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율법 5번 강의
05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동은교회) - 강의 5
서경수 2005-09-19 14:47:21, 조회 : 2, 추천 : 0
강의 5
마태복음 26장 24절을 보겠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번 하였느니라?
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아무리 인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한다 할지라도 ?인자?(예수님)는 자신의 할 일 하고 손 털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고 난 뒤에 인자가 남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입니다.
나는 너희들이 아무리 갉아도 내 할일 다 하고 가고, 다만 내 속에서 쏟아지는 그 피, 죄 사하는 언약의 피는 남기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예수님에 대해 대들고 복음을 모독하는 자들이 등장하는데 참 불쌍한 자들입니다.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는데 그분에 대해 오만 욕설과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리 그래도 인자는 자기 할 일을 다 하시고 떠나게 됩니다.
남겨진 언약의 피에 대해서 여러 인간들이 장난치고 악용하고 난리를 쳐도 그 피는 여전히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이 자신감은 말씀대로 세상이 진행되는데 너희 인간들도 그 말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윤리, 도덕을 구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피를 남기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말씀은 이 언약의 피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모든 말씀도 언약의 피 안에 다 들어 있고, 사도 바울의 모든 명령들도 그 언약의 피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지난 네 번째 시간에 ?사랑이 무엇이냐??는 주제를 던지고 시간관계상 끊고 말았습니다. 사랑이 뭐냐 하면, 사랑은 흐물흐물해 지는 것입니다. 주체가 흐물흐물해 져요. 예를 들면, 20대 중반의 여자가 시집을 가서 임신을 했습니다. 20대 초반 시절에는 혼자 세상을 다 개혁하고 정복하고 멋있는 여성되기를 꿈꾸다가, 시집가서 자기 배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니까 자기의 몸매, 옷차림 이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주체 자체가 흐물흐물해 져서 모든 관심을 뱃속에 있는 생명에 집중하게 됩니다.
사랑의 대상이 등장하게 되면, 강력하게 고수했던 ?나?는 흐물흐물해 집니다.
그런데 윤리는, 절대 선을 추구하는데, 절대 선을 위해서는 나쁜 것을 제거해야 하고, 이런 나쁜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주체가 공고히 될 수밖에 없어요. 더 예민해지고 단단해 집니다. 흐물흐물해 지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절대 선이 임재해서 그로 인하여 내가 점점 더 신의 모습에 다가가고, 내가 절대 신으로 변모되어 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왕 이 땅에 태어났으니 신처럼 한 번 되어봐야지 하는 이상을 가지고 삽니다.
김홍전씨라고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그 후계자 최낙제씨가 있어요. 박사학위를 받고 했지만 그런 것을 다 던져버리고 ?절대 목회?를 시작했어요. ?완벽한 목회? - 목자 되신 예수님이 양을 가르치신 것과 동일한 그러한 완벽한 목자상에 의한 그런 교회를 추구하려고 얘를 섰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구상한 것이 뭔가 하면, ?삼위일체적 전인적인 성도의 삶?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삼위일체가 하나님이라면 성도는 삼위일체가 낳은 자식이지요. 그러기에 성도 안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삼위일체적인 모든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낳은 자식이 성도라면 삼위일체적인 요소들이 다 포함되어야 할 텐데 기존의 한국 개신교들은 문제점이 있다고 하면서, 그 문제점이 ?삼위일체가 지식에 머물고 삼위일체적인 삶을 구현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믿습니다.? 라고 할 때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지식적인 요소, 감정적인 요소, 의지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요소는 전도한다든지 헌금한다든지 등을 말하고, 감정적인 요소는 기쁨과 감사, 평안 등이고, 지식적인 요소는 믿는 내용이 이단적이 아니고 정통적으로 내려오는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 이런 것인데, 이 믿음에 대해서 한국 개신교들은 사람 끌어 모으는데 급급해서 지식과 감정 이 두 가지만 강조를 해서 의지적 삶에 대해서는 영 사람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들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우리나라에 1,200만이나 된다고 하지만 전혀 그들이 성도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우리나라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홍전 같은 사람들은 지식적인 것에 머물지 말고 삼위일체적 삶의 실천을 강조해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적 삶이 뭐냐 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내부적으로 질서가 잡혀있는데 이 질서 그대로 우리 성도의 삶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성자는 희생이죠. 성부의 지시에 따라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성자의 모범적인 생활을 적용시키지요. 성부는 성자, 성령이 하시는 일을 입안하시고 지시하시지요.
그래서 이 삼위일체적인 것이 성도에게 몽땅 들어오게 되면, 성도는 이웃에 대해 이기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희생, 봉사하는 정신으로 살 것이고, 그리고 성령의 감동 감화로 거룩한 삶을 살고, 그러면서도 기존교회에서는 ?내가 성화되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삼위일체적인 삶에서는 모든 영광을 성부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홍전 박사의 신학을 한 마디로 한다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 이것이 삼위일체적인 삶이라고 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뜻이라고 합니다.
천주교 교리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서 쉽게 허점을 찾기 힘든 나름대로의 교리로 무장하고 있지요?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유교도 마찬가지고 십자가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실제적으로 구현하려면, 사람의 자아(주체)가 예민하게 발달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고상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방어기제?를 작동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점점 더 자아가 고착됩니다. 빈틈이 안 보이도록 자신을 살펴서 허점이 없는 완벽한 자아를 만들려고 합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했지만 그는 세상의 일을 선한 것, 악한 것, 가치 중립적인 것 이런 식으로 나눴습니다. 이러한 윤리적 스펙트럼을 칼빈이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스펙트럼을 소유하겠다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괜찮은 자아로 점점 더 공고히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완벽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아주 고상하던 처녀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난 후에는 모든 자세가 흐트러져서 옷도 대충 걸치고, 머리카락도 뒤죽박죽이고, 자기 몸 관리도 엉망이고 이렇게 되는데, 그러면 악한 것, 선한 것, 가치중립적인 것 이런 스펙트럼이 다 깨져버리지요. 다 깨지니까 교회 목사님은, 이 사람들이 신앙적인 긴장이 떨어졌구나 해서 유아실을 향해서 고함을 치며 설교를 하지요.
실제로 인생을 살다보면, 절대 선을 추구하다 보면, 전에 들키지 않은 절대 악이 비로소 얼굴을 내 밀지요. 내가 아주 섬세하게 되면 모세혈관에 속해 있는 죄까지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죄가 눈에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덜 악한 것이 되는데 덜 악한 것이 나중에 되면 아주 악한 것이 되요.
그러면 신앙생활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어 감당을 못할 때, 오늘 공부 시작할 때 읽은 성경구절을 생각해 보세요.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번 하였느니라?
28절 ?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인간: 주여, 힘듭니다.
주님: 놓아라 이놈아. 네가 스스로 완벽을 추구하다가 힘든 것을 내가 어쩌란 말이냐. 나는 피 흘렸으면 됐잖아. 언약의 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데?
인간: 주여,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주님: 나는 내 할일 다 했다.
본인이 스스로 절대자아를 구축하려고 하니까 본인도 힘들고 예수님도 힘들게 만들고. 스스로 스펙트럼을 만들어서 많이 악한 것은 덜 악한 것으로, 덜 악한 것은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한 단계씩 이동시키려고 얘를 쓰고, 간절히 기도하고 ---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부흥사들이 설교하면서 ?헌금할 때는 떼 묻은 돈 내지 말고 은행에서 신권으로 교환해서 그렇게 헌금해라?고 했습니다. 제가 처음 박사교회 가니까 헌금봉투에 든 돈이 하도 빳빳해서 회계 집사님이 그 돈 계산하느라 굉장히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장인지 한 장인지 분간이 안 돼요. 차라리 손떼 묻은 돈은 헤아리기 쉬운데.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나의 주체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하나님 말씀에 기록된 것이 아니고 별 시답잖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시답잖은 인생을 주께서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언약의 피가 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많이 알게 하시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가십니다.
지금 여기 김홍전 쪽에서의 주장, 삼위일적인 삶, 그리고 천주교의 교리 여기의 대한 허점을 잘 지적한 존 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존 듀이는 퍼스(Sanders Peirce)의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한 철학인데 이것이 ?도구주의?라고 불려집니다.
이 사람이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나라 해방 이후에 문교부 교육이 들어올 때 ?존 듀이의 민주주의?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대로 모든 인간의 교육은 민주주의에 합당한 시민 만들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존 듀이의 도구주의 또는 실용주의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그러한 윤리가 지금 우리나라 모든 교육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 존 듀이가 말하는 그 윤리에 목적이 뭐냐 하면, ?공동 선?입니다. 공동 목욕탕을 들어봤지만 ?공동 선?은 잘 못 들어보셨지요? ?공동 선?이란 개인적인 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선이 모이면 그 집단의 ?공동 선?이 유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가 아니고 집단을 위해서 선을 추구하는 것이 윤리라는 것입니다. 존 듀이가 말하는 공공의 선이 추구되면 그것이 인류의 문화를 더욱 더 진화시키고 발전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왜 발전하지 못했는가? 발전하고 진보할 계기를 줄 수 없는 그런 윤리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다.
실용주의, 도구주의는 뭐냐 하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그 충동을 공공의 선을 향하여 유도한 결과 그들은 마음껏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있더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너의 똑똑한 점과 나의 똑똑한 점을 모아서 점점 사회가 발전할 수 있고, 사회가 발전하면 그만큼 우리가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행복? 아니냐는 것이지요.
지금 휴대폰의 기능이 어디까지 나왔느냐 하면, 문밖에 나가다가 햇볕보고 자외선 측정해서 어떤 썬크림 바를지 그런 것까지 서비스해 줍니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주파수가 발생해서 1m 반경 안에 모기를 퇴치하는 것도 나왔습니다. 이런 것을 아프카니스탄에서 만들었습니까, 소말리아에서 만들었습니까? 왜 소말리아에서는 못 만듭니까? 이런 것을 만들 인재를 다 죽여 버렸어요. 사회주의를 위해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좀 더 안다고 하면 다 모가지를 쳤어요. 이런 재능 있고 기술 있는 사람들 다 죽이고 어떻게 발전된 사회를 만들겠습니까?
북한은 왜 전력이 모자랍니까? 지금 주체사상 연구하기 바빠서 언제 그런 기술자를 양성했느냐는 것이지요.
존 듀이의 윤리관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주체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김홍전 같은 사람은 자기의 절대 선을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하는데 존 듀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인간은 충동적이라고 생각해요. 충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충동이 경험을 만나고, 경험에서 반성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반성을 통해 도덕적 자아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도덕적 자아가 되풀이 되면 이것이 습관이 되고, 이것이 성격이 되고, 성격에서 그 사람의 행위가 나옵니다. 성격에서 그냥 행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목적이 있어요. 그리고 행동할 때는 반드시 스스로 보기에도 일관성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인정받기 위해 행동해요.
민주주의는 신이고 뭐고 ?너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잠재된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존 듀이의 이론을 실현하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소질을 개발할 수 있고, 소질을 개발해야 공공의 선, 인류의 발전과 진화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더 간추려 말하면,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그러니까 가진 집안 아이가 공부도 잘 하고, 못 가진 집안 아이는 잘 못하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요.
존 듀이는 이러한 비난이 왔을 때 그가 하는 말이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될 때도 그러한 아픔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진화라는 것은 결국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밟히고, 밟히는 놈 위에서 될 놈이 탄생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정글의 법칙, 생존 경쟁이지요.
여기서 존 듀이는 ?공공의 선?이라는 것을 말했지요? 솔직히 말하면 ?공공의 선?이 아니고 ?공공의 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냉혹한 경쟁사회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는 어디 가야하는가 하면 김홍전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천주교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존 듀이나 천주교나 김홍전이나 전부 다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어떻게 하든 자기를 좀 더 키워볼까 하는, 이것을 위해 예민해져 있고--
지금 50대에서 하는 이야기는 ?우리는 부모에게 이용당하고 자식한테 버림받은 세대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밑바탕에 뭐가 있느냐 하면, 돈입니다. 돈이 인간의 윤리를 만들고.
돈은 원래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찾아 헤매는 인간의 내심, 돈에 대해 유혹당하는 그 마음이 문제지요. 그럼 이 마음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을 존 듀이는 충동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제가 충동에서 경험을 만난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존 듀이가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어요. 사람이 충동에서 경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충동이 경험을 선별합니다. 이 점을 존 듀이는 놓치고 있어요. 예를 들면, 두 친구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은 인상을 찡그리며 숨으려고 해요. 그런데 다른 친구 B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왜 그런가 하면 A는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 안 갚았고, B는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선별해서 경험을 받아들여요. 이것을 칸트는, 인간 속에 ?오성?이라는 체제가 있는데 그 체제는 어떤 체제냐 하면, 인간의 경험 중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별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별할 때 기준이 있어야겠지요. 어떤 것을 선별할까? 내가 유리한 경험은 기억에 남기고, 그렇지 않고 자기 상상력에 충족되지 못하는 경험은 잊혀지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그러한 충동을 느끼지요.
여러분은 한 번 만난 사람을 다 좋아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어떤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또 보고 싶고. 이런 기준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왜 저 사람은 또 만나고 싶은데, 다른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은가요? 이 기준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아가 형성되는데, 지난 시간에 ?결핍된 자아?를 그 다음에 ?대상?을 이야기했는데 대상은 ?타인?입니다. 자아가 남들이 갖고 있는, 타인의 욕망을, 결핍된 것을 채우므로 그 때만 잠정적으로 나의 자아를 설정합니다. 여러 가지 대상이 있는데 왜 하필 저 대상이냐? 결핍을 채우는데 왜 저 대상이 필요한가? 이것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어릴 때 성격 형성이 되는 것이 4-6세 때인데, 여기에 형성되어 있어요.
인간의 성격을 구성하는 것이 70% DNA로 구성해요. 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연약한 정신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모든 것이 예민하고 섬세해서 작은 일에도 크게 상처받고 낙담하고 하지요. 나머지 30%는 환경문제입니다. 이 환경문제에서 인간은 교육으로 교정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70% DNA는 바꿀 수 없지만.
어릴 때의 생각이 그대로 전달되는데, 결핍이란 것이 어디에서 생기느냐 하면, 부모로부터 떨어지면서 부모와 하나 되었을 때의 상태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일체였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떨어져 나오니까 자연적으로 불안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대상 없는 불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뭔가 한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왔다는 옛날 감정이 무의식 속에 적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0분 쉬고 계속합시다.
(2005. 9. 16. 12:0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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