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30 값
2014년 3월 2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11-14
(11:11)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1: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하나님 자신을 이 지상에서 값을 치른다면 얼마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밝히십니다. ‘내 값은 은 30개’라고 말입니다. 이 은 30개 값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요? 쉬운 그림으로 설명하지만 이러합니다. 인간들은 1층에 살고 있다고 칩시다. 그리고 2층에는 하나님만이 사신다고 칩시다.
2층에 계신 하나님께서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섞여버리면 인간들은 이 낯선 분의 합류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이 이유는 아랫 층에서 윗층에 사신다고 여긴 그 하나님의 모양새를 천장에다 마주 그려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머리로 상상한 그 그림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우길 참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당일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랫 층 인간들은 자기네들의 역사가 참으로 무궁하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저 ‘당일’에 해당됩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을 뿐입니다.(베드로후서 3:8) 이 말씀은 곧 이 지상에 증장했다고 사라진 모든 개개인은 모두 하나님의 일하심에 필요했던 일꾼들이다 는 말입니다.
각 개인의 시간의식 같은 것을 하나님의 시간관에 통합될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관된 요점을 구성하는데 집결될 움직임을 보여주게 됩니다. 은 30개가 의미있게 출몰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진입하시면서 구성될 하나님의 자리와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은 30량이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21:22에 의하면 소와 노예의 충돌의 현장입니다.
소는 인간에 의해서 사물로 다루어지고 노예도 또한 그러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참으로 신처럼 행세하는 인간 존재는 소라는 동물도 아니요 노예라는 가재도구도 아닙니다. 오로지 인간들 뿐입니다. 인간보다 하위급에 속했다는 말은 그들에게 손상이 일어났을 때 돈이라는 사물로 계산하면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서 성립되는 규칙입니다. 바로 이 규칙으로 인해 생겨난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자기 자리로 삼아서 투입하시려는 겁니다. 사물과 사물의 충돌은 곧 사물이 품고 있는 내부적 본질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노예를 받은 소는 돌에 맞아 죽고 그 미친 소에 받혀 죽은 노예 은 30개로 충분합니다.
이 30 세겔의 가치는, 오늘 (2014년 3월 2일 자)의 가격으로 따지면 이러합니다. 은 1돈이 3443원이나 단위 g의 값을 내기 위해 3443을 3.75로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1 세겔이 11.424g이나 11.424를 곱하겠습니다. 그리고 총 값이 은 30세겔이나 30을 곱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금액이 314,663원입니다. 약 30만원입니다.
이것은 노예의 값이요 곧 하나님께서 지상에 투입될 때, 이 인간 세상에서 받아야 될 값이 됩니다. 이제 이 은 30개가 이 율법적 값어치를 지니고 언약적 환경을 만들어서 인류 역사 안을 돌파해가는데 그 길을 추적하게 되면 진정 누가 여호와 하나님 당사지인지 밝혀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은 30개가 새로운 사건 속에서 정립이 됩니다. 그 사건은 다름아닌 ‘토기장이’ 땅과 만납니다. 예레미야 19:1-3에 보면, 이 토기장이의 밭 지명이 나옵니다. 곧 ‘힌놈의 골짜기’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힌놈의 골짜기에 우리는 주목해봐야 합니다. 열왕기하 23:10에 보면,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요시야 왕 때에 전임 왕 므낫세 왕이 저지른 우상을 다 훼파해서 재로 만든 지역이 바로 힌놈의 골짜기가 됩니다.
바로 이 장소는 땅과 하늘이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이 지상에서 사람 취급 받지 못하면서 움직이는 두 물체인 소와 노예의 충돌의 현장에서 ‘은 30개’라는 언약적 의미가 발생되듯이, 이 은 30개는 이제 우상과 하나님과의 충돌 현상에서도 개입되어 발생됩니다. 이는 곧 범죄의 현장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세상 행로는 사람들이 이미 익히 아는 그런 신성함이 서려있는 거룩한 공간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거룩을 빙자한 우상숭배로 인해서 배척받는 그 현장이 됩니다. 히브리서 13:12-14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찾는 상상된 거짓 하나님으로 인하여 배척받는 그런 하나님 상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면 찾을수록 인간은 더욱더 하나님은 미움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인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은 그냥 물질 덩어리일 뿐입니다.
이 물질 덩어리가 사람 행세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무진 괴롭히는 짓들이 뿜어져 나옵니다. 마태복음 27:3-8에 보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제사장이 ‘피값’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충돌의 피값으로 등장된 것이 곧 은 30개의 값입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들은 더 이상 ‘사람이다’고 우길 수없는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값을 규정하기 위해 정하신 자리가 곧 은 30개가 나올 자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기도합시다. 28강 슥11장 11-14(은 30량)1403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1장 11절부터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3페이지입니다.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이 본문 말씀에 갑자기 돈 삼십이 여기에, 삼십 세겔, 삼십 개가 동원되고 그걸 토기장이라는 어떤 직업이 등장하게 되고 또 그것을 하나님의 값으로 친다는 그런 내용이 나올 때 이 본문을 우리가 무슨 뜻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상당히 곤란한데,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보다 더 곤란한 문제는 11절에 나옵니다. “당일에 곧 폐하매” 여기 당일이라는 이 단어가 시간 같으면 스물 네시간을 이야기 하잖아요. 그런데 스물 네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왜그리 길게 느껴지게 되는가. “ 당일에” 라고 했고 그 당일에 이런 일들이 생겨난다 이 말이죠. 당일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서 은 삼십개로 팔리게 되고 그 팔려진 돈을 추적해 보니까 그 돈은 토기장이에게 던진 바 되고. 이런 일련의 사태가 당일에 일어난다고 했을 때에, 도대체 이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스물 네시간이라는 당일과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을 때의 시간의 개념이 확 달라지는 거예요.
어떻게 달라지느냐고 물으신다면 일층과 이층으로 구분해서 설명을 하면 쉽습니다. 아래층에는 인간들이 논다고 치면 이층에는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계시는 이층의 시간은 아래층하고 다른 거예요. 이층은 고요하겠지요. 아래층은 인간들이 분주합니다. 그런데 아래층에 있는 인간들의 시간을 노끈으로 꽁꽁 묶어 버리면, 스카치테이프로 꽁꽁 묶어버리면, 묶어서 그것을 들게 되면 그게 이층에 올라가면 인간의 긴긴 역사가 당일에 이루어져요. 딱 하루가 되는 거예요. 천년이 하루가 되는 겁니다.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같이.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하루가 천년이 될 일이 없습니다. 일층에서는.
그런데 이층에서는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돼요. 이 말은 곧 이층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취지가 아래층에 내려오게 되면 아래층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를 못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 말은 이해가 안되는거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하고는 안 맞아요. 맞지를 않아요. 맞지는 않은데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것은, 이것은 바로 충돌을 야기시키는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은 삼십개라는 것이 이게 출애굽기 21장 32절에 보면 충돌로 야기된 것입니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소와 인간이 충돌 했습니다. 소가 음주운전 했든지 아니면 인간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충돌했다는 말은 일층과 이층이 마주쳤다는, 충돌했다는 것입니다. 마주쳤다는 것은 파괴, 파멸, 죽음 또는 상해, 상처 이런 것들이 발생이 되죠. 발생이 되는데, 발생이 되면 소 임자가, 어떤 주인의 종을 죽게 했으니까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준다는 이 말은 종의 값어치는 기껏 해봐야 은 삼십. 하여튼 은 삼십 세겔. 이것은 그냥 노예 값이 되는 거예요. 노예 값에 해당되는 값어치다. 이게 정상적인, 일반 시민들의 값이 아니고 노예에 해당되는 값을 이렇게 은 삼십 개로 정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아래층에서 충돌이 일어났는데, 교통사고가 났는데 삼십이 어디서 발생되느냐 하면 소하고 소도 짐승이에요. 인간이긴 인간인데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동물 비슷한 취급받는. 옛날 노예라는 것은 집에 있는 가구, 가재도구 밖에는 안 되었거든요. 재산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소라는 것도 재산. 노예도 재산. 재산과 재산이 부딪혀서 뭔가 크래쉬(crash), 부수어 졌다면 그 부숴진 값에서 돌출된 값이 은 삼십. 하나님께서는 그 은 삼십에 주목하고 은 삼십이라는 사건이 유발된 현장에다가 여호와 자신의 몸을 거기에 실어 버립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라는 것이, 사람들은 말씀이라는 것은 주게 되면 하나님은 허연수염 난 인자하신 하나님, 산타클로할아버지 같이 생각을 해가지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상상을 해요. 칸트라는 철학자는 인간의 이성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상상력이 있어서 그 상상력이 인간의 종교를 만들어 낸다고 했습니다. 이걸 아주 어렵게 이야기 하면 유한이라는 것은 그 안에서 초월적 철학을 가능케 한다 이런 뭐 유식한 말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아무리 종교에서 초월적이고 세상이 떠들썩한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상상력의 일부다 이 말입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런 모든 이야기가 인간이 자기가 유한함을 티내는, 그냥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천국과 지옥은 이건 모르니까 기껏 우리끼리 상상력을 해보자. 지옥은 아마 이렇게 고생스러울 것이고 천국은 이렇게 복지설비가 잘 되어 있을 것이다 라고 기껏 상상을 하는데 상상한 것을 다시 알라딘 램프에다가 집어 넣어 보자. 그러면 알라딘 램프가 뭐냐 인간이라는 거죠. 인간이라는 그러한 것을 투영시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 되고 지옥이 되고 뭐 하늘나라가 되고 그런 겁니다. SF 영화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SF 영화에 보면 신기한 금속을 사막에 딱 두니까 신기한 금속에서 뭔가 삐리링 하고 음악 소리가 들리고 뭔가 파란빛이 나면서 거기에 담겨있는 정보가 이미지화 되어서 거기에서 불과 약 2미터 지상에 딱 들어나는 거예요. 마치 알라딘 램프에서 램프를 문지르니까 아주 목소리 굵은, 바리톤 베이스톤의 거인이 등장해 가지고 “주인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마치 부흥사 음성처럼 “할렐루야 뭘 도와 드릴까요? 이미지가 파생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갖고 있는 소. 그리고 인간들이 밥 먹여서 일 시키는 노예. 그 두 사물체. 물체죠. 인간이 아니고 물체. 그 두 물체의 부딪침의 계산은 같은 사물인 돈으로 계산하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인간 값은 결국은 돈으로 해결되는 값 이예요. 이 세상에 인간들에게 다 쓰이는 물체. 이 세상의 인간은 노예나 소는 다 인간 밑에 있고 이 세상의 신의 역할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 값 말고 같은 가재도구의 충돌, 소와 그리고 노예의 충돌은 이건 사람의 목숨 값이 아니고 그냥 돈으로 해결하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신의 존재고 나머지기는 다 인간이 다루는 물체 수준이니까. 그 낮은 자리를 여호와께서는 자기 자리로 삼으시고 치고 들어오신 겁니다. 그 자리에다가. 스스로 사물이 된 거예요. 스스로 물체가 된 거예요. 나 시시한 사물체야. 인간보다도 더 낮은 자리, 인간들이 신으로 행세한다면 그런 분위기속이라면 차라리 너희들보다 더 못난 존재될게. 그렇게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예요.
그래서 오늘 스가랴 본문에서 내 값은 은 삼십냥이다. 아예 하나님께서 명찰을 붙였어요. “나는 삼십 냥입니다.” 지나가는 노예가 말하기를 “에이 그것은 노예 값인데.” “그렇다. 니가 사람들 범주에 들지 못하고 사람 취급 못 받지?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그런 취급 받지? 나 너하고 같은 레벨 될게.” 라고 찾아오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예요. 스스로 자학하듯이, 스스로 채찍 때리듯이. 그렇게 낮추시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그냥 인간들이 잠시 살아 있을 때, 인간의 이성 속에서 피어나는 알라딘 램프같은 자기 폐쇄적인 하나의 신화, 하나의 소설, 하나의 드라마. 죽으면 동시에 다 공중분해될 하나의 허망한 그러한 상상의 세계가 종교라는 겁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다 그런 거예요.
“당신이 그렇다는 증거가 있나? 그게 허망하고 인간이 만든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거대 봐라.” 증거대보라면 저는 은 삼십냥이죠. 은 삼십냥. 어느 인간이 자기 자신을 팔면서 “저요, 저 삼십 만원 밖에 안됩니다. 저 죽고 난 뒤에 삼십 만원만 갚아 주면 돼요.” 이렇게 나설 인간 없습니다. 어느 목사가 교회 퇴직하면서 퇴직금 삼십 만원 받고 나갈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내가 와서 교인 몇 명이 늘었고 내가 와서 헌금을 얼마 했는데 내가 십 년 동안 있으면서 교인이 30명에서 300명 되었으니까 개당 십 만원, 십일조 할거니까 십일조 미리 떼고 들어가겠습니다. 떼고 들어가서 미리 계산하고 후임자는 적어도 몇 천 만원 받고 들어오고 그 돈 받고 선교사로 튀면 되는 겁니다. 그 돈 가지고 선교사로 튀면 거기서 귀족생활 할 수 있을테니까. 필리핀이라든지 태국이라든지 못 사는 나라에 가면 귀족생활 할 수 있을테니까. 식모, 한 여덟명 거느릴 수 있을테니까.
인간들의 계급이라는 것, 이미 형성되어 있어요. 그 계급은 힘의 우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힘의 우열을 통해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힘밖엔 몰라요. 마귀가 그렇게 시켰습니다. 심지어 한 가정에서도 그래요. 가정에 딱 들어가면은 어린애가 태어나면서 항상 두리번거리죠. 형제가 둘이 있고, 아빠 엄마 있고, 개 한 마리 키운다면, 아버지 입장에서 서열은 제 5위예요. 엄마가 제일 세고 그 다음에 큰 딸 두번째고 그 다음 작은 딸이 세번째고 네번째가 강아지고 다섯번째가 아버지. 어릴 때부터 어린애들은 사랑이라는 것은 몰라요. 어느 쪽이 힘센 쪽인지, 그 힘센 쪽에 붙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챙기면, 챙기는 쪽으로 애는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애들한테 사랑을 요구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그런 인간에 의해서 노예로 삼아졌다는 것은, 그 노예 자리에 주님이 들어오셨다는 것은 그 위에 위에 있는 모든 계급인 인간은 사물이고 인간은 물체에 불과하다는 인간이 주께서 만든 그 인간 아니예요. 제가 낮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정신이 분주할때는 신이 없어서 행복하다고. 인간이 신이 없으면 그 자체로부터 딱딱한 물건이 되버립니다. 인생이 뭐며, 인생의 의미가 뭐며, 죽어서 어디가는지 살아서..그런데 관심없고 그냥 즐기는대로 사니까 그게 딱딱한 물건덩어리예요. 기분 나쁘면 술 먹고. 성질나면 패고. 원하는 것 있으면 돈 벌어 쓰는 재미로 살면 되고. 온 전체가 부딪치면 돈으로 해결하면 되고. 옛날에는 자본주의가 있기 전에는 뭐냐하면 남자 여자 있었고, 어린애 어른 서열이 있었어요. 마르크스가 등장해서 그것을 확 밀어 버렸습니다. 남자 여자 구별도 없고, 어린애 어른 구별도 없고. 오직 가진자와 못 가진자로서 새롭게 모든 것이 재조정되는 시대에 도래한 거예요.
요새는 재벌집의 애도 주식이 우리가 평생 벌어도 못 벌만큼 많잖아요? 어린애도. 그 애가 애가 아니라 그 애 집안의 돈이 얼마고 그 애가 상속자냐 그게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게 김민호냐, 하여튼 상속자냐 하는게 더 중요한 문제예요. 자식의 관심사는 뭐냐하면 아빠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상속할 것인가 이미 사춘기 접어 들면서 계산하는 머리가 돌아가는데 형 얼마 빼고 동생 얼마 빼고 나는 얼마 남고. 어떻게 하면 전부 다 이거는 힘의 논리에서 되는 겁니다. 힘의 논리, 돈의 논리니까 주께서도 차라리, “그래 하나님인 나도 돈 값으로 쳐서 올게.” 하는 것이 삼십 냥이예요. 이제 말씀은 그 삼십 냥이 어디로 가는가 추적해야할 필요가 있어요. 삼십냥이 어디로 가는가 보니까 그게 열왕기하 23장 10절에 보니 “힌놈의 골짜기” 뭐 이런 놈이 있는게 아니라 힌놈의 골짜기라는 것이 있어요. 요시야 왕 때 이야기인데 힌놈의 골짜기가 뭐냐하면 토기장이가 있는 곳이에요.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데 요시야가 힌놈의 골짜기에 주목하고 거기서 우상들을 태워버렸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앞의 왕이 므낫세 왕인데 그 사람이 우상을, 힌놈의 골짜기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힌놈의 골짜기. 은 삼십냥을 던져야 될. 옛날 토기장이들이 토기를 만들 때 힌놈의 골짜기 토기가 그렇게 찰지고 좋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힌놈의 골짜기에서 토기가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거기서 토기장이들이 하나의 집합을 이루었는데 그 장소인 힌놈의 골짜기가 뭐냐하면 요시야 때 우상을 태워서 그 재가 섞여 있는 양질의 흙이 많은 장소예요. 지금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사물이 되었습니다. 이층에서 아래층으로 와서. 그 삼십냥 값을 치뤘습니다. 이 삼십냥이 어디로 가는지 추적합니다. 시스템을 만들든지 카메라를 달든지 해서 따라가 보자 이 말입니다. 따라가 보니까 그 삼십냥이 유발될, 삼십냥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주변에 역할을 할 인간들이 많이 모집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 모집된 인간들이 해야 될 것이 뭐냐하면 우상을 섬기고 그 우상을 불 태워 버리는 그 과정을 녹녹치 않은 과정,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 그러한 자리에서 마지막 은 삼십냥이 도달하고, 도착되더라 이 말이죠.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어디를 구경했는가? 인사동. 떡볶이. 서울의 어디를 관광 하겠어요? 주님의 하시는 성지 순례는 어디이겠습니까?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거기에 주님이 하신 성지 순례가 나옵니다. 11절에 “예수는 그 육체를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불사르라고 이야기를 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죽게 하고 어디로 갔느냐 하면 자신을 미리 보여 주었던, 제물들이 불살라져 재가 있는 곳으로 주님의 육신이 따라 가는 겁니다. 따라 가서 자기 피로써 백성들을 거룩하게 할려고 성문 밖으로 고난을 받으셨고 그런즉 우리도 그 능력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 우리는 여기서 영원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곳을 찿나니 그 장소는 바로 주께서 가셨던 그 성지 순례 코스를 따라 가는 거라 이 말이죠.
마태복음 27장 7절에서 토기장이 나오고 그 유명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누구냐 하면 가룟 유다예요. 자, 가룟 유다한테 공로패를 드려야 하느냐? 훈장을 달아 드릴까요? 가룟 유다한테.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잘 팔아 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예수님을 팔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은 제자에 의해서 팔리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 집합체는 주님과 구원과 상관없는 단체가 될건데, 고맙게도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명이 예수를 팔아 주었기에 예수님은 그 죄를 싣고 그 죄가 나왔던 그 출처를 향하여 용서를 뒤집어 씌울 수 있는 근거를 가룟 유다님이 팔아 주셨기 때문에 그게 가능케 되었거든요.
설교 다시 해봅시다. 자꾸 깊숙이 땅굴 파서 들어가니까 길을 잃어버렸는데,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날 만들었으니까 하나님을 섬겨서 우리가 구원 받자. 이것은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상상력에서 나온 이야기다 이 말이죠. 우리의 상상속에서 다 나온건데, 그것은 실제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행적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 말이죠. 내가 구원받겠다는 이 말은 하나님 저 사람입니다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예요. 하나님 저 보시기에 사람 맞거든요. 소나 개나 다르죠? 그러니까 하나님 저 구원해 주세요 할 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인간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있어야 구원하지. 인간이 없는데 뭘. 아이구 불쌍한 인간아 니가 지옥같은 고생스러운 곳에서 사는구나 내가 들어가서 건져줄게. 이렇게 해야 말이 되는데 이 더러운 세상에 인간이 한 통속이 되었는데 누굴 건져요? 누굴? 인간이 존재하므로 죄가 유발되는데 누굴 건진다는 말입니까?
아까 주일학교에서 다윗이야기 하면서 했습니다. 다윗이 자기가 에헴하고 있으니까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당신이 간음자고 당신이 살인자입니다.” 했을 때, 다윗이 “아이구 들켰구나 그동안 용케도 숨겼는데 들켰네”가 아니라 “감사합니다” 라고 한 거예요. 다윗이. 참 이거는 제가 말을 하면서도 너무나 희한한 말을 하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 하여튼 여러분 마음대로 하세요. 다윗이 “감사합니다!!” 주께서 내 죄를 지적질을 해주셨다는 말은 이미 내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표시라고 믿게 된 거예요.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어요? “아이구 세상에 그동안 완전범죄인 줄 알았는데 들켰구나” 이게 아니고 주님께서 내가 꼬깃꼬깃 숨겨 놓았던 죄를 들추어 냈다는 말은, 이미 진짜 내가 어떤 죄를 지었던 간에, 내가 용서된 상태인 것을 차후에 그것을 통보해 주는 작업이, 바로 우리 죄를 끄집어내 주는 작업이라고 본 거예요.
그리고 자기 손에서 죽었던 그 우리야, 우리야 있잖아요? 자기 손에서 죽었던 그 우리야가 꺾어진 뼈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꺾으신 뼈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그게 제물의 꺾어진 뼈, 우리야 장군으로 인하여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지하에서 듣고 있던 우리야 장군은 울화통이 터질 거예요. “지가 나를 죽여 놓고.” 지금 잘했다는 이야기예요? 뭐예요? 지가 우리야를 잡아 놓고 “아이구 니 때문에, 니 안 잡았으면 나 구원 못 받지.” 순전히 이기적인 자기 용서밖에 모르는 파렴치한 인간밖에 더 되겠어요?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하나님 저기 계시고 나 인간이니까 건져낸다는 이런 우리의 신화같은 것은 걷어 치우고 실제로 여호와께서 실제로 이 땅에 와서 어떤 행적을, 어떤 경로를 보여주느냐를 거기에 집중하자는 이 말입니다. 거기에 집중한 거예요.
집중할 때, 집중한 그 앞에 등불들고 가는 것이 뭐냐 그게 인간이 아니고 물체, 은 삼십개라는 물체라는 이 말이죠. 은 삼십개라는 물체를 따라 가보니까 거기서는 우리가 원했던 여호와가, 우리가 기대했던 여호와가 아니고 자꾸만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어디로? 우상숭배 했던 자리로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너희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기껏 믿는 신은 그냥 우상숭배가 끝이예요. 우상숭배 넘어에 참된 신을 밝혀낼 인간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우상숭배 해서 그걸로 폐허가 됐던 토기장이의 그곳으로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는 거예요. 그래서 은 삼십냥을 보자 이 말이죠. 가룟 유다가 팔아먹었는지, 아니면 내가 팔아먹었는지 한 번 보자 이 말이죠. 가룟 유다가 대표해서 팔아먹었는지, 아니면 열두 제자 모두가 합심해서 팔아먹었는지 한 번 보자 이 말입니다. 누가 팔아먹었는지 관계없이 예수님은 이미 은 삼십에 팔렸다 이 말이거든요. 이미 결정난 거예요. 결정난 거에서 새롭게 보게 되면 모든 인간은 다 주님을 팔아먹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은 삼십냥이 갔던 그 도착 지점은 토기장이였습니다. 그 토기장이에서 가룟 유다는 자살합니다. 은 삼십냥 던지고. 그것을 마태복음 27장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6절에 “대제사장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이것이 소 값도 아니고 노예 값도 아니고 이것은 피 값이라 대제사장이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피 값이라. 이것을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으니. 묘지니까 죽음을 의미하죠. 결국은 공동묘지. 그리고 은 삼십개. 이 말은 곧 이층에 계신 하나님께서 몰래 일층에 오셔 가지고 일층에서 낯선 죽음의 현장을 거기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은 삼십개 집어 넣고. 토기장이 동원시키고. 제사장에게 피 값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들고. 거기에 가룟 유다 집어 넣고. 제자는 다 도망쳐 버리고. 홀로 그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이 바로 스가랴에 예언하시면서 그 삼십냥은 나 여호와의 값이라고 우리한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진짜 목자, 지금까지 가짜 목자이고. 진짜 목자가 나타날 때에, 그 날에. 그 세대에. 인간의 모든 역사를 묶어 버리면 한 날이 돼요. 이게 한 날에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모든 역사에 아무리 먼 과거나 아무리 먼 미래라도 그 모든 것이 같은 방에, 같은 호실에 같이 이루어진 사건들이고. 그 사건의 모든 것의 초점은 바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이런이런 인간들의 모든 작용들이 자기에게 쏠리도록, 이미 준비된 사건과 사태들 속에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스스로 이루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뭐냐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몸 안에서 피어난다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이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이라는 것은, 그냥 인간이 아니고 말씀의 완성이 담겨 있는 그 인간을 예수님이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누가 구원되느냐. 그것은 이미 완성된 말씀이 담기는 성도가, 그 성도에게서 새롭게 피어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모든 말씀은 다 이루었느니라. 다윗이 간음죄를 지었고 죄 하나. 살인죄를 지었고 죄 두 개. 벌써 큰 죄만 해도 두 개입니다. 죄가 두 개이냐. 다윗은 두 개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 죄는 내가 부모로부터 날 때부터 죄중에 태어난 것을 보여 주는 죄인데 그 죄마저 이미 용서받았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죄인으로 몰아 넣는 하나님의 선한 성령의 손길로 본 거예요. 그게 다윗이 구원받은 거예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이 세상적인 시간에 저촉되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의 움직임 이 모든 것에 지지않으려고 하는 이 모습들이 바로 은 삼십냥과 토기장이와 만날 때에 그것마저 이미 용서되었음을. 창세전에 이미 용서해 주기로 작정된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말씀에 하나의 진척 과정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예요. 그것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 비로서 우리에게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생각 말고 주님이 가신 행적을 따라 가보니 모든 말씀의 완성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말씀, 주님의 주님대로 이루어짐을 증거케 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믿게 하셨으니 모든 공로가 주님께 있음을 저희들이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그 누구도 자신을 인간이라고 우길 수 있는 권리가 없음을 십자가 피 값 앞에서 언약적인 관점에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