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불신앙성
2025년 3월 2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26-31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성경에 뭐가 쓰여졌던 우리의 몸은 이 성경을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놀림받는 것은 성경입니다. 그것은 본성적으로 인간은 자기를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것은 선/악의 구분까지 넘어선다고 여깁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나 하나님 말씀까지 자신의 몸이나 존재보다 앞서 존재하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31절에서 ‘살아 계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누구의 존재도 하나님 존재를 대체하거나 가로막거나 앞서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몸을 통해서 드러낸다면 그 드러냄을 통해서 인간의 본 모습과 속성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기 소유를 건드리면 어지간해서 용서가 안됩니다. 더구나 자기 몸을 건드리면서 죽기 살기로 나올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몸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그다기 관심도 없고 심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의 관심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몸의 일이 가리워졌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하여 이 세상의 인간들은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오늘 본문의 기준을 철거하고 치워버리는 것을 이 위기감을 해소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저만치 밀어나는 그 본성은 인간의 육신이 이미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내막은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등장하신 취지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이나 영적 존재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이 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들 속에서 하나님 아들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이가 하나님에 대해서 감각이 없으니 오로지 예수님만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감각을 지닙니다.
그 감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시험받으심과 시험하심’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있어 악마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없는 존재입니다. 아예 없으니 신경쓸 필요도 없습니다. 일반인에게는 악마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시험받으심’이라는 체험을 아버지로부터 부여받게 됩니다. 이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정리되는 것은 인간의 존재보다 ‘말씀의 존재’가 먼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악마는 예수님 대해서 “네 몸부터 먼저 챙겨라”고 합니다.
바로 이 정신이 악마의 일관된 정신이며 온 인류를 정신적으로 장악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즉 악마의 사주를 받아 인간은 ‘자기 이전’으로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최종적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악마가 통치하는 공간 안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시험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내가 나를 의식하기 이전에 선택되었기에 그 선택에 준해서 나를 새롭게 의식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험에서 서로 다른 두 개념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유혹’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점검’을 뜻합니다. 과연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일이 어떻게 중도로 내 문제로 돌아오는지 여부‘를 점검하는 겁니다.
점검은 이미 구원된 상태에서만 성립하는 겁니다. 마치 도저히 제 실력으로 대기업에 들어올 수 없는 신입사원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의 말이 많아서 그는 단호하게 알려줍니다. “사실은 우리 회사 회장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뽑아주셨다”고 말입니다. 이게 이미 입사된 사원이 해야될 일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해야 될 일은,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는 점을 실습, 실습을 통해서 계속 받아들이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말씀과 성령께서 이 일을 하게 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불신앙성을 드러내면서 주님께 감사하는 자가 이미 천국에 합격한 성도가 평생 해야 될 일입니다.
말씀 회사 직원들이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회장님께서 지금도 열성적으로 분류작업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전의 예정하심과 부르심이 지속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3:5에 보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를 검토하고, 자신을 증명하세요. 너희가 너희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계시며, 오직 너희가 책망받는 자들뿐이니?(papago번역)-너희가 배덕자가 아니라면?
5. Examine yourselves, whether ye be in the faith; prove your own selves. Know ye not your own selves, how that Jesus Christ is in you, except ye be reprobates?(KJV)
5.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 -- 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NIV)
5. Test yourselves [to see] if you are in the faith; examine yourselves! Or do you not recognize this about yourselves, that Jesus Christ is in you-- unless indeed you fail the test?(NASB)
구원받기 위해 자신을 시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 일에 대해서 예수님의 능력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겁니다. 예를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실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53)
성경에 보면, 성도는 이마에 주님의 이름이 박혀있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 성도는 자기가 자기를 호출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호출하면서 ‘말씀 회사’가 운영되는 겁니다. 이들의 구원 권능은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몸을 장악했던 모든 윤리/도덕 체계 자체가 성령으로 인해 뜯겨지는 권능입니다.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자신을 매복해서 체포하기 위한 성문 자체가 삼손이 다 뜯어버리는 겁니다. 이와같은 권능이 ‘말씀 회사’ 안을 덮칩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십자가 권능이 임하는 것은 우리는 남의 인생을 통해서 인간의 죄사함은 결코 인간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마 9:4-5)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인해 성도는 비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긍휼이나 죄사함을 요구할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바늘구멍보다 좁디좁은 구원의 일을 늘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9강-히브리서 10장 26-31절(내 몸의 불신앙)250323-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26-31절입니다.
히브리서 10:26-31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이 말씀대로라면 세상은 참 굉장히 위험한, 심각하게 위험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감지하지 못하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굉장히 심각한데 우리 인생은 전혀 심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놀림을 받는 게 성경 내용입니다. 성경 말씀이 가장 조롱을 받아요. 왜냐하면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자 이어야 하느냐?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자에요. 불쌍히 여김을 받지 말아야 하고,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 가서 무서움을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 자체를 한꺼번에 적극적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31절에 나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이게 우리는 근원적으로 싫은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우리가 살아 있지 않다’라는 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가려지고 그것이 느껴지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마디로 말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독 성경 말씀에 대해서만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아무 감각이 없어요. 무슨 소리를 해도 우리는 그게 그렇게 진지하게 들리지를 않아요. 그 이유는 간단해요.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살아있는 것을 제끼고 더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내가 용납 하질 않습니다. 나만 살아있으면 돼요. 나만 살아있으면 되는데 나 말고 따로 누가 나보다 먼저 더 크게 살아있다면 내가 살아있다는 그 가치가 밀리기 때문에, 별로 내세울 게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심장이 다 상하니까 마을 뒤쪽에서 약 먹고 죽으려고 하는데 그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에게 무턱대고 총을 쏘는 거예요. 그래서 약 먹고 죽으려 했던 그 남자가 도망을 갔어요. 왜 도망가죠? 어차피 죽으려고 했던 그 시간에 약 먹고 죽으나 총 맞고 죽으나 죽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총 쏜다고 놀라서 도망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남자 살았어요.
사람은 그냥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죽거나 살거나 내가 결정해야 해요, 내가! ‘내가 결정하는데, 네가 뭔데 나 죽는데 끼어들어서 나에게 총을 쏘고 죽이려고 하느냐?’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 확인하고 싶은 것이 뭐냐? ‘내가 살아있다. 내가 여기 있다.’ 이것만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다른 관심사는 없어요.
그러니 성경 말씀을 제시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 말씀 주셨다.”라고 나오면 살아있는 인간들이 이 말씀 보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없다.’ 간단하게 한 마디로 ‘하나님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도 없다.’ 슬그머니 자기 주변에서 밀어내면 그만이죠.
그래서 인간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다 감각이 있는데 말씀에 대해서는 감각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말씀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한 성립되지 않습니다. 천국이 있든 지옥이 있든 관심사가 아니고 내가 여기 있음, 오직 관심사는 이것뿐이거든요.
따라서 이 성경 말씀, 오늘 본문에 나온 이런 말씀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수님 자신에게 다 인수인계해요. 예수님께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가족이고 하나님께 속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나님이 없는 불신자가 당해야 하는 모든 경우와 그런 처벌을 홀로 체험하는 삶을 살아요. 이 말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에 대해서 유일하게 감각이 있는 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 주기도문이 있거든요. 거기 보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 6:9, 13) 시험하는 자가 누구냐?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가 인간들을 유혹했죠. ‘넌 이미 소속이 결정됐다. 넌 내 사람이다.’라고 시험을 한 거예요.
악마가 인간에 대해서 시험하는 것에 대해 어느 인간도 그걸 느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악마가 어딨어?’ 내 눈에는 사람만 보이지 악마는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감각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사람들만 보여서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에 악마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람의 모양으로 보냈어요.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서,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감각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악마로부터 유혹에 꽁꽁 묶여 살아간다는 것을 직접 광야에서 40일 동안 자신의 몸으로 체험했어요.
악마가 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죠.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유혹했습니다. “너 그렇게 나오면 놀림감이야. 정신 차려. 너 놀림 받고 사는 게 좋아? 너는 네 몸이 있잖아. 지금 굶으면서 기도할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있는 그 몸부터 떡을 먹고 챙겨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했어요.
예수님이 세 가지 시험을 거치면서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쪽에 살아있는 것은 뭐냐? 말씀만 살아있다는 거예요. 말씀만 살아있고, 예수님 자신은 그 말씀이 살아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자기가 죽는 그 일 외에 다른 일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해요. 말씀만 살아있기 위해서.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험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는 뭐냐? “네가 살아있느냐, 아니면 말씀이 살아 있느냐? 둘 중 하나만 골라.” 이거에요. 하나만 고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그 시험은 예수님이 당했던 시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기 전의 악마의 시험과, 예수님이 당하고 난 뒤의 예수님의 시험’, 시험을 두 종류로 주께서 생산해서 이 두 가지 시험을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유포를 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시험이 어떤 시험이냐? ‘내가 나를 의식하기 이전에 선택되었기에 그 선택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비로소 내 속에 의식된다’라는 시험이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여기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말씀이 살아있어서 살아있는 말씀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나를 탄생시켜 내 육신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넣었기에 그때부터 그 선택, 창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한 그 선택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다음부터 우리 육신이 당할 시험이 뭐냐?
그걸 확인하는, 나의 존재와 나의 태어남보다 말씀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험을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렇게 만들어가시는 일, 이것을 주께서 하셨던 겁니다. 그 시험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첫 번째 시험은, 악마가 우리를 유혹하는 시험이지만 두 번째 시험은 테스트에요, 테스트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살면서 악마가 조성한 환경 속에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과연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늘 테스트하면서 끝까지 자기 인생을 갔습니다. 심지어 겟세마네 기도에서 시험은 계속되고 있었어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의 시험에 노출된 분이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야고보서 1장 13절이 결론으로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것이 하나님 말씀이거든요. 이 말씀이 여러분 자신에게, 나 있음 보다 나의 안에 선재해서 먼저 내 속에 들어왔는지를,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 자신을 테스트해야 하는 거예요. 그 테스트의 선배가 창세기 22장 1절에 나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야고보서 1장에서는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는데 창세기 22장 1절에서는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시험의 종류가 예수님을 통해 두 종류로 나타났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의 시험은 이미 시험이 완료된 상태에서 시험한 거고, 한쪽은 과연 구원받을지 어쩔지 몰라서 악마의 유혹대로 행하는 시험, 미완료적 상태에서 하는 시험을 말합니다.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구원받을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장에서 말씀하시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하늘나라에 취직하는 것은 ‘약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같아요. 인간은 죽어도 천국을 못 갑니다. 죽어도 천국을 못 가요. 왜? 천국에 대해 무감각하기 때문에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성경 공부하고, 예배 참석해서 설교 들으면 되지 않겠는가?
안 돼요. 왜냐하면 무감각해요. 감각이 없어요. 다른 것은 조롱하고 놀리지 않더라도 왜 성경 말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자꾸 조롱하고 싶고, 저주하고 싶고, 밀어내고 싶은 충동이 있느냐? 쉽게 말해서 내 몸이 왜 불신앙적인 것을 자꾸 기억하느냐? 이게 콘드로이친도 아니고요.
내 몸이 기억하는 불신앙. 자꾸 핑계가 뭐냐? “히브리서 10장을 봐. 오늘 본문을 봐. 심해도 너무 심했잖아. 하나님 쪽에서 심하게 나왔잖아.” 이거에요. “우리 좋게 지내자.” 이러면 왜 하나님을 안 믿겠어요? “믿으면 복 줄게.” 이런 말을 왜 거부하겠습니까?
“넌 나한테 불쌍히 여겨달라는 소리를 하지 마. 불쌍히 여길 자격도 없어.” 이렇게 나오니까, 하나님 쪽에서 세게 나오니까 내 쪽에서도 세게 나올 수밖에 없죠. 왜? 나를 지켜야 하니까요, 살아있는 나를 지켜야 하니까요. 성경 말씀을 안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 보십니까? 안 봐요. 왜? 돈 벌기 바쁜 데 성경을 볼 시간이 어딨어요? 내 몸이 기억하는 불신앙 때문에 그래요. 성경 보고 싶죠. 그러나 내 몸이 ‘그거 왜 봐? 이거 병신 아니야?’ 내 몸이 성경을 거부한다니까요? 만나서 서로 성경 이야기하라고 하니까 성경 이야기 안 합니다. 트로트 가수 이야기하고, 정치 이야기는 해도 성경 이야기는 안 해요.
“서로 만나면 왜 정치 이야기나 하고 트로트 가수 이야기나 합니까?” 하면 “나 죄인인데요, 뭐!” 나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시건방지게 신자인 척 안 하기 위해서 성경 이야기를 못 하겠다는 거예요. 성경 이야기는 목사님만 하시고, 다른 사람은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뭔가 기분이 이상해요. 겸손을 가장한, 나 죄인임을 아는 자기 자랑? 이거 교만 아닙니까? 차라리 감각이 없다는 말이 적절하지 않겠어요? 성경에 대해서 당기는 게 없다. 왜? 내 몸이 불신앙이니까요. 내 몸이 성경을 밀어내고 있는데 내가 시간 내서 억지로 성경 봐 봐야 잠만 와요. 재미가 없어요. 그걸 왜 봐요?
예수님은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시험해 본다고 하잖아요? 시험해 보자는 그 이야기를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장 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시험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성도한테는 어떻게 되느냐? 네가 알아서 너를 시험해야 해요. 무슨 시험을 하느냐 하면, 내가 신앙이 없음, 내가 불신앙이라는 것을 시험해야 해요.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대기업에 취직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스펙도 좋지 않고, 토플성적도 안 좋고, 학교도 지방 전문대 나오고 이래서 내세울 게 없는데 취직이 됐어요. 그러니까 다른 신입 직원들이 “너 여기 왜 들어왔어? 네가 여기 들어올 실력이 안 되는데 이 동네 어떻게 들어왔느냐?” 하니까 그 신입 사원이 하는 말이 “회장님이 나를 특채해서 나를 취직시켰습니다!”
뭐 드라마 같은 이야기죠. 회장님이 취직시켰대요. “그러면 너 영어 실력은?” 뭐 개뿔도 없죠. “컴퓨터는?” 모르죠. 그걸 왜 묻냔 말이죠. 회장님이 취직시켰다는데 컴퓨터니 영어니 그걸 나한테 왜 물어요? 나는 애초에 이 회사에 들어올 실력이 안 되거든요.
구원받았다는 것은 ‘말씀 회사’에 취직된 거예요. 그래서 취직이 됐거든요. 취직이 되니까 그다음부터는 회장님의 지시가 뭐냐? “네가 왜 이 ‘말씀 회사’ 천국에 들어올 수 없는 실력자인지, 평생을 두고 네가 시험해라, 테스트해라.” 그 말이지요. 뭐 신났죠. 성도는 신났어요.
이 회사가 ‘말씀 회사’에요. ‘말씀 회사’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의한 분류 작업을 우리 회장님이 아주 열성적으로 하고 있어요. 회장님 혼자 바빠요. 그런데 말씀 회사에 취직된 직원들, 성도죠, 같이 바빠요. 무슨 일로 바쁘냐?
내가 말씀에 입각해서 ‘내가 신자 될 사람인지, 신자 안 될 사람인지? 네가 어딜 봐서 신자가 될 관상이냐, 과연 내가 신자가 될 사람이냐?’ 이걸 이미 취직이 된 상태에서, 천국에 합격이 된 상태에서 이 분류 작업을 여러분 평생토록 열심을 다해 해야 해요.
그렇게 하면서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나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 맞다’라는 것을 말씀에 의한 분류 작업으로 해주셔야 해요. 이러면 여러분들이 바쁘다기보다는 누가 바쁘냐? 우리 주님이 바쁘고 말씀이 바빠요. 말씀이 들어오면서 말씀 안에서 주님이 열성 있는 분류 작업을 하고, 그 분류 작업의 기준은 ‘네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너를 찜해서 천국, 우리 회사에다가 취직된 자로 만들어냈다’라는 그 내용이 성경 말씀이거든요.
그러면 이 말씀, 히브리서 10장 26, 27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라고 했을 때 성도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딱 내 이야기’라고 받아들여야 해요. 그것도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요.
그러면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볼게요.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6절이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말씀이요. 이 말씀을, ‘나한테 딱이다.’ 나한테 딱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말씀 회사’에 취직된 사람이에요. ‘나 뭐 죄인인데 이제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 이게 아니고요, 그 사람은 ‘죄인 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막 살아야 구원된다.’라고 착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엉터리가 또 없어요.
그 사람은 어디서 못 벗어난 사람이냐? ‘내가 여기 있다. 여기 있는 내가 최고로 소중하다.’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한 거예요. 그 사람은 아직도 ‘말씀 회사’에 취직되지 못하고, ‘말씀 회사’라는 그 영원한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그 대기업에서 주는 입시 경향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이에요.
“죄인이 십자가 피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아, 그 문제구나. 그 문제라면 내가 지켜야지.’ 취직이 안 된 상태에서 십자가 연구하고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구원받겠지.’ 그걸 자기 몸으로 달성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에요. 백날 애써보세요. 애써봐야 ‘폭삭 속았수다.’
‘폭삭 속았수다’라는 말이 제주도 방언인데 ‘많이 수고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말을 서울 사람이 들으면요, 그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의미예요. 본인이 본인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그것도 폭삭. 살아있는 나를, 이미 있는 나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 천국에 보내려고 하는 것, 이게 예수님 몸을 통해 보여준 바에 의하면 바로 악마의 일이에요.
이게 나의 일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도 나의 일에 속해요. 왜? 모든 시작을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게 나의 일이에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나로부터 출발하는 이 일이 어떻게 주의 일로부터 시작하는지, 말씀을 말씀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시작한 일인 것을 나로부터 시작한 일을 하면서 그것을 분류 작업하고 그것을 스스로 자기한테 패스하는 그 작업이 바로 성도입니다.
너무 무감각하니까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서 시험받게 하기 위해 보내셨거든요. 그러면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버지의 말씀대로 시험을 받았는지를 보라는 거예요.
보게 되면 분명히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에요. 이것은 변치 않는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살면서 가는 길은 천하에 저주받을 자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에, 나의 일이 먼저가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걸 흔쾌히 기쁨으로 수용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감당했던 거예요. 그게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우리가 이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말씀 회사’ 안에서 똑같이 하게 돼요. 이미 구원받았어요. 이미 천국 합격했습니다. 회장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부르실 때는 우리 이마에다가 주님의 이름을 갖다 붙인 거예요. 이마라고 하는 것은 나한테는 보이지 않고 나를 부르신 자에게만 보이는 지점이에요. 자기 눈에는 안 보이잖아요, 이마가.
요한계시록 22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이마라고 하는 것은 ‘빼도박도 못하고 너는 내 소속이야.’ 이마에 하나님 자기 사인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건 소유 대상이에요. 주님의 소유 대상으로 이마에 주의 이름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 이름은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재료가 됩니다. 주의 이름은 이런데 내 이름은, 아담의 육신을 입고 태어난 내 육신은 무엇을 기억하느냐? 하나님께 대적하고 반항하는 악마의 속성을 내 몸이 기억해요. 그 기억하는 것을 마음껏 펼치는 그 자유를 하나님께서는 허용하신 거예요. ‘불신앙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걸 마음껏 우리의 육신을 통해 보이라, 그 말이죠. 그게 이 ‘말씀 회사’에 취직된 자가 할 일이에요.
제발 불신자인 척 좀 살아가 달라는 거예요. 신자처럼 살아가지 말고. 그거 못 해요? 여러분 몸이 기억하는데 그거 못합니까? 아니면 벌써 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꾸준히 해왔는지도 모르죠. 자꾸 신자가 되려고 하면 안 돼요. 신자가 되려고 한다면 아까 본 고린도후서 13장의 시험하라는 주님의 그 명령이 우리한테서 삭제가 돼요, 그게 없어져 버려요.
주의 말씀이 살아있지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거든요. 주님의 말씀이 살아있기 위해 내가 살아 있는 입장이라면 ‘너를 시험하라. 너는 불신자였었어.’ 그 시험을 왜 우리가 못 합니까? 기분 좋게 해야죠. 주께서 시작한 일이 어떻게 중도에 나의 일로 변했는지를 네 몸을 통해 보여라, 이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창세 전에 너를 이미 확정해서 구원하기로 정했다’라는 건데 어떻게 교회 나와서 말씀, 설교만 들으면 “목사님, 저 어떻게 구원받아요?” 왜 갑자기 구원이 자기 일이 되어버렸어요?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고 못된 짓을 했는데 지옥 갈 것 같아. 어쩌면 좋아요?”
“성경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히브리서 6장 보니까 ‘한번 비췸을 얻고 타락한 자는 구원 받지 못한다.’ 또 오늘 본문 히브리서 10장에도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제는 넌 죽었다. 지옥 불에 들어간다.’ 그 이유가 뭐다? 히브리서 10장 28, 29절에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그래서요?” “그래서 나 구원 못 받으면 어떡해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구원이 된 사람은 ‘구원됐으니까 이젠 마음대로 산다.’가 아니라…, 마음대로 사는 게 불신자가 아니거든요. 불신자의 삶을 사는 거예요. 불신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뭐냐? 성경 말씀을 내 주위에서 다 철거해 버리는 겁니다.
설교, 강의, 모든 성경 말씀을 다 내게서 밀어내는 거예요. ‘나도 인간이고, 나도 살아있으니까 남들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보자. 인생 이렇게 사는 거 남한테 휘둘리지 않고, 밀리지 않는 인생, 사람이 됐으면, 인간이 되었으면 뭔가 내세울 만한 게 있어야 그게 사람 사는 보람이지.’
그렇게 마음을 잡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악마의 유혹에 빠진 거예요. 악마는 나타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아요. 악마의 마음은 뭐냐? 말씀 없어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 되고 바른 사람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휴전을 철폐하고 하마스에 폭격을 가했습니다. 5백 명 넘게 죽고 9백 명이 다치고, 뭐 난리도 아니죠. 그것도 밤에 폭격했는데 사전에 예고도 없이 그냥 쳤습니다. 언론에서는 이스라엘 이야기 안 하고 갓난애가 죽어가는 그 모습, 그리고 파괴된 시가지에서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이 “알라신이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우리는 그 못된 악의 화신 이스라엘에 의해 당했다.’ 그것만 막 비춰준다고요.
그 가자 지역에 있는 사람들 인터뷰할 때 그들 입에서 단 한 사람도 “이것은 하마스가 우리를 속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마스가 아니라, 이스라엘도 아니라, 내 몸과 내 자식과 내 인생이 중요하다.’라는 겁니다. ‘난데없이 우리가 당했으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여, 모든 국민들이여. 우리 하마스의 가자 지역 주민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라는 거예요.
거기에 예수의 피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예수의 피를 언급했어요? 십자가를 언급했습니까? 언급 안 합니다. 예수라는 것보다 내 존재가 우선이고, 예수라는 것도 알라신도 내 존재를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그런 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불신앙적인 내 몸이 하나님에게 그걸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뭐 하냐,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왜 안 도와주느냐?’ 하는 거예요.
우리 몸이 기억하는 불신앙이에요, 이게. 이게 악마성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뭘 어쩌란 말입니까?” 이걸 즐기면 된다니까요? 내가 그렇게 하나님께 대들고 ‘내 인생 꼬라지 보고 있죠?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 사기나 당할 잽입니까?’
그런데 그 모습을 내뱉으면서 ‘이것이 하나님 말씀 때문에 알게 된 내 진짜 모습, 내가 악마의 육신’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과 감사가 나오면 되잖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성질나는데 하나님께 찬양이 어디 있어요. 보이스피싱 당했는데 찬양이 되겠어요? 그러나 화는 내놓고, “내가 뭘 잘 못 했다고 이렇게 당해야 합니까?” 그렇게 해놓고,
㉯바로 그동안 내가 무감각했던 것에 어떤 감각이 생긴 거예요. 예수님이 왜 억울하게 죽었는지, 예수님의 감각이 나의 감각으로 드디어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제가 보기엔 꼭 삼손 같아요. 사사기 16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사사기 16장 1절에,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가사, 가자 지역이죠. 블레셋 사람들이 어떤 기생, 그 꽃뱀을 이용해서 삼손을 체포했어요. 삼손을 성문 안에 딱 가둬 놓았습니다. “이제 넌 죽었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체포한 거예요.
그런데 그때 삼손이 어떻게 자기를 구원하느냐? 자기를 체포하기 위해 성문을 다 잠가놨잖아요. 삼손이 문설주 자체를 다 뽑아서 문짝과 함께 어깨에 메고 “너희가 이런 것들로 날 가두려고 했었어?” 하면서 그걸 블레셋에게 보여준 거예요.
성도의 삶이 꼭 이래야 해요. 윤리와, 도덕과, 율법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너는 이걸 지켜야 구원받는다”라고 나를 율법에 가두어 두었을 때 아예 그 율법을 뽑아버려요. 그게 삼손의 힘이 아닙니다. 삼손 안에 들어있는 성신의 힘, 요즘 말로는 성령의 힘이에요.
성령이 성도에게 찾아올 때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유혹에 충분히 가둬지게 해서 ■우리 힘으로, 어떤 노력으로도 이 세상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시고, ■주님의 능력은 이 세상 그 자체를 능가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 능력 자체를 보이는 주님의 말씀의 도구, 재료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제 제가 성경 말씀 몇 군데를 찾아드린 뒤에 여러분에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2-53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그 시점이에요.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 질문은 이겁니다. 여러분이 죽고 난 뒤에 무덤 속에 가서 거기서 다시 살래요, 아니면 아예 안 죽고 싶습니까? 아예 안 죽고 싶은 것은 내 육신이 기억하는 불신앙이에요. 어쨌든지, 주사를 맞든 뭘 하든 살아야 해요. 사는 게 남는 거예요. 왜? 나는 소중하니까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소중하니까.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의 권능은 어떤 권능이냐? 죽음보다 더 센 권능인 것을 보여줍니다. 왜? 여기가 ‘말씀의 회사’거든요. ‘말씀의 회사’ 직원들은 회장 되시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는가를 그대로 답습하고 보여주는 거예요. 회사 직원들이 해야 할 것은 뭐냐? 바로 실습, 실습, 실습뿐입니다. 오직 실습만 하는 거예요. 주의 십자가의 능력을 실습하는 거예요.
그것도 이미 합격 된 상태에서 실습하는 것, 그걸 왜 못합니까? 할 수 있잖아요.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그 마감이 항상 나의 의미로 돌아와요. 나의 이익과 나의 의로움으로 돌아옵니다. ‘나 이렇게 잘났지요, 그렇지요? 나 이번 일로 이만큼 이익을 얻었어요.’ 이런 식으로 돌아와요.
그렇게 돌아오게 하는 세상의 힘, 그렇게 돌아오는 나, 그것을 ‘그게 바로 죽은 자야’라고 하나님께서 무덤에 묻어버리는 거예요. 주님은 조폭입니다. 삽 들고 묻어버려요. 우리를 묻어버립니다. 묻어놓고 그렇게 시체였었는데 다시 그 시체가 살아나요. 죽음을 포함해서 살아나요.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 “나 살아났다”라고 보여줍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부활한 그 사람들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와, 이런 것도 있나? 믿어야지.” 이렇게 나오겠습니까? “또라이 또 생겼다, 또 생겼어. 또라이 하나 죽이고 나니 또 생겼다. 또라이가 새끼를 쳤나?” 이럴 거예요.
왜? 사람들은 무감각하니까요. 아무런 영적 감각이 없어요. 성경에서 무슨 말을 해도 밀어낸다니까요. 감각이 없으니까요. “성경 내용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내가 노력해서, ‘폭삭 속았수다’, 내가 나한테 온갖 수고와 노력을 다해서 이만큼이라도 일궈냈다. 내가 보여줄 것은 이 나의 가치다.” 이게 끝이에요.
그중에 양념을 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적을 베풀어주셔서.” 백날 감미료를 쳐 봤자 그 마지막은 나로 끝나요. “주의 말씀으로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죄인임을 깨닫는 그것도 자기 일이라. 그것도 자기 자랑 리스트에 포함이 되어버려요. “죽고 난 뒤에 살려주겠다. OK, or NO?” 이렇게 되지요.
마태복음 9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두고 하는 테스트에요. 말씀 자체가 다 테스트에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2절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니까 3절에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했습니다.
4절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여기서 예수님에 의해서 비로소 ‘악함’이 규정이 됩니다. 5절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질문을 던졌어요.
“너 아픈 것이 좋으냐, 걸어가는 그것이 좋으냐?” “걸어가는 것이 좋아요.” “그래? 그렇다면 네가 일어나서 걸어가는 그것과, 네 죄사함을 받는 그것 중 어느 것이 좋으냐?” 사람들은 말을 못 합니다. 왜 말을 못 하는가? 주님 말씀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인간 속에는 뭐가 있느냐? 악마가 심어준 것이 있어요. ‘내가 회개하고 반성하고 착한 일을 함으로써 내가 용서받는다.’라는 이런 악마의 권세가 들어 있어요.
이게 죽을 때까지 계속 가요. 착한 일 하면 복 받을 것 같고, 나쁜 일 하면 벌받을 것 같은 그러한 악마가 심어준 소유 체계가 우리 안에 있다고요. 주님께서 그걸 아시고 질문해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만약 거기 있던 서기관들이 되바라졌다면 이렇게 했을 거예요. “걸어가는 거야 신비한 효과나 약효로도 될 수 있지만 죄사함은 우리가 못합니다.” 할 거예요. 그게 바로 악하다는 거예요. 지금 죄 사해주러 오신 분이 주님이거든요. 주님은 의사니까요. 주님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어요. 이미 죽은 자라서 감각이 없으니까 자기 속에 있는 생각만 드러낼 뿐이에요.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할 때 ‘그것은 비교할 항목이 아니지. 살다 보면 아프다 나을 수도 있겠지만 죄사함은 하나님 아니면 못 하는 건데?’ 그런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을 아셨던 거예요. 주님께서 “내가 하나님이다. 됐냐? 내가 하나님이야. 내가 하나님이라고! 너희가 있기 전에 내가 먼저 있었고, 너희의 생각이 있기 전에 내 생각이 먼저 있었어. 내 생각이 너의 모든 생각을 묻어버릴 거야. 죽여버릴 것이다.”
이게 권능입니다. 이게 구원의 권능이에요. 이걸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못 지켜요. 주님의 권능인데 어떻게 내가 합니까? ‘회장한테 잘 보이면 구원받을 것이다.’ 없어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젊은 회장이 계단에서 내려오는데 지나가다 부딪히면서 커피를 쏟으면서 “아, 죄송합니다.” 하는데 “네가 어느 대학 출신인지, 지방대냐 수도권 대학이냐에 관계없이 이번에 특채로 뽑아주마.”
이런 것은 드라마에나 있는 것인데 우리가 이미 그런 것을 알잖아요. 이미 알면 그것은 나의 일이 돼요. 이미 아는 것은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나의 일이 된다고요. 그 자체를 죽여버리고 박살 내버리고 악으로 규정해 버리는 그 능력이 주의 능력이고 말씀의 능력이라니까요.
그냥 이유도 없이 구원받은 거예요, 이유도 없이. 이유도 없이 구원받았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살아가면서 알아야지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늘 기쁘게 확인하는 절차가 남아 있어요. 그래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씀까지 밀어내는 경향을 또 보인다고요.
소속은 이미 결정 났습니다. 그런데 소속이 이미 결정 났다는 것을 오해한 그것을 구약이 보여주는 거예요. 사무엘상 2장 30절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잘 들어보세요. 엘리제사장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전에’입니다.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변덕입니다. “‘이전에’ 제사장 집에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어. 맞아. ‘전에’는 그랬는데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결단코,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하나님의 변덕을 누가 맞춰줍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변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이 변덕을 하시니 그 하나님의 비위를 맞춰서 구원될 자가 아무도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변덕을 부리시는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하지요. 그게 말씀에 나옵니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무도 말씀 지켜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변덕을 부리시는 거예요.
이게 부정성인데요,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도로에서 달리다가 기름이 떨어졌어요. 그러면 도로에서 빠져나와서 주유소에 들어가서 연료를 채우고 다시 도로에 들어가요. 도로를 달리다가 차에 기름이 없으니까 기름을 채우고 다시 도로에 들어가 달리듯이 주님이 채우는 원료가 뭐냐? 인간의 부정성이에요. 우리의 악입니다.
악을 연료로 채워야 주님은 자신의 언약대로 더 진척을 볼 수 있어요. 우리는 거기에 재료로 말려든 것을 찬미해 주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예가 부지기수거든요. 열왕기상 22장에 이스라엘과 유다 왕이 연합으로 아람 나라와 전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여호사밧 왕이 전쟁에 대해서 물으려고 선지자를 찾습니다.
열왕기상 22장 10-12절에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즉 “하나님께서 왕이 이기게 하실 겁니다.”라고 예언하면서 얼마나 성경 구절을 근거로 댔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 이런 성경 구절부터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적들이 이기지 못한다’라는 구절들 다 동원하면서 “반드시 이깁니다!”라고 했겠지요.
그들의 말은 부정성이 없고 긍정성밖에 없지요. “인간은 약하고 못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이번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말씀 자체에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자가 없고 변덕이 없고 주께서는 반드시 자기 뜻을 관철하신다’라는 그것을 어떻게 하시는가?
열왕기상 22장 8절에 이스라엘 왕이 미가야 선지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그런데 그 미가야 선지자의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나머지는 전부 다 사기꾼들이에요. 긍정적인 발언하는 것, 희망을 주는 것은 다 사기꾼들이에요.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하는 것은 다 사기꾼들입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뭐냐? 나를 망치기 위해서 인간의 막장 지점에 미리 가 있는 선지자가 미가야선지자입니다. 인간은 필히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관철하는 부정성, 하나님의 차에 집어넣는 휘발유, 연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추진할 수 있는 그 연료, 인간은 더러워야 하고 망해야 한다는 그 자체가 연료가 된다는 거예요.
인간은 망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그 엄연한 사실을 사람들은 안 받아들여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십자가에서 그걸 보여줬잖아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예수님이 받은 그 저주가 우리 모습이잖아요, 우리 모습!
그것은 하늘나라 말씀 회사에 취직이 되어야 그것을 알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목사님, 그거 아는데요?” 이러거든요. 여러분, 어떤 뚱뚱한 사람이 20킬로를 뺐답니다. 20킬로 빼면 날씬하겠지요. 20킬로를 빼면 날씬하다는 그 지식과 실제로 운동하는 것과 달라요.
성령은 우리에게 우리의 의를 빼는 운동을 시키는 분이지 지식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때우려고 하면 안 돼요. 여러분, 날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불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 하나님이 원하는 바라는 사실을 같이 기뻐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동지 의식을 느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얼마나 말씀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씀 대하기를 싫어하고 있는지, 그 이상한 충동을 도리어 우리의 본심이고 본모습인 것을 알게 되는 그 계기로 인하여 더욱더 주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성도의 삶, 주님의 삶을 보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20250324 주일오전 설교 요약-이 근호 목사
어제 낮 설교에서의 초반에 나왔던 문장이 설교 전체를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참 위험한 발언을 했어요. “어린 양의 피를 밟았잖아, 너희가. 예수님을 밟은 게 예수님의 피를 밟은 거잖아. 밟았기 때문에 나온 그 피를, 나는 계속 말씀의 완성으로 간주하겠다. 말씀의 성취. 하나님 쪽의 모든 성취를 너희 인간들이 밟아놓은 그 피가 나오는 것으로 나는 보겠다.”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뭐가 위험하냐 하면, 어린 양의 피를 밟았다는 그것을 주님의 열성 있는 분류작업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열성 있는 분류작업. 열성 있는 분류작업의 특징 중 하나가 ‘멈추지 않겠다’에요. 열성 있는 분류작업을 주께서는 멈추지 않겠다,에요.
혼자 바쁘셔요. 혼자. 하나님 혼자 바빠요. 쉬지도 않고 바쁘게 일해요. 뭐한다고요? 열성 있는 분류작업을 하시기 위해서. 직장 내에서, 가정 내에서, 교회 내에서, 매 공간 매 시간에서 한시도 멈추지 않고 이 작업하는 겁니다. 암컷, 수컷 병아리 감별하듯이, 너는 이쪽, 너는 저쪽.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감별하고 난 뒤에 그 표준을… 하나님께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자기 아들을 미리 파견했잖아요. 보내셔서 예수님이 당했던 모든 당함을 하나님 쪽에서는 ‘시험받았다’로 규정해요. 시험받았다. 그럼 ‘시험받았다’는 것은 시험하는 자가 있고 받은 분이 되어야 되는데, 거기서 악마의 존재가 예수님에게만 드러나요.
귀신에게 다른 인간들은 존재 자체가 없어요. 그런데 귀신이 예수님 만나면 갑자기 달려듭니다. 우리를 멸망하러 오셨군요, 뭐 이렇게. 소위 선수끼리는 알아봐요. 선수끼리는. 마귀, 악마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고요, 시험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 체제, 인간세계 체제에 훼방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악마세계 쪽에서 알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꼬시죠. 꼬십니다. 꼬시는 방법은 간단해요. “몸이나 챙기세요. 참 다 좋은 일하시고, 메시아 한다고 얼마나 수고가 많습니까. 그러나 일단 몸을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악마의 수법이에요. “종교도 좋고 기독교도 좋고 말씀도 좋고 다 좋은데 존재 자체를 최종성으로 둬야 되지 않습니까.” 최종성으로. 인간으로서는 자기 존재가 마지막이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어제 낮 설교에서 선지자 하나 제시했죠. 미가야. 미가야에 대해서 어떻게 제가 표현을 했냐 하면 ‘막장’ 지점에 와있는 사람이에요. 막장.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가서 그것을 터트려버리는 언론인.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언론인. 마지막에 가서 “모든 것이 거짓입니다.”하고 고발하고 폭로하는 하늘나라의 언론기관에서 파견한 기자. 대변인이죠.
천상회의에 참석했으니까. 천상회의에서 이 모든 인간들에게 거짓 선지자 400명에게 거짓말 영을 보내겠다고 이미 거기서 결의가 되어 있으니까, 그 사실을 미가야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에 대해서 어떻게 겁을 내고 싶어도 겁낼 수 있는 여지가 없어요. 아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속속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니까. 거짓말한 이유도 알고 다 아니까.
그들이 거짓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가야는 천상회의를 참석했기 때문에 땅과 하늘을 다 알고 있는데, 그들은 하늘을 모르는 상태에서 누구만 붙들고 영업하느냐 하면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붙들고 목회를 하고 있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상대로 목회를 하고 있으니까 그걸 미가야가 볼 때는, 끝장을 모르는 너희들 입장에 대해서 겁내고 무서워할 수가 없죠. 뺨 맞고 해도 약간 피부가 얼얼하다 뿐이지, 그게 전혀 미가야에게 위협이 될 수가 없죠.
참 위험한 발언을 성경에서 히브리서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위험한 발언을 던져놓고 그다음에 인간들의 대책을 보는 거예요. 그럼 인간의 대책은 뭐냐? 자기를 가장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성경이죠. 그럼 성경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조롱과 놀림을 다 성경에 퍼붓는 거예요.
‘이것은 신화다. 인간의 아이디어다. 고고학적으로 따져보니까 맞는 게 하나도 없더라. 그 당시 시대 사람들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그 당시 과학적 이념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참고로 하되 지금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서 그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이래서 그들은 학교라는 걸 통해서 진화론이라든지 때로는 창조론을 통해서 성경을 밀어내는 거죠.
성경을 밀어내는데 성경을 미는 것이 가장 노골적인 예수님 피에 대한 모독이죠.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을 함축해서 완성시킨 사태가 예수님의 피 흘림이거든요. 주님의 피를 이야기하니까 인간들은 ‘그때는 정치적으로 일시적인 소용돌이에 말려든 희생물이었지. 예수님이 안 죽었다는 뜻은 아니고. 그때 그 당시의 의미로 끝나버린 사항이 오늘날 우리의 죄를 사해준다는 것은 너무나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납득이 안 된다.’
그런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을 밟았다는 그것으로 오는 세상까지 완전히 색칠을 해버려요. 말씀으로 색칠을 하고, 인간은 그 당시 예수님을 공격했던 공격성을 가지고 밀어내는 거죠.
밀어내면서 제가 표현한 것은, 콘드로이친. 관절이 기억하는 약. 몸이 기억하는 불신앙성.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빼놓고 다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몸이 기억하는 이 기억은, 모든 건 다 용납하되 성경만은 안 된다는 쪽으로. 왜? 성경은 너무 과격하니까.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는 책이니까.
그래서 아까 모임 오는 길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에게 이 불신앙성을 완화시키는 기관이 교회에요. ‘교회생활 충실히 하는 걸로 내가 하나님 앞에 굉장히 우호적이라는 면면을 하나님께 보여주시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와 가정 화목에 있어서 섭섭지 않게 해주실 겁니다.’ 그 작업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교회가 인간을 긍정적으로 맞춰주려고 하는지.
그러나 성경 히브리서는 끝났어요. 한번 복음을 알고 한번 십자가를 알고 타락한 자는 두 번 다시 용서할 제사도 없고 ‘넌 끝났어.’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교회 다니면서 그 말씀은 부정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안 하지만, 만약에 교회 목사가 교회 부흥을 위해서 게으른 교인을 자극주기 위해 그 말을 했다면 그다음부터 교인들은 잠 못 드는 밤이 돼요.
어떡해? 지금까지 잘 버텼는데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한번 떨어지면 그걸로 탈락이 되는 거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한결같은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기 때문에. 분명히 창세 전에 구원했다 해놓고는 “너 지난 여름에 범죄 했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내가 안다.” 해버리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밀어붙이는 식에 끝난 거예요. 불합격 처리되는 거죠. 이 딜레마.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죠.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하나님의 자체적인 변덕과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그것이 어떻게 연결됩니까? 이천년 동안 신학자 다 동원해도 안 풀리는 거예요. 풀릴 수가 없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는 하나님이잖아요. 시험하지 않는 하나님인데 창세기 22장에서 보란 듯이 시험하죠. “아브람을 시험하사” 야고보는 시험하지 않는다며? 시험하지도 않고 시험받지도 않는다면서?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시험했고 그 뒤에도 시험이 계속 나와요.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지 말라” 했다고요. 그러면서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는 “스스로 믿음 있는지를 시험하라” 했으니까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될지…. 지휘자가 “이번 프레임에서는 나팔 불지 마세요. 여기는 현악기만 합니다.” 그래서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휘자가 지휘봉을 집어던지면서 “왜 나팔을 안 불어?” 이러는 거예요. “악보에 나팔 없게 되어 있는데, 왜 나팔을 안 부냐고 닦달내십니까?” “내 마음이 바뀌었거든.” 도대체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아요, 하나님 쪽에서.
그 재밌는 예가 바로 달란트 비유“(마 25:19, 24-27)에서 나오잖아요.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악하다.” “제가 두려워서 주신 동전 하나를 숨겼습니다.” “숨기지 말고 그 돈을 은행에 맡기면 이자라도 주잖아.” 악한 종 입장에서는 이거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왜냐하면 진작 이야기하지, 진작. 진작 이야기했으면 은행에 갖다 안 줬을까요? 얼른 줬단 말이죠. 왜 내가 모르는 법을, 나중에 나타나서 징벌용으로 내가 모르는 법을 왜 추가시키느냔 말이죠.
나는 시험 쳐서 백점인데, 보니까 빵점이에요. “선생님, 왜 제가 빵점입니까?” “네가 모르는 문제를 내가 냈거든.” 이게 도대체 뭐, 말이야 막걸리야?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말이.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모든 사태는 아주 간단하게 풀립니다. 주님이 시험받았던 것, 유혹받았던 것을 벗어났잖아요. 벗어난 그 권능으로, 삼손이 아예 성채를 완전히 뽑아 세우듯이, 주님께서 하신 모든 틀, 윤리, 도덕, 선악체계, 율법을 다 이룬 그것을 그대로 회장님의 일방적인 자기 결정으로 말씀 회사에 취직시키는 거예요.
말씀 회사에 취직시킬 때 그 사원이 해야 될 일은 예수님이 당했던 시험, 그 시험을 똑같이 반복하는 거예요. 그 시험은 ‘내 실력으로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를 반복하는 업무를 맡기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한번 비췸을 얻고 타락한 자는 다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말씀 회사니까, 회사 이름이 ‘말씀’이에요.)이 그대로 왔을 때, 이 말씀에 근거해서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회상하듯이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굉장히 즐거운 일이죠. ‘내가 바로 몸이 기억하는 불신자다. 구원받으려고 닦달 낸다는 그 자체가 전형적인 악마에 속한 자의 모습이다.’ 그 업무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찬미에요. 하나님을 찬미. 하나님을 찬미하는 방식은 그 방식밖에 없어요. 불신자를 구원시켜놓고 그들로 하여금 불신자의 삶을 반복시키면서 거기서 나오는 감사, 그걸로 하나님께서는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받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두 가지 문제 있죠. 시험하지 말라 해놓고 시험하게 하시는 그 문제와 또 하나는 한번 십자가를 알고 범죄한 자는 두 번 다시 속죄할 길이 없다는 그 말씀이 한꺼번에 해결된 거예요. 이천 년 교회 역사의 난제가 해결된 겁니다. 제가 해결됐다 했지만, 어떻게 해결됐는지 한번 물어볼까요?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회장님의 권능이 임함으로써 그 안에 해결이 다 된 채 권능이 임해요. “인간이 풀 수 없는 것을 이미 내가 다 풀었다!”하시면서. “그럼 어느 문제에서 우리가 못 풀었습니까?” “그건 네가 해야지, 앞으로.”
인생은 실습, 실습, 실습하는 거예요. 제가 의도적으로 반복했어요. 실습하고 또 실습하는 거예요. 그게 말씀 회사의 직원이 하루 종일 해야 될 일이거든요. 실습을 하는데 결국 이 실습에서 남는 것은 뭐냐? 성실한 주님의 분류작업이에요.
“어떤 사람은 복음을 버리고 갔습니다.”라고 여러분들이 걱정하죠, 식구들. “엄마는 요새 바쁘다고 안 와요.” 걱정을 막 하죠, 복음을 들어야 될 건데. 주께서 살릴 사람은 언젠가 오겠죠. 그러나 안 온다는 말은, 주의 분류작업에 의하면 일단은 죽은 자에 속하는데 만약에 살린다면 주께서 알아서 “아, 도대체 인생이 해결 안 나네.” 이렇게 하면서 언젠가 복음 찾아오겠죠. 오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만, 뭐 오겠죠.
그러니까 결국 뭡니까? 열심히 지금 뭐만 일하고 계신다? 주님만 일하시는 것을 드러내는 회사의 직원이다. 지방학교 출신에다가 아무것도 모르는데 합격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모든 찬미는 주님께 돌리세요. 그게 어제 낮 설교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