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존재와 경로

아빠와 함께 2025. 4. 20. 19:13

존재와 경로

2025년 4월 2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1-3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KJV)

1.  Now faith is the substance 물질 실체 본질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2.  For by it the elders obtained a good report.
3.  Through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fram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

(NASB)

1.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2.  For by it the men of old gained approval.
3.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prepar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things which are visible.

(NIV)

1.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2.  This is what the ancients were commended for.
3.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universe was formed at God's comman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what was visible.

‘믿음’, ‘실상’, ‘보이지 않는 것’, ‘말씀’‘나타난 것’, ‘보이는 것’이런 단어들이 모여있습니다. 이런 말들의 조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은 현실 구성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의 일부로서 나타난 것에 의해 보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보인다’는 것은 ‘보는 인물’이 나타난 세상 안에서 발생한다는 겁니다.

세상을 눈으로 보고 있는 나는 어디서 온 것인지요? 이점에 대해서 나타난 것들을 통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나타난 것들이라는 사실을 보고 있는 육신으로는 알 길이 없는 겁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 있는 ‘나’가 없어지면 그동안 알던 세상도 그와 더불어 한꺼번에 사라집니다.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으로 인해 알 수 있다면 보고 있는 자가 자기 수명을 다한다면 그에게 있어 이 세상은 자신과 함께 소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바냐 2: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습 2:15)

인간의 가장 깊숙한 마음에 자리잡은 상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즉 세상에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도 각자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는 없다’에 철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을 일어나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인간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에 감히 끼어들 수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요 자신의 스토리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나는 세상을 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면 이는 창세기 3:19에 위반대는 사태입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미 인간들은 흙으로 돌아가기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흙이라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그 외에 인간이 할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허상인 인간이 아무리 세상의 허무를 말해도 그것으로 자신이 실상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허상인 존재가 실상에 가담되는 것은 ‘말씀’의 자체적인 작용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기대의 의도를 무산시킵니다. 그래야지만 인간은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잘남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만 있고 나 외는 없다’가 말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당한다는 말은 말씀에 의해서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나의 의’가 공격받아 부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는 ‘나는 잘났다, 나는 오래 살아야 한다’가 내세워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허상에서 벌리고 있는 ‘잘난 나 증인’에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걸까요? 오늘 본문 11:2에 보면, ‘말씀’이 친히 그렇게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모든 우리 자신을 위한 계획을 망치게 하시는 식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10-12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10.  Always bearing about in the body the dying of the Lord Jesus, that the life also of Jesus might be made manifest in our body.
11.  For we which live are alway delivered unto death for Jesus' sake, that the life also of Jesus might be made manifest in our mortal flesh.
12.  So then death worketh in us, but life in you.

‘나’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의 방해물이 되고 방해꾼이 됩니다. 소위 하나님 말씀을 믿겠다고 나서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 믿음을 의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자신을 죽이고 그 죽은 힘을 도로 나에게 적용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실상대로 작용하려면 ‘보이지 않는 세계’의 활동이 우리 자신을 쳐야 합니다.

말씀과 약속이 우리는 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사사기 11:36에 입다의 딸은 이렇게 말합니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애꿎은 무남독녀 딸, 그것도 시집도 못가본 딸이 아버지의 객기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진지하게 딸에게 부탁합니다. 괜한 말에 신경쓰지 말고 그 없던 일로 돌리자는 겁니다. 그러나 입다는 딸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조차 하나님의 일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 허상 죽음의 경로를 감히 인간들이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에스더 4:16에 보면, 에스더 왕비가 나옵니다. 그는 자기에게 닥쳐온 사태를 주님에 의한 말씀 활동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습니다. 허상에서 실상에 이르는 길에는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공로가 끼어드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결과적으로 ‘열매 맺은 밭’과 ‘열매 없는 밭’으로 구분됩니다. 열매없는 밭에는 경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열매 맺은 밭’에는 경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아무리 애써도 사단의 방해와 환란과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고 열매 맺을 위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써 드러나는 허상과 자기 잘남의 시도와 결정은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12:7-8의 말씀을 통해서 철저하게 인간의 모든 경로를 간섭하셔서 실상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오직 주님 자신의 일만 홀로 하심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3강-히브리서 11장 1-3절(존재와 경로)250420-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1-3절입니다.

히브리서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오늘 읽었던 본문에 나오는 그 단어들 ‘믿음’ ‘증거’ ‘실상’ ‘나타난 것’ ‘보이는 것’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 여기에 ‘사람’이라는 단어는 들어있지 않죠. 사람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 살면서 누굴 상대하는가? 같은 사람하고 상대하면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사람을 다 빼버렸어요. 사람이 사람 같지를 않으니까 뺀 거예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사람이 아니고 그냥 흙이다.’ 이 말이죠. 흙이 사람 행세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이 절대로 인간하고 상대해서 일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 너는 흙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해요. “군소리하지 말고 그냥 넌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이에요, 딴소리할 것도 없이.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 빼놓고 누구하고 일하느냐? 하나님이 계획한 모든 계획은 어떻게 다 성취됐느냐?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자꾸만 여기에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나의 가치도 좀 알아 달라, 봐 달라.’ 이런 식이죠. 거기에 대해서 오늘 읽었던 히브리서 11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어떻게 사는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이 다다.” 이게 인간이죠. ‘모든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들의 집합이다.’ 이게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장 1절에 보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있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네가 진정 사람이라면 나타난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바로, 다이렉트로 오지 말고, 나타난 것이 내가 되는 게 아니라 뭘 경유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들을 경유해서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오해하느냐 하면, ‘나타난 것을 보고 있으니 내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되었고, 나는 나타난 것의 일부’라고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지금 제가 말장난하는 게 아니고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나타난 것들의 일부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나라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타난 것을 보고 있는 그 ‘나’,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멈춘다면, 다른 말로 내가 죽는다면 모든 나타난 것도 같이 다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내게 보이는 걸로 ‘나’를 구성하고, 그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에서 뽑아내서 ‘나는 나다’라고 이렇게 생각했단 말이죠. 그래서?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겁니까?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문제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언제까지가 그 한계냐? 내가 안 보이기 전, 다시 말해서 내가 눈 감기 전, 내 육신이 화장터에 가서 한 줌의 재가 되기 전까지는 굉장히 유효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내가 만약 죽어버리면 그동안 내가 봤다는 것, 나타난 것의 일부라고 한 그 모든 것도 나의 죽음과 함께 소실돼요, 소멸된다고요. 그러면 그동안 그 사람은 뭐 하고 산 거죠? 뭐 하고 살았습니까? 왜 살았죠?

스바냐 2장 15절에서 성경은 인간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인간이 뭐 신학이 어떠니, 철학이 어떠니, 종교가 어떠니, 과학이 어떠니 아무리 이야기해도 스바냐 2장 15절 이걸로 딱 마감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내 앞에 뭔가 남들이 나타나고 내 앞에 누가, 혹 노루가 지나가든지 토끼가 있든지 아니면 대통령이 있든지 간에 그것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보고 있기 때문에 내 앞에 의미 있게 있는 겁니다. 내가 보기 때문에 내게 나타난 거예요.

따라서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는 건 스바냐 2장 15절의 말씀처럼…, 이게 니느웨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거예요,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라고 이렇게 최종 결론이 지어집니다. 그것을 로마서 10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그것이 바로 ‘자기 증거’라고 합니다.

평생 누구한테 말하고, 행동을 하고, 어떤 자기 태도를 보일 때 나오는 그 모든 모습이 ‘나 여기 있잖아.’에 대한 함성 또는 외침이에요.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단 말이야!” 뭐 어쩌라고요, 어쩌라고? “나 여기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나는 왜 사느냐? 내가 여기 있음을 남한테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사는 거예요.

인간은 거울 앞에 내가 보인다는 그 말이죠. 보이니까, ‘보이는 것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의 일부기 때문에 그게 내가 아는 것의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히브리서 11장 3절에 위반돼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어요. 아니다.

성경 그대로 이야기해도 지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죠? 제가 뭘 더 보탰습니까?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의 일부’라고 그렇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과가 뭐냐? 그 결과는 바로 나 잘났다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나 여기 있어, 나 잘났어. 그 잘난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너희가 좀 인정해 줘. 내가 죽기 전에 인정 좀 해줘.’ 이거잖아요.

이걸 로마서 10장 2-3절에서는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그것은 ‘자기 의’를 내세운 것이다, 자기 의를.

인간이 제일 좋아하는 게 자기 의예요. 인간이 제일 좋아하는 게 자기 의인데, 그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겁니다. 로마서 1장 28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로마서 1장 28절은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너무 찔러서 아파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교회 와도, 자기 의에 환장해서, 자기 의를 최종적으로 자기 안에 뒀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최종 자리에 나의 의를 바꿔치기 할 다른 것을 우리가 원치 않아요. 그래서 이미 나의 의, 나의 증거가 전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을 하게 되면 그 하나님이 라이벌이 돼서 자기 의를 훼손하고 다치게 하면 그게 싫은 거예요. 내 의가 다치는 것이 싫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보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악마가 시키는 대로 이미 우리는 신처럼 되었으니까, 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나 말고 다른 신이 내 속에 개입하는 것이 그렇게 싫은 거예요. 말씀 듣는 것을 그렇게 지독하게 미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나하고 의논하고, 상대하고, 그렇게 됩니다. 더 간추려서 보면, 결국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만 살아가는 꼴이 돼요. 나만 살아가는 그 꼴에서 나오는 그러한 발언들, 그러한 대화가 나오는 거죠. 자,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했거든요.

‘네가 보고 있다는 것, 네게 나타난 것을 네가 제대로 본다고 여기는 그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실상은 보이지 않는 것과 관련돼 있다는 거예요. 나만 있다는 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이것은 실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에 속하고 허상에 속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살다가 연세가 많게 되면 뭐라고 하느냐? “아이고, 오래 살아도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헛것이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 그렇게 오래 다녀도 마음속에 치고 올라오는 것은 ‘그동안 헛된 짓 많이 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죠. 왜냐하면 ‘세상 오래 살아보니까 이제야 눈 떠서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헛것이다.’ 그렇게 눈을 떴다고 자부하지만 뭔가 빠진 게 있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빠졌어요. 허무하다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도 이야기하고, 그렇게들 알고 있는데 교회 안 가고 절에 안 가도 그냥 사색만 해도 느끼면서 ‘다 헛되구나’를 압니다.

그런데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사색해도 안 되고, 성경 봐도 몰라요. 따라서 내가 죽는다는 것은 실상 되시는 분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필히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사실인 거예요. 내가 죽는 것이 나는 나의 일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죽는 것은 주님의 일에 속했던 겁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서 아담보고 하는 말이 “넌 저주받아서 땀 흘리고 죽도록 고생하라.” 할 때 그 소리를 듣는 아담이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앞으로 잘할게요. 죄지은 거 그때그때 회개하겠습니다. 좀 편하게 살 방법은 없겠습니까?” 하는데 하나님의 관점은 이게 아니고 네가 저주받는 것이 너의 일이 아니고, 나 주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이에요.

하나님은 자기의 스토리, 자기의 이야기만 해요. 교회 그렇게 오래 나와도 그 사실을 우리는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관심 없어요. 하나님은 예수님 자신의 일에만 관심 있어요.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성경을 펼쳐서 성경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다 믿고자 합니다. 샅샅이 들춰서 족족 다 믿고자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하니까 이걸 교회 나오는 인간들이 놓칠 리 있습니까? ‘예. 믿어서 실상의 세계에 접근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실상을 증거해야 해요, 실상을.

허상에 속한 나를 증거하면 안 되고 실상을 증거해야 할 텐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아무것도 까딱 안 하고 손도 안 대고 있는 것이 뭐냐?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나의 의로움, 나의 잘남 이걸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니 백날 믿어봐야 이것은 누구의 증거냐?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구실, 변명으로 우회하면서 결국 도달하는 것은 ‘예수 믿는 내가 잘났잖아.’라는 자기 의를 끝까지 폐기 처분을 못 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뭐가 충돌되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3절 초반과 충돌됩니다. “믿음으로” 성경 그대로예요. “믿음으로” 그다음에 나오는 괄호, 그게 뭐냐?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거예요. 말씀으로!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실상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내가 믿습니다.’ 그 ‘나’가 동원되면 안 되고, 나는 빠지고 그 자리에 뭐가 들어가야 하는가? 말씀의 운동력이, 내가 운동하고 내가 생각했던 그 자리를 제쳐버리고 그 속에 말씀이 들어가 버려야 해요, 말씀이. 말씀 스스로가 활동해야 하고, 그 결과물로 성도가 발생돼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아,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는 거구나. 그럼 좋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것 인정할게요.’ 그렇게 나옵니다. ‘말씀이 살아있으니까 말씀 묵상도 하면서 성경 보면 되잖아.’라고 생각하는 데요, 그런데 그 말씀이 직접 나타났어요. 그것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된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니까 두 종류의 육신이 생긴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육신이 하는 일과, 말씀과 끊어져서 뱀과 관련된, 저주받아 마땅하고 기어이 죽어야 마땅한, 아직 살아있는 나라는 육신이 하는 일과의 차이,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의 일과 육신인 나의 일과 그 차이, 그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 대조, 대립을 한 번 시켜보라는 거예요.

과연 말씀이 육신이 된 그분의 일을 내가 믿는다고 해서 그분을 내 속에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선배 된 유대인들이 그 시대에 예수님과 상대하면서 확실하게 증거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싫어 버린 바가 됐다. 우리는 그분을 원치 아니했다”(사 53장).

말씀이 작동하고 말씀이 활동하는 육신의 특징은 뭐냐? 이 땅에 와서 죽은 겁니다. 죽었어요. 예수님이 사는 목적은, 요한복음 10장에 나온 말씀처럼 내가 이 땅에 죽으러 왔어요. 그런데 인간은 예수님을 믿든, 하나님을 믿든, 성령을 믿든 사는 이유가 있는데 그건 살려고 하는 거예요.

나타난 육신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죽기 위해 사는 육신이고, 똑같은 육신을 가졌다고 여기는 우리는 악착같이 살려고 하는 육신이에요.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어떻든 간에 나한테 이익이 가는 쪽으로, 살려는 쪽으로 육신이라는 것이 작동하고 있고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이 굉장히 수상해요. 그래서 순서를 제가 한번 정해봤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의 첫 번째는 뭐냐? ‘그동안 내가 믿던 세계를 버리고 이 성경 말씀, 주님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믿자.’ 하는 겁니다. ‘내가 믿던 나의 세계를 버리고 주님의 세계를 믿자.’ 이게 1번이에요. 순서가 그렇게 나가요.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다거든요. 왜 믿느냐? 믿어야 안 죽을 것 같아서, 죽고 난 뒤에 영생을 얻을 것 같아서 믿는 거예요. 결국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요.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나만 있고 나 외에는 없다’라고 하는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죽으심으로써 그것을 제거하시는 작업을 해나갑니다.

제거하는 그 작업이 뭐냐? 네가 믿는 그 믿음을 의심하라는 겁니다. “네가 믿는 믿음을 의심하라.” “어디 앞에서 의심할까요?” “십자가 앞에서 의심해라. 교회 앞에서 의심하지 말고, 성경 앞에서 의심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의심해라. 십자가를 딱 쳐다봐라.”

딱 쳐다보면서 ‘도대체 십자가 앞에서 나는 뭐야? 나 저 십자가를 그토록 좋아했는지, 아니면 십자가를 이용하려고 했는지?’ 스스로 한번 자문해 보란 말이죠. 스스로 한번 질문해 보세요. ‘십자가 말고, 좋은 말씀 주시면 지키겠나이다.’라는 우리의 태도가 그 십자가 앞에서 스멀스멀 올라와요. ‘죽으시는 건 주님만 죽고 난 뒤따라가기 싫습니다. 다만 죽고 난 뒤에 좋은 이야기해 주시면 제가 믿을 용의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버티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의 모든 믿음을 의심해 봐야 해요.

의심하는 그 방법도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의심하는 그 방법을 주님께서 이 현실 세계 속에 이렇게 줬습니다. 그게 법이에요.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가 의롭고 정당하다는 기회를 포착한 걸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법대로 안 했잖아? 난 법대로 했어. 그러니까 나의 의는 당신보다 더 뛰어난 거야.’

인간은 법을 통해서 자기 의를 더욱더 깊이 감추고 그걸 돋보이게 해서 ‘결국 남는 것은 나의 의를 증거하는 것이고 이 허상의 세계에서 나타난 것의 일부가 된 것처럼 나는 실상의 세계에서도 그 일부다.’라고 그렇게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백날 이야기해 봐야 하나님 듣기에는 그냥 자기 잘났다는 것을 자랑질하는 거 외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자기 증거에요. 왜? 아무리 해도 본인이 죽지를 않으니까, 본인이 제거되지를 않으니까. 본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 안에 살아있는 자기 의도 제거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법과 그리고 법을 초과하는 다른 세계…, 법의 세계가 허상의 세계거든요. 모든 것이 죄뿐이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11장 16-17절에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 세대가 바로 주님이 보는 허상이고, 이 세상이 허상이라는 것은 실상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실상의 특징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실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이 세상은 허상이고, 허당이고, 이 세상은 허당이기 때문에 실상의 세계에서 오는 말씀이 실상을 증거하기 위해 말을 하게 되면 그들은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요.

마리아에게 그게 아주 독특하면서도 결정적으로 나타난 거예요. 마리아에게 정혼한 남편 요셉이 있음으로써 주어진 법이 이거에요. ‘결혼하기 전에 혼전 동침을 하면 안 된다. 혼전 동침은 법에 어긋난다. 약혼 상태에서는 안 되고 결혼하고 난 뒤에 동침해야 한다.’ 법이죠.

그런데 마리아가 덜컥 임신했는데요? 임신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정식으로 요셉과 혼인하고 난 뒤에, 그리고 요셉과 잠자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에 의해 마리아가 임신하는 방법을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말씀이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미 나타난 것, 내가 속한 그 나타난 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다고, 말씀을 줬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그 시대의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시대 사람은 독하게 자기 시대의 상이 낱낱이 예수님 말씀 앞에 숨김없이 다 들춰져야 하는 겁니다.

우리 동네에서 어떤 사람이 이사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제 아내에게 물론 욕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소리를 했어요. “참 별나다.”라고 했어요. 이사하는데 큰 트럭이 동네 CCTV의 그 안내판을 쳐버렸어요. 이삿짐 차의 덩치가 너무 크다 보니까 운전사가 그걸 못 느낀 거예요. 그래서 거의 떨어질 것처럼 삐뚤어졌어요.

그러니까 제 집사람이 “스톱!” 하고 고함지르고, 저도 위에서 내려오다가 그걸 봤어요. 그래서 “저 안내판이 저렇게 삐뚤어졌다.”라고 하니까 그건 원래부터 그랬다고 우기는 거예요. 자기가 그걸 못 느꼈으니까. 그래서 이삿짐 차 기사한테, 이거 다 고쳐놓고 가야 한다고 하니까 제 집사람에게 “참 별나다.” 한 거예요.

아, 정말 오랜만에 듣는 복음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복음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참 별나요. 마태복음 5장 17-18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얼마나 별난지요. 그럴 때 유대인들이 “율법 정도는 지키고 있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부자 청년도 그랬고요. 그다음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별나도 보통 별난 게 아니에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고,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에 해당한답니다.

세상에 이렇게 별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너무 별나요. 그냥 대충 말씀 지키는 것으로 넘어갈 생각 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내 아버지의 뜻을 몰라서 그렇지 알면 너희들은 못 견딘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좀 별나게 굴어야겠다는 거예요. 너희들의 실상을 폭로할 때까지.

그래서 유대인들이 별난 그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유대인들은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어요. 뭐냐? 죽여 버렸습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안 죽이죠? 너무 안일해서 그래요. 뭐 대충 그냥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허상의 역할은 실상을 죽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난 실상을 보여준 게 바로 마리아에게서 나온 아들이었어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옵니다. ‘여자가 한 남자를 안게 될 것이다.’ 그 아들로부터 이 현실세계는 새롭게 확장되고 퍼져나갑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나는 너희하고 상대 안 한다. 저주받아 마땅한 것들과 상대해서 뭐 하는데?” 자꾸 저주나 풀어달라는 이상한 소리만 할 거란 말이죠.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허상의 인간은 결코 실상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 나의 잘남의 증인되려고 노력한 사람이 결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슬퍼해야 하고, 정말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 우리가 실상에 속한다면, 뭐 어찌어찌해서 실상에 속한다면 슬프게 태어난 우리 인생도 웃기는 코미디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 세계에 들어왔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내 모습이, 죄만 짓는 내 모습이 코미디 같아요. 코미디가 “참 웃기네.” 그거잖아요.

슬퍼해서 자살하지 말고, 태어나서 평생 고생만 하고 슬픈 일만 겪는 이것이 하나님이 제작한 코미디라고 여기면 안 되겠습니까? 그 코미디 “참, 웃기고 있네.” 그런 이야기, 그런 뜻이에요. 내 인생을 하찮게 볼 수 있는 여유, 그런 코미디로 여길 때 더 이상 나는 내 잘남의 증인 노릇을 그만두게 되는 겁니다. 웃기지도 않는 나를 변호해서, 변명해서, 그래서 지키기 위해서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점점 더 심각해지는데요? 몸에, 정신에 힘이 들어가는데요?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남은 게 이거예요. 허상인 내가, 나 잘났다고 사는 내가 어떻게 실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는 주님의 증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느냐? 나 자신의 증인 말고 증언 할 가치도 없는 나 변명 안 하고 어떻게 주님의 일하심만 증거할 수 있는 그런 방안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 방안이 바로 히브리서 11장 2절에 나옵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미 허상 말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증거물로 살았던 사람이 선진, 신앙의 선배들이었어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는데, 그게 실상인데, 진짜인데 그 진짜 세계를 증거하기 위해서 보이는 식으로 내 육신이 다뤄지고 있다는 그 일을 한 것이 신앙의 선배들이었어요.

그 신앙의 선배들 고백에 의하면, 세상 모든 되어진 것은 인간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말씀의 노력에 의해서 그렇게 펼쳐졌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그 말도 안 되는 코미디, 진짜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 자신, 기껏 나 잘났다는 것만 자랑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선배들에게 일어났던 말씀의 활동이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으로 주입되면 되겠죠. 논리가 그렇잖아요.

그게 바로 성경에 나옵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사사기 11장에 입다의 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입다가 객기를 부렸어요.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면 우리 집 앞에 가장 먼저 마중 나오는 게 뭐가 됐든 죽여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삿 11:36).

‘그 정도 각오로 제가 전쟁에 임하니까 이번 전쟁에 승리케 해달라’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것도 시집도 안 간 무남독녀가 “아빠!” 하고 튀어나온 겁니다. 승리의 기쁨은 날아가고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딸이 자기가 함부로 내뱉은 말을 책임지기 위해 나타났을 때 입다는 감을 잡았죠. 이런 사태를, 누가 왜 일으켰는지?

보통 남녀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요. 둘이 죽고 못 살다가 헤어졌을 때 여자가 전화 걸어서 이런 말을 해요. “그동안 날 갖고 놀았어?” 그런 말 하잖아요. 예! 하나님은 인간을 갖고 논 겁니다. 인간은 그것만 해도 영광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갖고 노신 거예요.

이 세상에 나만 있고 나 외에는 없다고 여기는 그 타락한 악마의 심성, 주께서 그걸 갖고 노시면서 그것마저도 하나님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용도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대신 희생물이 필요해요. 딸이 죽습니다. 죽을 때 한 번 말려는 봐요. “내가 정신없는 가운데 했던 소리니까 취소할게. 내가 괜한 소리 한 걸로 할게. 없는 일로 하자.”

그렇게 할 때 사사기 11장 36절에 보면,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곧 “그냥 저를 죽이세요. 그냥 죽이세요.” 다시 말해서 입다 딸의 고백은 뭐냐? ‘어떻게 내가 여기서 살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갈 것이냐?’를 고백하는 거예요. 어디로 가느냐? 시작은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지금 어디로 가느냐에 대한 그 코스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경로입니다. 보이는 허상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실상의 세계로 어떤 경로를 하나님께서 깔아놓으시고, 그 경로를 따라서 인간의 모든 선택지를 그때그때 마다 말씀으로 간섭해서 끌어당기는 거예요. 그때마다 인간은 계속 추측합니다. 자기한테 유리한 대로 추측해요.

추측하는 그것을 철저하게 말씀으로 간섭하셔서 인간의 추측과는 다른, 이미 말씀에 확정된 경로로 이끄는 거예요. 그것을 ‘Dead Reckoning’이라고 하는 겁니다. ‘Reckoning’은 ‘계산하다’라는 뜻이니까 직역하면 ‘죽은 계산’인데 이것이 뭐냐?

비행기 운항할 때 ‘추측항법’이 있어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도착 지점만 염두에 두고 ‘이미 알고 있는 출발 위치에서 이동 방향과 속력을 계산하여 자신의 위치를 추측하며, 항해하는 기술’입니다. ‘Dead Reckoning’,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가장 마지막 것의 제목이에요.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지고 보이는 허상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실상의 세계로 이끄는 하나의 샘플, 사례로서 이스라엘 역사를 만들었던 겁니다. 그중에 누가 걸려들었는가? 입다가 걸려들었고 입다의 딸이 말려든 거예요.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에스더 4장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궁에서 미모 자랑하면서 편안히 살기를 원했던 왕비 에스더, 당시 최고의 제국인 페르시아의 왕비지요. 그런데 자기 사촌 모르드개에게 일어났던 미미한 사건 하나가 엄청나게 파급되면서 어떤 경로가 만들어져요. 에스더 자신은 왕궁에 있었기 때문에 그 경로에서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경로가 드디어 에스더에게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지금 유대민족이 위기에 처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왕궁에 있다고 해서 이 난리를 피해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럴 때 에스더가 하는 말이 “죽으면 죽으리이다.”

나는 예쁘다, 나는 왕비다, 나는 미래가 창창하다, 라는 이 땅 허상의 세계에서 자기의 잘남을 뽐내면서 살기를 원했던 그 에스더가 모르드개를 통해서 일어났던 구원 사건에 휘말려서 이제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경로로 바뀐 거예요. 우리 인생이 하나의 화살표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해요. “교회는 천국 가는 열쇠가 되기에 그 열쇠만 알면 천국 문을 열 수 있다. 목사님! 그 열쇠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게 어떤 내용인지 알려주세요. 제가 그 천국열쇠를 믿고자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들이 이야기해 주지요. “천국 열쇠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입니다. 그 피를 가지고 열면 천국이 열립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에 굉장히 안심하면서 ‘나는 살았다’ 하고 마음 정리를 하지요.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 천국 가서 또 살고 싶은 나의 욕망, 나의 바람을 정당화하는 그 나를 증거하는 거예요. “나는 천국 열쇠를 믿습니다.”라고 했는데 6개월 뒤에 치매 걸렸어요.

자식이 와서 “어머니, 천국열쇠 믿습니까?” 하고 물으면 엄마가 하는 말이 “열쇠? 무슨 열쇠?” 전혀 기억 못 합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내게 담아놨던 모든 것이 허구의 바구니에 허구의 내용만 담아서 내가 죽는 동시에 모든 것이 허구로서 장례식 화장터에서 전부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5십 년, 6십 년 교회 다닌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갈수록 기억력은 떨어지는데요. ‘내가 믿는다.’라는 것을 기억하는 그것이 무슨 내 미래를 담보할 수 있겠어요? 약간 기분은 좋겠지만 그것은 해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방법은 뭐냐? 천국열쇠의 의미는 뭐냐? 코미디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범죄단체를 소탕하기 위해서 능력 있는 특수요원이 잠입했는데 불행히도 잡혔어요. 007 같은 영화 보면 보통 주인공이 적에게 잡히는 이유가 본드걸 때문이잖아요. 의리 지킨다고 그냥 잡혀줘요.

본드걸이 감옥 문 열쇠를 훔쳐서 감옥 문 쪽으로 던져줬는데 안타깝게도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기에 그만 떨어졌어요. 그래서 답답해하고 있는데 주인공이 옥문 열고 나와서 그 열쇠를 가지고 다시 들어가서 옥문을 닫은 다음에 다시 닫혔던 열쇠를 가지고 그 옥문을 열고 나오는 겁니다. 이게 안 우스워요?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왜 그런 짓을 하지요?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포기 못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천국 열쇠를 알아서, 그리고 내가 그 천국 열쇠를 이용해서 문 열고, ‘나는 나의 행함으로, 이 열쇠 가지고 천국 문까지 뚫었다.’라는 것으로 자신의 의에 축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그게 인간입니다. 얼마나 독해요, 얼마나 독합니까? 자신에게 철저해요.

그런데 주님은 별나지요. 주님은 별난데 어느 정도로 별난가? 모든 것을 양보해도 천국의 능력에 인간의 털끝이라도 끼어드는 것은 주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뭐 많은 사람을 전도해서 건지겠습니다, 무슨 고구마 전도를 해서 교회를 여러 곳에 세웠습니다, 강의를 해서 사람을 구원하겠습니다…, 하는데 “일체 입 다물어!”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의 자기 공로 외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 예수님의 공로에다 자기를 자꾸 집어넣을 생각하는 거예요. ‘저에게 성경 지식을 알려주신다면 그 지식을 가지고 나를 가둔 그 옥문을 열어서 탈출하겠습니다.’ 이것은 뭐 코미디지요, 코미디. 그게 교회 오는 보람처럼 되어버렸어요.

아까 집사님이 대표기도 할 때 나왔던 성경 구절을 다시 읽어볼게요.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일체 인간의 능력이 끼어들지 않는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고린도후서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한 수 요령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딱 기다려! 내가 너 죽여줄게.” 주님께서 살아 있는 우리를 죽이는 방법은 간단해요. 내 의가 저장 되어있는 곳을 공격하면 돼요. 내 의가 저장된 그것, 내 의가 있다는 그 자체로 인하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내 의가 있는 그것이 박살 나면서 우리는 졸지에 죄인으로 등장합니다.

죄인으로 등장하면 죄의 값은 뭐다? ‘죄의 값은 사망’(롬 6:23)이지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매일 같이 우리를 그렇게 죽이시는 겁니다. 우리한테 일어난 모든 현상이 우리를 죽이고자 하는 말씀대로 진행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한 경로는?

경로는 없어요. 주님 자신의 경로거든요. 우리가 만드는 족족 그 경로를 주님께서 간섭해서 다 말씀으로 파괴하고 말씀으로 없애버립니다. 경로 없이 구원되게 하시는 겁니다. 경로 없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십자가에서 나온 주님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의 열쇠 그 자체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왜? 말씀으로 우리를 죽이시니까. ‘나에게 의는 없고 죄밖에 없다’라는 것을 열쇠로 사용하십니다. 그 경로에 대해 나와 있는 것이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에요. <프랜치 스프>(2023)라는 영화는 프랑스 스프 요리사 이야기입니다.

밭에서 가장 싱싱하고 실한 재료를 가지고 신선한 요리를 제공합니다. 어느 정도로 신경을 쓰느냐? 직접 밭에 나가서 재료가 싱싱한지 일일이 살필 정도입니다. 어떤 밭에 가니 철심이 심겨 있어요. 철심을 중심으로 꼭대기에서 수평으로 여섯 개의 아연 가지가 뻗어 나오는 그것을 밭에 꽂아 놓았어요.

요리사가 “이게 뭡니까?” 하니까 “이걸 통해서 밭에 전류를 통하게 하면 식물이 강하게 자란답니다.” 요리사가 처음에는 그걸 믿지 못하니까 “밭을 둘로 나눠서 철심을 심어 전류를 통하게 한 밭의 작물과 다른 밭의 작물을 비교했어요. 그런데 전류를 흘린 밭에서 더 싱싱한 작물을 거뒀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씨뿌리는 밭의 비유에서 밭이 네 종류 나오지요. 세 개를 하나로 묶고 나머지 하나를 따로 할 수 있어요. 열매가 없는 밭이 세 종류인데 그 밭들의 특징이 뭐냐? 경로가 나와 있어요. 그런데 30배, 60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밭은 경로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천국 가기 위해서 자기 나름의 스케줄을 짜고 경로를 아무리 짜도 세 가지의 밭에 있는 장애물을 이길 수가 없어요. 말씀 듣는 시간에 잠을 자버린다? 이것은 씨앗을 길가에 뿌리는 것 같아서 이것은 사탄이 와서 말씀을 다 빼앗아버린다(마 13:19)는데 잠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해요? 못 견디잖아요.

그리고 ‘아, 말씀 좋다. 이제 복음으로 살리라!’(마 13:20) 했는데 세상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환난을 주니까 열매가 없어요. 그래서 포기해 버렸어요(마 13:21). 세 번째, ‘역시 말씀대로 사니 복을 받고 만사형통하네.’ 그런데 그 만사형통이 문제가 되었어요(마 13:22). 만사형통해서 ‘내가 죽어 마땅함’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살아 마땅한 존재’로 변했어요. ‘나같이 믿음 좋고 복 받았는데 나를 감히 죽이다니?’ 이런 엉뚱한 생각은 자기 증거에 빠진 거예요.

이것은 뭐냐? 그걸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의 장애를 통과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30배, 60배, 백배의 열매는 뭐냐? 경로가 없어요. 그냥 이유가 없어요. 주님의 자기 스토리, 자기의 최단 거리 경로에 그냥 ‘네가 나 갖고 논 거야?’ 하는 식으로 그냥 다뤄진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나의 인생이란 하나의 코미디 같은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끝으로 히브리서 12장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7-8절에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모든 선택, 결정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코미디로 바뀌기 바랍니다. 간섭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계획한 모든 것이 무산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의’라는 자체가 진짜 웃기는, 말도 안 되는, 악마가 심어준 망상인 것을 아는 그것이 실상의 증인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세상에 놓여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나의 존재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해도 저것을 생각해도 ‘나 다치면 안 된다’라는 생각 외에는 나올 수가 없는데 차라리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하찮은 코미디처럼 여겨지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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