짧게 요약해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에스겔아 내가 너를 파숫군으로 세웠다.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파숫군으로 세웠는데, 파숫군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종말을 미리 알고 전하거든요. 네가 만약 나팔을 불어서 백성에게 경고를 해야 되는데, 네가 만약 백성들이 욕하고 비난한다고 뭐 미친 놈 나가라 무시한다고 짜증나서 네가 만약에 나팔을 불지 아니하면 저 백성들이 못 들어서 지옥 간 책임을 네게 묻겠다. 하지만 네가 만약에 나팔을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치 않는다면 그 책임은 나팔 분 너한테 묻지 않고 백성들에게 묻겠다 라고 하는 이야기. 보세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가 뭐예요? 

  

이미 하나님이 백성들을 좋지 않게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좋지 않게 보는 거예요. “당신 마지막 때 죽어.” 한다면 어느 인간이 그 소리 듣고 “감사합니다.” 할 인간 아무도 없어요. 결국은 그 책임은 백성이 지게 되어 있는데 이 책임을 파숫군인 에스겔에게 한 이유가 그 당시에 선지자들 목자들 있었거든요. 그들이 왜 에스겔처럼 들은 대로, 아는 대로, 믿은 대로, 왜 말을 못하느냐 하면 백성들이 겁이 나서 그래요. 쫓아낼까봐. 교회에서 쫓겨나오고 사람들에게 밉상 받아서 굶을까봐. 

  

모든 인간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가르쳐 준 대로 하다가도 막상 하나님이 알려 준 복음대로 믿고 싶어도 막상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저들이 나를 나쁘게 보나? 내가 올려논 모든 체면과 위신은 한꺼번에 다 날라가면 아이구 안 되지? 그럼 난 부끄러운 셈이 되지? 나는 방귀 낀 셈이 되지? 그러면 나는 싫은데. 이러면 복음도 함께 날락 버리는 거예요. 모든 것이 장만되어 있습니다. 숟가락만 얹으세요. 때 묻은 것은 물이 와서 씻어 줍니다. 백날 이야기해도 본인이 본인을 씻을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종교행위 라는 겁니다. 교회 나오면서 교회를 주의해야 해요. 아주 위험한 곳이고. 기도하면서 나의 기도가 신앙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우리 교회는 그거 미리 알아서 아무도 기도 안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방법도 자기를 숨기는 방법밖에는 안 돼요. 

  

그냥 하세요. 하시면서 뭘 느끼느냐면 아, 나라는 것은 내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어서 내 종교 가지고 주님 앞에서 중간 매개체로 자꾸 들이대는 그런 죄가 나한테서 계속해서 나오는 구나를 알면 되는 겁니다. 그거 그대로 받아 줘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 다 미루어 버립니다. 이게 복음이예요. 에스겔에 나오는 이 본문을 두고서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고자 해도 그들은 본성상 이것을 못 해요. 그러면 에스겔도 다 완성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에스겔 33장의 파숫군 역할을 다 해버려요. 대신 죽어 버려요. 

  

따라서 벌 받아야 할 우리는 벌 받지 않고 주님을 타고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말씀도 못 지켰지만 다 지킨 것으로 돼서 다 되어 버린 겁니다. 거기에 근거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 성령을 주셔요. 요한복음 4장에. 성령을 주시게 되면 그게 물이 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물이 오는 줄 알았어요. 물이. 물은 천국까지 찼고 이 지상에서는 물이 아니고 성령이 오신다니까요. 성령은 죄 씻는 성령이예요. 그냥 괜히 놀러 오는 것이 아니고. 받았나? 병 나아서 신났지? 병 낫게 해주는 성령이 아니고 죄 씻어 주시는 성령이예요. 

  

어떤 분이 자기 어머니가 폐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어머니가 돌아가신다고 하니 병원에 갔는데 진짜 어머니가 헉헉 하시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간호사가 지나가면서 한마디를 해요. 그 말이 정말 가슴 아픈 말을 했어요. 간호사는 무심코 하는 말인데. 보더니만 “이제 한 시간 남았습니다.” 이 한 시간 남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다리에 반점이 생겼다는 말은 혈액 순환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간호사가 자기 직업상 “이제 한 시간 남았습니다.” 곧 돌아 가신다는 것이 아니고 한 시간 남았다는 거예요. 

  

만약에 누가 나보고 “사십분 남았네요.” 이렇게 하면 어쩌라구? 그래서 사십분 동안 뭘 하라는 말입니까? 사십분 동안 집안에 있는 돈 다 뭐하고 맛있는 거 먹고 그렇게 할까요? 안 그러면 사십분 동안 도대체 뭘 하라는 말입니까? 남자로 태어나서 죽기 전에 뭐 백가지 그것을 사십분 동안 다 해냅니까? 한 시간 남았는데 어떡하라는 말입니까? 

  

제가 하는 말은 그 한 시간 이라는 것이 지금 살아 있을 때는 한 시간이 돼요. 한 시간이 있으니까 당신 이렇게 하라 뭐 저렇게 하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한 시간이라는 자체도 뭔가 의미가 있는데 죽는 사람보고 한 시간 남았다는 것은 사실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살아 있다고 우리가 우길 때요, 우리가 착착 계획대로 오늘은 뭐하고 내일은 뭐하고 하는 자체도 사실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몇 시간 남은 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는 겁니다. 감출 필요가 없다니까요. 마치 몇 십 년간 사는 것처럼. 대단하게 오래 사는 것처럼. 뭔가 종교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우수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척척 그런 식으로 살 필요는 없어요. 

  

5분 남았는지 1시간 남았는지 주께서는 통보도 안 해주고 5분뒤에, 10분뒤에, 1시간뒤에, 50년뒤에, 주께서 어떻게 할지는 주의 손에 달렸거든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감추지 말자는 거예요. 진짜 우리가 주님의 성령을 받고 주님의 생수를 받아서 숟가락 하나 얹어 놓는 식으로 천국에 간다면 지금 거기에 숟가락만 얹어 놓은 미미한 심정으로 정원 앞에서 자기를 감추지 맙시다. 그 넓은 정원 앞에서. 생명나무가 있고 생명수가 있는 그 앞에서 더 이상 감춘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씀을 제가 이 시간 드리고 싶네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 씻음 받는 것도 자랑거리가 되고 기도한 것도 자랑거리, 헌금한 것도 자랑거리, 이 모든 종교 행위가 사실은 자기 자신을 숨기고 싶은 하나의 얄팍한 본성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고 차라리 넓은 정원 앞에서, 천국 앞에서 마음껏 노출할 수 있는 그런 자유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