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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32강-예루살렘의 통곡(슥12;10-14)이근호140330

아빠와 함께 2014. 3. 30. 17:00

예루살렘의 통곡(스가랴 1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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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3-30 15:43 
예루살렘의 통곡

2014년 3월 30일                        본문 말씀: 스가랴 12:10-14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2: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2: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2: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이스라엘은 특수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주변 나라들은 이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자기 나라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수하게 만드시게 된 연유는 다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준 그 언약으로 인하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족보들도 나열되게 된 것입니다.

언약이 보여주는 면면들은 지상의 인간들이 도저히 구상될 수가 없는 요소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즉 언약을 인간들이 지켜낸다는 것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와 문명들은 인간들 손에 의해서 제조되고 나타난 것들입니다. 바로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 구원의 특수성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해가시는 겁니다. 방주가 그 예가 됩니다. 방주는 특수한 배입니다. 그것은 방주 이후에 주어지는 특별한 사태를 감안해서 건조된 배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인간들이 이미 경험한 바를 감안해서 만든 배가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의 분석과 의미 해석을 차단할 수가 있습니다.

방주 못지 않게 이 이스라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언약을 응축담아 사건이 터지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일종의 이스라엘을 하늘을 들어올리는 고리 역할을 하는 지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고리 안으로 바늘에 실 꿰듯이 언약의 능력이 들어와서 저절로 빠져나가면 그 와중에서 예루살렘은 언약에 속한 도성이 되어 구원받습니다.

세상의 일반적은 큰 종교들은 이런 언약이 없습니다. 모든 게 인간들의 자기 성과급 따라서 구원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사람을 건져 올리는 고리도 친히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그것을 꿰는 든든한 밧줄까지 하나님께서 조치해주십니다. 그런데 언약을 외부에서 관찰하고 선택을 감행한 제 3의 지역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에 탑승한 노아 가족 중 하나가, 노아보고 말하기를 “아버지,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은 이 세상에 큰 비가 오기 전에 방주라는 배를 만들고서는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았데요”라고 말하면, 노아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바로 그 가족이 우리야”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아예 말씀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봄 철의 꽃이 피고 질 때에 그것은 감사하는 제 3의 지역에 있는 꽃은 따로 없습니다. 본 꽃들이 직접 화사하게 피고, 실제로 핀 그것들이 시들어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러합니다. 인간이 말씀을 관찰하고 지키기로 각오한다고 해서 말씀이 성취되는 게 아닙니다.

말씀 성취성은 자기 백성을 직접 그 말씀 속에 집어넣어서 그의 말씀 자체가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보여주는 관계에 돌입시키므로서 진행됩니다. 사는 게 곧 말씀이게 합니다. 하나의 꽃이 되게 합니다. 피기도 하지만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유유자적할 수 있는 제 3의 지역을 부여받은 적이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될 이유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육신은 허황된 것에 매료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되고 싶은 바를 자꾸만 창작하고서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우기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서 자연스럽게 말씀의 세계 는 환상이니, 허구니 라고 하면서 비난하게 됩니다. 자기 영구 보존하기 위한 몸을 위하여 제시된 현실이 과연 진정한 현실일까요?

육신들의 이러한 횡포와 폭력으로 인해 하나님이 죽게 됩니다. 그 분이 바로 10절에 나오는 ‘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죽으시므로서 구원의 특수성이 성취가 됩니다. 구원의 고리에 실이 꿰이는 겁니다. 이 죽음은 단순히 자살이 아닙니다.  “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아가 자기 몸에 유발한 왜곡한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멀리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나라의 모습을 TV에서 미리 보고 그곳에 가기로 작정을 했다고 칩시다. 그 풍광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곳에 아직 자기가 담겨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결혼 기념으로 그 나라에 가겠다고 부부가 나선다면 그 때부터 TV에서 봤던 낭만은 사라집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새는 것처럼, 공황 떠날 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 싸우기 마련입니다. 이는 그 풍경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버리면 자신으로 인해 아름다움이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바로 이런 문제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군대에서는 보편적인 군기를 위하여 선임자들이 신입병에게 무리한 불친절을 안깁니다.

“똑바로 안해? 그렇게 설명했건만 시킨 대로 제대로 못해? 이 굼뱅이를, 이러고서 나라 지키겠어?”라고 다꾸칩니다. 그야말로 개무시하는 겁니다. 왜 무시해야 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군에 오기 전에 각자 스스로 잘 나가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군대 질서라는 새로운 관점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기존의 모든 가치를 강제로 허물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 관점의 최종점은 하나님 자신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테러당해 죽으시는 그 관점을 자기 백성들이 갖추기 위해서는 성도의 일생이 이 관점에 맞추어 돌아가도록 조치되어야 합니다.

성도도 육신들을 갖고 있기에 ‘하나님의 죽음’은 그저 환상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으로 봐서 가장 현실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맏이의 존재감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모든 가치와 의미와 명예와 영광을 다 쏟아 붓는 그 지점은 맏이의 존재입니다. 맏이만 잘 된다면 그 어떤 비참함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육신의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맏이의 존재가 ‘하나님의 죽음’을 한탄 허구적 사실로 가리고 있는 바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예언하시기를 “그날에 하나님이 죽음을 보고서는 마치 너희들이 맏아들이 죽은 듯이 애곡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죽음‘이 결코 허구니 비현실이 아니라 유일한 현실이요 구원의 고리임을 알리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각자 회개하는 이유는, 각자 중요시 여기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모든 곳에 구멍이 뚫려서 자신들이 귀하게 여긴 그것으로 인하여 진정한 현실인 ‘하나님의 죽음’이 가리워졌음을 인정하게끔 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귀하지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는 것을 바라보며 사는 저희들을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2강 슥12장 10-14(예루살렘의 통곡)1403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2장 10절부터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4페이지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이스라엘 나라가 특수한 나라입니다. 어떤 특수한 나라가 되었느냐 하면 분명히 남들 보기에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인데,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다고 우겼고 거기에 대해서 다른 민족들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니들이나 우리나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기는 인간들, 그저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과 함께 있을 뿐이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도저히 못 믿겠다 그럴 때, 이스라엘의 특수성이 뭐냐 하면 여기에 나단 족속, 다윗 족속, 레위 족속, 시므이 족속 하는 것이 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그냥 족보가 아니고 이런 족보가 나타나게 된 이유는 야곱이 하나님께 받았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을 야곱 언약이라고 하는데, 그 야곱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러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노아라는 영화에 보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방주를 만드는 구조같은 것들이, 잣나무로 만드는데 그 구조가 전에 있던 어떤 배들하고는 구조가 다릅니다. 특수성을 갖고 있어요. 그 방주를 가지고 노아 언약이라고 하거든요. 노아 언약.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언약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본인들이 특수한 운명, 특수한 인생을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라고 되어 있어요. 예루살렘이라는 곳도 역시 특수한 구조입니다. 방주 안에 전체가 특수한 구조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도 특별한 인물인 것처럼 이스라엘 전체를 방주라고 봅시다. 같은 언약이니까. 방주나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같은 걸로 봐주면 그 안에도 아주 특별히, 특수한 장소가 뭐냐 하면 예루살렘 이라는 곳 이예요.

이 예루살렘에서 누가 죽느냐면 그가 죽어요. 10절에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가 누구냐면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의 특수성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지상에 와서 살해당하는 그 지점이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고 그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삽니다. 죽고 사는 것, 마치 바늘에다 실이 들어 갔고. 실이 들어간 그걸로 끝인 줄로 알았는데 다시 나오므로써 그 실이 박혀 있는 옷감은 위로 들을수가 있죠. 고리를 만들어서 고리에 꿰고 튀어나올 때, 예루살렘은 바짝 들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인간이 천국가는 방법은 우선 언약을 줘요. 언약을 주고 그 언약은 인간이 이룰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와서 그 언약을 스스로 성취하므로써, 언약을 성취했다는 그 조건이 구비되면 그게 들어 올라가는 거예요. 언약이 서류입니다. 서류에 싸인을 하면 합격통지서가 맨 그 통지서예요. 언약을 통해서 바짝 들어 올리면 예루살렘이 하늘로 올라가고 예루살렘이 이 땅에 내려오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다는 요한계시록 21장에 그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다른 종교, 불교나 맹자, 공자, 힌두교나 이슬람교 같은 것을 보면 이게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고 자기가 닦은 도 만큼, 죽어서 뭐 혜택이 없겠는가 뭐 성과급이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어느 종교든,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다 그래요. 성과급에 따라서 구원이 되고 안 된다는 겁니다. 요즘 여기에다 기독교를 자꾸 집어넣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드네요. 주님의 피로 구원받는데, 왜 자꾸 성과급이 왜 들어가는지. 아마 피를 믿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교회가 안 되니까 다른 종교처럼 성과급을 집어넣어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가짜로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언약이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죽는데, 자살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보면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찔렀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을 찔렀고 찔러진 그 하나님을 그들이 다시 바라보게 된다는 겁니다. 하여튼 특수한 종교예요. 이 복음이.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스가랴서에는 예루살렘이 애곡한다 했는데 여기는 땅의 있는 모든 족속이 애곡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는 나중에 예루살렘이 붕괴되면서 온 각처로 흩어지면서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흩뿌려지기 때문에 언약의 조치가 개인에게, 이스라엘이 아니고 전체에 다 퍼지는 겁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의 이러한 사실을 들었으면 그냥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여기서부터 좀 난해한 것이 그냥 이 말씀을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을 그냥 믿어버리면 지식이 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직접 우리가 찌른 자 경로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누가 찔렀대가 아니고 내가 찔렀습니다 라는 체험을 평생 동안 해야되는 거예요. 가로수에 꽃이 피었잖아요? 꽃이 피었다 말이죠. 꽃이 피었을 때, 우리는 “아! 꽃이 피었구나!” 라고 압니다. 그러나 우리한테 주목을 받는 꽃 자체는요, 자기도 자기를, 옆에 있는 꽃을 감상할 입장이 못 돼요. 자기는 실제로 핀 꽃이여야 되고. 해봤자 일주일도 못 갑니다. 다시 시들고 꽃이 떨어져요. 져버립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꽃은 내가 꽃을 피웠다는 것을 감상할 수 있는 제 3의 지역에 꽃이 없어요. “어? 꽃이 폈네?” “누가 보는데?” “핀 꽃을 내가 볼 수 있네.” 라는 그런 꽃은 없듯이. 본인이 피고 본인이 폈다고 우길 때, 다시 본인이 지는 겁니다. 꽃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라는 것은 나를 관찰할 제 3의 자리가 없어요. 우리는 죽어야 되고, 죽어가야 되고, 죽어 가면서 다시 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내가 다른 자리에 있으면서 내가 믿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할 자리가, 따로 내 자리가 없어요.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난 그 자리가 남의 자리가 아니고 나의 자리로 개입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게 되면 구경할 입장이 못 되고 주님의 뜻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야 되고 주님의 뜻대로 하늘나라에서 다시 살아냐야 되는 겁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결국은 내 이야기로 될 때만 우리는 방주 안에 같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방주 안에 여덟 식구 있으면서 노아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제가 이야기 해드릴까요? 어떤 가정이 있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방주 만들어 가지고 그들이 살았대요.” 라고 남의 이야기 할 수가 없어요. 너다 너. 지금 우리야 우리. 우리가 그 이야기라니깐.

말씀을 자꾸 읽으면 안되고요. 말씀 속에 들어가 있음을 소급해서 믿어야 돼요. 또 말씀에 들어갈려고 하지 마세요. 들어갈려고 한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소급해서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환상이 있어요. 어떤 환상이냐면은, 사실은 이 환상이, 제가 환상이라고 했지만 이게 실제가 되는데요. 마귀가 성경속에 있는 이야기를 전부 다 환상으로, 자꾸 그건 허구야, 환상이야, 헛된거야 믿지마, 그런거 보지마, 그런데 가지마, 들리게 하지도마, 자꾸 이렇게, 하나님이 죽었다가 살았났다는 이것이 실제인데 그게 실제 아니고 지금 내가 탱탱하게 살아있다는 거 이것을 자꾸 실제라고. 죽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은 아직 없어. 이게 실제라고 우기게 만드는 그런 요소가 아주 강렬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설명하기를 예루살렘이라는 이 지역이 어떻게 인간으로 바뀌느냐는 그 작업을 예수님께서는 해주시는 겁니다. 상당히 내용이 어렵죠.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TV에서 그리스나 이태리 스위스, 하여튼 경치 좋은데를 보거든요. 독일이나 미국 같은데 경치 좋은데를 보면 굉장히 아름다워요. 그러면 부부간에 “여보 이번 결혼 20주년에는 우리가 저기 가자? 알프스에 가자.” 라고 해서 알프스에 가면 너무 멋있고 아름답고 모든 스트레스가 다 풀리고 하겠죠. 그런데 막상 알프스 비행기 타고 갔다 오면은요 갈 때부터 싸우고 올 때까지 싸웁니다.

왜냐하면은 우리가 TV이에서 봤던 알프스에는 내 몸이 없어요. 그리고 옆에 있는 자기도 없어요. 둘이가 없어요. 그냥 제 3의 지역에서 보니까 아름답게 보이는데, 막상 여행을 하게 되면 이 몸이 같이 가요. 가게 되면 집구석에 있는 그 몸이나 알프스에 있는 그 몸이나. 집구석에 있는 바가지가 거기 가면 안 샐까요? 스위스 알프스에 가서 싸우는 거예요. 그 아름다운 풍경이 없어요. 아름다움이 안 생겨요. 16년 동안 해도 아름다움이 안 생겨요. 그게 왜그러냐면 인간의 몸의 한계가 그렇습니다. 자기 몸에서 말씀속의 세계 못 들어가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마치 말씀속이 알프스 같애. 너무 좋아. 천국이 너무 좋아.

그런데 막상 본인이 본인 자체가 말씀속에 있다고 생각 안 하고 성경 말씀속을 따로 구상을 만들어 놓고 이렇게 그림을 그려 놓고 “야, 성경속의 세계 참으로 아름답다!” 아름답기는 뭐가 아름다워요. 성경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 사는 세계가 성경 세계 거든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 육신의 문제, 하여튼 이게 천국이고 좋다고 하는데 내가 거기 가면 천국 버려요. 내가 가면. 그래서 천국도 살고 안 버리게 하는 방법은 이 몸에서 뭔가를 따로 끄집어 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루살렘의 지역이라는 곳에 살더라도 그 지역과 내 몸이 따로 논다는 것. 예루살렘에서 발생되는 사건과 내 몸이 살고 싶은 예루살렘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 가지 좋은 예가 있는데요. 이게 뭐냐 하면, 남자들은 다 압니다. 군대를 가게 돼요. 군대를 가게 되면 지가 사회에서 잘 나간다, 뭐 좋은 집안의 애다, 뭐 각자 자기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다 있고 있잖아요? 그런데 훈련소에 딱 들어 가면은 조교들이 이런 이야기 해요. “이것들이 굼벵이처럼 똑바로 못해 그것밖에 못하지? 내가 그렇게 가르쳤건만 너희들이 이것밖에 못해?” 이러거든요. 그러면 훈련병들은 “아니 뭘 가르쳤는데?” 뭘 가르쳤는데? 군에서 아무 것도 안 가르쳐 줘요. 무조건 이것들이 그렇게 가르쳐 줬는데 아무 것도 못 하고 이 굼벵이들 똑바로 해 똑바로 하라면서 막 패고 이런다고요. 친절하게 아주 사근사근하게 납득이 가도록 그렇게 선임병이나 조교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윽박질러요. 정말 일을 할려는 것이 아니고 일을 망칠려고 작심을 했어요. 조교나 선임병들이.

왜 그렇게 합니까? 각자 잘난척을 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 있을 때 전부 다 자기들이 똑똑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선임병들은 완전히 머리 깎아 놓고 몰아 넣고서 가르쳐 주지도 않았어요. 이 느림보 굼벵이들아! 무조건 굼벵이들이라고 시작을 하는 거예요. 개무시 하는 겁니다. 이 개무시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이예요. 똑바로 못 하지? 그렇게 가르쳤는데. 뭐 성경 말씀 봐도 모르는데 어떻게 똑바로 해요? 주님 혼자 잘하시는데. 주님 혼자 알고 있고, 조교 혼자 알고 있는데. 사회생활 하다 뒤늦게 군에 온 사람한테 좀더 나긋나긋하게 그저 친절하게 “사회에서 계시던 아저씨들 그 동안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앞으로 가이소.” “뒤로 가시옵소서.” “아니되옵니다.” 이렇게 합니까? 평소에 가정에서 부모한테 이쁨 받는 것처럼 그렇게 해요? “이러다 나라 지키겠어? 이런 돌대가리들이 군에 오다니” 그 사람들 서울 대학 나오고 아이큐 높아요. 이 돌대가리들이!! 이렇게 해줘야 해요. 그래야 권위가 먹혀요. 그래야 통솔이 되고 그래야 질서가 잡힙니다.

우리가 성경 보기 전에 똑똑하고 잘났고 종교 연구하고 영어 공부하고 과학 공부하고 기술있고 자기나름대로 열심히 돈 벌겠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이예요. 그래가지고는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에 못 가요. 완전히 개무시 당해야 되고 완전히 모든 것을 박탈 당해야 됩니다. 잘난척하는 것을 다 빼앗겨야 해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스스로 개라고 여길까요? 그것도 모자라요.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손에 하나님이 살해 당하는 것입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인간이 몸의 특징이 눈을 뜨면 자기 중심이 되거든요. 그래서 천국은 눈 뜨면 안 보이고 눈 감으면 보이는 곳이 천국이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으매 항상 우리는 변명들을 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몸 육신의 탯줄을 끊어 버려요. 원천을 끊어 버립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0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애통하기를 어느 정도 애통이냐면 독자를 위하여 애통해라. 독자라 하는 것은, 자식이죠. 그것도 기둥입니다. 집안의 기둥. 그러면 부모들이, 보통 결혼하기 전에 아가씨들 보고 공장다니라고 하면 사람을 보통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가씨 어디 다니느냐고 하면 공장다닌다고 말을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요.

그런데 일단 결혼했다 40대 50대 아줌가 되면 공장이고 뭐고 일만 시키면 다 가요. 왜? 자식 때문에. 이미 자신의 권위와 체면은 자식 있음에다 다 털어 넣었거든요. 자식만 잘 되면 나는 개같은 취급을 받아도 괜찮아. 자식에다 올인한 겁니다. 자식이 그것을 알 리가 있습니까? 자식이 그것을 알면 인간 다 되었게요. 모릅니다. 하여튼 모든 것을 다 줬어요. 니한테는 한 푼도 없다고 해놓고 죽을 때는 다 주고요. 자식들이 그 말 절대로 안 믿거든요. 유자식 상팔자 보세요. 믿지도 않아요. 안 준다고 해놓고 다 주고요. 호적에서 뗐다고 해놓고 유치장 제일 먼저 찾아가고. 부모들이 새벽기도 나오면, 우리는 새벽기도 없지만 기도하는 내용이 뭡니까? 그저 자식 위해서 합니다. 자식. 자식 위해서. 가끔 남편 위해서 기도하는 아줌마도 있지만 그건 남편을 경유해서 자식을 위하여. 남편 사업 잘 돼서 내가 낳은 자식을 위하여. 자식이 잘 된다면 어떤 무시도 다 감수하고 어떤 호사도 다 포기할 정도로 자식을 위해서 다 합니다. 그 인간의 모든 의와 존재의 가치.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자식이 있으매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나 꽃은 살아 있는 이유가 폈다와 지기 위함입니다. 꽃이 갑자기 피는 것은 지기 위함입니다. 질 때에 그 처절함과 처참함을 극도로 강조하기 위해서 반짝 피게 해요. 꽃도 그렇지만 인간도 자식을 위하여 자식 잘 되는 것을 보람과 낙으로 여기면서 살다가 만약에 그 자식한테 누가 건드렸다 이러면 용서가 안 되죠. 그 점은 가족의 끈끈한 정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대전을 가는데 기차 안에서 굉장히 시끄럽게 휴대폰을 해요. 내가 보기에 외국에서 살다가 온 한국사람 같은데, ktx안에서 휴대폰을 못 하고 밖에서 해야 하는데 그것을 잘 몰랐나 봐요. 제가 5분을 참다가 이야기 했어요. 좀 밖에 나가서 해라. 그래서 그 어른도 예하고 밖에 나가서 했고. 그 전에 아내도 여기서 하면 안된다고 했고. 자기가 뭐 듣지도 않고 했어요. 그러고 난 뒤에 대전쯤 내릴 때 되니까 옆에 있는 큰 딸이 “아저씨 말 그리 하면 안 되죠?” “뭘 그리 하면 안 되는데?” “죄송하지만 밖에 나가서 휴대폰 좀 해주실렵니까?” 플리즈(please)예요. 죄송하지만. 누가 죄송한대요? 옆에 떠든 사람이 죄송하지. 그 아가씨는 뭐만 생각하냐면 우리 한 가족인데 우리 가족을 건드린 그것이 기분 나쁜 거예요. 그것을 만회해 볼려고 하는 거예요. 남이야 시끄럽든지 말든지. 그저 내 가족, 우리 아버지를 왜 건드리냐 이 말이거든요. 자존심 상한다 이거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했어요. “우리 서로 상쇄합시다.” 당신 시끄러운 것 하고. 지금 곧 나가야 하는데. 대전 도착합니다 하고 방송 나왔는데 어디서 이야기 할데가 없어서. 진작 이야기 했으면 이야기 하겠는데 대전 다와서 뿔따구 나서 그렇게 이야기 해요. 아, 이것은 가족이 진리구나. 가족 앞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는구나.

그 맏아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끊어버릴 때 인간은 살 이유가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설정이 잘못되어 있는 거예요.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낳은 자식을 위해서 올인한다 라는 설정 자체가 무엇을 가리게 했느냐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살해 당했다는 그 사실을 가리게 만드는 우리 육적인 본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 그들만 언약속의 예루살렘이 되게 하십니다. 말씀 속에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올인 하는 것, 이게 만약 큰 아들이 애를 먹이면 둘째 아들에게 올인 하게 합니다. 하여튼 우리의 존재 가치를 다 쏟아 놓는 그곳에다가 주님께서 건드려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방주 안에 이미 살고 있다는, 말씀 속에 살고 있는 언약 백성인 것을 깨우쳐 주는 식으로 작업하겠다는, 이것이 주님께서 예언하신, 예고하신 그 예언입니다. 스가랴서를 통해서.

그러면 12절, 13절부터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따로 하고 저것도 따로 하고. 따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 당시에는, 옛날에는 회개를 그 대표가 했어요. 제사장들이 그 일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금식하고 있고 제사장들이 대표를 한 이유가 회개한 이유를, 그들이 언약을 알기 때문에 대표로 했는데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다 언약을 알게 될 것이고, 십자가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사항이고, 따라서 그 때는 각자각자 중요시 여기고 인생의 목표가 개인 개인마다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자식에다 올인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뉴질랜드 사업에 올인하는, 하여튼 뭐 사람마다 자기가 올인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모든 게. 어떤 사람은 자기 몸에다 올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거는 일방적으로 목사님이 이런 것은 회개합시다 이럴 필요가 없어요. 각자각자 본인이 최고로 귀하게 여기는 것, 제일 자기 자존심과 명예를 뽑아내는, 마지막 남겨 놓은 어떤 의미가 있을 거예요. 그 의미와 하나님의 죽으심을 바꿔치기 당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울지 않더라도 회개하는 예루살렘 주민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맏아들 죽었다고 애곡하듯이 실제로 그 죽음 내부에 우리의 존재 의미가 그저 맏아들 죽었다고 희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같이 죽고 하나님 때문에 같이 사는 그 천국 백성의 의미가 있음을 언약적으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