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40927a 로마서 8장 30절(정도와 본성의 차이)-이 근호 목사
<기독교의 허상> p.98 [예수님이 죽은 이유]. 죽은 이유에 대해서 p.99 중간에 이렇게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한평생 촌에서 농사나 짓고 살았으면 하등 죽일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촌에서 농사지었으면, 농사꾼 하나 죽이겠다고 그렇게 온 나라, 온 권력층이 다 동원될 필요 없겠죠.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이유가… 민중들, 일반 백성들이 선동해서 ‘(예수를) 죽여 주세요.’라고 요청한 게 아니고, 지도층에서 예수님을 죽이도록 모의하고 앞장섰어요. 예수님이 촌에서 농사지었으면 죽일 이유가 없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힘이라는 것, 권력이라는 것이 나왔다는 거예요.
예수님에게서 힘이 나왔단 말이죠. 힘이 나왔고 그 힘이 뭐를 지적했죠. 예수님의 말씀에 힘이 들어있고 그 힘이 지적을 했는데 방향이 있어요. 지적을 하겠다는 방향이 있어요. 인간의 힘입니다. 인간의 힘이 집결된 곳이 그 당시 유대사회의 지도자층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힘이 나왔고 그 힘은 인간의 힘을 지적했다면, 예수님의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대목이 나와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 아버지죠. 아버지의 일로 인하여 자신이 일을 하신다.
그러면 예수님의 일은 아버지의 일에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일은 아버지께 포함이 되어 있는데 포함된 예수님의 일이 인간의 힘이 집결된 곳을 향해 지적했다는 말은, 인간에게 분명히 힘이 있는데 그 힘은 아버지 일에 포함이 안 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에 너희 인간들이 들어가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너희들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의 충돌에 의해서 인간 자체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 관계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인간의 힘은 단독적인 힘인가?’, 즉 인간의 힘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일과 함께 있는 것처럼 ‘인간은 뭔가 보이지 않는 다른 미지의 힘에 묶여 있는가?’라는 점을 생각해봐야 돼요. 다른 힘에 묶여 있는가.
인간들은 ‘내 힘은 내가 노력해서 내가 수집해 끌어 모았고 끌어 모은 것을 저장했고 그걸 펼친다.’ 그렇게 이야기하죠.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적어보겠습니다. 인간의 힘은, 끌어 모았다→ 저장했다→ 펼친다. 이 ‘펼친다’가 대외적으로 뭐로 작용해요? 힘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끌어 모았다 하는 것은 지식이죠. 지식을 끌어 모았고, 저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의 잠재된 힘이죠. 잠복된 힘 또는 기억력이에요. 잠복된 힘이 있고 이걸 펼친다. 이게 내 자아에서 이렇게 이루어진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끌어 모을 때 뭐로 끌어 모으는가? 세 가지가 있어요. 상상, 지성, 이성으로 끌어 모아요. 상상은 이미지죠. 그림, 이미지로 상상하고 내게 필요하다는 지성으로 끌어 모았고 이성이라 하는 것은 이걸 차분하게 정리 정돈하는 거예요. 그렇게 끌어 모은 지식을 저장했다가 펼친다고요. 힘으로 발산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 생각이거든요. 그래서 인간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걸 먼저 생각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단독적 의식이에요. 나는 내가 알아서 내가 인생 산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걸 풀이하면, “사는 대로 그냥 살면 안돼요?” 이 질문이에요. 대인관계에 있어서 이 본마음이 항상 잠재되어 있어요. “교회 갑시다.” 하면 “그냥 내버려 둬. 내가 사는 대로 그냥 살래. 왜 내가 그냥 살면 안 되는데? 왜 지적질인데? 왜? 왜 내 삶을 까는데? 그냥 사는 대로 살면 안 되냐?”
이걸 주님께서 어떻게 지적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너는 무엇을 따르느냐?” 여기에 인간이 기절하는 거죠. “뭘 따라? 난 내 인생, 내가 상상하고 내가 지식으로 갖추고 그다음에 내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나는 꾸준히 지금껏 내 인생을 내가 일구어 왔고 난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지, 뭘 누굴 따라? 내가 뭐 어디 김정은을 따르고 누굴 따라? 아무도 안 따라요.” 이렇게 되거든요.
주님께서 “너는 무엇을 따르느냐?” “나는 단독자라. 단독자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마무리도 내가 하고 시작도 내가 하고 다 내가 살아왔다.”라고 하는 데 있어서 주님께서는 “너는 지금 누구를 따르고 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지적을 이렇게 해요. 제대로 살아야지, 이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네가 지금 이런 식으로 ‘사는 대로 살면 안돼요? 단독적으로 나 살고 싶어요.’ 하는 것이 배후에 조종하는 존재가 있어서라는 거예요.
■너는 누구를 따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지금 힘이 있다는 겁니다. 힘이 있다. 네가 힘이 있는 것은, 네가 뭔가를 챙겨서 네가 그걸 저장하고 네가 그걸 소비, 발산해서 그렇게 힘이 있는 게 아니고 누가 너에게 힘을 주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서 나오는 모든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거든요. 성령은 누구의 영이냐 하면 아버지의 영이에요.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힘으로 살아요. 그런데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예수님,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표준이 되어버리면, 저쪽에 예수님께 지적받는 인간들이, 그깟 인간을 지적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에게 힘을 받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아버지와 상관없는 다른 쪽으로부터 힘을 부여받으면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모습으로.
그걸 어떻게 파악하느냐? 이렇게 파악하죠. ‘경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경험에 입각해서이다. 나는 지금까지 경험에 입각해서 살았어요. 경험. 저건 나한테 유리할까, 불리할까. 또는 대구강의에서 한 것처럼 저게 나한테 유쾌한 일이냐, 반대로 불쾌한 일이냐. 이게 기본이 되어서 유쾌한 경험은 받아들이고 불쾌한 경험은 차버리고.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경험에 입각해서.
그런데 경험에 입각해서 살아온 이 경험이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느냐 하면, ‘입법기능’을 나타냅니다. 입법기능이 뭐죠? 법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우리나라 법은 국회에서 만들어내요. 법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인간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입법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럼 이 입법기능을 통해서 ‘나의 경험을 절대화’시키는 거예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이게 아니고, 인간이 살아온 만큼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법칙을 본인이 제정하는 거예요. 입법기능이니까 법을 제정하는 겁니다. 입법. 법 제정. 개념이 어렵게 되어 있지만 쉽게 말해서 이런 거예요. ‘고집 있다.’ 산(살아온) 만큼 고집 있네.
야, 할아버지 고집 세네요. 이걸 어렵게 말해서 ‘입법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 왜 그렇게 고집이 세요?”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하죠. 이게 경험에 입각하여 자체적으로 법을 세우는 입법기능을 발휘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절대화돼요. 자기 자신이 더욱 더 단단해져요. 동맥경화증처럼 정신경화증이에요. 딱딱해지고 절대화에서 더 나아가버리면 초월적인 존재가 돼요. 이게 뭐냐? 신이 되는 겁니다. 신(神). 절대화되는데 이걸 ‘주체의 초월성’이라 해요. 주체의 초월성. 이걸 아주 어렵게 말했지만 쉽게 말해서 ‘아이고, 강단 있네.’ 이거에요. 고집 있네 또는 강단 있네.
언제까지 강단 있게요? 언제까지 고집이 셀까요? 치매 이전까지. 치매는 자기 입법기능도 자기가 기억을 못해. 저장기관이 고장 났기 때문에. 그동안 자기에게 유쾌한 것, 내가 잘난척하는 것만 다 끌어 모아서 저장을 했는데 이 저장기능, 해마기능, 선조체기능이 망가져버렸어요. 두뇌 전체가 기억과 관련되어 있는데 기계가 오래돼서 고장이 나버리니까 자기는 분명히 옛날 버릇으로 고집을 내세워도 이게 앞뒤가 안 맞아요. 논리의 앞뒤가 안 맞아요.
이번 주 ‘인간극장’에 치매 걸린 노인네, 나이가 팔십 먹은 할머니가 나왔는데 그 할머니를 딸이 극진히 모셔요. 할머니가 치매 걸렸는데 정신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초기 치매 현상을 보여서 대충 아는데 앞뒤 논리가 안 맞는 거예요. ‘솔로’라는 프로그램 알죠? 국민 정신병자들 다 나오는 프로. 남녀 여섯 명씩 또는 다섯 명씩 해서 국민 대표 정신병자들 나와가지고 지 잘났다 하는 프로 있어요. 솔로 프로를 보게 되면 인간은 왜 절대로 남과 못 사귀는지 그 이유가 나와요. 모든 말을 본인이 뱉어놓고 본인 걸로 상대를 끌어당기는데 서로가 그렇기 때문이에요. 할머니가 그 프로그램을 재밌게 본 모양이죠. 자기 딸보고 하는 말이 “너도 한번 나가라.”그러는 거예요. 지금 남편 옆에 있는데. 남편이 하도 같잖아서, “이번 프로는 돌싱 특집인가? 이혼해줘? 이혼하고 돈 좀 줄 테니까 나갈래?”
여자 나이가 얼마냐? 52세에요. 52살인데 솔로 나간다는 게… 이런 프로그램도 있어요. 충청북도 지방 방송에서 하는 거 있어요. 나이 60 넘어서 모여가지고 비슷하게 하는 게 있어요. 추해서 못 봐. 그 프로에 나와서 남녀 이야기하는 거 보면 전부다 고집들이 있어가지고 처음 만난 여자보고 하는 말이 ‘남자가 두 번 사면 여자도 한 번 사야지.’ 이거해가지고 여자한테 까이고 그래요. 나이가 벌써 60되니까. 70 넘은 할아버지도 재혼하겠다고 나온 프로에요, 그게. 50대 나오는 것은 JTBC에서 하는 ‘끝사랑’이라고 또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인간 자기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은 인간을 공격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공격대상 자체가 아니에요. 너 뒤에 영적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너 뒤에 영적존재. 구약에서부터 그래요. 구약의 모든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모든 언약이나 말씀이 그 이스라엘 백성들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속에 잠복되어 있는 힘 있잖아요, 힘. 인간의 힘이라는 게 인간이 얻은 힘이 아니고 악마로부터 조종 받는 힘, 하나님 쪽에서 그걸 겨냥하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인간 쪽에서는 주체의 절대화죠. 주체의 절대화는 자체적으로 입법기능이 있는데 이건 다른 사람과 의논하는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경험과 내 경험, 느꼈던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의 자기가 자기 법을 세워요. 법을 제정한다고요. 나는 인생 이렇게 살고 싶어. 왜? 그게 유쾌하니까. 그게 육신이 원하는 거니까.
입법기능인데 자기한테 절대적이죠. 이걸 공박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은 뭐냐 하면 ‘계약’입니다. 계약. 이 계약에 의하면 인간의 사적인 입법기능은 주님의 계약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구약 때부터 이스라엘에게 지적한 거예요. 언약을 지켜라. 다른 신, 바알 신에는 이런 계약이 없고 하나님만 언약 또는 계약을 주셨다.
그럼 언약의 특징은 뭐냐? 언약의 특징은 인간이 손댈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 사이의 계약이기 때문에 주님과 주님 사이의 계약이기 때문에 인간은 손댈 필요가 없다고요. 손댈 필요 없이 이미 확정된 거예요. 확정된 것. 이 사실을 믿으면 너희한테 계약의 힘이 나오죠. 계약의 힘을 복이라 하고 신약에 오면 이게 바로 천국이에요. 천국.
그러면 인간이 천국을 막습니까, 악마가 천국을 막아요? 악마가 인간 편에 서서 온갖 힘을 다 주면서 ‘너는 너 스스로 네 법칙을 만들어서 네가 최고의 존재로 살아야 돼.’ 하는 그 모든 악마의 의도가 어디 있습니까? 이 계약 때문에 그래요.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확정된 계약을, 악마는 인간을 앞장세워서 훼방 놓고 방해 놓는 거예요.
그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사도행전 5장.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서로 싸우지도 않고 세상에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부부가 또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마음이 맞는 그런 부부가 나와요. 얼마나 다정한지 한 날에 둘다 다 죽었어요. 아나니아와 아내 삽비라가 소유를 판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 앞에 내놨어요.
그러니까 ‘아이고, 이렇게 귀한 재산을 바쳤습니까? 고맙습니다.’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8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3절에 나오는 단어를 한번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그다음 나온 단어가 뭐죠? “사단이”
사탄은 지금 확정된 계약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걸 훼손할 의도를 가지고 인간의 마음속에 작용해요. 그래서 5장 3절에 대립되는 두 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누구를 속였다고 되어 있어요?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렇게 되죠.
그러니까 성령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손댈 필요 없이 이미 확정된 건데, 확정된 것에 대해서 계약 확정된 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될 텐데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못 받아들입니까?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결혼해 살아오면서 자체적으로 한 가정으로서 자체 내에 입법기능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 생존에 유리하냐, 이미 확정된 법 같은 것이 그들 내부에 공감되고 공유되고 있었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왜 헌금을 다 하지 않고 얼마를 숨겼습니까? 간단하죠. 더 살고 싶어서. 이왕 사는 거 더 풍족하게 살고 싶어서. 그럼 이건 뭔 뜻입니까? ‘확정된 계약 따위 나는 모르겠고, 그냥 내 식대로 살도록 좀 놔둬요.’ 이런 거예요. 내 식대로 내 방식대로 my way 내 방식대로 인생 살도록 좀 놔두라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거기에 대해서 말씀은 ‘네가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지 말고 ‘누가 너에게 그걸 시키더냐’고 네 배후의 조종자를 네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성령의 모든 말씀이고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네 배후에 누가 그렇게 시키던가? 누가? 모르죠. 인간은 몰라요. 자기 스스로 자기 사는 데 정신 팔려가지고 온 경험치는 다 끌어 모았는데 배후에 악마 있고 그런 건 모르죠.
그래서 아나니아, 삽비라 입장이 되어 보세요. 우리가 이 본문을 볼 때. 아나니아, 삽비라 입장이 되어 봅시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중에서 그 두 단어 빼내면 납득이 돼요. 뭐냐 하면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네가 어떻게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러면 이제 인간 대 인간으로 말이 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성의는 표해야 되겠고 마침 땅 팔려고 어제 마음을 먹었는데 오늘 아침에 꼭 쓸 일이 생겨서 다음에 또 하지 했습니다.” 뭐 주절주절 변명들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거기다 그렇게 이야기한 게 아니고, 거기에 단어 두 개를 집어넣었잖아요.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고’ 그다음에 뭘 속이고? ‘성령을 속이고’ 단어 두 개만 딱 집어넣으니까 아나니아, 삽비라 입장에서는 뭐래, 이게? 도대체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평소에 ‘좀 놔둬요. 나 사는 식으로 살게.’ 여기에 필요한 단어들 있잖아요. 그 쓰는 단어들과 전혀 다르게 성령이 어떠니 사탄이 어떠니 하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5절에,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무슨 말인지 모르고 죽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늙어죽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죽는 이유를 살아 생전에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죽는 이유를. 사도행전 5장의 뜻은 이거에요. 인간은 하나님 일의 방해자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일의 방해자에요. 그 증거가 뭐냐? 죽음이죠. 그 증거로 죽습니다.
그 증거의 절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고요. p.99 중간에 [예수님이 한평생 촌에서 농사나 짓고 살았으면 하등 죽일 이유가 없다.] 하등 죽일 이유가 없어요. 주님이 그냥 농사짓지 않고 그 권력층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까지 와서 사람들을 지적질하니까 일반 대중들은 좋아하는데 누가 싫어하는 거예요? 인간과 인간들끼리 소통되고 납득되는 힘들이 결집된 그 최고기관, 그 지도층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거예요.
이 뜻은, 인간들은 ‘정도의 차이’와 ‘본성의 차이’를 구분 못한다는 거예요. 정도의 차이라 하는 것은요. 살고 싶을 때는 힘+힘+힘+힘+… 힘 더하기에요. 수학에서 더하기(+) 있죠. 이게 존재+존재+존재+존재+… 존재 더하기에요. 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 있는 것 더하기에요. 그럼 이건(-) 뭡니까? 있는 것을 빼는 것,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 이게 마이너스에요.
이게 서수(序數, ordinal number, 순서 수)가 아니고 기수(基數, cardinal number, 세는 수)라 했죠. 수련회 참석하셨으니까.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에는 순서밖에 없는데, 순서밖에 없는 걸 가지고 자기가 여기 1이 있으니까 자기와 닮은 다른 토끼보고 1이라 하는 거예요. 토끼 한 마리 있네? 어? 계란 하나 있네.
계란 하나 있다 할 때 이 하나는 어디서 나왔어요? 카운트하는 내가 늘 하나(1)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모든 인간의 진리와 지식은 ‘내가 여기 하나로 있다’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죽는 것은 진리냐, 진리 아니냐? 그건 진리에 포함 안돼요. 내가 죽고 난 뒤에는 진리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진리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하나 있을 때나 필요한 게 진리고 지식이에요.
그러니까 뭐가 궁극적인 진리입니까? 나 여기 있음. 그게 진리에요. 내가 진리니까 ‘내가 뭘 하든 좀 잔소리하지 말고 내버려 둬. 그냥 나 살던 대로 살게.’ 이게 진리에요, 이게. 그 진리가 입만 벌리면 나와요. 계속해서 나온다고요. 뭐 다른 사람이 하면 밉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지적)하니까 지도층에서 예수님을 죽여 버렸잖아요.
내가 진리니까 사람들은 이거에요. 인간들의 마음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Please, 제발 날 건드리지 마요! 제발.’ 이건 자식이 됐든 부모가 됐든 형제 간이 됐든 부부 간이 됐든 타인에게 비는 거예요. 참, 손바닥 비는 건 존재를 없앤다 했죠. 간절히 원하는 것은 딱 하나에요. 제발 날 건드리지 마라. 안 건드리면 내가 당신에게 내 성의껏 성의를 표할게. 단, 조건이 있어요. 날 건드리지 않는 단 한 가지 조건 하에.
무엇을 모른다 했어요? 무엇을 모른다 했습니까? 정도의 차이와 본성의 차이. 정도와 본성의 그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강의하는 것은 우선 정도의 차이부터 시작하겠어요. 정도의 차이부터 시작하고 그다음에 본성의 차이까지 설명하고 강의 끝납니다.
첫 번째, 정도의 차이. 2차원 평면구조에서 어떤 점이 하나 있을 때 이 점이 어디 있는가를 표시하기 위해서 평면에 있는 선을 하나 상상하는 겁니다. 수평에 x축, 수직적으로는 y축. 좌표평면상의 한 점을 P라 하고 x축과 y축의 교점을 원점(O)으로 생각해서 원점에서 P점까지 얼마나 떨어졌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이 거리(R)는 어떻게 되는가? 피타고라스 정리에요. x²+y²=R² 이 공식으로 R을 구할 수 있어요.
자, 한번 보세요. 이게 수학입니다. 수학은 인간 모든 지성의 극치에요. 수학을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의 모든 지성은 거기서 다 나와요. 여기서 한번 보세요. 이 원점이 뭐죠? 왜 원점이 있어요? 제가 거리를 잴 때 ‘원점으로부터 수평적으로 x, 수직적으로 y를 잡아서 제곱해 더하면 빗변에 해당하는 거리 나옵니다. 밑변a, 높이b, 빗변c라면 a²+b²=c²,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해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서 지식으로 이걸 ‘아니요’라고 할 사람 있습니까? 없죠. 맞는 이야기에요. 맞으니까 진리가 되죠.
그런데 여러분, 이게 진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이걸 몰랐어요? 알았어요. 피타고라스가 그 전에 사람이니까 다 알고 있었어요. 다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왜 죽이죠? 예수님이 촌에서 농사지었으면 안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걸 지적하느냔 말이에요. 뭘 지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좌표에) 원점 있잖아요. 원점. 이 원점 누가 정했어요? 인간이 정했죠. 이 원점이 뭐냐 하면 ‘관찰자’에요. 관찰자 중심의식인 거예요. 관찰자 중심의식. 관찰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관찰자가 있다는 말이에요, 인간들은.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죽여 버렸는데요, 이 관찰자를? 이 관찰자를 죽여버리면 이 a,b,c 이 피타고라스 정리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 원점 지점을 주님께서 구멍내버린 거예요, 구멍을. 인간들은,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해서 거리 R 나왔다. 점의 거리가 나왔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계약입니까? 확정된 거예요? 이게 생명입니까? 아니죠.
생명도 아닌데 이 수학을 왜 연구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죠. 수학을 왜 연구하는 겁니까? 뭐를 모으기 위해서? 힘. 무슨 힘? 생존의 힘. 생존의 힘 끌어 모아서 뭐가 되는데? 이게 자아. 자아가 되면 뭐할 건데? ‘제발 나 건드리지 마. 나 이 정도 힘이 비축되어 있어. 건드리지 마. 나 피타고라스 정리 알아. 건드리지 마.’ 이거잖아요. 이게 지성 아닙니까.
좀 더 해봅시다. 수학이 어떤 세계인지. 이게 지금 2차원 평면이에요. 2차원 평면인데 이걸 3차원으로 바꾸되 무슨 3차원이냐 하면 시간을 포함한 3차원(4차원)으로 한번 바꿔봅시다. 그러면 x축 해놓고 한 점을 Q라 해봅시다. 원점으로부터의 이 Q지점의 거리를 S로 해봅시다. 그리고 수직축 y를 시간으로 바꾸는 거예요. y를 시간으로 바꿔보면 이건 공간차원이 아니고 앞에 시간이 붙어서 시간이 포함된 시공간차원이 돼요. 시공간 차원이 되는 거예요. 이걸 로렌츠 변환(Lorentz transformation, 특수상대성이론의 기초가 되는 좌표 변환식)이라 하는 겁니다. 물리학에서.
시공간차원으로 바꿀 때에 수직축을 시간으로 바꾼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해를 돕기 위해 옛날식 저울(양팔 저울)을 그려보겠습니다.
y축은 아까 2차원 평면에서는 길이였어요. 4차원에서는 시간이죠. 시간은 t입니다. 단위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단위가 맞아요, 안 맞아요? 저울 한쪽 접시에 62kg, 다른 쪽 접시에 키 180cm. 이게 맞아요, 안 맞아요?
단위가 안 맞다는 말은 이런 거예요. 어떤 길이 있는데 화살표가 오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가고 있는데 만약에 교차되어 위에서 아래 쪽 방향으로 길이 온다면 이거 충돌해요, 안 해요? 충돌하겠죠. 2차원 동물들끼리는 충돌할 거예요. “오? 막혔는데. 못 가는데.”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고가도로 만드는 사람한테는 이게 쉽죠. 고가도로는 2차원이 아니고 3차원이기 때문에 쓱 지나가도 이건 충돌이 안 되고 차원이 하나 더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빌립 집사가 성령에 의해서 오잖아요. 차원이 지금 이쪽 차원이 아니고 하나 더 높은 차원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거예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게 중첩 차원이죠. 중첩 차원이기 때문에, 하나가 더 있기 때문에 하등 이상할 게 없어요.
너희는 땅에 속하고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다는 말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거예요. 이해 못하는데 차원이 낮은, 차원이 빠져있는 그 사람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해버리니까 인간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차원이 다르니까.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차원이 다르니까 알아먹을 수 없는 거예요. 전혀.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차원을 맞추기 위해 다른 걸 제시한 게 아니고, 자신의 죽음을 인간들 손에 맡겼던 거예요. 인간들 손에.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인간의 죽음인 동시에 영생의 시작이 되는 거죠. 왜? 두 개의 차원이 십자가에서 만나니까.
전립선암 3기다. 그거 걸리면 어떻게 돼요? ‘집사님, 나 살고 싶어요!’ 이렇게 나오겠죠. 집사님, 나 살고 싶어요. 암 말기인데 살고 싶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다른 차원으로 갈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살아온 차원으로 도로 거기에 벌벌 떨며 매달려 있는 거예요. 꼭 쥐 같아. 다른 차원을 모르는 쥐 같아요.
그럼 자기가 있는 세계에 속했다는 말은 아까 얘기에 의하면 어디에 속했다는 말입니까? 아까 강의 쭉 들어보면. 경험. 경험 위주의 세계에 속한 게 되죠. 경험 위주. 경험에서 뭘 얻는다? 힘을 얻는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온다? 정보죠. 지식을 얻는 거예요. 지식을 얻으면 힘이 된다는 겁니다. 지식을 얻으면.
그런데 그 힘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뭐를 지적했습니까? “너, 그 힘이 어디서 왔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다른 추가된 차원, 중첩된 차원을 포함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며 지적하는 거예요. “너 누구를 따르지?” 인간들은 뭐라고 합니까? “따르기는 뭘 누구를 따라? 지금껏 나는 누구를 따른 적도 없고 나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이때껏 살아왔다. 따르기는 누굴 따라!” “아니야, 너는 누구한테 부름을 받았어.”
예수님이 끄집어내는 게 이거에요. “너는 부름을 받았다.” 로마서 8장 30절 읽어봅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여기 부르시는 게 있죠. 불러주는 거. 부름을 받은 사람은 단독자입니까, 아니면 부르는 자에게 종속됩니까? 종속되죠. 로마서 8장 30절에서 하는 게 그 말이에요.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라 이 말이죠.
아까 이야기했죠. 인간이 경험을 쌓게 되면 거기서 무슨 기능이 나옵니까? 뭘 제정한다고 했습니까? 입법기능. 인간은 아는 만큼 자체를 지키기 위한 법을 만들어요. 법을 만들 때 자기가 자기 지키는 법을 만들죠. 법 제정이에요. 입법기능이죠. 그럼 그것은 하나님의 계약을 방해한다 했죠.
하나님의 계약, 입법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결정됐고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부르심을 입어서 사명을 받아 입법을 했는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확정된 계약, 언약을 누가 방해합니까? 마귀가 방해하기 위해서 따로이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인생의 자기 방식과 원칙을 본인의 지식과 힘으로 제정하길 원하는 거예요. 촉구하는 거예요.
누가? 마귀가. 너 사는 법칙 네가 알아서 네가 만들면 되지, 왜 누구한테 물어? 네 인생 네가 알아서 법을 만들어. 그게 네 인생이고 그렇게 되면 너는 절대적 초월자가 되는 거야. 제가 아까 강의한 게 그거잖아요. 그게 주체의 초월성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불러주심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불러주심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안에 자기를 위한 입법내용, 자기만 잘 사는 법이 계속 그대로 살아있는 거예요. 그거 살아있는 한 뭐가 안 들어와요? 주님의 확정된 계약이 들어올 수 없죠. 내 인생 내가 사는 법칙이 따로 정해져 있는데.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그다음에? “영화롭게 하셨”다.
제가 지금 수학을 말한 것은 그 입법기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울. 62kg에 180cm가 들어가면 안되죠. 단위를 맞춰줘야 돼요. 여기 길이에 해당되는 것을 시간으로 바꾸는 게 로렌츠 변환이라 했죠. 시간으로 바꿀 때 여기에 뭐를 넣어주면 길이가 시간이 되겠습니까? 이걸 그동안 인간의 머리로서는 뚫어낼 수 없었는데 그전의 수학자들도 했지만 아인슈타인이 이것을 해냈어요. 길이와 시간을 서로 같은 단위로 맞췄습니다. 두 가지를 집어넣어요. 하나는 𝑖(허수), 또 하나는 c(광속).
자, 이것이 인간의 이성과 지성 속에서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가 나오는지를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서수가 아닙니다. 기수는 인간에게 반칙이에요. 서수는 반칙이 아닌데, 서수는 순서대로 가는 거예요. 옛날에 돌멩이, 돌멩이를 나선형으로 쭉 순서 지어서 늘어놓고 제사를 지내는, 옛날에 알타미라 동굴 같은 데 벽화 나온 거 있죠. 순서를 정했다. 이거하고 나면 이거하고, 순서를 정한 거예요. 그러나 기수라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발달해서 나온 게 기수이기 때문에 기수는 현실 속에 없어요.
모든 게 서수인데 기수가 나왔다 이 말이죠. 기수가 왜 나왔나? 인간은 ‘있음’부터 출발한다 했죠. 있음에 있음을 더한 걸 뭐라 했습니까? 이걸 더하기(+)라 했어요. 더하기. 직선에서 가운데를 0이라 하면 우측으로 1,2,3,4,5,… 이렇게 되는 거예요. 2는 1+1이고, 3은 1+1+1, 4는 1+1+1+1이 되죠. 방향이 뭡니까? 있음에 있음을 추가하는 식이죠. 빼기는 0에서 -1,-2,-3,… 좌측으로 빠지고, 빠지고, 빠지고, 이렇게 되죠.
imaginary number, 이게 허수(虛數)인데 첫 글자를 따서 𝑖로 표기해요. 𝑖는 수직선상에 수가 없어요. 제곱해서 -1이 되는 수는 없어요. 직선상 말고 나머지 주변에 있는 수를 하나 생각하는 겁니다. (아래 그림에서 검은 색 실수축 측면에 노랑색으로 표시된 부분) 수직선이 있음의 차원이잖아요. 있음의 차원에 없음의 차원을 하나 더 보태는 거예요, 인간이. 더 보태는 겁니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길이와 시간의 단위를 맞추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25cm하고 하루, 이틀하고 이게 안 맞잖아요. 안 맞을 때는 여기에 없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시간은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숫자를 여기다 도입하는 거예요. 단순히 𝑖를 도입한다고 이게 되는 게 아니에요. 도입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뭔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길이를 상정해서 집어넣는 거예요.
길이, 시간 이 두 요소를 다 포함하는 게 뭐냐? 어떤 시간에도 변하지 않는 길이, 그게 바로 c(빠름을 의미하는 라틴어 ‘celeritas’의 앞 글자를 따서 c로 표기), 광속(光速, 빛이 진공상태에서 이동하는 속력)입니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원리에서 이걸 밝혀낸 거예요. 10분 쉽시다.
**강의에서 언급된 그림은 첨부파일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광주강의20240927b 로마서 8장 30절(정도와 본성의 차이)-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시공간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정도(程度, 사물의 성질이나 가치를 양부(良否), 우열 따위에서 본 분량이나 수준)의 차이죠. 인간의 정도의 차이. 정도라 하는 것은 있음+있음+있음, 더하는 거예요.
이 있음하고 인간은 지금 여기다 뭘 추가하느냐 하면 있음 세계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 세계를 위해서는 있음 가지고 빼기를 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시키면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인간이 지성적으로 정복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로렌츠 변환이라니까요.
x,y축이 있어야 될 이 좌표평면에서 이 y축을 뭐로 바꿉니까? 시간좌표로 바꾸는 거예요. 여기서 𝑖,imaginary number라는 게 있는데 𝑖는 이겁니다. 있음의 수직선은 하나밖에 없어요. 원점을 기준으로 우측은 1,2,3,4, 있음, 있음, 있음,… 좌측은 -1,-2,-3,… 이게 인간의 전부에요. 그런데 수직선을 제외한 주변은 없는 세계에요. 없는 세계에다가 빼기를 각도로 바꾸는 거예요. 있는 세계를 동그라미 치고 빼기 방향(시계 반대방향)으로 90도 가고 또 90도 가서 180도 가면 -1이 되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𝑖×𝑖을 하게 되면 뭐가 된다? 보이지 않는 수와 보이지 않는 수를 곱하니까 -1. -1은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수를 경유할 때는 보이는 수가 나오는 이런 아이디어를 만든 거예요. 각도 90도를 두 번 꺾으면 -1이 되고 한번 꺾으면 그냥 𝑖가 된다. 𝑖는 뭡니까? 두 번 곱해서(제곱해서) -1이 되는 수가 𝑖에요. imaginary, 없는 수인데 만들어낸 거예요. 없는 수를 만들어낸 거예요.
없는 수를 이렇게 만들어냄으로 말미암아 시간을 공간 속에 집어넣고 공간을 시간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를 만든 거예요.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치 않아요. 뭐가 있냐 하면 광속(c)이 있는데 이 광속은 특징이 뭐냐? 공간으로서 포착이 안 되는 거예요. 어느 공간에서도 30만km/초로 변동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아주 신기한 거예요. 30만km/초. 세상에 모든 게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게 뭐냐? 광속이에요.
그래서 결국 과학이라는 것은 이거에요. ‘광속을 믿냐, 아니면 너의 자율 또는 자유를 믿느냐?’ 이걸 요구하는 거예요. 광속을 믿는 것은 과학이고 인간의 자유를 믿어버리면 이건 자아세계고. 그런데 둘 중에 누가 이겼어요? 과학이 이겼잖아요. 과학이 이겼어요. 인간은 뭐다? 양자역학에서 하나의 전자 흐름이다. 왜냐하면 전자, 광자 이거 과학에 속하거든요. 이 과학이 인간을 이기는 거예요. 인공지능이 누굴 이겨요?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기는 거예요. 광속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변한다. 변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에 종속된다.
이 특수상대성 원리에서 나오는 로렌츠 변환. 이렇게 해서 이제부터 Q라는 지점을 표기할 때 S의 거리는 S²=X²-C²T²이라는 거예요(아래 그림 참고). 즉 모든 물체는 시간 요소까지 집어넣어야 제대로 시공간 내에서 자기 좌표를 정확하게 나타낸다는 거예요. 이런 로렌츠 변환(광속의 불변을 설명하기 위한 변환관계) 됐죠.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조사해보니까 이 세상은 공간세계가 아니었어요. 확정된, 변하지 않는 빛에 의해서 모든 것이 조성된, 변하지 않는 빛의 속도에 종속된 세계라는 것이 일식 가운데 빛의 휘어짐을 확인하면서 증명된 거예요. 과학이 진리였던 거예요. 빛의 속도 30만km/초가 진리라는 게 증명된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무슨 세계라 했습니까? 정도에요, 정도. 뭐를 놓쳤습니까? 인간의 정도의 차이만 알았지, 뭘 몰랐어요? 본성의 차이는 몰랐던 겁니다. 인간의 질적 차이를 몰랐던 거예요. 정도라 하는 것은 있음과 있음의 차이, 작다/크다 또는 빠르다/느리다 이거에요. 모두 과학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 증명이 됐거든요.
있음은 없음의 원칙을 경유해야 있음이 적용되고, 모든 있음의 세계는 변하지 않는 광속에 의해서 전부 다 조종 받는 세계에요. 조종 받는 세계. 그래서 이 정도의 차이에서는 인간은 뭐로 설명되느냐? ‘모든 인간은 광자 덩어리’다. 광속이니까. 이거 말고 다른 절대 진리가 어디 있어요? 인간은 광자 덩어리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걸 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인간들이 광자 덩어리라고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네가 뭘 아느냐고 묻는 게 아니고, 누가 시키더냐?” 누가 시키더냐. 이 질문에 대해서 사람은 답변을 못해요. 아인슈타인의 이런 원칙, 수학, 진리, 측정값, 이 모든 것을 누가 시키더냐 하는 거죠.
그럼 아까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2차원 공간에서 x와 y축이 있고 0(원점)에서 어떤 P(x,y)라는 지점을 나타낼 때는 x²+y²=거리 r²이라 했잖아요. 이걸 사람들이 진리라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원점을 누가 정했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야기를 안 해요. 원점을 누가 정했나. 이 원점을 뭐라 했습니까? 관찰자. 관찰자를 누가 정했느냐 하는 거예요. 본인이 정했죠. 관찰자를 본인이 정한 거예요. 본인이.
그런데 이 관찰자가 양자물리학과 상대성물리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게 c, 빛의 정도로 바뀐 거예요. 인간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이제 완전히 포기를 해야 돼요. 인간의 모든 지성과 이성은 전부 다 포기되어야 돼요. 소용없는 짓이에요.
주님은 ‘누가 시키더냐’ 이렇게 해서 관찰자+배후 존재, 관찰자의 배후 존재를 겨냥해서 주께서는 말씀을 주신 겁니다. 네가 세상을 네 중심으로 보는데, 그렇게 네 중심으로 보라고 누가 시키더냐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동안은 인간 중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했다면 인간 중심으로 했던 모든 지성과 과학적 노력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빛으로 바뀌었잖아요. 빛의 속도, 빛의 성질로 바뀌었잖아요. 인간은 이 속에 종속되고 날아가 버렸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이 관계를 아까 뭐라 했습니까? 이게 계약이고 계약은 법이죠, 이 법을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놨지만 보이지 않는 악마가 인간을 이용해서 이 법, 계약을 방해 놓았어요. 악마가 계약을 방해 놓으라고 인간을 사주하러 온 거예요. 이걸 방해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뭐라 했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라.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은 부르심을 입은 거죠.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잖아요.
똑같은 관계로 이미 악마와 인간 사이에 악마에 의해서 인간은 부르심을 받은 존재가 된 거예요. 그걸 의도하고, 악마도 마찬가지고 주님도 마찬가지고요. 서로 상생적인 관계들로 그 유사한 관계를 두고 악마가 인간 쪽에 모든 걸 시킨 겁니다.
제가 수요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까? 악마의 입장에서요, 선악과를 따먹는 데에 성공했잖아요.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었잖아요. 따먹었으니까 이건 누구의 승리입니까? 이미 게임 끝났어요. 하나님에 대한 악마의 승리입니다. 악마의 승리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트라우마로 가져가는 거예요. 자신의 트라우마.
트라우마로 가져갔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누구를 보냈습니까? 파견한 게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기 아들을 파견해서 버림받게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 아버지가 스스로 아버지 쪽에서 받아들일 트라우마를 아버지 쪽에서 생산하는 거예요.
아브라함보고 뭘 바치라 했습니까? 자기 아들을 죽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미워했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버리라는 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을 죽이라는 겁니다. 아들 죽이는 게 사랑이래. 이게 사랑의 극치랍니다. 인간의 존재 중심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곤란한 거예요.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고, 버렸다는 조건 하에 그 아들을 되찾아요. 예수님께서 “이 죽음의 잔을 안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된대요. 세 번이나 해도 안된대요. 죽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아버지가 아들을 다시 살리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안에 이런 트라우마가, 주와 주가 갈라지면서 치료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말라기 보면 “치료하는 광선”(4:2)이라고 되어 있죠. 하나님의 하나님 자기 치료에요.
그럼 이걸 하려면 인간의 것은 다 끄집어내야 되죠. 하나님이 만든 계약을 훼방하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건설한 것, 인간의 지성과 모든 지혜의 총합을 다 끄집어내야겠죠. 그걸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다 끄집어내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정도의 차이. 다시 말해서 있음과 있음의 차이를 파악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여기서 단위를 맞춰야 되니까요. 인간의 한계가 정도의 차이 인식이죠. ‘정도의 차이 인식’인 것을 어떻게 뭐로 바꾸느냐? 어떻게 ‘본성적 차이 인식’으로 바꿀 수 있느냐에요. 아까 첫 번째는 뭐라고 했습니까? 정도의 차이 설명했죠. 이제 두 번째는 뭐 설명한다고 했죠, 제가? 본성의 차이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그 문제.
그 문제가 사무엘상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장면이 나와요. 골리앗을 누가 이겨야 됩니까? 하나님이 누구한테 맡긴 업무였어요? 사울에게 맡긴 업무죠. 그런데 사울은 손을 못 대게 되어 있습니다. 왜? 사울은 지금 어디에 빠져 있어요? 모든 것이 정도의 차이라 했죠.
아까 첫째 강의에서 정도의 차이는 무엇의 차이라 했습니까? 힘과 힘의 우열을 논하는 차이죠. 힘. 누가 힘이 세냐? 인간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기껏 저쪽 힘과 내 힘의 비교. 힘으로 상대 파악하기, 이건 인간들이 알고 있는 거예요. 정도의 차이밖에 몰라요.
그런데 지금 사울과 이스라엘 부대는 골리앗 힘에 맥을 못 추고 있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골리앗 힘을 키웠고 의도적으로 장대한 자를 장군으로 내세웠던 거예요. 하나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것이 어떻게 돼요?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었어요. 소용없는 헛소리가 된 겁니다.
그런데 이 골리앗 전쟁에서 정도의 차이를 넘어서는, 본성의 차이를 이야기한 자가 있죠. 누굽니까? boy, 소년. 소년 다윗은 사람을 볼 때 정도의 차이를 본 게 아니고 본성의 차이를 본 거예요. 할례가 없잖아, 할례가. 쉽게 말해서 십자가가 빠진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십자가 빠진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그게.
윤석열 생각할 때마다 늘 그런 생각해요. 십자가가 빠졌는데. 십자가 빠진 자리에 윤석열은 뭘 집어넣습니까? 술. 술로 정치가 됩니까? 십자가 빠졌는데요. 자기의 경험, 경험치. 경험에서 끌어 모은 힘. 얻고 저장하고 펼치고. 힘 얻고 저장하고 펼치고, 힘 얻고 저장하고 펼치고. 매일같이 반복하는 그거밖에 모르죠. 본성의 차이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드디어 다윗이 할례 받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의 확정된 계약을 언급했죠. 인간 내부에 힘으로 조성된 자기의 입법기능, 나는 힘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입법, 법을 세우는 이 기능이 다윗에게는 없습니다. 없어요. 전쟁할 때 사울 왕이 뭐 방패 들고 가라, 칼 들고 가라, 갑옷 입어야지 이건 뭡니까? 본인의 입법기능을 말한 거예요. 나는 경험상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옳다,라는 그걸 따라서 소년 다윗에게 입혀봤지만 힘이 없어서 휘청거리다 치워버리죠.
세상이 주는 입법기능을 따르는 것을 정신병자로 보고 연구하는 학문이 정신분석학이에요. 라캉이 말하는. 그것을 어렵게 표현하고 있어요. 모든 인간은 상징계(symbolic)를 따른다. 상징계니까 이것이 뭐는 아니다? 실재계(real)는 아니다. 실재계는 모르고, 어릴 때부터 부모가 이야기한 언어 속에 담긴 모델, 허상만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실재하고 끊어져서 상징만 추구하면서 헛된 망상과 허구만 따라가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라는 논리에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라는 거예요.
내가 얻은 입법기능이라든지 내가 법 제정하는 것도 이미 기존에 나와 있는 기성품들이에요. 기존 세계가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예요. 그대로 따라하는 것. 그러니까 남이 정신병자면 나도 같이 정신병자 되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까 봤죠? 베드로가 사단을 이야기하고 성령을 이야기한 게 아나니아와 삽비라로선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되든 안 되든 그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이좋게 하루에 다 죽었잖아요. 다 죽었는데요. 왜 죽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일단 정신병자로 간주하고 그다음부터는 정신병자가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치료방법인 거예요. 정신병자를 정상적으로 만드는 건 없고, ‘아, 이래서 정신병자구나.’ 그걸 치료로 보는 거예요. 참 재밌죠? 왜냐하면 인간치고 정상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상징은 새로운 상징으로 치환되니까. 대체가 된다는 거죠.
‘너는 그동안 교사하면서 무슨 낙이 있었노?’ 하고 음메 기죽어,하고 있었는데 미국 간다. 어? 그게 대체가 되죠. 와! 야, 교사라도 성공한 교사구나. 비록 일주일이지만. 자기 돈 안내고 가는 게 어디에요? 아, 부러워라. everybody 정신병자에요, 전부 다. 전부 다 미국이라는 헛된 허구적 상징에 매료되는 거예요. 상징에.
사무엘상 18장 29절 한번 봅시다. 이제부터 단위를 맞추는 거예요. 길이하고 시간하고 안 맞는 걸 인간은 맞췄잖아요. 이제 하나님도 정도를 아는 인간을 본성을 아는 인간으로 맞추는 거예요. 맞추는 방법이 사무엘상 18장 29절에 나옵니다.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more and more)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다음에 19장 9-10절, 아 어려운 대목 나옵니다.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자, 여기서 단어 하나 뺍니다. ‘악신’이란 단어를 빼자. ‘악신’이란 단어를 빼고 이 대목을 우리 인간적으로 설명해봅시다. 그러면 “다윗이 나쁜 짓도 안하고 훌륭한 일했는데 당신은 왜 창으로 죽이려 합니까?” 했을 때, 그들은 뭐라고 답변합니까? 정도의 차이로 답변하겠죠.
“내가 미친 모양입니다. 내가 정신 좀 나간 모양입니다. 내가 이상하게 다윗을 보니까 더욱 더 미운 감정이 오는데 이건 다 내 잘못이에요. 내가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앞으로 내가 주의해서 다윗을 더욱 더 사랑하고 훌륭하다 칭찬하는 것이 어른다운 태도죠.”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겸손의 차이, 도덕의 차이, 착함의 차이, 인간성의 차이로 보죠. 인간성이라는 정도의 차이. 왜냐하면 겸손도 힘이니까. 낮추는 것도 힘이니까.
그러나 성경대로 하면 뭡니까, 이것은? 사울에게 어떠한 잘못도 없어요. 지금 성경이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뭘 해도 상관없다. 왜? 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이러면 안 되고 이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그게 아니고, 너는 뭐라도 해. 왜? 뭘 해도 의미 없기 때문에! 전도, 선교, 헌금 뭐라도 해. 물론 그런 건 안하겠지만. 배후에 본성적으로 악마가 너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면 끝이에요.
악신을 이야기했잖아요. 이래서는 모자라요. 19장 19-24절, 좀 긴데 제가 빨리 읽어보겠습니다.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지금까지는 정도의 차이입니다.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사울이 다윗 잡으라고 보낸 그 부하들에게 갑자기 뭐가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했죠.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그들이 다윗을 잡았습니까, 아니면 실성했습니까? 어떻게 됐어요? 완전히 실성했죠. 실성한 거 뒤에 나와요.
그래서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야, 이 인간들이 그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군기가 없어. 여기 군기 센 애들 보내! 두 번 다시 그런 실수 안하도록 군기 센 애들 보냈는데 그들도 또 예언하는 거예요. 지금 본인의 역할이 뭡니까? 다윗을 잡는 거잖아요. 정도의 차이, 자기보다 약한 다윗을 힘 센 사울이 정도의 차이에 입각해서 체포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부하들 때문에 유야무야 된 거예요. 예언하기 바빠요.
21절, “세 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그다음 22절,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예언을 하는데 24절, 예언을 하는데 옷은 왜 벗습니까?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낮과 밤으로)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이런 소문이 났다 이 말이죠.
자, 정도의 차이에서 다윗을 잡는다는 것, 확정된 계약을 믿는 이미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을 잡으려고 할 때는 영역 경계선상 다윗이 어느 공간, 어느 영토에 있는가를 하나님이 사울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네가 전에 다윗한테 창을 던진 것은 네가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누가 시킨 거예요. 누가 시켰어요? 악신이 사울을 시켜서 사울이 다윗보고 창을 던진 겁니다.
그러면 사울이 악신에 안 들렸으면 어떻습니까? 악신에 안 들릴 땐 그냥 미워하는 정도죠. 죽이려고 드는 게 아니죠. 그럼 다윗 안에 누가 들어있죠? 예수 그리스도 들어있죠. 그럼 사울 안에 누가 들어있죠? 다윗 안에 여자의 후손, 사울 안에는 뱀의 후손. 결국 이 세상은 확정된 계약에 대한 도전입니다. 방해에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악마는 하나님께 승리했기 때문에.
생각해보세요. 아버지가 자식에게, “얘야, 이 물 내 물이니까 먹지마라.” 했을 때 자식이 부모를 이기는 방법은 뭡니까? 아버지 막 때리는 거예요, 뭐에요? 이 물만 마시면 돼요. ‘난 아버지의 영토, 공간 안에서 벗어나 있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해서 선악과 따먹으면 되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따먹었잖아요.
본인은 모르죠. 이게 악마에 속한, 악마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상하게 예수님이 싫어. 예수님의 말씀이 싫어. 하나님이 미워. 이상해.’ 이건 본인이 설명이 안돼요. 그냥 미워요.
어김없이 오는 시간이 드디어 닥쳤습니다. 우선 노래부터 먼저 듣고 하겠습니다. 반주부터 거창하죠?
<나 행한 것으로> 찬송가 203장
1. 나 행한 것으로 구원을 못 얻고
이 육신 힘껏 애써도 죄 씻지 못하네
나 혼자 힘으로 내 주를 못 뵙고
나 탄식하여 울어도 내 짐을 못 벗네
2. 주 예수 공로만 내 짐을 벗기며
주 예수 흘린 피로써 나 평화 얻겠네
여기까지. 1절과 2절 중간까지 봤는데요. ‘나 행한 것으로 구원을 못 얻고 이 육신 힘껏 애써도 죄 씻지 못하네’ 오케이. 인정합니다. ‘나 혼자 힘으로 내 주를 못 뵙고’ 인정합니다. ‘나 탄식하여 울어도 내 짐을 못 벗네’ 인정해요. ‘주 예수 공로만 내 짐을 벗기며 주 예수 흘린 피로써 나 평화 얻겠네’ 여기서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예수님이 피 흘렸는데 왜 우리가 평화를 얻죠? 이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은 거 인정해요. 오케이. 이순신 장군 죽은 거 인정합니다. 인정하는데 이순신 장군 죽었다고 우리가 평화를 얻습니까? 내 마음이 편해져요? 아니죠. 이순신 장군 지가 뭔데 내 마음이 행복한 게 왜 있어요? 고맙죠. 고마운 거하고 행복은 달라요. 이순신 장군은 타인이잖아요. 나가 아니잖아요. 타인이 한 건 고맙죠.
예수님이 피 흘려준 건 좋은데 왜 내가 평화를 얻느냐는 말이에요. 그래도 내 평화가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래요, 그럼? 예수님 피 흘려도 내 평화 없으면 어떻게 할래요? 이 찬송가의 문제가 이거에요. 계속 더 들어볼까요? 중간에서 이게 막히게 되어 있어요.
(2절 중간부터) ‘주 예수 사랑이 내 근심 쫓으며’. 스톱. 주 예수 사랑이 내 근심을 쫓았다 하는데, 근심 없습니까? 근심 없어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사랑 좋죠. 사랑은 좋은데… 주께서 사랑한다. 오케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할 수 있는데 고맙다고 해서 모든 근심이 다 날아갑니까? 지금 걱정돼 죽겠어요. 미국 가서 뭐 어떻게 해야 될지. 근심이 없어지던가요?
인간은 알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아는 것으로 살고 싶은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피를 흘리든 주님이 사랑으로 오든 나는 내가 아는 것으로 내가 살고 싶은 거예요. 남을 살리는 게 아니고, 남은 난 모르겠고, 나는 무조건 내가 살고 싶고 내가 아는 것으로 살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너냐? 나의 죽음이냐?” 이걸 묻는 겁니다. 어느 쪽에 생명이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나의 평화, 나의 행복, 주께 고마움, 다 어디에 속합니까? 이게 내게 속하잖아요. 아, 끈질겨요. 이게 종교에요. 종교. 아무리 예수님 사랑하고 예수님 믿습니다, 해도 나는 나를 포기하고 나를 없앨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나에게 내가 전부라니까요. 내가 나한테 전부에요.
그전에는 예수를 몰랐고 나만 알았는데 여기에 예수님이 왔잖아요. 이게 뭡니까? 본성의 차이에요, 정도의 차이에요? 전에는 나만 알았는데 여기에 추가해서 예수님이 왔잖아요. 이게 뭐냐? 이게 플러스 아닙니까. 아까 수학에서 플러스거든요. 더하기, 더하기, 더하기, 계속 아는 걸 더하는 거예요. 아는 걸 더하는 게 나를 든든하게 만들면 든든한 만큼 그때 비로소 나는 약간의 안심을 얻겠다는 방식으로 인간의 존재는 그렇게 유지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요구하는 게 뭐냐? 나의 죽음도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계약으로 모든 입법이 확정됐다는 겁니다. 확정된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자살하고 이러지 말고 뭐든지 하란 말이에요, 네가. 뭐든지 하라. 네가 잘하는 거 있잖아. 자율. 뭐든지 해. 그런데 그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거예요. 앞으로도 의미 없는 것을 하라 이 말이죠. 그러나 뭘 해도 이게 의미 없다.
이 말을 제가 같은 뜻인데 다른 단어로 바꾸겠습니다. ‘주님의 활동으로 내가 뭘 하든지 아무것도 안한 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뭐냐? 평화! 평화입니다. 아무것도 안한 게 돼요.
지금 봐야 될 본문이 몇 개 남았어요. 사무엘상 19장 다시 봅시다. 24절,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되어있죠. 이게 뭐 사울 본인에게 무슨 의미 있습니까? ‘나 벗었다~’ 이게 의미 있어요? 의미 없죠.
지금 주님께서 사울에게 요구하는 건 그거에요. 네가 죽자고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는데 그 의미는 네 속에 있는 악마가 너한테 심어준 것이지, 악마가 너한테 시킨 게 없다고 쳤을 때 단독적으로 보면 네가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있든지 옷을 입든지 간에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는 선지자인데 선지자 특징은 자체적으로 아무 의미 없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선지자에요. 아무 의미 없음을. 내가 뭘 해도. 이건 뭐냐?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뭐든지.
짜장면 시켜먹든 미국을 가든 러시아를 가든 뭘 해도. 가든 안 가든, 갈라 했는데 또 교육청에서 돈 떨어졌다 해가지고 못 가게 되든, 뭘 해도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데 의미를 주는 순간 뭐가 되어 버립니까? 방해자, 하나님의 계약 완성에 대한 방해자가 되는 거예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와, 진짜 중요한 것 남아 있습니다. 열왕기상 13장 9절을 볼 텐데, 13장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선지자가 있어요. 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건지는 13장 제일 끝에 나옵니다. 미리 말씀 드리면, 선지자가 선지자 하는 게 아무 의미 없어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 이름 자체를 밝힐 가치도 없어요. 이름 더하기, 더하기가 아니고 이름을 빼는 거예요. 그 존재를 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존재 빼고 거기다가 이미 확실하게 완성된 계약을 집어 넣어버리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온 거예요. 우리 이름을 빼고.
어쨌든 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나중에 요시야라고 해서 이스라엘 왕 중에 대개혁해서 마지막에 신앙적으로 부흥을 일으킨 왕이 요시야입니다. 요시야 이후 유다 나라가 망하는데, 13장 2절,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예언을 했는데 실제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할 때에 여로보암이 화나가지고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했잖아요. 잡으라 했는데 팔이 왜? 팔을 좀 주물러야 돼요. 팔이 아파. 팔을 도로 접질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태도를 바꿔서 ‘살려주세요’ 했고, 다시 기도해서 살려줬어요.
그러니까 왕이 보통 사람 아닌 줄 알고 7절에 대접하려고 하죠.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그런데 8절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했어요.
그런데 이게 재밌는 게 9절에 보면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했어요. 이게 왜 희한하냐 하면, 주님의 지시, 하나님의 지시를 전달받을 때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주님의 지시가 주어지고 선지자가 지시에 대해서 지시가 이루어진 상황, 환경 속에서 선지자는 반드시 실패를 해야 돼요.
■“주의해. 그러면 안돼. 그러면 너는 안돼.” ‘안돼’ 할 때 우리는 보통 어떻게 됩니까? 정신 차려서 우리는 안하려고 하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나 율법이나 계명은 반드시 계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계명을 받은 자가 위반자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다이렉트로 연결돼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직접 연결되면서 중간에 인간은 위반자로 위반하고 빠지는 겁니다. 빼야 돼요.
물도 마시고 떡도 먹고 가라는 말을 주님이 먼저 선지자한테 했는데, 그 말을 누가 합니까? 여로보암 왕이 하는 거예요. 여로보암 왕이. 선지자 입장에서는 미리 예상도 못했죠. 그러니까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에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했다 하면서 10절에,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10절까지 보면 이 선지자는 제대로 말씀을 지킨 거예요, 안 지킨 거예요? 지켰죠. 그러면 선지자가 아니에요. 그러면 선지자가 아닌 거예요. 이 선지자는 자기 자신이 말씀 지킨 나와 말씀 안 지킨 나 사이에서 본성의 차이를 모르고 정도의 차이만 알고 있는 겁니다.
이렇습니다. 말씀은 위반을 통해서 내어놓아야 됩니다. 그래야 이게 말씀이에요. 말씀이 왔잖아요. 위반하는 나를 통해서 내 입으로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 잡다한 말씀들을 끌어 모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수요일 말씀처럼. 잡다한 죄인들이 모아져야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내(예수님)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지시가 먼저 있고, 지시가 먼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키려고 했지만 위반자로 드러나요. 지시를 지키려고 한 건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모른 상태에서 그러는 거예요. 반드시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모든 말씀은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뭐든지 해도 괜찮아요. 왜? 어차피 못 지킬 거니까. 어차피 못 지킬 거니까요. 뭐 장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선지자가 가는데 여기에 한 늙은 선지자가 등장해요. 늙었다는 말은 뭡니까? 아까 첫째 강의에 의하면 인간은 뭐로 산다? 인간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경험으로 산다. 체험, 경험한 게 기억이 되니까요. 경험 많은 선지자가 이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듣고 와서 아들한테 가서 “야, 빨리 그 사람 쫓아가라.” 쫓아가서 만났어요.
만나서 하나님의 사람이 하는 말이 17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했어요. 하나님께서 진짜 선지자, 이름 없는 선지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 만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 만나지 말라. 사람 만나지 않는 조건 하에 너는 내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사람 만나지 말라’하는 말은 어떻게 해야 돼요? 지켜야 돼요, 위반되어야 돼요? 위반해야 돼요. 왜? 상황을 그렇게 하나님께서 몰아넣었으니까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8절, 야, 18절 이거 정말 감동적이에요. 어디가 감동적이냐 하면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가 제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이거!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뭐함이라? “속임이라” 아니, 속인다고 속느냐? 예.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속인다고 속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아는 사람은 본성의 차이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속임수에요. 인간은 속임수 외에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인이 본인을 속였고 또 속이기를 기다리고 있고 속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드디어 속임을 당하고. 이게 인간입니다.
결정적인 게 아직 남아있어요. 이것가지고 놀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다시피 물 실컷 마시고 밥 먹고 해서 갔다 이 말이죠. 22절 보세요. 하나하나가 지금 어려워요. 22절, 이름 없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던진 벌이 뭐냐 하면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열조의 묘실, 선지자 계열의 그 특수한 공동묘지에 너는 못 묻힌다 이 말했거든요.
그리고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가니까 거기에 lion, 갑자기 짐승이 나타나서, 거기에 숲이 많은 모양이라, 짐승이 나타나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니” 사자가 보통 고기가 탐나서 죽였으면 시체를 뜯어 먹어야 되는데 뜯어먹지 않고 그냥 그 시체 곁에 서 있어요.
버린바 된 시체를 누가 거두느냐 하면 29절에,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했어요. 그리고 나서 자기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31절,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한 거예요.
자, 이 말은 뭐냐? 늙은 선지자의 희망은 뭡니까? 말씀이 임한 자의 죽음 앞에 자기가 붙어 있을 때, 나는 진짜로 말씀이 임한 자를 내가 인정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을 죽도록 누가 유도했죠? 본인이 유도했죠. 그럼 여기서 정도의 차이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나는 죄인 맞습니다’로 본성의 차이, 본질의 차이로 이 늙은 선지자가 여기에 들어온 거예요. 정도의 차이에서 본질의 차이로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선지자, 여로보암에게 찾아온 이 하나님의 선지자는 누구를 구원함이었습니까? 여로보암을 구원함이에요, 아니면 선지자 같지도 않은, 속임수만 쓰는 늙은 선지자를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진짜 선지자 죽어서 그 죽음으로 인하여 늙어 죽은 자가 구원받는 거예요.
구원이 뭐에요? 정도의 차이에서 말씀에 입각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 나는 그동안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 죄의 사주를 받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럴 때 왜 예수님이 죽어야 되고 예수님이 왜 자꾸 우리보고 너는 내 죽음에 합류하라고 했는지 비로소 그 내막을 아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나 스스로 잘나고 멋있어 보이게 하고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냈던 입법기능을 뭐로 바꾼 거예요? 이미 계약 완성,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로 바꿔치기한 겁니다. 교체되는 그러한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은 왜 구원받지 못하는가? 바로 이러한 정도의 차이와 본성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 여로보암 왕은 33절에 보세요.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되어 있죠.
도대체 뭐가 악한 거예요? 자꾸 성경에 구약에 악하다 하는데 도대체 뭘 두고 악하다 하느냐? 계약을 방해하면 악해요. 그 계약이 뭔데?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정치적으로 그럴 수도 있거든요, 정치적으로.
현재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남북으로 휴전선해서 갈라졌잖아요. 사람들이 자꾸 성전이 그리워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니까 나라 꼴이 안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강제로 김정은이 남한 드라마 보면 죽여버린다 하는 이유가 그거죠.
저쪽을 끊고 그 남쪽에 제일 가까운 성읍이 벧엘이에요. 단과 벧엘 두 개에다가 유사 성전을 만든 겁니다.(왕상 12:29) 그리고 제사장들이 남쪽에 있고 북쪽에 별로 없으니까 아무나 제사장을 자원하면 월급 줘서 제사장 시키는 거예요. 그게 악한 거예요. 하나님의 확정된 계약을 방해하는 게 악한 겁니다. 정도의 차이만 알았고 내 본성은 몰랐던 것, 이게 악한 거죠.
자, p.99 중간에 읽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이 한평생 촌에서 농사나 짓고 살았으면] 그다음에 뭡니까? [하등 죽일 이유는 없다.] 주님께서 권력이 집중된 그들에 의해서 죽은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힘과 힘이 모인 세상, 그것이 자기 뜻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이 다 이룬 것을 시기 나서 대드는 또 하나의 승리를 노리는 악마의 짓인 것을 깨달았사오니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아서 뭐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본성과 관련된 십자가와 관련된 일인 것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