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상속자
2025년 4월 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35-36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나 살아남기’가 그토록 중요한 문제일까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두신 상받을 자를 생산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인간들 가운데 상받을 자가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스스로 꿀리지 않는 인간임을 증명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쉬울 때나 하나님 찾겠다는 겁니다. 살만한 존재일 때는 하나님이 그다지 필요치 않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0:34의 말씀은 그냥 허공으로 날려 보냅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세상에서 재산 날아가는 것도 ‘기쁜 일’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산업의 함축된 표현이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언급했건만 인간들에게 그다지 기쁜 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자신의 존재성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존재는 귀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제시한 가치는 따로 있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두는 ‘상(賞)’입니다. 상은 기여도가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의 존재를 제거하는데 있어 기여도를 가진 자에게 상이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는 늘 ‘건방지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 내부에 악마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 악마의 대리자노릇을 하며 삽니다. 이것이 어디서 드러나는가 하면 바로 말씀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거림, 경멸로 나타납니다. “백날 말해봐라.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상에 의해서 나는 자극받지 않는다”는 단호함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만약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맞다면 이는 내 존재가치를 우선시 하는 것도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상이 존재합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자기로 인하여 심히 시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음’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들려오는 모든 말씀은 안 들린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아담이 잠들고 있을 때, 하와를 만드신 것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죽이게 해놓고서 들려지게 됩니다.
“내 입의 말씀이 너희를 죽였노라”(호 6:5) 말씀의 기능이 바로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상을 미리 마련해놓으시고 그 상에 관심갖고 살아가야 될 자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이미 악마의 대리자로 살아가기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과 가치에 대해서 인간들은 비아냥으로 일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상 받을 자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상은 뭘까요? 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하나님 자체가 상이 되기에 이 상을 공유할 자는 친히 하나님께서 생산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준해서 필히 성사시킵니다. 그 예가 바로 야곱 언약의 자녀인 유다 집안에 일어난 일로 나타납니다. 다말은 유다 집안의 며느리로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시동생인 오난과 관계를 가져 유다 집안의 후손을 이어야 하는데 오난이 생각하기를 아이를 가져봤자 자신의 씨가 아님을 알고 임신을 방해했습니다. (창 38:9)
그리고 막내 시동생은 있었지만 시아버지되는 유다가 그 아이마저 죽을까 해서 거부합니다. 이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직접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임신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시아버지인 유다는 다말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네가 나보다 옳도다”(창 38:26)
그렇게 해서 유다의 대를 잇는 자는 다말이 임신해서 낳은 베레스입니다. 이 베레스는 마태복음 1장 족보 속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된 자만이 상 수여자가 됩니다. 즉 ‘있음→없음→있음’입니다. 왜 이런 절차가 필요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느 인간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의 말씀을 들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는 직접 말씀이 그 마음에다 심어버리십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the result of our ministry,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s.
인간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역겨워하는 지를 하나님께 잘 아시는 이유는 하나님쪽에서 인간 관계를 끊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11장에서는 이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슥 11:10-14)
여기에 나오는 은 30세겔은 요즈음 시세로 120만원 정도입니다. 은 30세겔은 120 데나리온 정도이기까요. 1 데나리온은 어른의 하루 품삯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너무도 헐값으로 자신의 가치를 넘겼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이사야 52:3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즉 예수님의 가치를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보다 못하게 보는 모든 인간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고발하시는 방식으로 자신을 내비치시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치없에 자신의 존재는 정말 무가치함을 아는 자만이 하늘의 상만 쳐다보며 사는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존재가 없음으로 인해 더는 우리 자신을 위한 걱정 근심도 소용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1강-히브리서 10장 35-36절(상 상속자)250406-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35-36절입니다.
히브리서 10:35-36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4절에 보면, 우리의 모든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해야 하는데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빼앗겨도 괜찮은 이유가, 너희들한테는 더 큰 산업이 있기 때문에 기쁘다는 거예요.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뚜렷하게 부각이 되기 때문에, 그게 기쁨의 유일한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사라질 것들은 사라지는 것이 도리어 더 낫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용감하게 살 필요가 있는데 그 영구한 산업을 36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약속’이라고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이렇게 볼 때 우리 성도의 존재라는 것이 성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따로 마련한 큰 상의 가치를 위해서 우리가 성도가 된 겁니다.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존재는 없습니다. 존재는 없고 가치만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여기 존재가 있어 버리면 가치가 존재 때문에 가려지고 무시당하죠.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전부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건방져요. 건방지게 존재해요.
여러분 평생 살면서 여러 가지 고민과 걱정을 많이 하잖아요. 고민과 걱정을 하는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여러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윤석열 탄핵당했다.’ 왜 그게 걱정이 될까요? 윤석열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고, 윤석열을 밀어줬던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굉장히 시건방진 일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가치를 이 존재가 다 가려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존재가 하나님의 가치를 어차피 훼손하고 훼방할 것 같으면 존재로서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번 다 해 봐라. 숨기지 말고.”
인간이 인간의 존재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딱 하나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조롱하는 거예요. 성경을 놀리고, 성경을 비아냥거리고, 성경을 모독하고, 성경을 경멸하고. 그런데 그게 나를 거치면 안 그런 척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인간에게 들이대는 것은, “그 존재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감을 최대한도로 살려서 그걸 다 까발려 봐라, 다 까발려라.” 이 말이에요. 그렇게 까발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너는 비키고 네 속에 자리잡고 있는 악마가 직접 이야기하게 해라. 언제까지 네가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하겠느냐? 너 성경 싫잖아. 싫으면 싫은 대로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걸 노골화시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성경 말씀을 포기를 못 해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오늘 ‘약속’ 나왔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요. 이 약속을 약속되게 하기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놨는데 인간은 이미 악마한테 접수가 된 겁니다. 그럼 딱 깨놓고 하나님의 뜻은 ‘악마야! 인간 자꾸 앞장세우지 말고 그 속에 있는 마귀가 그냥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게 하자’라는 거예요.
바로 그 싸움의 현장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성경 말씀을 거부하고 싶은 그 악마의 본성이 있으면서 그걸 이해해 보려고 애쓰고 듣는 척을 하고 있는데 왜 그런 척을 하고 믿어보려고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과 호의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본인이 포기를 못 하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를 지울 마음이 없어요. 자기 존재를 제거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네 존재 말고 상(賞), 네 존재 말고 ‘약속’, 이렇게 바꿔치기 하는 것으로 주님께서 계획을 세운 겁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렇게 참아라, 약속을 믿고 참으면 상을 준다, 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이게 오늘 본문 말씀 아닙니까, 히브리서 10장 35절의 이 말씀이 딱 오게 되면 그때 우리 마음속에 또다시 잠자고 있던 악마의 본성이 살아나요.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상을 준다는데 내가 그 상이라는 말을 듣고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자극이 될 줄로 아십니까? 우리가 상이 있다고 해서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지’ 뭐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요? 상 그딴 거에 우린 미혹되지 않습니다. 나도 꿀리지 않을 만큼 살고 있는데 상 준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더 잘 되는 촉발성, 촉발될 수 있다고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까? 그건 오산이십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살아요, 그냥. 주님께서 그런 이야기해 봐야 들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괜히 헛수고하지 마세요. 나는 내 존재를 지킬 겁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우리 속에 있는 악마의 마음을 지금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엿 먹이는 거예요. 매 순간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자기 딴에는 돈 번다고 열심히 사는데 그게 뭐냐? ‘내 존재를 지우기 싫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라도 내 존재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무슨 소리 하든 귀담아듣지 않겠다고 나는 작심을 했습니다.’ 그런 각오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지금 백날 히브리서 이야기해 봤자 헛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먹히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 계획이 실패한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겠죠. 그런데 그 점을 우리 주님께서 이미 꿰뚫고 있었어요.
이사야 29장 13절에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입술로는 나를 경배하나,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 너희들이 어떤 소리를 하는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쪽에서 그걸 알고 있는 인간에 대한 조치는 뭐냐? 호세아 6장 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다 죽일 거야.’
그런데 너희들은 악마의 편에 서서 내 취지를, 하나님의 취지를 완전히 오해한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이 말씀하면 우리가 뭐 순종하고 엎어져서 회개하고 그럴줄 알았지롱? 백날 이야기해 봐. 우리는 안 그럴 거야.’라고 마귀 쪽이지요, 인간 쪽은 그렇게 오해했는데 하나님은 딴생각이에요.
‘너희가 그렇게 나올 줄 내가 모를 줄 알았지? 내가 하는 이 모든 말은 너희를 죽이기 위함’이라는 거죠. 그리고 ‘큰 상이 있으리라’라는 이 말은 ‘너희들 가운데 상 받을 자가 없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 상 개념을 언급하신 거예요. “상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도 널 알고 나도 너 아는데 무슨 상을 받아? 무슨 약속을 받아?”
내가 약속받을 잽이 된다고 본인이 그렇게 생각합니까?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는데, 정신을 내 존재에 팔고 있는데 무슨 상을 받아요. 상을 상답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대책은 그겁니다.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사람을 죽이고 상 받을 사람을 새로 생산하는 겁니다.
하나님 일에 빈틈이 없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상은 상속자에게 주어진다.’ 상은 상속받을 자에게 주어지고, 천국도 약속도 상속자에게 주는 겁니다. 그런데 현재 인간은 죽어가고 있어요. 죽어가고 있는 자, 죽을 자는 죽기 때문에 상을 받을 자가 못 돼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고 상이 있는 곳과 상이 없는 곳으로 구분했습니다. 상이 있는 곳은 천국, 상이 없는 곳은 지옥 그렇게 구분하는 겁니다. 상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은 일찍이 제거하고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상에 입각해서, 상 받을 수여자에 입각해서 상 받을 자격자를 재창조, 새로 만든 자만이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자의 특징이 뭐냐? 자기 존재와 상을 늘 대조하고 비교하는 사람이에요. 상 받지도 못할 자에게 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도 못할 나에게 어떤 작업을, 공적인 작업을 할 수가 있다는 것, 그 작업을 개시했다는 사실의 낌새를 느끼는 사람, 그런 사람은 더는 자기 존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작업을 하시는 그 약속으로 관심사가 달라질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이 말씀을 비아냥거리거나, 말씀을 우습게 보거나, 놀리거나, 조롱할 수가 없죠. “너는 해라. 난 안 듣겠다.” 이렇게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호세아 6장 5절 “내 입의 말로, 내 말씀으로 널 죽이겠다”라고 한다면 “하나님! 어서 말씀을 많이 주셔서 조기에 저를 빨리 삭제하거나 지우거나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요청하게 될 겁니다.
내 손으로 독약 마시고 뭐 한강에 뛰어들어 죽는 게 아니고, 매일 주시는 그 말씀이 나를 죽이는 말씀이라면 이 얼마나 고맙냔 말이죠. 내가 여기 존재하게 되면 상 그딴 거, 하나님의 천국 그딴 거 시건방지게 그걸 거부하고 배척하는 게 뻔하거든요. ‘그게 뭐요?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지금 사는 게 중요하지.’ 배척할 게 뻔한데 배척하는 이 악마의 대리자, 이거 주께서 가만 안 두겠다는 거예요. “말씀으로 내가 죽여줄게.” 하나님이 얼마나 친절하십니까?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 때 아담을 잠들게 했어요(창 2:21). 인간에게 잠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이 중지된 순간을 말합니다. 잠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거든요. 하나님의 작업은 이 원칙에 준해서 작업해요.
말씀 공부한다고 말씀 아는 게 아니에요. 내 존재는 항상 건방지기 짝이 없는 거예요. 왜? 존재하는 자체가 속에 있는 마귀의 대리자로 행세하기 때문에요. ‘백날 이야기해 봐라. 내가 듣나 한 번 봐. 안 들어, 안 듣는다고! 딴생각할 거야.’ 이게 존재거든요.
그러니까 아담을 잠재워놓고 이브를 만들 때 그때 상상외의 기쁨이 아담에게서 나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그러니까 생각 같으면 부부싸움 할 때, 남편이 아내를 시시하게 볼 때 가끔은 남편이 좀 죽었으면 좋겠어요.
죽고 난 뒤 다시 깨어날 때 “이런 좋은 여자분을 맡겨주시다니!” 여자분들은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이쪽에서는 이제 여자를 죽일 차례에요. 죽고 난 뒤에 내가 다시 살아날 때 내 존재감보다 내 앞에 있는 존재감이 하나님의 선물로 느껴질 때 예상 밖의 큰 기쁨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로다.” ‘네가 바로 내 몸이구나. 이로써 한 몸이 된다.’ 상대가 있음으로써 상대에게서 내 몸을 발견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지 않습니까?
이 원칙은 다니엘도 마찬가지예요. 다니엘이 뭐 계시받으려고 애쓰지 않았어요. 다니엘 8장 18절에 다니엘이 깊이 잠에 들었어요. 잠자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니엘에게 말씀을 줘버립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다니엘이 잠을 잔다는 것은 그 순간만큼은 죽은 상태예요.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까?’ 이런 거 필요 없어요. “그가 내게 말할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깊이 잠들매 그가 나를 어루만져서 일으켜 세우며” 그냥 잠자고 있을 때 어루만지며 계시를 줬습니다. 그 계시가 얼마나 대단한 계시인지 다니엘은 수일 동안 앓았어요.
그렇게 계시를 줄 때 하나님의 뜻은 그겁니다. “다니엘, Be quiet!” “다니엘, Stop!” 아무도 안 웃는 거 보니까 <당나귀 귀> 프로 안 보셨구나. “조용히 해! 말씀 앞에 죽은 자야. 너는 죽고 말씀 자체에서 말씀이 살아나는, 곧 말씀이 새로운 생산 작업에 들어가. 시건방진 네 존재는 거기 관여하지 마.”
말씀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 3절에서는 이걸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3장 3절에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네 마음에다가 내 말씀을 심어버린 거예요, 네 마음에다가.
주인공이 바뀌었어요. 말씀이 주인공이 되었어요. 내 마음에다가 말씀이 심어져 버린 겁니다.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윤석열 탄핵 이야기를 제가 언급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보게 되면…, 다 아는 이야기에요.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왕이 된 그 왕국의 소속이에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 있느냐?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지금 깊이 새겨져 있습니까? 윤석열하고 무슨 관계가 있죠? 아무 관계 없어요. 이재명하고 관계있습니까? 관계없습니다. 미국하고 관계있어요? 없습니다. 이미 하늘나라가 소속이에요.
사도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속이 확정되었어요. 천국 백성입니다. 천국 백성은 주님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도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담대하다.’ 당당하다. “그런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이 땅의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보관되어 있다는 이 사실이 목사님, 왜 평생 우리에게 안 느껴집니까?”
이 대한민국이 살기가 꽤 괜찮거든요.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것에 오랫동안 온 정신이 확 빠졌단 말이죠. 오늘 본문에 모든 사람이 산업을 빼앗긴다는데 아직 우리 산업을 빼앗기기까지는 안 했잖아요. 보이스피싱을 두 번 당하지는 않았단 말이죠. 세상사는 즐거움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그 말이거든요. 이건 세상이 주는 기쁨 그 기쁨에 현혹되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사는 데 있어 꿀림이 없다. 나는 나 스스로 사는데 전혀 꿀림이 없다.’가 확고해요. ‘상? 무슨 이야기에요? 약속? 들어본 적은 있는데.’ 관심 없어요. 심지 같은 나, 그 나만 단단히 서면 만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오만, 건방짐, 완악 그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남은 작업은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작업하느냐,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하느냐? 그 작업이 또 성경에 나와 있어요. 요근래 제가 여러 번 하는 표현 중 하나가 ‘참 친절하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만큼 감사하고 하나님께 고마워하라는 그런 뜻이에요. 너무나 친절해요.
어떤 작업을 하느냐 하면, 상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없는 데서 어떻게 생산하느냐, 그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상 받을 자가 아무도 없어요. 마귀하고 한통속인데 무슨 상을 받아요. 상의 가치가 누락되잖아요, 훼손되잖아요. ‘하나님이 준비한 그 상을 받을 새로운 가치 있는 사람을 어떤 식으로 생산하느냐?’ 이 말은, 다른 말로 어떻게 상속자를 만들어내느냐, 그 작업에서 이 성경이 가득하게 충만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단 시작을 어디서부터 하는가? 상이 뭐냐, 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창세기 15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여호와가 상입니다. 여호와가 상이예요. 여호와가 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친히 상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상이 되시는 그 작업에 기여한 사람, 기여한 사람에게 상이 돌아가는 그러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가 최후, 마지막 상인 것을 하나님이 제시할 텐데 그 제시하는 데 있어서 기여한 사람, 거기에 참여된 사람에게 하나님 여호와의 상이, 복이 돌아가는 그 작업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상 받을 자에게 상이 돌아간다, 그 말입니까?” 오케이, 그 말이에요. “상 받을 자에게 상이 돌아가는데 그 상 받을 자를 어떻게 만듭니까?” 그건 하나님의 상속자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상속자는 어떻게 생깁니까?” 죽였다가 살리는 방법이죠.
현재 있는 아담에 속한 육적인, 마귀와 한통속인 육을 죽이고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그걸 장자라고 이야기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생명의 언약이 삽입되면서 그 사람은 죽었는데 다시 살 자가 되는 거예요. ‘야곱’은 죽이고 ‘이스라엘’로 살리는 겁니다. 그게 복이에요. ‘아브람’ 죽이고 ‘아브라함’을 살리는 거예요. 있는 사람을 죽이는 작업부터 시작되겠죠.
존재의 있음은 상에 방해물이 되기 때문에, 존재 있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가치를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기 때문에 그 존재를 죽이고, 없애고 없는 가운데서 다시 살리는 거예요. 말씀으로 살리는 겁니다.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죠.
하나의 예를 들면 쉬울 겁니다. “하나님의 상 받는데 누가 기여했습니까, 어떻게 기여했습니까, 누가 상 받을 자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창세기 38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유다 가족이 나오는데 유다가 이방여인 수아라는 여자를 보고 동침을 했고 세 명의 아들을 낳게 됩니다.
큰아들 엘은 하나님께 범죄 해서 죽고(창 38:7), 둘째 아들 오난이 있었어요. 유다의 장자가 이미 죽고 없지만 유다는 그 큰아들을 이을 자식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복이, 상 받을 자격이 유다에게, 그리고 그 유다의 복이 그 아들에게…, 그렇게 해서 그 복이 계속 복을 낳고, 또 복을 낳으면서 어디까지 가서 스톱이 되느냐 하면, 여호와가 상급이 될 때까지 복은 계속 멈추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다의 큰아들인 엘이 자식이 없는 채로 죽었으니 둘째 아들인 오난으로 하여금 형수와 관계를 해서 자식을 낳게 하려고 한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38장 9절에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내가 낳았지만 내 자식이 아니게 될 줄 앎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존재는 뭔가를 흡입해요. 내가 여기 중앙에 있기 때문에 모든 괜찮은 것은 나에게 끌어당기는데, 나한테 끌어당기는 것을 이익이라고 하고 멀어지는 것을 손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손해 보는 장사를 안 하잖아요. 나한테 끌어당기는데 ‘애 낳아봐야 내 자식 안 될 것 같으니 거부한다.’
그래서 사정을 그 몸에 하지 않고 바깥에 했어요(창 38:9). 그걸 보고 하나님께서 오난을 죽였습니다. 개인의 욕정 문제가 아니죠.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계획, 언약이 나의 존재보다 더 우선됩니다. 내가 어떻게 밥 먹고 사는지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어떻게 실현되는가, 그게 더 중요한 거예요.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자기 존재에 마귀가 들어있는 사람 같으면 ‘난 안 들을란다~’하고 끝날 문제에요. ‘난 그걸 모독한다. 그 이야긴 시답잖다.’ 이렇게 모독하면 그만이에요. 왜? 난 꿀릴 것 없이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매 순간 우리 삶의 현장은 ‘말씀이냐, 내 존재냐?’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에요. 하나님은 양보 없어요. 우리도 양보 없어요. 우리도 한 고집 합니다. 우리는 어떤 수가 있더라도 성경을 진지하게 듣지 않겠다는 아주 단호한 각오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사업이 망해도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말씀은 듣지 않겠다.’라는 이러한 고집 같은 것이 우리 속에 강하게 있어요. 미처 우리가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면 바로 숨겨진 악마의 본성,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하는 본성이 노골적으로 그 순간 나타날 겁니다.
그런 경우가 교회에도 비일비재합니다. 목사가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때 그 목사의 마음속에 뭐가 있겠어요? 말씀 내용에 관심 없어요. 살아야 하겠다는 그것뿐이에요. 존재하니까 그렇게 시건방진 거예요. 나만 살면 된다는 거예요. 온 세상이 다 그래요.
오난도 마찬가지죠. 너무나 노골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이에요.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창 38:9-10)라고 되어 있어요.
이걸 남의 일로 듣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딱 들어왔는데 내 재산에 이게 손해냐 이익이냐를 따져서 내게 손해난다 싶으면 말씀을 추방시키잖아요. 말씀도 쫓아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야, 너 고3인데 교회 나가지 마라.” 이거랑 똑같은 거예요. “고3인데 왜 교회를 가? 교회 가는 것이 너한테, 너의 너 됨에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져봐. 머리가 있거든 따져봐라. 그 시간에 공부 더 해라. 영어 공부를 더 해라. 살아 남아야 할 거 아니야, 이 바보야! 교회 가면 떡을 주나, 밥을 주나? 아무것도 안 주잖아.”
그러면 “목사님 안 죽이던데요?” 죽이든 안 죽이든 그것은 이미 죽은 거죠. 상의 가치가 없으면 그건 이미 죽은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 유다가 셋째아들을 형수에게 안 줍니다. ‘저 여자가 뭔가 재수 없는 여자라서 셋째 아들마저 주게 되면 또 죽일까’ 싶어 안 주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며느리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고 기어이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어서 나중에 임신하게 돼요. 창세기 38장 24-25절에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재판을 하는 거예요. “네가 우리 가문을 더럽혔다.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 줄 아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하는 가문에 너 같은 가나안 땅의 이방 여자가 시집와서 우리 집안을 망쳐? 네가 마귀구나. 아주 폭삭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지? 어디서 이 거룩한 집안에, 어디까지 가서 임신을 해왔느냐? 누구하고 붙었어? 이실직고해!”
그러니까 다말이 “이 사람하고 붙었습니다.”하고 물건들 내놓는데 그 당시에 일종의 도장이죠, 도장, 인감도장 딱 보관했다가 내어놓을 때 그때 유다가 뭐라고 하느냐? “네가 나보다 의롭다”(창 38:26). 그렇게 해서 다말이 임신이 되어서 쌍둥이를 낳는데, 마치 이삭에게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낳듯이 야곱 언약에 담겨 있는 그 내용이 그대로 전수되어서 이 유다 집안에 일어납니다.
먼저 베레스를 낳고 그다음에 세라, 그렇게 쌍둥이를 낳았잖아요.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족보가 나오는데 마태복음 1장 2-3절에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다. 장자가 베레스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여기서 기여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언약을 성사하는 기여자는 누구냐? 그것은 바로 다말이죠. 그 다말이 하나님이 상속하는 그 상속자의 라인에, 족보에 여자 이름이 들어가요. 왜냐하면 다말은 죽을 뻔했으니까, 시아버지한테 불 살려져 죽을 뻔했으니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독일 동화에도 나와요. 엘리제라는 공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왕비가 죽고 난 뒤에 새로운 왕후가 들어왔어요. 들어와서 전에 있던 왕자들을 다 내쫓았어요. 공주 내쫓고 오빠 여섯 명, 왕자들을 다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 왕후가 단순히 왕후가 아니고 악녀였어요. 사람 구실을 못 하도록 낮에는 백조가 되고 밤에는 다시 사람이 되는 그런 저주를 퍼부어서 쫓아냈습니다. 공주도 쫓겨나서 우물가에서 백조 여섯 마리가 물을 먹고 있을 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아, 오빠들이 여기 있었군요.’
나중에 이웃 나라의 왕이 엘리제의 미모에 반해서 엘리제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갑자기 왕비를 맞아들이니까 ‘왕비가 제대로 된 왕비인지?’ 과연 김건희가 대통령 영부인 노릇을 제대로 하는지를 감시하겠지요.
감시하는데 말을 안 해요, 말을. 말을 일체 안하면서, 쐐기풀로 옷을 만들고 있어요. 그러니까 신하가 왕에게 왕비를 탄핵하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왕이 참다 참다 못해서 신하들 요청에 의해서, 다수당 요구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왕비를 화형에 처하기로 합니다.
‘어떻게 왕이 눈이 삐어서 말도 못 하고 마법을 행하는 그런 여자를 이 나라 왕비로 앉혔는가? 나라를 망칠 작정인가?’ 해서 왕비를 화형에 처하기로 했습니다. 왕비는 화형에 처해지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쐐기풀로 옷만 짜고 있어요. 그때 난데없이 어디선가 백조 여섯 마리가 날아왔을 때, 그리고 막 불을 붙이려고 할 때 왕비는 쐐기옷을 공중으로 날려버립니다. 십자가입니다. 그 옷을 받은 백조들은 다 사람이 되었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모든 인간들은 그 안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그 존재가 가지는 시건방짐, 나만 잘되면 된다는 그것만 있어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결국 예수님이 처형을 당하잖아요. 화형은 아니지만. 처형을 당하면서 나오는 그 고난, 그 고난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 있는 상 받을 진짜 하나님의 백성을 생산하는데 사람들이 도저히 못 알아듣는 말을 함으로써 성공시킵니다.
인간이 들을 수 없는 말을 함으로써 성공을 시켜요. 백조가 사람 되듯이 하나님의 약속에 더 관심이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지요. 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 작업을 하시면서 주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구약부터 신약까지 죽 나옵니다.
주님께서 말을 하지요. 말씀을 하셔도 못 알아들으니 입을 다문 것이나 마찬가지고 하여튼 “내가 너희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방금 그 이야기를 요한복음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2장 25절을 보면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사람의 어떤 증거도 받지 않는다. “네가 까불어대고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가 안 듣거든!” 왜? 친히 아니시니까요. 인간 속에 괴물이 들어 있다는 것을 친히 아시니까 “하나님!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안 받아요. 그것을 받고 구원해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어떤 모순점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주의 일에 기여를 해야 상을 받는데, 인간은 자기일 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주의 일에 우리가 자진해서 나설 수가 있느냐? 주의 일에 자진해서 나설 수가 없다면 아무 기여를 한 바가 없는 것이 되고, 기여한 바가 없으면 ‘수고했다, 착하다, 충성된 종아’ 하는 무슨 상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하는 그러한 모순점이 발생되지요.
주께서 그러한 모순점까지 감안하시는 일을 이 세상에서 이루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대목이 나오는데 스가랴부터 먼저 보고 마태복음을 보겠습니다. 스가랴 11장 7-14절까지의 내용인데 길기 때문에 제가 간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예언하기를 막대기 둘을 취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막대기 이름을 ‘은총’이라 했고 두 번째 막대기의 이름을 ‘연락’이라, 서로 연락(連絡)한다는 그 ‘연락’, 영어로는 nexus라고 하는데 연락한다,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슥 11:7).
첫 번째 막대기의 중간을 싹둑 하고 분질러버려요(슥 11:10-11).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끊어져 버리는 거예요. 이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쪽에서 인간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막대기는 뭐냐? 통합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절된 국가로 만들어요. 분단된 국가로 끊어버려요. 두 가지를 끊었습니다(슥 11:14). 그다음에 중요해요. 스가랴 11장 13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라고 되어 있어요.
막대기를 두 번이나 끊어버린다는 그 증거,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은 30냥에 예수님이 팔렸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팔렸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사야 52장 3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값없이 팔렸다는 말은 악마가 인간을 그냥 값없이 강제로 납치한 거예요. 소속이 악마의 소속으로 값도 치르지 않고 값없이 아담을 그냥 납치한 거예요. 호세아에 보면 간음한 여인이 자기 남편을 버리고 바람이 났는데 호세아 선지자보고 ‘네가 값을 치르고 집 나간 아내를 데려오라’라고 했어요. 데려오라고 한 그 기한이 3일이에요.
은 30냥이 어느 정도냐 하면요, 120데나리온이거든요. 한 데나리온은 성인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봅니다. 요즘으로는 약 십만 원을 잡으면 돼요. 그래서 은 30냥은 1,200만 원 정도가 돼요. 그 당시 노예 값인데 너무 헐값에 팔렸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은 ‘내가 이 기적을 베풀고 이 말씀을 전하는 나를 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면 헐값에, 그야말로 똥값에 팔릴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그렇게 인간 세계에서 흘려들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가치를 그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돈 1, 200만 원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살 수도 있고 팔 수도 있는, 상품화시킬 수 있는 정도의 가치로밖에는 취급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 인간의 자기 존재가 1, 200만 원보다는 더 값이 나간다고 모든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예수보다 내가 더 가치 있다.’라는 그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심보로 평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자식이 아버지를 두고 “아버지, 요양병원에 보내드리고 싶은데 한 달에 120만 원 내랍니다. 돈 아까워서 요양병원에 못 보내드리니 길에서 죽든지 말든지 나는 모르겠어요.” 한다면 여러분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리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너희들 평생 먹이고 키워줬는데 내 가치가 120만 원밖에 안 되느냐?” 그거지요.
그러면 주님의 가치는 120만 원밖에 안 됩니까?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노예의 값으로 팔리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에요. 인간의 그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영생으로 여기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성경에 보면 ‘피로 값주고 샀다’라고 되어 있거든요. 피로 값을 주고 샀다면 인간들 보기에 헐값에 불과한 그 피가, 120만 원보다는 더 비싸게 여기고 있는 내 목숨보다 더 고귀하다,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사나 죽으나 주의 것’(롬 14:8)이 됨을 영광으로 여기는 겁니다.
내가 나의 주인공인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거예요. 내가 내 존재를 갖고 있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겁니다. 이제는 나보다 더 가치 있는 분이 내 존재를 관리하기 때문에. 거기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께서 상을 주시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내 가치를 제거하는데 스스로 기여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는 그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이제부터 여러분이 아는 성경 구절을 대면 슬슬 풀릴 거예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제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아시겠지요. 네 가치, 내가 존재하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는 그 말이에요.
고린도전서 3장 7-8절에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모든 상은 기여한 대로 동질의 상을 받아요. 영생을 받습니다. 왜? 자기 존재가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무슨 상에 상급(賞給) 이 있습니까? 상에 상급같은 것은 없어요. 상을 받지요. 상을 받으려면 말씀을 받아야지요. 주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상속자 되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를 죽임으로써.
끝으로 마태복음 22장 25-28절에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부활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나 부활 안 믿거든? 부활이 있다면 하늘나라에는 이런 혼란이 발생된다.’ 그래서 “남자 7명이 한 여자와 결혼을 차례로 다 했는데 누구의 아내가 될 것입니까? 하늘나라가 완전히 난장판이 될 일이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모독하면서 질문한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인간은 모독하고 조롱하고 놀리고 비아냥 거리는 것이 주특기에요. 그것 외에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요. 왜? 자기 존재가치가 중요하기 때문에요. 주님을 계속 우습게 보는 게 자기를 그만큼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29-32).
관심사를 하나님께 둬야지 왜 이 존재에게 관심을 두고 성경해석을 그런 식으로 하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그 죽음 안에 주의 말씀이 그득하게 그 열매로 담겨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골로새서 3장 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영생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소속은 하늘나라입니다. 윤석열 탄핵, 이제는 그만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옵소서. 말씀 세계 안에 있어야 하는데 내가 형성한 나의 존재 안에 갇혀서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톡톡히 하면서 모든 성경 말씀에 대해서 비아냥거리고, 조롱하고, 놀리고, 개무시하는 그것, 그렇게 해서 우리가 뭐라도 된 양 으스대는, 가치가 높아지는 양 대단한 척하게 하는 악마가 차라리 말씀을 통해서 노골화되는 기쁨이 있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