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율법 7번 강의
05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동은교회) - 강의 7
서경수 2005-09-23 10:15:15, 조회 : 4, 추천 : 0
강의 7
이게 도대체 몇 번째 시간입니까?
다섯 번째 시간입니까?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그동안 강의를 하면서 ?우리의 의가 아니고 주님의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불안한 것이 있지요? 아무리 예수님의 의를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착한 일 하지 아니하면 큰 낭패를 당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것을 인간이 갖고 있는 ?원초적 불안?이라고 합니다.
원초적 불안 또는 걱정 혹은 기우 -
원초적으로 사람은 불안하게 되어 있는데, 나쁜 짓 많이 한 사람도 원초적 불안을 갖고 있고,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도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도 원초적 불안, 부자가 되어도 원초적 불안.
이런 원초적 불안을 제거할 수 없을까? 학자들은 이런 것을 제거할 수 없다고 하고, 다만 원초적 불안이 있는 것은 ?진짜 뭔가에 접근하는 것으로 알아라.?는 식으로 설명을 하지요. 칸트도 그렇고 특히 천주교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사람에게 원초적인 불안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존재의 기반(존재의 가장 밑바닥)에 하나님의 은총이 깔려있고, 그 하나님의 은총의 덕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은총과 가까이 접근하다보니 내가 가진 것 이외의 플러스 알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외의 또 뭔가 플러스 알고 있는 그것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 그 미흡함 때문에 불안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원초적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면, 법을 만들면 됩니다. 법을 만들어놓고 그 법을 지킴으로써 불안이 해소되고 안 지키면 불안이 그대로 있지 않느냐 생각하는데 그것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지킬만한 법만 만들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본인이 법을 만들기 때문에, 예를 들면, 성경을 너무 안 읽었다. 그러면 스스로 법을 세우지요. 이제부터 매일 성경을 2장 읽는다. 이렇게 법을 만든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싹 가십니다. 그리고 법에 따라 2장씩 읽어 나감으로 예전에 있었던 불안이 사라지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평소에 내가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다. 하루에 200장 읽자.? 이런 법을 만든다면 200장을 못 읽었을 때 하루 종일 불안합니다. 그러니 이런 무리한 법은 안 만들겠지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이 원초적 불안을 갖고 있는데 불안을 갖고 있을 때 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스스로 법을 만들어요. 입법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통해 아직도 나는 자유가 있구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법을 내가 만들었으니까.
법을 만듦으로써 불안과 근심을 해소하는데, 그 법을 만들 때 어떤 법이냐 하면 자신이 능히 지킬 수 있는 가벼운 법을 만들지요. 담배를 10년 전에 끊은 사람에게 ?이제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 이런 법은 기분 좋은 법입니다. 왜, 이것은 이미 다 지킨 법이니까요. 운전면허증도 없는 사람에게 ?이제부터 안전띠 매지 않는 사람에게 3만원 벌금?이런 법이 생겨도 상관없습니다. 이런 법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루 성경 2장 읽는 법을 만들고 불안을 해소했는데, 2장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어느 순간 원초적 불안이 싹트기 시작해요. 그렇게 2장을 3장으로 인상을 합니다. 2장은 적다. 하루 3장은 읽어야지. 하루 3장 주일은 5장 읽으면 1년에 1독 한다. 이렇게 스스로 3장으로 인상을 해요. 이 스스로 만든 법에 벌칙을 본인이 또 만들어요.
주님께서는 십자가 복음으로 사람을 심판하는데 인간들은 그게 아니라 스스로 법을 만들고 벌칙도 스스로 세웁니다.
인간이 불안해서 스스로 법을 만들고 벌칙까지 만들고 하는 이런 습관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이것이 선악체계에서 나왔거든요. 선악체계의 공식이 이렇습니다. ?이 땅에서 죄를 지으면 이 땅이 나에게 저주로 되갚아 준다.? 이런 인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인식 가지고 구약성경을 읽어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죄를 지었기에 가만히 있는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게 하고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갑자기 공격하고 있지요.
땅과 밀착되어 있는 나. 나와 밀착되어 있는 땅. 내가 잘 했느냐, 잘 못 했느냐에 따라서 땅이 나에게 복을 주느냐, 화를 주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그런 양상으로 구약 성경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보면서, 혹은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여러분들이 행동을 똑바로 해야 가정과 사업과 교회가 복을 받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 똑같네. 성경 말씀이나 내 평소 생각이나 차이가 없네. 우리 목사님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같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서 죄를 지었더니, 특히 아간이 죄를 범했더니 죄 짓지 않은 다른 공동체까지 아이성을 침범하지 못해서 혼쭐이 나지요. 그래서 아간을 처단하니까 하나님이 아이성을 정복하게 하셨다. 이것으로 봐서 죄는 한 사람이 지었으면 그 죄가 여러 사람을 괴롭게 한다. 부모가 죄를 범하면 그 벌이 자식까지 아니 후손 3-4대까지 내려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가 법을 잘 지키면 1,000대까지 복을 내리리라고 했어요.
조상 1,000대 한 사람이 법을 잘 지켰으면 1,000대 후손인 우리는 이 모양 이 꼴로 안 살고 있습니다. 그리니까 우리 조상들은 아주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1,000대가 복을 받는다면 이 조항이 상당히 애매한 조항인데, 윗대 어른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 그 복이 1,000대까지 전수된다면, 만약에 그의 손자가 실수해서 죄를 범했을 경우에 1,000대까지 복 주는 것이 취소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저승관? 사람이 죽어서 어디에 가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복잡하고 난해해서 신학 책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의 언급이 없습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소설이 되거든요.
[지옥의 하나님]이 소설이 될까 걱정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것이 소설이나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실이란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래서 땅과 죄와의 연관성이 구약 성경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한 번 보세요. 구약 성도들이 ?사람이 죽어서 어디에 가느냐?? 하는 문제는 세 군대 갑니다. 아니 가는 것이 아니지요. (이 세 곳 모두 땅이기 때문에 그냥 땅에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늘나라. 사람이 죽고 난 뒤에 하늘나라. 그 다음에 스올이란 곳이 있어요. 요나에 나옵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하면 저승이라고 하지요. 하늘 있고, 땅 있고, 스올 이렇게 세 군대가 있지요.
성경 한 군대를 찾아봅시다.
시편 71편 20절에 보면, ?우리에게 많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고 해서 죽은 자들이 집합하는 장소가 ?땅 깊은 곳?으로 되어 있습니다.
?땅 깊은 곳?이니까 땅을 떠나지 않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하면 하늘에 계십니다.
구약 성경의 특징은 인간이 땅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땅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구약 성경의 아주 독특한 저승관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죽으면 땅을 벗어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인간은 죽어도 그 땅에 그대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처음부터 창세기 3장 24절에 아담이 죄짓고 난 뒤 하나님이 추방해 버렸습니다. 어디로 추방했느냐? 땅으로 추방했어요.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 원래 아담이 있었던 장소는 낙원이었고, 낙원에서 현재 살고 있는 땅으로 추방되었고, 낙원은 우리와 상관없는 곳이 되었어요. 천사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 곳으로는 갈 수가 없고 우리는 죽으나 사나 땅에 속한 것입니다. 살아서도 땅에 머물고 죽어서도 땅을 못 벗어나는 그런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짓 한 사람은 어디에 갑니까?? 하는 질문이 구약 성경에도 있어요. 어디 가느냐? ?힌놈의 골짜기?라고 해서 ?게헨나?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신약에서 번역해서 ?하데스?(지옥)라고 했는데, 이곳이 뭐하는 곳인가 하면 쓰레기 태우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남쪽에 쓰레기 태우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쓰레기 태우는 곳도 역시 땅이에요.
구약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낙원에서는 추방되었으니 낙원은 우리와 상관없고 땅으로 추방되었으니 죽으나 사나 우리는 땅에서 못 벗어나는데, 땅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사나 죽으나 동일한 원리, 즉 땅의 원리에만 저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땅을 없애려고 합니다. 따라서 땅에 사는 인간들도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없어질 땅에 내가 살면서 ?나는 죽어서 어디에 갑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 왈 ?너는 땅에 있고 땅과 함께 날아가 버린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말라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보면 여러분들이 굉장히 생소하게 느낄 것입니다. 4장 3절에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라는 그 궁금증. 이것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갖고 있는데, 구약 성경에 의하면 악인들은 땅에서 재와 같이 처참한 운명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으면 ?스올?로 빠지는데 그 빠지는 모습이 마치 재와 같이 밟히면서 그렇게 간다는 것이지요.
구약 성경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어서 항상 하늘로부터 땅을 지배하는 원리에 저촉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저촉을 받는 한 예가 출애굽기 22장 18-19절에 나오는데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 짐승과 음행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도 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제거하고 죽이고 노아 홍수 때에는 지상의 대부분의 사람을 죽이는데, 사람을 자꾸 죽이시는 이유가 그 인간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땅의 원리가 분명히 종속한다는 것을 산 사람에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무당은 살려두지 말라고 하실 때, 무당 개인의 남편이나 자식, 그의 가정형편 이런 것을 하나님은 전혀 고려치 않아요. 무당이 죽는 것을 통해서 무당을 싫어하는 그러한 원리가 여전히 이 땅에 작용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똑똑히 알라는 것입니다.
시편 71편 15-16절에 보면,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고 놀라운 기적이잖아요. 놀라운 기적들이 주의 의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것을 내가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아까 보았던 19-20절에 ?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그 뒤 24절에 보면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주의 의로 홍해가 갈라진다는 이 기적은 윤리가 아닙니다. 모세가 윤리적인 사람이어서 홍해가 갈라진 것이 아니고, 홍해가 갈라진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이 세상에 침투한 그 결과로 말미암아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들에게 계속 이기게 하시는데 이것도 적들을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붙여주셔서 이기도록 하시는데, 그때 나오는 말씀이 뭐냐 하면, 4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적들은 패하는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기 맹세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게임인데, 죄밖에 없는 땅에 의로운 분이 와서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 땅에 갇힌 것이 되지요. 죽어도 맨 그 땅에 있고.
이 땅의 원리가 뭔가 하면, 누구든지 의롭지 않고 거룩하지 아니하고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지 아니하면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그 원리가 그대로 작렬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난데없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 완벽한 의가 등장해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이 무슨 수로 홍해를 가릅니까? 물 퍼내서 건넙니까? 왜 갑자기 홍해가 갈라지느냔 말이지요. 희한하잖아요.
홍해 갈라지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앞서 있었던 열 가지 재앙보세요. 똑같이 사료 먹고 풀 먹고 살았는데 애굽의 가축은 몽땅 죽고 이스라엘의 가축은 멀쩡해요. 이것이 뭐냐 하면, 애굽의 가축이나 이스라엘의 가축이나 이것은 다 하나님 것이지 땅은 어디까지나 하늘이 내려준 그 원칙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가축은 살리고 애굽의 가축은 몽땅 다 죽인 것입니다.
홍해 바다의 갈라짐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에게만 주는 특별 보너스 하늘의 절대적인 의로움이 작용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살았지 결코 너희들의 의로움으로 홍해 바다가 열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자기가 선택한 백성을 통해서 자신의 의를 이 땅에 펼치고자 하십니다.
여러분께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어렵습니까, ?t스올?에서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것이 어렵습니까?
이것은 둘 다 어렵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둘 다 사람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죽어서 어디에 가느냐?? 하는 문제는, 어디에 가는 것이 아니고 죽어도 맨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지요. 다만 약간 깊은 곳에 있단 말이지요. 산 사람 활동하도록 너희들은 좀 비켜다오. 그래서 땅 속 깊은 곳에 집어넣어요. 땅 속 깊은 곳에 집어넣고 이제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여기에서 살리는 것은 오직 시편 71편 19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의로 사는데 16절에서 그 의가 이미 앞당겨서 홍해를 통해서 여리고를 통해서 그 놀라운 기적을 봤기 때문에 그것을 네가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이 대단한 믿음입니다. ?홍해 갈라지고 노아 홍수가 벌어진 것이 오직 주님의 의로움으로 한 것이다.? 라고 믿는 자라면,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나의 의로 구원 받는다?는 그 이야기가 믿어지고 납득이 되지요.
야!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우리에게 죄 용서하신 것은 우리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홍해 갈라지는 그 의)가 이제 우리에게 임하므로 말미암아 이 말씀대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사는구나!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결론 내리면, 현재 인간들은 존재론적으로 영혼이 어떻고 육체가 어떻고 이렇게 이분론으로 이야기하지만 구약은 이것을 한 덩어리로 만들었어요. ?땅? 인간이 이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해도 ?땅?, 죽어서 ?스올?에 갇히고 자기 힘으로 부활되지 못한다. 그 원리에 다같이 갇혀있는 거예요.
?목사님, 우리가 죽으면 하늘나라 바로 갑니까, 어디 딴 곳에 거쳐서 갑니까? 그러면 거지 나사로가 갔던 아브라함 품이 천국입니까, 아니면 연옥입니까?? 묻는데 정답은 ?땅?입니다.
어디에 있던 땅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땅과 낙원과 하늘 이런 구조 자체가 예수님 앞에서 다 날아가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전체의 구조 자체가 모형이기 때문에.
이것이 골로새서에 나옵니다. 3장 2절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절에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우냐 하면, 이것을 영혼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됩니다. 가만 있어보자. 지금 내 생명이 하늘에 있지. 그러면 지금 이 목숨은 뭐며, 하늘에 있는 생명은 뭔가? 둘 중 어느 것을 골라잡으란 말인가?
현재 우리가 땅에 속한 이방인이기 때문에(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무슨 중심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땅? ?스올? 이런 개념이 아니고 ?나?라는 개념에서 ?내 속에 영원불멸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조사를 해 보니 그게 ?영혼?이란 거지요.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했어요. 내 속에 영혼은 불멸하고 우리 육체는 사라지니까 영혼 하나 잘 건져보자. 그런데 영혼을 잘 건지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면 이 죽은 영혼 집합하는 장소가 어디냐? 이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옷도 안 입고 그냥 돌아다닐 수도 없고, 이게 뭐냐 하면, 김기동의 귀신론입니다. 이것이 이방 종교적인 현상입니다.
영혼불멸을 통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땅에 속하고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만 구원한다? 이러면 되는데, 내 영혼을 분석하고 쪼개서 이것 하나 건져보려고, 영혼과 함께 ?나?라는 존재도 영원해 보려고 이런 시도를 하니까 성경 전체가 해석이 전혀 되지를 않습니다.
신약의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처럼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지 않고 그냥 ?몸?으로 봅니다. 성경에서 우리 인간을 ?몸?이라고 하는 이유는 땅에 속해서 땅의 원리의 저촉 대상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또 계산을 해요. 영혼 더하기 육체니까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는데 그러면 영혼은?
영혼과 육체를 나눠서 육체는 포기하고 영혼 하나 건져서 나중에 부활한 육체하나 건져서 밑에서 구원 받겠다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단독적으로 존재를 가지고 따지는 것은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반칙입니다. 그렇게 보지 말고, ?나?라는 것은 내 몸뚱어리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원리에 지배를 받는 관계로서 ?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꽃잎이 있고 가지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게 무슨 나무입니까? 이 나무 주세요.? 했을 때, 잎만 떼서 줄 수 없잖아요. 전체 다를 줘야 된단 말이지요. 우리는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있는 나를 내 몸이라고 하는데 성경에는 그런 것이 없고 그 몸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담겨있는 몸을 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안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위로 잘라버리고 여기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이것으로 내 몸이 성립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몸은 없어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인간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단독적은 나 자신으로부터 하나님도 찾아가고 예수님도 찾고 뭔가 자꾸 시도하려고 해요.
?내가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너는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혹시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자 아닙니까?? 라고 나오면, 하나님은 ?도대체 누가 그런 말 하든데?? 라고 되묻지요.
우리가 하늘에 갈지라도 주님 거기 계시고, 땅에 갈지라도 거기 계시고, 바다 끝에 갈지라도 거기 계십니다. 이 말은 내 곁에 주님이 늘 함께하신다는 말도 되지만, 아예 내 몸 자체가 하나의 하나님의 원리로 움직인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어떤 몸이냐 하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언약적 관계 속의 몸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내가 죽는 것은 내가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 마르다가 우니까 주님께서 같이 울잖아요. 왜 웁니까? 왜 죽은 오빠 나사로만 보느냐는 것이지요. 나사로와 예수님의 관계까지 왜 못 보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은 나사로에게 명하셨지요.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이 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걸어 나왔지요. 이것은 뭘 말씀하는가 하면, ?봐라 나사로 살았잖아? 라는 것이 아니고, ?봐, 내가 부활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 안에 뭐가 박혀있었는가 하면 예수님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게 오빠와 같이 오순도순 잘 살았으면서 오빠 나사로만 본 거예요.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신다는 것은 모르고 죽은 오빠만 걱정하고 있는데,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인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것이지요.
이것이 언약을 몰라서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말입니다. 죽든지 아프든지 어떤 상태에 있어도 항상 주의 것이에요. 그래서 ?단독적으로 내가 산다.? 이런 개념은 신.구약에 없습니다. ?단독적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하나님의 원리 원칙이 나온다.? 이것이 성경의 뜻입니다.
내가 살아 있어도 원리 원칙이 나오고 죽어도 언약적 원칙이 나오고, 불신자가 죽는 것을 보면서, ?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구나.? 거기에 하나님의 원리가 들어 있고, 성도가 죽는 것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의 안식이 들어가는구나.?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2-3) 할 때, 그 위엣 것(하늘)이 지금의 하늘이 아니라, 그것은 구약의 모형적으로 만든 땅의 원리에 있을 때의 하늘이고, 지금은 어디가 하늘인가 하면 예수님 안이 하늘입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의 하늘은? 이것은 땅이라고 합니다. 구약적으로 보면.
기력이 쇠해서 벌써 가물가물 하시지요? 조금만 더 하고 쉬겠습니다.
구약 때 하늘과 땅과 스올이 있는데 이것이 신약에 오면 이 셋이 몽땅 땅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 불에 태워집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안에서 둘로 나눠집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이 둘로 나눠질 뿐입니다.
왜 그러면 이러한 사고방식을 주셨는가 하면 인간이 땅에 속했기 때문에 땅에서 보면 하늘밖에 안 보이고 죽은 자가 땅에 묻히니까 땅밖에 안 보이니까 그 구조와 그 언어적 기호를 사용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은 다 모형입니다. 그림자예요. 실체는 진짜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오리지날입니다.
예수님은 위와 같은 인간들의 사고방식 전체를 ?어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새로운 세계를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죽어서 어디 가는가?? 따지는 자체가 ?어둠?의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사나 죽으나 주 안에 있다는 사고방식이 ?빛?의 사고방식입니다.
자, 이제 이번 시간을 마무리 해 봅시다.
사람은 알 수 없는 원초적 불안을 갖고 있는데 왜 그렇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내 행동 여하게 따라서 내가 처해있는 이 땅이 나에게 저주를 퍼붓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걱정과 기후는 어떤 때 발생되는가 하면, 나를 단독자로 간주할 때 이런 염려가 발생해요. 여기서 행동하는 주체가 ?나?이지요. 내 행동여하에 따라서 나에게 저주도 오고 복도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구약에서는 인간들의 사고방식에 맞춰 말씀하시다 보니 행동여하에 따라 복이 오기도 하고 저주가 오기도 하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오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다시는 저주가 없어요. 저주가 없다고 하셨는데 저주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만나가 오후에는 안 내립니다. 안식일에도 내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안식일 날 만나 거두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도무지 믿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다시 저주가 없다고 하셨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저주를 찾으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직도 저주를 내린다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자기가 대신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거짓말일 경우에는 저주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전부 다 바쳤다면 예수님 뒤따라 축복이 와서 우리에게는 저주가 없고 예수님과 함께 모든 하늘의 축복이 다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옵니다.
죄 때문에 박혀있던 그 저주가 이제는 죄가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그것을 ?신령한 복?이라고 했지요. 땅에서 노닥거리는 복이 아닙니다. 땅에서 누리는 권세와 영광은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단이 주는 것이고, 사단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신령한 복?만 사모하지 마귀가 주는 세상 권세, 명예, 물질 이런 것과는 상관없는 자입니다.
목사님, 저주는 없지만 징계는 있지 않습니까?
징계 받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에요. 징계 자체가 남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징계는 파멸하도록 징계하는 법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물리치료로 보면 됩니다. 다리가 아파서 병원을 갔는데 의사가 다리를 만집니다. 꾹꾹 누리기도 하고 접었다 폈다 하지요. 그럴 때 굉장히 아파요. 이 때 환자가 ?왜 아프게 합니까?? 하고 항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지금 물리치료 중입니다.
이처럼 징계는 물리치료와 같습니다. 어그러진 팔을 어긋난 다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주시는 것이 징계입니다.
성도에게는 환란도 저주가 아니고, 핍박도 저주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람은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저주를 논하지 마세요.
(2005. 9. 23. 9:3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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