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스가랴25강-유다족속,요셉족속(슥10;6-7)이근호140209

아빠와 함께 2014. 2. 9. 17:16

유다족속, 요셉족속 (스가랴 1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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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2-09 15:41 
유다 족속, 요셉 족속

2014년 2월 9일                         본문 말씀: 스가랴 10:6-7


(10:6)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10:7)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유대 족속과 요셉 족속을 구분지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 두 족속의 결합 경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하나님에 있어 주안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엿 가락이 하나이었다가 둘로 나누어지고, 이 둘이 다시 하나가 되었을 때에 우리의 관심사는 오직 뿐입니다. “맛이겠다!”

그 엿이 둘이 되든지, 하나가 되든지 입에 들어가서 녹아버릴 경우를 생각하면 맛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족속이나 유다 족속에 대해서 그렇게 무관심한 이유는, 현재 우리가 몸 담고 있는 나라, ‘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나 요셉은 남이 나라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가 둘로 나뉘어지고, 나뉘어진 이 두 나라가 하나로 합체되는 그 과정에 주목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냥 존재하는 그 대상을 심켜서 소유대상으로 삼고 싶은 충동을 보이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그 존재의 속에 뭐가 담겨 있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깨어지고 다시 합쳐지는 과정에서, 그 전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존재 속의 본질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스가랴 11:7에,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새”라는 말씀이 나오고,

스가랴 11:14에는, “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개의 막대기의 작용에 따라 유다와 이스라엘은 붙여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막대기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은총’이요 다른 하나는 ‘연락’, 즉 ‘연합’이라고 이해되는 막대기입니다.

즉 겉으로 보이는 이스라엘이 유다 나라 속에서는 특수한 원리가 작동하신다는 겁니다. 이 작동원리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자신이 세운 나라에 충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 사랑’이 결코 ‘하나님 사랑’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자기들 나라에 애착을 갖는다고 해서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는 말입니다. 내 나라 내가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보고 무조건 후원해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이라는 깨어져야 하고 쪼개져야 속에 들어있는 실상이 나온다는 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성상 다치기 싫어합니다. 예를 들면 수족관을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은 백상어를 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백상어를 잡아 튜브 같은 곳에 집어넣고 관람합니다. 수족관 속의 백상어는 상어 나름대로 물 속에서 놓고 있고 그것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물방울 튕기지 않는 곳에서 백상어를 구경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영역 구분은 일단 자기 쪽에서는 전혀 다치지 않겠다는 의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게 무슨 일이 있든 간에 그 이스라엘 역사를 수족관을 집어넣고 마음껏 구경하고 싶을 때 구경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로 인하여 하나님의 존재나 그 일도 수족관이 가두어넣은 셈이 됩니다.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에 무관심한다는 것은 곧 참된 하나님의 뜻을 놓치는 바가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이스라엘에 원조가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아브라함이라는 분입니다.

그분은 본토 아비 집에서 자기의 생업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막무가내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혈육으로부터의 단절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일종이 혈육적 관계의 깨어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하는대로 가다보니 지금의 이스라엘 땅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땅에 심한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떠나온 가족들이 살 수 없으니 살기 위해서 풍족한 애굽나라로 갈 수 밖에 없었고, 거기서 정치적으로 큰 권력을 만나게 되었고, 살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왕에게 상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홀로 생존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에 하등 이상한 내용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그런 아브라함의 행함을 보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4:2-5에 보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자기 다치지 않는 방도대로 몸을 움직일 뿐입니다. 누구라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인생에는 추가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요 은총이요 연락이요 연합이요 그리고 긍휼입니다. 이 아브라함 인생 속에서 하나님은 수족관에 갇혀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보통 백상어 수족관의 수조가 물의 압력으로 깨어졌다고 보세요. 그러면 끔찍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활동한다면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하지만 긍휼과 연합과 연결과 은총으로 맺어진다면 그 관계는 긍휼의 넘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값없는 용서와 희생과 봉사가 넘쳐 흐르는 곳입니다. 그 안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을 수족관을 가두어놓지 말고 우리 삶 속에 늘 흐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0장 6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1페이지입니다.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구약의 스가랴나 구약의 선지자를 대하면서 설교하는 제 입장에서 항상 먼저 부담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또는 유다, 에브라임 이런 용어들에는 교인들이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대한민국에 관심있기 마련이지 어디 남의 나라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에브라임, 이스라엘 그것 제쳐 놓고 그것 생각하지 말고 바로 보자 이러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구약에 있는 하나님이 집중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벌리시는데 그 일을 벌리시는 현장에 가야 하거든요. 현장이 뭐냐 대한민국이 아니고 다른 나라가 아니고 바로 이스라엘을 가지고 다루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짜 뜻이 무엇이며 본심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에 관여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그 속에서 만나야 돼요. 

다른 나라에서 따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에브라임, 요셉 족속, 유다 족속. 사실은 뭐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 족속도, 경주 이씨 안동 권씨도 지금 신경 못쓰는데 남의 족속까지 신경 쓸게 없잖아요. 그런데 안동 권씨, 경주 이씨에는 하나님의 뜻이 안 담겨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다 족속, 요셉 족속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변화 시키고 전환 시켰는지 그걸 아셔야 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 유다 족속, 요셉 족속 이전에 그들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제가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스가랴 11장에 보면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은총이 뭐고 언약이 뭐냐 이거 왜 나왔느냐 말이죠. 그 다음에 14절에 보면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또 연락, 연결한다 이렇게 나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일반 교인들은 아이고 이거 무슨 말인지 몰라 하고 그냥 지나가는데 우리는 그렇게 지나가면 주의 뜻도 그냥 지나가게 되어서 그럴 수는 없는 거구요.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엿가락 있잖아요? 엿가락을 보면 원래 하나인데 둘로 쫙 쪼갰습니다. 쪼개 놓고 다시 붙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인간들 눈에는 뭐냐하면 “어? 엿이 하나였는데 둘이 되었네. 두 개 였는데 다시 하나가 되었네.” 우리 인간들 보기에는 엿이 하나이든 둘이든 상관없이 딱 이겁니다. 맛있다!! 우리는 그냥 맛있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왜 같은 엿가락인데 하나였던 것이 둘로 깨질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깨졌으면 깨진 걸로 끝나야 되는데 왜 둘로 깨진 엿가락이 뭣 때문에 연결되었는가 그런 관계성에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는 거예요. 연결하는 방법이 사람의 손에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속에 숨어 있는, 담겨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끊어 버리고 연결 시킨 거예요. 병 주고 약을 준 겁니다. 병 주고 약 주지 아니하면 “나는 아파서, 나 환자야” 라는 우리 속에 있는 속마음을 바깥으로 드러낼 기회가 없는 겁니다. “나는 건강한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나는 환자를 부르러 왔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실 때 바로 그 관계성 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주께서 말씀을 가지고 초대하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TV드라마를 저 보고 쓰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으로 쓸 수 밖에 없어요. 집안이 가난해서 어떤 아가씨가 백화점에 취직을 했는데 어느 날 어떤 남자와 부딪혔다 눈 똑바로 뜨고 다녀야지 이게 뭐야 하면서 쳐다 봤는데 미안하다 하면서 괜찮은 남자가 이것 저것 주워 담아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백화점 아들이라 백화점 아들인데 그런데 백화점 아들을 좋아하는 여자 상관이 있었어요. 세상에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게 출생의 비밀이 있었네. 그게 언니예요. 옛날 고아원에서 헤어진 언니란 말이죠. 

드라마 자체가 뭐냐하면 뭔가 부숴뜨리고, 감추어진 출생의 비밀을 노출시키고 그것이 다시 봉합되면서 나중에 언니가 회개하고, 주로 언니가 회개하잖아요? 재벌 2세하고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로 끝나잖아요. 그렇게 뭔가 깨어지고 봉합하는 가운데서 그게 우리가 미처 몰랐던 나밖에 몰랐던 우리가 숨어 있는 하나님을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들어 갈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유다 족속, 요셉 족속을 분리해 놓았잖아요? 분리해 놓았는데 11장에 넘어가 보니까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막대기를 자르고 붙이고 해서 연락, 연락이라는 말은 연결된다는 말도 되고 통합된다는 말도 되는데 통합되는 막대기를 준비했다. 그 막대기가 뭐냐하면 목자가 오고 그 목자가 오는데 그 목자가 11장 12절에 보니까 그 목자한테 은 삼십을 달았다. 은 삼십개 가지고 뭔가 팔린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 사나이가 마태 누가 요한 복음에 보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먹을 때 은 삼십개 주고 팔았다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뭔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일관성이 있으면서 하나의 마지막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유다와 이스라엘 그리고 이스라엘 유다 나라 역사 그 속의 예수님의 활동. 이런 것이 하나의 버무려져서 이것이 결국에는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걸로 도출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이런 과정들이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과정은 들을 생각 안 하고 아이구 뭐 믿으면 구원받고 천당 갑니까? 예수 믿으세요. 까짓것 예수 믿지 손들고 나옵니다. 이렇게 된다 말이죠. 백날 손들고 나와야 소용 없어요. 

본인이 유다 족속이 되야 되고 본인이 요셉 족속이 되어야 하고 본인이 깨어져야 되고. 가룟 유다 예수님 팔았다 하니까 에이 못된 인간 스승을 팔아 먹냐 하면서 이렇게 의리 챙길 것이 아니고 본인이 가룟 유다.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가룟 유다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 볼 때 지금 내가 바라보는 예수님과 가룟 유다가 바라보는 예수님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 그렇게 되야 합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 설명할려면 열 두 제자 설명해야 되고 열 두 제자 설명할려면 구약을 설명해야 되고 구약 역사는 맹탕이 아니고 그냥 있으나 마나한 역사가 아니고 필수 조건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했는데 복잡한 것을 설명하려니까 더 복잡하게 되죠. 더 간단하게 합시다.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부산에 안 가봤는데 부산에 아쿠아룸이 있다는 겁니다. 수족관이 있는데 KTX 잡지를 보니까 수족관 사진이 나와 있어요. 그걸 보니까 아주 멋있게 되어 있어요. 밑에는 터널같은데 사람들이 안심 푹 놓고 길을 다닐 수 있게 해놓고 사방은 유리로 되어 있어요. 유리에 보니까 백상어가 머리 위로 왔다 갔다 돌아 다니고 아이들은 그 백상어 잡으려고 이렇게 하더란 말입니다. 

자, 백상어가 노는 그런 튜브라 할까요? 백상어가 노는 그런 관 따로 있고 사람이 안심 푹 놓고 물에 젖지도 않고 관람하는 영역이 따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상상을 해봤죠. 저렇게 백상어가 좋다면 백상어를 하나 풀어 놓으면 어떻겠는가? 풀어 놓으면 백상어가 사람 뜯어 먹고. 죠스니까 피투성이 엉망이 되겠죠. 아! 사람들이 보기는 보고 싶고 자기를 안전하게 지키고 싶을 때는 백상어를 가두어 놓는 식으로 따로 물에서 놀도록 하면 되는구나. 그렇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고는 보고 싶은데 하나님을 갖고 놀려면 하나님을 어떻게, 수족관에다 백상어처럼 가두어 놓으면 마음껏 하나님은 관람하지만 자기는 안 다치게 되고.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종교라는 이름을 채택을 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유다와 요셉 족속 이야기가 나올 때 그것은 수족관에 있는 유다 족속이 되고 요셉 족속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한테는. 아하, 옛날에 하나님을 안 믿다가 하나님이 맴매 했구나 그런 나라가 있었구나. 우리는 말씀 잘 지키면 되겠지. 이게 같은 동네가 아니고 딴 영역으로 가두어 놓아 버려요. 성경책 안에다만 가두어 놓고 이게 실제로 수족관이 터져 가지고 백상어가 돌아 다닌다는 사실을 자기는 상상도 못한 거예요. 

구약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이 성경 수족관을 터트려 가지고 백상어로 날마다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고 있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렇게 수족관에 따로 나누어 있다고 생각하고 시작을 해 보자 이 말입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성경이 보이는데요. 에덴 동산 알잖아요? 에덴 동산이 있다고 칩시다. 에덴 동산을 수족관에 가두어 두고 구경만 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에덴 동산에 있다고 생각을 해 볼 때에, 에덴 동산에 있을 때에 거기서 싫어, 싫다, 좋다 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도 없어요. 이게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민준이라고 해서 우리 황전도사님이 보고 있는 손자가 있는데 전에는 “왜 그래?”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지금은 좀 컸다고 노골적으로 “싫어” 이렇게 나온다는 거예요. 울산에서 공부 마치고 울산역까지 데려다 주면서 그 이야기를 해요. 요새는 민준이가 노골적으로 “싫어 싫어” 이렇게 이야기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 생각에는 뭔가 싫어 한다면 “ 나 할머니 싫어” 한다면 그 아이 앞에 뭔가 대상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에덴 동산에는 싫어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요. 대상이 없는 거예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수족관에다 신을 가두어 두니까 창세기 2장 3장 4장을 전부 다 가두어 두니까 아 하나님이 등장 하는구나 아는데 실제로 수족관에서 등 돌리고 돌아서 버리면 우리는 신을 향하여 이야기 할 신이 없다는 이 말입니다. 그게 “싫어” 라고 말할 대상이 없는 거예요. 에덴 동산에 들어가 보니까 진짜로 없어요. 왜냐하면 나무만 있기 때문에. 

여러분, 길 가다가 나무보고 “싫어!” 이렇게 합니까? “아이구 이거 열매 봐라”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요거 한 번 따먹어 봐” 그냥 따먹을 뿐이예요. 먹고 싶어서 먹었는데 그거 내 자유죠. 내 자유란 말이죠. 성경을 수족관에 가두어 두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나는 내하고 싶은 대로 살 뿐이고. 내가 하기 싫으면 내 자신이 스스로 물어요. “하기 싫어? 싫으면 하지마” 결국은 모든 질문과 답변은 내가 나한테 질문하고 내가 나한테 답변하고. 자기 독백의 과정, 이것이 인생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백설 공주에서는 거울이 대답을 하지만 그것을 실험 해보세요. 집에 가서 거울 보고 이야기를 해보세요. “거울아, 거울아” 거울이 가만히 있죠. 대상이 없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가 남한테 이야기 해보세요. 자기 아내한테 “여보 싫어” 그것은 자기 아내한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자신한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아내고 뭐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나 빼놓고는 다 마네킹입니다. 

인간은 나 빼놓고는 다 마네킹이예요. 마네킹이 아파봤자 내가 안 아프면 안 아픈 거예요. 발에, 발톱에 뭐가 들어가도 내 발톱은 멀쩡하거든요. 남의 이야기예요. 어떻게 감정이입이 원활하지 못해요. 감정이입이 하고 싶어도 안 된다니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아픔을 겪어 보자 해서 필리핀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진짜 못으로 박아요. 나중에 병원비만 들어가요. 어떻게 감정이입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이 인간이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을 안다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하는 독백이지 전혀 하나님에게 먹혀 들어갈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것도 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어떤 인간도 자기가 망치 들고 백상어가 들어가 있는 수족관을 깨가지고 백상어를 손으로 만지고 싶다는 이런 미친 인간은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그냥 관람용 이예요. 예수도 관람용. 삼위일체도 관람용. 십자가도 관람용. 피도 관람용. 나는 멀쩡하거든. 

자,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인데, 여기서부터 수족관 속에서 커져 버린, 수족관 안에 있는 나라가 생깁니다. 그게 뭐냐하면 유다 족속, 요셉 족속 이예요. 유다 족속과 요셉 족속의 원조가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은 멀쩡하게 자기 직업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방인데 이라크 지방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심지어 내란이 있는 시리아를 거쳐서 레바논을 거쳐서 지금 이스라엘 땅까지 그냥 왔는데 왜 왔는가 자기도 몰라요. 

너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본토 아비 집을 떠났으니까 찐득찐득한, 딱딱한 물체가 떠나야 하는데 뭔가 끈적끈적한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이 계속해서 말씀이 자기 등허리에 들러 붙어 있는 거예요. 이번에 어디로 갈까요?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는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는데 거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노린 것은 너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너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의 결과는 너가 배고프고 가뭄들고 어려우면 결국은 너가 사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가뭄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 갔고 내려가니까 거기에 강자가 있었고 강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기 몸 살기 위해서 자기 마누라를 뇌물로 갖다 바쳤습니다. 그것을 성상납 이라고 합니다. 요즘엔 검사가 그것을 하는데. 성상납 한 거예요.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행위 플러스 알파. 행위 말고 다른 요소에 있어서 구원되는 요소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렇게 될려면 자기 행위는 항상 구원이 안됨을 깨닫는 식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은 유다 이야기 하고 요셉 이야기 하면서 아브라함 이야기 왜 합니까? 라고 따지신다면 그 아브라함이 겪었던 것이 그 수족관의 하나의 원리로 작용했다는 거예요.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값 없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 원리가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 안에 생생하게 잠재되어 있어서 그게 반복적 커져 나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식구 몇 명이 안 되지만 이것이 덩치가 크면 이스라엘 나라가 되는 거고 그것이 오늘날 진짜 교회가 되는 거예요. 

어제 토요일 11시 50분에 광주 결혼식에 가서 결혼식 주례를 했습니다. 주례 내용을 잠시 이야기 하게 되면 주례 본문이 뭐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장 23절 24절 이게 본문이예요. 사람들이 전부 다 이 본문 가지고 주례사 어떻게 나오는가 궁금해 했을 거예요. 

저의 이야기는 이겁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찐득찐득한 것이 하늘에서 땅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계속 이어지는 거죠. 스파이더맨 같이. 스파이더맨 손목에서 뭐가 나오잖아요. 그러면 만약에 하늘에 스파이더맨이 있다고 봅시다. 하늘에서 거미줄이 쫙하고 끈적끈적함이 엠파이어 빌딩에 붙잖아요. 붙은 것이 그게 결혼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결혼식이라는 것은 사람의 의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로 결혼식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 그 안에 이미 이루어진 뜻이 가정 안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가정 안에 들어 있으면 가정의 남녀의 모임은 주의 뜻인데, 뜻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①첫번째는 죄인이어야 하고 ②두번째는 값 없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죄인인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남녀가 붙었고 그 과정 속에서 값 없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보여 주는 실습의 장소가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 이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세 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무조건 용서해라. 희생해라. 봉사해라. 상투적인 사랑은 걷어 치워라 상투적인 사랑은 사랑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이 용서입니다. 말로만 했습니까? 희생으로 했잖아요? 피 흘려서 희생으로 했습니다. 그 다음에 끝났습니까? 희생을 누가 믿어요? 안 믿잖아요? 그러니까 희생을 믿으라고 손수 우리에게 봉사해서 오늘날까지 주께서 이렇게 살려 주는 거예요. 병 주고 약 주고 하듯이 계속해서 안에 희생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실습 장소의 가정입니다. 그것이 구약에 보면 요셉이고 유다예요. 그래서 설교 마치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이거예요. 요셉 족속이나 유다 족속이나 이게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겁니다. 수 천명 모이고 수 만명 모여도 하나라는 겁니다. 니가 잘났다 나는 니한테 뭐 해줬다 하면 이게 둘이 되어 버려요. 내가 너한테 해주려면 너 있어야 되고 나 있어야 되고 둘이 되어 버려요.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수족관에 집어 넣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관람자 누구시냐면 우리가 관람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백상어가 우리를 수족관에 집어 넣고 우리를 보는 거예요. 니가 어떻게 놀아도 그것은 값 없는 희생, 값 없는 용서, 값 없는 봉사. 모두 값 없는 이라는 한 장소에서 노니는 내가 만든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지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 요셉 지파를 하나로 만들어 놓고 일부러 뚝딱 부러뜨려요. 부러뜨려 놓고 다시 합칩니다. 

합치는 그 풀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6절에 보면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긍휼히, 불쌍히 여기겠죠. 제가 신랑 신부에게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다 잊어버리고 하나만 기억해라 “값 없이” 이만큼 해줬는데 니는 나한테 뭐 해줬냐? 하면 둘이 되어 버려요. 가정이 분명히 한 몸 되라 했는데 갑자기 둘로 쪼개져 버려요. 긍휼히 사라져 버리고 값 없음이 사라져 버려요. 값 없이. 뭐든지 값 없이.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 오게 하리니. 

실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 이것이 신약에서 그대로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또 다시 실습하게 하시는 겁니다. 당신과 나는 값 없는 주님의 용서로 하나가 되었다. 그럴 경우에만 가정이 되죠. 그런데 갑자기 나는 너한테 이만큼 잘 해줬는데 너는 나한테 뭐 해줬는데 하면 그 자체가 가정이 될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이미 가정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지 말고 상대가 어떻게 하든지 값 없이 내놓으면 그게 가정입니다 라고 제가 이론상, 이론상만 이야기 했고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주례 마지막에 이렇게 했습니다. 마지막에 “싸워라” 싸워야 이론이 깨져요. 아, 우리 신랑은 주님밖에 없고 나는 신부구나. 싸워야 이론이 깨지지 안 싸우면 환상이 되버리거든요. 환상이 아닌 것을 알면서 평생을 살면서 환상이 깨어지고 그 속에서 항상 주님이 동행하는 가정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만 오늘 설교도 그런 식으로 마쳐야 되겠네요. 

주님의 은혜가 끈적끈적하게 달라 붙어 있습니다. 늘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우리 속살에 주님의 값 없는 용서가 이미 있는 사람이라면 열 번 깨져도 몇 번 깨져도 괜찮아요. 결혼 또 하시라는 말씀이 아니고 또 하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만 참으시고. 항상 잘했다 못했다는 관계 없고 이미 긍휼히 나의 잘했다 못했다는 것 보다 우선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유다 족속 요셉 족속 남의 이야기 같이 들립니다. 우리 이야기 아닌 것처럼 여겨 집니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 되게 여기신 것은 긍휼이었고 값 없는 예수님의 피였사오니 이 시간 우리 속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주님과 우리가 연락되고 연합된 것이 십자가인 것을 감사히 여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