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가치
2014년 3월 23일 본문 말씀: 스가랴 12:4-9
(12:4)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12:5)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
(12:6)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12:7)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2:8)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12:9)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 유다, 예루살렘, 장막이라는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일하시면서 무턱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핵심 요소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로 이런 식의 일하심은, 흔히 인간들이 구상해내고 섬기는 일반적인 ‘신’ 개념으로서는 포착되지 않는 요인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들이 섬기는 신을 ‘우상’이라고 규정하는데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셈입니다. 가짜 신은 소멸하고 진짜 신은 그 작업을 통해서 부각될 것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에게서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이 깨어지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승리하는 것을 이스라엘이 보게 하지 않는 식으로 일하신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의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싸워서 통쾌한 승리를 쟁취하는 바는, 참된 하나님의 일하심의 뚜렷한 증거처럼 전해내려고 있었던 것입니다. 홍해 바다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그 대표적 증거라고 할 수 있고 여리고성 함락도 그와 같은 증거에 합세됩니다.
막강한 이방민족의 군대에 철저하게 짓밟혀버린 우울한 유다나라에게 스가랴의 예언은 간만에 주어진 희망의 소식처럼 이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본 것입니다. 기존의 유다 나라가 영속적으로 회생되고 회복되는데서 오는 희망이 아니라 기존의 유다나라마저 지금보다 더 처참하게 드러나야 하는 사실을 딛고 새로운 유다나라가 주어질 것입니다.
유다나라의 멸망을 두고서, 이 유다 나라 자체의 회생을 기대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유다 나라 자체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유다 나라를 생각하기를, 자기네들이 성전을 관리하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성전을 아끼시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유다 나라를 지켜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와 성전을 분리해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유다 나라는 무너져도 참된 성전을 전혀 다치지 않는 상태로 하늘로 올라가게 하시는 방책을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치고 깨어지고 불타버린 성전의 모습은, 유다 나라 및 다른 이방민족들의 성전관 자체의 허술의 관념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성전이란 원래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통해서 지점으로 정해놓은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자긍심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유일한 장소’을 지키는데서 오는 자존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경우라도, 아니 모든 것을 다 손해보시더라도 이 곳만큼은 든든히 지켜줄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곳마저 무너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적(敵) 개념이 이스라엘 외부에서 내부로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적이 성전으로 알고 있기에 그 성전을 무너뜨리시겠다는 겁니다. 성전도 아닌 것을 성전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그 이유로 유다 나라는 자신의 오류를 내부적으로 키우고 왔던 것입니다.
유다 나라와 예루살렘 성전을 분리해야 합니다. 자기네들이 성전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스스로 유다 나라를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유다 나라에서 성전은 우선 공간성 확보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특정 지역에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그곳을 청소하고 관리하고 수리하므로서 자기네들 손으로 친히 성전을 유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 성전이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이어줄 방도가 될까요? 신약에 오면 그런 생각들을 무너지게 만듭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언급하시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집의 내용’은 사람들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본인에 의해서만 성립됨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의 12살 되는 때의 일이 적혀있습니다. 유월절 명절날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더불어 복잡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예수님 부모님들은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립니다. 결국 찾게 되는데 그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49절에 보면, “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러니 여기서 말씀하시는 ‘내 아버지 집’을 예수님께서 나중에 부정해버리십니다. 헐고 사흘만이 짓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일하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지킬만한 대상으로 간주되는 그 성전이 품은 공간성은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신 이후로 말입니다.
특정한 지점에 예배당이 있다고 해서 곧 그곳이 교회라는 법은 없습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집을 없애버린 그 사건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그 사건 안에서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유다 나라가 성전을 지킨 것이 아니라, 성전 자체가 새롭게 유다와 다윗과 예루살렘을 최종적으로 생산해낸다는 점이 밝혀지게 됩니다.
곧 예루살렘이라는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의 장은 예수님의 죽음 속으로 함몰되어 예수님 부활을 통해서 사건화됩니다. 마치 보이는 섬을 가기 위해 육지에서 헤엄치기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도 않는 섬을 향하여 몰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즉 내가 익히 하는 세계가 곧 천국이 아니라 도리어 너를 십자가 죽음으로 데려가게 하는 그 능력이 나로 하여금 천국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유다나 예루살렘은 다같이 무너지고, 그 무너짐에도 불구하고 참된 예루살렘은 새로운 방식으로 언약의 견재함을 사건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사건이란 바람과 같아서 인간의 소지용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붙잡아 둘 수가 없는 대상입니다. 도리어 반대로 인간이 그 사건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붙잡혀지게 됩니다.
베드로 및 12제자들은 자신과 예수님과 한패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거기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 도망쳐버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란 곧 완성체입니다. 그 안에서는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의인이 되는 결실을 낳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 자체가 예수님의 몸, 그 한 몸으로 인하여 당연히 하나(1)이 되기 때문입니다. 완료된 하나(1)입니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이요 새 다윗의 자손이요 새 유다지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어떤 행위도 우리를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도 없고 나오게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31강 슥12장 4-9(성전의 가치)1403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2장 4절부터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3페이지입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여기에 읽어 보면 예루살렘, 유다 반복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반복한다는 뜻은 중요한 지명이라는 뜻이예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 대충 아무 때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의 핵심이 있다는 거죠. 그 핵심은 어떤 핵심이냐면 하늘과 땅에 유일하게 연결되는 지점. 연결되는 지점이예요. 미국에서 우주선 쏘아 올리면서 아무 때나 그냥 동네에다 쏘아 올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나사(NASA), 멕시코에 있는 나사에서 쏘아 올리듯이 하늘과 땅의 연결된 유일한 지점이 있어요.
구약에서는 예루살렘이고, 신약에서 보면 예수님이 나타나는 그 곳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께요. 구약에는 특정지점이 있어요.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장소가 하나님과 땅이 연결되는 장소고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의 복음이 덮쳐지는 그 사건의 현장, 사건의 현장인데 이게 바람 같은 것이라 우리 쪽에서는 이것을 잡을 수가 없어요. 바람 같아서 잡으면 벌써 놓쳐버렸죠. 내 것 만들지를 못합니다.
구약 같으면 어떤 지점이 있어 내가 그 장소에 가게 되면 내가 그 장소에 합류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되고 교통이 되고 소통이 되죠. 하지만 신약에서는 내가 잡으면 잡히지 않고 주님이 잡으면 놓치지를 않아요. 여러분 우리가 잡는 것이 좋습니까? 주님한테 붙잡힌 것이 좋습니까? 내가 따라 가면 내가 정신없을 때는 놓쳐버리는 것이 돼요. 이겁니다. 치매 걸린 사람이 구원받겠는가? 라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내가 평소에 예수님을 잡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치매 걸리나 안 걸리나 그리스도인이 아니예요.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잡힌바 되게 되면 치매가 걸리든, 두뇌 하나가 다 날라가든 상관없이 그 사람은 치매 걸린 사건마저도 주께서 잡으시는 현상중의 하나가 되는 겁니다. 연세 많은 분들 치매 걸린다고 걱정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치매 걸려 천국 갑시다. 치매 걸려 천국 가고, 주님도 모르면서 천국 갑시다. 바로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장담하느냐? 우리의 장담이 아니고 성령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성령께서 알려 주게 되면 너의 행동과 상관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종결되었다는, 사태가 이미 종결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죠.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 나의 삶의, 일상의 반복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반복으로서 우리는 하루의 일상을 꾸려나가게 되는 겁니다. 광주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쉬는 시간에 김 을수 집사님이 우연히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일기장을 다 봤습니다.” “어? 제 일기장이 어떻게 유출되었죠?” “제 일기장을 봤어요?” 몇몇 사람 봤다는 거예요. 저는 일기장을 공개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다 봤지? 그런데 제가 걱정하니까 “목사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아마 복음을 몰랐으면 수도사 중에서 아주 도가 높은, 도를 닦는 굉장히 고상하고 청순하고 경건스러운 그 사람이 되었을 것인데 목사님 복음을 알아 가지고..” 이제는 뭐 개판 다 되어버렸지요.
젊은 20대의 일기장을 보니까 세상에, 그렇게 오직 믿음 일변도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 어떻게 한 여인을 사모하는 그런 모습이 나왔다는 거예요. 아무리 그렇게 변명을 해도 저는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가만히 집에 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내가 기분 좋지 않았다는 말은 어느새 벌써 내 인생은 나의 일과의 반복으로서 이어지고 이어졌다는 것을, 내가 그만큼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나의 인생이 이어짐이 아니고 주님께서 만들어 주시고, 주님께서 일구어 주시는 그 현상들의 이어짐인데, 주님의 일기장을 가지고 마치 나의 일기장이라고 잘못 오해해 가지고 “나의 일기장을 누가 보는데?” 라고 살짝 기분 나쁠뻔 했어요. 따지고 보니까 공개가 된 것도 주의 뜻이고. 주님의 일의 반복으로서의, 지금 치매 걸리기 전에, 우리가 늙어서 정신없을 때에도 이미 주님께서 손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신약에서는 성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성전은 지정된 장소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이 되었든 어떤 특정 건물을 가지고, 부동산을 가지고 성전이라고 했잖아요? 신약에 오게 되면 성령에 붙잡히게 된 그 사람의, 성도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 사람이 있으면 성전이 세 개냐? 신약에서의 사건에서의 숫자 계산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예요. 세 사람이 있다고 세 개의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 하나 하나가 전부의 하나에 종속되는 그 하나가 되는 겁니다. 천 명이 와도, 그럴 리가 없겠지만. 하나 하나 하나가 오직 하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 성전 안에서는, 왜 세 개 있어도 하나 천 명이 와도 하나가 되느냐 하면, 한 사람은 그냥 일대일로 접속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를 경유해서 접속이 되는거거든요.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접속이 되게 되면 하나에 속해 있는 여러 가지 지체일 뿐이예요. 지체 하나의 숫자를 1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느 몸체에 같이 묶여져 있느냐에 따라서 몸체가 하나기 때문에 우리도 거기에 대해서 하나에 대한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그 하나의 그림자, 그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거죠. 주전자를 빛으로 비추면 주전자 그림자가 생기잖아요? 주전자의 뚜껑도 하나고 주둥이도 하나 되면 그러면 주전자가 두 개가 되잖아요? 그렇게 헤아리지 않습니다. 요거는 주전자에 속한 뚜껑 하나. 요거는 주전자에 속한 주둥이 하나. 합해도 그건 한 몸체에 달려있는 지체로 봐서 하나로 간주하는 겁니다. 신약에서 이러한 계산법이라든지, 이러한 계산 이해는 먼저 구약 속에 들어가야 이것이 정립이 되는 거죠.
그러면 오늘 본문 스가랴에 나오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내용이 복잡하고 길어 보입니다만, 제가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먼저 유다나라를 공격해서 그 속에 있는 예루살렘을 공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보기에 예루살렘은 유다나라의 수도니까, 서울의 광화문, 광화문을 칠려면 서울부터 먼저 치고 한강 건너서 그 다음에 광화문 치고. 이게 우리의 상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을 칠려면 유다나라를 거쳐서, 유다나라의 변경지역들 치고 그 다음에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을 친다. 우리의 상식이거든요. 왜냐하면 유다나라 속에 예루살렘이 있고 예루살렘이 곧 유다나라고 유다나라가 예루살렘이라고 여겼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유다나라와 예루살렘을 분리시킵니다. 이것이 첫 번째 핵심입니다. 유다나라 속에 예루살렘이 있다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청소하고 마당질 한다고 해서 그게 유다나라 끝이냐 하는 문제를 주께서는 따지는 거예요. 유다나라 속에 예루살렘이 있더라도 예루살렘은 유다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 베드로 봅시다. “베드로야 너의 선생님은 어디 있지?” “아, 우리 선생님은 여기 계셔.”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과 열 두 제자가 같이 있는 것처럼 보이죠. 아니거든요. 아닙니다.
열 두 제자는 예수님을 배반해야 될, 역할을 해야 될 하나의 조연들이예요. 제자들이 생각하기를 지금 예수님은 자기들과 한패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아닙니다. “너희들도 아니거든.” 너희들도 아니라 말이죠. 결국 예수님과 열 두 제자와 떨어질 날이 올 거예요. 떼 놓을 날이 올 겁니다. 그 날이. 그 날이 바로 십자가 죽었던 날인데, 그 날에 열 두 제자중에 예수님 지킨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까? 아무도 없죠. 보세요. 예수님하고 열 두 제자하고 다르잖아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주님께서 고난 받는 일은 우리가 있는 한 없습니다.” 할 때에 예수님이 하는 말이 대번에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했습니다. 자기 제자 보고. 수제자 보고. “니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붙잡고 있다고 예수님과 한패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한패 아닙니다. 그것을 제가 설명을 할 때 같은 일층에 놓고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이층에 그리고 제자들을 일층에 그리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 머리에는 이층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과 함께 있다고 이렇게 오해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보디가드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 땡기려고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무편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밖에 없지, 아버지 이외에는 예수님 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예수님이 원치 않아요.
상당히 도발적인 발언인데, 예수님이 예수님 믿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자들에게 원했던 것은 내가 왜 예수를 믿고자 해도 못 믿는 존재인가를, 그것을 확신하고 있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의 이어짐은 없네? 없습니다. 그러면 이어짐이 없다면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거의 몫은 주님의 몫이지. 그건 제자들 몫이 아니고, 우리의 숙제가 아니예요. 우리의 숙제가 아니다 말이죠. 우리가 할 일이 아니예요. 우리의 할 일이 아니라고 하니 마침 그 생각이 나네요.
제 아내가 어머니한테 “제가 지금 다리가 아파서, 요새 갑자기 다리가 아파서 돌보기 힘듭니다.” 어머니는 그것을, 어머니는 모든 것을 경유할 때, 둘째가 이야기하든 셋째가 이야기하든 관계없이 모든 것을 첫째를 경유해서 해석을 하거든요. 그래서 둘째 며느리가 아프다는 것을 첫째 며느리가 아프다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아이구 내가 서울 가야 돼. 첫째 며느리가 아프대.” “아닌데요? 분명히 제가 듣기에는 둘째 며느리가 아프다던데요?” “야야 첫째 며느리가 아프대. 그래서 내가 돈 못 버니까 돈 벌어 주러 가야 돼.” 그래서 뭘로 돈 버실 건데요? 하니 옷장사하면 된대요. 원아동복에서, 아직도 원아동복이예요. 원아동복에서 옷을 떼 가지고 그것을 팔면 된다는 거예요.
85세 연세 드신 분이 옷을 떼 가지고 팔 때에 어디서 팝니까? 가게 하나 없는데. 그러니까 어머니의 모든 몸에는 형님을 기억해요. 맏이를 기억해요. 그리고 뭔가 둘째, 셋째는 없는, 지금도 그 연세에 돈 벌어서 첫째를 해주겠다는 심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육십이 넘은, 환갑이 넘은 큰 아들을 연로한 어머니가 숙제를 해야 됩니까? 왜 그것을 도와줘야 합니까? 지금 우리는 같은 일층에 있기 때문에 내가 안 도와 주면 안 된다 생각을 하는데, 이층에서 도와준다는 생각을 감히 못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줘야 예수님이 기뻐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재주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런 권한도 없어요. 우리는 예수를 못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놀라운 능력이 나올 때 그게 예수 믿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렵게 할 것 없이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유다나라와 예루살렘하고 자꾸 오해하기를 예루살렘은 유다나라가 관리한다고 보는 겁니다. 주님께서 유다나라하고 예루살렘을 떼 내어 버려요.
떼 내어 버리고 예루살렘을 공중으로 날려 보내요. 우주로 날려 보내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불타도 괜찮은 거예요.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생각하기를 “아이구 세상에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하는 유일한 장소 예루살렘이 불 타버렸으니까 우리는 끝났다.” “주님께서 “처음부터, 원래 끝났어. 원래.” 유다나라는 원래 없는 나라예요. 예루살렘에서 새로 만들면 되는 거예요. 신약에 있는 교회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새 예루살렘”
그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예루살렘을 안 만들어 내어도 예수님께서 만들어 주겠다는 그 약속을 믿어라 그 말입니다. 그 약속을 믿어라. 주님을 그만한 권한이 있음을 니가 믿으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믿지를 못합니다. 왜? 자기 자신의 몸이, 구원이 걱정이 되어 놓으니까 어쨌든 간에, 유사 예루살렘. 유사 성전을 뭐라도 눈에 띄게 만들어야 돼요. 제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서울의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뜨면 스텝 250명이 같이 뜬다는 거예요. 250명. 25명이 아닙니다. 저 지방 갈 때 혼자 가요. 250명이 안 따라 다닙니다. 250명이 온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한 호텔 하나를 다 잡아서 3박4일 동안 숙식을 다 제공한다는 거예요. 조용기 목사 초청하는데. 그만한 비용을 내어도 헌금이 남는 장사가 돼요. 이게 한 집단이 되어서 움직이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교회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철두철미하게, 유다나라가 실패한 그 실패를, 우리 몸도 같은 몸이니까 여전히 실패하고 있어요. 교회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 제가 매일, 자주 상담하는 것이 뭐냐 하면 “어느 교회 가야 합니까?” “여기는 부천인데 어는 교회 가야 합니까?” “여기는 인천인데 어디 복음 전하는 교회 없습니까?” 본인이 교회이면서도 왜 부천에 교회, 인천에 교회 없습니까? 서울 구파발인데 구파발에 교회 없습니까? 박 윤진 성도님 모이는 곳은 롯데리아예요. 10명이나 모인다는데 거기 지금 롯데리아거든요. 롯데리아가 교회입니까? 모이게 하시면, 두 세 사람도 주님에 의해서 모이게 하시면 그 순간 만큼은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 순간 만큼은.
교회가 있게 되면 문제가 그 교회를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 구원됐느냐 안 됐느냐 하는 것을 측정하는 오해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있음이 구원에 방해가 되고 훼방이 돼버려요. 자기 집에 혼자 있으면서 오늘도 주께서 혼자 있게 하셨다고 생각하면 되거든요. 제가 오전에 설교 했잖아요? 내가 법을 지키냐 안 지키느냐 선택권 자체가 나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그것은 율법의 완성 안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법을 지킬까? 아이구 내가 어겼으니까. 어겨도 구원받아요. 어겨도. 어겨도 구원받고. 지켜도 구원 못 받아요.
완성이라는, 최종 상태가 주어지게 되면 지금 과정에 있었던 것이 어떻게 해도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고요. 완성이 와서 덮쳐버리면 이미 완성된 것으로 간주해서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 예수 안에서 의인된다는 것을 시답지않게 여기지 마세요. 이게 진짜입니다. 진짜 예수 안에서 의인 되어 버렸어요. 참말이여? 이게 참말이거든요. 예수님이 아무리 이 땅에 오셔도 예수 안에서 의인됨이 안 믿어지면 그것은 과거 사실이 되어 버려요. 하나님은 과거의 사실을 현재로 반복을, 스프링처럼 계속하시는 그 능력이 구약에서는 성전이고 신약에서는 성령 안이 되는 겁니다.
그 때는 지정 장소에서 소통하지만 지금은 계속해서 예수 안에서 의인되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깨닫게 하고 반복하는 가운데서 그 자체가 하나의, 하나밖에 없는 성전, 또 나만 성전 아닙니다. 그 성전에서 계속 반복이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요, 교회가 없었습니다. 자기 교회가 없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를 생전 처음 듣는다고 듣지 마세요. 성경 자체에 나오죠? 사도 바울은 교회가 없었어요. 떠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떠난 교회는 교회가 아니었어요. 희한해요. 사도 바울이 함께 있으면 함께 있는 그거만 교회가 돼요. 나중에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를 읽는 그 동네가 교회가 돼요. 왜냐하면 편지만 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따라 가서 편지를 읽는 것을 사도 바울의 직접 음성을 듣는 것으로 간주해서 그 속에서 교회를 만들었죠. 그런데 교회라고 여기면 교회가 또 아니예요. 왜냐하면 말씀 생각 보다도 교회 있음이 하나의 우상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유다나라와 예루살렘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제 세상 사람이 유다나라 조지고 예루살렘 부수면 여호와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충분히 다해라 그 이야기예요. 너희들이 유다나라 망하거든 그것도 내 뜻이니까 망해버려라. 망해도 안 망하는 것이 뭐냐 하면 진짜 숨어 있는 예루살렘의 취지였고 의미였다는 겁니다. 마음껏 예수님에 대해서 욕하게 하세요. 마음껏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하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욕해도 마지막 모든 것이 죽게 되고 나면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 것이 믿어진다면 그 사람이 바로 교회고,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예요.
왜 자꾸 힘 자랑 합니까? 너희 교회 몇 명이야? 우리 교회 몇 명이야? 왜 되도 않는 힘 자랑왜 합니까? 구약 때 끝내 버렸어요. 구약 때는 특정 지정해서 나라 있으면 그게 성전 지킨 줄 알지만 신약은 내 몸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지켜 주십니다. 자기 몸도 지키지 못 하는데 힘 자랑 할 이유가 없잖아요? 여러분들이 어디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지금 나로 인하여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나는 지금 의인으로서 농사도 짓고, 의인으로서 지금 가정주부 노릇도 하고, 의인으로서 애들 햄버거도 하나 만들어 주고, 항상 의인으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의인으로서 건강하고 의인으로서 치매 걸리고. 이 모든 것은 내가 내 몸을 관리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유다나라 공격하고 예루살렘 공격 할 때에, 낙담하고 절망 했습니다. 끝났어. 끝났어. 하나님 끝났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다나라 분리해서 유다나라가 망하면서 예루살렘의 진가는 위로 올라가 버립니다. 자기들은 꿈이라고 여겼는데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서 위로 올라 갔어요. 위로 올라가고 예루살렘 불 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은 예루살렘 없다고 낙담했을 때, 그 예루살렘에서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사흘 만에 부활 했거든요. 흔히 다음 주일을 부활 주일이라고 하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요. 다시 살아나오므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죽인 것은 진짜 너희들이 생각한 허깨비적인 영웅 적을 죽인 거예요. 그들이 가상 적이 뭔지도 모르고 가상 적을 죽인 거예요. 그런 것을 향하여 다시 찾아 오시는 겁니다.
주께서는 상처를 입었는데, 그 상처의 의미는 다시 상처를 반복해야 비로서 그 상처의 의미가 나타나요. 상처 없이 가지 말고. 그래서 아까 찬송가 367장에 보면 “주도 곤욕 당했으니 나도 곤욕 당하리” 이 말이 뭐냐 하면 주님께서 내 대신 돌아 가셨다는 것을 반복하게 되면 우리는 나 때문에 돌아 가셨다는 것을 반복하는 가운데 주님에 의해서 행한 것도 없이 의인 되었음을, 천국 백성임을 반복적으로 은혜 받는 그런 혜택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겁니다. 괜히 큰 아들 돈 벌어 주는 숙제를 연로하신 분이 할 필요가 없고. 내 숙제를 내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만 아시면 됩니다. 무슨 짓거리를 하든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이것으로 내가 의인 되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주님의 이미 다 이루신 십자가 의해서 구원되었다는 것을 느끼면 그것이 늘 반복되어서 그 사람은 신약에 새롭게 등장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천국 백성,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 본인들도 예루살렘 멸망당했다고 낙담했습니다. 하지만 그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되고 다시 일어나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다시 생겨질 때에, 그 모든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다 조성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 들여서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으로서 행한 것도 없이 의인 되어 버린 행복과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