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05여름수련회-양심과율법1-내가 선택한 것인가 ,예수님이 선택한 것인가

아빠와 함께 2014. 3. 3. 08:59

 

2005년 8월 1-2일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동은교회)

이근호 목사 강의

 

강의 1

 

지금부터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성경 한 구절 찾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1-25절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번 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제가 강의 시작하면서 마태복음 26장 가룟 유다의 이 대목을 통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 자신의 신앙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스스로 점검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분명히 가짜인데 남들 앞에 신앙인인 것처럼 위장한다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가짜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언젠가는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짜 신앙인은 ?열심히 했습니다.?라는 것으로 변명하지만 이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가짜가 나중에 마지막 심판 받을 때 들키지 말고 미리 알아서 스스로 퇴장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마지막 위로가 되지 싶어요. ?나 아니었구나! 괜히 딴 동네 와서 놀았구나.? 하는 것을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자기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스스로 점검하라고 고린도후서에도 나와 있으니까 자기 신앙을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점검을 하는데 가룟 유다의 이야기만큼 더 확실한 게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자기가 선택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의 자리에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으면, 저는 이근호인데 이근호란 작자가 선택해서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 노선은 결국 가룟 유다와 같은 노선입니다.

 

그런데 뭐가 어려우냐 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는 예수님이 자기를 선택한 줄로 알았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를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믿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이런 설교를 평소에 늘 들어왔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 중에 자기가 포함되었다고 분명히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의 현장에서 보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선택한 자가 아니고, 자기가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는 찰나에 도달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예수님이 자신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내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 라고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선택했다는 그 빌미로 내가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강의 처음부터 말이 난해하게 나가는데 좀 난해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것은 너무 중요한 문제입니다.

 

관건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선택한 것과 내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고맙게도 우리에게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왔는가 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거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이 날 선택 했어? 하고 늘 외치고 다녀도 언젠가는 예수님은 과거의 허구적인 인물이고 내가 스스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마치 예수님이 나를 선택한 것처럼 착각에 빠져 있을 수도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판별은, 내 쪽에서 한번 예수님을 버려보면, 이것이 가능하면, 내 쪽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포기해서 이제야 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 ?아이쿠! 내가 그동안 귀신에게 씌었었구나? 하면서 이제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 마음의 평온함을 얻을 때 이런 사람은 자기가 예수님이라는 이미지를 선택했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을 가지고 철학에서는 ?자유 의지?라고 합니다. 일반 신학교에서는 ?자유 의지?를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룟 유다부터 시작하지 않아요.

 

예수님을 버릴 수 있는 자유 의지가 나에게 있다. 이 볼펜을 잡을 수도 있고 놓을 수도 있는 자유 의지가 있다. 이런 자유 의지의 항목 가운데 뭐가 포함되는가 하면 내가 예수를 안 믿을 그런 자유 의지도 있다고 정리가 되신다면 그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이고, 거기에 말려든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마저 그 사람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 걸려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자유 의지?가 있었고,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도 생생하게 ?자유 의지?가 살아 있어서 ?내가 예수님을 버린다면 언제든지 내 쪽에서 버릴 수 있는 그런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 이렇게 믿어진다면 가룟 유다의 노선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면, 걱정되는 것이 방금 내가 물을 마실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는 것처럼, ?자유 의지?의 항목 속에 예수님도 포함되고, 내가 예수님을 버릴 수도 있는 ?자유 의지?가 있다면, 이런 자는 가룟 유다와 같은 종족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면, 어떻게 하든 가룟 유다와 다른 종족이 되려고 뭔가 시도를 할 거예요. 그러면 무엇부터 제거해야 하는가 하면 나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부터 빼야 됩니다.

 

처음 출발점이 ?가룟 유다는 ?자유 의지?가 있다. 물도 마실 수 있다. 나는 꽃을 꺾을 수 있다. 잠을 잘 수 있다. 그런데 그 중에 뭐도 할 수 있다? 예수도 믿을 수 있다.? 이것이 가룟 유다와 같은 종족에 속한다면, 만약 가룟 유다처럼 지옥 안 가기 위해서는 처음 출발점부터 뭘 빼야 되는가 하면, ?나는 자유 의지가 없다?라는 것으로 출발하게 되면, 어떤 허점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가 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을 자유도 없고, 예수님을 거절할 자유도 없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이런 질문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자: ?당신은 자유 의지가 없고, 예수 믿는 것도 당신의 자유로운 의사로 믿은 것이 아니 라면 누가 당신을 예수 믿게 했느냐??

답변자: 성령님께서 믿게 했습니다.

 

나에게 자유 의지가 없으니까 외부에서 믿게 했지요. ?외부인인 성령님께서 나를 예수 믿게 하셨다.? 라고 한다면, 성령님께서 어떤 절차를 가지고 너를 믿게 했느냐? 이렇게 묻게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다.? 라는 말이나, ?성령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말이나 어떤 말을 갖다 붙이든지 간에, 어떤 절차에 의해 믿음이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느냐? 성령님께서 어떻게 너에게 믿음을 주던데? 넌 몰라도 돼! 이러면 안 되잖아요. 성령님께서 어떤 식으로 너에게 믿음을 주셨느냔 말이야? 너는 지금 너 자신이 원인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원인이 되어서 믿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령께서 원인을 주셔서 네가 믿는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그 원인과 결과 사이가 어떤 단계를 밟아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내가 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이런 것은 목사님께 배운 적이 없지요?

그냥 성령께서 믿게 하셨다.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되었다고 배웠는데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어오면 말을 못해요.

 

?내가 분명히 설명할 수는 없다.? 고 하면, 저쪽에서 ?네가 말을 못한다는 것은 성경 지식만 알았다 뿐이지 실제로 그런 느낌과 경험이 없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정말 성령님에 의해 구원 받았다면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표현되면 내가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할 것인데, 말로 못하겠다는 것은 뭔가 받은 것도 없고, 느낀 것도 없으면서 사기 치는 것이다.? 이렇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자가 묻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원인 없이 결과가 없는 것이다. 원인이 있을 때 결과가 있고, 어떤 결과가 주어졌다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러니까 원인이 누구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원인자가 어떤 경로를 통해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

 

내가 몇 년 몇 월에 기도원에 갔거든. 혹은 내가 동은교회 수련회에 갔거든. 동은교회 갔다는 것이 결과는 아니지요. 동은교회 참석했다는 것은 결과보다 좀 더 빠른 것이지요. 이것은 결과는 아닙니다. 참석했고. 그 다음에는? 내가 강의를 듣는 중에 믿어졌다.

 

그렇다면 동은교회 수련회 가서 강의 들으면 다 믿어집니까? 그것이 믿게 된 원인입니까? 동일한 원인을 주면 동일하게 믿습니까?

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동일한 원인만 있으면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믿기는 믿는데 상대방에게 설명은 못하고, ?네가 대충 알아서 챙겨 들어라.? 이런 식으로 책임 회피할 수는 없단 말이지요.

 

동은교회 수련회에 참석해서 강의 들으면 다 믿는가? 다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가? 나는 믿었지만 너는 못 믿는다. 그렇다면 수련회 참석한 것이 믿음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고, 원인 중에 뭐가 포함되었는가 하면,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니고 너만 믿게 되었다고 너를 지목한 그 원인까지 이야기 해 주어야 제대로 원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믿음의 원인, 혹은 출처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딱 너이어야 해!?라는 그것까지 규정해주면서 성경이 넉넉히 다 담겨있습니다. 담겨 있지만 우리는 성경의 깊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대충 가룟 유다같이 ?나는 믿는다. 주께서 나를 선택했다.? 라고 일반적으로 자기한테 최면 걸어서 성경 전체가 내게 해당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룟 유다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심지어 귀신까지 추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덧입어 많은 병자를 고친 사람입니다. 3년 동안 월급 한 푼 없이 어떤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이 자기 목숨 안 받치고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가룟 유다가 결국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믿습니다.? 하는 그 이상으로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첫째시간인데 저는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선택했다. 나는 구원 받았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이 필요하단 말이지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성령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시켰다.? 라는 말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해요. 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줄 때, 아까 제가 이야기한 ?이런 원인이 있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가룟 유다도 똑같은 생각을 했거든요. ?내가 병자를 고친 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역사한 결과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가룟 유다도 이 정도는 다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여름에 계속 가뭄이 들었는데 다른 지역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울산에만 비가 왔다고 했을 경우에 ?하나님의 은총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 있다.? 뭐 이런 이야기는 불신자들도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원인과 결과라는 식으로 믿음을 주지 않고 이것을 비켜가 버려요. 우리를 거치지 않고 비켜가요. 왜 우리를 거치지 아니하는가 하면, 우리를 거치게 되면 우리가 주체가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비켜가면서 주체를 죽여 버립니다.

 

죽은 사람 꼬집어봐야 소용없지요. 죽은 자에게 ?당신은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소?? 라고 묻는다면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당신은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이런 죽음이라는 결과가 왔습니까?? 하고 물어도 전혀 대답이 없지요.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싶어서 예수를 믿는데, 이것은 어떤 상태냐 하면, ?내가 주체자가 되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내가 납득되어 남에게 설득할 수 있도록 주께서 먼저 나를 설득시키고, 이렇게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당당하게 가지고 있는 내가 살아서 주님께 영광돌린다.?고 하는데, 이런 모든 시도는 나중에 가짜로 판명 날 시점이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줄 때는, 믿음이 들어오면서 나라는 주체를 그냥 두지 아니하고, 믿음이 쳐들어오면 이 주체는 서서히 눈빛이 꺼지면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믿음이 들어오면 그 믿음 가지고 신용카드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평생토록 우리에게 쳐들어오는데 믿음이 들어온 결과가 뭐냐 하면, 내가(자아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옵니다. 이 믿음의 능력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이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대해 빈틈없이 완벽하게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숙제가 뭐냐 하면, 약속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기획되고 침투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들어오는데, 그 믿음이 들어오면서 주님의 믿음으로 전환되면서 나의 믿음은 꺼져버립니다. 일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은 없어지고 주님의 믿음이 나를 장악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 성취 능력 때문이다.? 라는 것이 점차 드러나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신명기 4장 24절을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 구절을 찾았는가 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는 양심에서 우러나는 윤리나 도덕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람이 죽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양심이 고우냐, 얼마나 선하게 살았는가를 묻지 않고 하나님은 그냥 인간을 죽여 버립니다. 소멸하는 불이니까.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모세를 중간에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고, 인간은 소멸 당해야 하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야 하는데 받기만 하면 죽으니까 대신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중보로 나서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안 죽고 사는데, 이런 구조 즉, 하나님은 불이고, 우리는 죽어야 하고, 그래서 중보자가 대신 나서야 하는 이런 구조. 이런 구조와 우리의 양심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어요.

 

여기 소멸하는 불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이 나쁜 짓해서 죽은 것이 아니에요. 물이 없어 물 달라고 하다가 죽었고, 양식 없어 양식 달라고 하다 죽은 사람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 모든 사람이 다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주체자가 하나님이고 예수고 간에 내가 살고 봐야지 하고 폼 잡는데 죽었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나라는 주체자는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 그런 주체자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전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민족들은 모르고, 민수기, 신명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택한 민족만큼은 이 사실을 독특하고 비밀스럽게 알려주셨습니다.

 

여러분이 강의 교재를 갖고 계신데, 여기 첫 문장부터 무슨 말인지 독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얼마나 글이 어려운지 한 번 보시지요.

?일차적인 의미에서 자연법은 비성문율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정의를 내렸다. 자연법은 이성을 갖춘 피조물의 영원법에의 참여라고 했다. 그는 모든 유(有)가 영원법(하나님의 섭리)에 종속되어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영원법에 상응한 방식으로 행동할 타고난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천주교 윤리를 설명하고 있거든요.

목사님, ?우리가 왜 천주교 윤리를 공부해야 합니까?? 하고 물을 사람이 있겠는데, 사실 개신교 윤리가 천주교 윤리에서 나왔습니다. 자식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엄마, 아빠를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개신교가 천주교에서 나왔습니다. 여러분 몰랐어요?

 

그래서 천주교의 윤리를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을 공부함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조와 우리가 교회 나와서 스스로 마음잡고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다짐이 전혀 다른 엉뚱한 것이란 점을 알게 되지요.

 

양심이란 모든 피조물 안에 녹아 있는, 피조물 본인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피조물 되게 하는 그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이 바로 자연법인데, 

이 자연법이 인간에게만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런 주장을 왜 하는가?

?예수 믿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착한 심성을 개발하고 싶어서 예수 믿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는데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어설프게 이 정도만 알아도 신자라고 간주해 줄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이것은 정말 구약대로 하면 우상 섬기는 자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전혀 엉뚱한 분입니다.

만약 우리 속에 선한 양심이 있다면 그 양심을 불로 태워버리면 하나님이 자기의 것을 태우는 것이 되기 때문에 모순이 되지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주체가 없고, 죽는 대상일 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방 종교는 그렇지 않아요. 이방 종교는 주체가 우선이고, ?내 안에 어떤 것이 하나님 것이냐? 내 안에 어떤 요소가 하나님 요소냐? 그것을 찾아내고 개발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이것이 이방 종교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주체인 나는 절대 죽으면 안 돼요. 철이 없고 조금 모자라면 잘 가르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쪽에서는 주체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참된 존재를 깨달은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죽어야 할 그런 대상이기에 이쪽과 저쪽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 양쪽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죽는 주체냐, 하나님 믿고 사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주체가 살아 있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교재 16페이지 봅시다.

이 노래는 30여세에 비명에 가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란 노래입니다. 이 사람이 [이등병 일기]라는 유명한 노래를 불러 젊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지요.

제가 [서른 즈음에] 가사를 읽을 텐데, 이 가사가 하나님 앞에 문제점이 뭔가를 파악해 보세요.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이 노래의 제목이 [서른 즈음에]인데, 인생이 서른이 기점이란 사실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신명기에 나옵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안 나옵니다. 그런데 김광석은 서른을 정점으로 해서 멀어져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거 가장 아름다웠던 서른 시절을 추억하며 안타까워하고, 행복했던 시절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데 계속 멀어져 갈 것 같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낳지 않겠는가 하면서 자살을 했어요.

 

여기 가사에 보면,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어떤 것을 목표로 삼고, ?저것을 따 내면 내가 행복하겠지. 이 아파트를 내가 사면 걱정 없겠지.? 등의 것으로 자꾸 채우는데, 채우고 채워도 결국은 채운 것 보다 더 큰 공백이 생깁니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이 공백을 다 채웁니까? 세월이 가면 갈수록 공백이 더 커지는데. 그러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낳지요.

 

텅 빈 가슴에 뭔가를 채워 만족을 얻으려 하는데 채우면 채울수록 더 공허는 깊어만 가는데, 혹시나 교회에 가면 내 공허를 매울 수 있을까 해서 가니까 ?영생이 어떻고, 천국이 어떻고, 축복이 어떻고 --? 하는데 이 소리도 자신의 공허를 채울 수 없어요. 그렇게 되니까 이제는 교회도 발 끊고, 교회도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그리고 주님도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이렇게 되면서 내린 결론이 뭔가 하면, 주님이 선택했다고 교회에서 들었는데 그것은 틀린 말이었고, ?내가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어볼까 했는데 이제는 별 소용이 없는 것을 발견했기에 선택을 철회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가룟 유다의 모습입니다.

 

가룟 유다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참한 가룟 유다 하나 키우고 있어요. 예쁜 가룟 유다 하나 키우고 있어요. 낭만적이고 고상한 가룟 유다를 내 안에 키우고 있습니다. 직장일이 바빠서 가룟 유다까지 신경 못쓰지만 직장에서 쫓겨나면 갑자기 가룟 유다가 튀어 나오면서 ?이 병신 같은 인간아 너 왜 이렇게 사냐?? 하면서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라는 이 말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럽던 누이동생도 결혼해서 멀어져 가고, 정다웠던 친구들도 제 살기 바빠 우정은 다 깨어지고 모든 것들이 점차 떠나가고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우주팽창론?이란 것이 있는데, 별과 별 사이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멀어지고, 저쪽과도 멀어지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노래 가사처럼 ?모든 것이 점점 멀어져 간다?는 이런 사고방식의 특징이 가룟 유다와 동일한 것입니다.

 

첫째시간 결론을 내린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택한 백성에게 내려 올 때는, ?나는 처음부터 죽어있는 존재이구나? 하는 것을 파악하는 쪽으로 선택하시지, 하나님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를 선택하고 구원하는 식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선택되지 않은 인간들이 결국에는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전쟁이 벌어지도록 하나님이 뒤에서 유도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합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실 때는 그들을 이미 죽인 채 오신다는 것과 선택 안 된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반드시 공격하도록 되어 있고, 이 둘 사이에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도록 하나님께서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자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하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받는다는 그런 느낌을 전혀 못 느끼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은 가짜일 확률이 많습니다.

 

10분간 쉬고 다음 시간에는 성도와 비성도간의 싸움을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싸움을 붙이는가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2005. 9. 5. 10:01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