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언약으로 교체

아빠와 함께 2024. 12. 29. 05:29

광주강의20241227a 사무엘하 9장 8절(언약으로 교체)-이 근호 목사


『기독교와 허상』 교재 p.143 <늘 충격적인 일>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고요. 정작 p.146 <예수님의 분노> 이 점에 대해 치중하겠습니다.

충격적인 일이라는 게 p.145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가복음 14장 26-27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버리고 왔다. 끝나나? 그게 아니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방금 읽었던 이 말씀은 이 두 자로 다 정리가 돼요. ‘교체’. 뒤에 뭐 붙는다면 교체 (작업). 나에게서 나 빼고, 뺀 빈자리에 언약 집어넣고. 이 작업이 교체 작업입니다. 나에게서 나를 뺀다는 것. 나 빼기 나는 수학에서 0이죠. 나-나=0. 나 전체가 나에게서 다 빠져나가야 돼요. 나 전체가. 나에서 나가 빠져나가면 이게 0이 아닌가 하는데 0이 아니에요. 0보다 더 큰 것 또는 더 넓은 것. 더 넓은 것이라는 게 낫겠네요.

나라는 것이 눈에 보이잖아요. 내가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내가 걸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나로 인하여 가리워지고 방해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곧 언약이 보이는 나로 인하여 가리워졌으니까 이걸 이제 빼는 겁니다. 이걸 빼버리면 내가 깔고 앉아서 그동안 나만 느껴졌는데 내 배후에 있는 그러한 말씀세계가 이제는 주께서 나를 나에게서 좀 치워라 해서 빼주니까 비로소 언약세계, 말씀세계가 보이는 겁니다.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릴 테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여러분 보시면 대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이제 힘들게 되었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추방되었고요. 생명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철두철미한, 철저한 배척이에요. 철저하게 배척하는 거예요. 들어오지 마세요. 철저하게 하나님이 인간을 밀어내는 겁니다.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철저한 배척이죠.

철저한 배척인데 마귀는 반대로 ‘죽어서 좋은 데 가야지.’하고 자꾸 뒤에서 밀어내요. 그러니까 인간은 양쪽에 끼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도 안 보이고 마귀도 안 보이니까 인간에게는 뭔가 여망, 기대, 소망 같은 것이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고 저절로 이렇게 생겨나는 겁니다. 저절로 소망 같은 것이 생겨나거든요.

철두철미한 배척을 하니까 이 배척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서 이렇게 하기 때문에 인간은 ‘나는 모르겠고, 나는 내 소망대로 움직이겠다.’ 하는 거거든요. 소망대로 움직일 때 그 출발점이 뭐냐 하면 선악입니다. 선악체계. 네모를 반으로 나눠 한쪽을 시커멓게 그리면 이걸 악이라 하고 하얀 쪽은 선이라 합시다. 인간은 선과 악을 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느냐 하면 이렇게 왔어요. 선과 악에 걸쳐서 대각선으로 이렇게 와버렸다고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은 어디에 걸쳐 있습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몸이니까 악에도 걸쳐있고, 육신은. 예수님은 또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어디에 걸쳐 있어요? 선에 걸쳐 있잖아요.

걸쳐 있을 때 예수님 자신이 악과 선 양쪽에 다 걸쳐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어떻게 일을 하시느냐 하면, 대각선 양쪽으로 걸쳐 있는 이 대목을 오려서 따로 떼어 내버렸어요. 떼어 내버리면 원래 있던 큰 네모(선악)에서 이 대각선 지점이 뭐가 되겠어요? 공백이 되겠죠. 공백이. 그렇죠? 종이가지고 중간에 떼내면 공백이 된다고요.

공백이 되어 버린 큰 종이를 ‘종이1’이라 하면 오려서 나온 것은 ‘종이2’죠. 예수님은 그 실체가 뭐로 되어 있습니까? 인간의 육신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같은 종이에요. 이걸 예수님은 인자(人子),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했어요. 사람의 육신이 나 주님의 재료가 되었다 이 말이에요. 종이2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주(主)가 될 수 없어요.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이잖아요. 이름인데 이 땅에 와서 사람의 육신을 적셔서 인간 속에 있다가 그다음에 인간과 완전히 무관하게 떨어져 나가죠. 인간과 떨어져 나가요. 떨어져 나가서 따로 단독적으로 오려진 이 세계, 인자의 세계가 따로 형성되게 되면 인자의 세계가 완성되고 이것이 아들의 나라,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예수님이 인간에게 철저히 배척받아야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에 인간은 갈 수가 없죠. 왜? 배척한 분이 따로 나가서 만든 나라가 천국이기 때문에 배척했다는 그 일을 함유한 채 만들어지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걸 저는 ‘철두철미한 배척’, ‘철저한 배척’이라 한 거예요. 생명나무 오지 말라고 철두철미하게 가로막았던 하나님의 취지가 천국에 그대로 살아있다는 말이에요. 천국에 살아있는 거예요.

이 작업을 통해서 p.146 제목 <예수님의 분노> 나오죠. 예수님께서 분노 또는 예수님의 진노하심, 예수님의 화내심 그것은 바로 철두철미하게 인간을 생명나무 오지 말라고 배척했던 그 뜻이고, 그 뜻이 지상에 펼쳐지니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는 거예요.

아까 봤던 p.145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뭐가 될 수 없다?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를 미워할 줄 모르는 인간을 나는 기어이 거부하고 밀어내고 배척하겠다는 뜻이에요. 자기를 미워할 줄 모르는 인간을.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분노하는 자, 자신이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인식을 하는 자만이 예수님이 만드신 천국을 이해하고 천국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인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떨어져 나옴으로써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악기준, 악마가 심어준 선악기준의 세계에서는 천국하고 만나는 게 전혀 없죠. 만날 수가 없죠. 완전히 다른 세계니까.

이 도표를 여러분들이 이제 이해하셨죠.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는데, 인간의 선악에서 이렇게 도려내셔서 예수님이 오셨다가 홀로 따로 빠져나가서 홀로 만든 나라가 천국이라면 이것은 인간이… 인간이라 하면 유대인이 대표입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이 뭘 줬습니까? 말씀을 줬잖아요. 언약이라는 것, 모세 율법이라는 언약도 줬다 이 말이죠. 언약을 줄 때 그들은 하나님이 공백을 남긴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아니면 공백은 꽉 채워야 된다고 생각하겠어요? 공백은 꽉 채워야 된다고 생각한 거죠.

공백은 남겨두면 안 된다는 겁니다. ‘빈자리가 있다면 우리의 의가 마저 채워지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가려면 비어있는 자리까지 우리의 의로움으로 채워야 된다. 그러면 그걸 근거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류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마귀 들려가지고 성전에 입각해서 말씀에 입각하여 그들은 이것을 ‘옳다.’ 또는 ‘진리다.’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에 입각해서 옳다, 진리다 했는데 이방인들은 이 말씀을 없애버렸어요. 말씀을 없애버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까 말했듯이 나가 나에게서 빠진다 했잖아요. ‘나’에서 빼기가 아니고 더하기를 하는 거예요. 지식으로. 더하기를 했을 때 나는 뭐가 남을까, 이걸 이방인들이 생각한 겁니다.

유대인들은 ‘나’가 있고 여기에 플러스 율법, 율법을 더해서 자기는 천국백성이 된다는 공식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나+율법=천국백성. 나에다 율법대로 실천에 옮기면 천국백성 된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율법을 인정하지 않아요. 왜 인정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율법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완전한 이성, 완전한 성스러움, 완전한 아름다움, 진선미, 완전한 진리성, 진리성이 이성이니까, 선함, 진선미, 내 속에 완전한 그것을 가지고 내가 계속 개발해버리면 무엇이 될까? 그것을 인간을 대표하는 서양철학에서 오랫동안 줄곧 해왔어요. 처음에 신학에 그걸 덧붙였고 그다음에는 과학으로 그걸 덧붙여서 보다 공백이 남지 않고 빈자리가 남지 않도록 인간이 아는 것으로 꽉꽉 채웠을 때 과연 인간은 어느 레벨까지 어느 수준까지 오를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자, 그 점을 먼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완전한 지성, 완전한 감성. 완전한 감성은 예술이겠죠. 완전한 지성은 과학이나 철학이 되겠고 또는 신학이 되겠죠. 이걸 쭉 서양에서 했는데 제가 서양 철학자 가운데 세 사람을 언급하겠습니다. 한 사람은 프로이트, 한 사람은 헤겔, 한 사람은 들뢰즈. 이 세 사람을 제가 거론해볼게요. 들뢰즈 또는 같은 부류로 라캉. 이렇게 하면 네 사람 되겠죠.

프로이트는 이걸 봤어요. 인간 욕망의 대상은?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뭐냐? 인간에게 욕망의 대상이 뭐냐를 이 사람이 연구하다가 그 사람이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욕망의 대상이 뭔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거예요. 욕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요. 욕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유아기, 아빠 엄마가 있을 때 유아기의 상황이 인간의 욕망을 만든다는 거예요. 이 상황에서 욕망을 만들면서 욕망의 대상은 뭐냐? 아버지의 훈계. 이 아버지의 훈계를 프로이트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항상 내가 본받아야 될 내 자아, 내가 본받아야 될 절대적 대상, 초자아라고 이야기했고 이 초자아는 아버지의 훈계,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렇게 본 거예요.

프로이트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인간이 행동하는 것은 어릴 적 상황에 대한 미흡함, 그 미흡함에 대한 나름대로의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 가정상황에 대한 복수.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가족들이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가족이. 가족이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죠.

왜 사람마다 다른가? 그쪽이 태어날 때 그쪽 가족상황이 그 사람을 그런 식의 인간으로 만들었고 내 쪽 상황은 내 식대로 만들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들어보니 일리가 있습니까? 장로님 어릴 때 어떤 상황이 장로님 되게 만들었어요? 문제점이 있어요. 문제점은 뭐냐? 각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 거예요. 모든 사람은 똑같다,가 아니라 열 명이 있으면 열 명 다 다르다. 왜 다를 수밖에 없어요? 가정환경이 다르니까 다를 수밖에 없죠. 자신의 과거가 다르니까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프로이트의 욕망이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 팔 휘두르기로 살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이걸 흔히 말해서 다양성이라 해요. 인간은 자기 욕망이 있다. 자기가 문신을 하든 말든 담배를 피우든 동성애를 하든, 이건 내 마음대로다. 너는 너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면 되잖아,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왜 시집을 안 가느냐? 가든 말든 내 인생이다. 장가를 왜 안 가? 가든 말든. 장가를 꼭 외국 여자랑? 외국 여자랑 하든 말든 내 취향인데 부모라고 간섭하지 마세요.

유아기의 상황인데 라캉은 이걸 받아서 뭐를 발견했느냐 하면 ‘욕망의 대상은 없다’가 되어버려요. 왜 ‘없다’가 되느냐? 아버지의 이름으로 했는데 이 아버지가 허상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허상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 때문에 이렇다’ 이걸 라캉은 ‘상징에 불과하다’ 한 거예요.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은 허구다 이 말이죠. 허구인데 아무것도 없는 허구라 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이건 중요하니까 빨간 걸로 쓸게요, 라캉은 ‘결핍’이라고 합니다. 욕망의 대상은 뭐냐? 결핍이에요. 뭔가 빠져있는데 뭐가 빠졌는지 본인도 몰라요. 뭘 채워야 될지 본인도 모르지만 어쨌든 간에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냥 목말라. 목말라요.

한대수라는 나이 70넘은 가수가 불렀던 노래 가운데 있었어요. ‘물 좀 주소’. 옛날 한창 운동권 노래할 때, 물 좀 주소~ 시대가 정치 상황이 안 맞으니까 갈증을 느껴서 목마르다. 물 좀 달라는 거예요. 목마른 광야에서, 그런 운동권 노래 많이 있지 않습니까. 결핍한 것을 정치권에서 채워줘야 정치 본연의 임무를 다 하는 게 아니냐 그겁니다.

그럼 얼마나 채워야 돼요? 물 한 바케스? 한 탱크? 라캉은 계속 연구해보니까 욕망의 대상 자체가 없다는 거예요. 상징이라는 말은 그냥 그림으로만 장식되어있고, 그림은 실제가 아니잖아요. 세잔의 정물화에 실제 나오는 사과가 있지만 그 사과는 못 먹어요. 그림 속에 있으니까. 그와 같이 우리는 그림에 둘러쳐져 있는 거예요. 가상이에요. 그냥 그림이에요. 이미지에 둘러쳐진 세상이지요.

‘아버지, 아버지’ 하지만… 지금 다시 돌아가서 ‘나 복수할 거야. 아버지가 나한테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나중에 97살 돼서 온 아버지 멱살 쥐고 흔들 수가 없어요. 왜? 흔들면 부서질 것 같아. 그렇게 내가 욕하고 싶고 복수하고 싶은 아버지는 왜 그리 힘이 다 빠졌는지. 이제는 먹여 살려야 될 대상. 다시 말해서 내 욕망의 대상 자체가 아니었었어요. 전혀, never, 전혀 욕망하고 싶은 대상 자체가 아니었었어요.

왜 그런데 어릴 때 아버지가 그렇게 뭔가 라이벌처럼 느껴졌는가? 그건 내 쪽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내 쪽이 세상을 몰라서 그래요. 나는 진심을 다하는데 그쪽은 나에게 뭘 준다? 상처를 주네. 왜? 이유가 뭡니까? 내가 세상을 몰랐나보오. 내가 몰랐던 모양이에요, 세상을.

아버지의 한옥집이 대단해보였는데 자기가 나중에 비트코인 대박 나고 난 뒤에 ‘아휴, 그것도 뭐 집이가? 그거 뭐 두 채는 살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내가 기대했던 목표지점을 나는 허탈해하면서, 또 새로운 목표지점을 향하여 흘깃 보고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새로운 욕망의 결핍에 목말라하면서 찾아야죠.

그런데 라캉은 찾아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왜? 찾아봤자 전부 다 허구,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이미지에 불과하다. 정작 욕망의 대상은 상징적인 이 세상에 있는 게 아니고 실재에 있다. 그런데 실재는 무슨 뜻인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욕망의 대상은 없다는 뜻이다. 이게 라캉이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들뢰즈는 뭐라고 하느냐면, 라캉은 욕망의 결핍을 메꾸면서 욕망할 것, 목표를 자꾸 찾아가려고 하는 이것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데,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그걸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욕망을 생산하면 그것이 곧 세계요, 전체 세계라고 보는 거예요. “평생 동안 죽을 때 죽는 값이라도 너 하고 싶은 거 다 했잖아. 그게 우리 욕망이 고대하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목표를 잡지 말고 내가 여기서 뭔가 움직인다는 것, 내 욕망에 휘둘린다는 그 자체를 좀 좋게 보면 안 돼?” 이게 들뢰즈 철학이에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걸 고대할 게 아니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들뢰즈는 욕망을 긍정하죠. 욕망을 긍정한다는 말은, 내가 나에게 나를 신용한다는 뜻이에요. 신용은 모든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에요. ‘내일 줄게. 오늘 돈 빌려 줘.’ 이게 신용이거든요. 신용 없으면 은행에서 돈 못 빌리죠. 담보가 있어야 되니까. 이게 신용체계입니다. 신용체계가 자본주의 체제에요. 그래서 신용한다는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누가 신용한다? 내가 신용하는 거예요. 내가. “뭐 믿고 너한테 돈 1억을 빌려줘?” “날 믿어라. 내가 하고 싶어 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믿고 돈 1억 빌려 달라.”

그러면 자살은 언제 합니까? 언제 자살하죠? 본인이 본인을 믿을 게 전혀 없을 때 자살하죠. 본인이 본인을 더 이상 못 믿겠다 할 때 자살하는 겁니다. 그래서 들뢰즈가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자살해서 죽었어요. 호흡기 빼고 죽었어요. 빼고 병원 창문 열고 5층에선가 뛰어내려서 죽었습니다. 평생 누구 믿고 살았어요? 나 믿고 살았어요. 나 믿고. 꼭 일본 이름 같죠? 나 믿고.

모든 인간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를 믿어요. 예수 믿는 내 믿음을 믿고 사는 겁니다. 전부 다 ‘나 믿고’에요. 그래서 수요일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 자기의 욕망이 자신을 자살로 이끈다. 자기의 욕망이.

여기서 여러분들은 갈등을 일으키죠. 라캉 쪽이 맞는지, 들뢰즈 쪽이 맞는지. 어느 쪽이 맞는지. 때로는 라캉 같기도 하고, 때로는 들뢰즈 같기도 하고. 헤겔 이야기 안했거든요. 헤겔은 인간의 욕망을 ‘남한테 인정받는 것’이라 했어요. 헤겔은 욕망을 설명하면서 타인을 빌려와요. 타인.

전부 다 관련성이 있어요. 프로이트가 말하는 유아기에서 어린아이 양육할 때 당근 아니면 채찍이죠. 채찍을 때릴 때도 당근을 준다는 조건 하에 때리는 겁니다. 네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네가 이제 기저귀에 오줌 안 싸고 화장실 가게 되면 내가 맛있는 케이크 줄게. 그런데 또 오줌 싸면 너는 이제 맞는다. 생각의 방에 가서 혼자 의자에 앉아 벽보고 있는다.” 뭡니까? 선과 악이죠. 선과 악. 아까 도표 봤죠? 선과 악. 악에서 벗어나서 선의 자리를 유지하는데 악의 자리에 가게 되면 후딱 선의 자리로 와야 된다. 선과 악 둘 중에 하나를 해야지, 둘 다 걸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둘 다 걸친 분이 누굽니까? 아까 했듯이 예수님이 둘 다 걸쳤죠. 둘 다 걸쳤지만 둘 다 걸친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받는 방식으로 배척을 해버렸죠. 하나님이 인간에게 배척받도록 유도해서 기어이 하나님께서 인간세계 전체를 배척하는 결과를 내겠다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 쪽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악마를 영원토록 지옥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죠.

헤겔은, 유아도 마찬가지지만 타인을 더 동원시켜서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바로 욕망의 대상이라 본 겁니다. 그런데 그 인정받는 내용이 뭐냐? 인정받는 내용이 굉장히 모순돼요. 이 모순된 이야기를 헤겔도 해결 못했어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데 인정받는 그 내용이 뭐냐? 어떤 경우에 인정했느냐 하면, ‘네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인 것을 알아라.’ 여러분들 이게 안 맞는다는 느낌 들지 않습니까?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데 인정받는 내용이 뭐냐?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인 것을 인정한다면 내가 너를 칭찬해줄게.’ 이게 자율입니까?

엄마가 경상도 말로 단술이라 하는 식혜를 생강 띄우고 맛 예쁘게 해서 딸한테 줬을 때, 딸이 하는 말이 “엄마, 요새 뭐 일 안하고 집에서 노니 심심한 모양인데 앞으로 이런 거 해가지고 오지 마세요. 이거 먹을 사람 없습니다.” 이렇게 할 때 막 기분 좋던가요, 엄마가? ‘아, 진짜 오늘 나 너무 기쁘다.’ 이렇게 되던가요? 어떻습니까? “이것들이 말이야. 엄마를 무시하고.” 갑자기 분노가 나타나죠. 분노가.

분노가 나타난다는 말은 그만큼 내가 자율적이란 말입니까, 타율적이란 말입니까? 남을 의식하고 있잖아요. 자식이 나한테 “엄마, 전보다 더 맛있는 거 같아요.” “더해줄게. 더해줄게.” 이렇게 된단 말이죠. 남에게 놀아나는 나. 딸자식한테 인정받는 나. 엄마는 사는 보람을 얻게 됩니다. 해맑게 엄마는 웃죠. 웃는다는 말은 일시적이나마 욕망이 충족되었다는 뜻이에요. “선생님, 너무 잘 가르쳐요.” 할 때, 가만있어 봐. 내일 좀 일찍 가야겠다, 학교에.

모든 타인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남으로부터 인정받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최고에요’라는 거예요. 당신이 최고입니다. 헤겔이 보기에 인간의 욕망은 인간이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이 되는데 이 신은 어떤 신이냐 하면 나와 똑같이 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신이라고 인정받는 그런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부정을 통해서 타인에 의해서 내가 트랜스포머, 내가 나라고 하는 게 없이 타인이 요구하는 대로 맞춰주면서 내가 트랜스포머, 변형되는, 타인의 상황에 의해서 변형되는 내가 될 때 나는 비로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기 때문에 이게 바로 나라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욕망이라는 겁니다.

아까 라캉하고 비슷하죠. 타인의 세계라는 것은 상징적인 세계. 이미 기성에 있는 세계. 이 이방 철학가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은 여기 어디에 해당됩니까? 지금 이방인들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이 탐구하고 연구한 지식에서 나왔잖아요. 이성적인 지식, 지식이잖아요. 선악적인 지식이잖아요. 아까 말씀 빼고 내 속에 있는 것가지고 나를 분석하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뭘 동원시켰습니까? 차이점은? 율법을 동원시켰죠. 율법을 동원시켰는데 율법의 취지에 대해서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마중을 나갑니다. 방금 이렇게 자기 분석된 자아를 가지고 율법을 자기 소유화시켜서 나는 율법을 잘 지켰으니까 원하는 대로 지켰으니까 나는 천국백성이 된다고 자부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종교적이죠. 종교라는 말은 결국은 신으로부터 인정받을 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신이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유대인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악마다.” 너희 아비는 악마다. 너는 마귀의 자식이다. 악마의 자식이다. 악마의 자식이 할 일이 있어요. 하나님을 죽이는 일을 해야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주님께서 오시는 이유가 이겁니다. 진리라는 것은 라이벌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그들 속에 눈에 보이는 육신 배후에 예수님의 라이벌이 이미 있었던 거예요. 라이벌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설명할 것은 오늘 강의 가운데 좀 어려운데 이 대목에 우리가 일단은 도착했습니다. 어떤 어려운 대목이냐 하면, ‘존재하지만 부재한 것으로 보이는 것.’

아까 그 도표에서 악과 선. 인간 내부의 마음은 악과 선으로 되어 있다.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그런데 여기 인간 속에 와서 대각선 네모를 따라 도려내버리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부재한 분’ 이렇게 되죠. 마치 이순신 장군처럼.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부재한 분, 이렇게 되죠.

마리아가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막 울었잖아요. 왜 웁니까? 사람이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 치웠는지 몰라서 운다는 거예요. 결국 마리아는 진리를 모르죠. 왜? 라이벌이 없는 거예요. 라이벌이. 자기가 절대적 존재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진리 개념 자체가 항상 자기를 삭제한다는 생각은 없고, 기어이 기어이 내가 있어야 그다음에 무슨 말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진리가 되든 생명이 되든 영생이 되든 일단 내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부재했어요. 물론 그 뒤에 나타나서 “울지 마라.”하고 만지려 하니까 “만지지 마라. 아직 나는 아버지께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만질 게 아니다.” 벌써 부활체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는 안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나타나신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철두철미한 배척을 실현시키기 위함입니다. 철두철미한 배척을 실현시키기 위함이에요.

예수님이 무덤에 없다는 사실을 두고 ‘아, 예수님이 부활했구나.’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말은 뭐냐? 인간은 자체부터 오류가 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오류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존재하지만 부재하시는 분으로 오시는 거예요.

존재하지만 동시에 안 계신 분이 되는 거예요. 이걸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안 계신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안 계신 분으로 왔는데 사람들은 “랍비여”하면서 계신 분으로 인식한 거예요. 예수님은 실제로 계시다고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내 속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본인이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어떤 게 와도 자꾸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확인하는 식의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교회에 교인 오천 명이 있다면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면 오천 명 다 지옥 가는 거죠. 철저한 배척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에는 거기에,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분으로서의 존재라는 내용을 담고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말씀 하나하나가 인간에게 시비 거는 말씀인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분노가 담긴 말씀들이에요.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 천국백성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물으면 그건 주님의 분노가 담기면 되죠. 나에게서 나를 빼내고 빼낸 빈자리에 주님의 분노가 담기면 돼요. 어떤 식으로 분노가 담기는가? 말씀이 오면 되죠. 말씀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이 말씀이 말씀 자체가 지닌 욕망이, 전에 내가 부모로부터 있던 내 자리를 대신하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참 쉽죠.

은혜 받았다는 말하지 말고, 내 안에서 지금 무슨 말씀이 다시 오늘도 몇 번이나 나를 지적했다. 어떤 사람은 말씀 네 개가 네 번 지적하는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말씀 한 개 가지고 날 지적하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6년 8개월 동안 한 번도 지적 안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는 문제고.

은혜 받은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 천국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이렇게 지적해주는 거예요. 주님의 분노가 지적을 해줘야 내가 나를 그 순간만큼은 포기할 수가 있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서 손을 뗄 수가 있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그걸 못했습니다. 말씀을 지키기 전보다 지킴으로서 나의 의가 더 추가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유대인만 그렇겠어요?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이 와서 당신을 지적하던가요?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를 저도 봤습니다만, 머리에 꽃 꽂고 있는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한 여자가 좋다고 환호를 하죠. 수류탄이 터졌는가 뭐가 터지니까 팝콘이 팍 터져가지고 온 하늘에서 팝콘 눈이 막 내리잖아요. 그 팝콘 하나하나가 말씀이라고 보세요. 버터 향기와 더불어서 그게 우리 안에서 팝콘이 터지듯이 말씀이 터져버리면 그 순간만큼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주께서 일체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해요. 사랑은 우리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분노도 어디에 담기느냐? 말씀에 담겨요. 말씀에 담겨서 하나님께서 분노로 터트리면 그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터트리면 저주 안에 사랑이 나옵니다. 저주 안에서 사랑이 나와요.

충분히 짓밟을 것 다 짓밟고 충분히 죽일 것 다 죽였다는 하나님의 자기만족이 사랑이거든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면 출애굽기 11장, 12장에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천사들이 하는 일이 뭐냐? “이 집 맏이 죽었대.” “죽었어? 아, 주님께서 만족하겠다. 야, 빨리 지나가자! 넘어 가. 넘어 가.” 이게 유월절(Passover), 넘어가는 절기잖아요. “이 집은 됐고 다음 집 가자. 다음 거 맏이 또 죽이러 가자.” 넘어갔단 말이죠. 왜 넘어갑니까? 충분히 짓밟았기 때문에. 충분히 죽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넘어간 히브리 가정에서 넘어가도록 무슨 조치를 했습니까? “우리 집에 이미 우리 아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죽었어요.”하고 죽었다는 표를, 그냥 죽은 아들의 피를 바르는 게 아니고! 그런 실수하면 안돼요, 죽은 아들의 피를 바르면 안 되고, 죽은 아들을 대신해서 죽었던 어린 양의 피를 바르죠. 어린 양의 피를.

죽은 아들의 피를 바르는 그 실수가 바로 수도원, 수녀원들이에요. 기도원이고. 강원도 기도원 예수원 있죠. 그런 데서 하는 실수가 뭐냐 하면 자기를 비우는 거예요. 자기를 비운다고 난리도 아니야. 왜 자기를 자꾸 생각해요? 뭐할라고? 그런 신비주의는 이슬람, 불교, 티벳 불교, 기독교, 천주교 다 있어요. 그런 거. 자기를 비우는 방법 중 하나로 열혈사제도 있어요. 마약상하고 한판 싸우면서 자기를 비우는 방법도 있다니까요. 화염병 들고 비우는 방법도 있고. 탄핵하라고 외치는 그런 방법도 있어요. 자기를 비우는 거.

그런데 유월절 어린 양은 이미 밟을 대로 다 밟았다는 자기만족이란 말이죠. ‘내가 어떻게 했습니다.’가 아니라, ‘심판 전에 우리 집에 먼저 와서 이 분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그게 유월절이라는 말씀이에요. 말씀이 먼저 왔거든요. 말씀이. 그러니까 천사의 심판 이전에 뭐가 먼저 왔어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먼저 왔잖아요. 그 계명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현실이 들어있죠.

오류가 많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계, 이미지인 현실, 가짜 허구적인 현실 말고 진짜 현실은 주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어요. 일종의 팝콘이고 강냉이지만 그걸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로 터트려지는 이유가 예수님이 그 경과를 겪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 온 자는 누구든지 아버지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 필연성을 말씀 안에 담고 그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저주로 전달함으로써 우리에게 사랑이 임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도 만족스럽고 주님이 자기백성을 사랑하는 것도 만족스럽고. 그런 조치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라는 존재가 특이한 존재가 되죠. ‘이 땅에 존재하나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이 땅 말고 다른 데 이미 빼돌렸다.’가 되는 거예요. 부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이것은 크게 써야 돼요. 그 존재가 바로 ‘천사’같은 존재. 천사 같은 존재에요. 이것은 영적 존재 또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영적 존재 또는 영에 속한 사람. 다른 말로 하면 말씀세계 안에 들어온 사람. 10분 쉽시다.


** 강의 중 도표는 첨부파일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광주강의20241227b 사무엘하 9장 8절(언약으로 교체)-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기독교와 허상』 <예수님의 분노> p.147 위에서 4번째 줄에 보면, [세상에 대해서 분노할 줄 모르는 것은 자기 내부에 들어 있는 악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마귀에게 너무 관대한 것이다. 모든 행위 하나 하나에 변명의 꼬리표를 달아 준다. 습관처럼 반복한다. 실수는 감추고 장점은 드러내면서 철저하게 숨죽이며 사는 방식에 몸을 맡긴다.]

여기에 보면 ‘마귀에게 너무 관대하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게 인간한테는 참 이해가 잘 안 되는 대목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렇죠. 영적 존재니까. 첫째 시간 끝에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를 무슨 존재로 봤습니까? 영적 존재로 봤어요. 존재하면서 부재하고,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상태. 마치 천사와 같은 거예요.

천사와 같다 하면 사람들은 자꾸 형태, 형체, 눈에 보이는 그것으로 천사 흉내 내려고 하고 그것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구약에서는 천사의 모습이 뭐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요. 천사의 기능, 천사가 하는 할 일, 역할, 여기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어요.

천사가 하는 일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심판, 사랑 둘 다 전달하거나 실행하는 자’. 아까 유월절 했죠. 유월절 그때 누가 죽입니까? 천사가 와서 죽이죠.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과 다른, 다른 세계에 소속된 신분자이죠. 신분자가 하는 일은 심판과 사랑을 다 합니다.

사랑 같은 경우에 가브리엘. 또는 삼손 아버지 마누아 가정에 찾아온 것. 천사가 되게 바빠요.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천사, 야곱에게 찾아온 천사. 상당히 뭔가 쉬지 않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에서 이 천사의 기능과 할 일을 신약에서는 누구도 해야 된다? 바로 성도. 영적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같은 영적 존재이고 같은 나라 존재잖아요. 그래서 같은 일을 부여받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라서 이미 인간 속에 오류가 있어요. 오류가 있기 때문에 영적인 것은 전혀 모르고 육적인 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육적인 것만 생각하는데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뭔가 내 육적으로 관리가 안 되고 통제가 안 되는 게 있다 했죠. 그걸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욕망. 욕망의 대상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은 어떤 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신이 되는 것. 그런데 그 자체가 모순된다 했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신이 되면 되는데, 그걸 ‘나는 독립적이다. 자율적이다.’ 교도소 갇혀가지고 외친 인물이 있어요. 실제 인물은 아니고 소설에 나온 인물이 있어요. 그 인물이 바로 카뮈가 쓴 <이방인>에 나오는 인물이에요. 엄마 죽이고 난 뒤에 자기는 사형 날짜를 기다리는 중에 창틈의 별을 보면서 ‘그래. 나는 자유자야.’ 그런데 이 자유자가 되기 위해서 부조리가 뭡니까? 갇혀야 비로소 자유를 아는 이 부조리.

쉽게 말해서 해답을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도대체. 왜 인간이 이 지경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세상에 살면 자유가 없고, 세상에서 일 저지르고 교도소 가게 되면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던 별의 처량한 신세나 내 신세가 동일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처량한 신세가 비로소 내가 얻고자 했던 자유 같은 게 아닌가, 욕망의 대상이 드디어 멈춘 게 아닌가 라고 소설책에서만 그렇게 이야기해요. 소설로만. 너 한번 갇혀보지. 그게 자유인지. “나가기 싫어?” “나가고 싶어.” 이럴 건데요.

인간의 욕망은 도대체 인간이 파악 안돼요. 괴물 같은 거라서 인간 자체로서는 파악이 안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구약에서 천사가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구약 이스라엘에게 뭘 줬습니까? 아까 말씀을 줬다 했죠. 말씀을 주게 되면 말씀으로 인하여 말씀 안과 말씀 밖이 발생되는 거예요. 말씀 밖은 뭐냐? 참혹한 저주와 심판이 있고, 말씀 안에는 사랑이 있죠.

자, 사랑은 뭐라 했어요?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한다 했죠. 모든 것을 용납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행동에 준해서 사랑을 할까, 말까가 성립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태어났어야 뭘 하든지 하는데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스라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원칙이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게 되면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 사랑을 가리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천사가 부지런히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할 수밖에 없죠. 결국 심판해주는 것이 사랑 작업이다. 이 작업을 누가 합니까? 천사가 하는 거예요.

그 언약이 이제는 이스라엘 내부에 스며들어야 되거든요.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사랑의 열매라는 것이 증명될 테니까요. 이스라엘 백성에 스며드는 예를 지금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사무엘하 4장 4절,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므비보셋이라는 이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아까 프로이트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나 됨이 자기가 결정한 겁니까? 자기 의지로 절기로 선택한 거예요? 선택하거나 결정한 건 없어요. 유모가 자기를 안고 있다가 떨어뜨렸단 말이죠. 황급해서. 다리 하나라도 좀 멀쩡하면 좋겠는데 둘 다 다 절어요. 둘 다. 한쪽은 절고 한쪽은 괜찮은 게 아니라 둘 다 절게 된 장애자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출발부터가 어때요? 타인 의존적이에요.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윗 언약, 언약 안에 뭐가 들었다 했습니까? 심판도 들어있고 사랑이 들어있죠. 사랑. 요나단과 다윗이 언약을 맺어서 ‘네 집안의 사람 내가 언약 맺어서 사랑해줄게.’하고 언약 맺은 게 있어요. 그 언약 맺어서 므비보셋에 대해서 나중에 다윗이 그만한 여력이 될 때에 철저하게 보살펴주었습니다. 잘 보살펴주었거든요.

사무엘하 9장에 그 이야기가 나와요. 나오는데 우리가 9장 8절을 주목해봐야 돼요. 앞에는 다윗이 ‘도와줄게.’라고 하면서 잘 대해주죠. 7절에 보면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그래서 므비보셋이 비록 요나단의 아들이지만 다윗이 자기 아들로 여겨서 왕자들과 같은 상에서 먹도록 그렇게 조치를 했습니다.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그때 8절에 보면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그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9절에 “왕이 사울의 사환 시바를 불러서 이르되 사울과 그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저를 위하여 밭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을 공궤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먹으리라 하니라”라고 하고

11절에 “시바가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온갖 일을 종에게 명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라고 했단 말이죠. 13절에 “그(므비보셋)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의 언약 안에 있는 내용 중 하나가 므비보셋이라는 존재를 등장시켜서 이 존재가 어떻게 생각하게 되면 자기 입장에서 남들과 비교해서 저주받은 모습 아닙니까? 내가 선택하지도 않게 내 신체가 다섯 살 때부터 철저하게 불구가 되었고 두 발 다 저니까 내가 나서서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내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 계획 자체가 좌절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므비보셋이라면 이 원망을 누구한테 하겠습니까? 누구한테 하겠어요? 이 원망을 상식적 입장에서는 하나님한테 해야 돼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조져놨다는 거예요. 그럼 이것은 헤겔에 의하면 하나님과 나는 무슨 관계? 라이벌 관계가 되는 거예요. ‘내가 신이 되는데 하나님이 나를 방해했기 때문에 내가 신을 미워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담의 자손으로서 당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어야 돼요.

그런데 아까 우리가 본 것처럼 사무엘하 9장 8절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이참에 밥이나 먹고 살려고 ‘권력은 다윗한테 있으니까 잘 보이면 나는 이미 불구자니까 내 힘으로 못 사니까 한번 빌어먹고 기대서 한번 살아봐?’라는 정책적인, 정략적인, 정치적인 어떤 결정을 자기가 내린다면 이건 죽은 개입니까? 아니죠. 죽은 개가 아니죠.

‘다윗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어떤 조치든 나는 그냥 받겠나이다.’라고 한다면 므비보셋에게는 신이 라이벌이 돼요, 안돼요? 신은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께 종속된 겁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 또는 다윗을 통해서 어떤 일이 나에게 주어지는지 그것만 기다리면 되죠. 그렇겠죠?

그런데 그 일이 아주 참담하니이다. 참담한 일이 있어요. 사무엘하 19장에 보게 되면 19장 24절,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아, 이게 장애자라고 다 이런 마음가짐입니까?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어떤 조치든 나를 이미 죽은 개처럼 여길 때나 가능한 일이에요. 이런 므비보셋의 존재는 언약이 품고 있는 사랑 있잖아요, 그 사랑 속에 있다는 말은 남들 보기에 혹독한 인생이라는, 남들 보기에 이건 저주를 받아도 엄청난 저주를 받았다는 그러한 상황이 뒤집어씌워진 가운데서도 사랑은 조금도 죽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거예요.

계속 보면 19장 25절,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저에게 물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26절,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여기서 므비보셋과 정반대되는 성향을 지닌 자가 등장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시바에요. 시바. 하여튼 이름도 시반데 시바는 정략적입니다. 계산적이에요. 자기 주인은 장애인이고 자기 주인이 왕에게 보훈 대상이 되어서 막대한 수익이 들어오니까, 이참에 장애인 주인이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시바는 자기가 빼돌릴 생각을 한 거예요. 그야말로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20년 식모살이하면서 독약 먹여가지고 치매 걸린 주인 죽이고 주인 재산을 자기 앞으로 이름 등기한 것, 사랑과 전쟁2에 나오는 그 이야기.

그런데 ‘더 참담하니이다’하는 상황이 벌어져요. 이렇게 하니까 다윗이 시바한테 화를 내고 “이 못된 것” 이렇게 해야 ‘드라마를 끝까지 시청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이게 성립되는데, ‘그동안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이래야 유종의 미를 거두는데, 이게 아니고 다윗은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누구 말이 맞는지.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를 땐 어떻게 합니까? 여기 쪼개기 또 나와요. 솔로몬 재판할 때 애를 쪼개라 한 것이 솔로몬의 영특한 재판 아닙니까. 영특한 재판. 쪼개버려. “쪼갬에 동의하는 사람? 동의 안하는 사람? 쪼개버려.” 하는 것처럼 여기 29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다윗 왕이 전번에 시바 말만 듣고 “그 못돼먹은 므비보셋. 세상에, 은혜를 줬음에도 이제는 자기가 권리인 줄 아는 모양이다.” 이래가지고 심히 화를 내었던 다윗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다윗은 내가 잘못됐다는 것을 긍정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계엄은 계엄이다. 통치적 행위다, 통치적 행위. 그럼 끝나는 거예요. 전~혀. 그거 반성할 마음 전혀 없어요. 남자가 술 먹고 내린 판정인데 술 먹고 내린 그것이 얼마나 정당합니까. 다윗이 똑같아요. 뭐 상황 전후를 알아볼 생각을 안 하고 알아보는 게 아니고 무엇이 진실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왕의 권위가 더 중요해요. 솔로몬도 마찬가지에요. 쪼개라. CCTV가 있습니까. DNA 조사하면 금방 나올 걸, 그 시대에 DNA 조사가 되었습니까. 그냥 깨끗하게 쪼개라. 얼마나 무책임한지. “나는 모르겠고.” 이 말이거든요.

“그래, 시바와 밭을 나누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다음이 문제에요, 이제. 그렇게 되면 “나 드라마 안 본다.” 이렇게 되는데 그다음에 드라마 아닌 현실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30절에 야, 이런 구절이 있다니. 우리는 그동안 성경을 너무 얕본 게 아닙니까?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야, 이거 뭡니까? 이게 뭐에요? 이게 아까 빨간 걸로 쓴 ‘천사’ 기능입니다. 천사 기능 다시 이야기합니다. 존재하나 부재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부재하나 존재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은 존재하려면 이 땅에서의 존재는 반드시 소유가 있어야 돼요. 내 것이 있어야 돼요. 내 것이라는 말은 재산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집. 내 것이 있을 때나 비로소 우리는 동의할 수가 있어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내가 수긍이 되고 내가 증명이 돼요.

그러면 내 것이 있으면 내 것 안에서 내 것이라는 아지트 안에서는 내가 뭐가 됩니까? 신이 됩니다. 절대자가 돼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 바깥에는 뭐가 있느냐? 각자의 아지트가 있는 거예요. 자기를 위한 벙커들이 말씀 바깥의 세계에 있어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한테 제가 묻죠. “혹시 어제쯤 말씀이 우리 집사님 내부에서 팍 터져서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내 재산은 시바가 다 가져가고 나는 그냥 주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의 분노와 사랑이 섞인 말씀이 팝콘 터지듯이 터졌습니까?” 물으면 “그런 적 없는데요.” “그러면 한 2년 전에도?” “2년? 10년 내에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 12년 전에 있었습니까?” “12년 전에 기도원에서 울면서 한번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말씀이 나를 장악해서 말씀 안에 있다면 나는 움직이지 않아요. 말씀이 언약대로 움직여서 우리가 거기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그런 조치가 일어나는 겁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죠. 불가능한데 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나는 너한테 일체 책임 묻지 않고 용납하겠다는 그 사랑이, 말씀에 의한 저주와 심판과 그리고 진노를 퍼붓고 난 뒤에 그 안에 사랑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30절에 보면, 임금이 다시 온다면 제게 아무것도 없어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존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꽂힌 것은 다윗언약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종 메시야로 이미 기름 부은 다윗 임금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내 존재를 대체하는 겁니다. 대신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약 때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이걸 저는 천사 기능으로 보는 거예요. 천사 기능. 악마 빼놓고. 천사 기능인데 천사 기능을 언급한 이유가 이 천사 기능과 정반대의 천사가 누굽니까? 악마잖아요. 그 악마가 지금 누구를 인질로 잡고 있습니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요. 인간 내부에 선악 지식을 심어놔가지고.

그래서 악마는 존재하지만 부재해요. 존재하는 것은 뭐만 존재해요? 그냥 악마의 앞잡이 인간들만 존재해요. 우리들도 포함해서 인간들만 존재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네 속에 있는 악마의 그 영적 존재를 주님께서는 겨냥하시고 일차적으로 말씀으로 뭘 공격합니까? 모든 말씀으로 우리를 진노하고 우리를 분노하고 저주하고 심판하는 기능을 하시는 겁니다. 이걸 저는 ‘말씀이 내부적으로 터졌습니까?’ 하는 거예요.

뭐 사기당해서 돈 한 2만원 떼였다. 한 달에 천 억 버는 사람한테 2만원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2만 5천원 일당 받는데 2만원 떼이면 보통 아픈 게 아니죠. 2만원 떼였다. 나 고만 살래. 왜 그만 산다고 생각합니까? 2만원이 나의 존재를 증명해줄 재료잖아요. 그런데 2만원 재산이 날아갔잖아요. 그러면 누가 누구한테 신용을 줄 수 없습니까? 내가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내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굳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없죠. 내가 나를 못 믿으니까 살 가치가 없죠.

그런데 그때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아라.’ 디모데전서 6장 말씀이 온다면, ‘아차. 내가 영적으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눈에 보이는 내가 나를 다룬다는 생각으로 또 여기에 머물러 있었군요.’라는 생각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뭐 성령 받아야 올라오지, 안 받은 사람은 올라오지도 않아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제가 수천, 수만 차례 했는데 그때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죠. 하나님이 만든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들고 ‘나 이제부터 하나님하고 안 놀아.’ 우리가 하나님을 배척하고 싶은 악마의 충동이 또다시 우리에게 욱하고 올라오게 되어 있단 말이죠. ‘주께서 이렇게 나를 만들 것 같으면 나 하나님한테 너무 실망했어요. 나 하나님 못 믿겠어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런데 므비보셋이 어릴 때 두 다리 다 절뚝발이 되었는데 자기가 잘못해서 실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엄마, 아빠 말 안 들어서 그런 거예요? 유모가 안고 그렇게 만든 거예요. 모세의 유모는 모세를 살리고, 므비보셋 유모는 므비보셋 다리를 아주 절단나게 만들고.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적 세계, 영적 존재에서는 그것이 자기가 맡은 기능이고 역할이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께 대적할 수 있는 이유가 돼요, 안 돼요? 이유가 안 되죠.

하나님에 대한 미움은 하나님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지죠. 하나님에 대한 미움이 하나님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진다고요. 그런데 주님은 이걸 영적 모습으로 보는 거예요. 영적 모습. 배후에 누가 있다는 겁니다. 배후에 있으니까 영적 모습을 겨냥해서 뭐가 날아오죠? 말씀이 옵니다.

말씀에 뭐가 실렸다 했습니까? 말씀에 실린 것은 예수님 혹은 하나님의 분노가 실려 있죠. “네가 나를 배척해? 내가 너를 배척하는 거야. 내가 너를 밀어내는 거야. 천국 오지 말라고.” 밀어냈단 말이죠. 주께서 말씀으로 이렇게 우리를 공격하는 거예요. 공격하게 되면 이것으로 말씀 밖의 세계가 형성돼요.

이것은 성경을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8장, 오늘날 한국의 정치사상에서 상세하게 이 말씀보다 더 적절한 말씀은 없다고 일단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나라)이 아니라”

나라가 두 개 있죠? 예수님 나라 있고, 예수님 바깥에 나라 있죠. 예수님 바깥에 나라,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예수님께 속한 나라입니까, 예수님께 속하지 않은 나라입니까? 예수님께 속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속한 나라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두 개의 나라가 별개다 이 말입니다. 따로 있다고요. 따로.

그 따로를 결정하는 것은 뭐냐? 언약, 말씀으로 결정했잖아요. 언약 밖에, 말씀 밖에 나라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그거는 누구한테 내어준 거예요? 마귀한테 내어준 거예요. 마귀한테 내어준 이 세상에 대해서 거기서 ‘안타깝다’, ‘미련하다’ 뭐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보고 책망하시는 거예요. 남의 나라에 왜 그리 신경을 쓰냔 말이죠.

여러분, 하마스에 신경을 씁니까? ‘아휴, 우리 하마스에도 지도자가 있어야 되는데. 다 부서졌어. 지하 터널 박살났어. 아이고, 우짜지? 우짜지?’ 아프리카에 우물 물 안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아프리카에 우물 안 나오면 재산 바쳐서 도와야지.’ 뭐 이렇게 생각합니까? 여유 있을 때나 한 만원씩 전화로 내줄 수는 있는데 그것 때문에 막 ‘나는 아프리카 우물 안 나오면 죽을 거야.’ 이런 사람 있습니까?

대한민국 사람은 자기 나라가 있기 때문에 남의 나라는 오락이죠. 이거는 하나의 재밌는 게임벌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북한군 죽잖아요. 죽을 때, 걔 왜 죽어요? 그거 부모 잘못 만났죠. 부모가 공산당이어서 가잖아요. 그런데 그 애 죽을 때 그렇게 가슴 아파요? 마치 내 애 죽은 것처럼? 안 그렇잖아요. 남의 나라란 말이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부재로 존재케 하는 이유는, 이 나라가 네가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배척하라고 우리가 이 땅에서 태어난 거예요. 역사적 사명을 띠고. “그러면 목사님, 우리나라는 어떤 나란데요?”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냐 하면,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 분노하기 위한 나라에요. 예수님이 분노한 것처럼 같이 분노하라고 주신 나라에요. 그 나라를 허락했습니다.

그 나라가 히브리서 10장 27- 29절에 나옵니다. 얼마나 분노하는지 한번 보세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이 하마스야!

이게 하마스보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하마스 같은 나라가 뭐냐? 이 세상 220개국의 모든 나라가 하마스 같은 나라잖아요. 누가 보기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보기에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뭘 믿고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임금 되시는 주님이 이 땅에 와서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 그걸 지금 상기시키는 거예요.

우리를 구원해줄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밟혔다는 겁니다. 누구한테? 백성이 아닌, 마귀에 속한 마귀의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조롱받고 멸시당하고 천대받으면서 결국은 목숨까지 잃었다 이 말이거든요. 바로 그 이야기가 아까 교재 p.147 위에서 4번째 줄, [인간들이 세상에 대해서 분노할 줄 모르는 것은 자기 내부에 들어 있는 악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마귀에게 너무 관대한 것이다.]

좋은 대통령이 나타나면 좋겠다. 태극기 휘날리면서 광화문에 천만 명 모였다는데. 도대체 난 못 믿겠어. 천만 명이 거기에 모일 장소가 아니에요, 광화문이. 답답하네. 우리나라 1/5이 갔다는데 1/5 갔어요? 미국이 살리고 태극기가 살리고 하는 겁니까? 그거하려고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신 어린 양으로 죽었어요? 주께서 그것 때문에 십자가 죽었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이 모든 원인이 아까 요한복음 18장 그런 말씀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 29절 그런 말씀이 우리 안에 팝콘처럼 안 터져서 그래요. 안 터져서. 그럼 왜 안 터졌는가? 말씀을 안 들었는가? 들었어요. 설교 다 들었어요. 왜 안 터지는가? 나의 욕망, 영적 욕망이 나로 하여금 ‘너 신이잖아. 너 하나님이잖아. 너 자율적 존재잖아. 네 결정, 네 판단이 네 미래를 결정하잖아. 네 자부심, 자긍심을 네가 붙들고 있어야지. 네가 남들보다 못해서 되겠어? 너 장애자 돼야 되겠어? 그래야 속이 시원하겠어?’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내가 건강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요.

오늘 강의 내용은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말씀이 오게 되면 나의 뭐가 발견된다? 내가 손 댈 수 없는 근원인 오류가 파악되는 거예요.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에요. 말씀의 능력. 쉽게 얘기해서, 말씀이 나보고 이야기해요. “너 천사잖아. 너 이 소속이 아니잖아. 네 소속을 분간 못하고 왜 자꾸 혼동해? 이 소속 아니잖아. 너는 하늘나라 소속이잖아.”

네 생명은 하늘에 있다고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오죠. 빌립보서 3장 20절에 뭡니까? 네 시민권은 어디에 있다고? 까봐. 주민등록증 까보라고. 까보니까 하늘나라 팔공로 91번지…. 주민등록이 하늘나라 소속으로 되어 있어요. 소속이 하늘나라란 말이죠. 사랑의 소속이에요. 어떤 것을 해도 용납해준다는 겁니다. 용납해주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주께서 무한 책망을 해도 너는 기뻐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미 모든 것을 용납했기 때문에. 용서했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우리가 다시금 봐야 돼요.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한번 검토해보겠습니다.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아까 했던 그림 다시 한번 그리면서. 이 그림은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2017)라는 책에 나오는 그림입니다(p.197). 그 사람이 이 주장을 했다는 게 아니고 내가 이 그림을 따온 겁니다.

인간은 뭐로 되어 있습니까? 악과 선으로 되어 있죠. 그런데 여기 악과 선을 걸쳐서 대각선으로 오신 분이 있다 했죠. 대각선으로 오신 분이 있어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같이 선인데 악으로 걸친 분이에요. 이걸 오려보라 했죠. 오려서 따로 떼어내면 종이1은 공백, 빈자리가 되죠. 예수님이 부재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해버리는 겁니다.



이 자리, 예수님의 구멍 난 이 자리를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 내부에 심었어요. 말씀으로 심겨놔 버렸어요. 심겨놓는 방법은 우리의 육신을 저주함으로써 이것이 심어지면 이게 사랑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 이 자체를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 따라 이 땅에 존재하지만 부재한 존재가 되죠.

이걸 구약에서 보여주는 게 에스더, 에스라, 그다음에 느헤미야. 그래서 이렇게 설명하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한 예를 들겠습니다. 에스라 10장 3절, 구약성경 p.724입니다. 에스라 10장 3절에 보면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에스라, 느헤미야의 특징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살던 사람은 다 엉터리라는 겁니다. 그럼 어떤 사람에게 성전을 지을 권한이 있느냐 하면 바벨론 포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에게만 성전 지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라는 것이 에스라, 느헤미야의 공통점입니다.

그럼 바벨론에 간 사람이 전체 인구의 10%밖에 안돼요. 그럼 나머지는 어디 갔느냐? 나머지는 다 흩어졌어요. 흩어지고 어중이떠중이, 바벨론 군대 입장에서 봐도 이건 뭐 사람 같지도 않다는 것만 남겨놨다는 거예요. 바벨론 군대가 보기에도. 느부갓네살이 보기에도. 괜찮은 인간 수준 된다 싶으면 다 가져갔어요. 어떻게 쓸모짝 있다 싶으면 다 가져간 거예요. 버려놓나 안 버리나 우리한테 전혀 보탬이 안 된다 하는 존재는 다 남겨둔 거예요. 그것도 몇 % 되지 않아요. 황폐하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농사지으면서 빈 터니까 이방인들도 살 거 아닙니까. 토지는 황폐했지만 또 개간하면 되니까. 그때 누가 오겠어요?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없는 이방여인하고 혼인했겠죠. 그 이방여인하고 결혼한 사람들이에요. 50년 뒤에 에스라 왔고 거기서 좀 더 뒤에 느헤미야 왔고. 와서 같이 또 협력해서 성전 재건하는 데에 힘을 합치고 율법을 또다시 적용합니다.

그런데 그 해당 대상자가 누구냐 하면 바벨론에 포로 잡힌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율법대로 돌아가자.’ 뭡니까?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원래대로. 순혈주의라 하죠. 아브라함의 혈통, 혼혈 없이 가자.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 남자들 다 모아놓고, 여자하고 그 자식들 양육권 여자한테 줘서 다 찢어져. 다 갈라 서.

그리고 10장 8절,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좇아 삼 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한다. 며칠요? 며칠? 3일. 그때 택시 있었습니까? 대리 불러야 돼요? 버스 있었어요? ktx 있었습니까? 어지간하면 3일 내에 오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3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어떻게 된다? 모든 재산은 몰수한다.

이거는 에스라, 느헤미야 보기에 이 땅에 다시 나라를 이루려면 어느 정도 기본적인 토지나 재산은 있어야 된다. 이건 강탈한 거예요. 누구한테? 잡족들에 해당되는 그 사람들에게 다 강탈한 거예요. 그러면 잡족들이 성전 짓는 취지를 알았죠? 성전만 짓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재산 뺏겠다는 뜻이죠. 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대들겠습니까? 대들죠. 대들 때 에스라, 느헤미야가 어떻게 합니까? 심히 통곡하고 마음에 작심을 하면서 ‘저 적들을 주께서 쳐부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나라 되었어요? 성전 유지되었습니까? 성전 다 부서졌죠. 부서졌다고 느헤미야 왔지만 어떻게 됐어요? 또 부서졌죠. 또 부서졌어요. 이 에스라의 주장과 말라기의 주장은 다릅니다. 말라기에 보면 결혼했으면 이혼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럼 에스더는 뭐냐? 에스더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진노가 먼저 옵니다. 하만이라는 자가 나타나서 어떻게 해요? 유대인이라는 유대인은 모조리 다 죽이고 재산은 모조리 다 빼앗는 거예요. 씨를 말리는 거예요. 이거 누가 허락했어요? 하나님이 허락했죠.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이 자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천사와 마찬가지로. 인간 육신의 수준에서 천사로 전환되려면 소위 내 존재함을 확정해줄 그 어떤 건덕지가 하나님에 의해서 몽땅 다 날아가 버려야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돼요? 그래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새삼스럽게 박히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현재 우리가 말씀에 의해서 안 터지는 이유가 너무나 단단한 콘크리트처럼 내가 잘났고 가치 있고 나는 뭐든지 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장할 어떤 것이라도 내 것이 하나의 벙커처럼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성경은 많이 알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랑이지, 주님 주신 사랑은 아닙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거에요. 네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말씀이. 그런데 우리는 자꾸 혼동해서 과거의 내가 말씀 덕분에 계속 지금 이 내가 기어이 살아있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모델 되시는 예수님의 존재와는 전혀 맞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말씀으로 언약으로 죽고 언약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고 살아나려는 거예요. 언약이 심겨진 상태에서 언약 때문에 성령 때문에 살아나야 되는데 말씀은 없고 그냥 좀 살려 주이소, 이런 식이에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철저히 너를 밀어낸다, 배척한다는 이 취지, 하나님의 분노의 취지가 없어요. 그 취지가 없는 것은 말씀의 적용이 아니죠. 적용이 아닙니다.

내가 그럼 절뚝발이가 될까요? 그럼 재산을 다 드릴까요? 해봐도 소용없어요. 문제는 므비보셋이 죽은 개 같다고 자기를 표현했다는 거예요. 죽은 개 같은, 어떻게 저 같은 걸 다 돌보십니까? 이게 바로 말씀 안에 언약 안에 들어있어서 일체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천사로 사용하는 거예요.

다윗이 절뚝발이였습니까? 아니죠. 다윗은 다윗 천사의 방식이 따로 있어요. 다윗도 죽을 뻔 많이 했어요. 창이 막 날아오고 피하고 다윗도 한두 번 죽을 뻔한 게 아닙니다. 므비보셋은 장애자니까 다윗만큼 그만큼 적들이 좀 적다 뿐이에요. 다윗이나 므비보셋이나 둘 다 천사에게 해당되는 기능들이 그대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고, 그다음에 오늘날 누구한테? 감히 표현합니다, 감히 누구한테? 우리한테. 감이 안와요? 그럼 여기 광주모임. 감히 우리에게 그 기능이 주어졌습니다.

끝으로 어떤 기능이 있는가? 요한계시록 14장 18절, 천사의 기능이에요. 천사의 기능은 요한계시록 6장, 7장, 8장 여러분 다 아시죠. 천사의 기능 중에서 18절-20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아주 날카로운)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밟히죠. 밟힙니다. 분명히 밟혔어요. 틀에서 밟히니까 뭐가 터져 나와요? 그 본질이 찢어지면서 튀어나오겠죠. 그래서 그 죄가 일천육백 스타디온, 이 세상을 정방형으로 표현할 때 치수입니다, 이 세상에 퍼졌죠.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타디온에 퍼졌더라”

이것이 천사의 기능이라면 오늘날 성도의 기능이 그대로 주어졌는데 성도는 그럼 이걸 어떻게 합니까? 칼 들고 다닐까요? 아니에요. 칼보다 더 날카로운 칼이 무슨 칼이죠? 바로 말씀의 칼날. 말씀이 나부터 먼저 베였으니까. 말씀이 나를 베었으니까. 나를 작살냈으니까. 너 이미 부재해. 너는 죽은 존재야. 너는 죽은 개라 하는 그 말씀을 그대로 세상에 대해서 외치시면 여러분들이 천사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사는지 왜 발언을 하고 말을 하는지 왜 내가 결정을 하는지 다 주님 위해서 하는지 아니면 나를 지키기 위함인지 다시 한번 말씀 앞에서 여지없이 들통 나서 깨어지게 해주시고 우리 것을 빼내시고 그 안에다가 말씀이라는 엔진으로 바꿔주시는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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