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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29강-우매한 목자(슥11;15-17)이근호140309

아빠와 함께 2014. 3. 9. 19:27

우매한 목자(스가랴 1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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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3-09 15:40 
우매한 목자

2014년 3월 9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15-17

(11: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지니라

(11:16)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11:17) 화 있을진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이스라엘은 양과 목자의 관계로 구성되고, 하나님께서는 목자에게 이스라엘이 보존될 수 있도록 그 책임을 묻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은 참된 목자를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는 악한 목자만 허락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조치를 내리시는가요?

그것은 이스라엘은 종말로 접어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참된 목자를 주시겠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종말에 들어서기 전에 왜 인간들 속에서 추천받고 인정받는 목자는 참된 목자가 될 수 없는지 그 이유와 근거가 마련되어야 됩니다.

다윗 언약에 의하면, 인간들 속에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가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과연 하나님의 진실한 목자일까요? 인간 다윗의 존재 의의는 단지 사울왕과의 차별을 통해서 다윗의 대단함이 아니라 다윗언약의 대단함을 보이기 위한 계기로 사용되어지는 인물입니다.

사무엘상 26:25에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상대로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번번히 실패로 끝납니다. 사울은 본인도 알고 있습니다. 자기는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 힘으로 버티는 자이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와 관여로 책임받은 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다윗의 길로, 사울은 사울의 길로 가 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은 다윗언약의 개입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이 현상이 신약시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함에 대해서 자기 기여를 늘 고려하게 마련입니다. 즉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게 되기에 거기에 맞는 목자라는 자들도 이 이론을 긍정해주는 식으로 자기 양을 확보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은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거짓 목자의 외침에 마음이 쏠리게 마련입니다. 자기네들 내부의 욕심이 펄펄 살아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반인들의 움직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매한 목자를 허락하시는 겁니다. 양이고 목자고 함께 망해야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시대는 일괄 망함이 없이는 찾아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약시대가 종말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시대는 모든 것이 이미 무너져버린 시대입니다. 마치 오래된 대형 건축물을 없애기 위해 폭약으로 파괴 작업에 나서도록 장치를 해놓았다면 이미 스위치를 눌려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저없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이제 몇 초만 지나면 모든 건물은 흙더미 먼저 속에서 차분히 깔려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몇 초 사이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무너져내림 속에는 목자의 무너짐을 같이 내용으로 포함되게 됩니다. 곧 교회의 무너짐의 일반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 때는, 특별난 목자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구원되지가 않습니다.

오직 목자는 여럿이 아니라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 분만이 제공할 수 있는 성령받은 자들이 곧 이 시대의 목자 역할을 할 성도들입니다. 마태복음 10:19-20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종말 때가 되면, 위대한 인간상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여전히 ‘위대한 인간’을 찾아다닌 점에서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우매한 목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 언약 아래서의 다윗의 입장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비록 다윗이 사울왕과는 구별되지만 자체적으로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점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 평가하는 기준을 다윗에게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이유가 밝혀지지가 않습니다. 혹부리 영감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아랫 동네에 큰 혹을 달고 살아가는 두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중 한 할아버지가 산에 갔다가 도깨비 집단을 만나게 됩니다.

할아버지는 도깨비가 춤추는 것에 맞추어 자신도 같이 춤추게 됩니다. 그랬더니 도깨비들이 오해를 해서 “저런 흥은 분명 저 혹 속에 들어있다‘고 여겨서 할아버지의 혹을 떼서 보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혹부리 할아버지는 이제 혹이 없이 마을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혹보리 할아버지가 자신도 혹을 떼고 싶어 숲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혹 속에 어떤 힘도 없음을 발견한 도깨비들이 화가 나서 뒤에 온 혹부리 할아버지에다 전의 혹을 도리 덧붙이고 말았습니다. 혹 떼려 왔다가 도리어 혹을 더 하나 붙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상호 다른 결과를 낳았을까요? 그것은 타이밍입니다. 곧 때가 적절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마지막 때, 즉 종말 때는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인간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해서 내가 잘 되는 그런 경우가 발생하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다윗이 다윗 언약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는 다윗의 언약의 껍데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기 인생에 다윗 언약이 발생되었을 뿐입니다.

언약 안에서 이와 동일한 일이 종말 때 이루어집니다. 요한일서 2:27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훌륭한 목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1:17-18에 보면,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베드로 마저 본인이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됩니다. 이는 모든 양이 결코 사도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이 모두 이와같습니다. 항상 주님만이 유일한 목자임을 압니다. 자기 구미에 맞는 목자를 찾지 마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자기 인생을 꾸려나가는 그 모든 가능성이 막히게 하옵시고 그저 이 몸을 주님께 쓰시도록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9강 슥11장15-17(우매한 목자)1403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1장 15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3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지니라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진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성경에서 좀 긍정적인 것, 격려하는 말씀이 나오면 좋겠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못된 목자를 일부러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어떤 목자인지 너희들이 알아봐야 되고 그 목자에 마지막은 아주 비참하게, 처참하게 하나님께서 망가뜨리겠다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목자를 일으키겠다는 이유는 이 땅에는 목자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목자가 없는데, 어떻게 양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냐 미리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항상 오후 시간이 되면 제가 긴장이 돼요. 왜냐하면 전부다 피곤해 있어서 과정을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과정 따라가다 5분도 안되어 졸고 계시니까 마지막 20분에 도달을 못해요. 그래서 아예 결론부터 딱 내리고 과정을 풀어서, 조시더라도 결론은 알았다는 자기 변명 정도는 가져 갈 수 있도록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목자입니다. 목자는 따로 없고 모든 성도가 다 목자예요. 괜히 목자 욕하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들이 이미 목자입니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중국가서도 마찬가지고 정신이 좀 든다 싶으면 바짝 이야기 해버리고 바짝 이야기 해놓고 피곤해 하시면 슬슬 딴 이야기 해요.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하나님은 성도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너 원어 연구 왜 안해? 너 신학공부 왜 안해?” 이것을 묻지를 않습니다. 바르게 살아야지?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열심히 살아야지? 묻지를 않습니다. “그대로 있어. 내가 너 속에 들어 갈거야.” 네 속에 내가 들어 갈거야. 운전대를 내가 잡을 거야. 키를 내가 잡을 거야. 너는 조수석으로 빠져. 뒤에가서 안전벨트나 잘 매고 있어. 내가 네 인생 갈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자기 갈 바를 알지 못해요. 자기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의 도착은 이미 결정 났습니다. 천국입니다. 이상하게 천국 가는 것을 본인은 모르겠는데, 그 베드로 속에 함께 계시는 분이, 성령께서 베드로를 천국으로 이끌어 내십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천국갈 사람은 동일하게 똑같은 고백이 나오게끔 내가 해주겠다는 겁니다. 나는 평생 내 갈 바를 알지 못했다. 우왕좌왕 했으며, 늘 다가오는 일처리도 제대로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주어진 사태에 대해서 안절부절이고 그냥 걱정하고, 고민만 해댔지 어떻게 깔끔하게 일처리 해서 처리한 대가로 천국 가고 하는 것은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내일, 모레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죽어도 낙원에 갈 수 있도록 단단히 조치를 다 해요. 경상도 말로 단디라고 하는데 “단디”, 단단하게 조치를 다 해놓습니다. 내일까지 안 살아도 오늘 죽어도 천국, 바로 위로 가도록 옆으로 가서 위로 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위로 가도록 조치를 다 해놓으셨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발생되고, 아하 내가 세상을 향하여 목자로서 활용 당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마태복음 10장 20절을 말씀드린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 보면 지하 교회가 있다는 거예요. 지하 교회는 김정은한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능력하기 때문에, 자기를 무능력하게 만든 김정은 조직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무능력 할 때는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땅, 남조선에 와 버리면 그때부터 냉면집 해야 될지, 가수해야 될지, 뭘 해서 남조선 인민들과 함께 경쟁해서 밥 먹고 살지. 밥 빌어 먹고 살겠니? 어떻게 해야 될지. 그 다음 부터는 주님을 잊어버릴 거예요. 다 잊어버릴 거예요. 항상 우리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분은 이미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빛과 소금이고 뭐고 목자고 그 역할을 우리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그러한 때, 아무도 사람 믿지 마라. 오직 주님만 믿어야 되지. 십자가 믿어야 되지. 사람 믿다가는 그 사람이 목자인척 다가와서 돈만 빼먹고 간다. 그런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짜 목자들을 자꾸 보내시는 거예요. 가짜 목자를. 혹시나 의지하다가 또 당하고. 저 분은 괜찮겠지 하다가 또 실망스럽고. 자꾸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성령께서는 주님만 목자지 다른 사람은 목자일 수 없다는 것을, 너 속에 성령이 이제는 진심이 되게. 그것을 한 번 해보는 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도 외에는 믿을 사람이 없구나 하는 것을 진심으로 알게 되는 거예요. 

 옛날 어느 단편 소설에 보면, 큰 바위 얼굴이라는 것이 교과서에 나왔어요. 큰 바위 얼굴 너무 인자하게 생겼어요. 인자하게. 전설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큰 바위 얼굴 같은 사람이 오게 되면 그야말로 우리 마을은 행운이 핀다 축복받는다 했는데, 그 수많은 명성있는 사람들이 그 마을을 다녀갔고 뭐 시의원 구의원 해봤지만 아무도 없었어요. 어느 날, 붉은 노을이 지는데 그것을 쳐다보고 있던, 세월이 수십년 지났어요. 여전히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던 어떤 소년이 이제는 늙은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에게 붉은 노을이 쫙 비칠 때에, 마을 사람들이 보니 큰 바위 얼굴하고 그것을 기다리던 사람하고 이게 동일 인물이 되니까 당신이 바로 기다리던 사람이다 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꿈이 사람을 낳는다 라는 그런 주제이겠지만. 

어쨌든 예수님께서 목자 언급을 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목자라고 여겼던 그들에게 계속 실망을 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목자를 기다려서 양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기다림의 실력, 기다림의 능력으로서는 구원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너희에게는 어떤 것이 합당하냐면은 거짓목자들이나 너희들에게 합당한, 종교생활에 합당한 조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복음을 알고 난 뒤에 세상 돌아가는 것이 참 짜증스러운 것은 분명히 복음도 모르고 분명히 엉뚱한 소리를 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수천명 사람들이 그 교회에 모여 가지고 신앙생활이랍시고 하는 것을 보면 복음을 아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하죠. 하지만 그 넓은 길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일이 그렇게 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될 것이 뭐냐하면 이 스가랴 11장에 나오는 이 목자들이 어떤 이유 때문에 목자가 될 수 없으며 진짜 목자는 어떤 분이 진짜 목자냐 그 흐름을 이제는 알아야 돼요. 알아야 되는데 여기서부터 조금 복잡하기 때문에 조는 시간이 온 거예요.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기존에 목자가 다 사기꾼이 되면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이 없는 상태가 무슨 상태냐면은 이것이 바로 종말 상태입니다. 이것을 어렵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형태를 심판 하시므로 말미암아 바탕을 드러내도록 일하십니다. 형태, 종교적인 제도, 형식 이 모든 것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형태 자체에 대해 심판을 함으로 말미암아 형태적으로 도저히 목자될 수 없는 분이 목자로 드러나는 그런 방식을 채택하는 겁니다. 

그런 방식을 채택할려면 신약에서 구약으로 넘어가는 그 과정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죠. 그 과정이, 여러분들이 힘들어 하기 전에 한마디 하면 그 과정이 어떻게 됩니까? 라고 여러분들이 저한테 물으신다면 이렇게 됩니다. 원인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원인을 자르면 돼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원인이 없는데서 주어지는 효과, 효과가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의 효과예요. 분명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구원이 된 거예요. 그런데 구원이 되면 사람들은 거꾸로 자꾸 나한테 원인을 만들어 내요. 발굴하고 조작해내요. 이런 구원이 주어진 것은 아마 어느 기도원에 갔기 때문에, 내가 헌금을 했기 때문에, 충성을 했기 때문에, 성경 강의를 잘 들었기 때문에, 자꾸 이렇게 원인을 만들어 내는데 성령께서는 그럴 때마다 원인을 자꾸 삭제해 버립니다. 동일한 원인에서 두 가지 결과가 안 나오도록 하시는 거예요. 절대로 동일한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하십니다. 

원인을 잘라 줄 때, 우리는 고마워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거는 나의 어떤 노력과 애씀과 기도의 덕분으로 저렇게 구원이란 결과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계속해서 되풀이 해서 그것이 감지되어야 합니다. 원인을 자르는 거예요. 그러면 스가랴에서 원인을 자른다는 말은 뭐냐, 이스라엘 전체를 잘라 버립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잘라 버려요. 그러면 이스라엘 전체를 잘라 버리면, 이스라엘이 사라져 버리면 장차 진짜 이스라엘도 없어지지 않겠는가. 이스라엘 뿌리 자체를 잘라 버리면, 이스라엘이 무효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도 없는 상태에서 일하게 되면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구원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사무엘상 26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사울왕이 다윗을 공격하는데, 공격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서서 도와 줍니다. 하도하도 하시니 나중에 사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패배하게 만들고 너는 승리하게 만들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다윗 니는 참 좋겠네. 하나님이 니를 지켜 주고 나는 안 지켜 주고. 그래 니 갈 길 따로 있고 내 갈 길 따로 있다.” 라고 하는 고백. 그 고백을 우리도 같이 들어 주시면 여러분들은 성도에 속했다고 볼 수 있어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반드시 원인이 있고 내가 어떤 원인을 만들고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부응하는 식으로 복을 준다든지 저주를 준다든지 이렇게 하는 그런 결과를 준다는 원인과 결과를 유지하는 사람인 반면에 다윗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자꾸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와줘요. 그게 뭐냐하면 정확히 말해서 다윗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다윗 언약을 도와주는 겁니다. 다윗은 껍데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닮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처럼. 복의 근원, 이번에 중국에서 강의 하면서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껍데기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복의 근원이 있었고 아브라함은 그냥 자리만 제공했을 뿐입니다. 그릇만 제공했을 뿐이죠. 

저희도 마찬가지이고 다윗도 마찬가지예요. 다윗은 그냥 그릇만 제공했을 뿐이지 다윗 언약에 최종 복 주시는 분이 함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혈통은 잘라져도 잘라지는 그 안에 진짜 다윗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유다나라는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멸망 하므로써 다윗 언약이 없어지는 동시에 진짜 다윗의 나라를 일으키실 분이 유다 나라였어요. 유다 나라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아는 신약 성경입니다.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가 오는 거예요. 

 다윗을 목자라고 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그냥 자기 몸만 제공했을 뿐이예요. 다윗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 메시야가 온 것이 아니고 다윗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냥 다윗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되느냐 하는 그 문제는 하나님께서 제거해 버리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진짜 우리의 구원자, 목자를 보내기 위해서 무엇을 제거하는 작업을 그동안 하셨는가를 알면 되죠. 중국에서 강의에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여러분 별이 있어요? 없어요? 별이 있죠. 별이 있습니다. 그러면 물어 봅시다. 별자리는 어디 있습니까? 별한테 별자리 물으면 별이 웃기네 합니다. 별자리는 누가 정하느냐 하면 밑에서 보고 있는 지구상의 인간들이 지맘대로 정한 거죠. 별자리를. 

있는 별에다가 저거는 곰자리고 뭐가 어떻고 황금자리고 자기 맘대로 정한 거예요. 하나님은 별만 남기고 별자리를 제거하는 작업에 나섭니다. 세상을 보는데 자기들끼리 선을 이어요. 선을 잇고 이어서 아마 세상은 이런 자리가 될 것이라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요. 만든 질서를, 거미줄을 다 잘라 버립니다. 이거는 자기 맘대로 자기 욕망대로 설치한 그 자리거든요. 인위적이다. 인위적. 그 모든 인위적인 것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것을 제가 아까 원인을 제거하는 거예요. 남는 것은 원인 없이 왜 저에게 복을 주십니까 라고 고백해야 할 대상자만 남아요. 

사울이 다윗을 공격하면서 다윗도 힘들은 것이 이유 없이 당해요. 그 이유 없음이 바로, 이유는 따로 계시다 원인은 하늘에 따로 계시다는 거예요. 하늘에서 내용을 채우지 지상에서 내가 설치는 설침이 나의 구원의 내용물을 채워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런 것도 모르고 자꾸 목자를 원해요. 목자를 원하는 이유가 목자가 시키는대로 하면 나는 내가 구원받는 원인을 내가 만들어 낼 수 있고 만들어진 것들이 모아지면 나는 구원받는다 뭘 통해서? 저 목자를 통해서. 그러니까 신약시대에도 왜 그리 목자들이 많은지. 

어떤 사람은 좀 선한 목자. 어떤 사람은 많이 선한 목자. 어떤 사람은 희생적인 목자. 어떤 사람은 덜 희생적인 목자. 어떤 사람은 돈 좋아하는 목자. 이렇게 목자를 서로 분리하는데, 이게 별자리입니다. 그게 별자리에요. 착한 목사. 나쁜 목사. 덜 착한 목사. 성실한데 뭐 실력은 없는 목사. 실력은 없으면서 영빨은 있는 목사. 지맘대로 정해요. 그 별자리 전부 다 제거해 버려요. 아무도 없어요. 이 세상에 별자리가 없는 이유는 누가? 바로 너가 큰 바위 얼굴 이예요. 우리가 종말에, 종말을 만드는데 우리가 재료로 우리가 이미 들어가 버렸어요. 

종말이란 무슨 뚯이냐 하면 모든 원인을 제거하는거 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참 이런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어떤 폭파에 의해서 오래된 건물이 무너집니다. 벌써 단추는 눌러졌고 다이나마이트는 터졌고 15층 옛날 아파트가 무너집니다. 무너지면서 한 2초내지 3초내에 완전히 바닥에 큰 먼지를 일으키면서 바닥에 흙만 남죠. 그 사이, 이미 무너졌고 무너지는 그 과정 속에서 나중에 2초 뒤에 보면 건물이 완전히 형체도 없이 사라지겠죠. 처음에 단추를 눌러서 파괴시킨 그 시점이 벌써 종말입니다. 그 과정이 오늘날 눈에 보이는 우리고. 좀 지나면 이 세상 흔적도 없이 사라져요. 그걸, 이미 단추를 눌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세상은 이미 무너지는 정도가 아니고 이미 무너졌어요. 짧은 순간에 이미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믿을 놈 아무도 없다. 왜 다같이 무너지면 되니까. 그 무너지고 있는 과정 속에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하면 무너지고 있더라도 그 사람 속에는 이미 무너졌음. “이미 무너졌음.” 이렇게 확정지을 수 있습니다. 사울은 사울의 길을 가고. 다윗은 다윗의 길을 가고. 성도는 성도의 길을 가고. 성도 아닌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이미 그것은 아주 대범하게, 담대하게 대통령 앞에서도, 그 누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언급을 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이미 종말에 속한 사람이예요. 

요한일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주 안에 거하라는 말은 우리에게 만들어 낼 원인과 결과는 일체 없다는 겁니다. 저의 어머니가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시니까 제 아내가 좀 그렇게 하시지 마세요 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화가 나셔서 그러면 집나가 죽어버릴란다 이렇게 이야기 하세요. 그래서 제 아내가 그런데 밥은 왜이리 많이 해놓셨어요? 하니까 어머니가 그러면 굶어 죽으란 말이냐? 앞뒤가 지금 말이 안 맞아요. 이 말은 뭐냐하면, 원인을 만들어요. 죽더라도 내가 알아서 죽겠다는. 

성도는 원인이 없습니다. 이미 죽었어요. 우리는. 내가 산다 내가 죽는다는 것이 내가 산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너 죽었어 너 죄인이야” 라고 지적하신 그 분이 이미 이야기를 다 끝냈어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그것을 모르시는 것 같아요. 나 죽어버릴란다 해놓고 그럼 왜 밥은 많이 해놓냐고 하니 그럼 굶어 죽으란 말이냐 하니시. 밥 먹고 나가서 죽겠다는 뜻인지. 

혹부리 영감이란 동화가 있습니다. 두 영감이 있는데 한 영감이 도깨비를 만났어요. 도깨비가 춤추고 노니까 영감도 춤추고 놀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노니까 도깨비가 가만히 보니 잘 놀거든요. 옛날 놀던 가락이 있었던 모양이라. 나이트에서 놀았던지. 그런데 도깨비가 보니까 혹이 있어요. 아 저 혹 때문데 저렇게 잘 노는가 싶어서 도깨비가 혹을 떼어 갔어요. 그 이야기를 혹 달린 다른 영감한테 하니까 그 영감이 집에서 춤을 막 연습한 거예요. 연습하고 숲속에 가니 진짜 도깨비가 나타났어요. 춤을 추며 잘 놀면 도깨비가 혹을 떼 갈 줄 알았어요. 춤추는 자세 나오죠. 도깨비가 자기들 지맘대로 생각해서 혹을 떼 갔으면서 노래가 안 나오니까 속았다 싶어서 그 혹을 그 영감에게 붙여 놓으니 김일성 혹보다 더 커져 버렸어요. 이 동화를 한 이유가 뭐냐하면 사람이 어떤 원인이 되어서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타이밍입니다. 타이밍. 

세상 살아가는 모든 별자리는 내가 정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미 별자리 정해 놓고 그 별자리가 너 구원받는데 아무 보탬도,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혹이 없어진 영감보고 나중에 “야 니는 어떻게 해서 혹을 떼고 나는 더 붙였느냐?” 먼저 영감이 하는 말이 진짜예요. “몰라” 혹 떼 달라고 한 적이 없거든요. 혹 떼 달라고. 우리 죄를 씻어 달라고 우리 주님에게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내가 복 받는 목자만 찾아 다녔어요. 큰 교회. 큰 예배당. 부흥이 된다는 교회. 그것만 찾아 다녔어요. 평생을. 어떤 사람은 빙빙 돌아서 온 큰 교회를 다 돌아 다닌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는 큰 교회 목사 설교 찾아서 돌아 다닌 목사가 한 둘이 아니예요. 그저 혹 하나 뗄까 싶어서. 이것 떼고 죄 용서 받고 구원받을라고. 

스가랴 오늘 본문은 혹을 떼 줄 도깨비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혹이, 죄가 떼어 졌는가? 그냥 하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담기 위해서 너 허락 없이 그릇으로 사용하신 거예요. “너 속에 말하는 이는 너가 아니고 오직 성령이니라” 그러면 그냥 이미 혹이 떼인 상태예요. 죄 용서 받은 상태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 목자예요. 이건 취소할 문제도 아닙니다. 나 그만 할래요. 나 성도 그만 할래. 하고 아주 점잖게 물리칠 문제도 아니고.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데 난 아무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찾아다닌 어떤 보상이나 댓가를 얻을까 싶어서. 행운이 올까 싶어서. 그것에 맞는, 그것에 맞춘 목자를 찾아다닐 뿐이죠. 이만큼 잘했으면 나한테 칭찬해 주고. 이만큼 기도하면 복 받는다고 나에게 격려와 위로를 해줄 그런 가짜 교회들만 우리는 그냥 찾아다닐 뿐이었죠. 도대체 얼마나 헤매야 되고 얼마나 더 찾아야 됩니까? 기름부음이 여러분들 속에 있다는데. 요한일서 2장에 보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이미 기름부음이 여러분들 속에 있다는데. 

우리는 구약 성도와 마찬가지로 괜찮은, 건전한 내 마음에 맞는 진짜 희생적이고 괜찮은 목자를 찾아 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심어 놓은 가짜 목자인 것을 스가랴에 근거해서 우리는 인정을 하고 진짜 목자는 죽음, 바로 너같은 인간을 위해 죽었다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 이외는 어떤 목자도 없습니다. 이거는 사도 바울에게도 베드로에게도 요한에게도 똑같이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갈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지금 천국에 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우리도 인생, 그저 내 성질대로, 성깔대로 그냥 헤맵니다.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뭘 해도 자꾸 원인을 만들기 때문에 옳은 길이 아니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옳지 않은 길이지만 주께서 쓰시고. 주께서 이미 다 이루었고. 지금 세상은, 너가 기대하는 세상은 이미 폭파되어서 무너져 내려가는 종말인 것을 아신다면 여러분 조금 믿다가 보증서다가 후딱 발 뺄 거예요. 보증서가지고 집 날렸다 하지 마시고. 세상은 이렇게 항상 그리스도만 증거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실패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끌고 계시는 겁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실패, 실수 속에서 성령님이 함께 있음을 크게 직감하게 되고 고마워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만나고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이 어느새 나의 별자리가 되고 말았고 이래서 나는 위대하고 이래서 나는 대단하고 이런 나는 훌륭하다는 자기 변명조로 남한테 자랑질을 하는 근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주여, 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이 다 부질없는 나의 별자리인 것을, 버려야 될 것을 아무것도 우리 구원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날마다 깨우쳐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