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41031a 누가복음 7장 47절(용서)-이 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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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허상> 오늘은 p.119 [용서]. 용서는 사람과 사람을 대상으로 이미 용서가 실시되고 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죠.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용서가 그대로 하나님 앞에 용서로서 유효하게 받아지겠는가?
주기도문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네가 남의 죄를 용서하면 내가 네 죄를 사한다는 말씀 있죠,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너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네 죄를 용서해준다.
거기서 주님께서는 대칭성(symmetry), 땅에서 일어난 일과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대칭성으로 이렇게 묘사해줬어요. 땅의 세계에서의 용서/ 하나님 세계에서의 용서 이렇게 대칭성으로 할 때, 순서가 주기도문에서는 땅의 세계에서의 용서가 먼저고 그다음에 하나님 세계에서의 용서가 2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그다음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땅에서의 용서를 근거로 해서 하늘의 용서를 받는 걸로 이렇게 되어 있는데 실제적으로 보게 되면 ①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②땅의 용서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내용과 그 뒤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계시, 양쪽 다 예수님의 계시인데 왜 계시의 순서가 서로 다르냐? 주기도문 그 내용은 예수님 자신이 자신에게 적용시킬 내용을 미리 이야기한 겁니다.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다는 것을 주께서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한테 해코지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거고 심지어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섭섭하게 그렇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땅에서 같은 동료들로부터 여러 가지 죄와 죄의 공격을 받는 것에 대해서 아직 제자들은 감이 오지 않는 거예요.
제자들 입장에서는 인간 대 인간들이에요. 인간 대 인간이고 여기에 예수님이 같이 섞여서 같이 관계한다는 것이 제자들은 잘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우리 인간들끼리 용서하게 되면 하나님도 용서해준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데,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인간과 같이 레벨을 나란히 해서 입장을 나란히 해서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 죄 짓는 일이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친히 먼저 감수하신 거예요. 그걸 받는 겁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알죠. 우리가 예수님께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돼요.
그러면 용서라는 것, 대칭성을 통해서 예수님이 땅에 왔으니까 ‘예수님이 포함된 땅의 세계에서의 용서가 뭐냐?’ 그것부터 먼저 알고 ‘거기에 대칭적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진다.’ 이런 순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가 뭐냐? ‘용서란 죄를 겨냥하는 것’. 용서가 먼저 있고 이 용서가 죄를 발굴한다, 이렇게 보시면 정확하게 보신 거예요. 죄짓고 난 뒤에 용서를 구하는 것이 인간들의 상식이라면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고 용서가 먼저 있고 죄를 발견하는 거예요.
용서가 먼저 있고 죄를 발견했을 때, 용서와 죄가 어떤 식으로 만나야 되잖아요. 그럼 죄는 뭐냐? 용서라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 치고, 죄가 뭐냐? 용서와 만날 수 있는 죄는 뭐냐? ‘죄는 스스로 자신을 파선(파산)에 빠뜨리는 행위’가 바로 죄가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파선 또는 파산에 이르게 하는 행위.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거죠. 그러면 인간의 모든 권리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만드신 분에게 있습니다. 인간은 만들어진 거니까. 인간은 만들어진 거예요.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기가 다룰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누가 만든 게 아니고 처음부터 내 인생은 내가 구축한다면 인간에게는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 나를 파산에 이르게 하고 나를 엉망진창으로 스스로 몰아넣기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나한테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살다가 힘들면. 종이에 연애편지 쓰다가 잘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구겨버리죠. 편지 쓰는 당사자가 나니까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편지지를 내가 구길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인생은 내가 구길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없습니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권한이 없어요. 그런데 마귀가 개입해서 이제부터 네 인생은 네가 살아가야 된다고 그렇게 인간을 부추겨왔던 거예요. 인간이 내 인생 내가 살게 되면 뭐가 없어지냐 하면 하나님의 준비된 용서가 불필요해요.
용서라 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그 불가능성의 영역을 따로 다른 분이 그 분의 권한으로 쥐고 있다는 것이 용서의 세계거든요. ‘내가 할 수 있는 할 도리 다했는데 스스로 우리는 어떤 한계에 봉착했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모든 신변이나 나의 위상을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한테 없다.’ 그것이 확실해져야 돼요.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파산으로 빠뜨린다는 것은 뭔가 계속 시도해본다는 뜻이에요. 계속 시도해보면 어떻게 돼요? 시도해보면 결국 어디에 이릅니까? 계속 시도해보면 자기 파산에 이르죠. 모든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인간이 열심히 살잖아요. 그 끝은 뭡니까? 자기 파산이에요. 자기 파산.
가룟 유다가 대표로 선두주자로서 잘 보여줬죠. 자살. 꼭 뭐 번개탄 안 피워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파산 과정이기 때문에 ‘자살의 과정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모든 인간이 다 완전히 무너지는 과정에 놓여있으면서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뭐라도 해보는 거예요. 지치지 않고 해보는데 지쳐요, 결국은. 나중에 눈에 핏줄 터지고. 외지에 가서 일이 생기면 안돼. 뭐라도 해봐야 돼. 뭐라도 해보는데 지쳤어. 힘들어요.
파산하지 않는 인간이 없습니다. 모조리 다 파산하죠. 그래서 주께서 준비해놓은 것은 뭐냐 하면 ‘잘해라. 열심히 하라.’가 아니라 ‘용서해줄게.’거든요. 그러니까 용서를 받으려면 내가 나한테 시도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파산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을 발견해야 주님의 용서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하는 그 모든 조치가 나를 더욱더 망치게 하고 망하게 한다는 이 사실에 눈이 떠져야 돼요. 눈이 떠져야 됩니다.
앞에서 죄와 용서에 대해 언급했던 문장을 다른 문장으로 하게 되면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이름을 못 놓는다.’ 어떤 경우라도. 자꾸 점검해요. 자기 형편에 대해서 수시로 점검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자신이 지금 제대로 가고 있고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늘 파악하기 때문에 뭐가 자꾸 관계없습니까? 용서라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기는 겁니다. 내 이름은 어떤 경우라도 수치스럽지 않아야 된다는 고집 같은 게 있어요.
제가 설교에서 이야기했는데 그 부분을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문장이 의외로 굉장히 중요한 문장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일생이란 자아형성과정이다.’ 이것이 뭐 5살 뿐만 아니고 20살 뿐만 아니고 40살 뿐만 아니고요. 40살에서 자아형성이 마감되는 게 아니고, 70이 되고 80이 되고 90이 돼도 계속해서 자아형성은 쉬지 않고 계속 진행 중입니다. 자아형성. 나는 이래야 돼. 나는 저래야 돼. 나한테 이거는 고쳐야 되고 이거는 내가 유지해야 되고. 계속 다듬어나가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만드는 창조자’가 돼요. 악마의 마음입니다. 이게 악마의 마음이죠.
이럴 경우에 뭐가 계속 괴리현상으로 일어납니까? 뭐와 갈라져있습니까? 용서. 나는 용서 없이 내가 원하는 인생을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용서 없이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겁니다. 그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나에서 비롯된 자기 이름이죠.
그런데 보통 5살 때, 20살 때, 40, 50대까지는 그냥 ‘오~ 강단 있네. 오~ 상당히 자의식이 강하시네.’ 이렇게 되죠. 이게 70을 살짝 넘어가면 이걸 두 자로 ‘고집’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집인데 정치계에서는 이걸 고상한 말로 했어요. 노욕(老慾). 늙은이의 욕심, 노욕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노욕이라면 고상하고 사실은 고집. 앞에 ‘똥’자 하나 붙이면 똥고집.
그런데 이 사람의 이런 자기고집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졌습니까? 언제부터 만들어졌습니까? 출생할 때부터. 출생할 때부터 모든 에너지의 집중이 ‘나는 이런 인간이 되고 싶어.’에 다 집어넣어진 거예요. ‘나’라는 주머니는 범위가 좁은데, 그 좁은데다가 계속해서 세월가면서 온갖 인생경험들-직장 다니다가 나왔다가 뭐 가정적으로 어떻고 뭐 장사하다가 말아먹고 잘되고 그런 것들 전부다-대통밥이죠, 대나무 통 안에 꼬깃꼬깃 밥알 집어넣는 것처럼 살아온 모든 인생을 좁은 데에 압축하는 거예요.
참깨 압축하면 뭐가 나와요? 참기름 나오죠. 참기름 짜듯이 거기다 꼬깃꼬깃 넣었는데 나중에 나이 드니까 어떻게 됩니까? 참기름처럼 완전히 꽉 짜여져서 바깥으로 나온 게 뭐냐 하면 고집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원하는 것은 고집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가 나오는 것인데 인간은 이 고집이 나오더란 말이죠.
고집 안에 보니까 목숨 바쳐서 지켰던 것이 이 안에 들어있죠. 그게 뭡니까? 자기 이름이에요. 대통령 욕해도 아무렇지 않고 국가 욕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누구 욕할 때 갑자기 기분 나쁩니까? 자기죠.
경찰이 가면서 그냥 자기 볼일 보면서 가면 되는데 “Hey!” 부르면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하죠. 미국에서 누가 또 “Hey!”하고 안 부르던가요? “Hey! Just a moment. 잠.깐.만.” 내 이름을 부를 때 바짝 긴장이 되면서 안에 있는 방어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평소에 우리가 했던 일이 나 지키는 것 외에는 한 적이 없어요. 문제는 주님께서 이야기할 때 용서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은 자기를 지킬 권한이 없었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지키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지켜도 주님이 지켜야지, 네가 만들지도 않은 너를 네가 뭔데 너를 지키냐 이 말이죠. 네가 지키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바보같이 등신같이 자기가 계속해서 자꾸 지는 거예요. 지켜야 돼, 지켜야 돼, 내 이름에 흠집나지 않도록 지켜야 돼.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기 위함이었어요. 그 외에 없어요. 인간이 인간을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에요. 나를 지키는 방식 중에 하나였습니다. 저 사람을 용서하면 나중에 저 사람이 해코지 안할 것이다.
이런 말이 있어요. 서양에서 인사할 때 악수한다는 것은 ‘내 손에 권총을 쥐고 있지 않습니다. 칼을 쥐고 있지 않습니다. 보세요. 당신을 해할 무기가 내 손에 없어요. 비어있습니다. 당신을 해할 의사가 없습니다.’ 이게 인사가 돼서 악수한다는 말은, 평소에 얼마나 손에 많이 쥐고 있었나. 짱돌이라도 많이 쥐고 있었냐 이 말이죠.
인간은 도대체 왜 지켜야 되죠? 인간이 자기를 지킨다고 해서 뭐가 없어요? 용서를 맞이할 마음자세가 없어요. 내 인생은 내가 지키면 되지, 누가 나를 건방지게 용서하냐 이 말이죠.
성경에서 사함 받은 사람의 여러 가지 사례가 있지만 누가복음 7장입니까, 울면서 자기의 향수를 내놓은 여인. 소문 안 좋은 그 여인. 예수님이 바리새인 집에 초청받았을 때에 초청받지도 않은 여인이 와서 자기가 눈물 흘리면서 가져온 모든 향수를 다 터트렸잖아요.
누가복음 7장 47절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니까 여기 보면, 내가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를 사했다는 말은 ‘죄짓지 말라’가 아니라 ‘인간아, 죄짓지 말라.’ 이게 아니라, ‘너 지은 죄 어떻게 할 거야?’ 이런 거예요.
그런데 그 죄가 뭐냔 말이에요, 그 죄. 그 죄가 뭐냐? 예수님 앞에 죄 없는 인간은 없잖아요.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죄는 뭐냐? 그게 마귀의 속성을 전부다 할당받은 거잖아요. 다 배당받고 있단 말이죠. 마귀의 마음가짐을 배당받고 있을 때 그게 선악인데, 그 선악지식을 배당받고 있으면 그 선악지식과 연계되어 있고 연결되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에요.
자신의 이름은 뭐냐? 자아형성과정과 관련 있기 때문에 자아가 형성되면 형성될수록 자신의 이름도 같이 동행하면서 자기 이름이 참 대단한 이름인지, 가치있는 이름인지 아니면 부끄러운 이름인지를 자아형성 안의 내용을 통해서 바깥으로 정립되고 조성되겠죠.
그러면 용서를 받았다는 말은 이제 무슨 이름이 날아가버린 겁니까? 자기 이름 안에 있는 실상이 다 노출되었다는 뜻이에요. 들켰다는 겁니다. 자기 이름을 이렇게 구축하면 받아주는 곳은 지옥밖에 없어요. 갈 곳은 지옥밖에 없고 그 지옥에 누가 먼저 가있느냐 하면 마귀가 먼저 가있습니다. 악마가.
<기독교의 허상> [용서] 다음에 나오는 제목이 p.122 [악마]입니다. 오늘 [용서]와 [악마], 그 뒤에 있는 [남의 종교생활을 비판하지 말자] 세 개를 연달아 계속 할 겁니다.
일단 용서와 악마를 연결시켜봅시다. 자기 이름을 유지하게 되면 악마를 위해서 만들어놓은 그 지옥불속에 합류가 돼요. 한통속이니까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고집스럽게 자기에게 마음을 준 그 악마와 상봉하는 시점으로 인간들은 이건 뭐 빼도 박도 못하고 자기가 자기를 조종해서 노선을 변경하지도 못하고 어쩔 수없이 본성 자체가 끌려가는 거예요. 본성 자체가.
이것이 바로 인간을 둘러싼 field, 장(場), 공간이에요. 또는 환경.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옥 성격 또는 지옥 성질화 된 환경 속에 출생해서 이 안에서 그냥 죽습니다. 여기에 이런 사실에 대해서 아는 방법은 악마 바깥에 있는 주님께서 같이 이 지옥 환경 속으로 뛰어드는 방법밖에 없어요. 주님께서 같이 뛰어드는 겁니다. 뛰어들어서 무엇을 외치느냐 하면 용서를 외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의 죄 사함 받으라.” 너의 죄. 너의 죄 사함 받으라.
“선악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네가 먹지 말아야 될, 알지 말아야 될 것을 네가 삼켰다. 그 죄에 대해서 네가 구원될 길은 나로부터 죄 사함 받는 것밖에는 없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이 말을 이해했습니까? 이해 못했어요.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 못한 이유가 뭐냐? “네 죄 용서받으라.” 했을 때, 또는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그 이야기할 때 예수님 옆에 제자들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 말을 성령받기 전에는 이해 못하는 이유가, ‘죄 사함 받는 방식이 나에게서 어떻게 만들어질까?’ 이 생각을 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죄 사함 받기 위해서 내 쪽에서 뭘 준비하지? 죄 사함 받기 위해서 내가 할 게 뭐가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미 그것은 죄 사함에서 실패한 겁니다. 죄 사함에 실패한 겁니다.
예수님과 인간관계 같으면 “죄 사함 받으라.” “네, 받겠습니다.”하고 끝날 문제인데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의 권세, 힘에 둘러싸인 채 ‘죄 사함 받으라’가 딱 들어오니까, 인간은 ‘죄 사함 받으면 내 이름이 깨끗해진다 이 말이지?’ 이렇게 돼요.
‘죄 사함 받으면 더럽던 내 이름이 깨끗한 이름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악마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훈련을 잘 시킨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평소에 늘 집중한 것은 뭐냐? 죄 안 지을 수는 없고, 살면서 죄 지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내가 지었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서 내 쪽에서 어떤 행동을 나서느냐에 대해 많은 연구가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다른 백성들은 그 연구를 습득하고 교육받은 지침을 그대로 따르면 되고.
그런데 예수님이 그 바리새인한테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악마가 바로 그런 교육을 시킨 거예요. 어떻습니까? 이야기 들어보니까 이거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죠. 미국 갔다 와서 죄 사함 받을 거 같으면 얼마든지 너도 나도 미국 가겠어요. 미국 간다고 죄 사함 받는 게 아니라니까요. 미국 안 간다고 죄 사함 받는 것도 아니고.
죄 사함 받을 방법을 우리가 자꾸 구상하면 구상할수록 그것이 또 하나의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이 되어가지고 마귀만 대따 좋아하는 거예요. 더 더 더 철저하게 용서받을 만큼 회개해야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끊어버리고 해야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오늘 강의는 죄 용서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장(field), 지금 나를 구성하고 있는 장, 마귀가 집어넣은 이 장이 어떻게 이 장 자체가 변화되는가?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이 장을 어떻게 흔들어버리는가? 그 점에 대해서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다만 우리가 속해있는 이 장의 기준축 또는 기준계 또는 기준좌표계를 새로 설정해야 돼요. 새로 만드는 겁니다. 골치 아픈 x,y 좌표. x,y 좌표에서 P라는 점이 있을 때. x,y 좌표에 어떤 점이 있다는 말은, 나라는 존재를 표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x,y라는 나보다 더 넓고 큰 그런 환경이 먼저 마련된다는 이야기입니다(그림1).
그럼 기준이 바뀌었다는 것은 삐딱한, 그러나 그 사이가 똑같이 직각인 x′,y′축에 해당되는 어떤 존재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난 거예요(그림2).
기존의 x,y 좌표가 인간이라면 예수님은 삐딱하게 다른 좌표계 안에서 나타나가지고 이 두 기준틀(x′,y′)을 기존 좌표계에 합쳐버리는 거예요. 합치면 어떻게 됩니까? 기존 x,y 좌표계에 우리가 P로 있을 때, x′,y′ 좌표가 겹쳐지면 예수님은 이 안에서 P′가 되죠. 그럼 P′(예수님)와 P(우리 존재) 사이의 간격, 이 간격을 없애서 합치면 되겠죠(그림3). 참 쉽죠? 되게 쉽죠. 뭘 바꾸면 된다? 세상 보는 기준틀을 바꾸면 되죠.
예수님의 기준틀은 하나님의 관점이죠. 그럼 우리의 기준틀은 뭐가 되겠어요? 악마의 관점이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관점이에요. 인간은 그냥 점처럼 놓여질 뿐이지, 우리가 속해있는 이 관계 원칙 따라 그냥 따라할 뿐이지, 우리 고유의 어떤 거라고 설쳐대 봐야 우리 고유라는 게 없어요. 남들 각자 각자 전부 다 마귀의 다양체, 마귀의 다양한 면, 여러 가지 경우에 그들은 놀아나고 있고 나는 나 나름대로 마귀한테 놀아나고 있고. 거기서 태어났으니까요. 선악과 따먹고 선악지식이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이런 어떤 기준틀(x′,y′) 없이 같은 P, Q, R 같은 인간들 만나서 어떻게 해결해보려는 거예요. 훌륭한 목사님 만나고 바리새인 만나고 서기관 만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죄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거. 지는 압니까? 이 틀 자체가 악마가 만든, 악마가 조성한 환경이기 때문에 자기 입에서 기껏 나오는 한계가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당신의 이름은 가치 있는, 의미 있고 의로운 인간이 됩니다.’ 기껏 이 소리밖에 더 나올 게 없어요. ‘이렇게 하시면 당신은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소리 있잖아요. 긍정적인 희망. 기준틀이 틀린데 이거 뭐 백날 해봐야 소용없죠.
예수님(P′)과 그 당시 제자들(P)이라 합시다. 제자와 예수님 사이의 간격.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이 식사도 했거든요. 요한복음 21장 15절 뭐라고 되어있죠?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이렇게 되어 있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뭘 하셨어요? 식사를 같이 했죠. 식사를 같이 했어요. 주님 쪽에서 원해서 식사를 했다는 말은, 나는 너희를 버리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거예요. 13절,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주님, 곧 P′ 되시는 분은 P와 식사를 같이 했는데 아직까지 제자들은 뭐가 안 바뀌었어요?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뀌지 않고 자기 관점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식사를 해도 그냥 식사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주님께서 용서를 한다 해도 ‘예. 고맙습니다.’했는데 용서가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왜 와 닿지 않습니까? 자기가 속해있는 환경 자체가 주님이 속해있는 환경의 좌표에 의해서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를 하고 뭐 십자가 죽고 예수님 재림하시고 성경에 나오는 온갖 영적인 개념을 다 투입해도 그들은 그냥 지식으로 남아서 ‘내가 잘 되는 데에 이거 도움 되겠다.’ 그걸로 끝났지, 자기 자신이 정말 용서의 대상인 것에 그들은 미치지 못하죠.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용서의 대상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실 때 식사를 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까지 들어오는 게 좋을까요? 어느 쪽입니까? 나 너와 식사했다, 또는 나 너를 이미 용서했다는 그 말씀이 그 사람 속까지 들어와 버리면 새로운 기준계 전체가 그 사람 속으로 들어와서 작동하게 되는 겁니다.
이 작동을 어떻게 하는지 제가 그림 하나 그리면서 하겠습니다. 인간은 그냥 홀로 있지 않고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기 자아를 형성한다 했어요. 인간 평생 필생의 사명은 뭐냐? 내가 되고 싶은 나를 구성하는 거예요. 모든 교육도 마찬가지고 국제 교육도 마찬가지고 영어 모르다가 영어 잘하는 나로 구성하는 거예요, 모든 게.
그러면 누구를 만나요? 같은 인간을 만나겠죠, 같은 인간을.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을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구간이에요, 구간. A라는 지점과 B라는 지점 사이에 구간이 남겠죠. 이 구간을 공간(field)면에 그대로 옮기면 mapping, 지도화. 지도를 map이라 하죠. 지도화 시키는 거예요. ‘이 구간에 작동하는 장, field 안에서 둘이 만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그림4).
이렇게 만나게 되면 이것을 ‘사건’이라 해요. 사건. 시간을 축으로 해서 위로 올라가게 되면, 만났던 구간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1년 하든 하루 하든 1초를 하든 괜찮아요, 어쨌든 또 하나의 mapping이 성립되겠죠. 그럼 시간축에 따라 (사건)구간이 각 field에서 mapping을 형성합니다. 시간 변화에 따라 각 장에서 성립된 mapping을 연결한 선을 세계선이라고 합니다(그림4).
(세계선(世界線, world line): 시공간을 통한 경로.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1864~1909)가 1908년 도입한 4차원 시공간(민코프스키 시공간Minkowski Spacetime)에서 특정 입자의 궤적을 나타내는 용어. 그림5참고)
만남이라 하지 말고 개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에요. 개인이 시간에 따른 경로도 세계선, 같이 만나서도 세계선이에요. 시간축에 따른 궤적을 그리며 하나의 연결선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mapping된 세계 속에 시간 따라 ‘올라간다’가 되겠죠. 시간축의 방향이 위쪽이니까.
그런데 주님은 시간의 시작인 동시에 시간의 끝이었어요. 인간은 그냥 점점(…)이에요. 시간의 끝을 몰라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을 마감시키는 주님께서 시간축의 방향과 반대로, 거꾸로 내려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아시는 분이 내려온다면(그림4에서 붉은 선) 시간의 끝이니까 이 모든 것은 파산이 되고 파멸이 되는 거예요.
끝까지 이어지는 세계선, 그 끝부분은 이미 심판으로 잘라져있어요. stop. 여기까지.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해, 하고 잘라져있다고요. 끝나는 겁니다. 이 말은 주님이 이미 완료된 시간가지고 거꾸로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겁니다. 공수부대가 헬리콥터에서 내려올 때 어떻게 내려옵니까? 레펠(rappel, 로프를 타고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내려오는 것)이라 합니까. 다리가 아래로 가게해서 내려오는 경우도 있지만 헬기에서 내릴 때 머리부터 내려와요. 레펠하듯이 내려온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 만날 때 제자들은 같은 시간대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안하고 시간의 끝을 가지고 시간 속에 아직 있는 인간에게 찾아와 만나주는 거예요.
그럼 시간이 끝이 된다는 말은 심판을 의미하죠. 심판의 끝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인간과 만나게 되면 그것이 아까 이야기한 P′와 P의 만남이에요. 하나는 심판주요, 하나는 심판의 대상이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잘 해 볼란다, 어떻게 나를 변화시켜볼까 하는 게 다 헛수고에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냥 심판의 대상일 뿐이에요. 그냥.
그래서 누가복음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어떻게 했습니까? 부었죠. 향유를 그냥 부어버렸어요. 여자가 울었다 이 말이죠.
자기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가 함몰되어버린 거예요.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솜사탕이라면 솜사탕을 납작하게 만들어서 자기를 없앤 채 그냥 자기가 가진 모든 향수를 예수님 것으로 돌려버리고 자기도 그 안에 같이 투신을 해버리는, 자기가 모았던 값진 향수와 더불어 자기의 눈물로 쏟으면서 예수님 앞에 같이 합류해버린 겁니다.
이럴 때 이 여인의 행동이 바리새인한테는 납득이 안돼요. ‘왜 저런 행동을 하지?’ 그것도 어떤 여자였어요?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 죄 많은 여자가 예수님한테 합류할 때,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 여기잖아요.
그러면 선악체계에서 죄인 여자가 만약 합류해버린다면 여인은 자아를 붕괴함으로써 뭐만 남아요? 자기의 죄만 남죠. 자기가 그동안 죄를 쥐고 있다가 자기 쪽을 뭉개버리니까 죄를 담은 그릇 자체가 없어지고 죄를 담은 그릇을 이제는 자기 쪽에서 예수님 쪽으로 이동하는 그러한 행위에요. 주께서 그 여자의 행위를 죄 사함으로 받아주는 이유가 앞으로 예수님이 하는 역할이 이 죄인하고 조가 맞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인간들과 만나잖아요. 예수님이 누구와 만났느냐 하면 죄인을 만났어요. 죄인과 만남으로써 예수님이 이 땅에 온 자기 고유의 역할을 예수님께서 지금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여자의 일이 아니에요. 여자의 일은 끝났어요.
자기가 뭉개졌으니까 납작하게 뭉개졌으니까요. 아코디언처럼 완전 납작하게 뭉개졌어요. 여자의 일은 없고 여자가 자기 일 버리고 예수님 일의 일부로 투입되고 합류가 되어버린 거예요. 주의 일이에요. 그게 용서에요. 용서를 받는 게 아니고, 자기를 뭉개뜨려서 더 이상 내 일은 없다. 나의 일은 없어요. 평생이 자기 자아형성과정이니까 없는 거예요.
시간에 따라 mapping된다 했죠. 이 mapping된 시공간에 예수님이 합류한다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도 한 인물로서 공간면에 한 점으로 표현될 수 있어요. 예수님은 혼자입니까, 누구를 만나러 왔어요? 누구를 만나러 온 거예요. 예수님의 역할을 위해서 죄인을 만나러 왔단 말이죠.
그럼 예수님이 어떤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 꿇어앉아서 엉엉엉 운다. 향수를 부으면서. 이것이 무슨 선이 되겠습니까? 시간의 끝에서 와서 끝으로 딸려가는 주님의 세계선이에요(그림6).
지금 진화론 같은 경우에, 창조과학도 마찬가진데 진화론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시초와 최후를 몰라요. 최초와 최후를 모른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건 관계가 평균적으로 균일하다는 조건 하에 진화론을 만들었어요. 균일하게 적용되는 과학원칙을 끝까지 확대하게 되면 이게 아마 시작이고 이게 아마 끝이라고 보는 거예요. 지구 역사는 47억 년 전, 우주 역사는 136억 년 전, 이것은 뭐냐? 시초, 시작을 모르고 우리가 아는 구간을 잘라서 구간에서 나온 원칙을 가지고 최초와 최후까지 억지로 잡아당긴 것이 과학입니다. 과학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알파요 오메가잖아요. 최초요 최후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는 모든 행위나 모든 개념, 사랑, 용서 같은 모든 개념은 그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최초와 최후가 같이 함유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함유되어 있는 개념이에요. 10분 쉽시다.
** 강의 들어가기 전 언급되었던 그림과 강의 중 자료는 첨부파일을 다운받으시면 보이니 참고바랍니다.
광주강의20241031b 누가복음 7장 47절(용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입니다. 동일한 두 막대기가 있는데 하나는 서랍 속에 집어넣고 또 하나의 막대기는 바깥에 그냥 던져두든지 다닐 때 갖고 다녔습니다. 하루 종일 한 쪽 막대기는 갖고 다녔고 그 시간 동안에 서랍 속 막대기는 고이 모셔뒀죠. 그리고 난 뒤에 그날 밤, 서랍 속에 있는 막대기하고 똑같은 길이의 막대기인데 밖에 돌아다닌 막대기하고 길이를 재보면 같을까요, 다를까요? 똑같아요. 똑같죠.
똑같은데 그 막대기가 그 시간동안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막대기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막대기하고 예수의 언약 밖에 있는 막대기하고, 보기에는 똑같이 보여도 난 전혀 다른 막대기라고 그렇게 간주하시겠다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는 신약과 관련지었죠. 그 여인. 자기 자신을 지키지 않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지키지 않죠. 이 말은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자아를 포기 못 하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는 용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보시는 용서라 하는 것은 나라는 이름 자체를 제거하는 거예요. 제거하고 그 자리에 다른 환경을 집어넣어요. 나라는 막대기가 하나인데 그걸 둘로 만들어서 예수 안의 막대기는 영생 보내고 한쪽 막대기는 그냥 이 땅에서 흙이 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갖다버려라. 갖다버려야 된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첫째 시간 복습을 하겠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용서란 무엇과 만나야 돼요? 죄와 만나야 돼요. 죄 없는 용서는 성립이 안 되거든요. 자, 죄가 뭐냐? 이게 제가 묻는 겁니다. 죄가 뭐죠? 스스로 파선하려는 의도, 이게 바로 죄가 되죠. 내 인생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책임져서 파산해도 내가 알아서 파산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였습니다. 가룟 유다 안에 뭐가 들어왔다고 했습니까? 사탄이 들어왔죠. 악마가 들어왔죠.
방금 이야기한 것이 신약의 내용입니다. 지금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용서와 관련된 구약 이야기입니다. 신약 이야기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구성하고 자아형성하는 것을 왜 중지할 수 없다 했어요? 인간이 놓여있는 장이 무슨 장입니까? 마귀가 놓여진 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마가, 고린도후서 4장 4절, 이 세상의 신이죠.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다시 말하면 통치자. 통치자를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짐승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짐승은 통치자를 의미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7절, 통치자의 허락 없이는 매매를 못한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가 안 된다는 말은 통치자가 있고 통치자 있는 데서 우리는 출생했다 이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도 통치자 안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겁니다. 인간이 아는 시작과 끝은 이미 꿈쩍도 하지 않는 악마의 품속에서 그냥 태어났다가 죽는 거예요.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악마가 같이 슬퍼하고 이런 거 없습니다. 맨 그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니까요. 통치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신은 통치자’라는 것을 힌트 삼아서 거꾸로 구약으로 돌아가 봅시다. 구약에서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처음에 이스라엘 내에 왕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하나님 빼놓고 있었어요, 없었어요? 하나님이 왕이라는 말은 지상 이스라엘에 하나의 구성체에서는 절대로 왕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왕은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벌써 악마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요. 악마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들은 뭘 원합니까? 통치자 왕을 요구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기존의 영역 말고 말씀의 영역에 들어왔기 때문에 네가 말씀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표시가 뭐냐? 왕을 찾지 말라는 겁니다.
‘왕을 찾지 말라. 왕을 구하지 말라. 왕을 세우지 말라.’ 왜 이런 말을 하나님께서 하시느냐 하면 악마에 속한 인간들은 인간이 좋든 싫든 간에 악마가 이미 왕으로 통치자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씀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나라의 전쟁에서 왕이 없는 특징을 어떤 식으로 보여주는가? 사사기가 보여줍니다. 구약 사사기 잠시 보겠습니다. 5장 20절,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되어있죠. 여기에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운다 했어요. 별들이.
이게 드보라가 승리하고 난 뒤에 찬양하는 겁니다.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사기 5장은 가나안 왕 야빈과의 전쟁에 대한 하나님 안목에서의 해석을 5장에서 쭉 내려주고 있어요.
가나안의 왕 이름이 야빈이거든요. 그러면 가나안 땅에는 왕이 있어요, 없어요? 왕이 있죠. 가나안 왕 야빈이니까. 그러면 이스라엘은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왕이 없어요. 이걸 이스라엘이 견딜 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견딜 수 있어요? 이 땅에 통치자 없는 걸 견딜 수 있습니까?
북한에는 왕이 있어서 김정은이 맨날 핵 준비하고 도발한다, 푸틴이 다시 핵폭탄 만지작거리고 있다 할 때,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푸틴 대통령이 불리하다 싶으면 ‘핵폭탄 터질 수 있다’ 이렇게 겁박주고 협박할 때, 그때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뭐 나 혼자 나서볼까?’ 이게 돼요, 안 돼요? 러시아 모스크바 갈 차비도 없다. 지 혼자 나서서 뭘 하겠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에게 의도적으로 적들이 몰려오게 했어요. 가나안 적들이. 전쟁이 없으면 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왕 없이도 하나님 믿고 산다.’가 돼요. 그런데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뭘 원하겠습니까?
앞장서서 우리를 강제로 지휘하든지 인도하든지 우리에게 지시를 하든지, 앞장서서 총대 메고 나서서 적의 왕을 쳐부숴서 내가 속한 나라와 내 모든 것을 안전하게 보장할 수 있는 대단한 영웅적인 왕을 우리가 찾겠어요, 안 찾겠어요? 찾겠죠. 그러니까 보세요. 우리는 통치자를 원하고 있잖아요.
사사기에서 원칙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게 되면 굳이 통치자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원리입니다. 이 사사기가. 왜냐하면 모세 율법이 있기 때문에. 광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모세를 임금처럼 생각했어요. 그리고 모세 죽고 난 뒤에 또 누가 등장했습니까? 여호수아 등장했죠. 여호수아 등장할 때 사람들은 여호수아를 자기 임금처럼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된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단 한번도. 그들보고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들도 아담의 후손이고 우리도 아담의 후손인데 아담의 후손치고 율법만 있으면 되지, 어떤 지도자 없이 우린 적들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은 연약했어요. 오늘날 우리가 연약하듯이.
그런데 사사기 때, 모세 죽고 여호수아 죽고 난 뒤에 다윗까지의 기간이 200년이에요. 20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왕 없을 때 이스라엘 자기 백성이 어떤 처신을 하는지 노출시켰어요. 왕이 없을 때.
사무엘상 8장에서 결국은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뭘 원합니까? 왕 달라고 하죠. 왜 그들이 왕을 달라고 하느냐 하면 사무엘을 왕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래요. 사무엘 죽고 난 뒤에는 사무엘 같이 대단한 선지자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이끌기를 바랐는데 사무엘 아들들이 어때요? 비리비리해요. 영 신뢰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변변치 않은 걸 알고 고정적으로 아주 자리 하나를 마련해서 그 자리에다가 대대로 세습제로, 아버지가 왕이면 아들도 왕 되는 세습제로 될 수 있는 왕 자리를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세습제가 없어요, 있어요? 이미 있습니다. 뭐가 세습제입니까? 대제사장. 대제사장이 세습제로 있어요. 있는데 이들은 왜 의존하지 않습니까? 대제사장은 세상적인 어떤 지휘라든지 어떤 무기 개발 이런 걸 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들은 율법을 시행하는 사람이에요.
대제사장을 못 미더워한다는 말은 율법을 시행하는 것이 영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은 율법 자체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고, 율법을 내가 지킬 때 율법을 내가 신뢰할 때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지킬 때 비로소 이게 복된 효과를 낳는다고 하니까 이게 백성들에게는 부담이 되고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형제자매여 뭘 걱정하십니까? 이 성경말씀이 있잖아요. 성경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가시면 됩니다.” 목사들이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하잖아요. 그게 왜 마음에 안 와 닿죠? 그게 왜 마음에 와 닿지를 않습니까? 왜? 말씀에 대해서 영 믿음이 안 가는 거예요.
이 말씀에 대해서 믿음 갈 만한, 말씀대로 산 어떤 특별한 인간을 따로 마련하고 ‘그 인간의 지시를 내가 따르면 되잖아.’ 이런 생각이에요,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믿음 좋은 목사님이 계셔서 그분이 우리 대신 기도하면 우리는 그 덕이나 보자는 거잖아요. 제자들이 예수님 믿을 때 바로 그런 식으로 믿었죠.
‘통치자를 구한다. 왕을 구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용서라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용서가 아니고 자체 힘을 갖길 원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용서받는다는 것은 내 자존심을 완전히 박살내는 거예요.
벌써 세 번째 합니다. 용서는 죄와 관련되어 있죠. 그 죄가 뭡니까? 인간이 스스로 파산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갖고 있다? 내가 갖고 있다. 파산. ‘내가 망해도 내가 알아서 망한다.’라는 권한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파산할 권한이 없다 했죠. 왜 없다 했어요? 나를 내가 안 만들었잖아요.
나를 내가 안 만들었는데 마귀가 들어와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가 책임져야 될 존재로 계속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잘 돼도 내가 알아서 잘될 거고 못 돼도 내가 알아서 내가 망하니까 남 간섭하지 마라는 거예요. 그래서 도박하잖아요. 이게 파산인 걸 알면서도 계속 도박하는 이유가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는 그 쾌감이 내가 망하고 난 뒤의 슬픔보다 더 강렬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 이유가 뭡니까? ‘믿고 안 믿고는 내 선택, 내 결심에 달렸다. 내가 안 믿어서 지옥 간다고? 알아서 갈께!’ 이게 뭡니까? 이게 주님보시기에 파산한 거잖아요. ‘내가 지옥 간다면 지옥 갈게. 됐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 강요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이게 바로 죄에요.
죄라고 해서 나쁜 짓한 게 죄가 아니고, 끝까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는 게 죄란 말이죠. 그런데 그 반대편에 뭐가 있죠? 용서가 있죠.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하는데 용서받을 수가 없어요. 그럼 용서받겠다는 것은 뭡니까? 이건 실패죠. 용서받겠다는 의도가 뭡니까? 내가 용서받겠다고 주님 앞에 나오는 그 행위가 어디서 나온 행위에요? 내가 나를 단속하는 행위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건 용서가 아니죠. 용서가 안 되고 하나의 요령이죠. 여전히 ‘자기 책임은 내 손에 있소이다’를 주님 앞에서 자랑질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처럼 뭐가 바뀌어야 돼요? 좌표계가 바뀌어야 돼요. 그리고 죄 많은 여인은 뭐만 남기고 사라졌다? 죄만 남기고 날아가버린 거예요.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간 사람~ 이렇게 되죠. 내 죄만 남기고 나는 사라져버릴 때, 그 죄를 누가 손수 거두어줍니까? 예수님이 자기의 만남으로 간주해서 자기가 처리해버리죠. 그게 대속입니다. 그게 대속이에요.
그런데 문제가 인간은 죄인인 내가 용서받길 원하지, 죄와 나를 떼놓을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자기 자신이 용서받은 나임을 끝까지 내가 붙듦으로써 자아승리를 희망하고 있는 거예요. ‘거봐. 회개하니까 난 구원받았잖아.’ 이런 거.
신약에는 안 나오지만 구약에서는 생생하게 나와요. 그게 뭐냐?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는 어떻게 해’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상황에 부딪치죠. 전쟁이라는 것은 첫째 시간의 이야기에 따르면, 주님의 좌표계와 다른 기존 인간세계의 좌표계가 어긋나게 같이 결합되는 것, 이게 전쟁이죠. 그래서 사사기에는 왕이 없어요.
창세기 14장 18절에 보면 왕이 있기는 있습니다. 언약 속에 있는 사람한테는. 창세기 14장 18절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뭡니까?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죠. 제사라는 것은 죄를 없애는 장치죠, 장치. 그 장치에 종사하는 사람이 제사장이잖아요. 그런데 그 멜기세덱이 살렘 왕이에요.
왕인데 하는 역할은 제사장.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이 되어야 되죠. 그러면 날마다 이스라엘이 내뿜은 마귀적인 죄를 제사를 통해 제거함으로써 이방나라와의 전쟁에 이기는 방식을 이스라엘 왕 되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걸 시도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죠.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하기 위함이거든요. 율법을 줌으로써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서는 안 돼. 그런데 왜 자꾸 내 인생은 내 거라 여기고 책임지려 해?” 지적받는 가운데서 이방나라와 붙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거예요.
드디어 사사기 5장을 봅시다. 사사기 5장이 쉬운 게 아니에요. 굉장히 어려워요. 사사기 전체도 그렇지만. 사사기 5장에 그렇게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전에 4장 3절을 보면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승이 있어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죠.
이스라엘에는 자체적으로 왕이 없어요. 지도자가 없습니다. 없는데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죠. 그러면 부르짖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된 어떤 사태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또렷이 그대로 인수인계 받아서 하나님의 심정과 관점을 드러내는 사람으로서 세워지겠죠. 부르짖음, 기도의 응답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왕 되심을 다시 화끈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지도자겠죠. 그런데 그게 뭐를 통해서? 바로 전쟁을 통해서.
그런데 저쪽은 뭘 갖고 있습니까? 철 병거 구백 승. 철 병거. 철로 무장되어 있는 전투용 전차 구백 대. 와, 이거 강력한 무기입니다. 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이 학대받았습니까? 무기로 비교해서는 게임도 안 되니까 알아서 긴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왕이 아니고 야빈 왕이 이스라엘의 왕 노릇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요? 인간들이 해줄 거 다 해주고 다했는데 참다 참다 이제 폭발한 거예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요. 그만큼 인간들은 평소에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식으로 ‘요령껏 버티면 살 수 있잖아’ 그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하나님 안 믿었어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가 책임자 되어서 살아온 겁니다.
그럴 때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이렇게 되어 있죠. 원래 이 전쟁은 누구한테 주어졌느냐 하면 바락이라는 남성에게 주어졌어요, 남성에게. 남성에게 주어졌는데 이 바락이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정신 상태를 그냥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어요. 국방부 장관이라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전혀 하나님을 믿는 태도를 못 가졌어요.
그래서 누구한테 부탁했습니까? 김건희한테 부탁했죠. 드보라한테 부탁을 했는데 이 드보라가 종려나무 밑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었어요. 4장 5절에,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그다음 무슨 나무죠?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임금입니까, 임금 아닙니까? 임금 아니에요. 백성들과 시선을 같이 했습니다. 그냥 백성 중에 하나에요. 드보라가 나섰습니까, 나서지 않았습니까? 안 나섰어요. 안 나섰습니다.
이미 악마가 인간을 통치하고 있는 마당에 하나님이 좌표계를 달리해서 왔다면 이스라엘 내부에 기존의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사사기 4장, 5장에서 계속해서 사사기 때 사사를 통해 보여주는 겁니다.
사사는 나대지 않습니다. 나서지 않습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고 드보라도 마찬가지에요. 나서지 않아요. 그런데 누가 운짐달아요? 운짐이란 말 알아요? 마음이 초조하다. 황급하다. 다급하다. 그걸 경상도 말로 운짐달았다 해요. 마음이 초조하고 다급해서 바락 국방부 장관이 여자 사사 드보라를 찾아갔어요.
그러니까 9절에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여인의 손. 그러니까 야빈, 시스라 이 사람을 드보라가 죽이는 것이 아니고 드보라 계열을 통해서 죽여요. 드보라 계열. 그 드보라 계열이 누구냐?
드보라와 바락이 같이 찬양하는 노래 장면이 사사기 5장에 나오잖아요. 둘이 같이 남녀 혼성으로 부르는데 여기 5장 24절에 보면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무엇을 받을 것이라?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그러니까 이것은… 여자가 왕이 될 수 없잖아요. 여자는 왕이 되질 못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에 대표자로 누가 가게 되어 있어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에 여자가 참석하는 게 아닙니다. 한 가구당 가장인 남자가 예루살렘이라든지 아니면 언약궤가 있는 곳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세미나 듣고 와서 ‘네 아비를 존중하라’는 말씀에 의해서 아버지가 듣고 본 것을 아내와 자식들은 그냥 하나님이다 여기고 그 계시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아버지 장자 중심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왜? 유월절에 죽었다 살아난 것은 여자가 아니고 맏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버지 중심이에요. 할례도 남자가 행하고 여자는 할례를 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사 때에 율법이 식어지고 사사 때 율법에 대한 사람들 관심이 끊어졌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의 왕 되심은 회복해야 되겠고 그걸 다시 계속 부추겨야 되겠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대해 관심도 없고 제사 그런 것은 관심도 없어요.
사사기에 나오잖아요. 그땐 레위지파한테 십일조도 안줘요. 십일조를 왜 줘요? 돈 아까운데. 제사 드리든 말든 너희들은 네 할 일하고 나는 나 쓸 거 쓴다, 이런 식으로 완전히 율법이 다 해이해진 바닥에서 주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대로 하나님의 왕 되심으로 이끄는 그러한 현상이 뭐냐? 그러한 증거가 뭐냐? 여인이 지도자가 되는 거예요.
여인이 지도자가 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왕 없음. 이스라엘은 끝까지 왕 없음. 왕 없다. 통치자가 없어요. 통치자가 하나님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왕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무슨 기능이 작용합니까? 제사기능. 너희의 모든 죄는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죄 사함, 용서가 된다는 거예요. 그 기능이 계속해서 되는 구조, 이 구조를 왕이신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려낸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남성을 제치고 여자가 사사가 되고 여자의 노선에서 또 다른 여자 야엘에 의해서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장인의 방망이를 들고 그 방망이로 시스라를 쳐서 머리를 뚫되 곧 살적을 꿰뚫었도다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5장 27절에 나오죠.
죽은 시스라가 누구냐? 야빈의 군대 장관이에요. 그러면 보세요. 한쪽에 골리앗 나오면 여기에 누가 나와야 돼요? 사울 왕이 나서야 하잖아요. 그런데 야빈 왕의 군대 장관 시스라가 떴으면 이쪽에 누가 나와야 돼요? 바락이 해야 될 걸 누가 합니까? 이름은 나와요. 헤벨의 아내 야엘이라는 연약한 아줌마가 나와서 이겨버렸단 말이죠.
이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통치자가 따로 있을 리 없다. 다만 뭐가 필요합니까? 통치자를 원하고 있는, 악마의 본성에 근거해서 통치자를 원하고 있는 그 죄성 때문에 하나님의 왕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그 관계성만 드러낼 뿐이죠. 평소에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면 되는데 죄 고백할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 하니까 자기가 무시했던 여인에 의해서 나라가 살잖아요. 여인에 의해서.
5장 28절, “시스라의 어미가 창문을 바라보며” ‘아이고, 내 아들 왜 이리 늦게 오지? 승리했을 건데.’ 하니까 29절부터 “그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 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놓은 채색옷이리로다 곧 양편에 수놓은 채색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31절,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20년 동안 압제받고 난 뒤에 땅이 40년 동안 태평했다는 것은 그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까? 통치자가 굳이 이스라엘에게는 필요 있다, 없다? 필요 없다는 거예요.
연약한, 전쟁에 나설 수 있는 그런 완력이 없는 여인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전쟁에 승리케 했다는 말은, 왜 여인까지 동원해야 되느냐? 너희가 율법을 준 취지인 죄를 발굴하는 장치를 외면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뭡니까? 그들 각자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이 왕 되심의 권한 속에 있다는 말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왕과 백성 사이에 제사장 제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죄를 발굴하고 죄를 씻어내는 제사장 계열을 통해서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 가치와 중요성을 놓쳐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예상해봅시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 또 어려움 당할 때 여자가 나서서 하고 그렇게 해서 아예 여자를 왕으로 군대 장관으로 모셨습니까? 그렇지 않죠. 점점 더 사사기가 흘러가면서… 여러분들이 룻기 알죠? 사사시대에 룻기거든요. 사사시대 통째로 희망이 없어요. 다시 제사 안으로 들어올 그러한 마음가짐도 없습니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 11장 37절이에요. 누가 나오느냐? 입다의 딸. 입다는 딸 죽고 난 뒤에 입만 다셨어요.
통치자가 없다는 걸 제가 왜 자꾸 강조하느냐 하면 신약에 있어서 통치자가 누구인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악마가 이 세상의 신이 되어 있어요. 악마가. 이 세상 신이 악마에요. 그리고 요한계시록도 아까 이야기했죠. 13장. 이 세상은 악마가 이미 통치자 되어서 매매하는 것까지 전부 다 관여하고 있다 했죠. 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좌표들을 바꿔야 되잖아요, 지금. 좌표를 바꾸려면, 우리의 좌표가 뭐냐 이것부터 지금 우리가 구약을 통해서 보자 이 말이죠. 사사기 11장 37절에. 여러분 잘 아시니까 상세한 설명은 안 하겠습니다만 37절에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경우)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그러니까 이 입다의 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자기가 건질 수 있는 그런 것을 기대합니까, 기대 안합니까? 기대를 안 해요. 입다의 딸이 소원하는 것은 죽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안 죽을까봐 염려하고 있어요. 내가 아버지 손에 안 죽을까봐 염려하고 있어요. 이건 도저히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마음가짐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으로서 이렇게 있을 수 없는 마음가짐을 유발하게 된 동기가 이스라엘의 환경, 분위기 속에서 이미 나왔단 말이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지나가는 것이 내 뜻이지만 그러나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말게 하옵소서.”
이게 입다 딸의 심정과 통하잖아요. 살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나로서 언약이 나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아버지 손에 죽으라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아버지여, 저를 죽이옵소서. 예수님은,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우리가 속한 좌표계가 있어요. 내가 여기 P라는 점에 있다면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x,y라는 이 환경 속에 있단 말이죠. 이 좌표계라 했죠(그림1). 이게 바로 우리의 시선이고 악마가 준 세상관점이에요. 이 관점에 예수님께서는 P′로 섞여 오셔서 x′,y′라는 다른 좌표계를 가지고(그림2) 우리 좌표계에 와버린 겁니다. 그러면 P와 P′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겠죠(그림3).
인간을 P라는 위치로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위치가 아니고 사건입니다. 사건. 모든 인간 존재는 사건으로서의 존재입니다. 내가 이 땅에 있다는 것은 사건이에요. 악마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사건이에요. 너 거기 있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악마가 찾아왔잖아요. 악마는, 예수님이 광야에 있는 것이 악마 자기 영역, 자기 나와바리, 자기 좌표계에 쳐들어온 소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건으로 본 겁니다. 마중을 나와서 유혹한 거예요. 우리 동네인데 우리 동네에서 잘해봅시다. 날 경배하게 되면 이 모든 좌표계 당신 줄게.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일치되지 않아요. 떴죠. 두 노선이 붙어있지 않고 붕 뜬 거예요. 예수님의 존재(P′)도 사건이고 나의 존재(P)도 사건인데 이 두 사건 사이에 연결점은 없는 겁니다(그림3).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분, 우리는 죄 안에 있는 자. 죄 안에 있는 자와 용서하는 분 사이에 끊어졌는데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서 용서해달라고 백날 해도 주님의 사건 P′에 접근을 못합니다. 왜? 끊어졌으니까. 왜? 좌표계가 틀어져있으니까. 연결이 안 되어 있으니까. 공간이 붕 떠있으니까 연결될 수가 없어요.
여기에 뭐가 동원된다 했습니까? 전쟁을 일으켜요. 전쟁을 일으키면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이 일으킨 전쟁 앞에서 졸지에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 죄인이 될 때 비로소 멜기세덱은 어떤 하나님이라고요? 왕 같은 제사장. 그 제사장으로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잖아요.
내 역할에 좋은 재료가 있네? 오늘 요리 한번 해볼까? 오늘 죄 있는 여인이 향유를 쏟아 버리는 재료가 있었다면 주님은 또 우리 나름대로의 사건 속에서 또 주님을 드러내는 좋은 재료로서 우리에게 찾아오죠.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 우리는 바들바들 떱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내가 관리해온 나는 파산이니까. 그동안 내가 관리해온 나는 파산상태입니다. 엉망진창입니다. 파산상태에요. 이것을 드러냅니다.
이 파산상태에서 제사장직과 연결되면 이 제사는 반드시 희생물이 필요하죠. 입다의 딸은 누구 딸이죠? 입다의 딸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입다죠. 입다는 전쟁에 승리해서 좋았는데 집에 들어오면서 자기 인생은 파산상태였습니다. 전쟁 승리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던, 그것도 결혼하지 않은 무남독녀 딸을 그것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듯이 자기 손으로 죽여야 될 판이었습니다. 이게 자기가 예상 못한 새로운, 억압된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전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전쟁의 의미는? 전쟁이란? 그동안 내가 속한 내 세계와 주님의 세계 사이에, 주님 속에서는 희생물을 내밀고 나의 세계에서 나는 파산당한 나, 더 이상 내가 나를 손댈 가치도 없는 나로 비로소 삐직삐직 만나게 되는 겁니다. 만나는 거예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화로다 망하게 된 나와 주님 쪽에서 내민 것은 입다의 딸 같은 희생물이 여기서 삐죽이 튀어나오죠. 입다는 비로소 전쟁이란 개념이 내가 속한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전쟁이 아니고 자기 내부 전쟁으로 주께서는 찾아왔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어제 수요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이게 복음이 아니라 했죠. ‘만들었다. 해와 달 별.’ 이게 복음이 아니라했죠. 천지를 창조해서 나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천지를 만들어 운영하면 되는데, 복음이 이상스럽게도 내 마음까지 뾰족하게 찾아온다는 거예요. 뾰족하게 찾아오는 거예요.
대전강의에 의하면, 오뎅. 어묵에 쇠꼬챙이로 찾아오는 거예요. 율법은 나를 죽이는 거고 영은 나를 살리는 거고.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6)
주께서 나 같은 인간까지 신경을 쓰신다는 게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에요. 그냥 하늘의 별, 달이나 관리하시지, 안 그래도 저거 관리하느라 바쁜데 뭐 나까지 찾아와서 여러분까지 찾아와서 율법으로 한 번 쑤시고 그다음 구멍 난 곳에 성령 집어넣고. “어떻게 저한테 신경 씁니까?” 그럼 주님께서 “언제 니한테 신경 쓴다고. 나는 내 일했을 뿐이다.” 주님은 주님 자신한테 신경 쓰는 거예요. 주님 자신이 구세주고 제사장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같은 죄인이 필요했던 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버티지만 그것은 악마라는 통치자, 짐승의 관리 하에서 이런 일들이 기껏 그런 일로 추진되고 있었던 거란 말이죠. 그걸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의 일생은 무엇을 형성하는 과정? 자아형성과정. 뭐를 더 끌어 모으면 이렇게 내가 원하는 내가 될까? 그걸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멈추지 않고 해요.
그래서 나이가 한 60 지긋이 된 사람들이 20대 노는 거 보면, 그들이 까불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철딱서니 하나도 없다 하죠. 철없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기껏 네가 그동안 장만한 자아가 그 정도야? 네가 보는 세상보기가 그 정도 범위밖에 못 보지?’ 그런 얘기에요.
나이 60된 분이 20대 보면서 ‘아이고, 철딱서니 하나도 없다.’ 그걸 보고 80된 분이 뭐라고 합니까? 60대 보고 ‘네가 60밖에 못 사니까 세상 보는 게 그것밖에 안되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그 뒤에 100살 먹은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세월가면서 자아가 눈사람 뭉치듯이 뭉쳐지니까 세상 보는 범위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거예요. 늘어나봤자 고집이죠. 다른 뭐 좋은 말 듣겠어요? 그냥 자기 고집이에요. 그것이 바로 그들이 모르는 최후로 끌려가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최초를 모르니까 최후 모르고, 모르고 끌려가는 거예요. 파산되는 거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렇게 왕이 없어야 된다는 것을 희생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희생물을 통해서. 끝으로 이러한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언약이 진척되면 그게 어디까지 가겠어요? 나중에 사울까지 가겠죠. 아까 사울 왕 달라 했죠.
사울까지 가는데 사울은 하나님의 다윗 언약에 연결점이 없어요. 연결점이 없고 엔돌의 여자 무당을 찾아가요. 사무엘 붙들고. 죽은 사무엘 유령을 왜 끄집어냅니까? 왜 불러내요? 이것은 사울의 자아형성, 또는 자기가 자기를 계속 책임지려 하는데 죽은 사무엘까지 끄집어낼 정도로 자기가 파산상태에 있죠. 파산상태. 그게 바로 죄죠. 파산상태에 있으니까 죽은 사무엘에게 조언 받아서 ‘어떻게 내가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이스라엘 왕으로 할 수 있을까?’
그랬지만 다윗 언약은 사울 버리고 이미 어린 다윗을 동시에 새로운 왕으로 세웠죠. 그런데 그 다윗도 문제가 있어요. 다윗을 왕으로 세웠는데 다윗은 자기가 나는 왕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날 인정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어요? 인정한 게 아니고 우리아와 밧세바에 의해서 인간 다윗은 파산해버리고 나 말고 이 다윗의 후손이 바로 메시야로 온다는 다윗 언약이 자기에게 주어지죠. 그래서 자기는 다윗 후손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다윗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죄에 대한 희생물로 오신 그 분 앞에서 우리는 뭘 하기 전에도 일찍부터 우리는 희망 없는 파산된 상태라는 것을 발견할 때,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우리의 계획이나 목적을 이룰 생각을 하나님께선 가만두지 않고 성령으로 날마다 폭격해버리죠. 부숴버리죠. 우리에게 늘 나오기는 나오지만 성령께서 그것을 무산시키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심만 드러내는 겁니다.
그것을 두 자로 뭐라 합니까?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 또는 ‘용서’가 있다. 이게 바로 용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는 이미 다 용서를 하시고 우리에게 대제사장 보내시고 희생양 되시고 다 해줬는데 우리는 그런 게 우리한테 관심사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남들 보기에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자랑질하고 싶은 충동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을 저희들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여, 우리의 좌표계가 잘못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십자가와 만나서 우리가 파산된 좌표계 속에서 그동안 살아왔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귀한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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