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보복성 폭력

아빠와 함께 2025. 3. 30. 22:14

보복성 폭력 

2025년 3월 3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32-34

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10: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세상이 아무리 폭력적이지만 하나님의 폭력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폭력보다 더 센 폭력으로 실행됩니다. 그것은 인간쪽에서 하나님을 건드린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멸망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등극시키는데 있습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히 1:10-11) 친히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을 친히 부셔버리십니다. 그 부셔져야 할 대상 속에 마땅히 인간도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일찍이 하나님의 선악과 과실을 따먹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가만 계시지 않고 보복성 심판을 감행하십니다. “정녕 죽으리라”(창 2:17) “꼭 죽으리라”는 뜻입니다. 안 봐주신다는 말이요 예외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구원이란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니라 ‘두 번 태어난다’는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로서 ‘한 번 태어난 자’와 ‘두 번 태어난 자’와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번 태어난 자는 육신으로 태어난 자들인데 이들은 어디서 태어났느냐는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인생 한 번 살고 그 다음에 뭐가 있는지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관심사는 태어남의 전과 죽음 이후가 아니라 오로지 ‘살아있는 것, 계속 삼아남기’입니다. 끝까지 살아남기입니다. 죽고 난 뒤에 천국가서 또 영원히 살아남기입니다. 
자기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세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인간의 주관적 해석에 의할 것 같으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세상이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자기 내부에 굳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계속 살리기 위해 나의 모든 믿음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으로는 계속해서 휩싸여지는 공포와 공포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 선택하고 또 선택합니다.

“어느 문을 열고 나가면 천국일까? 하나님 믿는 믿음으로 문을 열어야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문을 열어도 지옥입니다. 문제는 바로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믿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불신이면 안 된다고”고 공포에 떨고 있으니 그것이 더 지옥스러운 양상입니다.

예수천국, 불신 천국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믿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면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보복성 폭력을 미리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의지했던 나의 믿음이 불신으로 변하는 겁니다. 이것이 ‘불신 천국’입니다. 더는 내가 나에 대해서 지킬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복성 폭력으로 인하여 우리의 주관은 완전히 죽은 주관이 됩니다. 소용없는 주관이 됩니다. 두 번 태어났다는 말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것을 말하는데 이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보복성 폭력이 도리어 은혜요 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이 작업을 위해 세례요한은 불도즈 같은 말씀을 외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눅 3:4-5) 인간에게 제일 힘든 것은 자기 내부에 의미의 사슬들이 방울져 있다는 점입니다.

일종의 ‘마음 뽁뽁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들은 세상을 주관적으로 헤아려서 얻어낸 실적들입니다. 그 의미들은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품게 됩니다. 이 기대와 소망이 사람을 망하게 합니다. 삶이 억지가 됩니다. 부드럽지가 못합니다. 말이나 행동에 늘 분노가 품어져 발산됩니다.

자기 것 지친다고 환장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광기의 세계’입니다. 세상은 온통 각자들의 광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광기로 폭력들이 남발하지만 하나님의 폭력은 이들 폭력보다 훨씬 더 셉니다. 하나님의 폭력은 인간들에게 덮어쒸워진 공포가 실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인간들이 노벨상을 제정한다고 해서 지진이 없어질까요? 아무 상관없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주관을 노리고 폭력을 행사하십니다. 이 폭력의 예가 구약 42장에서 44장에 걸쳐 있는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나타나 있습니다. 꿈에 의해 형들에게 미움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린 요셉은 꿈으로 말미암아 갖은 고생을 하면서 드디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요셉의 꿈이 하이라이트는 7년 풍년, 연이은 7년 흉년입니다. 요셉이 이 꿈의 진행이 자신들의 형과 부모님을 말씀 안에서 살게 하시는 보복성 폭력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를 위해 요셉은 억울하게 희생물이 된 것입니다. 요셉 자기 앞에 와서 돈들고 양식 사려온 형들에게 요셉은 그냥 곱게 원대복귀하지 못하게 합니다.

즉 다시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힘보다 더 센 힘으로 요셉은 형들을 붙듭니다. 자기네들 입에서 ‘피 값’을 언급토록하고 고백케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실시되는 모든 폭력의 절정은 ‘그의 찔림’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성도가 다시 태어난 자라는 것은 자신의 주관은 죽고 하나님의 주관이 삽일되어 세상을 전혀 달리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이 관여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 복이요 은혜입니다. 육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보복성 폭력과 관련성을 지녔다는 살을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기존 세상의 강한 힘과 폭력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강력한 폭력권으로 인해 형들은 애굽에 있는 요셉 발 앞에서 묶이게 됩니다. 그 묶임 속에서 그들은 드디어 요셉이 새로운 주관을 위해 희생물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오직 나만이 살면 그만이다는 생각이 예수님을 죽게 한 원인과 연관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자가 바로 다시 태어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성도들을 통해서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 당했던 희생을 반복 경험토록하십니다. 이것이 ‘고난의 큰 싸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상의 피곤이 소유의식에서 비롯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0강-히브리서 10장 32-34절(보복성 폭력)250330-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32-34절입니다.

히브리서 10:32-34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줄 앎이라.”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어디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는 겁니다. 29절, 30절에 보면 형벌, 하나님이 주신 그 형벌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새롭게 나온 사람을 말하는데 새롭게 나온다는 사실은 없고요, 새롭게 지음받은, 새롭게 창조된 사람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 않느냐, 아무도 가 본 사람이 없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죽고 난 뒤에 뭐가 있는가?’ 성경은 그걸 기본으로 삼는 게 아니고, ‘네가 어디서 다시 태어났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태어남을 모르게 되면 죽고 난 뒤의 사실도 몰라요.

기존의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죽고 난 뒤의 사실을 살아생전에 당연히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사람은 이미 죽은 이후에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두 번 태어나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 태어난다. 육으로 태어난 것 한 번, 그다음에 영으로 한 번 태어나는 것이 두 번, 이렇게 두 번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는 거예요. 첫 번째 태어나는 그 육신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그런데 두 번째 다시 태어난 사람은 모르는 게 없습니다. 다 압니다. 다 알게 되어 있어요.

왜? 그 세계를 거치고, 죽었고, 그 죽음 안에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가, 온 천지가 죽기 전부터 이미 죽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그런 자는 다시 태어난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이 사람을 성도라고 하는데 이 성도에 대해서 이 세상은 가만두지 않고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다시 태어난 사람과 그리고 한 번만 태어난 사람, 두 번 태어난 사람과 한 번만 태어난 사람을 의도적으로 마주치게 만들고 그 가운데서 한 번만 태어난 사람, 육신만을 가진 사람이 영으로 태어난 사람을 구박하는 양상으로 하나님께서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한 번 태어난 사람은 어떤 공포에 휩쓸리는데 그 공포라는 것은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내가 죽으면 말짱 소용없다는 것, 내가 죽으면 안 된다’라는 그 공포에 휩싸이고 휘둘리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죽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으로 여기는 겁니다, 죽는 것을.

망하는 것을 두고 ‘이게 웬 하나님의 은혜냐?’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두 번 태어난 그 사람은 기존의 모든 공포로부터 죽고, 이제는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기존의 공포에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32절에서는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한 번 태어난 사람은 사는 게 굉장히 억지스러워요. 그런데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사는 게 부드럽습니다. 억지스러운 게 아니고 굉장히 부드러워요.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억지스러운 것은 매 순간 공포에 쫓기기 때문에 그래요. 무서움에 쫓기는 거예요.

옛날 우리나라 기독교 초창기에 이렇게 전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런 구호를 걸고 전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성봉 목사인가, 그 성결교회 목사님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삼천리 온 반도를 다니면서 전도했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예수 천당’은 맞아요. 천국은 하나님 아들의 나라니까 골로새서 말씀대로 맞는 말인데 ‘불신 지옥’ 그거는 잘못된 말이에요. ‘불신 천국’입니다. 예수 세계가 천국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 앞에서 느긋하게 불신자 되는 방식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불신은 안 된다’라고 공포에 떠는 것, 그것이 바로 지옥이거든요. 불신은 안된다고 공포에 떠는 것. ‘나 믿어야 해, 믿어야 해. 안 믿으면 나 지옥 가는 거야.’ 그거 공포 아닙니까? 그게 진짜 불신이잖아요. 두 번을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밖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목적은 뭐냐?

내가 살아야 하겠다고 억지스러운 삶을 사는 것, 이게 얼마나 공포스럽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의해서 고난의 큰 싸움을 하려면 적을 알아야 하겠죠. ‘빛을 받은 후에 이제부터는 네가 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적은 어떤 적인가? 육신으로 한 번만 태어난 자는 모조리 다 적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한 번 태어난 사람이 두 번 태어난 사람에 대해서 공포심을 느끼고 공격하는데 그게 33절에 나옵니다. “비방과 환란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이런 것, 구박에 구박을 가하는 거예요. 핍박을 가하는 겁니다. “왜 너는 우리들처럼 살아가지 않는데? 너는 뭘 믿고 우리처럼 살아가질 않느냐?”라고 구박을 해대는 거예요.

그러나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뭘 믿는 게 아니에요. 믿는 게 아니고 세상에 대해서 해석을 달리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해석의 대상이거든요. 해석의 대상인데 이 세상에 대해서 해석할 때 인간들은 전부 다 주관적으로 하는데 그 주관이 공포에 벌벌 떨면서 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는가?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해서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해석하게 되어 있어요. 그걸 ‘소유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소유 의식’은 뭔가 기대하고 목적을 갖게 되어 있어요. 기대하고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자기를 망치고 들어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공포는 한번 지나가면 또 공포가 밀려오고, 뭘 해도 무서움이 또 찾아오니까요. 그래서 인간들은, 한 번 태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열심히 선택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결정하고…, 그렇게 합니다. 선택하고 결정할 때는 반드시 상황을 자기 주관대로 해석하면서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빨간 약을 먹을까, 파란 약을 먹을까?’ 이렇게 선택하는 거예요.

‘어느 문을 열고 나가면 내게 소망이 되고, 어느 문을 열면 절망이 되는가?’ 이걸 선택해요. 선택할 때 인간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믿음의 역량을 총동원합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옳은 선택을 해서 나를 살리는 방향으로 좀 해주세요.’라고 선택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이미 죽음을 경험했고, 심판을 경험했기 때문에 두 번째 태어난 사람은 뭘 아느냐? 이 세상 전부에 대해서 다 아는데 뭘 그리 공부했다고 다 아는가? 다른 게 아니에요. 인간은 어떤 문을 열어도 그것이 지옥이라는 것, 어떤 선택을 해도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 점을 알아요.

왜 지옥이냐 하면, 이 세상 자체가, 인간이 세상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하나님이 보는 해석이 다르다는 사실을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알아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이유를 히브리서 1장 초반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 대목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장 10-11절에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뭘 아느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이유를 알아요. 하나님 주관에서 해석할 때 만드신 이유가 뭐냐?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만든 겁니다. 그걸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자신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해 이 세상을 만드셨어요.

그래서 두 번 태어난 그 사람은 뭘 먼저 당했느냐? 하나님의 폭력을 먼저 당했던 사람이 바로 두 번 태어난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폭력을 경험한 거예요. 이 말은, 폭력권을 가졌다, 폭력권을 가진 쪽이 천국이고 폭력권이 없는 곳이 지옥이 되는 겁니다. 천국이 지옥을 개 패듯이 패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 태어난 사람들은 차마 자기가 자기한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요. 왜? 살려야 되니까, 소중하니까, 어떻게 보듬어서 어떻게든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폭력을 행사 못 합니다. 행할 수가 없어요. 그저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살살 다루어 주옵소서. 저를 곱게 다뤄 주옵소서. 안 다치게 해주옵소서. 내 인생 편안하게 가게 하옵소서.” 교회 새벽 제단에 나와 맨날 하는 기도가 그 기도입니다. 남들한테는 모르겠지만 자기한테는 비폭력적인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폭력으로 다루시는데 히브리서 1장 10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런데 그것은 멸망한다. 그렇게 멸망시키는 이유가 11절에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주님을 영존시키기 위해서 먼저 만든, 한 번 만든 창조는 하나님의 폭력에 의해서 박살나야 하는 겁니다. 파괴되어야 해요. 그래야 두 번째 주님 중심의 나라가 영존, 영원히 천국을 이뤄가는 겁니다. 이건 양보 없는, 변동 없는, 이것은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스케줄이고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전면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때는, 그냥 심판할 거 심판하고 폭력 할 때는 이유가 있어요. 보복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해요, 보복 양식으로 심판합니다. “너희들이 나를 먼저 건드렸잖아. 너희 인간들이,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있는 마귀가 나 하나님을 건드렸잖아.”

나에 대한 보복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하나님입장에서는 정당한 것을 보여주는데 왜냐? 인간 세계가 하나님을 건드렸기 때문이에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건드렸잖아요. 하나님 쪽에서 참을 이유가 없어요. 참지 않습니다. 정녕 죽는다고 이야기했어요. “너 죽어! 내 거 먹지 말라고 했는데 너 건드렸지? 너는 이제 죽었어.”

왜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볼 줄 모를까요? 그렇게 교회 다녔는데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왜 없을까요? 자기를 지켜내기 위해서 성경 보고 교회 오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닌데. 인간에게는 하나님 보고 살려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어요.

인간들이 왜 하나님을 건드리고, 이 세상의 것이 예수님을 죽였느냐?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나를, 내가 어떻게 태어났든, 어디서 태어났든 그건 모르겠고 일단 태어났으니까 나는 살아야 하겠다는 일념, 그거 외에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여러분, 노벨상 탔다고 해서 지진이 멈춥니까? 노벨상 있다고 지진이 안 일어나던가요? 마음씨 착하다고, 착하게 산다고 산불이 안 일어나는 거예요? 산불 나서 타 죽은 사람들은 다 우리보다 나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이 뭘 건드렸냐 하면 하나님의 핵심, 하나님의 주관을 건드렸어요.

따라서 하나님도 심판하고 폭력을 행사할 때 인간의 주관적 해석을 건드리는 겁니다. 인간은 너무나 주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봐요. 내가 하는 행동이 어느 정도로 큰일을 낳는지를 몰라요. 자기 조상의 묘지 관리한다고 라이터 들고 올라갔을 때 그 일이 어느 정도로 큰일이 날지를 본인이 알았겠어요? 몰랐잖아요.

‘내가 오늘 묘지에 불내서 한 40명을 죽인다.’ 이런 거 없었어요. ‘내가 오늘 묘지 관리하면서 송이버섯 재배하는 사람들 다 망하게 할 거야.’ 그런 거 없었다고요. 그 사람이 묘지에 가서 행동하는 것은, 눈앞에 묘지가 있다, 뭐가 있다는 이 모든 것이 ‘나한테 어떻게 유리하게 작용하는가?’ 단지 그것만 알아요.

왜냐하면 인간은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인간 뒤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 존재해요. 귀도 앞쪽으로 달려 있죠. 눈도 코도 앞에 있죠. 입도 앞에 있죠. 전부다 앞을 보잖아요. 들어오는 모든 세상의 것은 앞에서 수용하도록 감각 기관들이 다 앞에 있다고요.

그러면 인간이 죽는다는 말은, 앞에 있는 감각 기관들이 다 죽는다는 말이고, 죽게 되면 하나의 골판지죠, 세포의 골판지. 하나의 판때기에 지나지 않는 게 인간입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날 인간은 ‘가연성 존재’라고 했어요. 불에 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킬러가 자기 집에 있는 개 건드렸다고 러시아 마피아 조직 자체를 다 붕괴시켰습니다. 존 윅이라는 사람이 자기 개 건드렸다고 다 죽여 버렸어요. 인간은 자기 주관 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도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은 더욱 아름다워라

얼마나 주관적입니까? 이게 ‘연가’라는 노래 가사거든요. “저 하늘에 반짝이는~” 그 노래란 말이죠. 세상에 주관 빼놓고 아는 게 뭐가 있어요? 내 위주 빼놓고 아는 게 있습니까? 없죠. 그 주관, 주관이 어디를 건드렸냐 하면 하나님을 건드렸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 49-50절에 “그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절에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그 당시에는 왕이 없고 제사장이 지도자거든요. 그 지도자가 하는 말이 “한 사람을 죽여서 우리 민족이 편안하게 살고 힘들지 않으면 그게 우리한테 이익이 되지 않느냐.” 이게 가야바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야바는 한 번 태어난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합니다. “어때? 내 생각 맞아 틀려?” “맞아요!” “그렇지!”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그 한 사람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살~짝 이 땅에 보내서 결국은 그 예수님의 폭탄을 인간들이 건드리도록 유도하셔서 하나님의 모든 폭력과 심판이 정당성 있는 보복 양식으로만 진행되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거예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결국 뇌관을 건드리게 한 거예요. ‘하나님의 보복성 심판, 폭력의 수류탄 핀을 뽑도록 그렇게 유도하는 쪽으로 너희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있고, 그렇게 선택하게 되어 있고, 그렇게 결정하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라는 거예요, 주님 건드리는 식으로.

이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가셔서 빛을 보게 하는 두 번 태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그들이 사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 그대로 당하게 만들어요. “전에 예수님 건드렸잖아? 지금 이 시대도 새로 태어난 자를 기어이 건드리도록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너희를 향한 폭력성은 정당하다.” 이렇게 나오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의 주관성이 있다는 말은, 그 주관성으로 세상을 해석해서 그걸 자기에게 의무화시키는 겁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해야 할 일이 나와요. 인간들은 세상을 주관적으로 보면서 거기서 수집한 게 뭐냐? 그게 의미거든요.

의미니까 인간은 늘 이렇게 매일매일의 의미로 조금씩 조금씩 연결되어 있어요. 저는 이걸 뽁뽁이라고 할게요. 스트레스받을 때 꾹꾹 누르면 터지잖아요. 하나님은 세례 요한이라는 불도저를 보내서 그 뽁뽁이 위를 불도저가 그냥 지나가게 되면 모든 의미는 삑! 퍽! 빡! 하면서 전부 다 터져버려요.

누가복음 3장 4-5절에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불도저 동원한 겁니다.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인간의 개성, 특징, 이거? 불도저 지나가면 완전히 골판지 돼요.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로 주의 말씀이, 세례 요한의 말씀이 인간을 그렇게 밀어붙여서 납작하게 만들어버리죠. 오징어포, 쥐포 기계의 압력으로 밀어 넣어서 당기면 납작하잖아요. 주께서 우리를 납작하게 만들어요. 앞에 있는 의식을 등짝으로 만들어요, 뒤로 만들어요. 앞이나 뒤나, 앞을 봐도 그 인간, 뒤를 봐도 그 인간 그냥 하나의 골판지처럼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극히 감사해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인간이 피곤하고 힘든 것은 이 의미를 안 놓치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되거든요. 사람이 피곤한 이유가 소유 의식 때문에 그래요.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내 것을 가져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세상 살면서 노력하는 게 남의 것이 아니고 필히 내 것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부터 그 사람의 삶의 무게는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에 폭력을 행사해서 완전히 망치는 것인데, 억지 부리면서 그 뜻으로 세상을 볼 줄 모르고 주관적으로, 일방적으로, 내 의미를 살리는 쪽으로 세월 가고 나이 먹어가면서 계속 ‘내 의미는? 내 가치는? 내 소중한 것은?’ 맨날 이거 계산하고, 챙기고, 이거 한다고 스스로 자기 몸은, 자기 삶이라고 하는 것은 힘들어 죽는 거예요.

그렇게 억지가 되니까, 그거 지키려고 하니까 예민해지고, 예민해지니까 투쟁적이 되고, 그러니까 사는 게 부드럽지를 못해요. 항상 분노, 분노가 섞이지 않으면 말을 안 해요. 분노가 섞이지 않은 말, ‘분노가 안 섞였는데 무슨 말을 해?’ 이래요. 화내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내 것을 내가 지켜야 하니까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나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에 대한 믿음. 각자 주관적인 믿음에 무장되어 살아가는 게 인간들의 모습이에요.

영국에 호수가 있는데 ‘네스호’에요. 그 네스호에 괴물이 나타난다고 그렇게 옛날부터, 저 어릴 때부터 이야기들 했어요. 네스호에 공룡 같은 것, 길게 모가지 빼고 있는 사진들이 얼마나 돌아다녔습니까? ‘괴물이 있다? 그러면 영국 당국에서 찾아서 증명해야지.’ 그래서 네스 호수의 물을 다 빼라느니 이런저런 식으로 해서 1969년에 조사를 다 끝냈어요. 끝내보니까 그 넓은 네스호에 사는 게 별것이 없었어요.

그런데 인간의 믿음이라는 게 뭐냐? 주관적이에요. 왜? 인간이 믿는다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나에게 공포를 유발할 때나 기억을 오래 해요, 나한테 뭔가 공포스러울 때. ‘내 의미를 박살 내지 않을까?’ 두려울 때 그 기억이 오래가요.

인간은 공포와 더불어 살아요. 아예 귀신을 불러내요. 귀신 없다고 하면서 맨날 귀신하고 살아요. 저는 이 귀신을 광기라고 부르겠습니다. 인간은 광기에 휩싸여서 살아갑니다. 광기에 휩싸여서 그거 대체한다고 자기가 마련한 게 믿음이에요.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뭐 어쩌라고?” “이 공포로부터 살려주세요.” “믿음?” “예.” “그게 지옥이야.” 믿음 그게 지옥이라고요.

‘예수 천당’은 맞는데 ‘불신 지옥’은 아니에요. 내가 나를 믿지 않을 때 비로소 그게 천국이에요. 내가 나의 믿음을 믿지 않을 때 그게 천국입니다. 내가 나를 믿었던 것은 한 번 태어났을 때나 가능한 거예요. 내가 나를 믿고, 내가 나를 건사하고, 남한테 밑지지 않기 위해서 야무지게 살아서 뭔가 남한테 보란 듯이 ‘내 인생 잘 살았다, 마이웨이’ 그거 내세울 때 그게 바로 한 번 태어난 사람들의 공포에요. 그거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 은혜 주세요. 복 주세요. 축복해 주세요.” 기적 달라고 교회 나와서 그거 빌고 있다고요.

산불 났을 때 의성에 교회가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밀조밀 교회 많은 데가 의성군이에요. 의성군의 교회들이 얼마나 기도를 했겠습니까! “딱 한 번만 비 내려 주이소!” 이런 식으로, 경상도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사야 5장 6절을 몰라요. 5장 6절에 보면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명령을 해서 “구름!” “예” “그 의성 쪽에 비 내리지 마!” 명령을 한 거예요.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 폭력을 행사하러 오셨기 때문에, 보복을 위한 폭력 “네가 건드렸잖아. 선악과 따먹었잖아. 네가 예수님 건드렸잖아. 내가 뭐 가만있을 줄 알았지? 너 선악과 왜 따먹었어? 예수님 왜 죽였어? 너 살려고 그런 거잖아. 네 주관적인 좁은 안목에 의해서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건드렸잖아. 이제 와서 네가 보복과 심판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지. 네가 예수님을 왜 죽였어. 그건 네 속에 ‘나는 내가 지켜야지 아무도 날 지키지 않는다’라는 신념과 믿음이 너에게 있잖아.”

“하나님 한 번만 살려주세요!” 그것은 모든 세상 공포를 다 몰고 오는 거예요. 그냥 주님한테 폭력당하고 망하면 돼요. 그러면 인생이 부드럽게 된다고요. 왜 악을 써요? 악은 지금 내가 쓰고 있구나, 참….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엘리야 시대 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했어요. 그 정도로 하나님이 친절을 보여줬으면 우리가 뭔가 나에 대해서, 내 믿음이 문제 있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봐야 할텐데 비가 안 오니까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 신을 믿기 시작했어요.

내가 다룰 수 있는 신, 그게 바알과 아세라에요. 내가 기도하면 무조건 응답해야 하는 신, 그런 의무가 있는 신, 그걸 사람들은 하나님이라고 본 거예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넌 너밖에 모르잖아. 너 사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없잖아.” 그런데 뭘 기도해요?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이 소유 의식으로 더욱더 공포의 늪 속에 졸아들게 만들어요. 그럴 때 자기가 불안하니까 ‘더욱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나 지옥 가면 안 돼. 신앙이 있어야 해. 주여, 제가 신앙을 갖겠습니다.’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요. 자기를 안 믿으면 될 텐데 기어이 자기를 붙들고 갑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조치는 간단합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그가 찔림은. 예수님이 찔려서 피가 나옴으로써 모든 게임은 끝났어요. 끝, 끝입니다. “공포야, 안녕.” 예수님이 찔림으로써 더 이상 성도한테 공포라는 건 없습니다. ‘아, 내가 주님을 찔렀다기보다는 주님이 나한테 찔렸구나. 주님이 찔렸구나.’ 주님이 내 손모가지 쥐고, 주님이 그 칼을 쥐게 만들어서 주님이 나에게 폭력적으로, 내 손의 칼로 주님 자신의 몸을 찌르도록 그렇게 유도한 것 이것이 게임오버에요.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이게! 끝났어요. 인생 뭐 걱정 근심 무거운 거, 끝났어요. 그걸 은혜라고 합니다. 그걸 복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때 바로 ‘두 번째 태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인물로서 주님의 죽음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우리한테 폭력적인지 그 폭력을 행사한 사정, 그 예시가 창세기 42장부터 44장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42장부터 44장의 내용이 어떤 내용이냐 하면, 요셉이 꿈꾸다가 밉상 받아서 열일곱 살 때 애굽으로 은 20냥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때 형들은 요셉을 죽으라고 방치하고 내쳤죠. 그리고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옷에 묻은 것이 짐승의 피인 줄 모른 채 ‘내 아들 요셉이 죽었구나.’ 죽은 줄 알고 낙담을 했어요. 요셉은 17살 때 팔려서 남의 나라 노예가 되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다가 13년 후 나이 서른에 애굽 나라의 국무총리가 됐어요. 꿈을 해석함으로써 바로 왕이 “우리 제국의 앞일을 네가 유일하게 알기 때문에 행정 책임자로서 모든 것을 다 해라.” 이렇게 총무 대신을 맡겼습니다. 출세한 거죠.

그런데 바로의 꿈 해석의 내용이 뭐냐? “7년의 대풍년 다음에 7년 대흉년이 옵니다”(창 41:29-30)라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바로왕과 대신들은 ‘이게 애굽나라에 관한 이야기’라고 주관적으로 해석을 했어요. 모든 것이 주관적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이 공포에 대처해서 요셉에게 부탁하기를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해다오. 그래야 애굽이 산다”라고 했어요.

인간들은 자기 살길밖에 모르지요. 그러나 요셉은 뭘 알았느냐 하면, ‘이것은 애굽나라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우리 아버지 어머니, 야곱언약에 속한 아브라함의 자손 히브리인들을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지키기 위한, 언약을 다시 한번 새기고 기억하게 만드는 조치’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과연 7년 동안의 대풍년 때 창고 지어서 곡식을 저장해 놓고, 드디어 7년의 대흉년이 오는데 창고를 지어서 곡식 저장 안 했다면 풍년 때 곡식 다 까먹었을 거예요. 흉년 때 참다 참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요셉의 형제들이 곡식 구하러 애굽에 옵니다. 그 장면이 창세기 42장이에요.

“돈 여기 있습니다. 양식 사러 왔습니다. 양식 주세요.” 그리니까 요셉이 관원을 제끼고 “내가 직접 만날 것이다.” 해서 직접 만난 뒤에 “너희가 돈 있다고 해서 양식을 내줄 수는 없다. 너희가 혹 정탐군들이 아니냐?”(창 42:9)라고 의심을 하면서 “막내 아들 데리고 오지 않으면 양식이고 뭐고 너희는 여기서 못 나간다”(창 42:15)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요셉의 엄마 라헬이 막내 아들 베냐민도 낳았거든요. 엄마가 다르기 때문에 요셉을 구박했던 그 형들이 베냐민도 당연히 구박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때까지는 자기들이 요셉을 구박해서 노예로 팔아치웠다는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42장 21-23절에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 들은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그래서 요셉은 형제 중에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놓고 돈은 그대로 주면서도 양식을 줘서 막내동생을 데려오라고 다시 이스라엘로 보냅니다. 이 말은 요셉이 더 큰 폭력으로 억지를 부려서 형들로 하여금 다시 세상의 공포, 세상의 권력, 바로 폭력이 지배하는 그 세계로 결코 복귀하지 못하도록, 원대복귀 못 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언약의 방식이고 말씀의 능력입니다. 찔림의 능력이에요.

한번 딱 잡았으면 다시는 그 인간의 권력이 있는 세상, 한 번 태어난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세상, 오직 자기만 믿는 믿음으로 버티고 있는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찔림의 능력이 그 성도를 붙잡아 당깁니다. 어디까지? 스스로 자기가 피 값을 고백할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궁지로 몰아넣어요. 이게 은혜입니다. 이게 은혜고 이게 첫 번째 사랑이에요. 사랑은 이 세상보다 더 센 폭력을 받을 때가 첫 번째 사랑이에요.

이제 양식이 있으니까 얼마쯤 버티지요. 그런데 흉년이 7년이나 계속되니 먹던 양식이 또다시 떨어져요. 의도적으로 흉년이 계속돼요. 이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폭력적이라는 말이지요. 내 백성 놓치지 않기 위한 하나님의 폭력이에요.

창세기 43장에서 그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옵니다. 15절에 “그 사람들이 그 예물을 취하고 갑절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의 앞에 서니라.” 요셉의 형제들은 막내동생 베냐민을 애굽에 데리고 오면서 ‘주셨던 돈도 다시 다 가져왔습니다. 아버지도 잘 계십니다. 이제 됐지요? 우리가 사는 것이 급합니다. 양식 주시면 곧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 마음이지요.

그런데 요셉이 44장에서 형들 모르게 무슨 일을 꾸밉니다. 1-3절에 “요셉이 그 청지기에게 명하여 가로되 양식을 각인의 자루에 실을 수 있을만큼 채우고 각인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소년의 자루 아구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개동시에 사람들과 그 나귀를 보내니라.”

요셉이 은잔을 몰래 막내동생인 베냐민의 캐리어죠, 짐보따리에 넣어두고 그 일행을 돌려보내는 식으로 한 겁니다.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아버지 야곱이 이미 요셉을 잃어버렸으니 “베냐민만큼은 못 데려간다”(창 42:36, 38)하고 버텼던 거예요.

그러니까 형들이 “아버님! 얘 안 데려가면 애굽의 총리가 양식 줄 리가 없습니다. 괜찮은 사람같이 보였으니 베냐민 보여주기만 하고 다시 데려올 겁니다.” 그러면서 르우벤이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창 42:37).

이래서 요셉의 형제들이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었던 거예요. 그렇게 애굽으로 갔다가 양식도 얻고 모든 일이 잘 됐다고 여기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오는 길인데 요셉이 부하들 시켜서 베냐민의 짐보따리에 애굽에서 점칠 때 쓰는 은잔을 숨겨놓았던 참이지요. 룰루랄라, 아무것도 모르고 가는데 뒤쫓아온 사람들이 “이 도둑놈들아! 우리 주인님이 점칠 때 쓰는 은잔을 너희들이 훔쳤구나.”

“예? 저희는 그런 일 결코 없습니다.” “그래? 지금부터 짐 조사해서 은잔이 나오면 그 사람 인질로 잡는다!” “형이 혹시 훔쳤어?” “아니!” “그러면 형은?” “아냐!” “저희는 절대로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래? 조사하면 다 나온다.”

조사해 보니 베냐민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어요. 요셉의 형제들은 그냥은 고향의 집으로 못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게 뭐냐? 꼭 산불이 나서 집이 불타고, 지진이 나서 사람이 죽는다고 하나님이 아니고 주님은 우리의 주관을 건드려요, 주관! ‘이 세상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노력하면 살 수 있는 세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믿음, 나의 신학, 나의 신뢰, 내가 나를 살리는 나의 교리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은 겨냥해서 집요하게 추궁합니다.

“그런 네 믿음, 너에 대한 신뢰가 나를 건드렸다는 그 사실을 몰랐지? ‘뭐든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고, 나 사는 것을 힘들게 하면 다른 하나님을 믿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너!” 밥이라도 먹고 좀 살만하니 하나님의 말씀도 안 듣고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그 ‘나’, 나 편하면 그만이라는 그 ‘나’.

창세기 44장 33절에 유다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곧 “내가 베냐민 대신 잡히겠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동생 죽고 난 뒤에 얼마나 상심했는지 베냐민마저 잘못되면 우리 아버지는 정말 죽습니다. 나 하나 희생해서 우리 아버지 살릴게요. 내가 대신해서 종이 될게요.”

그 고백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 앞에서 할 때 요셉은 비로소 ‘너희들이 세상을 보는 그 주관과 나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주관과 일치된다’라는 그 사실을 드디어 발견한 겁니다. 그 뒤에 보면 요셉이 울지요. “풍년들고 흉년이 든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아버지와 그리고 형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을 조작해 왔”(창 45:5-7)던 거예요.

지진이 일어날 때 일어나고, 불이 날 때 불이 난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세상은 예수님 중심이지 내 중심이 아니었던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내가 내 내 신앙의 올무가 되지 말고 나의 신앙에서 예수님의 올무로 옮기시는데 옮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하시고 역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꼭 우리를 아프게 해서 뭘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주관을 아프게 하지요, 내 주관. 내 뜻대로 되지 않도록 해서 내 주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 세상은 나 위주로 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그만큼 우리는 흉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누구를 통해서? 한 번만 태어난 사람들을 통해서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이 그러한 경우를 계속 겪게 하는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세상은 온통 광기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광기의 사람들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유튜브에 나오는 세상에서 모든 일어나는 일들은 자기 혼자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 광기의 표현들이에요. 우리는 그러한 세상을 지금 통과하고 있어요. 광야 생활처럼 통과하고 있습니다.

뭔가 차이가 나야 해요, 차이가, 어떤 차이점이 발견되어야 해요. 주님의 주관으로 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주관이 들어오면 그 사람은 한번 태어난 것이 아니고 이미 내 주관은 죽고 죽은 주관에 주님이 찔림을 받았다는 것, 게임 오버, 끝났어요, 그 예수님의 찔림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거든요, 그 주관으로 세상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 너무 안일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너무 일방적으로 내 생각만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해주시고, 말씀의 세계를 너무 얕잡아 보지 않았는지, 무시하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일어나는 일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세상은 필히 망해야 마땅하다는 것, 그 자체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요 은혜인 것을 알고 늘 감사하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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