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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4-03-16 15:28 | |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2장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3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고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나올 때,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현재 200여개의 나라 중에 그 중의하나의 나라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희들은 이스라엘이라지만 우리는 대한민국, 저 바다 건너 일본, 일본. 중국. 필리핀. 터어키. 대한민국. 여러 나라 중의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스라엘을 찾으러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해서 개인적으로 어느 나라 소속이냐는 천국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구요. 이스라엘의 성질, 이스라엘의 속성,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되게 했던 그 원리와 원칙에 해당되는 백성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묻는 거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거든요. 유대인의 왕. 대한민국의 왕이 아니고 필리핀의 왕이 아니고 유대인의 왕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그 분을 왕으로 모실려면 그 순간 졸지에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원리와 원칙에 이미 그 질서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보통 왕은요, 자기들끼리 회원들이 모여서 왕을 뽑거든요. 그래서 왕이 좀 잘 된다 싶으면 세습제로 들어가 버리면 이제 본격적으로 왕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는 왕조라 할지라도 백성들이 맘에 안 들면 은연중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가지고 새로운 왕이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왕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딴에는 하늘에서 뭐 어떻다 점지했다 하지만 사실은 백성들 가운데 일반인들 중에서 하나일 뿐이예요. 그러한 왕의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사울왕입니다. 사울왕은 사람들에 의해서 추대 된 사람이라 이렇게 보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체를 합니다. 사울왕을 다윗왕으로 교체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생각한 지도자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왕이고 그걸 왕이라고 여겼던 너희들도 같이, 상관없는 왕을 왕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도 하늘나라와 상관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박근혜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받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받을 것이냐 라고 생각해 보세요.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말은, 뭐 이명박 그전에 대통령 노무현 기억도 잘 안나요. 대통령이 하도 많이 바뀌어서. 너무 자주 바뀌는 그 이야기나 옛날 구약 때에 제사장, 아론 제사장 뭐 무슨 제사장 계속 제사장이 바뀌어서 죽고 또 바뀌어서 죽고 이렇게 뭔가 제사드리는 제사장이었는데 죽었다는 이 말은 애초부터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왕, 오직 한 분으로 끝나 버린, 한 분으로 다 되어 버린, 더 이상 왕이 필요치 않는 거예요. 그 분의 왕이 나타나기 위해서 그건 아니야 그건 왕이 아니야 라는 긴긴 역사가 필요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우리가 정답이 주어질 때 정답이라는 것은 문제가 주어질 때 정답 값을 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 목요일에 서울 가면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요, 지하철을 한 시간 반 정도 타고 갑니다. 가면서 보니까 지하철에서 애들이 숙제를 해요. 이쪽에 문제집 있고 정답지를 오려서 자기가 푼 문제 정답하고 대조를 해보는 거예요. 저는 서 가지고 보는데, 문제는 저는 안 보고 정답만 보니까 1번 36 2번 72 3번 1/2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 볼 때 뭐 정답지예요. 아무리 봐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경 속에 들어가 살지를 않아요. 성경 바깥에 있으니까. 문제 속에 들어가야 문제가 나오거든요. 아까 식사 시간에 저한테 설교할 좋은 힌트가 주어졌어요. 이 상규 집사님 이야기인데, 한 집사님이 심장 검사 하셨다는 거예요. 심장에 관상동맥이 세 개 들어간다는 거예요. 어떤 분도 검사를 했는가보죠. 의사 선생님이 하는 말이 관상동맥이 세 개인데 지금 하나가 막히고 뭐 빨리 수술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 사람 하는 말이 이런 말 이예요. 뭐 세 개중에 두 개만 있으면 됐지 뭐 아직 두 개가 남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사람이 무엇을 착각하느냐 하면 어떤 몸이 있고 자아가 따로 있고 그 몸을 자아가 소유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자아라는 것은 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나의 이미지인데, 하나의 이미지거든요. 자아는 없는 거예요. 그냥 육체만 있을 뿐이고. 육체가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자아를 만들어 낼 뿐인데. 평소의 습관이 뭐냐 하면 나라는 것 따로 있고 나에게 합당한 육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관상동맥이 세 개가 있을 자아하고 관상동맥이 두 개만 통하는 자아하고 이미 이 두 자아가 달라요. 수술 안 했습니다. 이제 두 개 막혔습니다. 그 사람 또 하는 말이 또 세 개 중에 두 개 막혔지만 아직 하나가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집사님 말씀이 얼마전에 죽었답니다. 죽음이 주인이었어요. 죽음이.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를, 마치 인간인 것처럼 보이는 존재를 이 땅에 잠시 보였다가 흙으로 회수를 해버립니다. 흙으로 회수 해버려요. 나중에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거예요. 하지만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우리가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은 땅의 속성을 흙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약한 자로 설명한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우리는 스스로 자아, 또는 인간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이라고 생각해 보신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육신 또는 그냥 흙 그래서 이름도 아담으로 지은 거예요. 흙덩어리로 지었지 우리를 사람으로 간주한 적이 없어요. 우리를 자아로 간주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을 이야기 하면서 이것이 반드시 필요해요. 예루살렘은 어떤 지명 이름이 아니예요.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것이 참 어렵게 느껴지는 겁니다. 교회가 어떤 지명이 아니잖아요? 예루살렘이 어떤 지명이 아니예요. 이게 붕 뜹니다. 어디로? 하늘을 향하여. 어떤 집단이 되어서. 요한계시록 22장에 말씀하기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라고 할 때에, 그 점을 제가 설명해야 되는데 성경 전체가 동원되어야 설명이 돼요. 어, 예루살렘은 지명인데? 여기서 비행기 타고 가서 공항에 가서 바꿔 타면 가는데? 그거 예루살렘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무슨 성벽이 있는데, 그거 예루살렘 아니거든요. 그것은 인간도 아닌 자들이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만든어낸 인간의 문화고 문명일 뿐이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이 세상에 건져 올리는 그 예루살렘 아니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인 행세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간단해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가 인간이 아니고 무엇을 통과해야 하냐면은 예루살렘을 통과해야 인간이 돼요. 왜냐하면 거기에 누가 기다리고 있어요. 너의 이름과 예루살렘에 거주하시는 분의 이름과 바꿔야 돼요. 이제는 주의 이름으로 살아야지 내 이름으로 유지하면 안 됩니다. 그 바꾸는 작업에서 내 자아, 내 자존심, 내 명예를 걸고 했던 모든 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서서히 바꾸어 주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간단한 작업이 뭐냐 모든지, 내 뜻대로,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내 뜻대로. 그런데 내 뜻대로 되면 어떻게 되느냐 내 육체대로 되어요. 주님은 나와 상대하지 않고 내 육체와 상대합니다. 그러면 내 육체는 뭐냐? 내 육체는 맨날 죄만 지어요. 내 육체는 맨날 콩내놔라 팥내놔라. 내 육체는 맨날 배고프다. 뭐든지 내 육체는 저 인간 죽이고 싶다. 저 사람은 안 살았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더 살았으면 좋겠다. 맨날 내 육체는 세상 모든 것이, 내 속에 죄가 요구한 대로 되어야 우리는 만족할 정도로. 이것은 횡포가 보통 횡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자꾸 십자가 피만 생각하는데 피가 중요하죠. 그 전에 뭐라고 했느냐면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십자가라면 그 십자가 경로를 밟으면, 십자가 믿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덮치는 거예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절차와 반대 절차를 역과정으로서 십자가 나올 수 있었던 절차를 모든 과정을 역으로 우리에게 덮어 씌울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될 때 주님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거예요. 여러분들이 세상 일이 뜻대로 안 될 때는 당황하지 마시고 너무 느리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 다음에 죽으면서 끝~. 이게 모든 것이 끝나는 겁니다. 자 이런 것을, 자기 뜻대로 안 될 때에 나오는, 예루살렘을 설명하기 전에 이거 하나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이 복음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나오는 어떤 아이디어를 보여준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홍 상수 감독이라는 사람인데요, 홍 상수 감독이 했던 작품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생활의 발견> 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우리 권사님들 집사님들하고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겨울왕국도 안 봤는데 뭐 그것을 볼 리가 있습니까. 홍 상수 감독이 외국에서 상당히 가치있는 감독인데 그 감독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각본을 현장에서 써요. 각본을. 모든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것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흐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이유는 이 지루하고 지루한 권태로움에서 벗어나서 획기적이고, 때려 부셔도 범죄가 안 되고, 총 쏴도 그것이 용납되고, 그러면서 정의가 승리하는. 뭔가 자극적이고 내가 원하는, 내 뜻대로 되는 그런 세상을 보고 싶어서 영화관에 가는 거거든요. 저도 솔직히 말해서 겨울왕국 봤습니다. 봤는데, 그 겨울왕국 보면서 속이 시원했던 부분이 어떤 부분이었냐면 공주가요 만지는거 마다 다 얼음이 돼요. 손으로 건드리기만 하면 다 얼음이 돼요. 여기 벌써 얼음이 다 됐어요. 이게 겨울왕국이라면.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만지면 다 얼음이 되는 그 동화를 패러디 한 것 같습니다. 뭔가 모자랄 때, 뭔가 만지면 다 내 뜻대로 될 때, 그 꿈은 겨울왕국을 통해서 대리 만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홍 상수 감독은 뭐냐 하면, 지루하고 짜증나는 것을 풀기 위해서 영화관에 갔는데 홍 상수 감독 영화는 영화내내 지루하기 짝이 없어요. 세상을 잊기 위해서 영화관에 온 사람에게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을 잊기 위해서 영화관에 왔다면은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다시 지루한 세상으로 돌아가야 되는 그 허탈과 허무는 더 괴롭습니다. 차라리 내 실상을 거울 보듯이, 진짜 뭔가 잔뜩 기대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까 지루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 지루함이 곧 나구나! 내 자아는 자꾸 상상을 하듯이 나는 멋있어 나는 놀라운 존재야 나는 이 세상을 뒤바꿀 수 있어 나는 위대한 꿈을 꿀 수 있어 라는 자체가 뭐를 모르냐 하면은 자신을 다시한번 돌아보지 않고 자꾸 욕망만 시달리다 보니까 그렇게 실패하면서도 나는 대단한 존재야 언젠가 내가 한 몫 쥘거야 인생은 한방이야. 한방만 터지면 그동안 잃은거 다 보상 될거야. 실패, 두려워마. 언젠가 실패를 보상할 날이 있을것이라 하는데. 홍 상수 감독은 말합니다. 그 실패가 너의 본 모습이다. 실패가. 실패를 딛고 일어서지 말라는 거예요. 계속 실패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홍 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 영화 시나리오에는 없는, 길을 가다가 마주 오는 사람이 네 사람이 오잖아요? 그래 이번 영화에는 저 네 사람을 집어넣어야 되겠다 하는 거예요. 만나는 그 상황을 그대로 영화에 집어넣어 버려요. 있는 그대로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연성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우연성의. 작위적이고 인위적이 아니고, 내가 맘에 드는 인생을 꾸릴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홍 상수 감독이 주부가 되어서 아이에게 교육을 시킨다면 “엄마 오늘도 시험 못 쳤어” “그래 너가 그거야” “그런데 시험 더 망쳤어” “그래 그게 바로 너의 모습이야” 이런식으로 가는 거예요. 꿈꾸지 마라. 잘하리라고 생각하는 꿈을 꾸지 마라. 이것이 힘들고 외로운, 예루살렘을 모르면서 어떻게든지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의 세상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의 특징이 그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방금 제가 홍 상수 감독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은 홍 상수 감독의 비슷한 이야기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시편 84편에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참새도 제 집을 얻고” 참새도 제 집을 얻었다는 말은 내가 성전 안에서는 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만든 그 성전을 사모합니다 라는 이런 뜻입니다. “세상에서 천 날 보다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성전 안에서는 나를 위대하게 만들 어떤 시간도 남아 있지 않다는 이 말입니다. 나를 지금보다도 더 위대하게 만든, 사람이 자아를 주의깊게 만든다는 것이 스트레스거든요. 그 스트레스가 없다 이 말이죠. 내가 살든 죽든 상관없는 곳이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주장하는, 내 이름을 걸고 하는 내 모든 일은 주의 이름 앞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교회 와서 교회 앉아 있어도 여러분들은 주의 이름이 아니고 자기 이름을 걸치고 앉아 있으면 누가 날라가 버리냐면 주의 이름이 그 교회에서 날라가 버리면 그것은 교회 온 것이 아니고 어디 놀러 온 것이랑 똑같은 거예요. 어디 사우나탕에 왔는지 식당에 왔는지 똑같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예의도 필요 없고 에티켓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야말로 홍 상수 감독 영화처럼, 홍 상수 감독은 자기를 생각하니까 지루하지만 주님 앞에서는 지루하지도 않아요. 왜? 누가 지루하지? 라고 지루할 대상도 없기 때문이예요.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심한 말을 그만하고 예루살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 3장에 보면 17절에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하면서 그 앞에 14절에 “나는 너의 남편이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한테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남편이거든” 예루살렘은 보좌가 되고 내가 너와 함께 동행할 것이라. 그리고 15절에 보면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은 오늘 스가랴서 본문과 연관이 됩니다. 예루살렘을 예루살렘 주민들이 스스로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예루살렘은 너보고 지키라고 오라고 한 것이 아니고, 너보고 애써서 다듬으라고 오라고 한 것이 아니고, 너는 예루살렘에서 제대로 된 죽음, 지금 네가 자살해도 못 느끼는 진짜 죽음. 한강에 뛰어 들어 자살해도 느끼지 못하는 진짜 죽음. 하나님 앞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짜 보여주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이예요. 그 예루살렘에서 너희가 죽게 되면 비로소 죽은 너희를 재료로 해서 진짜 예루살렘이 나타날 것인데, 그게 오늘 보면 스가랴서 12장에서는 그 때부터 예루살렘은 뭐냐 그동안 너희를 죽이기 위해서 동원된 모든 이방 주변의 나라에게 너희가 무거운 총이 될 것이다. 무거운 무기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복수에 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복수는 너희가 이미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너의 이름으로 복수되는 것이 아니고 너를 살려준 그 분이 우리를 데리고 해나가시는 거예요. 이래나 저래나 우리는 빠지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을 위해서 죽겠습니다. 고난 받겠습니다. 고난 받지 마세요. 제발 고난 받지 마세요. 주님을 위해서 고생하겠습니다. 제발 고생하지 마세요. 고생하게 되면 고생한 내가 다시 기억나니까. 자꾸 성과를 생각하거든요. 하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나라는 자체가 무가치함을 알려 줄 때, 우리는 감사만 이야기 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면 내 뜻대로 안 되면 누구 뜻인가? 주님의 뜻대로 된 거예요. 주님의 뜻대로 된다면 내 육체라는 것, 내가 지금 내 육체가 뿜어내는 내 욕심과 탐욕도 어디에 쓸모 있느냐면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주의 십자가 의미를 드러내는데 아주 굉장히 잘 활용이 돼요. 아, 활용되니까 죄를 더 지으면 되겠네 라고 하거든요. 제가 엊그제 서울에 가서 어떤 목사님과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그 목사님이 아주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어떤 질문이냐면 로마서 5장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했습니다. 상당히 기분 좋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의문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어서 로마서 6장에 그런즉 우리가 죄를 지을거냐 그 문제가 해답이 안 나온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죄를 지어줘야 남들 앞에 은혜 받은 것을 과시할 것인데, 죄를 안 지으면 보여줄 은혜가 없잖아요? 은혜가 없으면 주의 증인이 안 된다고요. 주의 증인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어야 하는데, 분명히 우리 논리 같으면 그 논리가 맞다고 생각하는데, 6장에서 사도바울이 브레이크를 걸어요.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을 것인가? 우리의 논리가 들켜버렸어요. 사도 바울에 의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죄를 안 지어야 맞지 않습니까? 라고 저한테 질문 안 하는 것처럼 질문을 해주셔서 그 다음에 제가 답변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죄는 내가 죄를 지을거냐 안 지을거냐 주체가 나예요. 그런데 6장에 보면 이미 우리 죄에 대해서 죽은자다 말이죠. 죄에 대해 죽은자다 이 말은 죄 짓고 안 짓고 대해서 이미 우리가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어요.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이 지은 죄는 죄가 아니예요. 그래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했어요. 옆에 운전하다가 화들짝 놀라 버렸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른 거예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다니? 우리는 죽어도 우리는 죽음을 몰라요.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어줘야 진짜 죽음이고 마지막 심판 때에 만나는 죽음이 그 죽음이거든요.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보여준 그 죽음인데, 우리가 짓는 죄는 죄가 안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진짜 죄가 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죽여 버리고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해버리죠. 그러면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안 믿는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죄고. 그들은, 세상은 그것을 모르게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랑거리가 되는 방법이 뭐냐 그들이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가 뭔가를 모아 놓은 것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세상 어떤 누구도 예루살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니들이 죽음을 알아? 니들이 지옥을 알아?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로마서에. 믿지 않는 것이 죄거든요.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주님으로 죄가 이미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죄예요. 요한일서에 보면 그게 바로 그 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해요. 따라서 결론이 뭐냐 홍 상수 감독이예요. 우리는 인위적으론 해놓고 스스로 자기를 때려요. 오늘도 죄졌습니다. 기도도 안 했고 전도도 못 했습니다. 그거는 죄 아니예요. 왜냐하면 이런 죄도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게 바로 성도 아닌 사람입니다. 진짜 죄를 모르는 불신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어설픈, 육신을 갖고 살면서 육신을 마치 내가 조절할 것처럼 생각하는.. 관상동맥 세 개 없는데 없어도 살 것이다 여기는. 정말 의사가 보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하지만 그 육체 자신이 우리가 결과적으로 나온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육신이기 때문에 우리 육신에서 십자가가 나왔고 그 십자가를 들여다보니까 그 안에 이미 우리 자아가 죽은 걸로 창세전에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이 말씀을 통해서 믿어질 때 바로 이것이 바로 은혜중에 은혜입니다. 예루살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 내가 여기 있다고 했을 때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았지만 내 안에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전부가 해석이 되었습니다. 내 쪽에서 해석하지 말고 주님께서 그 말씀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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