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녹취록 올립니다. 이름 : 서경수
■광주 강의(06. 12. 22) 21-1
요한 1서 3장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0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여기에 “마귀의 자녀들”이란 말이 나오지요? 성경에서 볼 때.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그러한 선입견을 갖고 있어요.
제가 한 번 적어 볼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들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이 되겠지요?
이러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인간을, 사랑 자체인 인간을 만약 다른 형제가 모독한다면(마귀 새끼라든지 인격 모독이라든지) 안 된다는 것이 우리들이 갖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요한 1서 3장 10절에 보니까, 여기에 “마귀의 자녀들”이란 용어가 나오지요? 그러면 이 마귀의 자녀들은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지요. 마귀의 자녀든 하나님의 자녀든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잖아요? 하나님이 안 만들었으면 생길 리가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만드셨다? 마귀의 자녀도 만드셨잖아요. 그런데 첫 번째 공식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했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뭔가 주물럭주물럭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에서 마귀의 자녀가 나왔다는 말은, 우리의 기본 상식에서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든지, 또는 하나님의 사랑이 일부만 적용되고 일부는 적용이 안 되든지, 아니면 아예 마귀의 자녀가 없도록 하시든지’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해놓고 마귀의 자녀까지 언급하니까 사랑의 하나님에서 마귀자녀가 탄생하는 그 논리에, 우리들의 논리에 뭔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여기에서 암시가 되지요?
우리의 논리가 뭔가 잘못이 있다. 뭔가 구멍이 낫다. 여하간 뭔가 문제성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귀한 자이기에 인간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여기에 “마귀의 자녀”가 툭 튀어나오나 말이지요.
이것은 바로 사랑에 대해서 뭔가 크게 오해했기 때문에 이런 마귀의 자녀가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는 말을 제대로 안다면, 마귀의 자녀가 필히 하나님께서 만드셔야만 한다는 논리가 나올 때 딩동댕 정답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어!’ 라고 말하면 그것이 정답이 된다는 말이지요.
일반적인 사람의 논리에서는 ‘사랑’이란 자체가 마귀하고는 안 어울리는 사고방식인데, 어떻게 사랑이라고 이야기해 놓고 마귀의 자녀를 만들 생각을 다 하셨는가? 이것이 우리 이해로는 앞뒤가 안 맞는데, 이것은 우리의 이해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사랑이냐? 우리는 죄를 지니고 있는 죄인인데, 죄인이 지니고 있는 사랑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같은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라면서 무슨 마귀의 자녀를 만들어 내는가? 그게 무슨 사랑인가?’ 라고 함부로 이런 말을 하지요.
그래서 이번 강의는 시작부터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마귀 자녀가 나오느냐? 그리고 그걸 이해 못하는 우리는 왜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장 1절에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주사”입니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다.’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현재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을 안다는 겁니다. 사랑을 알게 되면 마귀의 자녀가 왜 있어야 하는가도 같이 알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한 번 따져봅시다. 왜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면 그 만들어진 인간도 하나님의 사랑이 당연히 따라와야 될 텐데 왜 우리는 사랑을 모르는 자로 이 땅에 출생하고 살아가는가?
이것을 제가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의외로 간단해요. 저기 시계가 있는데 저게 뭐냐? 시계다. 이건 뭐냐? 비타 500이다. 그러면 시계와 비타 500을 합쳐서 뭐라고 하느냐? 시계 비타 500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우리 인간은 범죄하고 난 뒤에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면, 하나의 개체를 개체 단독으로 보고 이름을 짓는 그런 버릇이 있어요. 저게 뭐냐? 시계다. 이건 뭐냐? 비타 500이다. 그러면 둘 합해서 뭐냐? 시계와 비타 500이다.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하는 거예요. 저건 에어컨이고 저건 냉장고고, 이것은 떡이고 이건 물이고. 한 번에 한 개씩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당연한 것이 아니고 타락한 증거로 보는 겁니다.
타락을 안 했으면 사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너는 누구냐?’ 예를 들어 ‘나는 현자’다. 나는 누고? ‘나는 인철이다.’ 인철이라고 하니까 장로님 이름인데 잘못했네! 그러면 ‘인석’으로 합시다. 너는 현자고 나는 인석이다. 우리는 범죄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딱 끊어서 ‘너는 누구고, 나는 누구다’ 이렇게 본단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너는 사랑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리고 ‘인석이는 누구냐?’ 그냥 사랑의 대상, 아담이고. 그러면 현자는? 그것도 아담이고.
무슨 말이냐 하면 ‘아담’이란 말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이 포함 되었는데 인간이 범죄 한 후에 뭘 떼버렸는가 하면 사랑을 떼버리고 ‘나는 누구냐? 나는 아담이다.’ 이것으로 그친 거예요.
우리가 범죄하고 난 뒤에는 아담은 아담이고, 현자는 현자고 인석이는 인석이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이것이 아무 하자나 문제점이 되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하나님이 묻지요. ‘인석아! 예. 너 사랑은 어디 있느냐? 사랑이란 것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사랑하지 않습니까?’
자, 사랑은 어디 있느냐? 사랑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사랑할 대상이 나타나야만 사랑이 있지요. 범죄하고 난 후에 우리의 느낌은 그렇습니다. 그냥 우리 자체로는 사랑이 아니고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사랑이 됩니다. 미움이 뭡니까? ‘나는 미움이다.’ 말이 안 되지요? 나는 이근호지 미움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나에게 미움이 발생되려면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 발생될 때 비로소 나에게 미움이 발생되잖아요? 우리는 상대가 있어야 미움이 되잖아요? 제 말 맞지요? 사랑과 미움 이런 것은 상대 없으면 관계가 성립 안 되지요?
‘사랑 한다’는 것은 타동사가 되어서 반드시 목적어가 있어야 됩니다. 뭘 한다고 할 때는 목적어가 있잖아요. 무엇을 사랑하느냐 이렇게 따지잖아요. ‘나는 사랑이다.’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된다니까. 이 차이를 알겠습니까? ‘나는 사랑이다.’ 라는 말이 성립이 안 돼요. ‘나는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성립이 됩니다.
‘나는 사랑이다.’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원래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참 어렵지요?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게 성립 됩니까, 안 됩니까? 성립이 돼요. 그러나 ‘아담은 사랑이다.’ 이건 성립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요. 왜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그가 따먹은 선악과는 모든 관계가 날아가 버리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끊어지면 남는 것은 달랑 자아만 남지요. 주체만 남지요. 이해되십니까? 이해되어야 하는데 참 어렵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있는데, 분명히 두 육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두 육체로 보지 않고 한 몸으로 보지요. 지난번 울산 강의에서 했지요? 두 육체가 뭐라고요? 두 몸이 아니고 한 몸이지요. 이것을 수학적으로 한 번 따져보세요. 이것이 맞는지. 말이 되는지.
그러면 1,000명이 모였다. 그러면 몇 몸이 되어야 합니까? 1,000 몸이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한 몸이라고 해요. 그 어떤 수학적 논리로 그것이 나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인간은 수를 세잖아요? 수를 센다는 말은 둘 이상이기 때문에 수를 세지요. 비타 500 하나, 비타 500 둘. 세잖아요. 센다는 말은 하나가 아니라 따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따로 존재한다고 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 속에 있는 그 관계가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 인식은 이미 범죄하고 난 이후의 인식이기 때문에 1, 2, 3, 4 뭘 헤아린다든지, 내가 누구냐 혹은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을 때도 항상 주체를 전제로 하고 물어요. ‘나’라는 것을 먼저 설정하고, ‘저 사람을 미워할까 좋아할까?’ 항상 나를 먼저 전제하고 그 다음에 따집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 예를 들어도 이해 안 되면 그냥 집에 가야 된다.
군상상고와 경북고가 야구를 합니다. 그런데 운동장에 늦게 온 친구가 물었어요.
친구1: ‘어이, 몇 대 몇이고?’
친구2: ‘군상상고랑 경북고가 시합을 한단 말이야.’
친구1: ‘그래, 그건 아는데, 지금 몇 대 몇인데?’
친구2: ‘어허, 군상상고하고 경북고가 붙었다니까.’
내가 묻는 것은 어느 팀이 시합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지금 몇 회가 진행됐고, 현재 점수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묻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9회 말인데 군산상고는 4점 경북고는 3점이다.’ 이렇게 답변하면 되지요. 그러면 9회 말은 누구 것입니까? 군상상고 것입니까, 경북고 것입니까? 아니죠. 관계지요. 그러면 4점은 군상상고, 3점은 경북고 이것은 알겠는데, 4대 3 자체는 누구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냥 4대 3이지요. 4점은 누구인가? 하면, ‘군상상고’, 3점은 ‘경북고’ 이것은 말이 되는데, ‘현재 9회 말이고 결과가 4대 3이다.’
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갔습니다. 전화를 합니다. ‘목욕탕에 몇 명 있나?’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고, ‘목욕탕 물 뜨겁냐?’ 라고 물었어요. ‘지금 목욕탕에 3명 있거든.’ 몇 명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목욕탕 물이 따뜻하냐 이 말입니다. ‘따뜻하다.’ 하나님은 그걸 묻는 거예요.
‘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아니고요. 저 여자가 따 먹었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갑자기 어떤 문제로? ‘선악과를 어떻게 했느냐?’ 묻는데 어떤 문제로 돌아갑니까? 너, 나의 문제로 분해되지요. 미끄러지지요. 정말 하나님께서 묻는 선악과는 없고, ‘내 책임인가, 여자의 책임인가’ 하는 책임 문제로 후퇴하잖아요.
여기 떡이 있는데, ‘이 떡 왜 이것밖에 안 남았어?’ ‘형님 먹었어요. 동생이 먹었어요.’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하나님은 떡에 관해서 묻는데, 인간들은 타락하고 난 뒤에 자아가 우선이거든요. 주체가 우선이기 때문에 ‘제가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고요, 저 여자가 먼저 따 먹으라고 해서 따 먹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정작 하나님이 찾는 한 몸 되기는 없고, 두 육체가 두 몸이 되었지요. 왜냐하면 한 몸에서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예수님께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이 아주 깊은 말씀이에요. 오른 손이 하는 일이 왼손이 모르게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아무리 오른 손이 조용히 일을 해도 왼손이 나는 모른다고 할 수 없잖아요? 같은 몸이면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하는 것이고 같은 몸이기에 그렇게 되지요. 만약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른다면 이것은 같은 몸이 아니고 따로 논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내가 잘못했습니까, 제가 잘못했습니까? 나 의롭습니까, 죄인입니까?’ 라고 벌써 출발점을 나로 규정짓는 그 자체로부터 너, 나의 책임이 없는 상태로 세상을 창조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너, 나를 이야기 안 해도 되는 상태. 너, 나가 빠져야만 되는 상태.
‘내가 죄 지었습니다. 저 여자가 죄 지었습니다.’ 라고 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 한 몸 상태. 한 몸 되면 되잖아요. 한 몸 되면 김 집사가 어떠니, 최 집사가 어떠니 싸우지 않게 된단 말이지요. 이 목사가 어떠니 박 목사가 어떠니 안 싸우지요. 왜냐? 한 몸이기 때문에. 싸운다는 말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말입니다. ‘너는 울산에 있고 나는 광주에 있는데 너랑 나랑 무슨 상관이냐?’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한 몸 되면, 내가 어디 있든, 네가 어디 있든 우리 관심사가 너와 내가 아니고 우리 둘 다 뭘 바라본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만 바라본다 이 말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뭔지 이해되십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왜 따 먹었느냐?’ 하나님의 관심사가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이미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처지가 된 이상 선악과를 따 먹었지 않습니까? 선악과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로서 있던 선악과를,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는 하나님의 선악과도 되지만 누구 선악과도 됩니까? 인간의 선악과도 되지요? 인간이 아는 선악과가 되지요.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인간이 되었지요?
원래 선악이란 것은 하나님만 아는 것인데, 하나님만이 ‘나’라고 할 수 있어요. 여호와를 뭐라고 합니까? “나는 나다.” 하나님만 ‘나는 나다’ 할 수 있고 나머지는 ‘나는 나다’고 할 수 없는 주재에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뭐가 됐습니까? ‘나는 나다’로 궁극적으로 그쪽으로 응축될 수밖에 없어요.
응축이란 말 아시지요? 뭉치고 뭉쳐서 결국 한 점으로 모아지듯이, 이것을 블랙홀이라고 합니다. 중력이 잡아당기면 나중에 단단한 물체가 되어 그것이 폭발해버리면 블랙홀이 되잖아요.
인간은 아무리 애쓰고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내가 최고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도 이것을 깨달았는데 고행을 해서 알았어요. 결국 이 세상에는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다. 부처가 80평생 고생 실컷 하고 알았어요.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밖에 없어요. 단단한 쇠 공이예요. 단단한 쇠 공을 차면 발만 아파요. 이것은 들어갈 틈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밖에 없어요. 자기밖에 모른다고. 인간은 ‘나는 나다’고 할 입장이 못 됩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어요. 마치 신처럼, 신이 알고 있는 선악 지식을 본인이 알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본인이 신이 되어버린 겁니다. ‘나도 안다. 선악에 대해서.’ 선악을 알아서 신이 된 것이 아니고, 이미 주체가 하나님에서 떨어진 상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란 관계가 이미 날아가 버린 상태에서 유성처럼 떨어진 것은 ‘나’라는 외톨이. 자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는 하나님만이 사용할 말을, 우리 인간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 세상 자식이든 아내든 친구든 다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은 ‘나는 나다.’ 부모가 어떻고 스승이 어떻고 결국 갈래면 가라. 결국 남는 것은 나만 남았구나. 아, 외로워라. 이것을 니체는 ‘초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신이기에 신처럼 행동해야지. 예수도 초인이고 우리도 초인이고 수천의 신들이 우리 인간이다. 인간 자신이 신인데 왜 신을 찾느냐 이 바보들아. 따져봐라. 인간이 신이 아닌가. 알 것 다 안다. 사랑도 알고, 의도 알고, 죄악도 알고 다 아는데 자기가 신이지 인간 외에 신이 어디 있느냐?
심지어 니체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신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내고, 인간이 신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다? 나에게 있다면, 내가 신을 선택한다는 말은 결국 신은 강아지고 선택하는 내가 바로 주인이니까.
신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최고 높은 자를 말하잖아요. 높은 자란 선택권을 갖잖아요. 그러면 내가 신을 골라잡아 선택한다는 말은 신도 내 밑의 똘만이(부하)고 나는 신보다 높은 절대 신이 되는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 그런 글을 썼지요? “기독교는 신앙이 아니고 하나의 문화다.” 기독교가 하나의 문화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교회는 문화센터지요. 문화센터가 뭐 하는 데냐 하면, ‘자기 자신이 곧 신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입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곳입니다. 문화센터의 특징은 절대로 인간을 정죄해서는 안 돼요. 모독해서도 안 되고. 오히려 신처럼 대우해야 돼.
신처럼 대우해 줄 때 문화센터는 융성하게 되고, 만약 인간을 모독한다면 그 문화센터는 문을 닫아야 됩니다. 문방구에 어린이가 와서 “지우게 있어요?” 하는데, “너는 죄인이야!”라고 하면 지우게 사겠습니까? “손님은 왕이십니다. 어떤 색을 원하십니까? 노랑, 빨강, 파랑?” 이렇게 모셔야 다음에 또 올 것 아닙니까?
교회가 문화센터가 되고 교회 활동은 문화 활동이 됐어요. 이런 시대에 돌입한 겁니다.
오늘 울산에 목사님 만나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 들었습니다. 옛날 기독교는 고함치고 기도하고 부흥회한다고 주여! 주여! 삼창하고 했는데, 요새는 어떤 것이 유행하는가 하면 고요하게 앉아서 침묵하는 것이 유행이랍니다. 이것이 일종의 참선이지요. 참선 중 한 방법이 ‘관’. ‘관’이 뭔 줄 알아요? 집중해서 한 곳을 관찰하는 거예요. 이거 불교에서 다 했고, 천주교에서도 한 것 아닙니까.
왜 이런가 하면, 웰빙 문화가 기독교에 까지 침투해서 기독교도 이제 웰빙에 보탬이 되는, 바꿔 말하면 인간을 초인으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해 ‘너가 신이니까 신처럼 살면 그것이 최 극상의 행복이다.’
니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 자기보다 높은 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느냐?’ 높은 자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 마음대로 설치면 벌 받는다는 뜻이거든요. 자기 마음대로 설치면 벌 받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행복하냐, 불행하지. 그러니까 내가 내 마음대로 설쳐도 누구한테 간섭 안 받을 때 그야말로 행복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자가를 알 때 피폐해진다.’고 하거든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내 머리위에 어떤 놈이라도 앉아 있는 것은 싫다는 소리예요.
범죄하고 난 후에, 자기 딴에는 사랑도 알고 선악도 안다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보시기에 다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하면,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인간이 신의 흉내를 내면서 ‘나는 나’라는 입장에서 거기다가 사랑을 집어넣고, 의를 집어넣고, 메시야, 언약, 십자가 어떤 개념을 다 집어넣어도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런 ‘나’ 중심의 ‘주체’ 중심의 사상으로 하나님을 대하게 되면, 어느 인간이 ‘나는 마귀 자식이다.’라고 하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모두 다 자기를 극상의 신의 아들로 간주할 것 아닙니까? 신의 아들로 간주한다는 것도 사실은 핑계고 자신이 극상의 신이지요.
농담으로 자신이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는 사람은 있어요. 성철 스님. ‘나는 마귀가 좋다.’ 얼마나 신 같으면 자기는 마귀가 좋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진실로 ‘나는 마귀다.’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은 다 해요. 하지만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여전히 앞에 ‘나’가 있잖아요. 구원 받은 사람 같으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 앞에 뭐가 떨어져 나가야 합니까? 그냥 죄인이죠. ‘죄인이 바로 나다.’ 이렇게 나를 뒤에 넣어야지요.
‘나는 죄인이다.’가 되면, 나는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대지만, ‘죄인은 바로 나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버둥대며 애를 써도 나는 죄의 범주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구원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되지요. 죄인이 왜 구원 받습니까. 죄인은 죄인으로 끝나야지 왜 구원을 받아요. 그렇잖아요?
죄인이면 ‘빨간 옷 입으셨네요?’ ‘예 빨간 옷 입었습니다.’ 이러면 되지, ‘저는 파란 옷을 못 입어 고민이에요.’ 이럴 필요가 뭐 있냔 말이지요. 파란 옷을 안 입어서 고민이란 말은, 앞에 뭐가 있다? ‘나는 파란 옷을 좋아하는데 지금 빨간 옷이기 때문에 싫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또 ‘나’가 앞에 등장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죄인은 나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되는데, ‘나는 죄인이다.’고 하면, 뭐가 꿈틀거리느냐 하면 ‘빨리 이 죄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가 꿈틀거리지요.
베드로가 예수님 만난 후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때 ‘나’는 구원 받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고, “떠나소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죄인은 바로 접니다.’라는 말이지요.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처음 알았습니다. 주님 세계가 따고 있고 내 세계가 따로 있구나! 나의 세계는 나의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지 깝죽대면서 나의 세계를 탈출하려는 것은 말도 안 되는구나를 분명히 알았지요.
‘나는 죄인이다.’ 라는 사람이 만약에 구원 받고자 해도 기껏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나는 의인이다.’ 라고 하지요. 이것이 구원입니까?
‘나는 죄인이다.’가 기껏 노리는 것이 뭐예요? ‘나는 죄인의 탈을 벗어버리고 나는 의인이다.’가 되겠지요. 이렇게 ‘나는 의인이다.’가 되면 또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나’가 붙어 있잖아요. ‘나’가 붙어있는 이상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그 인간은 아니란 말이지요. 이것은 기껏 종교를 하나 선택한 것뿐이지 여전히 누가 살아있습니까? ‘나’가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죄인은 나다.’가 되려면, 죄인 상태에서 만약 구원 받았으면, ‘의인은 나다.’ 이렇게 되어야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의인이고, 예수 안에서 나는 의인 되었다.’
‘예수 안에서 의인 되었다’는 말은 ‘나는 이제 죽으나 사나 의인이다.’ 이 말 아닙니까.
아담 안에서 ‘나는 죽으나 사나 죄인이야.’ 하다가, 예수 안에서 ‘나는 죽으나 사나 의인 되었다.’ 의인되시는 분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 아닙니까. 의인은 예수님이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범죄하지 않는 것이 되지요.
범죄는 뭣과 연관되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원래 그 관계가 없으면 죄고, 그 관계가 살아났으면 그것은 의가 되는 겁니다.
제가 약간 비약했는데, 좀 더 쉽게 해 봅시다.
야, 이것 참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네.
처음부터 다시 해 보겠습니다.
처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 있었지요. 그 사랑의 증거가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것이 사랑 맞잖아요? 제 말 틀렸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사랑이잖아요.
지금 악마는 뭘 깹니까? 악마는 사랑관계만 자르면 돼요. 아까 고기 먹었잖아요. 제가 칼을 들고 고기를 잘랐지요. 이처럼 마귀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 관계에서 사랑을 잘라내요. 잘라내니까 인간이 사랑관계에서 떨어져서 독자적인 관계가 되지요. 이것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예야, 이왕 독자적인 관계가 된 것, 너 혼자 잘 해라.” 이걸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마귀가 잘랐던 그것을 그리워하지요. 그것이 바로 사랑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떨어지고 난 뒤에 생각하는 사랑은 누구 중심의 사랑입니까? 이미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내가 주체가 되어 있기에 나 중심의 사랑이 되겠지요? 인간들은 기껏 몸부림쳐봐야 ‘사랑’을 외쳐도 내 잘되는 사랑입니다.
수요일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주인공이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인공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왜냐? 산타크로스를 사랑의 화신으로 보지요. 산타가 사랑의 화신이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선물을 주잖아요.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울지만 않으면 돼요.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울지만 않으면 선물 주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사랑의 화신 예수님은 십자가로 다 죽이잖아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패버려요. 그러니까 두 종류의 사랑이에요.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고, - 너는 죽었어. 너는 죄인이야. 이게 주님 주시는 사랑이고, 산타는 시속 320Km 루돌프 설매 타고 와서 선물 주잖아요. 이 둘 중 어느 것이 주체가 납득이 되는 사랑입니까? 산타가 ‘나’라는 주체에, 내가 그리워하는, 평소에 내가 소망하고 있든 그 사랑에 합당하잖아요? 그 산타가 마귀고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인데 이 세상에서는 누가 마귀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마귀가 돼버리고 산타가 메시아가 되잖아요.
이런 왜곡, 이런 거꾸로 된 원인이 뭡니까?
이미 관계에서 떨어져서 ‘나’라는 주체가 단단한 쇠 공처럼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주인이라도 개가 밥 먹는데 건드리면 주인이라도 물지요.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아빠 하며 좋아하다가도 먹는 것 빼앗으면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욕 나옵니다.
내 귀한 자녀가 어디에서 저런 욕설이 나오는가? 너무 걱정 마세요. 부모 책임 아닙니다. 이미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주체가 확립되어 있어요. 자기 피부에 뭐가 건드리고 하면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아직 숙달이 들 돼서 자기 주체가 완벽하게 확립이 안 되었지만 머리가 커지고 두뇌가 발달하면 점점 더 자아 중심으로 가요.
두뇌가 IQ든 EQ든 발달하는 것이 방향 없이 발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나’ 좋아라는 식으로만 발달해요. 이웃사랑, 세계 핵문제 이런 것 때문에 발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다.’ 라는 것을 더욱 더 확인하고, 이것을 굳히기 위해서 두뇌는 발달하고, 조기유학 가서 영어배우고 다 하는 겁니다. ‘나는 나’ 되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삐아제는 ‘자아의식 확립’이라고 합니다. 자의의식 확립 안 된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자폐아’ 자폐아는 맨날 기대요. 나가라고 해도 기대고. 사람을 만나도 숨어있고. 자아가 확립이 안 돼서. 이것은 장애아지요. “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독자적인 언어를 구성 못하고 들었던 것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회에서 환영받는 사람은 자아의식이 강렬한 사람일수록 이 사회에서는 영웅으로 환영해 줍니다.
아무리 인간이 교회를 다니고 기도를 해도 그 중간에 ‘손대지 마. 절대 이것은 안 빼앗길 거야!’ 라는 것이 있어요. ‘신이시여, 내 뜻대로만 되게 해 주시되 내 뜻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런 것이 궁극적으로 들어있습니다. 이게 마귀의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게 어려운데 이해되든 안 되든 나도 모르겠다. 그냥 밀어붙여야겠습니다.
십자가 이후와 십자가 이전이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사건이나 에덴동산 사건은 원초적 사건입니다. 원초적 사건이란 말은, 이 사건은 역사 전부를 덮는 지붕 같은 사건이에요.
선악과 따 먹은 사건은 그 때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이 계속해서 지구 끝날 때까지 사건이 계속 지붕으로 덮여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했다. 이것은 아담만 범죄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자아의식이 있어서 ‘아담은 아담이고 나는 나다.’ 라고 우기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백날 우겨도 하나님은 ‘나는 전체를 아담 한 몸으로 간주하고 일을 개시한다.’ 그렇게 처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아담에 속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죄인은 바로 우리다.’ 우리 후대를 100대를 잇고 1000대로 내려가도 범죄한 자는 우리다. 다른 말로하면 죄인은 곧 아담이다. 아담 속에 누가 있다? 우리가 있다. 따라서 죄인은 우리다. 죄인은 아담이다. 그러면 의인은 누구입니까? 의인은 예수님이지요.
하나님은 이 두 공식밖에 몰라요. 이 두 가지 공식에 의해서 창세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공식을 그때그때마다 적용시킨 겁니다. 죄가 얼마나 깊이 있고, 죄가 얼마나 다양한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율법은 사랑 관계 회복을 위해 주셨건만, 그래서 모든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초점이 있건만, 인간들은 모든 계명을 자기에게 흡수해서, ‘나는 신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라는 자아 위주로 전부 흡수해서 이것을 순종, ‘지켰다’고 이야기합니다. 맞잖아요?
사울이 왕이 되고 나니까 그 나라가 누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난 뒤에 그 나라가 누구의 것이라고 봤습니까? 자기 것이라고 봤지요. 그때마다 주가 찾아옵니까? 사울에게는 사무엘이 찾아오고 다윗에게는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지요. 너의 것이 없다는 거예요. 주님의 것으로 너지. 너의 것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모든 살아가는 것이 ‘나의 것’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개입하는 식으로 하지요. “비타 500 누가 먹었어요?” ‘내가 먹었어요.’
나, 너. 너라는 것은 나의 입장에서 너가 있고. 나가 성립되면 너가 생겨요.
주체가 성립되면 반드시 다른 주체를 상정하는데 그걸 객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주체와 객체 사이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고 섞이지를 않지요. 왜? 섞이게 되면 주체가 날아가 버리니까.
죄짓고 난 이후 주체는 포기 못하지요.
중요한 것인데, 다시 해 봅시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가 두 자로 뭡니까? ‘사랑’이지요. 이것을 테이프로 봅시다. 하나님과 우리를 묶는 테이프로. 테이프가 끊어지니까 인간은 나밖에 모르는 존재가 되었어요. 한 몸이 아니고 나 밖에 모르는 몸. 나 밖에 모르는 이것이 현실이잖아요. 나 밖에 모르는데, 아무리 ‘기독교가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십자가가 어떻고’ 해도 결국 나 밖에 모르는 것을 해체할 수 없지요?
따라서 나는 결국 내가 죽는 한 나는 안 죽지요. 야, 이 말 좋다. 오랜만에 좋은 말 했다.
내가 죽는 한 나는 안 죽지요. 내가 십자가 믿고 함께 죽어도 나는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안 죽지요. 내가 예수님 십자가 믿고, 주와 함께 죽는다 해도 나는 안 죽어요. 왜? 나는 십자가와 함께 죽은 나가 되 버리지요. 그러니까 안 죽잖아요.
내가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할 때, ‘믿습니다.’ 고 하는 주체가 누구예요? 그 나는 살아 있잖아요. 그 나는 안 죽었잖아요. 예수 믿는 나는 누굽니까? 예수 믿는 나가 있잖아요. 안 죽잖아요. 나가. 아무리 예수 믿고 “나는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혔나니” 해도 나는 남아 있잖아요.
아무리 내가 성경을 외워도 나는 안 죽는단 말이지요. 이 말은 결국 내가 나를 죽이는 방법이 있다, 없다? 없어요. 내가 나를 죽이는 방법이 없어요. 세상에 그 누가 자기 자신을 저주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도 축복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나를 죽이는 것은 내 계획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죽이겠다는 계획은 내가 세울 수 없어요. 그 계획은 다른 분이게 일임하세요. 누가 죽이십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자는 반드시 저주 받아야 되지요. 이 계획은 취소가 안 됩니다. 왜? ‘선악과를 따 먹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으니까. 그 죽이는 죽임을 누가 죽이십니까? 방금 제가 우리는 못한다고 했지요? 누가 하십니까? 예수님이 하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죽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죽입니다.
제 생년이 1953년입니다. 십자가는 구경도 못했어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지요. 바울도 십자가 근처에도 안 갔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결국 십자가라는 것은, 십자가 전, 후를 따질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지요. 우리는.
십자가라는 것이 시간의 한 지점으로 머물 것 같으면 우리가 전, 후를 따지겠지만, 십자가란 것이 십자가 전, 후를 따지는 우리 자체를 완전히 죽여 버렸기 때문에 진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십자가 전, 후라는 생각도 못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와서 죽이면 비로소 안 죽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우리가 죽을 수가 있는 겁니다. 왜? 우리는 죽고 그 안에서 누가 살아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이 방법 외에는 사랑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를 형성시키기 위해서, - 그래야 언약을 완성하니까 - 모든 일을 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뭐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리 남한테 해준다 할지라도 해주는 주체가 나기 때문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은 왼손이 모르는 상태가 아니고 아는 상태에서 해 버리는 거예요. 나는 나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았어요? 이스마엘이죠. 기껏해야 이스마엘이잖아요. 그러면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이스마엘은 저주받을 자지요. 저주받을 자를 낳았다는 말은 누가 저주 받아야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저주 받아야 하지요. 그렇잖아요? 자기가 낳은 자식이 저주 받는다는 말은 그 부모가 저주 받을 자이기 때문에 저주 받을 자식이 나왔잖아요.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육체는 십자가에 죽어야 되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구원 받는 것은, 자기 스스로는 할 것이 없지요. 자기 스스로 해 봐야 이스마엘밖에 안 되니까, 그러면 뭘 해야 됩니까? 이삭이 와서 죽을 때 아브라함도 같이 죽고, 이삭을 살릴 때 함께 사는 것.
이삭은 누구 작품입니까? 주님 작품이죠. 바로 주님이 와서 우리를 죽이고 살릴 때 비로소 그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 말대로 ‘나는 사랑의 대상이다.’고 할 때, ‘나’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드디어 하나님 사랑 맞네.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사랑을 증명하는 증인에 불과하지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랑은 여기 있다.” 라고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왔잖아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지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기껏 하는 말이, 자기가 주체가 된 사랑이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 사랑 말고. 나중에는 주께 맡겨버리지요. 그 사랑이 뭐냐 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네가 죽지는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주체를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짓밟고 우리 주체에서 하는 모든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님이 주체가 되어서 주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밟고 지나가지요. 우리는 밟혀서 납작하게 되고. 요한을 내가 올 때까지 살려둔다고 해도 너는 상관 말고 너는 이 사랑 자체인 예수님을 생각해라. 그렇게 나옵니다.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잠시 쉽시다.
(06. 12. 29. 18:08 녹취 마침)
■광주강의(06. 12. 22) 둘째시간 녹취록 올립니다. 이름 : 서경수
광주 강의(06. 12. 22) 21-2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마귀의 자녀가 왜 등장하느냐?’ 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했지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모든 인간을 다 사랑해야지 누구를 마귀의 자녀라, 도대체 사랑에서 마귀의 자녀가 도무지 나올 구멍이 없잖아요? 하나님은 사랑인데 마귀의 자녀가 나올 수 없단 말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마귀의 자녀가 나오는가?
이것은 바로 우리의 잘못된 오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내 중심으로 사랑하니까, ‘나’라는 것이 먼지 있으니까 “무조건 ‘나’는 잘되어야 돼.” 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니까, “나는 인간이고 나만 잘 되면 안 되고 같은 인간은 다 잘 되어야지.” 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니까 “사랑이라면 다 몽땅 사랑하고 구원해야지.” 라는 생각을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뭔가 하면, 마귀의 자녀는 필히 마귀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사랑인데, 왜냐하면, 그래야 “나는 구원 받고 싶습니다.” 라는 주체가 다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주체가 날아가야 다시는 주체 이야기를 안 할 것 아닙니까. 주체라는 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생긴 현상이거든요.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쟤는 천당 가는데 나는 왜 지옥 보냅니까?” 라는 소리가 안 나오게 만들어야 돼요. 반대로 “나는 지옥 가야 하는데 왜 천국으로 갑니까?” 라는 말을 할 필요 없게 만드는 거예요.
이것이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25장 3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절에 보면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오히려 묻지요? ‘제가 언제 주님한테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묻지요.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합니까? 주께서 하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지요. 나는 매직으로 글을 썼는데, “너는 그림도 잘 그리고 --” “주여, 제가 언제 그림을 그렸습니까?” “내가 그림 그렸다고 하면 그림 그린거야”
주님의 해석은 우리의 해석을 능가해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일방적으로 구원해 가시는 거예요. 성도는 그것을 느낄 뿐이지요. 내가 경건한 것도 없고, 일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복을 주셔서 의인 되었다는 것을 성도는 알고, 누구는 모른다? 마귀의 자식들은 모르지요.
여기 마태복음 25장에 마귀 자식 나오잖아요? 이 사람들은 왼편에 있는 자들인데, 지옥 가잖아요. 지옥 가면서 뭐라고 합니까? 44절에 보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주께서 안했다고 하면 안 한 거예요. 이 말은, 누가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다? 우리 주님이 쥐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너는 무엇을 했고, 나는 무엇을 했다’는 해석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없다? 우리한테는 아예 없는 거예요. 왜? 우리 주체를 박탈해 버리니까.
우리 주체를 박탈시킨 거예요. 그래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롬4:6)에 대하여 다윗이 말했지요.
주님께서 어떤 자를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어떤 자를 구원하기로 작정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너희들이 이 지상에서 주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나는 일체 거기에 대해서 배제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건질 자를 건지는데--.
제가 오늘 차타고 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고린도후서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구원 받을 자에게는 향기고, 망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악취가 된다고 했지요?
이 말씀은, 악취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라고 할 때,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아이고 고맙고 감사해라.’ 이렇게 받는데, 안 믿는 사람은 ‘웬 입 냄새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이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악취로 느끼도록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본인이 악취로 안 느끼고 싶어도 악취로 맡아지도록 주께서 열심히 일하신 거예요. 망하는 자에게.
망하는 자가 인간성이 더러워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망하게 하시는 분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모두가 안 믿는 눈치인데, 진짜예요. 진짜입니다.
여호수아를 봅시다. 11장 20절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들에게 저주 받는 자 되게 하시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저주 받는 자 되게 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이렇게 하는 겁니다.
구원 받는 사람은 사랑을 받아 챙기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곧 사랑 되게 하시는 거예요. 사랑을 따로 챙기는 것이 아니고 사랑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사랑으로 구원 받고, 저쪽은 사랑으로 저주 받는 거예요. 이것을 물론 믿음이라고 하지만.
이사야 22장 14절을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죽기까지 용서를 안 해 준다는 말이거든요.
한 곳 더 찾아봅시다. 시편 69편 27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라고 주께서 기도하셨지요? 절대로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28절에는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라고 나옵니다.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어떤 일을 실시해서 그 실시한 것이 나에게는 이렇게 도착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진도를 좀 나가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왔으면, 그 다음에 3장 1절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이 대목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안다, 모른다를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오 목사님에 대해서 안다, 모른다를 누가 결정하는 거예요? ‘나’라는 주체가 결정하잖아요? “너, 저분 알아?” “응, 알아.” “누가 알아?” “내가 알아.”
항상 안다, 모른다의 주체는 누굽니까? 내가 주체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주체가 누굽니까? 자기 자신이죠.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된 이상은 어떤 경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지요. 이해되십니까? 이 말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판단을 내리는 사람한테는 어떤 경우에도 모르는 식으로 움직이신단 말이지요.
자기가 주체인 사람에게는 어떤 식으로라도 발각되지 않는 그런 예수님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확실한 것은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에서 “우리”는 누굽니까? 성도 아닙니까.
성도가 있고 비 성도가 있다면, 성도에 대해서 안 믿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분석하고 판단하고 이해하겠지요. 그렇게 해서 아는 것은 성도를 바로 아는 것입니까, 모르는 것입니까? 모릅니다. 그러니까 ‘네가 아무리 판단하고 분석해도 헛것이고 엉터리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를 어떻게 알아보는가? 성도가 비 성도에게 이야기하면 압니까? 이렇게 해도 몰라요. 이것이 중요해요. 성도가 이야기해도 그들은 몰라요. 왜 그러냐 하면, 성도와 비 성도 사이에는 원래부터 서로 모르는 사이 되게 하도록 주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예요. 어떻게?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성도를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이런 소리 하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나는 예수님은 모르지만 당신 보니까 진짜 신자 맞구나!” 이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불신자들도 납득이 되는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자일 확률이 많아요.
신자는 얼마나 꽁꽁 숨었는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절대로 성도로 드러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신자 눈에 성도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그게 성도에요. 절대로 성도처럼 보이지 않아야 그게 성도에요. 왜? 모르는 놈한테는 몰라요 돼요.
주님을 모른다면 성도도 몰라요. 주님과 성도는 함께 가는 겁니다.
말을 바꿔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신자라고 이야기할 때 그러면 그 사람이 불신자입니까? 어떤 사람이 불신자라고 이야기해서 불신자가 아니고, 성도가 불신자라고 했을 때 불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도인지 불신자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제시하는 주님이 어떤 주님인가를 제시할 때, 주님을 아는 자가 불신자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불신자 맞습니다. 그러나 주를 모르는 자가 ‘저 사람 불신자다.’ 라고 할 때는 그것은 확실치 않습니다. 진짜 불신자를 불신자라 할 수도 있고, 성도를 불신자라고 욕할 수도 있어요.
결국 이 본문 말씀은, 성도가 불신자에게 납득시키려고, 이해시키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는 성도라고 스스로 납득하려고도 애쓰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요한 1서에 나와요.
성령이 와서 “너는 성도다.”라고 하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성령이 아닌 ‘내가 따로 성도 맞다.’고 백날 해봤자 그래서 성도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말은 맞는데 뭔가 와 닿지는 않습니까?
요한 1서가 이렇게 힘들어요.
1절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뭘 알지 못한다? “우리를 알지 못함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알지 못하는 거예요. 결국 성도는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고 애쓸 필요 없단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타협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란 말이지요. 네가 성도된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안 알아줘도 괜찮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구원해서 성도 되게 하신 주님은 어떤 주님이신가? 철저하게 불신자들을 만들어 내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면 ‘나’라는 주체는 뭘 합니까? 내가 할 게 뭐냐를 따진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셨다는 것에 대한 모독이고, 불신자들이 그렇게 하지요. 이제 문제가 풀렸지요?
불신자들은 주님을 모르지요? 그러면 불신자와 주님 사이에 뭐가 성립됩니까? 죄가 성립되는 거예요. 다른 말로는 범죄. 범죄는 불신자가 있어야 주님과의 관계에서 범죄가 비로소 무엇인가가 드러나지요.
죄가 뭐냐? 불신자와 예수님의 관계, 이것이 죄 아닙니까. 불신자는 예수를 모르잖아요. 그게 범죄란 말이지요. 그런데 성도는 주님을 알지요. 그게 뭡니까? 그것이 ‘사랑’이고 ‘의’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범죄 합니까, 안 합니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뭐가 어렵습니까? 반복해서 죄 안 짓는 그런 것이 아니지요? ‘주체가 어떻게 하는가’ 그런 문제가 아니지요?
불신자가 주님을 대하는 태도가 뭐라고요? 그것이 죄 아닙니까. 그런데 신자는 죽었다 깨나도 불신자처럼 주님을 대합니까, 안 대합니까? 안 대하지요. 신자도 도적질하고 속이고 다 하지요. 하지만 주님을 버립니까, 못 버립니까? 못 버리잖아요. 주님께서 선택했기 때문에 버리고, 안 버리고 할 권한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을 버릴 권한이 없어요.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마치 불신자가 예수 믿을 능력이 없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버릴 능력이 없어요. 암 걸리고 뭘 하고 해도 우리가 주님을 버릴 수가 없다고요. 저주가 풀리면 다시 저주를 받을 능력이 없다니까. 저주 받을 기회조차 없어요. “주여, 제가 무슨 짓을 해야 저주 받습니까?” 안 돼요. 끝났어요. 무슨 짓을 해도 저주가 없어요.
저주 받을 놈은 무슨 짓을 해도 복을 못 받듯이, 반대로 성도는 무슨 짓을 해도 저주가 오지를 않아요. 저주는 안 오고, 용서가 오고 사랑이 오고.
저는 순대나 개고기 이런 것을 못 먹어요. 오리고기도 안 좋아 하는데. 웨이터에게 “웨이터! 개고기 2인분” 배달된 것을 보면 ‘영덕 대계’고. 나는 멍멍 개고기 달라고 했는데, 바다 계가 오고, 잡채가 오고.
“아니, 개고기를 달라니까.” “아니, 주인님이 개고기를 주지 말라고 하는데요.”
저주를 달라고 해도 저주를 안 주세요. 저주가 없데요.
왜냐하면, 이미 범죄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저주가 오지를 않아요. 오는 것은 맨날 축복이라. 주님의 용서와 사랑 이런 것만 와요. 이것을 네 자로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무슨 짓을 해도 저주가 없다는 것.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네가 뭐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축복 받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무슨 짓을 했기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지옥 가는 거예요. 저 사람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지옥 가는 것처럼,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천국 가는 거예요.
이것을 성경에서는, 인간은 원래부터 지옥 가도록 되어 있어요. 왜? 아담 안이니까. 우리 조상 아담이 범죄했으니까. 지옥 가도록 되어 있는 것을,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우리를 그냥 천국으로 빼돌린 거예요. 주께서 사랑하셔서.
아벨이 제사 지낼 때 응답 받는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응답하신 것은 하나님이고,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 것 그것도 하나님 마음대로고. 그걸 오야(대장, 보스?) 마음이라고 하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라고 물으면, “너와 내가 한 몸이니까” 머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몸에게 해당되니까 한 몸이지요. 옛날 선악과 따 먹고 깨어졌던 한 몸이,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 안에서 한 몸이 된 거죠.
고린도전서 15장을 보겠습니다.
아이고, 오늘 빠진 사람이 많아서 영 분위기가 --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모든”이란 말을 왜 썼습니까? 아담 안에서 아담만 죽은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주체적 노력과 의지에 상관없이 아담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다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본인이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자는 다 살리십니다.
이 “모든”이란 말은, 개개인의 개성 발휘, 자기 결심, 자기 결단 이런 것들이 일체 반영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구원 받는데 반영된 적이 없어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이라는 지남철(자석)이 동원돼요. 그래서 누가 구원 받습니까?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
여러분, 쇳조각이 자석의 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이기죠. 당기는데 지가 무슨 힘으로 떨치고 나오겠습니까?
부부싸움에서 여자가 불리한 것이, 여자는 머리가 길잖아요. 남편이 술 먹고 와서 아내 긴 머리를 잡아당기는데 몸이 안 따라올 수 있겠어요? 머리카락이 얼마나 강한데 안 빠지잖아요. 가만있으면 빠지지만 당기면 안 빠져요.
머리 쥐고 당기는데 딸려가야지. 무슨 수로 구원에 반항합니까? 지남철이 당기는데 쇳가루가 어쩔 수 없지요. 23절 끝에 나오지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붙었다는 말이 뭡니까? 지남철과 쇳가루의 관계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도는 ‘나 잘랐다.’가 아니라 그 관계를 증거하는 사람이 성도예요. 성령님도 중보자 위주, 관계 위주예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그냥 아무 한 것도 없이 당겨서(붙어서) 구원 받았느냐? 라는 것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요한 1서에서 우리가 사랑을 아는 것은 주체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만 사랑을 안다고 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뭡니까? 지남철 아닙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고 할 수가 없어요. 아는데 왜 몰라요. 칼 들고 “예수 믿지마라.”고 해도, 그 때는 “안 믿을게” 해도 괜찮아요. “너, 예수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줄게.” “안 믿을게요.” 큰 소리로 100번 하세요. 나는 예수님을 저주한다. 세 번에 꼽배기를 해 보세요. 그래도 성령께서 다 아십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예수 믿게 되었는가?”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성령 말고, 너는?” “나는 못 믿고요. 주님이 믿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 봐, ‘나는 못 믿고’가 되는 신학이잖아.” 하고 욕한다고요. 이근호 신학은 ‘나는 안 믿고’ 신학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믿게 했다.’는 것은 가위로 오렸는지 지우개로 지웠는지 없어요. 성령께서 믿게 하셨다는 것이 주의 뜻인데, 성령께서 믿게 하셔서 믿는다는 것은 싹 지우고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했다고 해서 욕하고--
“목사님! 이제 그만 하세요.” 하지만, 이게 아담의 선악과 문제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만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담과 그리스도 이야기를 그만 하세요.”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리스도 이야기 하려면 아담 이야기해야 되고, 아담 이야기 하려면 아담에 속한 것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는가를 이야기 해 줘야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죽을 때까지 그만 둘 수가 없어요.
이제 요한 1서가 서서히 풀립니까?
4장 13절을 봅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성령을 안 주시면 어떻게 돼요? 성령 안 주시는데 본인이 성경 연구해서 주님 사랑을 알고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우리가 성령 안 받은 상태에서는 사랑을 모르지요? 그러면 우리는 나름대로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까? 안다고 우기지요. 나름대로 알잖아요. 우리는 선악을 알잖아요. 선악과를 따 먹었지요. 선악이란 것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말합니다. 신의 지식을 말해요. 그러면 사랑도 나름대로 알지요. 의도 알지요. 심판도 알지요. 죄도 알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잖아요. 이 말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라고 안다는 그 자체가 뭡니까? 그것이 죄라고 보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는 따져야 되지요. 내가 ‘죄는 나쁜 짓’이란 것을 아는데, 강도짓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데, ‘나쁜 짓이란 것을 아는 그것이 왜 죄냐?’ 라고. 우리는 그것을 상당히 의아해 하지요?
여기에 대한 성경의 해답은 뭡니까?
3+5=8 이란 것을 알잖아요. 우리는 이것이 진리인줄 알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 죄란 것입니다. ‘그것이 왜 죄냐?’ 라고 물을 때, 하나님 답변은 ‘성령을 받지 않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3+5=9 라고 하면 틀렸고 8이라고 해야 정답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아예 우리에게는 ‘뭐가 죄 아니고’라는 것이 성사 됩니까, 안 됩니까? 성사가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고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이것을 아담 안이라고 하지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 죄인입니다.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죄가 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이 죄란 것을 알지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잖아요. 내 말이 뭐 틀렸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이미 선악을 안 이상은 주체가 됐잖아요. 그러면 하나님만이 아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니까 그 자체가 뭡니까? 관계 끊어짐 그 자체가 죄 아닙니까? 죈데,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우리가 죄라는 것을 인정을 안 하지요. 3+5=9가 되면 틀렸다고 이야기하고, 8이면 맞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8은 의롭고 진리고, 9는 오류고 이렇게 알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성령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죄 아닙니까?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것이 죄인 것을 모르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고발하니까, 아하 3+5=8 이것도 죄인 것을 알지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성도가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해도 그것이 죄인 줄 알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나쁜 짓 하면 죄고, 착한 일 하면 의라고 하지요. 이것이 성령 안 받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만약 성령 안 받고도 안다면 성령 받을 필요 없이 3+5=8 맞지요. 그래서 나쁜 것은 줄이고, 좋은 점 -고아를 돌본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순교 한다든지 이런 것은 착한 일이잖아요. 착한 일만 고르고 모아서 ‘하나님, 성령 받지 않더라도 내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이런 착한 일을 했습니다.’ 라고 내 밀면,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죄 지을 때도 있지만 전적으로 죄만 짓는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일부는 죄고 일부는 의롭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 십자가 왜 졌습니까? 십자가 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말씀만 해 주셔서 잘 하는 것은 장려하고 못한 것은 제거하고 하면 되지 십자가는 왜 지십니까? 십자가 진다는 것은 성령을 보내기 위해서 십자가 지셨잖아요. 십자가 안 지면 성령이 안 오지요? 그러면 십자가를 져야 성령 세례를 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진 이유는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요한 1서에 성령을 안 받으면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이 십자가 진 이유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성령을 보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하고, 십자가를 지고 성령이 오는데, 성령이 오기 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 같으면 이것은 죄 아래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 하신 일과 우리가 비교가 되니까 우리의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으로 또는 화목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겠지요.
이런 고백을 방해할 수 있는 우리의 행동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나쁜 짓을 해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어떤 짓을 해도 나쁜 짓인 줄 아는 거예요. 이야, 이말 또 어렵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해도 십자가 바라보면서 그 피를 생각하는데, 1) 우리가 스스로 나쁜 짓이라고 생각해도 피의 용서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2) 어떤 짓도 나쁜 짓이죠. 왜? 성령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니까. 3) 어떤 짓도 용서 된다면, 4)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을 버릴 수 없죠. 그러니까 정답은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을 버릴 수 없다.’ 가 되지요.
어렵습니까? 다시 할까요?
나쁜 짓을 해도 피를 속일 수 없는 입장이라면 어떤 일을 해도 성령이 오기 전까지입니다. 성령 보시기에 다 나쁜 짓이니까 어떤 짓도 나쁜 짓이 되니까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을 버릴 수 없는 그런 입장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범죄를 못하지요.
6절을 봅시다. “그 안에 거하는 자” 누구 안에 거합니까?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요. 사랑 안에 거하지요. 그러면 그 사랑이란 것은 뭐가 올 때 사랑입니까? 성령이 와야 그 안에 거하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범죄치 못하지요.
그러면 성령 안에 거하면서 범죄하는 경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범죄하냐, 안 하냐를 나쁜 짓 했나, 안 했나가 아니라 어디 안에 거하는가를 보거든요. 그러면 만약 하나라도 나쁜 짓 하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누구에게 속했습니까? 마귀에게 속했지요.
그러니까 죄를 짓는 것도 일부 착한 일하고 일부 나쁜 짓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짓을 해도, 일부 착한 것이 없고 전부 다 죄가 되는 거예요.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생각에는 마귀에게 속해도 착한 일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마귀에게 속했으면 어떤 식이라도 마귀의 영향력을 못 벗어나서 결국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마귀에게 속한 사람의 특징이란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듯이,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일부는 나쁜 짓이고 일부는 착한 짓이고 그런 것이 아니고 몽땅 다 나쁜 짓이 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성령님이 계시기에 몽땅 나쁜 짓이 아니라 몽땅 다 의로운 것이 된다 이 말입니다.
다시 해 봅시다.
창세기 3장에 우리가 죄 짓고 난 이후에 우리는 뭘 알고 있습니까? 선악을 알고 있지요. 그런데 선악을 아는 것은 누구의 소관입니까? 우리가 알아야 될 사항입니까? 선악은 우리가 몰라야 될 사항이잖아요? 몰라야 될 사항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는 이미 비정상이잖아요. 비정상이란 말을 달리 하면, 우리는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마귀에게 속했는데 “잘 하면 될 것 아닙니까? 바르게 살면 될 것 아닙니까?”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비정상이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란 말입니다. ‘내가 나쁜 짓도 하지만 그래도 착한 일도 많이 했잖아요?’ 라고 하는 자체가, ‘계속 선악을 아는 이 상태를 저는 유지하고 싶습니다.’ 라는 그런 악마의 외침이란 말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자진해서 “주여, 선악을 알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런 인간은 없단 말이지요. 이왕 알게 된 것, ‘나쁜 짓은 제거하고 바르게 살면 되잖아요.’ 성화론 자들처럼 ‘앞으로 점점 더 거룩하게 살면 안 됩니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원래 주님의 생각은 없고,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아담 안에 놓여 있고, 마귀에게 놓여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 자체를 뭘로 봅니까? 범죄한 자의 특징이라고 보지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아하, 이게 범죄한 자 맞구나!’ 하잖아요. 그건 범죄한 자 맞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 범죄한 자야!” 할 때, “예, 범죄한 자 맞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누구 의견을 주도로 삼는다? 내 의견을 버리고 누구 의견? 내 의견은 ‘바르게 살자.’ 이것이 내 의견이고, 주님의 의견은 ‘넌 뭘 해도 죄야.’ 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의 의견이 나의 의견을 지배했고, 내가 굴복했다는 그 자체가 사랑이고 의란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것을 해도 주님 생각밖에 안 하니까, 주님의 사랑을 우선시하니까, 주님 사랑을 우선시하는 것이 원래 하나님이 원하는 바잖아요.
그런데 마귀가 있다가 ‘얼래리 꼴래리, 저놈은 거짓말 했데요.’ 하고 놀려도 ‘내가 보기에는 주님을 아는데’ 그러면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그가 범죄한 것은 맞아요. 그러나 그의 범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드렸던 분이 그를 인정한다는데, 그게 사랑이고 사랑 있으면 됐지 그 외 뭐가 더 필요해요?
성도 중에 범죄 안 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성도는 모든 것이 범죄인데. 그렇잖아요? 모든 것이 범죄 아닙니까? 성도는 하는 것 마다 범죄인 것을 알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는 거예요. 아하, 이 공식이 이제 나온다.
불신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 죄인 줄 모르고 선악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뭘 해도 범죄한 것이 돼요.
하나님께서는 뭘 보고 구원합니까? 사랑보고 구원하지 범죄했냐, 안 했냐를 따지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께서 사랑을 준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안 오신 입장에서는 우리는 율법대로 범죄하는데, 갈라디아서 3장을 보세요.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아래 있어요. 이 말은, 곧 우리는 저주아래 있고 저주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이지요. ‘율법대로 행하면 되지’ 이러면 안 돼요. 저주를 못 벗어나요. 율법이 뭔가 하면 우리가 저주 아래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율법 못 지킨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저주란 것을 알리기 위해서 뒤에 율법이 추가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처음부터 율법이 있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400년 후에 율법이 추가된 거예요. 새삼스럽게 ‘잘 지키면 구원해 줄게’가 아니라, ‘네가 죽어가면서도 왜 네 주제를 모르느냐’ 말이지요.
불신자: 왜 죽습니까?
하나님: 아담 안에 있기에.
불신자: 아담 안에 있는데 왜 죽습니까?
하나님: 아담이 문제거든.
불신자: 그러면 죽어야 합니까?
하나님: 그럼, 죽어야지.
끝난 거예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예요. 모든 사람이. 개별적인 차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 죽은 거예요. 죽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저주 아래 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지남철이 되어 당기는 사람은 어떤 계층이든 관계없이 의인 되는 겁니다.
영광스럽게 부활되면 되지 죄 지으면 어떤데? 그렇잖아요? 영광스럽게 부활되면 그만이잖아요. 죄 안 지으면 당겨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가 덜되면 당겨줄게 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당겨주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잘해서 당겨준다고 하면, 내가 쇳조각이 아니라 지남철이 되어야 해요. 지금 성화론 자의 문제가 뭐냐? ‘네가 스스로 신이 되라.’ 이말 아닙니까. ‘성령을 받았기에 완벽해야 되고 신이 되어야 한다.’ 이말 아닙니까.
우리가 완벽할 수 있습니까?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하는가?’ 물으면 답변 못해요. 왜냐하면, 자신은 바르게 했다고 하는데도 완벽하지 못하거든요. 그러면 처음부터 완벽하지 못한 거예요. ‘완벽하지 못하지만 믿습니다.’ 이렇게 해요. 이런 믿음은 완벽하지 못한 믿음이라니까.
믿는 것도 완벽하지 못한데 어떻게 구원 받아요? 믿는 것도 완벽하지 못한데. 내가 주님을 믿는 것도 완벽하지 못해요. 내가 믿으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 받지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은혜로 구원 받는 거예요. 이걸 나타내는 현상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란 것은 반드시 인간의 행함과 대비되기 때문에, 성령이 오심으로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있는 자는 --
요한 1서 4장 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두려움을 쫓아냅니까? 아니죠.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을 쫓아내지요. 우리는 늘 두려움이 발생되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나 없어지지요. 생기면 없어지고 또 생기면 없어지지요. 주님 보시기에 이것이 범죄하지 않는 거예요. 왜? 주님을 사랑하는데 그게 무슨 범죄입니까?
십자가 이전 이후를 따질 수가 없어요.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라니까.
5분 쉬었다 합시다.
■광주강의 셋째 시간 녹취록 올립니다. 이름 : 서경수
광주 강의061222 21-3
조금만 더 해 봅시다.
요한 1서 3장 3절에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되어 있지요?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 뭡니까?
자기 힘으로 죄를 없애지는 못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깨끗하게 합니까? 뭘 쳐다보는 겁니까? 십자가의 피를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는 한 번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계속 씻어주는 피인 것을 믿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자기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알면 그 십자가 생각할 때마다 주님의 사랑을 알지요. 그 사랑의 열매가 뭐냐 하면, 자기 자랑이 아니라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그 십자가 자랑이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인데, 그것을 한데 모으면 결국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나 이만큼 잘났다.’ 가 아니라, 온유라고 하면 ‘나에게는 온유가 넘친다.’ 이것이 아니라, 온유, 화평 이런 것들을 끌어 모아보면 ‘주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나와 있잖아요. 주님이 주신 것이 내 마음속에 퍼져서 온유와 화평이 모아지면 주님의 사랑으로 나오지요.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온유는 가짜 온유입니다. 자기 과시용이지요. 주님의 용서보다 더 깨끗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 피를 이야기 할 때는 이보다 더 낳은 처방전이 없다고 주는 십자가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피를 받아서 용서 받은 것을 감사할 때, 감사와 은혜를 알고 늘 기뻐하는 것, 이것보다 더 깨끗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거기다가 형제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데, 그보다 더 깨끗한 것이 어디 있어요? 사랑을 알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 이보다 더 깨끗한 것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뒤에 나오는 사랑을 모르는 자들은, 예수 믿는데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모르는 자는 이유 없이 처음부터 몰랐던 자입니다. 처음부터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몰랐기 때문에 도중에도 사랑, 사랑하지만 결국은 자기 유익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결국은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요한 1서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해 볼게요.
3장 1절 끝부분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관점에서 성도를 보겠습니까? 예수를 모르는 관점에서 보겠지요. 예수를 모르는 관점에서 본다는 말은 자기 경험으로 그 사람을 보겠지요? 그럼 뭘 따지겠습니까? “나는 착한데 너는 왜 못됐어” 이렇게 따지겠지요.
그러면 성도는 주님을 알기 때문에 뭘 이야기합니까?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깨끗케 했다.” 이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 이제 그만 우려먹어라. 그것은 한 때이고 지금은 네가 깨끗해야지.”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그게 뭐냐? 그리스도 피만 증거하는 것 때문에 그들이 가짜임을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것을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증거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십자가만 증거하는 그 이유를 그들이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적그리스도임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러한 환경으로 주께서 몰아가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는, 그냥 성도인데 모르는 것이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마귀에 속한 자단 말이지요. 하나님을 알고 ‘열심히 바르게 하자.’ 라는, ‘이제는 될 수 있는 대로 범죄하지 말고, 죄를 반복하는 쪽으로 하지 말자.’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자체가 처음부터 이것은 가짜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범죄라는 개념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범죄치 않지요. 그래서 제가 물어본 거예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완벽하지는 않지요.’ 이렇게 나온다는 자체는 처음부터 이것은 사랑이고 뭐가 개뿔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뭐가 범죄인줄 모르는 거예요.
뭐가 범죄인줄 모르기 때문에 진짜 성도에 대해서 공격하는 겁니다. 본인이 모르기 때문에 남을 공격하는 거예요. 방종 한다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방종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예요. 범죄하고 싶어도 못하는 겁니다. 왜? 그것은 내부적으로 늘 범죄하기 때문에 그래요.
착한 일 좀 하고 나쁜 일도 좀 하면, ‘나쁜 일은 좀 줄이고 착한 일을 좀 더 하면 되겠다.’ 이렇게 되겠는데, 늘 범죄하면 뭘 해도 범죄기 때문에 구태여 착한 일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한 적이 있어야지.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만 쳐다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사랑이 효과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사랑의 효과를 밋밋하게 잘 모르면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 설마 이것도 용서할까?’ 이렇게 생각하고, 이 사람은 처음부터 주를 모르는 사람이고, 처음부터 마귀에 속한 사람입니다.
주를 모르게 되면 ‘이런 죄도 용서 받을까? 이것은 아마 내가 최선을 다해야 될 걸.’ 라고 나오고, 그 사람은 최선을 다 해도 두려움이 또 생기는 거예요. ‘그 때 왜 완벽하지 못했을까? 그 때 그쪽으로 안 가야 했는데 왜 갔을까? 이 어리석은 놈아!’ 이렇게 된다고. 십자가 피 앞에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예수님 오셨는데, 신랑이 왔는데 신부가 신랑과 함께 기뻐하면 그만인데--
결혼식에서 통곡하는 사람은 전처와 그 자식 밖에 없습니다.
결혼식에는 통곡 안 합니다. 통곡하는 사람은 수상해요.
신랑이 왔으면 기뻐하지 왜 가슴치고 회개한다고 하느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자에게 무슨 의사가 필요합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헌 술은 새 부대에 안 맞아요. 코드가 맞지를 않아요.
지금 열린우리당하고 노무현하고 영 코드가 안 맞아요.
요한 1서는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성도와 불신자는 절대로 안 맞도록 되어 있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겁니다.
요한 1서 4장을 봅시다. 5-6절에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그러니까 이 말은 개인적인 역량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고, ‘조금만 더 나쁜 짓 줄이고 착한 일 더 해.’ 이런 호소가 아니고, 아예 근본 토대와 터전을 한쪽은 마귀에 속한 자, 한 쪽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 나누고 시작하지요.
이렇게 나눠놓고 시작한다는 것은, 아무리 내가 애를 써도 이쪽 진영에서 저쪽 진영으로 옮겨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구원 받은 자가 아무리 나쁜 짓해도 저쪽 저주받을 진영으로 옮겨갈 수 없는 겁니다. 이미 나눠졌으니까.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다”(4절)는 말은, 주님은 나보다 더 큰 거예요. 나의 죄보다 주님의 용서하심이 더 큽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 받은 성도만 믿고 알지 다른 사람은 아무리 연구해도 이것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믿으라고 아무리 해도 안 믿어 집니다. 내 죄보다 주님의 용서가 더 크다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만 알지 어느 누구도 이것을 모릅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5절)
그러니까 세상에 속한 말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허용하고 부추기는 이유가, 이미 갈라진 것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뜻입니다.
말을 해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 이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체고 저쪽은 자기 자신의 행함이 주체가 되고 이 둘 사이가 뚜렷하게 되어야 돼요. 서로 화합하도록 열심히 노력하면 안 돼요. 뚜렷이 갈라져야 됩니다. 갈라지게 하신 것이 하나님 뜻이란 말입니다. 주께서 갈라지게 하는 것을 우리가 이으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말을 하면 그만이고, 저쪽은 자기 말을 하면 그만이란 말이지요. 저쪽에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반듯하게 살자는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이미 우리는 승리했고 심판에서 이미 건져졌다는 것입니다. 4장 17절에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지요? 참 이상하지요? 우리가 알기로는 죄 짓는 곳에 형벌이 있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두려움에 형벌이 있다는 말은, 네가 죄 지었다고 여기나 안 지었다고 여기나 두려워한다는 자체가 소속 자체를 밝히는 것입니다. 네 소속이 악마에게 있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는 말이고, 두려움이 생겼다는 말은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너의 진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아무리 해도, 아무리 두려움이 생겨도 결국 사랑으로 승리케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결국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범죄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거예요.
사랑할 수밖에 없으면 사랑의 열매가 나오는데 사랑의 열매를 어느 인간이, 어느 놈이 그걸 죄라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한다는데. ‘그래, 나 죄 지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한다. 그런데 뭘 어쩌란 말이냐?’ ‘그래, 나 죄인이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한다. 뭐가 문젠데?’
‘주님을 사랑하면 범죄 안 해야지’ 주님을 사랑한다는 자체가 범죄하지 않는 건데. ‘네가 지금 뭘 두려워하느냐?’ 벌벌 떠는 이유가 죄 지을까봐 벌벌 떠는 거예요. 죄 지을까봐 벌벌 떤다는 자체는 그것은 흉내만 낸다 뿐이지 진정한 너의 죄보다 더 큰 사랑이 네 속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3장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이 말은 결국 창세기 3장의 이야기가 옛날 이야기로 하나님은 간주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당시를 인간은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어요.
따라서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마귀를 멸함으로 말미암아 마귀가 이야기한 것, 다시 말해서 선악과 따 먹고 주체라 하는 그 자체를 하나님이 완전히 없애 버리고, 여자의 후손 주님께서 용서하는 사랑으로서 아담과 하나님을 이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께 난 자”고. 9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하나님의 씨는 예수님이죠.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것은, 자기가 열심히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이미 난 자가 따로 있어서 우리가 취소할 수 없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전에 창세기에 뭐가 있었고, 2000년 전에 십자가가 무슨 의미고,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무슨 의미며, 성령께서 오신 것이 무슨 뜻인지 저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옛날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찾고, 그 관계가 주님의 십자가 피고, 피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용서 받고 사랑의 품안에 잠기는 줄 압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가 심판마저 이겼사오니, 하나님께 모든 것을 용서 받았사오니 이 사랑을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07. 1. 4. 10:36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