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41122a 사사기 20장 1절(구멍 난 현실)-이 근호 목사
『기독교와 허상』 교재 p.128 <꿈과 현실>. ‘꿈과 현실’인데 인간적 입장에서 볼 때는 ‘현실과 현실’이에요. 인간이 꿈이라는 것도 인간은 현실로 이해하고, 인간이 현실이라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꿈에 불과한 겁니다. ‘꿈과 꿈’ 하든지 ‘현실과 현실’ 하든지. 이 세상에서는 인간적 관점에서 꿈과 현실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꿈이든 현실이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은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꿈을 거론하거든요. 그래서 인간에게 꿈이라는 것은 예비 된 현실로 간주됩니다. ‘이 꿈은 언젠가 현실로 바꾸어놓을 거야.’ 그래서 현실과 꿈이 떨어진 게 아니고 이 현실에 충실하게 되면 꿈이라고 여겼던 것이 현실 안에 점차 녹아진다. 꿈이 현실 안에 녹아진다고 봐요.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은 현실을 꿈이라고 이야기하고 지금 현실에서 노력하게 되면 꿈이라고 여겼던 것이 현실로 바뀌는 그것, 그렇게 되면 ‘내 꿈은 현실적으로 정당했다. 내 꿈은 현실로 옳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꿈, 계획이나 기대, 목표는 누구나 다 있어요. 결국은 현실로 바꾸어서 지금 있는 현실 안에 같이 더 보탤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 인간은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꿈이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시는 데에 적당할 거예요. 피라미드입니다. 피라미드인데, 피라미드에는 여러 가지 미로가 들어있죠.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내 앞길은 어떻게 될까?’ 미로같이 불확실해요. 불확실한데 ‘이 불확실한 게 꼬이고 꼬이고 하다가 언젠가는 미로에서 나왔던 모든 것을 위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때가 오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게 돼요.
피라미드는 세상을 전체적으로 다 볼 수 있는 안목이 피라미드 안목이고, 그 안에 자기가 지금 현재는 미로에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의 꿈은 뭐냐? ‘인간의 꿈은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갖는 것’ 이게 인간의 꿈이라 할 수 있어요. 내가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서 전체를 보는 겁니다.
그러면 피라미드 위에서 전체를 보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누구냐 하면 바로 왕, 재벌, 성직자 또는 유명한 전문가들, 교수나 전문가. 집안에 우리 애가 말을 안 듣는다. 미로에 빠졌죠. 그럼 누구를 찾아가야 돼요? 사자머리 정신과의사한테 가야 되겠죠. 그 사람이 전문가죠. 피라미드의 위치에 있다는 거예요. 항상 꿈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여러 가지 능력까지 내가 언젠가는 차근차근 밟으면 올라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피라미드는 미로로 구성된다.’ 피라미드는 미로로 구성된다는 거예요. 지금의 미로 생활의 완성이 피라미드에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피라미드에 있다고 여긴 그 사람도 또 더 큰 피라미드를 꿈꾸고 있다면, 지금까지 기대한 게 헛수고될 수가 있잖아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꿈과 현실을 일단은 나누지만, 따지고 보면 아직까지 도래하지 않는 현실을 꿈이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 거예요. 인간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꿈이란 이름으로 먼저 걸쳐놓고 그 꿈이 현실로 변할 수 있도록 해야 지금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는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이가 60돼서 퇴직해도 꿈을 버리는 순간, 그 사람은 그냥 직장 퇴직이 아니고 인생 퇴직이 되어버리죠. 꿈이 없으면 ‘에게, 이 현실이 전부란 말인가? 여기가 끝이란 말인가? 내가 더 이상 도달할 건덕지가 여분의 것이 없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진짜 인생의 의미가 생기지 않죠.
일을 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타인의 평가가 주어지는 공간입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타인의 평가가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일을 하지 않으면 뭐가 없어요? 타인의 평가가 없는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관심도 없죠. 그러면 지금까지 일을 해왔다는 것은, 타인이 내 속에 들어와 있음을 현실로 본 겁니다. 타인이 내 속에 왔어요.
타인이 내 속에 와서 ‘일 똑바로 안해?’ ‘어? 일 잘하네.’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그게 나를 구성해왔는데 내가 퇴직해서 일을 안 해버리면 내가 집구석에서 놀든지 말든지 전에 있는 직장동료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들은 그들 일하기에 분주하죠. 그러면 내 속에 타인이 죽어버리면 나도 같이 죽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일을 해야 그쪽이 ‘아이고, 퇴직하셔도 건강 좋아서 열심히 일하시네요.’라는 평가가 계속 주어짐으로써 남들의 평가로 구성된 현실이 계속 살아있는 겁니다. 계속 살아있게 돼요.
그러한 예가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에 있어요. 그 <헤어질 결심>에 나오는 대사가 이런 대사입니다. 남자 형사가 범죄자 여자 탕웨이 중국 사람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언젠가 나보고 참 품격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품격은 어떻게 생기는지 알아요?”라고 형사가 여자에게 물어요.
“품격은 ‘자부심’에서 오는 겁니다. ‘품격 있는 형사네요’할 때 그 품격은 이 형사 일에 내가 자부심을 갖는 거예요.” 벌써 여자가 그 형사에 대해서 평가를 했죠. 평가를 한 순간, 그 남자는 여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나는 품격 있는 형사가 꿈인데 타인이 그 꿈을 현실화시켜서 이루어졌거든요.
그리고 서로 좋아하는 사이인데 다음에 다시 만났어요. 보니까 그때 나를 평가했던 그 여자가 점점 자기와 멀어지고 차갑게 대하는 느낌이 들어서 형사가 그 범죄자 중국여자한테 갑니다. “만만하니?” 이렇게 된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이 말이죠. 왜냐하면 전에 그렇게 ‘품격 있는 형사다. 형사는 참 저래야 돼.’ 라는 평가를 했는데 말을 함부로 하니까 이제는 마음이 교류가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만만하니?” 이렇게 했어요.
그때 탕웨이가 중국의 여물어지지 않은 어눌한 발음으로 “사랑이 그렇게 나빠요?” 사랑이 그렇게 나빠요? ‘사랑하는 사이에 만만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죠. 그러니까 품격 있는 형사, 품위 있는 형사가 범죄의 증거가 될 수 있는 휴대폰을 “다시 찾지 못하게 바다 깊은 속에 던져버려요.”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게 뭐냐? 그 둘이 만나서 뭘 얻고자 하느냐? 저 여자와 사랑하는 게 내 꿈인데 그 꿈이 놀랍게도 현실로 바뀌었죠. 그럼 그 현실은 본인 단독으로 해서 구성될 수 없는 현실이에요. 현재 이 기분 좋은 현실이 되려면 그 여자가 체포되지 않고 이제는 범죄자 아닌 자유자가 되어서 자기와 계속해서 같이 있어줘야 그게 가능하다 이 말이죠. 그게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꿈이 현실로 변했다고 할 때 인간의 꿈, 내가 가진 이 꿈이 진짜 현실이고, 꿈이 현실로 변했다 하는 이것은 가상이에요. 이건 억지라니까요, 억지. 내가 꿈이라는 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 세상에 변수가 있지만, 그 변수 가운데서 일방적으로 내 꿈이 이루어졌다고 본인 쪽에서 내가 선언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꿈과 현실이 아니고, 현재 확보된 현실과 확보된 현실에 추가할 수 있는 현실, 그 두 가지 현실밖에 없죠. 이 세상에는 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현실에서 더 추가되는 현실뿐입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것은 인간들 이야기고요. 그럼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현실은 어디에 막혀 있느냐 하면 인간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 때문에 다 막혀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자기중심인 거예요. 자기중심주의.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뜻이 곧 현실화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자기 뜻이 있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뭐라 하겠습니까? “하나님 뜻이 만만하냐? 하나님 복음이 만만해?” 그럼 인간은 뭐라고 합니까? “내 중심으로 사는 게 그렇게 나빠요?” 이런다고요. 나 하고 싶은 대로 내 꿈을 펼치는 게 그렇게 나빠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자, 그러면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하나님 뜻과 인간 뜻이 같은 현실로 섞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어떻습니까? 없죠. 그냥 없다 하지 말고 뚜렷한 증거가 있어야 돼요. 없었던 증거가 뭐죠? 한쪽은 내치고 주님 하는 쪽은 버림받고. 각자 다른 현실이 있었던 겁니다. 다른 현실.
다른 현실이 있다는 말은, 인간은 인간중심주의, 이것을 현실로 본단 말이죠. 그럼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인간중심의 현실부터 먼저 생각하고, 상당히 복잡해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보잔 말이죠. 분명히 틀어지니까. B가 인간 뜻이고 A가 하나님 뜻인데 A와 B가 틀어진다면 먼저 인간 뜻부터 보잔 말이죠. 우리가 인간 뜻부터 살펴서 인간들은 자기 꿈을 어떻게 현실화시키는지, 그 절차와 순서와 내용을 살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어느 대목에서 안 맞는지를 보시라 이 말입니다.
지금 그 순서를 아시겠죠? 인간중심의 뜻을 어떻게 현실화시키는지 이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까 조금 이야기했는데 계속 같은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꿈을 현실화하는 데 있어서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냐 하면 타인이 필요하죠. 타인이 있어야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를 본인이 파악하니까요. 왜냐하면 인간 속에 이미 타인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빠, 엄마가 들어갔고 타인이 들어가 있단 말이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인간끼리 만난다.’ 인간은 인간끼리 만나요. 인간끼리 만나고, 인간끼리 만날 때는 말을 하는 거예요. 말, 언어. 가만있다고 되는 게 아니고 만날 때는 서로 만나자 이야기하고 서로 대화가 될 때 만나거든요. 그런데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따지고 보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2x=7. 2x=7이라 할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건 이거에요. x=3.5 이렇게 되죠. 사람들은 이걸 생각한다고요. 그런데 뭘 주의해야 되느냐 하면, 언어를 연구하고 인간관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오늘날 공통점은 x=3.5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 ‘=(같다)’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특히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의 특징은 언어를 통해서 사물과 같다는 것이 인간세계에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늘 잠재적인 정신병자라는 겁니다. 같지도 않은데 자기 일방적으로 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했으니까 내가 생각한 그것은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점에 대해서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조사를 하고 연구를 많이 했어요. 도대체 같다는 게 뭐냐? 이게 너무나 일방적이에요. 같다는 것. 같다는 것은 이쪽, 저쪽 다 알아야 성립하는데 인간은 자기 생각만 알아요. 자기 생각만 알고 이 생각은 자기도 조절 안 돼요. 그냥 떠오르는 생각이에요. 자기가 떠오르는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떤 다른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니까 ‘아, 내가 옳은 모양이다.’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 현실에 있어서 내 육신이 여기 있잖아요. 육신이 있는데 이게 참 이상한게요, 칼로 누가 내 다리를 찌른다든지 배를 찌르면 내가 아프잖아요. 그때 내 육신이 아프죠. 그럼 마음이 아프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칼 들고 설쳐야 됩니까? 칼에 찔리면 육신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려면 외부로부터 뭐가 날아와야 됩니까? 말이 날아와야죠, 말이. 학자들은 그걸 체크한 거예요.
말이라 하는 것은 칼이 아니고 화살도 아니에요. 돌멩이도 아니에요. ‘비 맞은 장닭’ 이게 칼입니까, 도끼입니까? 아니죠. 아니잖아요. 그런데 으윽, 왜 마음이 아프죠? 이게 왜 마음이 아프죠? 그걸 연구한 겁니다. 사람들은 깊이 연구를 했어요. 연구해보니까 뭘 알아챘느냐 하면, 인간은 육신으로 태어났지만 내용은 뭐로 채우는가? 말로 채운다는 거예요. 아빠, 엄마, 동생, 형이나 내 가정에서 말로 내 내용이 다 채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말로.
그래서 부모로부터 강요를 당했어요. ‘내가 말한 대로 똑바로 하게 되면 사탕 하나 더 줄게.’ 이러잖아요. ‘내가 엄만데 네가 나 시키는 대로 하면 네가 좋아하는 맛있는 사탕 하나 더 줄게.’ 할 때, 엄마의 지시와 내 행동이 같다, 안 같다는 평가를 본인이 내립니까, 엄마가 내립니까? 말을 준 저쪽에서 내리는 거예요. ‘잘했어, 잘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참 잘했어.
그럼 걔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미 엄마의 지시와 명령에 종속되어버린 거예요. 옳고 그르고가 엄마의 지시에 맞냐, 안 맞냐에 따라서 내가 착한 아이냐, 나쁜 아이냐 이미 결정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라는 아담의 자손에게 내려오던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대물림하게 되죠. 대물림.
여러분, 솜사탕 때리면 아픕니까? 안 아프죠. 그런데 말이 사람을 아프게 하죠. 말이 사람을 아프게 한다고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게 이런 겁니다. 칼에 찔리면 병원에 가서 밴드 붙이고 후시딘 연고 바르면 낫는데, 이 마음의 상처는 오래가요. 수십 년 갑니다, 수십 년. 어릴 때 상처는 수십 년 가요.
도대체 인간 안에 뭐가 있어가지고 이렇게 아프냐? 아프다는 말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내가 주인이 아니었다는 걸 티내는 겁니다. 그럼 인간의 주인은 누구죠? 인간의 주인은 누구죠? 기존에 있던 부모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부모를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모만 만나지 않잖아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커서 학교 친구 만나고 여러 가지 만나게 되면 거기서 뭐가 유입됩니까? 계속 말이 유입되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지금까지 모아놨던 말과 새롭게 유입되는 말 사이에서 자아를 구성하게 되면 이제는 엄마가 생각하는 착한 아이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죠. 유지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유지해버리면 친구들에게 추가적으로 더 받는 보상이 날아가니까요. 그걸 쉽게 말해서 ‘나 너하고 안 놀아줘.’ 이거거든요. 나 너하고 안 놀아줘. “같이 놀자.” “그러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럼 늦게 가야 되는데?” “엄마한테 거짓말하고 같이 더 놀자. 한번 용기를 내봐.”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이것이 첫 번째로 여러분들이 만나게 되는 아주 난해한 이야기에요. ‘내 존재가 나를 밀어낸다.’ 옛날(前) 존재가 지금의 내 존재를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는 것. 쇼트트랙 선수들이 경기할 때 밀어내요, 선수가. 중국하고 한국하고 시합할 때 뒤에서 밀잖아요. 내가 내 존재를 밀어내는 거예요. 새로운 현실을 위해서. 현실은 말로 구성되죠. 새로운 칭찬과 새로운 보상이 기다리는 새 세계, 꿈의 세계를 향하여 내가 나를 밀어내고 나는 기존의 존재로부터 미끄러져 빠져나가죠.
지난 수요일에 제가 소개했던 카프카의 단편소설 있었죠. 『법 앞에서』. 그 단편소설이 굉장히 짧아요. 짧은데 처음이고 끝이고 그렇지만 시골에서 온 소시민이 문지기한테 자꾸 나보고 들어가라고 허락을 하라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들어가면 되는데 왜 허락을 맡고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까? 인간은 타인의 좋은 평가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로 앞으로 밀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 문지기가 들어오라 해서 들어왔다! 나 정당하지, 그치?” 자기 정당성이에요. 자기 정당성. 어디 가도. “아주머니는 어떻게 이 모임에?” “예, 우리 아는 옆에 친구가 여기 댄스교실 살 잘 빠진다고 소개해서 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게 뭐에요? 소개해서 왔죠. 이미 그 모임에 정당성이 보장됐잖아요. “어떻게 왔습니까?” “그냥 왔어요.” 안 놀아줘. 저 아줌마 자칫하면 도둑일 수도 있으니까 주의하자.
인간은 벌써 부모로부터 자기 의가 되지 아니하면, 쉽게 말해서 자기 마음이 상처받지 않고 더욱 더 빛을 발하려고 하면 칭찬, 칭찬, 잘했다, 잘했다,가 계속 주어져야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내가 옳은 존재라 하는 것을 보다 깊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되는 거예요, 인간은.
지금 제가 하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은 없고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이야기를 제가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카프카의 그 단편소설에 보면 문지기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지금 당신은 나한테 허락 맡고 자꾸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 문을 통과해도 앞으로 계속 나오는 문에서) 나보다 얼마나 더 센 문지기가 있는지 나도 몰라요. 나도 감당 안 돼요.” 그런데 시골에서 온 그 사람이 들어가지도 않고요. 결국 못 들어갔어요. 늙어죽을 때까지 못 들어갔어요. 딱 보니까 빛이 거기서 나오는 거 같아. 그 법 안에서 어떤 빛이 나오는 거 같아요. 막 들어가고 싶어요. 들어가고 싶은데 허락을 해줘야 들어간다는 거예요.
나중에 끝부분이 이렇게 끝나요. 늙어가면서 문지기가 의자 치우고 “나도 집에 갈랍니다.” 하는데, 자기가 1년, 2년이 아니고 너무 오래 기다렸다가 입구를 넘어서지도 못하고 거기서 늙어죽는 거예요. “마지막 할 말이 있는데요.” 둘이 키는 비슷했는데 너무 오래 있다 보니까 쪼그라들었어요. 문지기가 “예, 소원이 뭡니까? 답변해드릴게요.” “그런데 이렇게 앉아 기다려도 왜 나만 기다리고 오는 사람이 없습니까?” 이러니까 “이 법은 당신을 위한 법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안 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법 해석은 당신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공격하고 자기를 방어하는 식으로 늘 실험만 혼자 집구석에서 하다가 죽는다.’ 자기를 공격하고 자기를 방어하는 거예요. ‘남들이 이렇게 공격하면 이렇게 방어해야지. 저렇게 공격하면 저렇게 방어해야지.’하다가 의자에 앉아 늙어죽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를 공격하고 자기를 방어하는 식으로 살다가 죽는다.’ 이 점을 여러분 잘 유의하세요. 그럼 자기를 공격할 때 칼로 활로 공격하는 게 아니고 뭐로 공격한다 했습니까? 언어. 말로 공격하죠. 사회는 언어와 말로 공격해요. 언어와 말로 공격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정답을 알면 너 넣어줄게.’ 정답을 알면.
그런데 아까 2x=7 했을 때, 사람은 정답인 x에 관심 있잖아요. 그런데 애초부터 2x=7에서 같다(=)는 건 인간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바로 연사와 계사라고 이렇게 표현해요, 프랑스 언어학에서. 프랑스 언어학을 제가 자꾸 소개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보고 원어로 하면 더 진리가 나타난다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언어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성경에 인간의 뜻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단 한 단어도 없고 한 글자도 없어요. 인간은 같지 않습니다. 왜? 일방적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자기의 의로움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자기 의로움부터. 내가 의롭다는 현실을 유지한 채 거기다가 꿈이라는 말로 이 의로운 내가 어떻게 더 의로운 존재로, 두 자로 아까 뭐라 했습니까? ‘미로’를 가다가 모든 걸 아는, 네 자로? ‘피라미드’에 어떻게 도달하느냐? 다시 말해서 ‘천국에 어떻게 가는가? 어떻게 내가 구원받는가? 내가 어떻게 온전한 자가 될 수 있는가?’ 그걸 시도하는 자들이에요, 인간은.
그런데 미로에서 피라미드로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출발부터 나의 정당함이 나와 equal, 등식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등식이 성립 안 된다고요. 당신이 옳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증명 못합니다. 인간은 자꾸 스스로 연습하는 거예요. 이렇게 공격하면 이렇게 답변하고 연습을 해보는데 그 연습하는 중에 빠진 게 있어요.
이렇게 묻고 이렇게 답하면 된다 하지만, 인간들의 그 짓이 얼마나 헛된 짓인가가 바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서 드러납니다. 스핑크스가 사람의 얼굴에 사자의 몸을 하고 있잖아요. 스핑크스 괴물이 그냥 가만있으면 오래 살았어요. 수수께끼 답을 누구한테 요청 안하면 됐던 거예요.
그런데 지나가는 어떤 사람보고 묻기를,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정오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게 뭐게?” 물으니까 오이디푸스가 “그거? 딱 보니 사람이네.” 그걸 듣는 순간 스핑크스가 죽어요. 답을 푸는 순간 ‘아, 답 풀었네. 아이고, 훌륭하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가 아니라, 답을 푸는 순간 인간은 죽는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그리스 철학에서 신(神)이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주는 대로 그냥 살지 신에게 묻지 말라는 거예요. 신에게 물어서 만약에 답변이 오게 되면 그 답변이 물었던 나를 죽여 버린다는 겁니다. 왜? 답은 누구만 알아야 돼요? 신만이 알아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알아야 되기 때문에.
왜 신만 알아야 됩니까? 신이 아는 정답을 알아버리면 더는 그 인간이 인간이 아니므니다. 신과 같은 레벨이 되어버려요. 여기서 창세기 3장, 2장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네가 죽으리라”에 대해서 마귀는 뭐라고 해요? 네가 신처럼 되리라. 그다음부터 인간은 뭘 추구하게 되었어요? 정답이 뭐냐? 정답이 뭐냐를 추구하는 겁니다. 생긴 대로 살지, 정답은 왜 찾느냔 말입니다.
제가 10대 때 국민학교 5,6학년 때부터 대구 비산동 중앙에 달성공원이라고 하는 공원이 있었는데요. 옛날에 동물원도 있었던 달성공원이 있는데 그땐 학원도 없고 해서 학교 끝나면 달성공원에서 아이들이랑 장난치고 놀았어요. 그런데 늘 마음에 있는 것이 그 달성공원 앞에 보면 각종 노인들, 갖가지 노인들이 거기 죽치고 대낮부터 하루 종일 있어요. 아침부터 갈 때까지 모여 있다고요, 노인네들이. 입에서는 낮술, 낮 막걸리 먹어서 냄새 풀풀 풍기죠, 옷은 담배 냄새에 찌들어있죠.
그래서 제가 궁금한 게 저 노인네들은 인생을 저만큼 오래 살았으면 뭔가 지혜가 있을 건데 그들이 보는 세상은 어떨까?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볼까? 50년, 60년 살면서 뭘 깨달았을까? 그게 그렇게 궁금했었어요. 나 국민학교 때. 쉽게 말해서 ‘나는 저 나이 되면 나는 어떤 정답을 가질 수 있나?’ 그게 궁금했고, ‘그걸 또 미리 당겨서 저 사람에게 듣게 되면 미리 알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사람들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어서 들어보면 전부 다 뭐 박정희 이야기, 리승만 이야기 그런 이야기겠죠.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인을 감추고 이야기하더란 말이죠.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에 그걸 감추는 용도로 뭐 이야기합니까? 박정희 이야기하고, 정치 이야기하고, 거기가 경상도니까 전라도내기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하죠.
그러나 이걸 아셔야 돼요. 적의 적은 ‘나’가 아닙니다. 적의 적은 하나님이에요. 이걸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뭐로 보느냐 하면, 다니엘의 주제도 그렇지만,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거예요. 쿠데타. 인간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인간들은 이 반란군 속의 하나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주기도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 사함에 대한 얘기가 나오죠. 그러면 인간이 사함을 요청하는 그 죄는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위 조건에 맞추면 뭡니까? ‘내가 하나님께 대든 반란군의 일원이었습니다.’를 회개하는 거예요. 반란군의 일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칙에 보면.
그런데 달성공원 할아버지들은 이런 거 몰라요. 자기도 누군 줄 몰라요. 말은 해요. 말은 하는데 자기의 정당함을 확인하는 말을 해요. 어디 우리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을 험담해? 박정희 대통령과 한 패가 되는 게 뭡니까? 달성공원 노인 집단에서는 그게 의로운 게 돼요, 의로운 게. 광주에서는 뭐가 의로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집단에 속해서 내가 계속 의롭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쪽에서 통용되는 단어에 대해서 내가 옳다, 옳다고 계속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뭐를 감추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그 사람의 피라미드는 또 하나의 미로가 되어버립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미로.
실컷 부모에게 태어나서 가정에 살다가 잠깐 세상생활 했다고 해서 직장은 다니고 이제 퇴직하고 했는데 그렇게 했던 자기 인생의 미로 있잖아요. 미로 다 끌어 모아봐야 별 큰 피라미드 아니에요. 소소한 피라미드에요. 그러다가 나중에 죽으면 화장터에 들어가서 그냥 보내버린단 말이죠.
언어학자들은 뭐를 분석했느냐 하면 인간의 말과 사실 또는 사물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절대 일치되지 않는 거예요. 말≠사실, 사물. 그게 연사(連辭)와 계사(繫辭) 때문에 그렇다. 연사는 뭐고 계사는 뭐냐? 계사는 계속해서 단어를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을 계사라 합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게요. 중국음식집에 갔습니다. 메뉴를 보세요. 메뉴를 보게 되면 ‘면류’, ‘요리류’ 나올 거예요. 이게 연사에요, 연사. 면류에 보면 짜장면, 우동, 짬뽕 줄줄 나옵니다. 이걸 계사라고 해요. 그러니까 바꿀 수 있는 것은 계사, 이걸 하나의 분류로써 함축할 수 있는 것은 연사,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어라는 것이 어디서 통용되느냐 하면 내가 소속되어 있는 그 범위에 자체적으로 한계가 있어요. 통용되는 한계.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던 권사님이 길에 가다가 약간 자빠졌다. 그러면 뭐가 나옵니까? ‘아이고, 아버지여’ 또는 ‘주여’ 이렇게 나오죠.
그게 뭡니까? 그쪽 세계에서 많이 들었던 거죠. 들었던 것이 의식에 들어가지 않아요. 무의식에 들어가요. 무의식에 들어갔던 것은 우리 손으로 손가락 집어넣어서 이걸 빼낼 수가 없습니다. 의식은 ~인 체 하면 돼요. 아닌 척하면 되는데 무의식에 이미 들어온 것은 인간 손으로 빼낼 수 없어요. 그래서 정신병이라 하는 것은 고치기 힘들어요. 무의식의 문제기 때문에.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하느냐? 아까 못 빼낸다 했죠. 못 고친다 했죠. 그럼 성경의 말씀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땅이 아니고 인간세계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왔죠. 하늘나라에 성도의 타인이 있죠. 누구냐? 주님이죠. 하나님인데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이 땅에서는 우리의 타인이 되죠.
구약에서는 그 타인을 보내실 것을 예비했어요. 신약은 이미 오신 주님이 오시면서 뭐를 던졌느냐 하면 말을 던졌어요. 말씀. 성경말씀을 던졌단 말이죠. 던진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정당성이죠. 하나님의 정당성이에요. 그럼 우리의 정당성 아니죠. 우리의 뜻하고 아무 상관도 없죠.
그 뜻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못 고치잖아요. 못 고치는데 끝까지 우리 존재를 파버립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 존재에 빵꾸가 나죠. 양말 오래 신으면 빵꾸가 나잖아요. 우리 존재에 구멍이 나죠. 그 구멍 난 지점에 성령이 바람처럼 우리에게 불어 닥치죠.
불어 닥치면 누구 존재입니까? 주님의 존재죠. 주님의 존재가 기존의 인간에 구축된 내 존재를 쇼트트랙 하듯이 뒤에서 바깥으로 확 밀어버립니다. “내 증인이나 되어라!” 밀어버리죠. 이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전부 다 어디에 기원돼요? 전부 다 말에 기원되죠. 말에.
어떤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휴, 목사님, 저 신앙생활 잘하고 있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잘하고 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잘하고 있는 걸 묻는 게 아니고, 어제는 어느 말씀에 대해서 빵꾸나가지고 그 말씀이 이런 뜻이라고 그 성경구절을 이야기하면 나도 은혜 받고 좋겠는데, “아휴,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잘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정당성이 거기서 왜 나와요? 정당성이 나왔다는 말은 뭡니까? 지금 빵꾸가 안 났다는 뜻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세요.’ 이런 뜻이란 말이죠. 제가 왜 건드려요? 말씀이 건드리죠. 인간은 스스로 못 고쳐요. 고칠 수가 없어요. 성경공부 한다고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언어가 와서 우리를 밀어내야 돼요.
이 대목보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야고보서 3장을 전에 한번 한 기억이 나긴 하는데, 야고보서 3장 6-9절,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어디서 나왔다 했습니까? 지옥 불이죠.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이게 하나님이 보시는 현실이에요. 우리는 꿈속에 사는데 우리의 현실은 현실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불사질러버리죠.
그다음에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그다음 8절 보세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게 뭐냐 하면 그동안 인간 배후에서 누가 인간에게 말을 해왔다는 겁니까? 마귀가 그 짓을 했다는 거예요. 마귀가. 아담에게 물려받은 죄를 장악하는 마귀가 아담을 다루었듯이 똑같이 우리가 출생하면서 우리에게 이걸 집어넣은 거예요. ‘너는 정당해야 돼. 어디가도 정당하고 너는 칭찬받아 마땅해. 너는 마음에 상처 입으면 안 돼.’ 이런 식으로 해왔던 거예요.
그래서 9절 봅시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쓴 물, 단 물 말고 단 물만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빵꾸 나야죠.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현실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꿈이 아니에요. 이왕 나온 김에 한 구절만 더 보고 마치겠습니다. 욥기 17장 14절,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진대”
자, 욥이 말하기를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라. 구더기가 어디 있습니까? 무덤 안에 있죠. 그러면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공격하고 욥에 대해서 자꾸 엉뚱한 소리하는 이유가 뭐에요? 욥의 현실은 뭡니까? 지금 어디 안에 있다? 산 채로 무덤 안에 있는 거예요. 산 채로 무덤 안에. 죽음만이 현실입니다. 10분 쉽시다.
■ 광주강의20241122b 사사기 20장 1절(구멍 난 현실)-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아까 첫째 시간 끝부분에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에요. 그러면 이 땅에 하나님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과 만났을 때 이 지상에서 그 말씀에 의해서 본인이 작살 난 사례를 보여라. ‘내가 이 땅에서 부모로부터 아담의 계통으로 태어난 그것이 죄였다.’라는 것을 보이면 되는 거예요.
방금 제가 그냥 ‘죄였다’라고 했는데 그게 성경에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21장 38절에 나옵니다. 포도원 농부 이야기인데 세 받으러 온 종을 농부들이 죽였죠. 38절에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뭡니까? 지금 쿠데타 반란을 일으킨 거예요.
동덕여대 학생들이 남녀공학하지 말자고 데모를 하잖아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동덕여대 부동산이 누구 거죠? 누구 소유로 되어 있습니까? 지금 그 학생들 소유는 아니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치과를 운영하다가 장사 안 되니까 산부인과로 바꾸겠다 하는데 치과 다니는 환자들이 점거농성하면 어떻게 돼요? 그거 어떻게 됩니까? 치과 부동산 소유주가 누군데, 왜 환자들이 점거농성하냐 이 말이죠.
노량진 학원가에 학원이 지금까지 경찰공무원 수강생 가르치다가 경찰공무원 손님이 없으니까 중년들을 위한 부동산 중개업으로 바꾸겠다 할 때에 경찰공무원 수강생들이 점거농성하면 어떻게 돼요? 기밀 부수고 하면 안 되잖아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부동산이 누구 건데요? 수강생들은 돈 주고 배우면 되지, 그들은 더 이상 권한이 없죠.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이 세상에 있는 땅. 땅 누구 겁니까? 하나님 거죠. 육신도 우리 하나님 거죠. 하나님 건데 그걸 불법으로 점거농성한 것이 뭐냐 하면 다니엘에 짐승들이에요. 그냥 바다에 죽치고 앉아있지, 바다에서 왜 기어올라 와서 하나님 땅을 점거하느냐? 이게 뭐냐? 쿠데타에요. 쿠데타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이건 반란군에 해당됩니다.
그 반란군의 일원이 누구냐? 최고의 피라미드 위에서 보면 우리가 태어나기를 반란군의 아들로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주기도문에 내 죄를 사해달라 할 때, 회개하는 마음이 뭐에요? ‘나는 내 몸속에 반란군의 피가 지금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거 인정하는 거잖아요. 그거.
예를 들어서 하늘나라에 출입국 심사하는 입국심사대가 있다 합시다. 천사가 와서 이제 천국으로 보내주는데, 손을 내밀며 “여권!”이라고 물었어요. 그런데 거기 들어가려는 사람이 “제가요. 신앙생활을 너무 잘했고요. 부모님 잘 섬겼고요. 교회생활 봉사 많~이 했어요.”하니까 천사가 “여권 내놓으세요. 여권. 아니, 여권을 내라니까. 당신이 어떻게 살았는가 문제가 아니고 여권을 내놔.” “여권이 뭐에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살난 거! 그래서 작살난 그 구멍에 예수님 피가 묻은 여권 내놓으세요! 피 묻은 말씀 내놓으라고요, 피 묻은 말씀!” 말씀해석 내놓으라고요. ‘이렇게 내가 죄인입니다.’ 그거 내놓으라는 거예요. 있어야지. “다음 사람!” 보내버리죠.
마태복음 21장 38절에서 반란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이는 상속자니 이 아들만 죽이면 이 포도원은” 누구 것이 된다? “내 것이 된다” 포도원 원래 주인이 따로 있잖아요. 동덕여대 학생들이 동덕여대 부동산 소유주 아니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저한테 맡긴다면 간단하죠. 동덕여대는 폐교처리하고 동덕대학교로 바꿔버리면 되죠. 학생들한테 54억인가 다 물어내라 하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반발하겠죠. 왜 반발하죠?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무엇 때문에. 꿈 때문에. 무슨 꿈? ‘나는 동덕여대 출신자’라는 꿈. ‘그때 그 시절이 좋았었어.’ 라는 꿈. 그러나 졸업생이 거기에 동조하고 그러면 안돼요. 왜냐하면 새싹 유치원 출신이 유치원 안 하고 다른 거 할 때, 유치원 졸업한 지 45년 된 사람들이 점거농성하면 돼요, 안 돼요? 안되죠.
그럼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교회. 유럽에 그런 교회 많아요. 교회가 장사가 안 되니까 나이트클럽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럼 교회 교인들이 점거농성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때요? 아, 문제 어려워요? 점거농성할 수 있어요, 교인들이? 역시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재산이 기독교 재단회 소속인가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 보세요. 이 세상에서의 정당성은 어디서 옵니까? 돈에서 나와요. 소유주가 누구냐?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의 가진 것, 내 정당함이 뭐를 막아요? 진짜 현실, 천국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내 가진 것에서 꿈이 나왔으니까 내 꿈, 나의 의로움과 정당성이 뭘 막아요? 천국을 막아요.
천국을 막는데 여기서 제가 말을 주의 깊게 하고 있습니다. 뭘 주의 깊게 하느냐? 내가 나의 꿈을 막는다, 아닙니다. 내가 나의 구원을 막는다, 아닙니다. 내가 나의 천국을 막는다,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나는 천국을 막는다. ‘내가 나의 천국을 막는다.’와 ‘나는 천국을 막는다.’의 차이점이 뭡니까? 뭐가 들어갔어요? ‘나의’ 천국이죠.
나의 천국은 우리가 안 막습니다. 못 막습니다. 내가 없어져야 되죠. 우리가 하는 짓은 왜 죄가 되느냐? 예수님의 나라를 막기 때문에. 나의 천국을 안 막아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주여’ 하는데 무슨 자기 천국을 막아요? 나의 천국이 진짜 천국을 가로막죠.
그럼 그런 예가 과연 있느냐? 오늘 ‘꿈과 현실’에서 메인(main, 주된), 오늘 본 내용 다 포함된 거예요, 중심 성경구절을 지금부터 보겠습니다. 사사기 20장 1절,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는데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미스바에 법궤가 있었던 모양이죠.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
아까 첫째 강의에서 뭐라고 했어요? 보통 이 땅에서 적의 적은 나잖아요. 내 적의 적은 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우리의 적은, 너의 적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적이 되는 거예요.
현재 사사기 19장 끝에서 한 레위지파가 첩이 죽고 난 뒤에 열두 토막 내가지고 ‘우리 이스라엘 땅에서 있을 수 없는 범죄가 일어났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 말씀대로 율법대로 정의를 다시 일으켜야 된다. 정의를 유지시켜줘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전쟁을 도모하게 되었죠.
레위지파 그 사람이 토막 내서 보내고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동조해서 회의해서 소위 정의를 외쳤습니다. 정의라 하는 것은 악에 대한 처벌이 뒤따르는 것을 정의로 본 거예요, 그들은. 악이 있고 악을 저지르지 않는 쪽에서 정의로운 자가 처벌하면 정의가 산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적의 적은 본인이에요. 적의 적은 본인이고 적은 악한 자가 된다면 나는 졸지에 뭐가 됩니까? 악을 처벌하겠다는 나는 의로운 자가 되죠. 이게 바로 인간 현실의 난맥상, 문제란 말이죠. 첫째 시간부터 했잖아요. 인간은 자꾸 뭔가 붙들고 싶은 게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어릴 때부터 자기는 의로워지고 싶어 하죠. 내 속에 있는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거예요. 그래야 존재의 의미가 있으니까요.
사력을 다하여 결사적으로 인간은 정의를 유지하려해요. 그 『법 앞에서』단편소설처럼 그냥 들어가도 되는데 꼭 물어서 들어가려 하는 것은 초반부터 뭐를 지키려하는 겁니까? 법을 지킴으로서 그 법이 나의 존재의 정당성을 계속 지켜주고 유지할 만한 유일한 환경이라고 본 거예요. 법 앞에서. 그런데 정확하게 해서, 법 속에서. 법 속에서 법으로 무장되었을 때 정의를 유지하려 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는 40만 모였죠. 그렇다면 거기에 악한 일을 행했다는 베냐민 지파는 몇 명 모였느냐 하면 이만 육천 명이에요. 15절, “그때에 성읍들에서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이요” 이만 육천이죠. 그다음 “그 외에 기브아 거민 중 택한 자가 칠백인데” 칠백 명 이 사람들이 특수부대 출신이에요. 우크라이나 간 그들하고 달라요. 하여튼 대단해요.
그럼 합해서 26,700명. 이쪽에는 400,000명. 그럼 어떻게 돼요? 400,000÷26,700. 뒤에 다 떼어버리고 40대 2. 몇 분의 몇입니까? 정의 쪽에 20, 악한 쪽에 1. 이래서 이제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겁니다.
17절에 보면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의 칼을 빼는 자의 수는” 몇 명인가?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그러니까 이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편에 서서 모처럼 이스라엘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게 뭐냐? 이스라엘에 뭐가 흐른다? 정의가 흐른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정의가 뭘 망치는가? 하나님의 정의를 망칩니다. 왜? 인간의 정의는 가짜 현실이고, 진짜 현실은 인간의 정의에 의해서 망쳐진 정의가 진짜 현실입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끝까지 자기 자신의 존재와 현실을, 잘 들으세요, 일치시키려고 애를 써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요.
나는 의로워지고 싶고, 의를 유지하고 싶고, 남한테 좋은 소리 듣고 싶은데 거기에 꼭 필요한 현실적인 조직이나 구성이나 그런 집단이나 나한테 이런 뜻을 옹호해줄 사람은 어디 있지? 그걸 찾아다니는 것이 평소 인간들이 늘 행동과 몸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드디어 그때가 왔어요. 그때가 왔습니다. 오늘은 노래 세 개나 돼요. 할 게 많습니다. 자, 노래는 자꾸 들으면 가요교실 되기 때문에 듣기는 듣지만 길게는 안 듣겠습니다. 가사를 주목해보세요. 첫 번째, <남자라는 이유로>하는 가사를 보세요. 가사를 음미해보세요.
대중가요 가사라 해서 참 천박하게 논다 욕하지 마시고 이겁니다. 천박이고 뭐고 간에 피라미드와 미로 관계에요. 지금 이 대중가요는 피라미드가 아니고 미로에요. 여기 조항조가 세계평화를 위해서 노래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소향도 아니고. 뭐 하나님을 위해서 노래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여기 노래가사가 보면 전부 다 미로에요. 개인적이고 사적인 거라고요. 일상에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만나보면 전부 다 이런 이야기에요. 가사를 한번 봅시다.
남자라는 이유로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당신 앞에 멍하니 서있네 (당신 앞에 어떻게 서 있습니까? 멍하니. 가사 하나하나가 중요해요. 멍하니. 안 들키게, 이런 마음이죠. 멍하니.)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 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그러니까 속으로 간직했는데, 어떤 여자 앞에 나오니까 이제 더는 못 참겠는 거예요. 그 여자 앞에서는 터트리고 싶은 거예요. 왜? 마음에 뭐가 있다 했어요? 마음에 상처가 있죠.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에요. 왜? 마음에 뭐가 있어요? 상처가 있죠. 상처 왜 생깁니까? 어릴 때 그 나를 자꾸 뒤에서 밀어내는데, 밀려나간 사회는 어릴 때 나를 칭찬해주길 원하던 그 사회가 아니었어요.
사회는, 직장생활이라 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분질러버리는 곳이에요. 나를. 직장생활이라는 게. 그래서 직장생활하면 돈 좀 정기적으로 따박따박 오지만 내 꿈이 날아가 버렸잖아요. 차라리 그거 하지 말고 태권도나 하고 합기도나 하다가 안 그러면 독서실 하든가. 내 사업. 돈은 몇 푼 되지도 않지만 수입이 들락날락하지만 내 사업을 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남자거든요.
특히 남자가 사업 한번 해보겠다고 하는데 아내가 어떻게 해야 돼요? ‘몰라, 나는. 니 마음대로 해라. 나는 너한테 언제 기대한 적 없거든. 실망했어.’ 하지만 그 아내한테 뭡니까? ‘사실은 내가 직장생활 이렇게 힘들었다. 합기도하면서 이렇게 힘들었어.’ 하면서 이제 마음껏 우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피라미드입니까? 이게 하늘나라입니까? 미로입니까? 미로죠. 그다음 보세요. 2절 가사가 괜찮아요.
저마다 처음인 듯 사랑을 하면서도 (전부 다 돌아온 솔로처럼 내숭떨고 있는 거예요. 저마다 처음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쓰라린 이별 숨기고 있어도
당신도 그런저런 과거가 있겠지만
내 앞에선 미소를 짓네요 (내 앞에서는 뭘 짓는다고요? 아이고, 미소를 짓네.)
언제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 볼 날이 (이 밑에 가사랑 차이가 나요.)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언제한번 그런 날 올까요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울어 울어 볼 날이 (여기 ‘울어’가 두 번 나옵니다.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이거 잠깐 듣고 가시겠습니다. 왜 아내가 필요한지 아시겠죠? 아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내가 참고 있었다는 이 의로움을 의로움이라고 제대로 점수를 매기고 평가해줄 사람 당신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럼 아까 천국은 무엇이 있어야 들어간다 했어요? 빵꾸나야 되죠. 자기 그 정당성이 구멍 나야 돼요. 그것도 말씀에 의해서 피 묻은 게 있어야 돼요. ‘나 이 땅에서 그렇게 사업하느라 힘들었습니다.’ 그것가지고 천국에 안 넣어줘요. 그건 자기 천국이에요. 천국 가서 자기 자랑할 사람들이에요.
천사 특징이 뭐가 없다 했습니까?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계약대로 언약대로 피가 없으면 안 넣어줍니다. 자, 이러한 남자에게 여자가 화답을 해야 되잖아요. 화답이 <슬퍼하지 마>라는 노래에요. 가사를 먼저 보겠습니다.
슬퍼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나에게 말을 해줘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속 시원히 말을 해줘 (제대로 지금 여자 쪽에서 반응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 세상 모두가 변한다고해도 나는 너를 사랑해
너에게 나를 준 걸 후회는 안해 이대로 함께 있을께 (다독거려주는 겁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해
서로 후회하지 않도록 너의 곁에는 내가 있잖아
너를 지킬 테니까 (여자 쪽 이야기입니다.)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해야해
가슴이 아프지 않도록 차라리 그것이 속 편한 거야
이젠 슬퍼하지 마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해 서로 후회하지 않도록
너의 곁에는 내가 있잖아 너를 지킬 테니까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해야해
가슴이 아프지 않도록 차라리 그것이 속 편한 거야
이젠 슬퍼하지 마
이 세상에 (그다음에 제가 큰 글씨로 해놨죠. 뭡니까?) 남자는 너 하나 뿐인데
슬퍼하면 나는 어떡해 네가 힘이 들면 내게로 와
내가 널 사랑하겠어
이젠 슬퍼하지 마 이 세상에 남자는 너 하나 뿐인데
슬퍼하면 나는 어떡해 네가 힘이 들면 내게로 와
내가 널 사랑하겠어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남자, 여자가 오랫동안 서로 사귀고 좋은 친구처럼 사귀었는데 여자 쪽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가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안 해요.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남자는 꿈이 있어요. ‘나 봐. 얼굴 잘생겼지. 허우대 좋지. 성격 좋지. 그런데 나한테 너 같은 게 가당하겠어?’
너는 파트너로는 괜찮은데 결혼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 험한 직장 때려치우고 이 잘생기고 허우대 좋고 하는 여기에 부합되는 큰 사업체 사장, 아까 피라미드는 뭐라 했습니까? 재벌이죠, 그렇게 되는 데에 필요한 조건으로 내가 결혼할 여자는 첫째, 예쁘고 두 번째는 집에 돈 많고. 딱 두 가지에요. 뭐 더 욕심내지 않아요. 이것도 욕심이지만 딱 두 가지입니다. 예쁘고 돈 많고. 그래서 이 잘생긴 허우대와 성격에 처가 쪽에서 반해가지고 ‘자네 꿈 이루게.’ 하는 거예요. 지금 초기 자본이 없어. 그러니까 여자는 애인으로 사귀되 결혼은 그런 여자하고 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럼 여자 쪽에서 그걸 먼저 결혼하자 하면 어떠냐? 여자는 또 자존심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너 같은 게 어떻게 나한테 결혼감으로 가당하겠어?’라는 그런 굴욕적인 말을 차마 듣기 싫어해요. 그거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왜 듣기 싫어해요? 무엇 때문에? 첫째 시간 초반에 했는데. 마음의 상처. 마음의 상처 때문에.
이게 피라미드가 아니고 무슨 세계에요? 미로의 세계에요. 미로의 세계 특징은 불확정성. 전부 다 확정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남녀관계가 전부 다 자기 의, 자기의 정의를 유지하면서 미로에서 벗어나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너 내 장래, 내 꿈 방해하지 마.’ 참 진짜…
이 노래 한번 들어봅시다. 그래서 이 남자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 번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둘이 만났거든요. 그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이게 바로 피라미드의 위치가 아니고, 미로에서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것, 인간들이 하고자 하는, 다시 말해서 인간이 꿈꾸는 그 세계, 그것이 바로 세 번째입니다. 이 세 번째 노래가 <고맙소>라는 노래인데요. 여기 가사를 한번 보게 되면,
고맙소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잘 모르나 보다
진심을 다해도 나에게 상처를 주네 (아까 상처 이야기했죠. 상처 이야기했잖아요. 상처를 받는다는 자체가 이 사람은 지금 현실도 아닌데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이 말이거든요. 자기가 반란군인 줄 모르고)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을 잘 모르나 보다
사람은 보여도 마음은 보이지 않아 (야, 이 말이 맞죠.)
이 나이 되어서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아까 남녀 둘이 만났죠. 밑에 두 번째 가사를 보세요.)
술 취한 그날 밤 손등에 눈물을 떨굴 때 (자, 손등에 눈물을 떨굴 때 여자 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손을 감싸며 괜찮아 울어준 사람 (야, 이거…. 여러분 술은 먹지 마시고요. 음주운전 주의해야 되고.)
세상이 등져도 나라서 함께 할 거라고
등 뒤에 번지던 눈물이 참 뜨거웠소
이 나이 되어서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못난 나를 만나서 긴 세월 고생만 시킨 사람
이런 사람이라서 미안하고 아픈 사람
나 당신을 위해 살아가겠소
남겨진 세월도 함께 갑시다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이거 한번 들어봅시다. 제가 왜 이런 거 하느냐 하면 백날 복음 들어도 돌아서면 이 세계에요. 이 세계. 누가 날 위로 안 해주는가? 그거 뭐, 잘했다 칭찬 한 마디 해주면 될 걸가지고, ‘다 죽여 버릴래’ 이런 말보다도 칭찬 그게 뭐 어렵다고, 이런 거요.
둘 다를 알아야 돼요. 피라미드도 알아야 되고, 피라미드 제일 위 하나님의 관점도 알아야 되고 밑에 우리의 타고난 본성, 그저 남이 나를 칭찬하고 잘했다 하면 진짜 뭐든지 다 해줄 것 같은 이 본성. 이거 어쩔 건데요? 어쩔 건데. 내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사는 게 그렇게 나빠요? 내가 이 땅에서 사는 게 나빠요? 주의 뜻은 나쁘다는 거예요. 네가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반란군의 심보로 사는 게 그 자체가 나쁘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쩌라고요?
자, 여기서 사사기 2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멍내버립니다. 구멍 냈기 때문에 열두 지파가 몇 지파 되었죠? 열한 지파 되었죠. 사사기 20장. 그때 사사시대가 누가 없을 때? 하나님의 왕 되심에 합당한 왕이 없을 때에요. 없으니까 하나님의 뜻이 차단된 겁니다.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사기 뒤에 보면 “각각 그 소견에” 그다음 나오는 말이 “소견에 옳은 대로” 그대로 “행하였더라” 왜? 꿈을 현실로 전환하기 위해서 자기 옳은 대로 행했더라. 내가 옳은 대로 행한 그게 나빠요? 탕웨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게 나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만만하니? 뭐 하나님이 품격 있다고? 그 품격은 자부심에서 나온 거야. 하나님의 하나님 됨의 자부심에서.”
사사기 20장 계속 봅시다. 그렇게 해서 그 뒤에 여러분들이 전에도 들은 적 있지만 21절에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사십만 중에서 이만 이천이 하루 만에 죽었어요. 이만 육천 칠백 명이 이만 이천을 죽였다 이 말이죠. 그다음 25절에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몇 명입니까? “일만 팔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일만 팔천 명이 없어졌죠.
합해서 몇 명입니까? 4만 명이죠. 십분의 일이 날아갔죠. 이게 어느 편입니까? 정의로운 편이죠, 정의로운 편. 소위 정의를 부르짖는 그들이 불의한테 죽임을 당했어요. 그럼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죠. 이걸 이스라엘이 이해 못한 거예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왜 이해를 못했는가?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를 않았어요. 하나님께 그냥 통보만 할 뿐이었죠. ‘우리가 정의를 행사할 테니 하나님은 영광 받으세요.’ 이렇게 들어간 거예요. 쪽수도 많겠다. 그런데 십분의 일, 사만 명 죽고 난 뒤에 그다음에 그들이 누구한테 갑니까? 26절에 벧엘로 올라가서 누구한테 묻죠? 여호와께 묻는 겁니다.
이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 27절, “그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아까는 언약궤가 미스바에 있었는데 그때는 벧엘에 있습니다. 자, 언약궤에서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가? 언약궤에서 말하는 정의.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어요. 크게 쓰겠습니다. 오늘 제일 중요한 거니까. 언약궤가 말하는, 하나님이 말하는 정의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면 여기서 뭐가 나오죠? 죽음이 나오죠. 하나님이 인정한 유일한 이 지상의 현실은 ‘죽음’입니다. 죽음. 죽음인데 하나님의 언약이 받쳐주는,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출발된 언약에 대한 죽음이에요. 언약에 대한. 언약 자체의 죽음이에요.
아까 그 취지를 알아야 돼요. 인간들은 처음에 가정에서 태어나죠. 가정에서 태어날 때 부모가 자식보고 죽으라고 명령을 합니까, 살라고 지시를 합니까? 너 오줌 거기 누면 안돼. 화장실에 가야 돼. 밥을 가려서 먹어야 돼. 여러분 이거 설명하면 좀 걸리지만 설명해야 되겠어요. 표정들 보니까 지금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데….
인간이 자연에서 인간이 문화로 가잖아요. 문화로 갈 때 여기에 언어가 도입돼요, 언어가. 이 언어가 뭐냐 하면 ‘구분’입니다. 구분인데 내가 살기 위해서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될 것. 버섯과 독버섯의 구분이죠.
그리고 내가 가져야 될 여자와 갖지 말아야 될 여자. 여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근친상간 금지. 금지죠. 내 쪽의 여자는 어느 쪽에 시집보내야 돼요? 남의 집에 가야 되고 남의 집 여자는 내 쪽에 와야 되고. 이게 가치교환의 법칙이에요. 교환함으로써 결속이 되는 겁니다. 의로운 집단, 우리 집안 의롭다가 교환을 통해서 사돈끼리 합쳐서 자식을 통해서 다 같이 의로움이 되는 거예요. 그게 상견례에요. 바짝 긴장되는 상견례. 무슨 말이 오갈지는 상상도 안 되는 상견례.
레위기 11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때 먹을 것과 안 먹을 걸 줬죠, 율법으로. ‘돼지고기는 먹지 마라.’ ‘소고기는 먹어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받을 때 어떤 자세로 받았습니까? 이것 먹고 시키는 대로 하면 ‘산다’가 돼요, 시키는 대로 하면 ‘죽는다’가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산다 쪽이죠.
아직도 자기 자신이, 율법과 자신의 만남이 자기에게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옛날 이 존재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주님의 하늘의 존재가 나의 존재를 폐기처분하고 밀어내고, 장차 올 메시야 존재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는 하나님의 언약궤 원칙을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살려고 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율법 앞에서 당치도 않은 거예요. 들통 난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이유가 그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우리가 여기서 정의를 실현해야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땅을 계속 지탱할 수 있게 해준다.’라고 생각해서 전쟁을 벌인 겁니다. 그런데 그 땅은 자기들이 살 땅이 아니에요. 그 땅엔 누가 살아야 되느냐 하면 언약궤가 있어야 될 땅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야 될 땅인데, 그들은 당연히 자신이 백성이라고 여긴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나의 존재는 주님 앞에 쓸모짝 없다는 것을 내비칠 수 있는 그러한 경우를 당해야 그게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베냐민 지파, 불의한 쪽이, 베냐민이 잘했다는 소리 아닙니다, 불의한 쪽이 두 번 이겼어요.
세 번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자, 물었으면 그들은 이제 자기 정의로 나갑니까, 하나님의 정의로 나가요? 하나님의 정의로 나가죠. 그래서 28절에 보면, ‘우리가 가리이까 말리이까’에요.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형제를 치지 않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라는 거예요.
지금 그 정도 되면 이스라엘 존재의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있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있게 된 거예요. 바로 그것이 천국의 여권이에요. 천국의 여권이라고요.
우리가 모르는 하늘의 현실이 이 땅을 차지해왔고 그 현실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뭣도 모르고 우리는 내 현실, 내 잘남, 내가 훌륭하게 사는 것으로 천국 가겠다 하는 것과 대충돌을 일으켰죠. 그런데 충돌을 일으켜준 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고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안다면 이게 바로 복 받은 거죠. 이게 복 받은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전쟁했고 전쟁의 방법은 매복 방식으로 전쟁을 해서 그때 35절에 “베냐민 사람 이만오천일백을 죽였으니” 처음에 베냐민 사람 몇 명이라 했습니까? 이만육천칠백 명이죠. 그런데 이만오천일백을 죽였으니까 전멸이죠. 그냥 전멸이에요. 44절에 보면 “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일만 팔천이니 다 용사러라” 일만팔천 명이 죽었네요. 이만오천일백 죽이고 또 44절에 일만팔천 죽이고 46절에 이만오천 명 다 죽었고. 그러니까 베냐민 사람 다 죽였습니다.
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열두 지파가 되어야 될 야곱의 언약이 야곱언약대로 안됐죠. 열한 지파가 되었으니까 야곱언약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뭐가 돼요? 빵꾸가 난 거죠. 구멍이 생긴 거죠.
끝으로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22장 32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이렇게 읽으면 돼요. 동일한 목소리 크기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이 아니라, ‘아브라함의(작은 소리로) 하나님(큰 소리로)이요 이삭의(작은 소리로) 하나님(큰 소리로)이요 야곱의(작은 소리로) 하나님(큰 소리로)이요’
하나님이 밀어붙인 존재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에요. “에이, 죽어라.”하고 밀어낸 거예요, 뒤에서. 언약으로. 밀어내는데 그 밀어낸 분이 누구시냐 하면 바로 주님이 밀어낸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 했잖아요. 거기서 생기는 것이 마태복음 22장에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삽니까? 어떻게 죽었다가 삽니까? 사람은 죽었다가 살지를 못해요. 못하는데 살았다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가 바뀐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부활에.
결국 인간은 지옥 갈 사람도 저주스러운 부활이 되지만 그건 일단 더러운 부활이기 때문에 부활로 간주하지 않아요. 마가복음 9장 48절을 보면 지옥의 현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지옥의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게 현실이거든요.
그런데 이 현실은 인간세계에서는 안 받아주는 현실이에요. 왜 안 받아주느냐? 밀리지 않아서 그래요. 하나님에 의해서 밀리지 않으니까 턱하니 이 세상에 내 자리다, 하고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욥은 이미 경험했죠. 내가 육신 안에 있는 것은 내 무덤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육신은 나에게 무덤처럼 주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욥이 알게 된 겁니다. 나중에 욥이 더 예쁜 딸도 얻고 재산도 배나 얻었을 때에 그 많은 재산과 자식을 자기 거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거라고 생각합니까? 장차 오실 하나님이 주실 복을 미리 당겨서 ‘이게 복이야’라고 보여준 거죠.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는 복을 욥은 자기가 파괴되고 난 뒤에 말씀이 주는 복 안에 미리 소속되어 만나게 된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일단 죽이고 죽은 자를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 그렇다면 마지막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에서 열한 지파 되었죠. 그러면 이 한 지파만 채우면 됩니까, 아니면 열두 지파 다 새롭게 해야 되겠어요?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지금 열 하나도 문제 있죠. 열 하나에 문제인데 한 지파 채워봐야 똑같이 문제 있어요. 그러면 채워지는 마지막 이 이스라엘을… ‘왕이 없으므로’라고 했잖아요. 왕이 없으므로. 없으므로 본인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했죠. 그러면 옳다, 옳다, 옳다, 옳다의 열두 지파는 백날 해도 이건 원래 하나님 언약의 맞춤 이스라엘이 될 수 없죠.
그럼 새로 외부에서 누가 오면 되죠. 누가 오면 되죠? 왕이 오면 되죠. 왕. 언약적인 왕이 오면 되죠. 그다음부터는 율법의 레위언약 시대가 아니라 이제 왕 언약, 다윗언약의 시대가 바로 룻 시대에 주께서 룻이라는 여자, 다윗의 증조할머니를 준비해서 펼쳐집니다. 룻 안에서 이방인 안에서 외래인 안에서 뭐가 나옵니까? 새로운 이스라엘을 언약적으로 조성할 왕이 여기서 등장하는 겁니다.
이게 숨겨진 하나님의 꿈이요, 현실입니다. 우리의 꿈은 개꿈. 우리의 꿈은 개꿈이죠. 개꿈인 것을 감사한다면 그 사람 존재 뒤에는 주님 계십니다. ‘주여, 제가 반란군입니다. 제가 쿠데타 했고 내 것도 아닌데 데모했습니다. 점거농성 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런 인간밖에 안됩니다. 주여, 저의 죄를 사해주옵소서.’ 이렇게 하는 것은 이미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앞에 나가면서 우리가 할 존재의 사명이 바로 그거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현실이 현실이 아니었고 다 엉터리였고 하늘의 현실만이 참된 현실인데 우리는 사적인 미로 같은 세상에 살면서 사적인 내 꿈을 이루고자 평생을 다 낭비하고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주께서 십자가 피의 사건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존재를 세상을 향하여 전면에 내세우니 우리 뒤쪽에는 더 이상 마귀가 아니라 주님이 든든하게 받치고 있음을 또다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