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50321a 마태복음 9장 17절(막)-이 근호 목사
오늘은『기독교와 허상』교재 p.161 <메시아로서의 예수와 우상 예수> 그 대목 하겠습니다. 여기에 ‘우상’이라는 개념 하나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을 잘 알죠. 자신의 경전이니까. 잘 알면 거기서 우상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을 따로 그들이 추리고 있었을 겁니다. 뭐가 우상인지 우상이 아닌지에 대해 나름대로 잘 정리가 되어 있었는데요.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그 우상과 예수님이 생각한 우상이 달랐어요.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우상, 우상 이야기 많이 나오는데 우상에 대해서 개념을 잡는 데 있어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그 우상 개념을 일단 우리가 경유해야 돼요. 그걸 거쳐야 돼요.
여러분 다 알다시피 우상이라 하는 것은 이겁니다. 물질(재료)+(신적(神的)) 이미지=우상. 이럴 때 이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럼 ‘우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한다. 우상 섬기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서 물질+이미지니까 그들은 무엇을 버리고자 했느냐 하면 이 ‘물질’을 버리는 쪽으로 나아갔어요.
나무, 쇠 이런 걸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담지 않는다. 물질을 없애버리면 신적 이미지, 신적 형상이라 할 수 있는데, ‘신적 형상으로만 있으면 우상을 피할 수 있다. 우상 아니고 진짜 하나님을 섬긴다.’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둘 다를 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물질+이미지’ 둘 다를 버려야 돼요. 둘 다를 버리는 방법은? 유대인들이 생각한 우상개념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싫어하는 거니까 절대로 이걸 섬기지 말라고 나름대로 그들끼리 생각을 같이 했잖아요. 특히 이 우상이라는 것은 이방민족의 신이란 말이죠. 우상이 이방민족의 신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방민족의 신과 차별화된 우리 유대민족만의 하나님을 섬기면 우상을 안 섬겨도 되고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라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들한테 문제없다 이 말이죠. 우상개념을 잡는 데 있어서 그들은 제대로 우상개념을 잡아서 피하기 때문에 그들이 우상을 섬길 리는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물질적 재료를 거부하고 신적 형상, 여호와 하나님을 받아들였을 때에, 신적 이미지와 물질에서 물질에는 육신도 포함되니까, 예수님의 육신과 아버지의 이미지를 합쳐버리면 예수님 본인이 되겠죠. (예수님의) 육신+아버지의 이미지=예수님 본인. 예수님의 육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합치면 예수님 본인이 되겠죠. 예수님 본인으로서 ‘예수님의 육신+아버지의 이미지’ 이것 빼놓고 모조리 다 우상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한 우상개념에 들어오지 못하면 그들은 여호와가 됐든 삼위일체가 됐든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그게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럼 우상숭배자는 영원히 지옥 불에 들어가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과 함께 한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바, 하지 말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구약을 통해서 생각해보니까 십계명에도 나와 있듯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여기에 초점을 맞춘 거예요.
그러나 출애굽기 20장에서 그들이 아무리 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 조건이 있었어요. 출애굽기 20장 3절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그래서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네. 여호와만 섬기겠습니다. 애굽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됐죠?” 뭐 이렇게 대충 타협을 보려고 했는데 4절에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면 ‘너를 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너를 위하니까 오늘날 우리로 하면, 나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지 말라. 그 말을 유대인들은 어떻게 곡해했느냐 하면, 나를 위하여 여호와는 섬겨도 괜찮다고 곡해한 거예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여호와 믿어도 그것은 하나님이 용납한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생각한 그 개념 자체가 역시 우상적이라는 것이 예수님 입장에서 어떻게 정리되느냐 하면 이렇게 하면 돼요. ‘자기의 의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신)을 가져오면 모조리 우상숭배자이고 엉터리 신이다.’ 자기의 의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가져오면.
그러면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뭘까요? 자기의 의와 자기의 이익을 망치고 이것이 무너지고 주저앉게 되기 위해서 뭘 믿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 그 사람만이 ‘자기를 위하여’에서 제외된 사람이겠죠.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봉사할 때, 자기의 의와 자기의 이익이 이런 봉사를 통해서 ‘이제는 완전 작살나는구나.’하고 그게 기뻐서 하는 봉사만이 봉사에요. 교회 참석도 그렇고 성경공부 모임도 마찬가지고 헌금도 마찬가지고 전도도 마찬가지고 어떤 봉사든, 이 일을 통해서 난 이제 작살나는구나. 나는 더 이상 나의 이익과 나의 의라는 것은 이제 도저히 하나님께서 못 봐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나한테 맡겼구나. 즐겁게 무너지자. 가볍게 무너지자.
어떤 주어진 일에 대해서 그 일이 나를 무너뜨리는, 견고한 나의 잘남과 가치와 의미를 무너뜨리는 일로 다가온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우상 섬기지 말라는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분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육신과 아버지의 뜻과 이미지를 가져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이 잔이 내게서 넘어가지 말고 direct로 이 잔이 나를 향하여 그냥 이 저주의 잔이 나한테 주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라는 봉사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라는 봉사를 하신 겁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나 여러 가지 성경읽기라든지 십자가마을 모임에 참석하거나 교회에 참석할 때 마음가짐 자체가, 내 방법으로는 내 노력으로는 절대로 이게… 너무 강하고 견고해서 무너지지 않는 나를 하나님께서 무너지게 하기 위해서 이런 시간들을 주셨고 이런 모임들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그 은혜와 그 기쁨으로 참여되어야 되겠죠. 참여되어야 돼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뭐냐? 인간은 스스로 우상을 포기할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인간 자신이 무너져야 될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건 주님 쪽에서 개시하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일을 벌이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자기 우상성에 대해서 처리가 불가능한 거예요. 안 무너지는 거예요, 이게. 안 무너지니까 하나님을 믿든 삼위일체를 믿든 예수님을 믿든 무엇은 아직 공고합니까?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는 그대로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32장 8절에 보면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온 것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에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와 인간들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나를 위해서’가 이게 대조가 되고 대비가 되고 이게 갈등의 요인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제대로 성령 받아서 우상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저한테 이런 일을 해서 저한테 무슨 이익이 옵니까?’ 이런 질문을 안 하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박살내고 작살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이익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질문이. ‘하나님이 실시한 일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데 있어서 그것으로 주님이 기쁘시다면 기꺼이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손도 못 대는 우상덩어리였음을 그냥 노골화시켜주시옵소서.’ 그렇게 되겠죠.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유대인들이 정리한 게 있어요. 유대인들이 정리한 우상. 시편 115편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잘 알잖아요. 우리가 유대인이라 생각하고 지금 여호와 하나님을 지독하게 믿어서 우리 민족, 또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이 철저하다는 그런 마음을 가졌다 치고 시편 115편 4절을 봅시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가 유대인이라면 ‘이 우상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말고 우리민족 말고 이방민족의 신이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어떤 흐뭇함이 있겠죠. 어떤 흐뭇함? ‘우리는 그러한 이방민족과 같지 아니한 걸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하고 ‘우리는 진짜 하나님의 이미지만 이렇게 제대로 알아서 우리만큼은 구원받은 백성이다.’라고 주장하게 되겠죠. 왜? 시편에 나오니까. 그들은 시편을 달달 외우다시피 하니까요.
그다음에 똑같은 유대인의 마음으로 이사야 44장 17절 보겠습니다. 16절부터 보면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라는 말을 유대인들이 다 보고 있잖아요.
‘이러한 우상을 섬기지 않게 되어서 하나님 고맙습니다.’라는 마음을 그들이 가졌게요, 안 가졌게요? 가지겠죠. 문자대로 말씀대로 하나님이 주신 계시 그대로 믿으니 우리는 누가 뭐래도 우상이 아닌 진짜 하나님과 교류하고 있는 진짜 백성이라고 호언장담할만하겠죠. 지금 그 우상을 주께서 깨고자 하시는 거예요. 그 우상을.
수요 설교에 나왔던 이야기를 잠깐 하게 되면, 애굽은 애굽의 신들이 있잖아요. 우상이죠. 우상이 있던 애굽에서 하나님이 모세 언약, 유월절 양으로 그들을 율법 안에 집어넣었어요, 율법 안으로. 율법 안에 들어갔단 말이죠. 그러니까 애굽에서 살았는데 이제 그들은 어디서 사느냐? 율법 안의 세계에 사는 거예요.
율법 안의 세계에 살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대조하기를, 다른 민족과 차이나는 것이 우리 민족은 뭐냐를 따지는 거예요. 남들은 저런데 우리는 이렇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우리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규정해버리는 겁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율법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로마서 7장에 보면 다른 민족이 몰랐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인간 자체가 바로 우상의 제조주체라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이미지 있잖아요, 신적 이미지, 이게 어디서 나온 거죠? 이 신적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인간에게서 나왔잖아요. 인간에게 나온 거예요.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알았던 신의 개념을 이 이미지로 담은 거예요.
이방인들도 그렇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가지고 자기 범죄한 이미지를 담았는데, 문제는 율법이 주님의 지시에 따라 율법대로 해요. 율법을 지키는 내 소원대로 율법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율법이 인간에게 후달리는 게 아니고, 율법을 인간이 관리하는 게 아니라, 율법 관리자가 따로 있어가지고 철저하게 왜 율법대로 망해야 되는가를 유일하게 체험하는 그들이 누구냐?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그럼 오늘날 성도라는 게 딱 나왔죠? 성도는 뭐냐? 복음 안에서 왜 우리는 지옥가야 마땅한지 복음을 위해서 체험하는 대상자가 오늘날 성도입니다. 구원은 예수님만 구원받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만 구원받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하고 설교를 대하고 예배를 대할 때 ‘주님, 오늘도 도대체 내가 뭐가 그렇게 문젯거리입니까?’라는 그런 자세로 봐야 됩니다. ‘주님, 오늘 교회 나왔습니다. 저한테 돌아올 이익은 뭡니까? 기쁨? 행복? 뭐 그런 겁니까?’ 행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물질을 가지고 이미지와 결합시켰잖아요, 방금 이사야 44장처럼. 이 물질요소를 거론해서 이걸 떼버려요. 떼버리면 이방민족의 신들은 다 떨어져 나가요. 이제 남아있는 떨어져 나갈 것은 뭡니까? 신적 이미지죠. 이미지는 어디서 나왔어요? 나에게서 나왔죠.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을 우상숭배자로 만드는 작업을 하십니다. 얼마나 친절한지 몰라요. 얼마나 친절한지. 그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주님의 친절은 한이 없어라. 한량이 없습니다. 6장 26-27절.
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에요. 떡을 주죠. 떡을 누가 줬습니까? 아버지한테 기도해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떡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 남자만 오천 명 되는 사람들은 주님이 굉장히 고마운 거예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했겠어요, 속으로? ‘아직 고맙다 소리하기에 이른 거 너 모르지? 너 성급한 태도인 줄 모르지? 그치?’
어쨌든 떡을 줘요. 떡을 주니까 요한복음 6장 26-27절에 보면,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주님께서 뭘 따지느냐 하면, ‘내가 여호와를 믿으면서 나에 대한 나의 잘남과 나의 이익은 무엇입니까?’라는 생각의 원천, 그 토대가 뭐냐는 거예요. 떡을 먹으니까 배부르잖아요. 그래서 찾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를 안 다치게 하는 조건 하에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라는 그런 식이에요. 우상이 되는 조건, ‘나를 위해서’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서는 인간에게서 떨어져나가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제 뭐 복음 수십 년 들었고 알만큼 다 아니까 더 알거 없다, 이렇게 나올 때요. 그럴 수 있잖아요. ‘마이 묵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갈 수 있단 말이죠. 갈 때, 주님께서 “잠깐, Just a moment, 잠깐만 이야기하고. 잠깐 이야기하고.” 잠깐 불러내요. “뭐 복음에 대해서는 ‘아’하면 무슨 소리인지, ‘어’하면 무슨 소리인지 다 압니다.” “그래? 그렇게 해서 자기를 위함이 찢어졌는가?” 묻고 싶은 거예요.
“나라는 것은 박박 찢어진 상태로 알 것 다 알았다고 가시는 겁니까, 아니면 또 다른 나를 위해서 새로운 복음 찾아 가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직도 남아있습니까? 그게 산산조각 났습니까?” 그런 거예요.
이걸 실감나게 하려면 말로 해서는 안 되고요. 실제로 종이를 찢어야 돼요. 종이에 ‘자아’라고 쓸까요? ‘자아’라고 쓴 종이를, 이 자아를 산산조각 찢잖아요. 찢을 때는 화나서 찢어야 돼요. 이 못된 자아, 자아 싫어! 맨날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내 잘남만 생각하고, 싫어! 무슨 행동과 말을 해도 ‘나 하자 없지? 나 이제 정당하잖아. 나 너보다 낫잖아.’ 이걸 유발하는 자아, 싫어! 찢어서 훅 날려버려라,하고 자기에 대한 분노.
요한복음 12장 같으면 그게 뭡니까? 자기를 미워하는 거예요(25절). 그리고 마태복음 16장 같으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나한테 올 수 없다는 것(24절). 그렇게 되었습니까?
다시 말해서, “나 이제부터 당신 복음 안 듣는 이유가 나를 제대로 지근지근 밟아줘야지, 왜 어설프게 밟느냐? 나 이제는 다른 데 가겠어. 쿵쿵거리면서 나를 막 박살내고, 이 벌레 같은 인간아! 그런 복음 있으면 찾아가겠습니다.” 이러면 “아이고, 그동안 죄송합니다. 제대로 안 밟아줘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가는 건 괜찮아요. 그래서 가는 건 괜찮다고요.
주님께서 어느 정도까지 말씀으로 밟아주느냐 하면 ‘시신이 될 때까지’ 밟아요. 시신, 시체. 왜냐하면, 시신을 보쌈할 때 시신이 되어야지만 반항하지 않기 때문에. 시신 되어서 우리 시체놀이 한번 해볼까요? 시신 누워있고 그 시신을 김밥 말이 하듯이 멍석에 둘둘 말아서 꽁꽁 묶어가지고 공동묘지에다 던지든지, 공동묘지보다 더 무서운 화장터에 집어넣든지. 시체놀이 한번 해봐요?
주님께서 우리를 시신 만드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고 이것 때문에 그래요. ‘흉물스럽기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굳건하게 ‘자기를 위해서’가 있어요. 자기를 위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시신이 아니고 시신을 둘둘 만 멍석. 멍석을 위해서 시신을 보쌈해 데려가는 거죠. 그 멍석.
그 멍석이 뭐냐? 오늘 제목으로 하고 싶은데 그 멍석이 ‘막’입니다. 막. 세포막 있죠. 세포의 모든 유기물은 막이 없으면 흘러내려요. 액체가 고체가 안 된다고요. 안에 작용이 안돼요. 막이 막으로 세포의 구성요소를 감아버릴 때 하나의 세포는 그 안에서 작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줄 때 뭘 줬느냐? 막을 줬어요. 막이 있는데 그 높이가 2.6m에요. 성막의 울타리, 성막을 두른 울타리가 5규빗이라 해서 2.6m쯤 돼요. 제가 이스라엘 가서 완전히 똑같이 만든 모형을 봤어요. 그래서 폴짝폴짝 뛰어서 보려했는데도 그 안이 잘 안 보여요. 막 말고 안에 또 천막이 되어 있잖아요. 그거는 10규빗, 5.2m에요. 딱 솟아있어요. 그것만 솟아있다고요.
그 성막이라는 막 안에는 죽은 자만 활동해야 돼요. 활동. 무슨 죽은 자가 활동합니까? 아니요. 거기는 죽은 자만 들어가서 활동해야 돼요. 죽은 자만. 아니, 뭐 움직이는 거 보니까 제사장이 움직이고 살아있는데 뭐 죽었다고 하느냐? 하나님이 ‘죽었다’ 하는 것은 막 같은 것을 발랐기 때문에 살아도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게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듯이 제사장이 성막 안에서 그 유월절 사건을 재현해요. 늘 반복해요. 반복해버리면 그 제사장이 피를 바르고 난 뒤에는 그들은 죽음의 땅에서 산 채로 죽음을 표현해요, 죽음을. 죽음을 표현한다고요.
그 죽음을 표현할 때 레위기 17장에 있는 율법의 완성이 되겠죠. “생명은 피니라” (17:11) 생명은 눈에 안 보이죠.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뭐로 나타난다? 눈에 보이는 피로 나타난다. 그러면 물질+이미지가 우상이라면 이 우상의 완성은 예수님의 몸과 그 몸에서 나오는 활동, 피가 유일하게 진짜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의 몸+피=진짜 하나님. 무슨 뜻이냐 하면 여호와는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과 피가 하나님이에요.
유대인들은 하늘에 계신 어떤 상상의 신을 향하여 ‘여호와’라고 불러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호와 관계를 주(主)로 바꾸어서 내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유대인들의 관계를 하늘을 보고 했는데, 그 하늘에 계신 분이 율법의 완성으로서 우리 곁에, 인간이 사는 세계에 같이 합류했다고 예수님이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들으면 경악스럽죠. 정말 경악스러운 거예요. 그냥 하늘에 계시지, 뭐 또 부담되게 여기까지 오십니까. 그런데 전혀 부담되지 않도록 오셨는데 오신 목적이 뭐냐? 인간이 행하지 못하는 것,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의와 나의 이득을 챙기는 이 본성, 이 본성을 주께서는 입도 못 떼게 아주 시신으로 만들어버려요.
그럼 인간은 뭐가 돼요? 인간의 육체 자체는 우상이 되죠. 아까 우상의 규정이 뭐라 했습니까? 시편 115편과 이사야 44장에 의하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그게 바로 소경이고 그게 바로 우상이잖아요. 세포로 구성된 우상. 하나님을 우회로 빙자해서 하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서’가 있는 이상 나는 나만 믿고 나만 섬기는 존재. 딱 그게 우상이죠.
네가 찾는 것은 네 몸이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기적도 행했지만, 만약에, 예수님 말씀 듣겠다고 전부 각자 도시락을 가지고 온 거예요. 예수님 말씀 듣겠다고 강론 듣겠다고 왔을 때, 주께서 축사하사 열두 제자로 하여금 그 오천 명 되는 도시락을 전부 수거해서 불 태워버린다. 그럼 사람들은 “아주 미워죽겠어!” 하겠죠.
그들의 모든 양식을 다 빼앗아버릴 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겠습니까, ‘어렵도다’하고 떠나겠습니까? 떠나잖아요. 떠난 이유가 뭡니까? 저 분은, 저 존재는 나의 의와 나의 잘남과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의 옳음과 나의 경제적인 재정적인 나의 행복이라는 이익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어느 쪽에서 규정했어요? 인간들이 결정을 내리도록 주께서 그렇게 유도하신 겁니다. 그게 오늘날 예수님의 활동이에요.
예수를 믿어요? 뭐 예수님 알고 믿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피 흘리고…” “그럼 스톱. 당신은 누군지 아십니까? 당신은 누군지 아셔요?” “아휴,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고…” “그 죄가 뭐죠?” 인간은 죄를 몰라요. 인간의 모든 개념은 자기한테 구원이 주어진다는 그걸 염두에 두고 만든 개념이기 때문에 나를 포기하는 개념이 아니라 어쨌든 저쨌든 요령을 부려서 기어이 내가 나를 살리는 그 방식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조건 하에 요령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사기꾼’. 그게 바로 사기꾼입니다.
제주도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폭싹 속았수다(‘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의 제주 방언)>라는 드라마가 있는 모양이죠. 드라마 내용은 잘 모르겠어요. 4.3 사태인가 드라마를 안 봤으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누가 누구를 속였다는 거예요? 본인이 꾸준히 누구를 속여 온 거예요? 자신을 덮고 온 것이다. 자신을 속여 온 거예요, 꾸준히.
할 수 있는 재주가 이 재주밖에 없어요, 자신을 감추는 것. 은근히 자기의 의와 이익을 노리고 있는 그런 자신의 욕망을 자아가 끌고 교회가자고 하면서 주님 말씀 앞에서 먼저 자기가 자기 단도리를 해요. ‘조용히 해! 나오지 마. 함부로 나대지 마. 들켜. 가만있으면 돼.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 왔습니다. 천국 가려고 왔습니다.’라는 거 들켜. 들키면 안돼.’
들키지 않는 것과 아예 없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잖아요. 안 들키도록 하는 거예요. 안 들키도록. 그렇게 ‘자아를 위하여 또는 자기를 위하여’ 나올 때, 인간은 결국 자기의 의와 자기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종교생활을 하든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하잖아요.
그리고 다시 돌아갈 때 인간들은 결국 뭐를 챙기느냐 하면, ‘경험(치)’. 경험을 믿어요. 체험을 믿는다고요. 체험을 믿는데 이 체험이 무슨 체험이냐 하면, ‘과연 나는 옳다는 것을 증명해줄 체험’이에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줄 체험. 주의 말씀은 모르겠고, 주의 말씀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일단 옳을 경우에 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주의 말씀을 경유해서 이 말씀 지키고 이 말씀 지키고 이렇게 착실하니 역시 나는 처음부터 생각한 대로 난 옳아. 나는 구원받아 마땅해.’라고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딱 우상이죠. 딱 우상이라고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서 우상 만들지 마라’는 멘트 있잖아요, 멘트. 율법. 율법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상 안 섬겼으니까 구원해주세요.’라고 나서는 사람을 패는 작업이 있겠죠. 패는 작업, 작살내는 작업이 있겠죠.
그게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걸림돌’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인간의 눈에는 나 잘났다는 걸 증명하는 체험과 자꾸 빗나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믿었으니까, 하나님은 우리 편이니까 바벨론부터 이방민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거라 예측을 했는데 이 예측이 자꾸 빗나가요.
그래도 끝까지 버티고 믿음으로 버텨야지. 내가 뭘 잘못했겠지. 잘못 생각했으면 수정하면 되니까. 원래 과학은 그래요. 뭔가 논리가 딱 안 맞으면 다시 실험해서 결과 나오도록 하면 되니까. 또 해서 그래, 말씀이 이 점이 문제였어. 컴퓨터 고장 나면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잖아요. 자꾸 수정하잖아요.
진즉에 진즉에 폐기처분해야 될 컴퓨터를 붙들고 계속 컴퓨터 고치듯이 자기 자신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고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이 나를 흉물스럽게 본다는 그 시선은 전혀 찾을 길이 없어요. 못 찾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작살내버려요. 걸림돌이라 하는 것은 에스겔에 보면 그게 나와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또 그들의 우상이 걸림돌이었다. 14장 3절에 걸림돌이라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하나님 시선하고 그들 시선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거예요.
유대인이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외국 바벨론이나 앗수르에 포획된 그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그냥 불렀겠어요, 안 그러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던가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이고. 그들이 아는 지식을 몽땅 다 그들에게 그야말로 소나기 퍼붓듯이 퍼부었어요.
말씀의 소나기를 퍼부었는데, 문제는 그들이 뭐를 지금 수정 못해요? 그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박살내기 위해서’ 말씀을 줬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그걸 용인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딱 기다려. 내가 너 죽여줄게.” 이런 걸 모른다고요, 이런 걸.
유월절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발라라. 그러면 너희 장자는 살고 나머지는 죽는다 할 때, 이미 그 유월절에 그때만 바르고 그다음부터는 살았으니까 다시 헤헤거리면서 자기 자신은 스스로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 엄청난 오산이죠. 유월절의 사건으로부터 line이 들어오죠, line, 선이 들어온다고요. 이 선은 유월절 체험으로 연결돼요. 유월절 체험의 사슬구조죠. 유월절 체험만이 그 율법 안에 담겨서 계속 그들에게 주어진 거예요.
주는 방법은 바로 이방민족과 맞닥뜨리게 만드는 겁니다. 이방민족과 맞닥뜨릴 때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 많이 아니까 이방민족을 이겼습니까? 율법 많이 아는데.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친 제사장도 있고 다 있는데 그들이 이방민족을 이겼어요, 못 이겼어요? 못 이기죠.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언제 이겼어요? 우리가 ‘자기를 위해서’라는 것을 버릴 때,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나서게 할 때만 그들은 이겼다 이 말이죠. 대표적인 예로 여러분 잘 아시는 이야기할게요. 다윗과 누구와 싸웠어요? 다윗과 골리앗이죠. 그런데 다윗 이전에 다윗의 자리를 누가 차지했었습니까? 사울 및 그 병사들이 골리앗과 대치하고 있었죠. 다윗은 어느 자리에 들어갑니까? 골리앗 자리에 안 들어가고 ‘사울 및 병사들’ 자리에 들어가죠. 이스라엘 군대에 들어갑니다. 적은 동일하게 골리앗이고.
골리앗과 대치되는 자리에 다윗이 들어감으로써 두 가지 효과가 있어요. 하나는, 골리앗은 적이다. 골리앗은 뭐가 없어요? 할례 받지 못했죠. ‘할례 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적이다.’ 또, 사울 및 병사들은 뭡니까? ‘할례 받아도 적이다.’ 할례 받아도 이게 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다. 이 슬로건으로 했잖아요.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얼마나 우사스럽겠어요(남이 보기에 창피하다), 사울 및 병사들이. 게다가 다윗은 어른이 아니에요. 소년이라 소년. 소년이에요.
전세계 태권도 대회에서 팔팔한 20대 어른들이 나오는데, 작년에 홍콩에서 열린 세계 태권도 품새 선수권 대회서 14살 먹은 한국애가 금메달 땄어요. 이거 확인하려고 하면 <인간극장>보면 돼요. 확인해보면 되죠. 어른들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14살 먹은 애가 금메달 땄거든요. 어른들 우습게 만들고. 10점 만점에서 9.54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그럴 때 “내가 엄마 말씀대로 코치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거는 자기 전쟁이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태권도 품새 해서 옆차기로 상대편 날려버리고 금메달 땄을 때, “이 시합은 우리의 시합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합입니다.”하면 도대체 우리를 완전히 엿 먹이는 이야기밖에 안돼요. 완전히 엿 먹이는 이야기.
다윗과 우상의 만남이 나오는 구절이 굉장히 흥미로워요. 사무엘상 19장 13절, 다윗이 사울한테 찍혔어요. 찍혀서 장인어른이 죽이려고 덤벼듭니다. 장인어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현재 갖고 있는 이스라엘 권력을 다윗이 와서 갉아먹는다고 생각해서 자기 적으로 간주해서 죽이려고 했단 말이죠. 부인되는 미갈이 그걸 알아챘죠.
그전에 보면 10절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여기서 다윗이 살아난 이유가 1번-사울이 평소에 창 연습을 제대로 안 했다, 뭐 그런 걸까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윗을 지목해서 사울과 분리시키는 작업을 하죠, 사울과.
분리시키는 작업인데 12절에 보면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13절,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사울의 군사들이 와서 “다윗 어디 있어? 아직 자고 있구만. 뭐 볼 것도 없어. 그냥 찔러 죽여!” 이렇게 하게 되면 사울의 군사들, 사울 쪽에서 볼 때 다윗의 존재는 그냥 마네킹 같은 존재죠. 마네킹이죠. 마네킹인데 수상한 마네킹,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그걸 ‘내란의 수괴’라고 이야기해요. 내란의 수괴 같은 존재가 다윗이 되는 겁니다. 헌재 열어서 재판하든지 해야 됩니다.
그런데 미갈의 행동이 참 재미있어요. 다윗이 누웠던 자리에 뭘 집어넣었는가? 우상을 대신 뉘였다는 것은, 우상 같은 것은 얼마든지 창으로 찔러 죽여도 상관없는 시신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죠. 사울의 신하가 와서 다윗인 줄 알고 찔렀는데 보니 우상이라. “아, 우상에게 우리가 참 몹쓸 짓을 했다.” 이렇게 합니까? 안 하죠.
마네킹 돈은 좀 들였다만,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안 된다면 상대방을 전부다 마네킹으로 보는 거예요. 사물로 보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위해서’가 너무나 절대적이기 때문에 나에게 도움 되는 쪽에게만 호의를 베풀 용의가 되어 있지,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살해대상, 그냥 제거해야 될 대상, 마네킹 같은 그런 걸로 보는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우상 같으면 기를 쓰고 없애잖아요.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의 복이 안 오니까. 내 복을 가로채는 우상 같으면 아주 질색이죠. 그 질색인 우상을 미갈이 떡 옆에다 놓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우상이 얼마나 호신용으로 흔했겠습니까?
첫째 시간 끝나면서 이야기합니다. 우상은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고 해결할 수 있는 해결대책으로 있는 신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학, 그리고 철학, 과학. 그 이야기는 10분 뒤에 합시다.
■광주강의20250321b 마태복음 9장 17절(막)-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우상을 언급하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아브람은 자기 아버지가 우상을 만들던 사람이었고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택했어요. 아브람 입장에서는 진짜 하나님이 따로 있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어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공통되는, 공유되는 그러한 개념을 형성하게 되어 있거든요. 그게 사회니까요.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언어는 똑같은 언어가 담겨야 서로 소통이 되니까 같은 단어를 쓰면서 서로 소통이 안 되면 그 공동체에서 추방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상을 만든 게 아니고 신을 만들었죠. 다들 그렇게 하니까, 자기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사 자기 아비 집에서 끄집어내요. 자기 아비 집에서. 자기 아버지 집에서 끄집어낸다는 건 라인 자체가 다른 라인을 새로 시작하시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람 라인 말고 아브라함의 라인을 새로 시작하겠다. 그 아브라함 라인을 시작하면서 주입되는 게 뭐냐? 언약이라는 게 들어가요, 언약이라는 게.
그런데 언약이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아요. ‘언약이란 그 안에 주의 이름이 담겨있는 것.’ 주의 이름이 담겨있는 것. 그런데 언약이라는 게 하나의 새로운 노선으로 온다면 기존 노선은 어떻게 됩니까? 새로운 노선에 의해 기존 노선은 폐기되어야 되겠죠. 폐기되면 폐기된 노선에 누구 이름이 들어있습니까? 나의 이름이 들어있죠. 나의 이름이 폐기된다.
합쳐버리면, 언약이란 내 이름을 겨냥해서 폐기처분하는 하나님의 작업, 그것이 언약이다. “너는 누구냐?” “저 쓰레기입니다.” 폐기대상이다. “왜 쓰레기인데?” “이름 자체가 저쪽 쓰레기 라인에서 와서 쓰레기입니다.” 이럴 거예요.
그러면 이제 나의 이름을 폐기하고 주의 이름이 담길 때, 인간의 이름 곧 존재들이 하는 것은 폐기되어야 하니까, 폐기된다는 것은 좋게 좋게 거래하고 협상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고, 강제 폐기되거든요. 강제 폐기되기 때문에 강제 폐기되는 과정에서 내 이름을 지켜내기 위해 평소에 우리는 어떠한 경험과 체험을 수집해왔는가 ? 내 이름을 공고히 하고 내 존재를 공고히 하기위한 방식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방식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주의 이름이 들어와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희생’입니다. 희생. 따라서 ‘우상이란 희생이 담겨있지 않은 것.’ 자기 파괴가 담겨있지 않은 게 바로 우상입니다. 이제 유월절 어린 양의 의미에 대해 감이 오시죠? 유월절 어린 양이 뭡니까? 희생의 체험만이 너를 살린다는 뜻이잖아요. 외부에서 온 희생이에요. 내가 희생하는 거 아닙니다. 우리는 희생할 줄도 모르고요. 희생이 뭐지? 그렇게 돼요. 인간에게 희생이라 하는 것은 이보 전진을 위해서 일보 후퇴하는 것밖에 안돼요. 이것은 전략적인 거죠. 전략적인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으로 바치잖아요. 아브라함 라인이에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합니다, 로마서 4장에서. 아담이 우리 조상이라는 말은 아담에게 했던 일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거고 그러면 우리는 아담의 조상후손이지만,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고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믿음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에게 했던 경험과 체험이 그대로 우리에게 반복되고 되풀이되겠죠.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그러한, 자기가 속해있는 그 시간대나 사는 데에서 일어나는 반복되는 희생의 원리원칙을 압축해서 단출하게 묘사한 데가 있어요. 그걸 표현한 데가 있어요, 성경에. 이제 좀 어렵습니다. 그게 좀 어려워요. 함축되고 단출하게 했기 때문에 그걸 풀어내려면 좀 복잡한 논리가 필요하겠죠.
요한계시록 12장 2절,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아파서’. 어떤 여인이 아파요. 굉장히 아프다고요. 이 여인이 아픈 이유가 뭐냐? 누구를 임신했기(해산) 때문에 아파요. 어떤 남자 아기를 임신해서 그 여자가 아파요. 이게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어떤 여인입니다. 거기 보면 해를 입은 여인이라고 나오죠,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 보면. 1. And there appeared a great wonder in heaven; a woman clothed with the sun, and the moon under her feet, and upon her head a crown of twelve stars:
사람들은 이 여인을 궁금해 해요. 왜 궁금해 하느냐? 나도 여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이 여인 같은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여인의 체험은 아파요. 아픈 것을 먼저 나서지 않는 게 인간입니다.
아프게 한 것은 내 의도로 아픈 게 아니고 다른 돌발적인 사태가 나한테 주도적으로 일방적으로 주어질 때, 아파요. 주님이 찾아드니까 주님이 내 안에 임신이 되니까, 내가 원치 않는 고통, 아픔이 찾아오면서 그 체험은 믿음의 계열의 공통되는 요소로서 함축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아프면 이제 구원받겠지. 아프면 예수님 임신한 거고 그러면 나 구원받겠지.’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또 수작들을 부리지 마시고요. 그냥 아프다면, 그럼 이 여인이 어떤 여인이며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을 임신해서 아파하는 여인과 대비가 되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에. 그 여인이 ‘음녀’라는 거예요. 음녀.
이 여인이 아프니까 음녀는 신났죠. 이 여인은 희생이지만 음녀는 뭡니까? 희생이 없죠. 그 자체가 우상이 되니까. 그래서 우상이라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방민족에게만 있는 신이 우상이라는 그 경계가 틀어지면서, 약간 복잡하지만, 언약을 가진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이 이방민족한테 삼켜졌잖아요. 삼켜져버리면 삼킴 당한 이스라엘의 언약이 삼켰던 모든 이방제국에까지 전부 다 영향력이 그 안에서 암세포처럼 퍼지게 됩니다.
그럼 삼켰던 그 나라를 짐승이라고 해요. 다니엘에서 짐승이잖아요. 첫째 짐승, 둘째 짐승, 셋째, 넷째 짐승. 넷째 짐승에 가면 글로벌해요. 전 세계 예외 없이 모든 국가가 짐승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첫 번째 짐승이 그게 짐승이라는 그러한 별칭으로 불리워진 이유가 언약 백성을 삼켰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오늘날 글로벌한 모든 세계는 같은 짐승이니까 똑같은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공격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임신한 그 성도들을 공격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게 음녀죠.
그럼 요한계시록에서 아픈 여인이 어떤 여자인지 알기 전에, 현재 이런 성도 빼놓고 나머지는 어떤 요소로 통합되어 있는가?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어떻게 통합되어 있는가? 그 통합된 게 과학, 다른 말로 하면 지식이죠, 그리고 종교적으로 신학. 과학과 신학입니다. 신학은 영을 추구하거나 또는 구원을 추구하는 의지고요. 이 과학과 신학 이런 것들이 이들한테는 전혀 거리낌 없이 잘 통용돼요. 왜냐하면 각자 이런 과학과 신학과 철학이 자기를 위해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욕을 먹을 각오하고 하나씩 나눠드리겠습니다. 왜 팝송이나 대중가요 가사를 이렇게 프린트해서 이 귀한 공부시간에 나눠주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을 감추고 있는가는 우리가 성도다, 신자다 하는 이름 때문에 고이고이 감추고 있어서 안 보여요. 그런데 세상은 그게 없잖아요. 세상은 자기 내면에 있는 욕구, 욕망을 여과 없이 이렇게 팝송이나 가요로 드러내니까 소위 성도다, 신자 맞다 하는 속에 잠복되어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들추어내는 거예요.
제목은 ‘Desperado(방랑자여)’ 이글스(Eagles)가 불렀던 1973년도 곡입니다. 이글스가 불렀던 또 유명한 노래 있죠. ‘Hotel Califonia’(1976). 거기에 가사를 보면,
Desperado
Desperado, why don't you come to your senses?
방랑자여, 이제 정신 좀 차리는 게 어때?
You've been out ridin' fences for so long now
그렇게 오랫동안 경계를 넘나들며 떠돌았잖아
(경계. 가족들 친지들이 나한테 원하는 것과 내 욕구를 펼치고 싶은 것 사이의 경계죠.)
Oh, you're a hard one But I know that you got your reasons
너는 쉽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아
These things that are pleasin' you can hurt you somehow
지금 너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결국 너를 아프게 한 거야
(이젠 좀 나이가 들었다 이 말이죠. 옛날 청춘을 돌아보니 왜 그리 철딱서니 없느냐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Don't you draw the queen of diamonds, boy
다이아몬드 퀸을 선택하지 마 (포커에서 다이아몬드 퀸이라 하는 것은 돈이죠. 돈 많은 여자겠죠.)
She'll beat you if she's able
그녀는 기회만 있다면 너를 이용할 거야
You know the queen of hearts is always your best bet.
하트 퀸, 그런 여인을 붙잡아. 언제나 최고의 선택이라는 걸 알잖아 (하트 퀸은 빨간 사랑의 마크)
Now it seems to me some fine things have been laid upon your table
지금 보니까 좋은 패들이 네 앞에 놓인 것 같은데
But you only want the ones that you can't get
너는 오직 가질 수 없는 것들만 바라고 있지
(자기가 이미 가진 것들은 욕망하지 않고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자기 내부에서 욕구와 욕망이 계속 살아서 움직였던 거예요. 그러니까 돌아다닌 거예요.)
Desperado, oh, you ain't gettin' no younger
방랑자여, 이제는 더 이상 젊은 게 아니야
(야, 이거 참 많이 듣던 소리죠. ‘너도 이제 나이를 봐. 그렇게 싸대고 다닐 나이가 아니잖아. 이제 집구석에 좀 눌러앉아, 고만 다니고.’ 이런 거.)
Your pain and your hunger, they're drivin' you home
고통과 허기가 결국 널 집으로 인도할 거야
And freedom, oh freedom well, that's just some people talkin'
그리고 자유? 자유는 그냥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그러니 ‘젊을 때는 마음껏 나 하고싶은 대로 한다’ 그런 데에 현혹되면 안돼. 하고 충고하는 거죠.)
Your prison is walking through this world all alone
오히려 이 세상을 홀로 떠다니는 것이 네 감옥이잖아
(감옥. 네가 넓은 세상, 네 꿈을 펼친다는 그것이 약간 평수가 넓은 감방이었어요. 그 다음이 중요해요.)
Don't your feet get cold in the winter time?
겨울이면 발이 시리지 않은가?
(내가 이 팝송을 골랐던 이유가 이겁니다. 겨울이 오면 발이 시려요. 겨울이 오면.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꿈, 꿈 하지만 자기는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처 발견 못하는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 망가졌는지를. 내가 어느 정도 허송세월했다는 걸 몰라요.)
The sky won't snow and the sun won't shine
하늘에 눈도 내리지 않고 태양도 빛을 비추지 않지
It's hard to tell the night time from the day
밤인지 낮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그런 날들
You're loosin' all your highs and lows
자네는 감정의 기복조차 사라지고 있네
(어지간히 낮에는 자고 4시에 출근해서 밤중에 돌아다녔는 모양이라. 밤낮이 바뀐 삶을 살면서 그러다 보니까 이게 좋은지 나쁜지 행복한지 불행한지 감정의 기복조차 점점 무뎌졌다 이 말입니다.)
Ain't it funny how the feeling goes away?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참 이상하지 않아?
(네 정신이 뭔가 망가졌다는 걸 몰라? 이런 뜻이죠.)
Desperado, why don't you come to your senses?
방랑자여, 이제 정신 좀 차리는 게 어때?
Come down from your fences, open the gate
네가 쌓아올린 벽을 허물고 문을 열어 봐
It may be rainin', but there's a rainbow above you
비가 내릴 수도 있겠지만 (축축하겠지만) 그 위엔 무지개가 있을 거야 (여기 또 무지개 등장하네요.)
You better let somebody love you (let somebody love you)
이제는 누군가 너를 사랑하도록 해줘
Let somebody love you before it's too late
네가 사랑하는 것 말고 누군가 너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너무 늦기 전에
딱 들어보니 굉장히 어떻습니까?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죠. 이런 잔소리가 다 누굴 위함입니까? 이 방랑자, 사람 되라고 하는 소리잖아요. 그러니 세상이라는 곳이 결국 뭡니까? 어떤 충고든 잔소리든 이 모든 것이 누구 잘 되도록? 나 잘 되도록 하는 거예요. 나 잘 되도록. 그 윤리 도덕이 철학에 들어있어요. 철학은 윤리를 알맹이로 하기 때문에. 신학도 마찬가지고.
누구 잘 되도록요? 다시 한번, 누구 잘 되도록? 나 잘 되도록 하는 거예요, 나 잘 되도록! 그게 무슨 세계를 이룬다? 음녀의 세계. 저주받은 이 세상의 속성입니다. 나 잘 되도록. 신학도 한몫 하죠.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다. 성경 봐. 다 너 잘 되기 위해서 말씀 주신 거야.
그러니까 나 잘 되도록 하는 그 자체가 내가 손댈 수 없는, 내가 수정이나 교정을 할 수 없는 막가는 그냥 우상덩어리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남아있는 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 주의 이름으로 교체시키느냐 그 작업이 남아있겠죠. 잠언서 20장 24절에서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해서 하나님께서는 벌써 잠언서에서부터 하나님 자신과 인간을 경쟁관계로 놓고 있습니다. 경쟁관계에요.
잠언서 19장 21절에 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계획이 곧 뭐다? 우상이다. 우리가 계획하면 내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이룰 것이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러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신학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게 아니고요.
네가 무슨 계획을 하고 무슨 기대를 하고 어떤 것을 하더라도 쓰레기다. 그것은 결국 너 자신을 미화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너의 본심에서 도출된 것이다. 거기다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이룰 수 있습니다, 하는 것은 바로 물질+이미지, 신적 형상 이미지를 네가 끄집어내서 거기다 갖다 붙이는 그러한 계략이죠. 꼼수에요, 꼼수.
주님께서 우리는 우상인 것을 끄집어내시고 주의 이름으로 교체하는 작업에 있어서 다시 한번 우상의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상이란, 자기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의식하는 정신’ 이게 우상의 본질로 들어가 있어요. 나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타인, 남이죠, 타인에게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고 또는 안 묻더라도 은근히 고대하고 기대하는 것, 이게 바로 우상의 주특기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상이 안 되려면 무엇이 제거되어야 돼요? 타인을 의식하는 정신이 제거되어야 되겠죠. 이걸 제거하는 방법이 1번-마취제를 쓴다, 이런 거 아닙니다. 이 타인의 자리에 누가 오시느냐? 주의 이름이 와요. 주의 이름이. 호산나, 부르면서 난리도 아니었죠. 이 타인의 자리에 주의 이름이 옵니다.
오게 되면 비로소 내 우상의 본질이 자극을 받아 드디어 또 발작을 하는 거예요.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갖고 있던 그 정신을 사랑합니다.’ 그런 발언들은 앞에 뭐를 노리는 거예요? 나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는 겁니다. 이런 걸 잘 하는 걸 요한계시록에서 뭐라고 하느냐? ‘거짓 선지자’라 해요, 거짓 선지자. 세 자로 하면 아까 뭐다? 사기꾼들.
요한계시록 12장 보겠습니다. 서서히 힘든 작업에 들어갑니다. 해봅시다. 힘든 작업이에요. 2절에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아팠는데 자기가 임신하고 싶어 한 게 아니고 그냥 임신된 거예요. 꼭 마리아처럼. 그럴 때 그 아픔을 통해서 누가 나타나느냐 하면 붉은 용이 나타나요. 짐승이 나타나는 거예요. 짐승이 나타나서 그 해산한 아이를 노리고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해서 그 여자를 공격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인생은 내가 이렇게 착실하게 꾸려나가려고 애썼는데 난데없이 예수님이라는 분의 말씀과 예수님의 존재가 나로 하여금 예상 밖의 밉상과 미움과 비난을 받는 계기를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아기는 임신했고 세상은 나를 공격하고. 타이밍이 멋지죠. 멋진 타이밍이에요, 멋진 타이밍. 그리고 내가 이렇게 예수님 때문에 아파하는 것은 내가 의도했던 게 아니고 내가 기대했던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5절에 보면 드디어 여자가 아이를 낳았습니까, 안 낳았습니까? 여자가 아기를 낳고 난 뒤에 그 아기는 어디로 갔느냐? 뭐 자기 엄마를 좀 구하든지 해야 드라마가 재미나는데 아기는 매정하게 그냥 하늘로 올라가버려요. 아버지께로 하나님 앞에 올라가버려요. 올라가니까 아이를 임신했던 그 여자는 그냥 방치되고 버려짐을 당해버려요. 그 버려지는 곳이 어디냐 하면 6절에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광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것이 우리가 ‘내 인생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식으로 전혀 우리가 기대한 게 아니에요. 일은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고, 예수님을 싫어하는 짐승, 용의 존재와 그리고 안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것과 그로 인하여 내 인생은 아주 엉망이 되어 버렸어요, 엉망이.
예수님을 임신하지 않은 남들처럼 그렇게 좀 살아봤으면 좋겠다 할 정도로 그들의 삶이 부러울 정도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이질적이냐? 낯서냐? 하는 그러한 체험이 주어집니다. 여자 자체가 완전히 예수님 때문에 생겨버린 희생물이 되는 쪽으로 주께서 이끌죠. 아브라함 자손들, 신앙인들 다 그래요. 아주 기이한 현상입니다.
광야로 갔다 이 말이죠. 광야로 가서 좀 살만하니까 용이라는 것이 네비 찍어가지고 도망쳐도 도망을 못쳐요. 광야 256번지에 지금 오두막집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용이 그 광야에 뭐를 부어버리느냐 하면 물을 쏟아버려요. 15절,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그다음 16절에 보니까 떠내려가야 맞잖아요. 떠내려가게 했는데 또 안 떠내려가요.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세상에서는, 교회도 비슷하지만, 세상에서 불신세계에서 이 장면, 이 대목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거는 신화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너무 외로워가지고 정신착란이 일어나서 내가 정신착란 일어나서 보이는 환상도 남아있는 교인들, 핍박받는 교인들에게 도움될까 싶어서 이 책을 남겼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거 구라다. 이거 신뢰하지 마. 사도 요한의 사적인 개인적인 체험에 불과하고 우리는 이걸 통해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구라를 진리라고 내놓겠는가, 그 정도로 이해하자. 왜? 지나간 구라가 한 두 개가 아니니까. 이건 믿을 게 못된다. 이건 현실이 아니고 그냥 신화에 불과하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누가요? 이 음녀 쪽에서. 또 신학은 신학 쪽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이 세상 쪽, 마귀 쪽에서 요한계시록 12장 이 이야기를 물로 확 붓죠. 진짜 예수님을 임신해서 예수님의 임신 때문에 아파했던 진짜 성도를 이 땅에서 아예 삭제시키는, ‘그런 존재는 일체 없다. 그런 존재는 없는 거야.’라고 삭제할 수 있는 방안을 이 세상에서 내놓겠어요, 안 내놓겠어요? 물을 확 토해가지고 모든 걸 희석시켜요. 짐승도 없고 아기 예수 임신한 것도 없고 광야도 없고 그냥 사적인 종교적인 그러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희석시키는 무마시키는 그런 논리가 나오겠습니까, 나오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나오죠.
더 중요한 진리는요. 이 논리를 모든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그걸 수긍하려고 애쓴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상은 첫째,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다음에 타인의 정신을 의식한다. 타인, 대부분 거의 전부죠, 그 시대의 정신을 의식해서 수용할 마음자세를 갖고 있어요. 왜? 무엇을 위해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대다수가 이 대목을 뭐라고 하는지 한번 들어보자, 이런 거예요. 그 목적이 뭡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면 이러한 것에 휘둘리지 않고 이것을 배격하는 현상은 어떤 현상이에요? 진짜로 성령이 와서 예수님이 안에서 잉태된 사람에게 해당되겠죠. 이걸 이렇게 합시다. ‘육에서는 영이 나오지 않는다.’ 지금 영이 와서 육을 부정해야 되는데, 긍정적인 육에서 영을 뽑아내려니까 이런 모든 성경해석이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견해를 존중해주고자 하는 거예요.
왜? 이 사회에서 자기가 지탱하는 방법은 그 방법 외에는 없기 때문에. ‘나를 너무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당신의 모임에 나를 그냥 넣어주세요. 당신의 정신에 의해서 인정받고 싶은 것이 내 (우상적인) 본심입니다.’ 우상이라는 소리는 안하죠. 우상이라는 소리는 하면 안 되죠.
그래서 이러한 유혹과 시험을 당해낼 자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아무도 없어요. 성경을 백번 보고 봐도 아무도 몰라요. 없죠. 없는데 예수님 쪽에서 임신한 사람, 성경말씀대로 그대로 우리 자신들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몰아붙여버립니다. 몰아붙입니다.
그러니까 ‘아프다’는 말이 뭐냐? 아프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주님이 오지 않으면 아플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주님 때문에 나의 모든 사고가 다 무너지고 이거는 나를 지킬 수 있는 어떠한 토대도 현장에서 다 치워버리는 거예요. 이거 이거 수집해서 나를 만들자 하는 그런 기회조차 주님께서 다 무산시키는 겁니다.
그걸 누가 하시는가? 그걸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해주셨잖아요. 언약이 잉태해서. 특히 요셉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대표적인 거죠. 꿈 때문에 완전히 망가진 인생을 살았어요. 어느 정도냐 하면 나중에 국무총리가 되는 망가진 인생을 살았어요.
망가졌다는 말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모든 건 망가졌다는 거예요.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것은 결국, 다시 한번 내가 괜찮은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걸로 수집하는 용도가 아니고 ‘꿈대로 아버지, 엄마, 형들을 위해서 내가 국무총리라는, 내가 원치도 않는 이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하는 뜻이에요.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여러분들에게 희생물이 되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런 뜻이란 말이죠.
자, 그러면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렇게 정리하면 간단하죠. 이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말씀이 점선이고 바깥에 인간이 있다면 이건 우상이죠. (첨부파일 그림 참조) 세 번째 합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남을 의식하는 것. 남 지키기 위해서 좋은 일 하는 게 아니라, 나 좋으라고 남 의식하는 거예요. 우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오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남들은? 남들은? 어? 예수 죽였다. 그럼 나도 예수님을 부인한다.’ 이럴 수밖에 없어요. 이게 우상이거든요.
점선인 말씀이 우상인 인간 안에 들어와요. 말씀이 점선으로 들어옵니다. 들어오면서 이 점선이 나라는 점선에게 ‘말씀의 막’을 형성하죠. 말씀의 막이 형성됩니다. 일종의 하늘나라, 예수님 몸의 세포가 됩니다. 예수님 몸의 세포입니다. 그럼 말씀이 뭐로 바뀌느냐? 이게 실선으로 바뀌어요. 실선으로 바뀌겠죠.
그럼 말씀이 들어올 때, 우상을 덮칠 때에, 우리 내부에서는 우리가 몰랐던 우상성이 폭로되는 거예요. 우상성이 폭로가 됩니다. 굉장히 점잖은 사람인데 이 말씀에 대해서만 갑자기 ‘싫소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그 대목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사기 17장. 우상이란 뭐냐 하면 내 안에 있는 불안감과 불안정성을 해결하는 해결책이라 했죠.
17장 1절에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인간이 이걸 가져갔어?” 그런데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엄마, 내가 가져갔어.”
이렇게 하니까 그들은 뭐를 느꼈느냐 하면, 나를 지키기 위해서 방금 저주를 했잖아요. 그런데 내가 내놓은 저주의 대상자가 지금 나타났죠. 누굽니까? 아들이 저주받게 되었어요. 불안하잖아요. 말은 뱉어놨고 저주는 뱉어놨고. 이걸 저주는 없어지고 복으로 바꾸기 위해서 무슨 조치를 할 때 그때 등장하는 게 뭐냐?
3절,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껍데기는 여호와지만 안에는 우상적인 사고방식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 여호와를 믿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나는 거죠. 그러면 왜 구체적으로 신상을 만드냐? 구체적이어야 돼요. 구체적일 때 정서적인 안정이 더 와요. 이렇게 몸으로 만질 때. ‘하나님 믿습니다.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러면 안돼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적을 하든지 징크스를 피한다든지.
축구하기 전에 손톱을 안 깎는다든지. 이제 오만하고 붙어야 되는데 오만 이것만 한번 이기면 자동적으로 월드컵 본선 나간다. 오만하고 붙었는데 이 오만이 얼마나 오만한지 한 골 넣어서 1대 1로 비겼다. 그러면 그동안 월드컵 나가기를 바라는 온 국민의 징크스가 좌초된 거예요. 대한민국이 월드컵 나가야 된다는 그런 구절이 있습니까?
성경구절은 하나님에 대한 거고, 우상은 누구에 대한 겁니까? 내 마음의 불안정과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용도로 성경말씀 말고 내가 나를 지켜보고 나를 지켜주는 그 신을 인간은 따로 교회 다니면서도 따로 마련하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 형편이었어요, 그 당시에.
그러니까 만약에 아들이 돈을 안 훔쳐가면 그들은 뭘 믿는 사람 되겠어요? 여호와 믿는 사람이죠. 딱 가져가니까 여호와가지고는 이건 턱도 없어요. 저주가 안 씻어질 것 같은 느낌 드는 거예요. 여호와긴 여호와인데 성의를 표시해서 여호와 이름의 신상까지 만들어서 돈을 돌려줘요. 그것가지고도 모자라서 5절에 보면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그 사람에게 일 년 연봉을 주면서 사적인 제사장까지 삼을 정도로, 자기가 진심으로 저주한 것이 진심으로 철회되길 바라면서 신을 섬긴 거예요. 그만큼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거예요. 초조해 있어요. 초조하고 불안하면 반드시 예수든 여호와든 삼위일체라는 이름의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다. 왜? 우리 자신이 우상이니까. 우리 내부의 이미지가 겉으로 우상에 투영되니까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필수 절차에요.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왜 아들이 돈 가져간 걸 엄마가 몰랐을까요? 그건 아까 잠언서 19장 21절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내가 내 뜻대로 되냐 안 되냐 하면서 마음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를 때, 다시 말씀은 뭐라고 하느냐?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그 사달난 거? 그거 내가 했다. 왜? 그거 내가 한 거야. 뭐 이의 있어?” 전도서 9장 1절에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아주 짧아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모든 것이 손 안에 있다, 이렇게 할 때 이 소리 듣고 마음이 그렇게 편하던가요? 아, 나 이 말씀 듣고 은혜 받았다, 이래요? 안돼요, 이게. ‘다음에는 이런 사건,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 하나님 일으키기 있기, 없기? 없기!’ 지가 막 하나님한테 윽박지르면서 ‘앞으로 이렇게 내 가슴 놀래키기 있기, 없기? 없기~! 앞으로 내가 헌금 드리고 잘 할 테니까 없기.’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까 잠언서 20장 24절 했죠.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언서 이 말, 전도서의 말을 사람들은 ‘그래, 그래.’ 전부다 수긍해요, 논리적으로. 수긍하는데 그 말씀이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지는 말라는 이야기에요. 인간 쪽에서의 우상성의 특징입니다.
자, 끝으로 그러면 이렇게 뜸 들였으니까 이제 해답을 해야 제가 곱게 오늘도 끝날 수 있잖아요. 해답도 없으면 마음이 섭섭하다는 거예요. 있습니다, 해답. 마태복음 9장 16절, 17절. 오늘 강의는 이때를 위함이다. 이 말씀을 위함이에요. 마태복음 9장 16절, 17절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겁니다.
그동안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인간에게 악마가 씌워준 막이 있었습니다. 막. 이걸 주님은 낡은 막, 옛 막이라 하셨어요. 막이 있었어요. 이 막이 어떻게 되느냐? 주께서는 이 막을 찢어버립니다. 막을 찢으면 안에서 쓰레기하고 오물이 와르르 쏟아지겠죠. 쏟아진 쓰레기를 다시 새로운 막으로 그걸 담아버려요.
16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이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새로운 막을 주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새로운 막을. 새로운 막이 준비되기 위해서는 내게 있는 모든 속성이 옛날 막에 의해서 푹 젖어있어서 추잡하고 더러운 것들만 내 안에서 출렁였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되겠죠. 스스로 인정할 수는 없어요.
그럼 뭐냐? 우리에게 아직도 우리 인생이라는 걸 주신 이유는, 나를 지키려는 그 막 있잖아요, 옛 막, 아담에 속한 막, 그것을 허물기 위해서 주께서 시간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늘여주시는 겁니다. 이 방법이 뭐냐? 육에서는 뭐가 나온다? 육에서는 자꾸 육적인 아이디어만 나와요. 요한복음 3장 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전도서 한번 보겠습니다. 전도서 11장 5절,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바람의 길. 전도서 1장에서는 어디서 불며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했죠. 요한복음 3장 8절에 가면 성령의 임함이 뭐와 같으냐? 바람과 같아요. 바람이 오게 되면 그동안 기존의 아담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막 있잖아요, 이 막은 바람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람을 잡을 수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어요. 그냥 바람에 의해서 완전히 난도질당하고 다 해리되고 해체되어 버려요. 바람에 의해서.
성령이라는 이름의 막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성령의 막의 특징이 뭐냐? 옛날 막은 나를 담기 위해서 그 막이 필요했던 거예요. 타인의 의식, 타인의 이론, 개념이 필요한데, 성령은 성령이 필요해서 우리를 바람같이 사용합니다. 더는 너 자신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너 자신의 가치, 너 자신의 이익, 너 자신의 의미에 놀아나지 말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같이 그냥 휩쓸리면 된다는 거예요.
그걸 간단히 말해서, 주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하면 된다는 거예요. ‘주님이 시켰다. 한다.’ 이건 아니고,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다시 되돌아봐서 ‘아, 주께서 나의 우상성을 폭로하기 위해서 일을 또 만드셨구나. 내 집착이고 내 아집이고 내 것, 내 것, 내 것, 그거 쥐려고 하는 그것을 해체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막, 신선한 포도주를 담는 신선한 막, 예수님의 살과 피를 담는 막으로서 우리에게 제공해주었구나.’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파악하는 거예요.
다시 요한계시록 12장 이제 이해되시겠죠. 광야에 쫓겨난 그 임신했던 여자의 운명, 팔자라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단속할 수 없어요. 짐승이 훅 물을 붓는다는데 뭐 ‘물 붓지 마세요’ 이럴 수도 없고 그냥 방치된 상태인데, 방치된 모양으로 성령께서 다루어주신다는 거예요. 왜 방치가 좋으냐 하면, 자꾸 내가 내 인생에 손대려는 우상적 본성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럼 인간을 둘러싼 이 실선은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이죠, 말씀. 말씀의 활동대로 또는 말씀의 완성인 성령의 활동, 성령의 활동에 우리가 새로운 막으로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점선에 둘러싸인 인간과 실선에 둘러싸인 인간 이 두 개를 합쳐봅시다. 합치면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나를 지키려는 이 우상성이 성령 안에서 완전히 어떻게 됩니까? 늘 들키고 늘 들통나고 더 발각되죠. 이게 바로 ‘예수 안’이라는 막, ‘십자가 안’이라는 막입니다. ‘성령 안’이라는 막이에요.
그래서 오늘 제목은 ‘막 안의 존재’ 안 그러면 그냥 ‘막’. 그건 나중에 좀더 생각해봐야 될 거고요. 우리를 우상으로 들추어내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알았다는 것이 얼마나 어느새 자기 위주로 판단하고 수용했는지, 주의 하신 일을 감히 우상 주제에 알았다 하는 것이 얼마나 시건방진 일이고 추잡한 짓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그런 쓰레기를 주님 십자가에 담아서 십자가의 피만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해주시니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