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율법 4번 강의
05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동은교회) - 강의 4
서경수 2005-09-14 22:33:09, 조회 : 1, 추천 : 0
강의 4-1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의 지으신 세상을 네가 책임지고(청직이라고 하지요)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공장장?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러니까 회장님 따로 있고 공장장 따로 있고. 회장님이 공장 자체를 공장장에게 위탁해서 잘 돌아가도록 했고, 공장장은 자기 책임 하에 일하되, 늘 회장님께 검열받고 허가받고 보고하면서 지시대로 일해야 한다.? 이렇게 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정적인데, 이렇게 되면 유대인이 왜 필요합니까? 이스라엘 백성 따로 세우지 말고 모든 종족을 똑같이 대우해서 그들의 선함을 통해서 영광 받도록 하면 되는데 왜 이스라엘을 세우고 율법을 주었는가 말이지요.
이 점에 대해 천주교에서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의 최고의 법은 인간이 실패를 경험해 봐야 최고 경지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바리새인보다 더 낳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으니까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봐서 바리새인보다 더 높은 높이뛰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성령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가 뭐냐, 자기 잘못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회개도 없지요. 그리고 교만하고. 그들은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 없는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인간적인 그런 윤리와 도덕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천주교의 주장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마지막 통로로 여깁니다. 이것마저 없어지면 진짜 교통이 단절되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것은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모델케이스로 보여주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윤리와 도덕이란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상태에서 당신이 말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월등한 윤리관은 뭔가? 사랑이란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을 이룬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사랑으로써 바리새인과 유대인보다 더 나은 법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사랑(부부간 사랑이나 친구간의 우정 등)은 최고 경지의 사랑에 미흡하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것이 최고의 사랑이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었고, 그 최고의 사랑의 경지가 비로소 유대인들이 실패한(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유대인들은 성령 받지 않아서 실패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사랑을 받은 신약의 성도는 이제는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그래서 로마서 8장 4절에 보면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가 뭐냐 하면, 율법의 요구는 원래 바리새인들에게 준 것인데, 그들은 사랑의 영을 받지 못해서 율법의 요구에 미흡했습니다. 이제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성령 안에는 주님의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율법의 사랑을 비로소 다 이루어서, 그렇게 이루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법)는 우리 성도로 인하여 이 땅에 의로움이 번지고(이것은 자기 의지 예수님의 의는 아닙니다) 이런 것이 모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빛과 소금의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완벽 하지요? 우리의 상식과 너무 일치하는 것 같아요.
자, 이러한 천주교 교리를 개신교 입장에서 솔직하게 바라보게 되면, ?핵심은 같은데 범위가 우리보다 한 수 넓네(이들은 불교도 용납하니까).?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왜 개신교는 핵심은 같은데 불교는 용납하지 않고, 천주교는 용납하는가? 이 차이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수준에서는 그 차이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칼빈보다 한 수 위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교주가 장로교 교주보다 한 수 위더란 말이지요. 그리고 칼빈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그대로 받은 사람이에요. 천주교가 돈 받고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리고 하는 그런 것들이 문제였지 기본 교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것이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을 본받았고, 루터와 칼빈은 어거스틴을 직수입했다고 보면 됩니다.
어거스틴이 뭘 주장했는가 하면, 바로 연옥설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입니다. 죽은 자기 엄마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교회에 요구한 사람입니다. 산자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주면 죽은 자가 산자를 위해 기도해요. 왜? 같은 집안이니까.
칼빈의 성화론 교리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가치 중립적인 행동]이 있어요. 예를 들면, ?목사님! 아침 먹고 약 먹는 것이 낫습니까? 약 먹고 아침 먹는 것이 낫습니까?? 물을 때, ?그것은 선과 악의 가치가 유보된 것입니다. 무엇을 먼저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리스트를 한 번 작성해 보세요. 1) 나쁜 것 2) 확실히 나쁜 것 3) 덜 나쁜 것 4)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것 5) 약간 좋은 것 6) 확실히 좋은 것
이렇게 한 번 나눠보세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연옥설을 갖고 있고, 나름대로 윤리적은 스펙트럼을 다 가지고 있어요. 심지어 맹자, 공자도 다 그래요.
그러니까 천주교의 교리는 성경 볼 필요도 없이 현재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윤리적인 스펙트럼을 그대로 정당화해 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왜? 모든 존재는 선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지금 하는 말이 뭔가 하면, 개신교에서 이 천주교 윤리를 함부로 비판할 수가 없어요. 현재 개신교의 성화론이나 이런 것 가지고는. 오히려 개신교의 이런 교회보다 더 폭이 넓고 대승적이고 더 깊이 있고 사람들에게 설득력도 있고 그렇습니다.
영혼은 신과 직접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가 떨어져도 영혼만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육체는 질료(재질)이기 때문에 떨어져 나가도 괜찮아요. 영혼만 건전하면 육체가 어떠하든 문제없어요. 이것이 천주교의 주장입니다.
여기에 대해 루터는 이렇게 놀렸어요.
?성경에는 영혼 중심의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성경에는 인간은 몸이 인간이지 영혼 + 육체가 인간이 아니다.? 라고 했어요. 이것은 천주교가 주장하는, 영혼이 신과 결합해서 영혼 불사한다는 이론은 이방 종교적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첫 계시를 뭘로 보는가 하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십자가로 보고 있어요.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데, 예수님의 죽음이 가짜 죽음이 아니잖아요. 우리와 똑같은 죽음이라면 그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과 같은 죽음이라면 그분의 죽음이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죽음으로 끝나버려요.
여기에서 천주교의 주장이 옳다면 대신 죽는 것이 나와야 해요.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대신 죽음?은 중요치 않고, 모델케이스로 죽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숙제를 하나도 안 했습니다. 저 혼자 했는데, 선생님께서 숙제 안 한 얘들 때릴 것을 저에게 때립니다. 때린 후 더 이상 숙제 이야기는 안 합니다.
천주교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숙제 안했지! 안 하면 어떤 벌을 받는 줄 알아. 에이 이놈아, 네가 와서 대표로 맞아.
이것은 숙제 안한 것에 대해 한 사람이 모델케이스로 맞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죄를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죄 지으면 이런 식으로 저주받는다는 것을 예수를 통해서 모델로 보여주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경고를 받고 절제된 행동을 해서 앞으로는 바르게 살자. 뭐 이런 식이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모델적 의미로만 효과가 있을 뿐이지 실제적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몽땅 가져가는 것으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악마가 보통 때는 눈에 안 띄어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면 악마는 본색을 드러냅니다. 악마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왜 우리의 윤리관, 양심으로 납득이 안 되는 소리를 하냐? 누가 대신 죄를 씻어준다는 그것은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방금 복음과 천주교를 대비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결판이 났는데, 그럼 개신교는 어떻습니까? 개신교가 루터와 칼빈을 따른다고 했는데, 문제는 루터를 따르자니 교회 손님이 안와요. 손님은 어떻게 해야 오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니 구원 되었습니다. 그 방법을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 받습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손님이 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니라 ?믿어지십니까? 안 믿어져요? 그럼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손님 오겠습니까? 여기서는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에 대한 해답이 없어요. 구원 얻을 방법이 도무지 없다구요.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방법을 달리했어요. 개신교이지만 납득도 되는 두 가지를 융합을 했습니다. 두 가지를 합쳤다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합쳐질 수 없는 것이니까. 여하간 이렇게 합쳤다고 사기를 쳤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천주교는 선행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지만 루터, 칼빈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주장했기 때문에 간판으로 내걸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해요. 그리고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하면서 천주교의 행함을 그대로 가지고 옵니다.
그러니까 겉은 개신교인데 속은 천주교와 같아요. 왜 불교를 반대하는가? 불교는 행함 종교이고 자력 종교이지만 우리 개신교는 타력종교 - 남의 힘에 의해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지요. 이런 주장에 대해 성철 스님이 비웃습니다.
성철 스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구원은 오직 부처님의 공덕으로 받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또 뭐라고 했는가 하면, ?믿고 난 후 행함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 그 자체가 거룩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철의 이런 주장 때문에 동국대학교 교수들과 큰 교리논쟁이 벌어졌어요. 그쪽에서는 [돈오점수] - 깨닫는 것은 순간이지만 수양되는 것은 점차적이다. 그들은 법을 중요시합니다. 법이란 것은 실천의지가 투입될 때 법이 가시화된다고 보았어요. 그러나 성철은, 믿음도 깨닫는 순간 믿어지고, 믿는 그 순간 이미 모든 법은 다 이뤄진다. 그럼 법은 뭐냐, 이미 이뤄진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에 불과하다. 법을 지켜서 새삼스럽게 거룩하게 된다면 어느 세월에 법을 다 지키겠는가? 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는 [돈오돈수]를 주장했어요.
불교의 이런 논쟁은 사실 신라시대 때 원효대사가 [돈오돈수]를 주장했어요. 그 당시 주류 계급들은 [돈오점수]를 주장했고.
[돈오점수]가 되어야 이게 장사가 됩니다. 차츰 나아진다고 해야, 열심히 돈도 갔다 바치고 하지, [돈오돈수]를 말하면 한꺼번에 구원 받아버렸고 그렇게 되면 누가 돈 내겠어요? 이런 교리는 단순한 논쟁 갔지만 절의 존폐를 결정짓는 중요한 싸움입니다. 절을 계속 운영해 가기 위해 이런 교리들이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개신교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에 기록했으니까, 천주교같은 선한 행위가 안 나타나면 결국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진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이려면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자고 행위를 해야 합니다.
개신교가 ?믿음으로 구원 받고,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한다.?는 이 두 가지를 말하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런 개신교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존재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나, 하나님 압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와 동일한 것이고, 이것은 유대인과 동일한 것이고, 또 이방 종교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말하기를, ?십자가는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은폐하기 위함이다.?고 했습니다. 단,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아는 자에게만 드러나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인데, 자기 택한 백성 외에는 아무도 못 믿게 하기 위해서 봉쇄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십자가를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누가 죽였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가 하나님을 살해했어요. 그러니까 기존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엉터리 하나님이었을 뿐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한 용도로서의 신이지요.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바로 내 속에 있는 엉터리같은 하나님(우상)이 진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원인 제공이 되었구나.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 행하심만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종속되는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데, 기존의 천주교, 개신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채웠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신의 존재를 가지고 믿음으로 보고, 진짜 믿는 자들은 십자가의 내용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니 이 둘 사이에 대결구도가 형성될 수밖에 없어요. 누가 이런 대결 구도를 만들었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조장했습니다.
문: 당신은 뭘 믿습니까?
답: 예수 믿습니다.
문: 하나님은요?
답: 하나님도 믿지요.
문: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의 대상은 두개입니까, 세가 입니까?
답: 세분입니다.
문: 누구 누구를 믿습니까?
답: 성부, 성자, 성령을 믿습니다.
문: 이 셋을 각각 믿습니까?
답: 아닙니다. 삼위일체로 한분을 믿습니다.
문: 그러면 한 분을 믿네요.
답: 그렇지요.
그렇다면 진작 삼위일체 한분 믿는다고 말하지.
삼위일체 한분을 믿는다는 이 말은 결국 천주교의 니케아 회의에서 나온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존재를 믿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사도신경에 나오잖아요.
사도신경에 나오는 ?십자가 죽으심?은 그냥 일어난 사건이고,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에요. ?예수님 오셔서 이 땅에서 이런 고생 했단다.? 그냥 지나간 거예요.
[지옥의 하나님]에 보면, ?개신교들이 십자가를 믿을 때 독감 주사 맞는 식으로 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독감 주사 한 번 맞고 또 맞습니까? 한 번 맞지요. 독감 주가 맞은 후에는 건강한 몸으로 착한 일 해야지 무엇 때문에 또 독감 주사 맞느냐구요.
그런데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매일같이 독감 주사 맞듯이 한단 말이지요. 이제는 제발 십자가에만 머물지 말고 떨치고 나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6장을 보세요. 떨쳐 나오게 되어 있는가?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기 보면, 십자가가 한 번 독감 주사가 아니고, 영원히 그 안에 머물러야 되요. 영원히 십자가 안에서 머물러야 십자가의 효력을 보는 그러한 관계성을 십자가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피로서 애굽에서 나온 후 제사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어린양을 잡아서 그 어린양의 속죄 안에서 계속 돌아야 해요. 그리고 성막에서 매일같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제사가 드려지고, 그 제사 덕분에 이스라엘은 용서의 은혜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소산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양이라는 옛 언약이지만 지금은 새 언약 속에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디를 가도 십자가 속에 있는 사람으로서 십자가 안에 있는 자로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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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4-2
십자가 대속의 의미가 성도가 착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까지 커버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성도가 착한 일을 하기 위한 동기부여로서 십자가가 있었지, 십자가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앞으로 착한 일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성경 해석이 아니라는 것이 천주교의 주장입니다.
이것이 상식적이고, 우리 양심에도 부합되고, 일반적인 윤리적 통념과 도덕성에 부합되는 완벽한 이론 아닙니까?
그런데 만약에 십자가를 가지고 거기에서 믿음을 시작한다면 이 땅에는 인간들이 설쳐대는 세상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 분이 설쳐대는 세대인데 이것을 ?인자의 때?라고 합니다. 사람의 때가 아니고. 인자의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지금 설쳐대는데 --
그러면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어떤 계획을 세웠습니까?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 곁에 항상 주님이 계세요. ?바울아, 네가 로마에 가서 증거해야 된다.? 사도바울이 언제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려고 계획했습니까? 바울은 로마에 안 가려고 했어요. 터키, 이란 쪽으로 가려고 했지 로마에 가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가는 것도 바울이 배 티켓을 구입해서 로마로 간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죄수의 신분으로 바울을 로마로 보내셨습니다. 기껏 주께서 바울을 로마로 보내신다는 것이 죄수의 신분으로 화물칸에 집어넣어 보내십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자의 때에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은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발걸음을 세시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실하게 잘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착한 일 한 가지 더 했다고 해서 주의 일이 더 잘 되고, 내가 나쁜 짓 했다고 해서 주의 일이 막히고 한다면 도무지 누가 주님인지 분간이 안 되지요.
천주교의 주장은,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일은 우리에게 맡기셨기에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한 이성이 있으니까 잘못 된 것은 반성해 가면서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최고의 사랑은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 이외에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리 그 사람을 달래고, 밥 사주고, 비위 맞추고 해도 복음을 전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란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을 달래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그 사람의 존재를 있으나 마나한 시시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을 모르는 남편이 남편: 여보, 내가 직장에서 쫓겨났어. 앞으로 우리가정은 어떻게 살지?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니까 내가 복직될 수 있도록 기도해줘.
아내: 여보, 당신 직장에서 쫓겨난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예수 안 믿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인데,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은 큰 문제도 아니야.
남편: 당신의 머리에는 뭐가 들어 있기에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단 말이야? 우리 가족이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내: 가정 파탄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러세요.
남편: 그럼 당신하고 갈라서자.
아내: 갈라서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남편: 그럼 당신은 뭐가 중요하노?
아내: 우리가 죽고 심판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요?
그런데 방금 예를 든 이런 아내가 있을까요? 없어요.
남을 모델로 삼지마세요.
본인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그때 그때 마다 모델이 될 수밖에 없어요.
특정 인간이 "이렇게 간 것이 주의 종의 길이다." 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신자는 뭔가를 느낍니다. 뭔가 내 뜻대로 안 되는 구석이 있고, 어떤 힘에 의해서 내 인생이 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이런 느낌.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느낌은 다음 시간에 확인해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 십자가 달렸다고 해도 우리는 남의 이야기로 들려왔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훌륭하고 더 착할 수 있는 완벽한 선을 추구하는, 그래서 더 단단해지는 나의 주체가 나의 생명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선악과며 생명나무가 아닌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우리이름 대신 주의 이름이 우리 속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5. 9. 14. 10:2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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