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지 1
2014년 4월 13일 본문 말씀: 스가랴 13:7-9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13: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13: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3분지 1’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사람들은 해석하는데 있어 자신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일장적인 수리 생활에 흔히 등장하는 수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덩어리를 놓고 세 등분으로 나누게 되면 그 나누어진 각각의 하나 하나는 다들 ‘3분지 1’입니다.
따라서 이점을 명확히 알고 있는 자기네들로서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충분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는 모든 해석은 필히 경험적으로 검증이 되어야 하고, 그것도 반복적으로 똑같은 결과를 나타낼 때만 진리로 채택이 됩니다. 사람들은 믿을만한 것만 믿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믿음이란 점차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으로 진전을 보이는 면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를 하게 되면 텅텅 비워있는 집안 창고가 넘치게 된다는 말라기의 말씀을 놓고,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되는지를 점검하게 됩니다. 수입 소득의 10%를 출석 교회에 내었더니만 갑자가 집안이 횡재했다는 경우를 조사하게 되면, 십일조해도 집안의 수입이 늘어나기는커녕 십일조 액수만큼 줄어드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즉 십일조해서 얻는 수입보다, 자기 수입 여부는 출석교회에 십일조하는 행위와 무관함을 증명하는 증거가 수 천 배 더 많이 나오는 이 현실은 도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겁니까? 십일조하면서 사업했다가 망해서 가난하게 된 자신이 부끄러워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애시당초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위여부를 자신의 고대하는 예상 결과와 결부시킨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십일조의 증명은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십일조 대목을 읽고 보고 있음을 하나님쪽에서 감안하고 있다는 점을 잊으면 아니됩니다.
사람들이 십일조하면서 기대하는 바가 정답이 나오는 그 노선이 아닌 엉뚱한 노선에서 헤매게 됩니다. 이는 그 어떤 성경 말씀도 예수님이 행하신 십자가 사건을 경유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라면,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다’는 그 대목과 연관시키지 않는 것이 잘못입니다.
목자는 예수님이시고, 내몰라하면서 줄행랑 치는 양들은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십일조해서 이득을 보겠다고 은근히 기대하는 바로 그 양들입니다. 이 양들의 관심사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더라’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욕구와 욕망 달성에 가 있습니다. 이래가지고는 애초에 성경 해석이 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 말씀에 자기에게 적용시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이사야 61장 대목을 펴놓으시고는 ‘그 말씀이 지금 자신에게 임하여 너희들 귀에 들렸느니라’고 하십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성경을 해석을 하고자 하는 그들에 대해서 이런 난데없는 도발적인 해석을 내릴 때, 누가 이 해석을 받아들릴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들은 나름대로 문자 해석, 글자 해석, 의미 해석을 자신감을 갖고 있는 자들인데 말입니다. 3분지 일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유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3분지 2의 집단과 3분지 1의 집단을 나뉘어집니다. 그리고 3분지의 일의 집단에 대해서는 ‘작은 쪽’이라고 하시고 그들의 구원은 불 가운데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이 ‘3분지 일’이라는 표현 자체가 인간들이 끼어들어서 해석할 수리적 기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벌리신 특별한 일을 묘사하는 고유적인 작용을 하게 됩니다. 마치 야구선수가 자신의 고유의 번호가 있듯이 말입니다. 만약에 어떤 선수가 등에 ‘61번’이라는 번호를 달고 경기에 임한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너는 왜 60번도 아니요 62번도 아니요 하필이면 61번이냐”고 묻는 물음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인 것과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7분지 1도 아니요 4분지 1도 아니라 하필이면 3분지 1로 표현합니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숫자를 등장시킨 밑사건에 주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밑사건’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3분지 1의 의미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 밑 사건이 바로, ‘목자를 치니 양들의 흩어짐’입니다.
즉 인간치도 안 도망칠 위인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치고 목자가 칼로 침을 받는 것을 저지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도망치는 주제에 멀찍이 서서 “그런데 3분지 1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날릴 입장이 되지 못하는 말입니다. 이 ‘3분지 1’의 해석과 의미는 예수님 가져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로 ‘침을 당한 그 목자’임을 증거하는 용도로 다시 계시 속에 섞여 들어오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8:7-12에 보면,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3분지 일이 적용되는 그 현장을 ‘땅’이라고 묘사되어 있으면 이 땅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실제로 죽고 양들이 흩어진 그 환경이 되는 땅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은 지속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을 보여주는 쪽으로 활용되게 됩니다. 3분지 1이 양(量)으로 판단될 수 기호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하여 보복당하는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이 땅의 형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침을 당한 목자가, 자신이 당함을 ‘3분지 2’과 ‘3분지 1’라는 구별된 수 표현으로 일방적으로 멸망당할 자와 은혜받은 자를 구분짓는 권한자임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유일한 그 목자로 판명된 목자 자신이 자기의 존재함과 일을 표현하는 고유적 기호로서 쓰시는 겁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성도는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당하심 사건에다 모든 것을 걸고 살게 됩니다. 즉 세상은 ‘3분지 1’이라는 표현을 앞장 세우시는 그 예수님에 의해서 당하도록 되어 있음을 믿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의 가치를 깎고 훼손시키는 식으로 자기 의미를 내세우는 죄를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