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강 슥11장 4-10(악한 목자와 양)1402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1장 4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2페이지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산 자들을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새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여기에 나오는 이 내용은 이스라엘 유다 나라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죠. 하나님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유다 나라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 하죠. 이거 남의 이야기잖아.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게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나와 있는 그대로 우리 인생에다 판박이처럼 갖다 붙여 버려요. 판박이 알지요? 초등학생 여자애들이 갖고 노는 배우들이나 탈렌트,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들 사진들을 종이에다, 자기 노트에다 갖다 붙이면 딱 붙잖아요. 요걸 그대로 떼어다가 우리 인생에다 딱 놓아 버린다 이 말이죠. 딱 놓아 버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우리를 구원의 능력이 돼요.
어깨 아플 때 파스 붙이면 시원하잖아요? 그게 시원하게 하는 능력이, 기운이 나와서 그렇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파스를 붙여 주시는 겁니다. 그 파스 중에 하나가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스가랴서 11장 내용입니다. 뗄 생각 하지 마세요. 떼면 안 됩니다. 딱 붙이고 있어야 돼요. 그럼 붙여 놓은 파스가 시원한 파스냐 별로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선배들이 망했던 이야기를 우리 어깨에다 파스를 갖다 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선배들이 망한 이유가 뭐냐하면 이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를 못한 거예요.
그러면 선배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 못했다 하니까 그럼 그들이 왜 이해를 못했을까? 거 참, 이해하면 될걸 왜 이해를 못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선배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 못하기는 마찬가지예요. 왜 이해 못하는가? 이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아가 이야기를 해드리면, 성경에 아가라는 것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사랑이야기입니다. 거기서 나온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예요. 잘 들어 놓으세요.
상대방에게 반해 버리면 어떤 조건도 상관이 없다 이렇습니다. 사람이 누구한테 빠져들면 그 사람이 어떤 짓거리를 하든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든 어떻게 하든 모든게 그렇게 아무렇지가 않아요. 우리가 궁시렁 궁시렁 거리고 불평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반할 수 있는 대상자가 없어서 그래요. 푹 빠진 대상자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져 버리면 우리가 보기에 사랑하는 분의 조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그쪽도 강도든 창기든 묻지를 않아요. 주님께서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면은 내가 주님이 어떻게 인생을 꾸려가도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께 반해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과 사랑 사이에 서로가 반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조건을 문제 삼지를 않아요.
요즘 현대인들은 뭔가 반한 구석이 없어요. 항상 간만 보고 가요. 마트에 가면 음식 시식하는 것처럼 뭔가 푹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불안해요. 언제 또 배반당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차원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이 차원을 역사적 차원이라고 먼저 말씀 드릴께요. 역사적 차원이라고 먼저 말씀 드리는 것은, 역사적 차원이 먼저 깔려 있어요, 깔려 있고 영적 차원이 있기 때문에.
신약에 가면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하는 것은 신약에 나온 이야기이고. 구약에서는 우리 선배들,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에서는 그냥 뭐 무조건 우상 섬겼어요. 우상이 그냥 좋은 거예요. 오늘 이사가는 날, 손이 없는 날이라고 해서 이사 많이 갈 거예요.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유혹에 같은 동질성을 느끼고 같이 죽이 잘 맞고 말이 잘 통합니다. 그래서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역사적 차원부터 먼저 깔아 놓고 그 다음에 영적 사건을 언급, 차원이 높아지거든요.
역사적 사건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부대낀다는 것은 참, 우리의 육신적인 몸으로서는 상당히 괴로운 일입니다. 미국에 제이미 쿠커라는 목사님이 계신데, 평소에 목사에다 “님”자 잘 안 붙이지만 이 분에다 “님”자를 붙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존경스러워서가 아니고 그 하는 일이 존경스러워요. 그 분이 존경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 하는 일이 존경스러운데 그 분이 뭐라고 하였느냐면 “성경대로 독을 마실지언정 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분이 뭘 했느냐면, 이 분 별명이 독사 목사인데 평소에 독사하고 같이 살았어요. 세 마리의 방울뱀과 두 마리의 황갈색의 독사하고 같이 살면서 그걸로 전도를 했습니다. “봐라 성경말씀 좀 믿어줘. 나 독사하고 살아도 안 죽잖아. 물려도 안 죽잖아. 그처럼 성경 말씀 마가복음(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막16:18)에 독을 마실지라도 성령받은 사람만 이렇게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인데, 왜 요즘 사람들은 말씀을 안 믿느냐? 나 봐라 손수 시범 보여 줄게. 나 독사하고 살아도 이게 안 물리고 물려도 안 죽잖아? 이게 믿음이다. 이 믿음대로 살면 여러분 죽어서도 천국 갈 수 있는 믿음 됩니다.” 하다가 독사한테 물려 죽었어요. 독사한테 물렸거든요.
그래서 구급차 불렀는데 구급차를 거부했습니다. 자기는 믿음 있다고 우겼다가, 우겼는데 구급차 부르면 안 되잖아요. 구급차 부른지 한 시간 만에, 독사한테 물린지 세 시간 만에 죽었습니다. 이제 존경스러운 이유를 알겠지요? 역사적 차원에서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멋진 모범적인 목사님!! 그 목사는 독사 물려도 안 죽는다는 자신한테 반해 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반해 버린 것이 아니고 자기 인생에 반해 버린 겁니다. 자기 인생을 내세웠고 자랑스러워 했고 그런 겁니다.
바로 이런 독사 목사, 이미 돌아가신 제이미 쿠커 목사님이, “님”자 붙입니다. 그 기능이 아주 멋진 기능을 시범으로 보여 주었어요. “아, 믿음 있어도 물리면 죽는구나!” 아주 멋진 예를 보여 주었거든요. 이러한 기존의 역사적 차원에서의 요런 믿음이 결국은 유다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오해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게 되면 우리 나라, 유다 나라를 하나님이 지켜줄 줄 알았어요. 망하라고 주었는데, 하나님이 망하라고 줬거든요. 오늘 정답을 미리 말씀 드릴께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뭐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요 율법이 실패한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올라 옵니다. 십자가를 그냥 들이대지 마시구. 십자가 압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십자가를 그냥 들이대지 마시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냥 예수님 태어날 때부터 쿵닥쿵닥, 예수님의 아버지가 목수니까 십자가를 오죽 잘 만들었겠어요? 십자가 만들어서 짊어진다. 어릴 때부터 십자가 진다 이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진 것은 예수님의 후반부 이야기예요. 후반부 이야기이고, 그 전반부 이야기는 뭐냐하면 법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왜? 인간들의 수준이 워낙 낮은 차원이기 때문에. 그저 법 지키면 복 받아서 내가 산다. 그 정도의 수준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법 지켜서 사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법에 실패해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 오전에 설교 중에 어려운 부분이 있어 가지고 그걸 다시 한번 중요한 부분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예요.
내가 술을 먹고 성질이 나서 내 가족이라도 하여튼 눈에 띄는대로 하나님이 만든 족족들은 다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이게 “내가 사람 죽이니까 나쁜 짓이지?” 하니까 남들이 “어, 니가 죽이고 싶으면 죽여” 라고 남들이 나쁜 짓이 아니라고 한다 할지라도 내가 칼 들고 사람죽이는 것이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이것을 반성하는 주체라고 합니다. 칸트에 의하면. 내가 이게 나쁜 짓이라고 하는 생각이 왜 들어야 하는 인생이냐 하는 이 말입니다. 다시 해도 어렵죠?
남들이 궁시렁 궁시렁 해서 기분 나쁜 것이 아니고 나는 내 성질 껏,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성질도 부리고 성질대로 다하고 싶은데 하면서 자꾸 떠오르는 것이 뭐냐하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게 왜 나한테 발생 되느냐?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겠다잖아요. 내가 술을 먹는다. 내가 담배를 피고 술을 먹는다. 이건 누가 시킨 것이 아니고 내가 먹겠다는데, 왜 말이 많아? 니 술 먹는데 나 가만히 있었어. 나 말 안 했어. 그런데 내가 술을 먹고 개판치고, 내가 술을 먹는데 술 먹는 것을 잘못이라고 내가 지적하는 그런 나일 수 밖에 없느냐 그게 싫다는 거예요. 왜 인간이 이런 인간이냐 말이죠.
내가 술을 먹고 사람을 죽여도 “짝짝짝 잘 했어” 라고 하는 왜 이런 인간일 수가 없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 인간 안 되는게 짜증나고 화가 나는 거예요. 나는 자꾸 왜 반성을 하게 돼요. 반성을 하게 되느냐 이 말입니다. 아니 죽이고 싶으면 죽이면 되잖아요? 왜? 내가 했기 때문에. 어떤 부자한테 사채하니까 당신 왜 사채 합니까? 내 돈 내가 쓰는데 니가 왜? 맞아요. 내 돈 내가 쓰는데 남은 간섭하지 마세요. 문제는 내 돈 내가 쓰면서 이거 잘못 쓰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 자책하는, 자책한다는 이 자체가 내가 화가 난다는 거예요. 자책이 되는 거예요. 나는 왜 하나님이 아니냐 이 말이죠.
하나님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같으면 뭘 해도 아무 상관이 없어야 되잖아요? 왜 나는 하나님이 아니냐 이 말이죠. 내가 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얼마나 피해를 입히고, 쓸데없이 왜 피해를 입힌 것을 생각하느냐 이 말입니다. 술 먹고 그냥 깽판치고 불질러 버려라 왜 니가 했으니까. 내 돈 내가 쓴다며. 니도 그냥 불질러라 이 말이죠. 아버지가 자식을 죽였다 경찰서에 잡혀 간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 “내 자식 내가 죽이는데 니가 왜?” “나라법이 그렇습니다.” 자,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법에 실패해야 해요.
나를 신으로 만들어 줄 법이, 내가 법을 지키면 신이 되겠는데 내가 법을 지켜서 신이 안 된다는 것이 이게 딜레마에 빠진 겁니다. 딜레마에. 다시 합시다. 우리 선배들이 하나님의 법을 받았습니다. 십계명 받고 율법 받았습니다. 그들은 법을 받을 때 생각하기를 이 법을 지키면 우리 나라 복 준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요즘 가정에서 내가 예수 믿고 이렇게 하면 우리 가정에 복 줄까? 하는 생각과 똑같은 생각이예요.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온 것이 너가 법을 어겼다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런 적이 없고 법을 지킨 만큼 복 받는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그게 함정이고 실수였다 이 말입니다.
보통 교회 가서 이름 쓸 때, 종교칸에 기독교 하잖아요? 기독교라고 썼는데 성경에는 기독교라고 쓴 것이 없어요. 성경은 기독교 중심이 아니고 복음 중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라는 말을 쓰는 것은 뭐냐하면 너는 하나님의 법을 모르지만 나는 안다는 거죠. 그게 잘못됐다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온 것은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고 하나님의 어떤 법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드러내시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자꾸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나는 지켰다 안 지켰다 나는 믿는다 안 믿는다 하는데, 믿느냐 안 믿느냐 또는 믿든 안 믿든 그런 것 하고 상관없이 주께서는 일체 안 본다니까요. 설교 다시 처음부터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반해 버리는 거예요. 어떤 상대에게 반해 버릴 때 어떤 조건도 필요 없는 겁니다. 하고 안 하고 법 지키는 거하고 관계없는 거예요. 제가 광주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지시를 준 적이 없어요. 제가 이런 예를 들었거든요. 담임 선생님이 수학 문제 내놓고 “야 너 나와서 풀어” 손가락질 하니까 눈치가 빠른 애가 손가락 방향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어요. 그 뒤에 엉뚱한 애가 있다가 걸려든 거예요. 주님의 법은 예수님을 겨냥하게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법이, 십계명이나 모든 법이 자기를 겨냥한 줄로 생각해가지고 “그래 이 참에 이거 지켜서 복 받아야지” 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건 믿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오해한 겁니다. 일반 사람들이 오해하니까 목사들이 법을 이용해가지고 자꾸 사기를 치고 보이스피싱 하는 겁니다. 거기에 말려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시한 적이 없어요. 왜? 지시해 봤자 그것을 지킬 위인이 못되거든요.
그런데 우리 선배들이,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 선배들이 그걸 지켜서 다른 나라보다, 다윗 언약에 의해서 크게 부강된 나라가 되고자 하다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오늘 본문보니까 다 죽여 버리거든요.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이해 못하는 목자를 만났기 때문에 목자 조지고 양들 조지고 다 죽이겠다는 그 내용이거든요. 오늘 본문이. 은총? 은총같은 소리하고 있네. 다 부서뜨리겠다 은총을 부숴버리겠다는 겁니다. 은총을 부숴버리고 서로 연락, 깨지는 것이 먼저고 연락시키는 것입니다.
광주에 김을수 집사님이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는데요, 경상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선생님이 “야 니 이름 뭐꼬?” 경상도 말로 물으니까 애도 경상도 말로 “안 득깁니다” 이렇게 했거든요. 선생님이 화가 나서 “안 듣긴다고?” 이렇게 하니까 “듣깁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학생 이름이 안 득기인데, 안 득기. 성이 안씨고 이름이 득기인데 “니 이름이 뭐꼬?” “안 득기 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선생님이 can not hear? 로 들은 겁니다. 뭐 내 말이 안 듣긴다고? 그 때 애가 선생님이 안 들린다는 뜻으로 들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 때 “듣깁니다” 했거든요. I can hear. 들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름이 뭐냐에서 듣기느냐 안 듣기냐로 빠진 겁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안 득기. 안이라는 부정, 듣기느냐 아니 듣기느냐가 이 땅에서 이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차원이라는 말이죠. 지금 이름 묻다가 들리느냐 안 들리느냐가 왜 나오는 문제입니까? 지금 주님께서는 예수님을 향해서 법을 주었는데, 왜 갑자기 우리가 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말도 안 되는 이런 역사적 차원을 왜 하느냐 이 말이죠. 독을 마셔도 해롭지 않는다 하니까 제이미, 에이 욕이 다 나오는데 제이미 쿠커 목사는 그것을 실험을 해보는 거예요. 그걸 실험해서 성공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니는 백날해도 안 믿기. 니 이름 뭐꼬? 안 믿기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못 믿게 되어 있어요. 차원이. 사람은 반해서 구원받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반한 순간,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 이런 조건 자체가 날라가 버린다니까요. 조건 자체가. 그게 방금 이야기한 것을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야 하니까 항상 무엇을 해요. 이것은 마이크입니다. 저것은 난로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항상 묻는 버릇이 있어요. 그것 알아서 뭐할건데. 하여튼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막상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뭐라고 했느냐면 “누구십니까?” 라고 했어요. “누구십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벌써 나타났다 이 말이죠. 나 말고 다른 인물로 등장하십니까? 등장해 버리면 등장한 인물은 뭐고 또 나는 뭡니까? 그래서 아침에 말씀드린대로 그 분은 몸이고 우리는 몸통이고, 우리는 거기에 붙어 있는 시체가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목자를 거론합니다. 목자를 조져요. 목자가 실패한 그 자리에서 목자가 나온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그거예요.
목자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목자를 조져야 돼요. 기존 목자는 목자도 아닙니다. 그들은 양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양을 등쳐먹죠. 그들은 양을 많이 쳐먹어서 부자됐다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다는 겁니다. 5절에 보면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 하리라 하고” 이렇게 했다 이 말이죠. 이거 목자가 누굴 이야기 합니까? 조용기 목사 이야기 하는 겁니까? 누구 목사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설교 처음에 한 거 다 잊어 버렸죠?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걸 판박이로 해서 우리에게 딱 갖다 붙인다면 순복음교회 재산을 백억을 빼돌렸다. 순복음교회만큼 그 만한 재산이 없는 목사들은 그게 목사냐 하고 욕을 해대겠지만, 순복음교회 목사 인척들은 그게 뭐 어때서? 하나님의 뜻이 부자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찬송케 하리로다 이렇게 스가랴 11장 5절 그대로 이야기 하면 돼요. 니가 지금 우리만큼 돈이 없기 때문에 궁시렁 궁시렁 하지만 니가 만약에 교인들 수십만 모이고 헌금 해댄다면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 찬송하리로다 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니가 내 입장 안 돼봐서 그렇다는 거예요.
이 말씀을 그대로 판박이로 해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다, 우리가 욕할 그런 순복음교회 인생 말고, 우리 인생에다 그것을 딱 집어 넣는다니까요. 집어넣게 되면 우리도 뭔가 부요케 되는 것에 대해서 기대와 희망을 갖는다는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만큼 양을 못 끌어 모아 등쳐먹지 못 해서 그렇지 내가 부자가 되고 능력만 있다면 양을 잡아도 나는 죄 없다 할 수 있다는 그러한 잠재적인 속성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런 현상이 안 일어나서 그렇죠.
그리고 그 뒤에 보면 그들은 양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했는데, 이건 모든 목사들이 다 그래요. 목사는 누가 불쌍하냐면 목자 자기가 제일 불쌍해요. 그 다음에 불쌍한 것이 자기 마누라 불쌍하고 자기 자식 불쌍하죠. 자기 빼놓고 교인이 불쌍해요? 내가 장담하건대 그런 목사 없습니다. 우선 자기 몸부터 챙기기 마련인데 자기 몸 빼놓고 남을 걱정해요? 그러니 왜 자꾸 자기를 폄하시키고 막장으로 몰아 세웁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참된 목자를 등장시키는 현장이 바로 그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실패한 자리가 있어야 해요. 우리 자리가 하나님의 법에 실패한 자리로서 주님께서 그렇게 몰아 가십니다. 그게 우리를 살리는 파스예요. 붙이는 파스, 제 뒤에 파스가 붙여 있습니다만 그게 우리를 살리는 파스입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잘해 볼려고 애를 씁니다. 이왕이면 목사가 되어 가지고 양들을 불쌍히 여기고 이왕이면 돈 없는 어려운 사람도 돕고 싶어요. 하지만 사람은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점점 더 딜레마에 빠져요. 완벽하지 못한다는 거에서 그 텀이 점점 더 아파 온다니까요. 애초부터 착하지도 못했으면 안 착해도 덜 아픈데 너무나 섬세하게 예민하게 참으로 예민하게 착한 사람은요, 자기가 미처 못한 그 일에 대해서 그렇게 아파요.
제가 요번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무심코 당기세요 라는 문을 열고 들어 갔어요. 얼마나 아픈지. 심지어 자동문에 3분동안 기다려도 열리지 않아서 누르니까 열렸어요. 그게 무슨 자동문입니까? 자동문에 서면 무조건 열려야 되는데. 자동문이라고 해놓고 그걸 눌러야 돼요. “당기세요” 아주 예민한 것에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남들은 대수롭지 않는 그 법 위반이 예민한 사람한테는 법 지키는 것 보다 더 아프게 다가와요. 실패한 자리, 우리가 법에 실패한 자리. 그리고 산상수훈 다시 보세요.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이 말씀이 얼마나 못 지킬 말씀인지. 어떤 말씀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도저히 못 지켜요. 한 때 뭔가 정신이 이상하게 나가서 지키겠지만. 몇 초 안 돼요. 또 지나가면 돈 좋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돈을 누가 안 주어서 그렇지 돈을 누가 주게 되면 돈 좋아 하게 되어 있어요.
제 딸 결혼 부조에 확 우리 부부가..세상에!!이런 돈을..왜 나한테 십 만원을 주지? 미쳤어 미쳤어 그래서 딴에 반성한다고 죄를 더했습니다 그렇게 써 놓았습니다. 그거 쓴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주께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법에 실패한 자리예요. 실패한 자리에 많이 용서받은 자가 주님께 반해 버리고 주님을 사랑해 버리는 겁니다. 그게 목자예요. 그게 연락, 은총 부수어 버리고 끊어진 은총은 새로운 목자가 와서 연결시켜 줄 때 우리는 무너졌어야 마땅한데 주님 때문에 연결되었습니다는 것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할 일은 간단합니다. 왜 우리는 법을 지킬 수 없고 법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착하게 살아서 법을 지켜서 복을 받는 것은 없고 우리가 구원 얻고 영생 얻고 복 받는 것은 다른데서, 우리로 하여금 파스, 이 말씀이라는 파스를 우리의 온 몸에다 갖다 붙여 주시는 그 실패하면서 우리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그 주님을 더욱더 반해 버리고 사랑하게 만드는 어떤 조건도 우리에게 자꾸 묻지 않는다는 것이 생생하게 귀에 앵앵 하게 들려오는 그런 현장으로 우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실패했다는 말 조차 할 자격이 없을 정도로 징징대고 짜증내고 왜 세상은 내 맘대로 안 되는지 화내고 그게 스물네시간 일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공하겠다는 의도 때문에 그런 저의오니 차라리 실패하는게 마땅하다고 여기고 십자가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있는 형편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