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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26강-레바논의 최후(슥11;1-3)이근호140216

아빠와 함께 2014. 2. 16. 16:55

레바논의 최후(스가랴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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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2-16 16:10 
레바논의 최후

2014년 2월 16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1-3

(11:1)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11:2)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쓰러졌음이로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들아 곡할지어다 무성한 숲이 엎드러졌도다

(11:3) 목자들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들의 영화로운 것이 쓰러졌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쓰러졌음이로다

구약에서 특정 나라의 등장은 ‘현실성’에 관해서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와 관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특정 나라가 실제로 이 역사 속에 있음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명함이 천국의 분명함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도리어 훼방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 나라가 분명히 있듯이 천국도 분명히 있습니다.”는 식으로 말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존 나라의 현실성은 그 ‘진행’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뭔가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고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 있음이 인간들로 하여금 매일의 삶이 그 있음으로 계속 두려움에 싸이게 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완성에서 미완성으로 계속 진행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불안정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속해 있는 나라가 ‘없다’고 말할 수는 입장입니다. 이로서 인간에게 있어 두려움이란 운명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과연 이 운명에서 벗어날 위인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레바논의 등장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레바논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고 믿고 의지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 당시 사람이나 오늘날 사람에게 있어서도 이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나라이기에 내가 사랑하고 내가 지켜야 하는데 그것만이 삶을 그나마도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이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나라 있음’은 아무도 부정 못할 확실함에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비록 늘 두려움이 피어난다고 할지라도 소속된 사람들에게 가치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있음이 확실하냐 아니면 나라 있음이 확실하냐 라고 했을 때, 나라 있음이 확실합니다. 최종 확실성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몸 딛고 사는 이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나라 중의 하나인 레바논이 오늘 본문에 보면 망한다는 겁니다. 레바논 나라의 특산물이자 주요 수출물은 백향목이라는 겁니다. 건축에 있어 이 목재만큼 뛰어난 목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레바논은 ‘백향목’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집니다. 만약에 그 나라에서 백향목이 홀라랑 타버린다면?

이는 그 나라 입장에서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레바논의 백향목이 불타버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곧 나라가 망한다는 말입니다. 레바논을 멸망케 한 나라는 역사적으로 바벨론 제국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레바논을 멸망케 한 그 제국도 다른 제국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이렇게 되면 뭔가 ‘있음’은 결국 소실되고 소멸될 수 밖에 없는 자체적인 법칙 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이란 필연적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없은 상황이 되려면 인간들이 기대어 사는 이 나라들의 있음을 근거로 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레바논이 등장한 것은 신약 시대에 다른 나라의 등장을 언급하기 위함입니다.

그 나라는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있음은 그 안에서 더 이상 두려움을 발생시키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사라지거나 소멸될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제국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에서 인간들이 믿고 의지하는 소실된 나라로서 레바논을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나 인정하고 누구도 이의 걸지 않는 근거, 곧 분명 이 세상 속에는 이러이러한 나라들이 있고 그 후속된 나라들은 그런 나라들을 바탕으로 계속 등장했음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정으로 두려움이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8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세례 요한은 언급합니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발언을 왜 세례 요한은 외치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나타났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그것도 늘 보여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보게 해달라고 요청해도 나타나지 않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나타났다는 겁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은 두려움이 없는 인생이 이제 시작됨을 알려줍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머리는 권력자의 접시에 담겨서 그 최후 모습이 만인에게 공개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죽음이 도리어 보는 이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게 됩니다. 죽은 세례 요한이 두려움이 아니라 유일한 현실이라고 붙잡고 있는 자신의 나라에서 나온 권력사용의 결과가 두려운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느 나라를 붙잡아야 구원도 얻고 두려움없는 여생을 보낼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그 모든 나라를 모두 다 망하는 쪽으로 몰아붙이시는 식으로 나타난 작용이 곧 ‘독생하신 예수님의 작용’입니다. 이로서 인간에게 있어 확실한 현실성이란 그 폐기로 인하여 ‘예수님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활용당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천국을 해변가에서 떨어져 있는 어느 섬이라고 생각해봅시다. 해변가에서 섬을 바라보기만 하고 가지 못하는 자들이 해변가에서 자기 마음대로 온갖 아이디어를 끄집어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열심히 해서 만들어낸 ‘믿음’으로 간다는 자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간다고 할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런 믿음을 간직하고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신적으로나 정신으로 점점 심약해지기 때문이요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잊고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해변가에서 바라보이는 그 섬을 아무리 세세히 관찰하고 탐구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큰 파도가 덮쳐서 섬을 가보겠다는 열의에 찬 어떤 이를 휘감아 덮쳐버리고, 파도에 실종된 그 인사가 어느날 눈을 떠보니 벌써 파도 에너지에 실려서 그 섬에 도착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파도의 힘입니다. ‘이미 독생하신 하나님의 나타남’의 위력과 계획을 가로막을 위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참으로 천국에서 지금 살고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모든 나라를 계속해서 무너뜨리는 그 하나님의 업무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2-18 07:06 
26강 슥11장1-2(레바논의 최후)140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1장 1절부터 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3페이지입니다.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 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지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레바논 하는 것은 나라 이름입니다. 지금도 레바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옆에 나라가, 이스라엘은 지중해와 만나거든요. 지중해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스라엘 지나서 사우디아라비아 가기 직전에 레바논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가 거기에 있고, 그 나라가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는데, 그 사실이 스가랴 11장에서 레바논아 하고 지역 이름을 이야기 할 때, 뭐 목회자나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보면서 특정 나라가, 이스라엘 말고 특정 나라가 이렇게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해석을 하게 될지 난감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 현실감이 뚝 떨어져요. 구약에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있다. 레바논이라는 나라 있는 것 하고 내가 천국 가는 거하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관계를 이어주는 단계가 보통 많은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레바논 하면 그냥 우습게 보고. 레바논을 우습게 본다는 것은 성경 자체를 우습게 보고 그냥 모르겠다는 식으로 훌쩍 넘어가 버리죠. 로마서나 요한복음이나 갈라디아서, 요한복음, 마태복음은 기억나는데 스가랴는 잘 기억이 안나죠.

그러면 이것을 설명을 해드릴텐데요. 설명을 하면서 이 본문 뿐만 아니라 나머지기의 나오는 본문, 여러 가지의, 이스라엘 블레셋 모압 암몬 나오거든요. 제가 설명해드리는 원리로 파악하게 되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것입니다. 나라가 등장한다는 것은, 신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고 했을 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나라가 있다 하면옆에 일본 있고 북쪽에 북한 있고 서쪽에는 중국이 있고 대한민국은 여기 있고. 분명히 있잖아요?

그래서 한번 따져 보자는 겁니다. 나라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까? 신이 있다는 것이 더 현실감이 있습니까? 우리는 믿는다고 행세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분명히 있다고 우기지만, 하나님이 안보이니까 자꾸 우기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어! 어떤 사람이 만약에 우리한테 와서 “목사님 미국이 있어요. 미국이 진짜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뭐랬어요? 뭐랬는데.” “아니 진짜 미국이 있다니까요.” 태민이 같은 어린 아이가 와서 신기한 듯이 어른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 엄마 진짜 있어.” 하면 “누가 뭐랬는데 그래 그래 진짜 있어.” 이렇게 하잖아요. 미국이라는 나라가 진짜 있어. 뭐랬나. 우리는 그걸 미국이나 영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어요. 너나 나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걸 새삼스럽게 믿습니다 하면서 쌍시옷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있다는 이 말은 아, 이것 증거대라고 하면 증거댈 수가 없어요. 증거를 못대거든요. 그래서 “나는 니와 달라.” 하는 우기는 마음이라도, “너는 안 믿지만 나는 믿어.” 해서 추가적인 어떤 지식을 확보한 척이라도 할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신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는 말은 그만큼 이 사회에서는 먹혀 들어가지도 않는 소리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이것을 반대로 이야기 해놓았습니다.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이렇게 나오죠.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이것을 제가 처음 대할 때는, 아 세례 요한이 바른 소리 하는구나. 하나님은 본래 본 사람이 없고 아무도 볼 수도 없는 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했구나 하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가만히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요한이 말하기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말한 것은 아! 이거는 충격적이다. 원래 하나님은 안 보이는 것이 맞잖아? 그치? 라고 제가 받아들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본 사람 없죠?” “예.” “만난 사람도 없죠?” “예.” “아무도 본 사람 없죠?” “예.” “다 그런 줄 알죠?” “예.” 그런데 나타났어요. 그런데 나타났거든요. 아! 이 세례 요한이 맞아 죽어도, 사람한테 목 베어 죽어도 세례 요한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조금도 후회하거나 좌절할 분이 아니구나를 알 수 있어요. “안 봤지? 안 봤지? 나 봤거든.” 이러면 목숨이 열 개 인데 열 개 다 달아나도 괜찮아. 나 죽어도 괜찮아. 그런 뜻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 그지? 우리 확실하지? 우리 다 동의 했어? 이거 완전히 다 정해진 거야? 하나님 본 사람 없는 거야? 분명하지? 이유 없기? 분명하지? 나 봤거든. 나타났거든.

결국 성경에서 이 말은 세례 요한이 그런 말을 할 때, 그 느낌은 뭐냐 두려움 없음입니다. 두려움 없음.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역사가 진행 한다는 뜻입니다. 역사가 진행한다는 뜻은 성경을 덮고 다시 여러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시면 여러분들의 일과가 내일 또 시작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밥은 대충 빵으로 때우고 후다닥 대충 찍어 바르고 회사에 나가야 되고. 일은 진행되는 거예요.

일이 진행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두렵다는 것입니다. 두려운 거예요. 또 무슨 사태가...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떤 사태가 기다릴지. 깜짝 깜짝 경귀 일으키듯이 무슨 일이 또 터지면 안 되는데... 그래서 자녀분들한테 전화 하잖아요. “야야! 꿈자리가 시끄럽더라, 너 오늘 낮에 행동 조심하고 차 몰고 나가지 마라. 꿈자리 사납더라. 니 꿈은 개꿈이지만 내 꿈은 맞는기랴” 자꾸 전화하고 걱정하는 것이 뭐냐하면 두렵다는 것이고요. 두려움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은 이게 마무리가 안 되고 이게 진행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큰 탁류가, 홍수가 지금 진행 상태에 있는데 그 진행 상태 중에 하나가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레바논은 천국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천국이 아니지만 미국 있고 일본 있고 필리핀 있고 인도 있고 우리 알잖아? 마찬가지로 레바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신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되 그래서 신에 대해서 있느냐 없느냐 대해서는 누가 왈가불가 할 문제이지만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왈가불가 할 사항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분명히 하나님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레바논은 있다. 거기서 문제가 끝나면 괜찮은데. 레바논이 있음으로서, 또는 우리 이웃, 레바논이 있는 것만 아니고 이스라엘이 있음으로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뭐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정 생활이나 직장 생활에서 힘들 때 어떻습니까? 혼자 있고 싶죠. 아무리 애들이 귀여운 거 맞아요. 귀엽지만 엄마가 몸이 아플 때는 애들을 내 대신 누가 좀 돌봐줬으면. 저리가 저리가 하잖아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원숭이 보니까 그러대요. 귀찮으니까 자기 새끼를 발로 차버리더란 말이죠. 뭐가 진행되고 뭐가 있다는 자체가 두려운 거예요.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 끝나버렸어요. 이것은 뭔가 진리라는 것은, 정답이라는 것은 시간이 흘러 봐야 차츰 뒤에 나온다고 뒤로 미루었던 그 정답이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므로 말미암아 해답을 다 쥐고 있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 곁에 먼저 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버리면 그 분이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고 하늘 나라, 천국을 몰고 가지고 나타나셨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느냐 하면 레바논에 살고 있고 레바논 옆 나라에 살고 있고 레반논 건너 건너에 살고 있게 되면 독생하신 하나님 나타나신거, 두려움 없는 그 천국과, 두려움을 유발시키는 지금 우리가 땅에 속해 있는 나라와 이게 대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레반논 언급이 나온 겁니다.

구약 성경에 레바논 하나 나오는데 이렇게 사설이 길어요. 특정 나라가 나왔다는 이 말은 그 특정 나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니는 지금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그야 대한민국이죠.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하나 못딴 대한민국이죠. 짜증나. 중계방송 한 거 시간 다 물어내. 빙상연맹 홈피 다 마비 됐잖아요? 짜증나서요. 남은 게임은 하나 밖에 없는데 그거 못따면 또 두려워. 자, 라인에 서시고 훅 호루라기 불면 자 출발. 그 자체로도 두려워요. 보는 사람도 두려운데 하는 사람은 오죽 두렵겠습니까?

세상은 모든 것이 두려워요. 메달 못따게될까 싶어서. 따고 나면 당연히 땄지. 못따면 두려워요. 안현수가 또 메달 가져갈까 두려워요. 내가 관심두는 일이 내 원대로 내 뜻대로 내 목적대로 기대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요. 우리는 두려움을 이렇게 온 몸으로 받아 가면서도 이 땅을 떠날 줄도 모르고 그래도 붙잡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다 라는 생각으로 붙잡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성경은 말합니다. 레바논은 이럽니다. 레바논은. 니가 땅을 붙들고 있는 만큼이나 니하고 똑같이 땅을 붙잡고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레바논이라. 그런데 레바논의 운명이 어떻게 된 줄 알아? 라고 성경은 스가랴서 11장 1절에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레바논의 최후예요. 최후라니까요. 레바논의 최후. 레바논이, 어떤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끝장났다. 그러면 끝장나든 끝장 안나든 나하고는 상관 없어요.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성경에서 레바논이 나온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나온다는 말은 레바논이 멸망했다 할 때에 우리는 레바논이라는 나라를 남의 나라로 여기지 말고 내 나라로 여기자 이 말입니다. 레바논의 최후로 보지 말고 대한민국의 최후라고 볼 때, 레바논 그 나라가 왜 망했습니까? 라고 물으면 똑같은 물음으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왜 망해야 되는데요? 라는 같은 질문을 유발하라는 말입니다.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세례 요한은 어느 나라를 위해서 살았다? 세례 요한은 유대 나라한테 오히려 목이 잘려서 접시에 담겼어요. 그만큼 세례 요한이 내뱉은 모든 발언들과 생각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본인이 더 살기 위해서 버티기 위한 발언들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나는 내 갈 나라 따로 있거든. 내 본향은 따로 있어. 그러다가 잘렸잖아요.

세례 요한의 운명은 사실은 맛보기로서 앞에 있는 예수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 세례 요한이 먼저 온 거예요. 그래서 같은 운명의 길을 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방송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새로운 드라마 제목이 <천상 여자> 라는 제목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는 거예요. 드라마 뭐 저는 관심도 없어요. 별에서 온 그대가 19회 두 회 남았는가. 오늘 왕가네가 마지막인지 그것도 관심도 없고. 관심도 없어요. 관심도 없는데, 천상 여자라는 말을 쓰는데 뭔가 한글법에 어긋나는 것 같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천생 여자가 맞다는 말입니다. 천생 여자가 뭐냐면 너는 하늘에서 태어난 여자, 여자 중에 가장 여자다운 여자다. 너는 하늘에서 태어난 여자 정도, 천생 여자다는 이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천생 천국 백성이예요. 예수님에 의해서 앞당겨서 보내졌기 때문에. 천생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천국 외에는 다른 나라를 나라 깝으로도 여기지도 않습니다. 메달을 백 개를 따든, 몇 등을 하든지. 그거는 궁극적으로 관심이 없어요. 메달을 따지 않아도 두렵지 않아요. 무섭지가 않아요.

레바논이라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느껴야 될 점은 뭐냐하면 레바논이 어떻게 되었다 고소하다고 하지 말고 레바논이라고 할 때, 이미 우리는 레바논 뿐만 아니고 이미 우리가 신경 쓰고 있는 이 나라도 레바논과 똑같은 운명이다. 그런데 어떤 나라가 왔을 때는 최후가 되어도 괜찮다고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으로 이 레바논을 언급을 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 그러면 됐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레바논 이야기를 왜 하느냐. 바로 우리가, 레바논이 자기가 붙들고 있는 방식으로 오늘날 우리가 일요일 지나고 내일 되면 또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 레바논 나라, 대한민국이 존재 이유가 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레바논에게 별명이 붙었습니다. 별명이 뭐냐 백향목. 백향목이 집을 짓는데 아주 좋은 나무다는 그것을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제가 어릴 때,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하고 오래 동안 함께 살았는데요. 할아버지가 입만 여시면 하시는 단어가 있었어요. 집은 취향목. 취향목이 최고라는 거예요. 그래서 취향목? 취향목이 어떻게 생긴 나무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봉화 춘향에 가니까 취향목이 딱 있는 거예요. 춘향 지방에 나는 소나무가 춘향목인데. 우리 할아버지는 맨날 이것을 춘향목이라 하지 않으시고 취향목, 취향목이라고 하셨어요. 백향목입니다. 이게 춘향목 또는 금강 소나무. 석포로 넘어가는 길이거든요. 봉화에서 춘향 거쳐서 석포. 이번에 눈 1미터 온 석포. 그 동네 자주 갔었습니다. 올해도 갈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자주 갔었습니다.

그 좋은 백향목이 레바논의 특산물로 나왔습니다. 레바논은 하나의 자긍성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레바논하면 온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이 역시 나무는 백향목이 최고야 레바논 나무가 최고야 그래서 수출을 했고 항구가 있는 두로 지방으로 수출을 했다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두로지방. 그렇게 비싼 목재들을 그리스 유럽 쪽으로 수출을 했고 온 사방으로 중국까지 갔는지 모르겠지만 수출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무 베다가 돈벌이 하니까 가만히 놀고도 강대국이, 부자가 된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우쭐대겠습니까?

레바논이 아무 두려움이 없는데, 만약에 어떤 것이 두려움이 있느냐면 자기를 먹여 살리는 소나무가, 요새 말로하면 취향목, 춘향목이죠. 그게 만약에 불타버리면 레바논 나라가 날라가 버리죠.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리죠. 그렇다면 레바논이 우쭐대고 교만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나무가 있는 조건하에서만 우쭐대는 거예요. 그 범위 내에서.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이 땅의 인간이 약점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약점 잡혔습니까? “아이구 이럴 것 같으면 내가 괜한 소리해서 목 잘렸다.” 이렇게 약점 잡혔습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났느라 나는 쇠하여야 되고 그 사람은 흥해야 된다고 했던 사람이 무슨 약점을 잡힙니까? 약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데요. 죽이라 죽이라 하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 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지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레바논에서 최고로 좋은 나무가 백향목. 그 당시의 취향목, 춘향목이예요. 그런데 그보다 못한 나무도 완전히 전부 다 불로 싸질러버리니까 나라 하나 하나가 차츰차츰 이 땅에서 없어지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하면 바벨론 제국이 와서 주변의 나라를 다 불살라서 점령해 버렸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유다 나라도 그렇게 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레바논 언급하면서 결국에 유다 나라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유다 나라야 유다 나라가 너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뜻이예요. 니가 지금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하나님 자체가 좋으냐? 아니면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는 백향목이 가득한, 이런 잘 살았다는 이것이 좋으냐? 만약에 니가 소유한 재산이 좋다면 너는 구약에 나오는 레바논 망하듯이 너도 지금 곧장 망하게 될 것이다는 말씀으로 본문 설교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런 말씀을 주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구원되는 문제로서 이제는 구약이 신약과 신약에 와서 그 해답을, 그 해결점을 얻어 챙겨야 되겠죠. 구약에서 망하고 망하고 이스라엘도 망하고 유다도 망하고 유다를 망하게 한 바벨론도 망하고 망하고 망하고 하면서 점점 더 어디로 가느냐 신약 시대에 접근해 가는 거예요. 구약에서 망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망할 때 그 바벨론인데, 그 바벨론이 망했거든요. 바벨론은 세계 최고다. 세계 최고인데 바벨론도 망해 버렸다. 도대체 누구야?

레바논을 망하게 한 바벨론은 뭐고 또 바벨론도 망하게 한 분은 도대체 누구냐? 그 분이 바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왜 망하게 하느냐? 그것은 바로 구원을 말씀하게 하시기 위한 구원을 드러내게 하시기 위해서 망하게 하셨다. 이런 것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될려면 여호와를 믿어야 되겠네요 이렇게 나오죠. 그게 함정이고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안양 공부에서 우리 전용열 목사님이 쉬는 시간에 이런 질문을 했어요. 어떤 분들이 자꾸 전용열 목사님한테 질문을 하는 거예요. 복음에 대해서 질문을 하니까 그 질문 가운데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셨어요. 어떤 교인으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았으니까. “전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마음을 낮추어서 구원을 받는다는데 그게 맞습니까?” 라고 어떤 분이 질문을 했겠지요. 아니, 아니 어떤 분이 이렇게 먼저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은 믿기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겠지요. 전목사님이 “내 믿음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라고 답변을 했겠지요.

그런데 답변을 하고 가만히 보니까 그 답변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의문점이 발생된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 내 믿음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라는 그 믿음을 내가 간직하고 있으면 구원됩니까? 라는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일단 내 믿음은 엉터리니까 빼고 이건 애초부터 아닌 것으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주님 주신 믿음을 어떻게 내가 관리하게 되면 그 주님 주신 믿음으로 내가 구원됩니까? 할 때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됩니다 라고 답변해 버리면 문제가 큰 문제가 생겨요. 그 믿음을 내가 나중에 치매 걸려서 내가 유지 못하고 계속 갖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내 믿음은 애초에 놓쳤지만,이제 뭐마저 놓치냐면 주님 주시는 믿음마저 날라가 버리고 놓쳐 버리면 나는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라는 딜레마, 이런 난점에 빠져 버려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이렇게 해드렸죠. 뭐냐하면 저기 섬이 있고 이쪽에 해변이 있고 해변 앞에 섬이 있다고 합시다. 다리도 없고 배도 없어요. 근데, 섬이 천국이예요. 해변가는 이 땅이고. 이 땅에 있는 내가 저 섬에 어떻게 가느냐 이 말이거든요. 나는 절대로 갈 수 없어. 나는 절대로 헤엄쳐도 못가. 파도가 세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저 섬, 천국에 못가. 그런데 주님 주시는 믿음만 있으면 나는, 헤엄칠 수 있습니까?

주님 주시는 믿음 가지고 헤엄쳐서 가면 도달할 수 있습니까? 내 믿음 가지고는 안 되는 건 물론이고 주님 주신 믿음 가지고도 안 되는 건 물론이예요. 섬은 여전히 내 앞에 있고. 나는 맨날 생각하는 건 “저 섬에 가는 건 내 믿음이 아니고 주님 주시는 믿음으로 가는 거야.” 라고 맨날 생각만 해야 그냥 해변가예요. 해변가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모래바닥에 안절부절 하면서 두려워 하면서 “근데 이 믿음 내가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하지?” 괜히 또 두려운 거예요. 아까 두려움 이야기 했죠?

내 자리는 항상 두려움을 유발시키는 자리예요. 늘 두려울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혹시 갔는데 주님 주신 믿음이 아니고 니 믿음이네 라고 하면서 빠꾸시키면 못가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섬 있고 여기 해변가 있고. 해변가 맞은 편에 섬이 있을 때는, 인간의 구원론으로 접근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론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파도를 쳐요. 파도를 치는데, 내 믿음일까? 주님 믿음일까? 하고 있는데 뭐 퍽 하고 파도를 쳐요. 파도를 쳐서 정신을 잃어 버리고 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저쪽 섬에 있는 해변가에 도착해 있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야지 그리스도 빼놓고 자기 구원론, 자기 믿음론 붙들고 있으면 백날 붙들어 봐야 구원 못됩니다. 내 믿음론, 내 구원론 따로 간직하면 안 되고 그것을 어디에다 흡수 통합해서 없애버리냐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나마저 내 구원마저 그리스도 일로 종속되고 포함을 시켜야 된다 이 말이죠.

레바논에 있어서의 멸망했다는 이 소식에 대해서 우리는 레바논이 망했다 대한민국이 망했다 걱정하지 마시고 주께서 하신다면 망해도 좋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하신다면. 부자야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신다면, 우리는 자기 것을 팔고 따라 갈 수 없지만 주께 허락하시면 이건 안 팔아도 주님만 보이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재산 팔고 주님 따라 갈 필요가 없고 그 있는 재산이 몇 억이 되어도 괜찮아요. 십 억이 있어도 괜찮아요. 십 억이든 뭐든 주의 돈이고. 드리든 갖고 있든 하여튼 모든 것이 전환, 소유권이 다 바꿔져 버리면 그 자체가 이미 그쪽 섬에서 지금, 이쪽 해변이 아니고 저쪽 해변에서, 천국에서 지금 거닐고 있는 나그네하고 산책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성령받은 상태에서 구약을 해석해야 됩니다. 아, 인간은 저래서 저렇게 하면서 두렵고 두렵고 또 두려워 하면서 매일 살아 가는구나. 나도 그렇게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데 어 이게 웬 은혜인지. 세상 자체가 우리에게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이 모든 것 자체도 주께서 파도가 덮치는 결과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제가 언젠가 이탈리아에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요, 거기 폼페이라는 옛날 도시를 가 본 적이 있는데요, 폼페이 도시가 화산재로 새카맣게 덮혔어요. 그걸 보고 느꼈어요. 바로 저게 뭔가 덮쳐 가지고 색깔이 빨강색이든 노랑색이든 이제는 표도 안나요. 화산재가 덮쳐 온통 시커매요. 벽도, 길바닥도 모든 것이 시커매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덮쳐버리면 너희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독생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느니라는 그 발언 하나로 목이 잘려도 두렵지 않는 그 소속이 바로 저쪽, 이미 천국섬에 소속된 세례 요한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만 레바논 나라나 우리 나라나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믿음도 아니고 내가 갖고 있다는 주의 믿음이 아니라 참으로 주께서 일으키시는, 날마다 주께서 진행시키시는 그 작업 속에 우리가 화산재처럼 덮쳤습니다. 덮치고 보니 우리의 본향은 천국임을, 주께서 끌고 가고 계심을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이 세상이 말씀의 천지라는 사실,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말씀 자체의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