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율법 3번 강의
05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동은교회) - 강의 3
서경수 2005-09-12 14:25:01, 조회 : 1, 추천 : 0
강의 3
세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이 강의가 여러분의 상상대로 내용이 그렇게 전개되었다 치고, 강의가 다 끝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때 나오는 질문이 뭐냐 하면, ?그러면 내가 착한 일 하지 말란 말인가?? 라는 질문이 등장할 때, 뭐라고 납득이 되도록 뚜렷하게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강의 끝난 후에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기를(타인이 질문해도 좋고), ?그러면 착한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단 말인가? 그리고 사람이 반듯하게 사는 것이 가치 없단 말인가?? 했을 경우, 답변이 궁하다든지,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네? 하고 나온다면 강의를 헛들은 것이 됩니다.
제가 방금 질문을 던지기를 ?내가 착한 일을 안 해야 된단 말인가?? 할 때, 성경에서 묻는 것이 뭐냐 하면, ?네가 누군데?? 이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착한 일을 안 해야 돼. 하지 말아야 한단 말이야. 그러면 나쁜 짓 하란 말이냐?? 이렇게 나오는데, 질문의 취지가 ?착한 일? 여기에 강조점이 있단 말이지요.
?내가 착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할 때, ?그렇게 묻는 너는 누군데?? 라고 묻습니다. ?목사님 이제부터 착한 일 하지 말까요?? ?당신 누구신데요?? 그것은 잘 모르지요.
이사야 2장 22절에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인간에게 말씀은 왜 주셨느냔 말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구박을 하시면서 이 두꺼운 성경은 왜 주시느냔 말이지요. 우리를 인정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정말 수에 칠 가치도 없다면 아예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지 말든지, 말씀을 했으면 인간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 주시든지 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말씀을 던져놓고 말씀을 받는 우리보고 하는 말이, ?너는 수에 칠 가치도 없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가치 없다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의 호흡은 코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코로 숨쉬지 않고 귀로 쉬란 말입니까? 아니면 배로 숨쉬면 됩니까?
?나?라는 것이 없어요. 결핍된 나와 타인이 있어요. ?나?라는 것은 항상 분열돼요. 분열되면서 모자라는 ?나?, 배고파 하는 ?나?, 이런 배고파 하는 ?나?를 ?남?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배고픈 나가 아닌 만족한 나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배고픈 것과 관계없는 만족한 나를 따로 상정을 해요.
이렇게 되니까 ?나?라고 하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요. 지금의 나는 아니고, 그 무엇인가 ?나?가 따로 있을 것이야. 이렇게 자꾸 따로 있는 ?나?를 연상을 하니까, ?네가 누군데?? 하니까 ?난 몰라?, ?너 지금 있잖아!? ?지금 있는 나는 내가 아니야. 뭔가 있는데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는 몰라? 이게 누구냐 하면 타인이에요.
남의 떡이 탐이나요. 남의 가정이 탐이 나고, 남의 집이 탐이 나고, 남의 것을 탐을 내요. 얘들 보면, 얼음을 달라고 해서 냉장고에 있는 얼음을 주면 맛있게 먹으면 될 텐데, 동생한테는 오렌지 얼린 것 주고, 형에게는 돈 줘서 아이스크림 사먹게 하고.
자신이 얼음 달라고 해서 얼음 받았으면 만족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형이 가지고 있는 브라보 콘이 내 마음에 속 들어와서 이것이 또 나를 분열시키네.
그러면 ?나?는 어느 자리에서 진정한 ?나?인가?
그런데 여기에 대해 해답을 주신다는 성경 말씀은 엉뚱한 소리 하고 있어요. ?너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도 없다.?
이래서 성경 해석이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선입관이 하나님 앞에 안 통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성경의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이름 바꿔라. 주의 이름으로 산다고 합니다. 주의 이름 안에 생명나무 과일이 들어있고, 너의 이름 안에는 늘 결핍된 나와 타인만 있어요. 즉 선악과 적인 요소가 있지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에 비춰볼 때 문제가 뭐냐 하면, 여기 이름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이름이 아니고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아담의 이름, 진짜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이름을 쥐고 있으니까 결핍된 나와 그리고 타인의 것을 탐내는, 그래서 늘 불평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그런 나를 지니고 살아가는 거예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데, 이 여인의 마지막을 보면 구원 받았어요. 결론부터 보면 구원 받는데,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계속 목말라 샘을 찾아 왔다 갔다 하다가 모순된 자기 이름 가지고 그냥 죽었을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그 여인이 하는 말이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했지요.
예수님의 정체가 드러나고, 여인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게 되니 목마라서 내가 물을 찾고 다시 결핍되고 하는 이런 구조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어요. 내가 시집을 여섯 번 가든, 우물에 물을 길러오든, 내가 어느 동네에 살든, 유대인이 아니고 사마리아인이 되었든 이런 것들이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워도 괜찮은 그런 존재인 것을 알았을 때, 따로 누가 ?예수님이 생명수?라고 이야기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사라지니까 예수님은 그냥 생명수에요. 문제는 내가 버티고 있고, 내가 퍼 마시려고 하니까, 아직도 자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상태 속에서는 아무리 예수님을 퍼 마셔도 이것은 계속 결핍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4장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같이 죽자?는 것입니다. 같이 죽으면 너는 개구멍으로 빠지는데 그 개구멍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같이 얼싸안고 죽으면 개구멍으로 빠지는데, 빠질 때 이름이 뭐냐 하면, 새 이름인데,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의 이름은 죽음을 초래하는, 죽음을 대대로 전수해 주는 그러한 이름이라면, 주의 이름은 ?은혜 위에 은혜로라.? 아담이 한 번 죄지어서 모든 사람이 죽음 안에 갇히게 된 것처럼,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므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생명을 얻고, 아담의 이름으로는 죽습니다.? 라고 방금 제가 말씀드렸는데, 어떤 분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그러면 착한 일 하지 말란 말입니까?? 이렇게 나온다면, 제 대답은 ?그것은 사소한 일입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사소하다고 한 말은 ?나로부터 출발한 것은 하늘나라에 별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이 땅에 100년을 살든, 어떤 직업을 갖든, 어느 동네에 살든 이런 것들은 모두가 사소한 일이란 말이지요.
내가 고아를 몇 명이나 돌보고, 얼마나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 부지런히 읽은 이런 것으로 영생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천주교의 주장은 항상 나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 속에 뭔가 선한 것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낙태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비록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돕고 해서 신께 영광 돌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 김수한 추기경이 법정 스님과 어울리고 석가탄신일에 절에 찾아가고 하는가 하면, 중도 존재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중을 존재케 했다면, 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해서 모른다면 사이좋게 지내서 한 수라도 더 가르치면 그것이 전도고 우리의 사명이라고 합니다. 참 대자대비하고 대승적인 주장이지요?
이점에 대해서 유명한 철학자 알랭 바티유라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대자대비하고 대승적이면 모든 것을 포용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이슬람교도가 되지 않는가? 결국은 ?내가 당신을 인정하면 당신도 나를 인정할 것이다.? 라는 정치적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김수한 추기경이 정말로 불교를 포용하고, 이슬람을 포용한다면 천주교 로만칼라 벗어버리고 승복입고 해인사 들어가야 합니다. 왜 그렇게 못합니까?
이 철학자의 말은, 인간에게서 어떻게 대자대비한 마음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열 번을 용납했어요. 그러나 열 한번 용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 했지요. ?내가 몇 번을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여러분 일곱 번 용서하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너는 용서할 자격도 안 되는 놈이 왜 용서를 거론하느냐? 는 것이지요. 용서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고, 주님의 용서 때문에 너는 용서 받은 자인데, 네가 어떻게 남을 용서한다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주기도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주기도문의 말씀을 누가 이루는가 하면 예수님만 이루십니다. 다른 사람은 못 이뤄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것을 누가 이루십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분열된 나,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지키는데 그 지키는 주님의 이름에 정복당해서, 그 이름에 복속당해서, 그 이름에 종속되어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 우리를 덮치게 되면 나의 이름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됩니다. 없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밥 먹고 똥 싸고 하면서 있는데 하여튼 내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는다면 내 이름이 아니고 나를 대신해서 저주받으신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용서받지, 내 이름으로 구원 받지 않습니다.
어제 설교하면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주께서 속죄해 준다고 하니까 속죄만 달랑 챙기고, 예수 안에 있어야 속죄가 되는데 속죄만 달랑 떼가 버리고 예수 안에 있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어디에 가 있는가? 자기 안의 속죄에요. 어디에 이런 속죄가 있습니까? 로마서에 있습니까? 마태복음에 있습니까? 어디에 나옵니까?
마치 어느 정도 바보인가 하면, 가로등의 전구에서 환히 불이 밝혀지니까, 그 전구만 떼서 집에 가지고 오면 불이 켜지는 줄 알고 있어요. 가로등의 불은 전신주 안에서 전선을 뽑고 전구까지 연결되어야 불이 켜집니다. 이거 몰랐어요.
예수 안에서 속죄가 되지, 혼자서 나 속죄 받았다고 떠들고 다녀도 하늘나라에서 인정 안 해줍니다. 바보같이 전구 혼자 달랑 돌아다니고 있으니 어떻게 불이 켜집니까? 전구를 귀에 꽂아보세요 불이 켜지나?
아담과 속죄가 결합하는 수는 없어요. 주님과 속죄하는 능력이 결합되지 아담에게서는 속죄하는 능력이 안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와 접해야 되요. 이것을 ?세례? 혹은 ?연합?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기회 있으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수에 칠 가치도 없는데, 이런 수에 칠 가치도 없는 나를 왜 아직도 스스로에게 집착하고 하도록 일을 일으키느냐?
욥기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주체, 내가 착한 일 하는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고 우기는 세 친구가 있습니다. 여기에 반해 욥은 이 세 사람을 반대하기 위해서 억울한 고생을 해요. 억울한 고생을 말하니까 손무성 목사님이 생각나는데 손무성 목사님 여기 앉아 계시지만, 평생을 살아온 길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전부다 남 좋은 일만 해요. 억울한 인생이지요. 본인은 죽도록 고생하고 남 좋은 일 다 시키는 거예요.
욥이 억울한 고생을 하므로 말미암아 세 친구가 욥을 탐스러운 타자로 여기지 않도록, 나는 욥처럼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싹 가시게 만드는 그것이 생명나무의 출현입니다. 예수님의 출현이에요. ?누가 믿었만??? 다른 말로 하면, ?누가 탐을 냈나, 그 인생을? ?누가 알았으리요.? 전부다 얼굴을 돌렸습니다. 일제히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인생의 품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체가 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의미 있는(완전하다는 말은 아니에요. 내가 착한 일 하면 의미 있잖아 하는 것이지요) 것이라고 여기는 신약의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입니다. 바울 되기 전의 사울. 이 사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십자가 진 예수님을 더욱더 핍박을 많이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언하시기를 나중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너희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사람들이 그렇게들 알고 있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이 미리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한16:2)
욥 본인도 몰라요. 욥은 메시야가 아니니까. 모형으로 메시야의 역할만 하지요.
내가 너희보다 더 착한데 왜 이런 고난이 왔는가? 친구들과 서로 다른 결과가 주어졌을 때, 욥의 친구들이 욥을 외면하지요. 친구들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도 욥을 외면하지요. 여하간 욥은 나쁜 짓해서 당할 일을 욥이 혼자 다 당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누가 봐도 전부다 곡해하고 오해할 수밖에 없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둘째 시간에 강의했지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일부러 모압 지경 한 가운데를 통과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하시고, 그 저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장차오실 메시야의 억울한 죽음에 동참하도록 하는 그런 조치를 사전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욥이 당하는 억울한 고생은, 이미 욥이 하나님의 이름이 그 속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내장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장차 올 예수님이 그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억울한 고생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가 이런 억울한 고생을, 비난을 받아야 될,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내가 착한 일을 해야 하는가? 라고 묻지 말고. ?내가 억울한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라고 물으시기 바랍니다.
?착함?이란 내용을 뜯어보면, 둘 다 착한 것 같지만 한쪽은(세 친구) 주체가 점점 강화 되요. 예전에 물렁한 주체가 단단한 주체가 되고, 나중에는 진짜 단단한 돌덩이 같은 주체가 됩니다. 사람이 최고의 선을 갈망하면 갈망할수록 그 최고선에 도전하는 자기 자신은 점점 더 강퍅해지고 포기 못하게 됩니다.
러시아의 장대높이뛰기 세계 신기록 보유한 여자선수가 있어요. 만약 그 선수가 5m를 넘는다면, 제가 그 선수에게 ?2m 넘을 수 있어요?? 한다면, 대번에 화를 내겠지요. 나는 5m를 넘은 사람인데 겨우 2m로 나를 낮춰보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내가 어느 정도의 인간인가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더 높은 단계의 선함에 도전해서 승리하고 5m 10cm, 다음에 5m 20cm 이렇게 자꾸 나가면서 자신을 포기 못하지요.
술 끊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술을 권하면 화를 내지요. 술 끊는데 3년 걸렸는데 그 노력을 수포로 돌리란 말인가 하면서 화내겠지요.
성경에서 요구하는 선한 일이란 것은 이방 종교에서 말하는 주체가 얼마나 선한고, 착한가를 측정하는 높이뛰기가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이라는 것은 말은 쉬워요. 예를 들면, 주의 복음 듣겠다고 오는데 차가 고장 나서 못 오게 됐어요. 이런 경우 처음에는 ?사단아 네가 나를 시험하느냐. 복음을 못 듣게 하다니? 이렇게 나오는데, 나중에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누가 손핸데요. 나 복음 들으러 안 갈랍니다.? 하고 나오지요.
마귀가 복음 못 듣게 방해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이렇게 될 때,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이 이렇게 나오니까 나는 주님을 버려야겠다.?고 가룟 유다처럼 나오지요. 그러나 진짜 성도 같으면 그동안 내 신상에 유익하면 성령의 은혜로 생각하고, 내 신상에 불리하면 악마의 장난이라 여기며 인위적으로 분류했던 그 분류 자체를 이제는 주께서 복음에 저해된다고 욥처럼 우리에게 억울한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환란 중에 비로소 소망이 보이고.
내 자아가 현재 주의 이름을 가리고 있는데,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데, 성령께서 욥처럼 억울한 고생을 당하게 해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자존심에 기대를 걸지 못하도록 조치하십니다. 이것이 욥의 위치고.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도 중요하지만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갑자기 욥을 대적하고(악의 정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핍박합니다. ?하나님의 복 받았다는 것이 겨우 그 정도냐??
특히 우리 노회 계시는 목사님들에게, ?복음 전한다는 교회에서 있는 교인마저 떠나가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당한 억울한 죽음이 얼마나 아팠겠는가를 깨닫고 그 아픔에 참여하라고 주신 은총입니다.
이렇게 단단히 준비를 하셔야 천주교 윤리에 대해서 현혹되지 않고 문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이제까지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았다고 열심히 설명했지만, 천주교 강의를 들으면 ?아, 그들 주장이 맞네? 하면서 천주교로 개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이제부터 제가 잠시 신부가 되어서, 천주교에서는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가를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실 때 선하게 만들었다고 했지요. 그래서 사람들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선악이 들어 있어요.
세상을 만들 때 질서가 있어요. 그냥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질서가 조금씩 각 사람에게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작은 모자이크가 모여서 전체를 이룹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가만있으면 되는가? 아니지요. 예를 들어, 강원도 산골에 사는 청년이 감자만 캐고 산다. 그러면 그 청년이 구원 받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법을 제정해서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질서는 법과 자유의지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러기에 이제부터 선은 누구 손에 달렸는가? 인간 손에 달렸어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만약 자유의지를 잘 못 사용하면 이것이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주교의 윤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선하게도 쓰고 악하게도 쓰는데, 유대인한테는 율법을 주었지만 이방인에게는 양심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2장 14-15절을 보면,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자기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하지요.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있고,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율법과 양심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왜 율법을 주셨는가 하는 문제는 왜 이방인에게 양심을 주셨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해답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 받고, 이방인들은 지옥 간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유대인에게 율법을 준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평한지, 이방인에게는 율법은 안 주셨지만 대신 양심을 주셨기 때문에 양심이냐 율법이냐 따지지 말고, 율법을 주시고 양심을 주신 최초의 원인자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에 초점을 맞추면 성경해석은 다 풀린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일리가 있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분이 계신데. 천주교 윤리에 뿅 가겠지요?
최초의 법이 뭔가 하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선악과를 따 먹지 말란 것이 유대인에게 한 이야기입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이것이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율법 없는 양심 가진 자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다는 말이지요.
김수한 추기경이 왜 절을 찾아 가는가?
착한 일 하고 나쁜 짓 하지 말라는 것이 분명히 성경책에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불경에도 있어요. 그러면 성경에 있는 것은 진리고, 불교 신자가 양심에 의해 착한 일 하고 나쁜 짓 안하겠다고 하는데 이들을 나쁜 사람이고 지옥 간다고 말하면, 무지몽매한 이방인들에게 양심을 주신 하나님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이들 주장에 전혀 하자가 없지요? 꼭 맞는 말입니다.
따라서 익명적 그리스도인이라고, 비록 교회에는 안 다니지만 교회 밖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개신교처럼 십자가의 복음이 들어와서 그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구원 받는다면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사람들은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더 나아가서 ?착한 일 하고 나쁜 짓 하지 말라?는 계명이 양심에 의해서 모든 인간에게 다 심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맹자의 논어에 나오잖아요. 서경덕, 이황, 이퇴계 전부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지요.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하나님 말씀 배우는 것도 물론 하나님의 뜻이지만, 부모 공경하기 위해서 부모가 싫어하는 교회 안 나오고 부모가 기뻐하는 일 하는 것 이것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이렇게 폭넓게 모든 것을 용인하고 수용하는 이유는 결국 연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연옥 교리가 나오기 전에 외경, 가경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바울계시록, 에스라계시록 등등이 있는데, 참고로 에스라계시록에 보면, ?지옥을 가니 일곱 천사가 지키고 있더라. 70 계단을 내려왔고, 두 마리 사자가 있는데 그 입에서 불이 나왔더라. 의인들을 그 불에 까딱 없었는데 다른 이들은 불타버렸다. 불 가운데 거대한 냄비가 하나 있더라. 냄비에 의인은 통과하는데 악마에 의해 냄비로 던져지니까 죄인들은 그 냄비에 빠지더라.?
이것 보니까 뭐가 생각나는가 하니, [반지의 제왕]이 생각나요.
바울계시록이란 것이 있는데 이 가짜 성경에서 연옥이 최초로 나옵니다. 상층 지옥이 있고 하층 지옥이 있는데, 상층 지옥은 연옥이고 하층 지옥은 진짜 지옥입니다. 하층 지옥에 가면 굶주림, 목마름, 더위, 악취 등 수많은 영혼들이 순서대로 불에 들어가고, 무서운 강 위에 다리가 있는데 어린아이들은 다 통과하고 악인들은 빠지는데, 특히 고리 대금업자 이 사람은 자기 혀를 먹는답니다. 정조를 더럽히고, 어린 아이를 돌보지 않았던 영혼들은 용과 뱀에게 욕을 당하고, 고아와 과부를 학대한 사람은 벌거벗은 채 추운 곳에서 벌벌 떨고 있고 등의 기록이 있어요.
저는 바울계시록의 내용을 보면서, 사람의 악한 상상력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다 볼 수 있는 것 같았어요.
이제 좀 더 진도를 나가 봅시다.
하늘의 질서는 법과 자유의지가 결합해서 이 땅에서 자유의지를 제대로 사용해야 선이 되고 악도 된다. 그러면 왜 자유의지가 필요하냐? 지옥이 있지요. 지옥은 나쁜 짓했기 때문에 책임져야 하는데, 책임지는 것은 본인의 의사 결정에 의해 한 것만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억지로 한 것은 책임감이 덜 해요. 타인이 시켜서 강압적으로 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감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벌을 물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심판을 가할 때는, ?네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행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잘 못 되었다.? 이럴 경우 벌이 다른 이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한 그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이 지옥이란 것입니다.
야, 참 말 되네. 정말 공정하고 괜찮은 이론이지요?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자크 라캉이란 사람은 아주 예리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이 자유를 자유케 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굉장히 예리한 질문이지요?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만약에 내가 자유롭다면 이 자유를 자유롭게 한 원인이 있을 것 아닌가 말이지요. 그리고 그 원인과 결부되었다면, 그 자유는 온전한 자유가 아니고 원인에 의해 파생된, 원인에 종속된 것이지 독자적인 자유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비타 500]을 주셨는데, 제가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비타 500을 먹을 자유가 있습니다. 제가 먹겠습니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먹은 것에 대해 책임지겠습니다.? 이렇게 했다면, 이것은 제가 비타 500을 먹고 만족하니까 이런 이야기 했지, 만약 비타 500의 맛이 마음에 안 든다면, ?도대체 누가 비타 500 가져왔어요. 박카스를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비타 500을 다른 마실 것이 없어서 마셨지 다른 음료수가 있었으면 비타 500을 안 먹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강도짓을 했습니까??
?카드 빚 때문에 그랬습니다.?
?카드는 누가 사용했습니까??
?내가 사용했지만 이 사회가 너무 쉽게 카드를 발급해 줘서 내가 발급 받았습니다.?
결국 누구 탓입니까? 원인 제공자가 따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인간의 자유가 만약 원인 없이 진짜 자유라면, 이것은 자유가 아니고 주체의 절대성입니다. 주체의 절대성이 뭐냐? 신 아닙니까. ?내가 곧 신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왜 ?자유가 있다?고 엉뚱하게 위장해서 말하느냐 이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데, 이 자유의지가 법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인지 하나님이 실수해서 나온 것인지 이것을 규명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천주교를 아무 대답을 안 합니다.
만약 이 자유의지가 법에서 나왔다면, 결국 책임추궁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법대로 되었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왜 예수를 팔았는가? 성경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대로 되어야 하니까 예수를 팔았어요. 그러면 가룟 유다에 대한 사면 운동을 벌여야 해요.
만약 가룟 유다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제가 만약 실컷 복음 전했는데 지옥으로 보내더라. 제가 복음을 전했는데 왜 지옥 보냅니까? ?주의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면 가룟 유다와 내가 만나서, ?우리 예수님 배반하기를 잘했지! 저걸 하나님이라고 따라다녔어.? 이렇게 나올 것이 뻔하지요.
라캉의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너만 신이냐? 나도 신이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를 그렇게 절대시 하도록 만든 것이 누구냐? 그것이 바로 너 배후에 감추어진 악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악마를 들춰내기 위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순과 모순을 계속 일으켜요. 이런 모순을 일으켜서 결국은, 본인 입에서 ?예수, 너만 잘났냐? 나도 잘났다. 어찌 너 이름만 구원이고 내 이름은 구원이 아니냐? 내 이름 부인하고 너의 이름으로 구원 받으라고. 천만에. 나는 생생하게 내 이름 살릴래.?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적개심. 주님에 대한 반발.
여기에 대해 주께서 말씀하시지요. ?이제 튀어나오나? 진작 나오지. 꽁꽁 감추려고 그렇게 얘를 섰는데 안됐다 얘야!?
주님은 기어이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는데 철저하게 자기 성도들을 이용합니다.
5분만 쉬고 계속 공부합시다.
(2005. 9. 8. 15:2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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