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앞 뒤 경로

아빠와 함께 2025. 4. 13. 16:34

앞 뒤 경로 

2025년 4월 1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37-39

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천국은 ‘달라지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인공으로 마련하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뒤로 나아가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뒤쪽에 이미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허물어 버리는 식으로 자기 백성을 앞쪽으로 몰아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어떤 경로가 발생됩니다. ‘앞-뒤’로 형성된 경로 말입니다. 그런데 보통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 경로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머물고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앞이 되었든 뒤가 되었든 그게 인간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 여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은 굳이 안 달라져도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내가 여기 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존개한다는 것이 제일 순위가 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앞-뒤 경로’가 인간의 존재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16-17에 보면,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특이성이 그들 자신에게도 일어나는 자가 믿는 자 계열 속에 들어가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특이성으로 인해 신앙인은 ‘달라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특이성이란 바로 ‘없는 데서 있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 난’바로 그 특이성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것은 바로 ‘이삭’에게 일어난 변화입니다. 이삭은 없는 데서 생겨났고 죽은 데서 살아났습니다. 이 현상은 바로 아브라함 자신이 변화된 자 되었음과 연관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이삭에게 일어난 효과가 아브라함 자신에게 은혜와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게 했다는 겁니다. 이점은 아브라함의 관련된 조카 롯의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7:32-33에 보면,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롯의 처가 뒤돌아 본 것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롯의 처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됨으로 구원되는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기존의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식으로 구원을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롯의 처가 죽는 지점은 소돔과 고모라가 아닙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죽었습니다. 소위 구원되고 난 뒤에 멸망당한 겁니다.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롯의 입장에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언약의 원리가 바로 ‘없는 데서 있게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즉 언약에 의한 구원이란 자신을 육신을 살리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특이성 자체의 구원입니다. 롯은 여기에 참여된 겁니다.

뒤로 가는 것은 안 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 특이성 있는 경로를 나타내는 것이 믿는 자의 역할이라는 겁니다. 이 경로는 민수기 광야 생활을 통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민수기 11:5-6에 보면, “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만과 원망을 가볍게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지금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겁니다. 이 마음을 누가 함부로 원망할까요? 민수기 14장에 보면 노골적으로 그들의 집단 마음이 노출됩니다. “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민 14:4-7,10)

여기서 대다수의 백성들은 폭력 성향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도 아니고 뒤로도 아니다. 지금 자신의 존재를 살리겠다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사를 방해하면 돌로 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곧 지금 그들의 본심은 자신들이 죽을 지경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절박함을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합니다. 건강하고 돈이 풍성하고 아무런 고난도 없기를 바할 뿐입니다.(시 73:3-5) 하나님 챙기고 하나님 고려하는 것은 그 다음 순번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생각해 놓은 뒤쪽은 심판이 집행되면서 따라옵니다. 여리고성은 무너뜨리고 그 여리고성에 무슨 개발을 하려는 자는 집안의 자식들이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수 6:26)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담겨 있는 이런 심판의 사건을 최초의 범죄 사건과 연관지어 그 경로 안에 담아 두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도저히 인간이 구원될 수가 없지만 언약이 주는 은혜로 인하여 ‘없는 자를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방식’으로 천국 백성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순간,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의미없고 소용없는 일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이처럼 최초의 죄와 최후의 구원이 함께 배합되어,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구별되는 경계선 역할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는 선과 악이 함께 있는 육신으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성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주시는 특이성을 품고 움직이는 주님의 촉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2강-히브리서 10장 37-39절(앞뒤 경로)250413-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37-39절입니다.

히브리서 10:37-39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침륜(沈淪)’이라는 말은, 침몰한다는 뜻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침몰한다.’ 이 뜻은, 우리가 앞쪽으로 가는 순간 뒤쪽이 발생하는데 앞쪽으로 가는 순간 뒤쪽은 ‘침륜’이니까, 이미 주님께서 그쪽에 심판을 실행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거기에 주어지는 그 작업을 착실하게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재개발 지역에 “여러분 빨리 이사하세요. 개발 들어갑니다.”라는 통고를 받고 이사를 하고 난 뒤 가보니 우리 집이 벌써 사라진 거예요. 만약에 이사를 안 했더라면 그냥 재개발 지역에서 포크레인으로 흙에 파묻히게 돼 있죠.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작정하신 자에 대해서 계속 앞으로 밀어붙이는데 앞으로 밀어붙이는 동시에 그 성도의 뒤쪽은, 거기에 있었는데 그것을 제거하는 작업을 병행하는 거예요. 앞으로 당기는 작업과 동시에 뒤쪽에는 돌아갈 곳이 없도록 그곳을 없애버리는 작업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진다’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생각 못 하고 ‘가끔은 뒤를 좀 돌아보면 뭐 어떻겠느냐?’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에게 시간이 있어서 ‘우리가 갈 곳은 미래, 지금은 현재,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것은 과거, 비록 내가 미래를 바라보더라도 과거는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우리 중심으로 여길 수가 있어요.

우리 중심으로 ‘내가 여기 있음’, 그리고 우리 중심으로 ‘내가 앞으로 가는 것’, 우리는 본문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앞으로 가는 것과 뒤로 가는 것의 현재, 그 중간에는 우리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이스라엘의 행로를 삽입해서 하나님께서 설명을 해주는 겁니다.

실제로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호수아 6장에 보면 여리고 성이 나오는데 그 여리고성을 멸망했어요. 멸망하고 난 뒤에 그냥 가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당부를 했습니다. 6장 26절에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접수하고 이스라엘은 자기 길을 가면 될 텐데 그 무너뜨린 여리고 성에 대해 그냥 엎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담아서 그쪽 자체의 미래까지 예언한 거예요. 다시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그 자식과 함께 집안이 망할 것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열왕기상 16장 34절에 보면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뒤로 물러가고’, 또 ‘앞으로 가고’ 할 때 ‘그래, 뒤쪽은 될 수 있으면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천국 갈 생각만 하자.’ 이런 해석이 잘 못 됐다, 이 말입니다. 이건 우리 개인적인 시간의 노선이고, 하나님께서는 일을 할 때는 말씀이 실제로 실현되는 과정을 좇아서 이스라엘 행로, 이스라엘 역사를 따라 이 말씀을 그대로 실현에 옮기는 거예요.

‘이스라엘 경로를 따른다.’라는 이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하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예를 들어 누가복음 17장 31절부터 33절까지 보면,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것이니라” 뒤로 돌이키지 말것이니라.

32-33절 계속 보면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롯의 처는 구약 역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롯의 처처럼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자.’ 지금 이 문제가 아니고 ‘롯의 처를 생각하라’라는 말은 ‘롯의 처가 뒤를 돌아봐서 멸망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예언과 계시로 사용한다.’라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롯의 처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는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예언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예언 안에. 따라서 ‘그래, 나는 개인적으로 롯의 처처럼 뒤돌아보지 않으면 구원받겠지.’ 지금 그 문제가 아니에요.

조금 더 설명을 깊이 해드리면, 롯의 가정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거든요. 소돔과 고모라에 있던 그들이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실상 나오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요, 천사가 손모가지 끌고 멸망하는 도성에서 강제로 끄집어냈어요.

그때 롯과 롯의 처와 두 딸이 나왔습니다. 약혼했던 사위는 천사의 말을 농담으로 여겨 안 나왔어요.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생각해야 할 게 있어요. 네 사람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왔으면 네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거잖아요. 구원받았잖아요.

구원받았는데 뒤돌아보면 망한다는 조건을 왜 붙입니까? 이게 여러분들 납득이 되는 거예요? 구원을 하려면 아쌀하게 해주면 되잖아요. 구원 시켜놓고 탈락자가 왜 발생하느냐 그 말입니다. 구원시켜 놨으면 탈락자도 없어야 되잖아요. ‘네 명이 나왔다. 네 명 구원받았다. 끝.’ 이러면 깔끔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 심판에서 네 명이 나왔는데 최종적으로 세 명만 구원받고 한 여자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하는 그 경우, 하나님께서는 구원받기 전에 미리 멸망시키지 않은 이유가 뭐예요? “롯의 처, 넌 나오지 마. 너는 소돔 좋아하니까 거기서 살아.” 하고 그냥 내버려두지, 나오기는 네 명이 나왔는데 살기는 세 명 살았어요.

왜 탈락이냐?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롯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롯에게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 그 언약의 내용 안에 무엇이 풍성하게 들어있는가를 롯의 가정을 통해서 밝혀주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 특이성, 아주 특이해요, 그 숨어 있는 특이성이 롯의 가정에서 롯과 롯의 처가 분리되면서 설명이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떤 특이성을 갖고 있는가? 로마서 4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 그러니까 믿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이죠. 이 말은 “여러분 믿습니까? 진짜 믿음 있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그 특이성이 여러분들에게도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에요.

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니까,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그 사례가 반복해서, 되풀이해서 계속 발생하게 되면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거기서 아브라함과 똑같은 믿음이 있어서 구원받는 자가 똑같이 생산되는 겁니다. 그 특이성으로 생산되는 거예요.

그 특이성을 가지고 16절에서는 ‘은혜’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특이성을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특이성이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특이성을 낳았는가? 아브라함은 아기를 가질 수 없는데 낳았어요. 특이성 하나죠.

그리고 두 번째 특이성이 뭐냐? 그렇게 준 아기 이삭을 그냥 키우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아버지 손으로 죽이라고 합니다. 죽이러 갔는데 죽이는 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특이성 둘입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 특이성을 가진 자만이 아브라함이 조상이 되는 그 믿음의 계열에 속한 사람이다.’ 이 말이에요.

이걸 오늘날 우리가 편하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은 달라지지 않은 인간은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것도 특이성을 가지고 달라지지 않은 인간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특이성을 받지 않은 자는 아무리 천국이 있더라도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니까요. 성경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없는 데서 있는 자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뭘 믿었느냐 하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믿었다고 하죠? 그러나 우리가 똑바로 압시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이삭에게 일어난 현상을 믿었던 거예요.

이삭이 없는 데서 생겼잖아요. 그러면 나는, 없는 데서 새로 생겨야 된다는 거예요. 없는 데서 새로 생겨야 되고, 그리고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났잖아요. 그렇다면 이삭을 바라보는 아버지 아브라함도 ‘내가 죽었다가 살아나야 내가 믿음의 계열에 속한,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다.’ 그걸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게 어렵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능해요.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능합니다. 이 지상에서 그러한 특이성으로 일어난 결과가 뭐냐? 내가 달라지는 거예요, 내가 달라지는 것. 달라지지 않으면 불신자고, 달라지면 그것은 믿는 자, 신자가 됩니다. 아브라함도 신자가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천사가 임하니까 신자가 된 거죠.

여기서 신자가 아닌 자, 불신자라고 하죠, 그 불신자가 뭐냐? 불신자라 하는 것은 그 특이성이 없는 자에요. 제가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롯의 처가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가 좋으면 아예 나오지도 말든지, 왜 따라 나와 놓고는…, 그러니까 여기서 일단 우리가 롯의 입장을 생각하지 말고 전부 다 롯의 처가 됩시다.

우리가 다 롯의 처가 됐다고 칩시다. 우리가 강제로 소돔과 고모라 정든 고향을 떠나온 건 맞아요.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 나왔는데 롯의 처가, 자기가 살아온 것에 대한 미련이 있어 돌아본 거예요.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듯이 그냥 뒤돌아본 겁니다.

돌아봤을 때 아까 본 누가복음 17장 33절에서는 그걸 뭐로 설명했느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이 33절 이야기하면서 32절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한 거예요. 롯의 처는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자에 해당된다, 이 말입니다.

자기 목숨을 보전한다는 것, 그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엄청난 과제를 우리에게 준 거예요. “너 구원 받았나?” “예 구원받았습니다.” “뒤돌아봐, 안 봐? 너 롯의 처처럼 뒤돌아보고 있어, 안 보고 있어?” 지금 엄청난 과제를 주고 있는 거예요.

제가 문제 낼 게요. “여러분 구원 받았습니까?” “예.” “그럼 뒤돌아봅니까, 안 봅니까?” 1번, 본다. 2번, 안 본다. 여기서 말씀의 깊이가 있어요. 1번, 뒤돌아본다. 성도입니다. 2번, 뒤돌아보지 않는다. 불신자입니다, 불신자예요.

이게 어디서 갈라지느냐 하면, 성경말씀 가지고 내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나는 돌아보지 않아야지.’라고 생각할 거고, 이거 불신자예요. ‘성경 말씀은 내 구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언약의 어떤 요소가 깔려 있는가를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특이성을 줬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신자입니다, 그 사람이 신자예요.

그래서 신자한테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그 말씀이 의미 있게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도대체 어떤 점에서 롯의 처와 딱 닮았는가?’를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찾아내면 돼요. 롯의 처와 어떤 행동을 똑같이 하고 있는지를 매일 같이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그게 신자예요.

그러면 불신자는 뭐냐? 불신자는 아예 말씀이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습니다. 불신자는 ‘앞으로 가고’ 혹은 ‘뒤로 가고’가 아예 없어요. 불신자는 그냥 살아요. 불신자는 그냥 산다고요. 말씀을 의식하고, 이런 것이 없어요. 그냥 머물러요. 현재에 머무른다고요. 불신자의 삶은 내 존재가 1순위에요. 내 존재가 1순위고 가끔 교회 가서 말씀 들어요. 왜?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게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여기 산다는 게 소중한 거예요.

이걸 제가 그냥 말로 하는 것보다 성경 말씀에 그런 예가 나오거든요.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하는데 돈을 감추고 했어요. 헌금을 안 한 게 아니고 돈을 반 감추고 했어요. 그날 부부 둘 다 죽었습니다.

왜 돈을 감췄느냐? 내가 사는 게 1순위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1순위가 아니에요. 내가 1순위라고요. 베드로한테 욕을 되게 얻어먹었어요. “사도행전 5장 3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런 욕을 얻어먹었다고요. 헌금해도 문제에요.

또 시편 73편 4-5절, 그 불신자들 아예 말씀에 관심없는 불신자들의 특징이 나옵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고민거리도 없어요. 고민거리도 없고요, 6절에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여기에 보면 죽는 때도 고통이 없고요, 또 힘이 건강하고요, 쉽게 말해서 만사가 형통하고 고난이 없으니까요. 이게 사람들이 사는 목적 아닙니까? 여기 나오는 불신자의 모습이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려고 하는 이유 같은 게 아니겠어요? 건강하고, 돈에 대한 걱정 없고, 어떤 재앙이 없고, 그걸 우리는 두 자로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행복의 조건에 여러분 어떤 걸 집어넣을 거예요? 안 아프고, 돈 여유 있고, 다른 아무 말썽도 없고. 끝.

그들이 성경을 펼칠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을 왜 펼치죠? 불신자는 성경을 펼칠 이유가 없다니까요! 혼자 잘 사는데 성경을 왜 봐요? 쓸데도 없는걸. 인간에게 제일 절박한 말이 있습니다. 네 자로 하면 이래요. “내 돈 내놔!” 이거보다 절박한 표현이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신자의 절박함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5장 4절에 사도 요한이 울어요. 아주 대성통곡하며 웁니다.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사도 요한이 왜 울죠? 돈 떼어서 우는 거예요? 보이스피싱이나 사기당해서 우는 거예요? 사도요한이 왜 울죠?

사도 요한 우는 이유가, 달라진 내가 해야 할 일 그 내용이 책 안에 담겨 있어서 이걸 펼침으로써 현실화가 되어야 하는데 이걸 현실로 되게 할 자가 없어 울고 있는 겁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돈 벌고 건강한 게 아니고, 행복이 아니고 주의 일을 하는 그것이 내 일인데,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말씀대로 실현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그 물길을 타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 현실은 두루마리 성경책 안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이걸 딱딱 떼서 펼쳐야 그게 현실이 되는데, ‘빨리 현실이 되어 내가 내 할 일을 하게 해 달라.’ 그걸 못 해 울고 있는 거예요. 이게 달라진 사람입니다, 이게 달라진 사람이에요.

여러분들은 뭐 때문에 웁니까? 뭐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라를 잃었을 때, 그리고 태어날 때 울어요? 뭐 때문에 울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우는 이유는 “내 돈 내놔.” 이거 외에 다른 진리가 있습니까? “내 돈 왜 떼먹었어?” 가장 절박한 말이잖아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달라진다는 말은, 깊어진다는 말이 아니에요. 백날 깊어져 봐야 그게 달라진 게 아닙니다. 깊어지기 위해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아니에요. 새롭게 달라진 내 할 일이 이 성경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증거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것처럼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하고 상대한 게 아니고 예수님하고 상대했잖아요. 예수님을 상대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던 그 내용이 복음이고 은혜란 말이죠.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없는 데서 태어나고, 이삭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런 것은 아브라함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 그 중간에 이삭 같은 예수님이 있어서 결정된 일이잖아요. 그게 은혜로 주어졌으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아버지께 복종하는 그 순간 우리의 어떤 행위도 이제는 소용없습니다. 의미가 없어요. 자꾸 내가 주님 앞에 복종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의 주특기는 뒤돌아보는 거예요. 뒤돌아보는데 주님께서는 뭘 보느냐 하면, 약속을 보라는 거예요.

약속이 뭐냐? ‘너 말고 내가 너 대신 아버지한테 복종한 그 순간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너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라는 게 복음이에요. 그게 기쁜 소식이란 말이죠. 뭐 때문에 고민하고 근심했습니까? 내 행동 따라서 내가 행복해진다고요? 아니에요. 주님의 행동 따라서 결정된 거예요, 모든 것이.

그래서 지금까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앞이 있고 뒤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무엇이 뒤쪽이고 무엇이 앞쪽인지’ 그 전체가 하나님의 계시고 언약의 내용이니까, 언약 내용 안에 무엇이 있느냐? 비로소 ‘뒤쪽’이 무슨 쪽인지를 아는 거고, 반대로 ‘앞쪽’으로 간다는 것이 뭔지, 계시 안에서, 언약 안에서 앞쪽이 따로 설정되어 있는 거예요.

일반 불신자는 성경 자체를 볼 이유가 없어요. “내 돈 내놔.” 하면 끝나는 거죠. 내 돈 가지고 내가 사는데 성경을 왜 봐요. 달라진 사람만이 성경을 보면서 왜 내가 착해서 구원받지 않는지, 내가 세상 쪽을 안 봄으로써 구원받는 그런 일은 없다는 것, 성경 말씀을 내가 지켜서 구원받는 일이 없다는 것, 내가 잘해서 구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성경 안에서 찾아야 해요, 성경 안에서!

그게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은혜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뒤쪽’을 보기 위해 우리는 민수기 14장을 봐야 합니다. 먼저 민수기 11장부터 보겠습니다. 11장 5-6절에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단체로 광야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뭐가 발생되었는가? 비로소 ‘뒤쪽’이 발생되고 ‘앞쪽’이 발생된 거예요. 뒤쪽은 애굽이고 앞쪽은 약속의 땅이에요. 그 중간에 이스라엘을 집어넣습니다.

, 이스라엘이 과연 약속의 땅에 들어갈 만한 사람으로 바뀌어졌는지를 보는 거예요. 바뀌어졌는지 아닌지는 그 사람의 속내를 광야 생활을 통해 전부 다 노출해야 하고, 그래서 까발려져야 하죠. 그 역할이 율법의 역할이에요.

그들은 말합니다. 이제 불평하는 그들의 심정에 우리가 같이 동참해 봅시다.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고등어 구워 먹는 것 있잖아요. 그리고 성주 참외와 3만 5천 원짜리 수박, 그거 먹고 싶습니까, 안 먹고 싶습니까?

그걸 먹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이었잖아요. 그때 그게 낙이었다, 이 말입니다. 고등어 구워 먹고요, 그것도 숯불에. 다라이 같은 데다 파 썰어 넣고 고추장에 밥 비벼 먹어 보세요. 마늘, 정력에 좋죠? 이게 왜 나쁩니까? 이게 왜 나쁜 거예요? 참외 먹고 싶어 참외 먹는 게 왜 나쁘며, 수박 먹고 싶은 게 왜 나쁘냔 말이죠.

민수기 14장 1절부터 4절까지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지금 이들의 주장에 어떤 헛점 같은 게 있습니까? 어떤 문제점이 있어요? 우리는 그들의 말에 동의를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우리의 마음이. 민수기 11장에서 그런 주장들을 하다가 또 양보를 했어요. “좋습니다. 수박, 참외, 생선 포기할게요. 고등어는 포기하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먹고 살 수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민수기 20장 5-6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그렇게 되어 있어요.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는 거예요.

제가 빠뜨린 게 있는데 가나안 땅 정탐 후에 백성들이 원망할 때 민수기 14장 8-9절에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회중들을 타이르면서 말리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렇게 하니까 민수기 14장 10절에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갑자기 폭력이 동원됩니다. 민수기 14장 4절에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다시 뒤돌아서 가자는 거예요. 뒤돌아보자고 할 때 갈렙이 나서서 “뒤돌아보지 말고 그냥 앞으로 갑시다.”라고 하니까 회중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돌을 들고 갈렙과 모세와 아론을 쳐 죽이려는 폭력성을 드러낸 겁니다.

폭력성이라는 게 왜 나옵니까? 폭력성이 나오는 이유는, 당신을 때려죽이지 않으면 내가 못 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죽었으면 좋겠나?’ 이 말이거든요, 폭력성이라는 게. 우리 심성 안에 그게 들어있는 거예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은, 그 심성이 들어있다고 지옥 간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요, 우리는 계시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이스라엘은 억지로 들어온 거고 우리는 지금 성경을, 민수기를 펼쳐서 보고 있는 거고요. 불신자는 아예 성경 민수기가 뭔지도 모르고 아예 들추지도 않고요. 본인이나 살면 되지 뭐 성경을 왜 보는데요? 안 봐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보게 하시는 거예요, 이 폭력성을.

보게 하면서 네가 누구 편인지를 보는 거예요, 너는 누구 편이냐. “너는 갈렙과 모세, 그리고 아론 편이냐, 아니면 모세에게 대드는 그쪽이냐?” 모세와 아론 쪽은 뭐 몇 명 안 되잖아요. 하지만 대다수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 자체는 ‘애굽으로 돌아가자.’가 합의된 의견입니다. 그게 민주주의에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그 세계 속에 휘말리고 있고요.

사람이 죽을 판인데 뭐가 하나님이고, 뭐가 교회고, 지금 그게 대수고, 그게 중요한 거예요? 지금 내가 죽을 판인데. “우리가 뒤돌아보지 말고 그냥 앞으로 갑시다.” ‘그래, 과거는 다 지나가고 앞으로 천국이 기다린다.’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거예요, 이게.

성경 말씀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현장속에 들어가서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주님의 성령께서 말씀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결국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인간도 인간 속에 있는 뒤돌아보는, 즉 누가복음 17장에 의하면, 자기 목숨 보존하는 것을 포기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 존재가 1순위에요. 여기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행복이 우선이고요, 사는 게 우선이에요. 이걸 분명히 명심해야 해요. 그런데 불신자는 성경을 안 보고, 그냥 머물고 있으면서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이렇고, 성령께서는 신자로 하여금 성경속으로 들어가서 우리 자신이 기껏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과 현재 내가 하는 일과의 그 차이, 그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까지 우리 육신, 성도니까 그 육신에다가 이 둘, 서로 대비가 되는 두 개의 자아상을 결합시켜서 둘둘 감아놓습니다. 그렇게 감아놓으면 우리는 말씀의 촉수가 돼요. 예수님의 활동의 촉수로서 활동한다고요.

주의 증인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어요.(안 될 수 밖에 없어요) ‘나는 뒤만 돌아보는 천하의 죄수 중에 죄수’ 이것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말씀이 아니었으면 이걸 내가 어떻게 알았어요? 그걸 감사한 마음으로 남은 생애 동안 주님만 증거하는 사람 되는 것, 주님의 복종으로서 모든 것이 게임 오버, 끝났다는 것 그걸 일본 말로 ‘시마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끝났다, 시마이가 된 거예요.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둘둘 감는 것, 이러한 형식과 구조에 대해서 1934년 한국의 어떤 시인이 지은 시 속에 비슷한 구조가 있어서 제가 소개하려고 해요. 이름은 이상(李箱, 1910~1937)인데 이상의 오감도(烏瞰圖)라는 시 제4호에 보면 내용이 이렇게 돼요. 우리가 보통 글씨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잖아요. 시제 제4호는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썼는데 시 속에 한글은 하나도 없어요. 숫자만 있습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모양도 반대 방향에서 보이는 숫자 모양으로 처음 1열에는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그다음에 십이 아니고 영, 그리고 점을 찍습니다. 이런 식으로 적은 것이 그 시(詩)에요.

 

患者의 容態에 關한 問題(이상, 1934년 7월 28일자 조선중앙일보)

* 시의 내용은 첨부파일을 확인해주세요.

診斷0·1
 26·10·1931
  以上 責任醫師 李 箱

그 내용의 제목이 나와요.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가 시의 제목입니다. 환자의 용태, 어떻게 변하는가의 그 추이에 관한 문제예요. 환자의 증상을 1, 2, 3, 4 이런 숫자로 본다면 그 안에 뭐가 있느냐? 알 수 없는 점이 찍혀 있다는 거예요. 그 점이 열을 바꿀 때마다 점점 더 당겨집니다. 아프다, 아프다, 더 아프다, 더욱더 아프다…, 제일 마지막에는 ‘죽었다!’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살았는데 결국 그는 죽었다, 환자는 그런 용태를 가지다가 결국 병으로 사망했다’라는 그것을 두고 행을 바꿔서 점을 앞으로 이동시키면서 찍음으로써 표현한 겁니다. 그 점의 경로를 추적하게 함으로써 표현하는 거예요. 그 시의 내용이 전자기학과 관련한 내용이 있을 것이라 해서 조사를 해보니 ‘스토크스 정리(Stokes’ theorem)’의 원리를 시에 집어넣었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스토크스 정리’란 내부의 상태는 경계면의 정보만으로 전달이 가능하다는 정리입니다. 내부의 상태니까 그 내부는 숨어 있는 것이고, 숨어 있으니까 이걸 보통 수학에서 ‘폐곡선’이라 하는데요, 예를 들어 공 같은 구면 위에 1, 2, 3, 4의 좌표를 찍어서 잇는다면 맨 똑같은 선이 돼요. 그런데 폐곡선이라 하는 것은 도넛 모양으로 중간에 구멍이 있지요.

그 구멍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그 구멍부터 숫자로 도넛 주변을 감는 식으로 1, 1, 1, 1…. 2, 2, 2, 2…. 3, 3, 3, 3…, 4, 4, 4, 4…. 이런 식으로 전체를 숫자로 감아요. 이렇게 숫자로 감아버리면 그 감은 숫자는 하나의 선이 돼요. 도넛 전체는 하나의 면인데 이것은 선이 된다고요. 그 숫자를 추적해서 적분(모은다)하면 그 도넛 구면의 에너지양이 계산된다는 겁니다.

붕대 감듯이 일종의 도넛의 구형을 비스듬하게 선으로 돌려버리면 1의 선에서 벗어나서 2로 오고, 2에서 벗어나서 다시 3쪽으로, 3을 벗어나서 4쪽으로 당겨온다고요. 그런 식으로 죽 당겨오면 그 경계면이 선으로 표현이 된다고요.

제가 이걸 말하려고 하는 겁니다. 성도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최초의 범죄 사건이 들어 있어요. 범죄 사건이 들어 있으면 아브라함에게 있던 특이성,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린다는 그것, “정녕 죽으리라” 죽는 것, 그 없는 것, 죽는 것은 없는 것이지요, 없으니 죽은 것이잖아요, 그 없는 것 또 죽는 것, 그 최초의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경로를 만들어요.

그렇게 경로를 만들게 되면, 그들의 역사를 하나의 숫자로 매긴다면 점부터 시작해서 1, 2, 3, 4, 5, 6…, 이런 점을 매길 수가 있는 거예요. 하나의 점으로 매기는데 이것은 집단으로도 그럴 수 있고 하나의 개인으로도 그럴 수가 있어요. 이스라엘은 집단이니 표면적, 면적으로 볼 수 있어요. 하여튼 면적이지만 개인은 그 면적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게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데요. 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여기서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 것이 있습니다. 범죄를 아간이 했잖아요. 한 사람이 범죄했다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머지 사람들, 범죄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통과시키고 그 사람만 죽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 때문에 전체를 난관에 빠지게 만들어버려요.

선에 걸쳐있던 그 계시의 내용을 적분으로 모아버리면 면적(面)이 되는 거예요. 도넛 같은 면적 전체가 경계선…, 여기서 경계라는 말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넛처럼 사용해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언약적인 그 세계,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그 약속과 현재 인간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의 현실, 참외 먹고 싶다, 고등어가 먹고 싶다는 그 인간현실 사이의 경계선으로 누굴 집어넣는가? 이스라엘을 집어넣은 거예요.

이스라엘을 집어넣는데 최초의 범죄사건을 가지고 집어넣어요. 최초의 범죄사건을 집어넣으면 그 범죄가 1, 2, 3, 4…, 의 숫자를 밟아오면서 그 마지막 멸망까지 확대가 됩니다. 그 노선이 하나의 직선 노선이 된다고요. 선을 모으면 면, 면적이 돼요. 경계선이 경계면이 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이스라엘, 하나의 교회…, 여기서 제가 말하는 교회는 구원받는 성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의 교회와, 기존의 모든 세계와의 경계면에서 언약적 사건을 발생시키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 안에는 뒤돌아보는 것…, ‘롯의 처와 같이 뒤돌아본다’라는 그것, 롯의 처는 왜 뒤돌아봤는가?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를 살리고자,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최초의 사건, 그리고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살리리라” 이미 잃어버림으로써 영생을 얻은 달라진 나, 그 두 개가 성도 안에서 개인적으로 하나의 선을 이루고, 그러한 성도가 모이면 교회적으로 하나의 면적이 되면서 세상에서 보여주는 천국생활을 이미 시작한 것으로 여기는 거예요.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예수님의 촉수로서, 계시의 촉수로서 활동할 수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의 오늘 본문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개인의 육신에 그 경계면을 집어넣어서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19-21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나는 선하기를 원하지만 내 속에 다른 것이 들어 있습니다. 악이 들어 있어요. 성도의 육신, 사도바울 본인의 육신이지요, “뒤돌아보면 죽는다.” 그리고 “앞을 봐라.”라는 그 계시가 성도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 한쪽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둘 다가 들어 있어야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계시를 증거할 수 있는 기능이 발산되는 거예요.

그런 기능이 발산되면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뭐냐? 범사에 감사하지요. 범사가 감사하고 고맙지요. 왜? 자기가 그 정도밖에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건져놓고 잘라낸 롯의 처의 모습과, 뒤돌아보지 않았던 롯의 모습이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된 조카 롯의 가정을 통해서 1, 2, 3, 4…의 선으로 연결된 것처럼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다 이루었다”라는 이 두 가지의 상반된 요소가 예수님과 연속된 우리의 기능으로 들어 있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불신자는 이 이야기를 안 듣습니다. “내 돈 내놔라!” 이게 끝이에요. 그래서 불신자는 뒤를 돌아보는 그것도 없어요. 내가 여기 그냥 머물러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 머물러 있다 보면 나중에 죽으면 천국 가겠지. 교회 다녔으니까.’ 이게 불신자예요.

감사, 고마움? 없습니다. 로마서 7장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내 안에 점(·)이 있다. 아까 본 이상의 시에 의하면 ‘내 안에 점이 있다. 내 안에 죽음이 있다.’ 성경적으로 하면 “내 안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지? 정녕 죽으리라’(창 2:17)가 내 안에 점으로 박혀 있다.”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심으로써 ‘정녕 죽으리라’를, 하나님이 내린 그 법을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이 내린 그 법을 자기 안에 집어넣었어요. 집어넣어서 결국 그 끝은 뭐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버림받았어요.

예수님의 그 경계, 보이지 않는 천국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경계를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으로 보여줬듯이 그 역할을, 그 이야기를 지금 예수님의 촉수가 되는 우리가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보면서 사람들 대다수가 이야기합니다. “그래! 우리는 이제 천국만 바라보면서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

아이고, 그게 뭡니까, 그게? 그게 바로 자기를 보존하는 롯의 처의 사고방식이에요. ‘나만 죽어서 천당 가면 행복하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존재이유가 아닙니다. 내 안에 나 말고 달라진 나의 그 달라짐을 알리기 위해서 안 달라졌던 옛날의 그 모습이 내 안에 같이 배합되어 있고, 섞여 있고, 엮여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죄라고 하지 않으면 나는 죄가 아닌 줄 알았지요. 그런데 말씀이 와서 “너 뒤돌아봤잖아!” “맞습니다. 뒤돌아봤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뭘 증거할건데?” “저는 뒤만 돌아보는 인간입니다.” “네가 천국 백성이다. 네가 바로 천국 백성이야.”

왜? 로마서 7장에서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점이 있는 이 몸, 최초의 사건, ‘정녕 죽으리라’가 박혀 있는 이 나를 누가 구원하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왜 감사한데요? 육신으로서는 죄의 법을 섬기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그런 식으로 섬기는 육신으로 사용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 속에 들어온 말씀의 효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속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이제는 거북스럽게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고, 참으로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고 고맙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달라진 사람인 것을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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