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의 휴대폰

아빠와 함께 2025. 3. 16. 19:21

하나님의 휴대폰

2025년 3월 1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21-25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9.  Having therefore, brethren, boldness to enter into the holiest by the blood of Jesus,
20.  By a new and living way, which he hath consecrated for us, through the veil, that is to say, his flesh;
21.  And having an high priest over the house of God;
22.  Let us draw near with a true heart in full assurance of faith, having our hearts sprinkled from an evil conscience, and our bodies washed with pure water.
23.  Let us hold fast the profession of our faith without wavering; (for he is faithful that promised;)
24.  And let us consider one another to provoke unto love and to good works:
25.  Not forsaking the assembling of ourselves together, as the manner of some is; but exhorting one another: and so much the more, as ye see the day approaching.

‘하나님의 집’이 있는 반면에 ‘사람의 집’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집입니다. 사람들이 희망하는 바는 절대적으로 자기 만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나 세계를 원합니다.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은 그 누구로부터의 간섭도 받지 않고 신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평생 시도하는 것은 ‘자기만의 집 장만’입니다.

그런데 이런 집으로 인해 ‘하나님의 집’의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인간들의 ‘자기 집’에서는 자기에 대한 그 어떤 부정성도 용납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집 안에서 믿을 만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거짓인 줄도 모르고 가까인 줄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집’과의, 대비와 대조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뭔가 제공하는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양심의 악’과 ‘더러운 마음’을 씻어주는 그 무엇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생적인 양심과 마음은 더럽다는 뜻입니다. 엉터리라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엉터리인지는 누가복음 2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으셨다는 소식을 뒤로 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자신이 거짓이라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행해주시면서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식사에 축복하실 때, 제자 둘은 눈이 열렸으며 동시이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는 다른 양심, 다른 마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세계에 몰입되어 자신이 괜찮은 존재인줄로 알았던 것이 모조리 거짓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두 제자가 눈을 떴을 때,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보이느냐 아니 보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영에 의해서 눈이 열리고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이는 곧 예수님이 한결같이 살아계시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신다면 계속에서 우리의 양심과 마음이 악하고 거짓인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즉 죄 용서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주어지는 말씀의 책망입니다. 죄 용서받은 상태에서 성도의 육신은 마치 벌받는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집은 인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셨다’는 부정적 요소를 근거로 해서 세워지는 겁니다. 그것이 곧 ‘세상 죄를 지고가신 분’의 집으로서의 천국입니다. (계 21:22)

사람들은 일절 자신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아이를 주셨습니다. 그 아이는 ‘최후의 아이’입니다.(사 9:6) 그 아이 안에 세상의 시작과 끝이 관통되어 있습니다. 마치 소리 껍질 안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었는지 여부는 개미에 실을 묶고 안으로 집어넣어 도로 밖으로 나오므로서 확인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영, 성령께서 성도에게 찾아오게 되면, 예수님의 경우과 마찬가지로 성도의 몸으로도 세상의 시작과 끝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즉 인간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신체성은 어디까지나 결과물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람이 되고 난 뒤에 ‘흙+하나님의 호흡’이라는 시작점을 잊어버렸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항상 당당하고 마음껏 폭력을 행하던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살인 현장에서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다음과 같은 소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마 27:19)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던 그 마음 속에 불안과 두려움을 일어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본디오 빌라는 자신의 시작을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회당장의 딸이 살아나는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막 5:39-40) 동일한 시체를 놓고서 인간들은 자신의 가짜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집을 알리기 위해 우리 인간들이 마련하고자 하는 자기 집과의 분리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에 합당한 DNA를 언약으로 삽입하는 일입니다. 사무엘을 한나는 자기 집과 분리해서 하나님의 집으로 넘깁니다. 그렇게 되면 사무엘에 의해 ‘하나님을 아버지가 되시는 다윗의 가문’이 형성됩니다.(삼하 7:14)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소지품이 됩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휴대폰을 평소에도 못놓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부정성으로 우리의 신분이 하늘의 집에 들어갈 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마치 400년동안 애굽에 살면서 애굽 사람이 다 되는 그들에게 악한 바로 왕을 통해서 모든 히브리인의 남자아이를 출생부터 막는 조치를 통해서 그들이 애굽 사람과 다른 운명의 길을 가야될 사람으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미 용서받은 상태에서 이 세상에 놓여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모를 재현시키십니다. 벌받을 필요도 없지만 벌받는 것처럼 수난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성령이 임한 사람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7-18)

성도끼리 자주 모여야 될 이유는, 바로 그 현장에서 피어나는 부정성과 주님의 용서하심을 반복해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된 상태에서 보여주는 봉사입니다. 주님이 여기 계심을 보여주기 위한 봉사입니다. 더러운 양심으로 더러운 마음으로 오로지 자기 세계 마련에 정신을 쏟는 그 가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기 위한 모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처음 사랑과 끝 사랑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8강-히브리서 10장 21-25절(하나님의 휴대폰)250316-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21-25절입니다.

히브리서 10:21-25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여기 하나님의 집이 나오죠. 하나님의 집에서 제공된 것이 뭐냐? 뭔가 씻어주는 기능이 주어졌고, 그 결과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데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거죠.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24시간 늘 생각을 해야 할 텐데 그걸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요. 각자 자기가 장만한 자기 집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집 장만하는 거예요. 아늑하고, 포근하고, 어떤 피곤한 일이 있더라도 후딱 들어와서 씻고 자면 되는, 오로지 나 그리고 내가 낳은 내 가족과 집안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집, 그 집에 들어가면 일체 그 어떤 외부의 소식이나 연락도 차단되고 그 어떤 간섭도 없는, 오직 나만을 위해서 뭘 해도 되는 천국 같은 집, 그 집 만들기에 사람들은 평생을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사회생활 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내가 영원히 살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외부 활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내 집 마련에 필요한 여러 가지의 인테리어나 요소, 조건은 외부에서 쓸만한 것, 부러운 것, 탐나는 것들을 모아서 그 안에 집어넣습니다.

외부에서 탐나는 걸 그 안에 집어넣고 조립하는 그 법칙, 원칙이 있는데 그게 뭐냐? 내가 살던 고향을 닮아가는 내 집이에요. 사람은 자기 고향을 만들고 싶어 해요. 자기 기억에 부합되는, 자기 기억이 오롯이 살아있는 고향 만들기, 여기에 정신이 팔려서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집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뭐냐? 내가 정돈하는 나의 양심이고, 오직 나만을 믿는, 나만을 지켜줄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고, 그리고 남에게 꿀리지 않고 항상 허점이나 오점이 들키지 않는 자체적으로 온전한 마음을 그런식으로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인간이 한평생 살아가는 것은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일에 몰두하고 매진했던 겁니다.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내 양심은 착하다. 내 마음은 착하다.’가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히브리서 10장 22절에 보면 분명히 “양심의 악을 깨닫고”라고 되어 있어요. 아, 이거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네 양심, 그거 악한 줄을 몰랐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마음, 자기 양심을 착하다고 밀어붙입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믿음이 되려면 내 마음이 믿을만한 양심, 믿을만한 마음이 되어야 내가 나를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나를 신뢰하고 그 신뢰하는 마음으로 영원히 편히 쉴 수 있는 내 집 마련…, 뭐 전원주택도 괜찮죠.

평생 나의 소망, 일평생 고생했는데 보람 같은 건 뭐냐? ‘나는 고향 같은 내 집 마련했다.’ 이게 보람이 되겠죠. 그게 악하다는 생각을 우리는 하지를 못합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마는, 우리의 양심과 마음이 악하다는 것이 어디서 온 것이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온 거예요.

내가 만든 집에서는 나를 정당화하고 그러죠. 하나님의 집에서 볼 때 악한 거예요. 추잡하고 더러운 겁니다. 뭔가 뿌려주는 게 있고, 뭔가 씻어주는 게 있지 아니하면 우리가 믿는 나의 마음이나 내 양심은 온전한 믿음과 온전한 마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하나님에게라도 간섭받기 싫어.’ 뭐 이렇게 버티겠죠. 버티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에 못 들어가는 거야.” 하나님 집에 못 간다는 말은, 내가 만든 집은 거짓이라는 거죠. 나의 지난날 모두가 거짓된 거예요.

하루하루가 그 거짓된 것을 계속 진짜라고 우기면서 버티는 식으로 살아가죠. 그러면 진짜 나는 누구냐? 하나님의 집을 모르면 평생 가도 진짜 나를 몰라요. 모르고 그냥 거짓된 나만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내 집 마련하기에, 내 집 장만하기에, 나만의 세계 장만하기에 자꾸만 방해된다면 인간은 분노를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속 내면에 광기가 지배한다,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 소망이라는 것은 바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주어진다. 그렇게 주어지는데 그 전의 작업은 양심의 악, 마음의 악, 추잡하고 더러운 몸과 마음 이것을 뭔가 깨닫고 씻을 수 있는 요소가 외부에 의해서 주어져야 한다는 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돌아보고 서로 모이기를 힘쓰라’라는 것은 뭔가 하나님한테 받은 게 있을 때, ‘본인이 가짜였는데 진짜 나를 이제는 발견했다’라는 그 기쁨으로 서로서로 모이게 되어 있는 거예요.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무엇이 주어졌을 때 우리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이 되는가?

그것은 누가복음 24장의 예가 적절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는데 그 두 제자가 잠시 동행하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누가복음 24장 30-31절에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참 절묘하죠?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볼 때 그때 예수님은 안 보인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안 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주님이 집어넣어 준 것으로 인하여 내가 가짜인 것을 발견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라는 거예요.

예수님하고 제자들 다닐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눈으로 얼마나 봤습니까? 보고도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었어요. 무슨 뜻인지를 몰랐습니다. 왜? 자기한테 문제 있다는 것, 하늘나라 기준으로 봤을 때 자기가 하늘나라 갈 수 없는 가짜라는 것을 도저히 인정을 못 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마음이 뜨겁다고 했어요.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이냐? 온전한 마음이에요. 온전한 마음, 정결한 마음, 온전한 믿음은 뭐냐?

하늘에서 주는 것이 주는 것대로 느껴지는 마음,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인식이 되는 마음, 하나님이 나에게 연락을 주시고 하나님이 이렇게 계속해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그 마음, 그 양심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원칙대로 인정하는 온전한 마음이고 온전한 믿음인 거예요.

‘눈이 밝았다.’ 같은 말로 ‘마음이 뜨겁다.’ 마음이 뜨거울 그때 주님께서 두 제자에게 집어넣어 준 게 있어요. 누가복음 24장 27절에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세와 선지자의 글, 구약이죠. 구약 말씀을 총동원해서 어디서 굳히기에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고난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내용으로 요약이 돼요.

요약이 되면서 ‘아, 주님이 가짜가 아니라 내가 가짜구나.’라는 것, 내가 진짜가 아니라 진짜는 주님이 진짜라는 사실, 이게 눈이 밝아질 때 마음이 뜨거웠을 때 알게 되는 거예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것, 거기서 뭔가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우리는 평생 온 정신을 어디다 파느냐? 내 인생 내 집 마련하는 것, 내 세계 구축에 모든 정신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나만 편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에요. 내가 누군지 그건 모르겠고, 내가 진짠지 가짠지 그건 모르겠고 ‘내 인생 내가 편하게 살면 그걸로 한평생 잘 살았다. 난 누구한테든 큰소리칠 수 있다.’ 여기에 몰두한 거예요, 여기에.

그러니까 내 집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집이 어떤 집인지 몰라요. 아늑한 내 고향 같은 내 집. 보통 촌에 옛날 가옥 보면 방 두 개 있고 중간에 마루 있는데 거기 사진틀이 있어요. 그 사진틀에 환갑 때 찍은 단체 사진이 큰 게 있고, 거기에 손자들, 애 낳을 때마다 끼워 넣은 애들 사진들이 있어요. 또 큰아들 외국 나갈 때 찍은 여권 사진도 있고, 그런 모습들이 있죠. 그 식구들의 집합, 식구들의 모양이 뭐냐? 내 집 만들기에요. 평생 살면서 그것 외에 생각한 게 있어요?

성경은 아주 충격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하나님이 아이 하나를 주셨는데요, 그 아이가 최후의 아이입니다. 최후의 아이예요. 마지막 아이입니다.

그러면 우리 집안에서 낳은 아이는? 괴물의 아이예요. 가짜가 가짜를 낳고, 가짜가 가짜를 낳은 거예요. 돌잔치 해봐야 몇십만 원짜리 돌 반지 해줘봤야 가짜입니다. 실 잡고, 마이크 잡고, 돈 잡아봐야 가짜에요. 진짜 아이는, 최후의 아이는 한 아이를 주셨으니 그 아이로 마감되었어요. 그 아이 빼놓고는 모조리 다 가짜입니다. 살아도 소용없어요. 가짜가 오래 산다고 진짜 되는 법은 없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이 사실을 예수님의 아버지도 몰랐어요. 누가복음 2장에서 유월절 날에 사흘 동안 어린 예수님을 찾는다고 돌아다녔거든요. 그때 사흘 만에 만났는데 아버지가 화나서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우리가 너 때문에 속상한 줄을 아니?”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되바라진 말처럼 들립니다.

누가복음 2장 4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 태어난 아들이고, 따라서 당연히 나는 아버지의 집을 찾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여, 왜 나를 당신의 아들로 생각하십니까?’

이사야 9장 6절에서, 하나님이 주신 아들은 육신의 아빠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에요. 처녀에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이게 바로 모세와 선지자의 글에 있거든요. 이걸 들을 때 여러분, 마음이 뜨겁지 않습니까? ‘뜨겁기는 씨…’ 싸늘해요. 눈이 열리지 않습니까? 눈이 열리기는, 점점 잠이 와서 눈이 막 감기는데요.

가짜에 푹 잠겨서 자기에 대한 거짓 충성, 거짓된 신뢰, 자기 한 몸 지키는 것, 자기가 자기한테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거 그거 광기입니다. 그거 미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집을 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 드러냈는가, 그 절차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 절차는 사무엘상에 보면 1장부터 나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한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이 예쁘죠? 한나인데, 남편의 사랑을 받았어요. 결혼해서 남편한테 사랑받았으면 그걸로 끝이지 그 정도 큰 사랑이 어디 있겠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그 남편에게 첩이 있는데 그 첩이 브닌나에요.

이 브닌나에게 아들이 생겨서 아들을 낳았어요. 그러니까 브닌나가 본처인 한나 약을 올리는 겁니다. 마치 하갈이 사라 약을 올리듯이(창 16:4), 본처보고 “한나 당신은 믿음 좋다, 믿음 생활 잘 한다고 하는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안 줬는데 아들을 준 사람은 나지 당신이 아니야. 남편이 사랑했는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당신 사랑 안 했어.” 그렇게 구박을 당하니까 그 말이 상처가 돼서 한나가 견딜 수가 없어요.

사무엘상 1장 6절에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여기에 대해서 한나가 못 참고 이제는 하나님께 따지러 가는 겁니다. 남편 보고 따져봐야 남편은 무책임한 소리 하죠. “내가 아들 낳나? 하나님이 낳으시지.” ‘그래? 그러면 하나님께 따지겠다.’

성전에 가서 밤새도록 미친 여자처럼 기도합니다. 울고불고 난리가 났겠죠. 사무엘상 1장 13절에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줄로 생각한지라.”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뭐 이렇게 되어 있는데 하여튼 그게 술 취한 모습 같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엘리 제사장이 “당신 술 먹고 기도하러 왔지?” 이렇게 하니까 사무엘상 16장 16절에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너무 애통해서 그러니 나를 악한 여자로 보지 마세요.’ 그런 거예요. ‘내 원통함과 격동함으로 인하여 내가 기도했습니다. 분통이 나서요.’ 그런데 여기서 한나가 알게 된 게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아들 사무엘은 내 집, 내가 장만하려고 하는 내 집, 내 명예와 내 가오를 위해서 필요한 집, 내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할 내 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자식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꺼이 그 사무엘을 하나님께 넘깁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한나에게서 찬송이 나옵니다. 그 찬송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기점으로 해서 인간이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집과 하나님의 집을 분리시키는 작업을 친히 하나님께 하는 그자가 하나님에게 성도요, 복된 자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진짜 인간을 만드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뭔가를 제공해 주는데 그 제공해 주는 것으로 인하여 ‘평소에 부모 육신으로 태어난 내가 뭘 추구하고 있으며, 진짜 하나님 집에 갈 사람은 그 육신이 추구하는 내 집 마련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미 마련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분리되는 그 현장으로서 자기 성도에게 뭔가를 주고 있고 사용하고 있다.’라는 거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사무엘이고, 사무엘은 바로 엘리의 집안을 작살냅니다. 나중에 사무엘에 의해 마지막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등장하는 게 그게 다윗의 집이고요, 그게 사무엘상에 나옵니다. 다윗 집의 특징은 뭐냐? 다윗과 다윗의 후손들은, 아버지가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다윗의 가문을 새롭게 조성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는데 그래서 이 언약을 집어넣는다는 게 뭐냐? 출생부터가 하늘나라의 DNA를 거기다가 심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DNA를 심어버려요. 그러면 벌써 출생부터가 심어놓은 DNA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언약대로 움직이죠.

엘리 집안,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제사하는 것, 그런 율법의 시효가 끝났을 때,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고 시도했는데 그 시효가, 그 테스트가 이미 끝났을 때 인간의 육신 출생이 아니고 처녀에서 나온 아들, 한 아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족보에서 난 아들이, 성령에 의해 태어난 아들이 최후의 아기가 되는 겁니다. 마지막 아들입니다.

그 마지막 아기의 역할은 뭐냐? 그 최후의 아기 출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시작한 일과 마지막 끝장내는 일이, 그 안에서 서로 그 정보를 내통하고 관통하는 일이 한 아기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예수님이 최후의 아기고 처음 아기인데, 그 처음 아기와 최후의 아기가 말씀 안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문제를 냈어요. “소라의 껍데기 안을 실로 연결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 그 껍데기 안이 복잡해서 밖에서 실로 연결하려고 하면 막히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통과를 못 시킨다고요. 다이달로스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 개미 몸에 실을 묶어서 소라 껍질 속으로 집어넣으니까 개미가 알아서 들어갔다가 바깥으로 나오니까 실로써 소라 내부가 연결이 된 거예요. 시작과 끝이 연결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현재 성도 안에 그렇게 조성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 안에다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방식을, 성령을 통해서 그걸 실시해 버린 거예요. 뭐가 가짜냐 하면,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게 가짜에요. 여러분, 일단은 성령을 통해서 시작과 끝을 관통했다고 치고, 관통된 소라의 껍데기라고 치고요. 소라껍질 됐으면 좋겠어요.

그 시작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시작이 창세기 2장 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되고 난 뒤에 뭘 잊어버렸는가? 흙에다가 하나님이 훅 하나님의 입김을,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었다는 사실을 인간이 잊어버렸어요. 인간이 되고 난 뒤에 그 시작점을 잊어버린 거예요.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줄 때 율법안에도 시작과 끝이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요, 히브리인들은 가나안 사람들 말에 의하면 ‘물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히브리인들이 요셉이 죽고 난 뒤에 바로왕이 애굽에서 무려 400년을 살았어요. 400년을 살게 되면요, 완전히 토박이랑 똑같아요.

바로 왕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히브리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어요. 인간이 되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서 내가 사람이 됐다’라는 사실을 누가 알아요? 그걸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냥 “생일 축하합니다!” 그게 시작점인 줄 알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보이는 내가 생겼다는 사실을 누가 그걸 알고 있느냔 말입니다. 어디 윤석열이 알고 있어요? 이재명? 몰라요, 몰라요. 만나봤자 가짜와 가짜의 만남이에요. “내가 왕년에…” 맨날 왕년에, 왕년에. 더 시작으로 가야지, 내가 태어나서 어릴 때 말고, 아니 당신의 존재 이전으로 가야죠, 존재 이전으로!

출애굽기 1장에서 히브리인들이 요셉을 통해서 준 하나님의 은혜를 다 잊어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뭘 했는가? 출생부터 다룹니다. 출애굽기 1장 22절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이게 어려운 이야기죠. 다른 민족은 놔두고 히브리족, 옛날에 바로에게 은혜를 줬던 요셉의 후손들에게만 ‘아들 낳으면 다 죽이고 여자는 살리라’라고 바로 왕을 통해 하나님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이건 뭐냐? 애굽에서 사대 째, 400년 가까이 사는 이들이 애굽 사람과 똑같이 되어서 자기 속에 어떤 부정성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부정성, ‘내가 어떻게 잘 먹고 잘살아도 나는 가짜야.’라는 부정성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살아도 사는 것도 아니고 이건 낭비다.’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게 부정성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바로 왕을 통해서 히브리인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거예요. “너희는 지금 애굽 사람하고 똑같이 놀면 안 돼. DNA가 달라. 하늘나라의 유전자야.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거야. 똑같이 놀고 똑같이 살고, 그러면 안 돼.”

그래도 못 알아듣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로 왕을 통해서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살리라’라고 해서 아예 대를 끊어버리는 부정적 요소가 차고 들어옵니다. 그 부정적 요소가 들어올 때 히브리인들이 난리가 났죠. 그때 레위 지파의 여인이 자기 아들을 숨겨서 기적적으로 건져냅니다.

건져내는데 그 이름이 ‘히브리’와 같은 뜻인데 물에서 건져냈다, 물에서 건져낸 ‘모세’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 세상과 같이 섞이면 안 된다는 것, 유전자가 다르기에 ‘내가 따로 취급할게.’라고,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을 통해 따로 취급하게 됩니다.

그렇게 취급하는데 그 취급하는 방식에 대해서 호응을 못 해요. 왜 호응을 못 하는가? 그 이스라엘이 여전히 마음도 어둡고 눈도 어두워서 눈에 보이는 게 다예요.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엄청 애를 써요.

출애굽기 17장에,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이면 안 된다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아말렉이라는 민족과 전쟁을 일으킬 때 하나님께서 일단은 눈에 보이는, 너희가 익히 아는 방식을 줘요. 10절에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이렇게 산 밑에서 아말렉과 마주해서 전쟁을 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게 다입니까? 아니죠.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을 눈에 보이는 방식과 겸해서 같이 제공해요. 그게 뭐냐? 모세는 산 위에 있는 거기는 어떤 무기도 없어요. 모세는 그냥 지팡이 들고 하늘을 향해 팔을 올리니까 밑에 있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고 “아이고 팔 아프다. 팔이 아프네.” 팔이 내려가면 산밑에 있는 이스라엘이 아말렉에게 지는 거예요.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 17:11)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싸움을 이스라엘 인간들의 양심과 마음 내부에서 벌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어느 쪽이야? 보이는 쪽이야, 보이지 않는 쪽이야?”를 묻는 겁니다.

구약 전체 내용이 그래요. 계속해서 하나님이 보이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쪽을 설명해 주려고 그렇게 애를 써요. 그렇게 애를 쓴다고요. 그건 앞에 있는 홍해 건너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게 하는 데 뒤에 애굽 군사들이 다 따라왔어요.

“앞에 간다, 잡아라!” 난리에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느꼈어요. 보니까 거의 다 따라왔어요. 오도 가도 못해요. 백성들이 모세한테 원망하죠. 그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으로 둘 사이를 차단해서 막아버립니다. 애굽 군대가 거의 다 쫓아 왔어요. 다 왔는데 구름 기둥으로 인하여 그들이 접근이 안 되는 거예요.

두 민족 사이에, DNA가 다르니까, 확실한 차등을 줘버립니다. 그렇게 차등을 주고 이쪽은 홍해 건너가고 저쪽은 구름 기둥 철수하니까 “야, 이제 보인다. 뒤따라가자. 어? 저들이 홍해를 건너갔네? 이거 위험하지 않나? 일단 따라잡자.” 따라잡다가 다 죽었어요, 홍해 바다에서. 이게 하나님의 극진한 친절하심과 사랑입니다. 자꾸 알려주는 거예요.

옛날에 <고스트>(ghost, 1990)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제목으로는 ‘사랑과 영혼’이에요. 그 영화를 제가 젊을 때 송죽극장에서 봤어요. 서울 사람들은 송죽극장 몰라요. 장천동에 자유극장 마주 보고 있었잖아요. 그때 사람이 미어터졌었어요.

그 때 영화 보면서 가슴이 아팠던 것은 죽은 남편이 유령으로 살아있는데 여자는 모르는 거예요. 데미 무어는 그걸 몰라요, 그걸 모른다고요! 살아 있을 때 함께 도자기 구울 때나 서로 좋아했지, 죽고 난 뒤에는 그걸 몰라요. 그래서 죽은 유령 애인이 동전 하나를 가지고 어쨌든 그 낌새, 나 안 죽고 살아있다는 그 낌새, 내가 네 곁에 있다고 하는 그 애타는 것, 영화 보면서 내내 애가 탔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 주님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네가 너를 위해서 살고 너의 일을 하면 그건 지옥 가는 거야. 그건 네 속에 마귀의 광기야. 눈에 보이는 사람은 안 돼.’ 이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7장 19-24절에도 같은 취지가 나와 있어요.

예수님을 살해하는 현장입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거기 관여하게 되었는데 19절에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본디오 빌라도, 눈에 보이는 세력을 가지고 있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확실하게 믿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한테는 전부 다 자기 밑에 있는 부하들이기 때문에 두려움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을 통해서 낌새가 와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낌새가 나옵니다.

“여보, 저 사람 건들지 마라. 어젯밤에 내가 애를 먹었다. 당신이 지금 하지 말아야 할 것, 관여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여한다는 강한 징후가 있는데 그 일에 개입하지 마.” 여기에 그 당당했던 본디오 빌라도, 역사 기록에는 아주 폭력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요, 아주 강한 사람으로 여겨졌는데 갑자기 여기서 두려움이 확 밀려옵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게 다인데 두려움은 어디서 오죠? 요한 1서 4장 17절에 보면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 마음을 노리고 말씀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어떤 일이 발생된다 하더라도 나는 너희에게 제공한다. 네 DNA는 두려움을 없이 만드는 DNA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네 DNA가 하늘나라의 DNA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네가 두려워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탄핵 인용을 하나, 안 하나, 대구 경남 이쪽에서는 지금 두려워 죽겠어요. 저쪽 서울에서도 두려워하고요. 윤 대통령 잘리고 난 뒤에 전부 모가지 다 날아가는 거 아닌지 두려워하고요. 세상 모든 것이 두려움, 두려움, 두려움 그렇게 두려움밖에 없는 이유가, 모조리 다 자기만의 세계에 온 정신을, 모든 혼을 자기만의 세계, 자기 집 장만에 털어 넣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두려움을 자처하는 거예요. 광기를 자처하는 거예요. 지옥 갈 DNA입니까? 그래 놓고 스스로 자기를 책망해요.

약해지면 안된다는 말 대신
뒤처지면 안된다는 말 대신
지금 이 순간 끝이 아니라
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외치면 돼

“약해지면 안된다는 말 대신,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지금 이 순간 끝이 아니라 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외치면 돼~”(나를 외치다. 마야, 2006). 그게 광기 아닙니까. 이게 광기거든요. 광기라는 것은 뭐냐? 내가 남한테 나의 허점과 오점을 들키기 전에 나를 단도리 하는 것이 광기에요. 자기한테 철저함으로써 더욱더 나의 세계가 하자 없고 누수 없게 하는 그것, 그 안에서 내가 왕이 되는 것, 그게 나의 일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교회 와 봤자 그 교회는 가짜 천국이에요. 자기 자신이 가짜인 것을 모르는 데서 나오는 가짜 천국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방해를 받는다? 분노가 일어나지요. 나의 절대적 세계를 당신이 뭔데 왜 방해하느냐고.

그래서 마태복음 27장에서 당당하고 간 큰 이 본디오 빌라도가 무슨 좀생이 같은 짓을 합니다. 24절에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물 담긴 세숫대야 가져오라고 해서 손을 씻어요. 그러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나는 빼달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게 공포고 이게 두려움이에요. 인간은 두려움을 자처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면 한번 따져보자는 거예요.

마가복음 5장에서 우리가 같이 따져봅시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갔는데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요. 장례식장이니까요, 그것도 어린 딸이 죽었으니까요. 마가복음 5장 39절에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여기 보세요. 죽은 아이가 누워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의사가 와서 진단했겠지요. “애가 숨을 쉬지 않네요. 죽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사망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요.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 말고 모든 제자들도 그것을 같이 보고 있어요. 그리고 일가친척과 동네 유대인들이 다 같이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고 내린 결론은, ‘아이는 죽었다’입니다. 죽은 것을 보고 ‘죽었다’ 하면서 인간은 자기가 가짜인 것을 몰라요. 왜? 하늘의 기준이 없으니까. 잘못된 양심, 잘못된 마음이 내린 결론이 ‘이 애는 죽은 것이 확실히 맞다’ 그거예요. 그때 주님께서 합류합니다.

인간의 자기 집 만들기에 하늘의 집이 합류하는 거예요. 40절에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예수님이 합류해서 사람들을 다 보내고 난 뒤에 제자들과 같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것을 보고 잔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다 비웃었습니다.

41절에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죽은 자보고 말을 던지는 것, 이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는 소용없는 거예요. 그냥 위로 삼아 할 수는 있지만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뭘 했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이 어떤 효과가 있고 어떤 결과를 남겼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죽은 자가 알아듣는 말을 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입장이냐?

지금 우리는 살아 있으나 우리를 어느 자리에 어디로 보내야 하느냐? 우리가 이 소녀처럼 죽은 자리에 있을 때나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효과를 내는 거예요. 우리가 죽은 이유는 죄 때문에 죽은 거예요. 죄가 있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예요. 이게 하늘나라 기준이고 법칙이에요.

그런데 죄짓고 있으면서도 자꾸 살았다고 우기니까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밀어내지요. “저리 가!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밀어내는 겁니다. 교회 처음 와서 봉사할 때 위태위태해요. ‘저러다가 한 3개월 만에 떠날지 싶다. 오래 간다고 해도 한 6개월 갈까 싶다.’

저분이, 눈에 보이는 남들 보란 듯이 봉사해서 내 믿음 좋다는 것을 추려서, ‘나 믿음 좋다, 나 믿음 좋다, 나 믿음 좋다’ 하는 그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지, 아니면 죽은 자인데 봉사해야 한다는 주의 지시가 와서 봉사하는지, 이것을 구분하기가 인간으로서는 모호한 거예요.

보통 처음에는 봉사를 곧잘 하다가 나중에는 잘 안 해요. 처음에 우리 교회 나올 때 양복 좍 빼입고 몇 주 동안은 일찌감치 나오잖아요. 6개월도 안 되어서 빼입던 양복은 어디로 가 버리고요, 슬리퍼 신고……, 물론 슬리퍼 신고 오는 경우야 없지만,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예요. 예배 시작 20분 늦는 것은 보통이 되고요.

왜냐하면 하나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어디에 모여야 해요? 내가 생각하는 내 세계에 이미 소유가 되어 있으니까 걱정 없다, 그 말이지요. 나의 세계가 있으면 모든 것이 소유성으로 나타나요.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물어봅시다. 휴대폰을 소지하는 겁니까, 휴대폰과 동행하는 겁니까?

요즘 내 몸이 있어도 휴대폰 없다면 나는 없는 거예요. 휴대폰과 함께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는 주님의 휴대폰이에요. 나 있다고 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휴대폰 용도로써 우리가 있는 겁니다. 주께서 낌새,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보이는 우리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이야기를 다시 해 보면, 예수님이 그들의 눈에 보이는 육체로 있을 때나 그들 눈으로 보기에 없을 때나 주님 입장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어요. 주의 말씀이 있으면 눈에 보여도 계시고 안 보여도 계신 거예요. 나보다 먼저 계시고 나를 휴대폰으로 사용해서 계신 거예요. 왜? 두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두려움이!

어떤 사람은 “그래도 죄지으면 어떡합니까?” 하는데 죄를 없애놓고 사용해요. 죄를 없애서 정결하게 해 놓고 사용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일한 효과로 성령을 통해서 깨끗하게 씻고, 우리의 양심을, 성령을 통해서 죄 있던 것을 죄 없이 한 거예요. 지난 시간에 들었잖아요. 죄를 기억지도 아니한다고요(히 8:12/10:17).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는 분의 소지품, 휴대폰 이게 바로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내가 성도인지 아닌지를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죄 용서해 놓고 벌을 받게 해요. 희한하지요. 여러분, 사는 게 벌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특징은, 그 DNA가 이미 죄 없이 해 놓고, 오늘 죽어도 천국 가게 만들어놓고 이 세상 온갖 벌은 다 받아요. ‘이래도? 날 그만 떠나지 왜? 이제 네 고향 찾아가지? 내 고향 말고, 주님 고향 말고.’ 하나님의 집은 안에 부정성이 들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21장 22절에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어린양의 성전, 하나님의 성전 곧 어린양의 성전. 어린양이라는 것은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사람 손에 죽었다는 이 부정성을 토대로 하는 겁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행 4:11)이 되는 집이 되는 거예요.

부정성을 품어야 그게 하나님의 천국이 돼요. 그런데 교회 온 인간들이 ‘여기 잘난 나 천국 보내 달라’고 하는 거예요. 부정성이 없어요. 마태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왜 천국 가느냐 하면, ‘나는 완전히 파괴되었다’라는 그 부정성, ‘내 것이 아예 없어졌다’라는, ‘나는 인생 완전히 망쳤다’라는 것, ‘내 집, 내 고향, 내가 건설하고 내가 장만한 내 집이 완전히 망했다’라는 그 부정성을 품었기에 구원받는 거예요.

돌아온 탕자가 부정성, ‘내가 더러운 짓을 했다’라는 그 부정성을 품고 있기에 아버지에게 아들이라는 것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잃어버린 동전도 그러하고,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양 한 마리도 그러하고요. 왜 안 부러지려고 하고, 왜 안 부서지려고 합니까?

우리가 평생 노리는 것은 내 집 마련이잖아요. 그거, 그거 가짜고 말씀이 와서 그걸 무너뜨릴 때, 부정적으로 무너뜨릴 때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아, 내가 또 이게 진짜인 줄 알았구나.’

달리다 굼, 부활하는 이유가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관된 주의 일 때문이에요. 죽은 자로 만들지 않으면 살려냄도 없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죽은 자가 되는 방법은 갑자기 자살하고…, 그런 식이 아니에요, 그 방법이 아니고요.

예수님의 몸 안에서 시작과 끝이 서로 연결되어서 활동하잖아요. 그것이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가 돼요. 하나가 되면 하나님의 영을 부어서 된 인간만 인간으로 간주하고, 그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만이 진짜 마지막에 천국 가는 DNA, 천국 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몸 하나를 관통해서, 그것을 말씀화 해서 우리에게 다 보여준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말씀 전체가 한꺼번에 응집된 채, 시작과 끝이 한곳에 모인 채로 우리에게 온다면 예수님이 겪었던 그 체험이 우리에게서 재생되고 반복, 반복, 날마다 revival 되는 거예요.

자, 이렇게 되니 그 기능과 역할…,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오늘 본문 10장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성령을 통해서 ‘그날’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지시를 눈에 보이는 너와 나를 통해서 구현해 내고 있다는 이 일에 저와 여러분이 좀 봉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참석하는 게 봉사에요. 왜? 참석하는 게 힘들어요.

일단 자동차 기름값 들어가지요. 전기차는 전기세 들어가지요. 시간, 내 세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할 시간을 따로 떼 내서 그걸 포기를 해야 하는 그 부정성, 부정성이 또 들어가요. 그 부정성, 내 일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안 오려고 했는데도 왔다는 그 부정성이 모여서, 주님께서 죽은 자를 어떤 식으로 이 땅에서 휴대폰으로 사용하는지를 알리는 겁니다.

모이게 되면 뭘 하는가? ‘모여서 정치 이야기나 하고 그걸로 끝나던데 모여서 뭘 할 것인가?’ 주님이 주시는 벨 소리, 그때는 무음이나 진동으로 하지 않고 주께서 벨 소리를 확 키워서 들리게 하는데 그것은 뭐냐? “내가 하나님께 벌받는다고 얼마나 짜증을 냈는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그런데 말씀으로 당했다!” 따리리리리링! 이게 벨 소리 아닙니까!

“나도 나밖에 몰랐는데 당했다.” “나도, 나도 당했다.” 그 부정성이 모여서 어린양에 초점을 맞춰서 ‘십자가에서 이미 죄를 기억지 아니한다.’라는 것을 알 때 그 마음은 깨끗한 마음, 온전한 마음, 온전한 양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가짜 천국 아니고, 진짜 천국은 모임으로서 발현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처음에 봉사 좀 하다가 남들 다 안 하니 혼자 쪼다처럼 느껴져서 바보 안 되려고 요령 부리는, 그렇게 해서 챙기는 것인 그 나의 세계가 얼마나 심각하게 거짓이고 가짜인 것을 기쁜 맘으로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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