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종교와 복음의 차이

아빠와 함께 2025. 2. 16. 18:26

종교와 복음의 차이 

2025년 2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3:6-9

(33: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33: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33: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33: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기존의 시공간적인 지평으로 계속 이어져 간다면 지금 이스라엘 정부가 하는 것이 제대로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최종성’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최종성’이란 모든 인간의 행함이 ‘끝’을 내린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죄’로 마감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래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 ‘죄악을 사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데 있는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사한 상태’로 돌아오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악을 사하기 위해 어떤 상황이 필요하지요?

이 상황을 위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해서 무수한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등장했습니다. 이런 선지자 중에 대표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모세와 엘리야는 ‘죄사함’을 위하여 어떤 공통적 내용을 담게 될까요? 이 사실은 구약의 범주 안에서 밝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예언 해석에는 필히 ‘최종성’이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최종성’에 입각한 해석이 마태복음 17:1-3에 나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하나님께서 이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키신 것은 예수님의 하시고자 하는 최종적 과업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 그는 화산 속에서 40일 있다가 다시 백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들고 온 율법판은 불 속에서 나온 것이고 그가 들었던 율법도 다 불 속에서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의 경우, 그는 죽으면서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쉽게 말해서 불 속에서 견뎌내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갈 생각말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3:13에서는,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행하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불 속에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공로는 어떤 불을 견디고 그 불 속에서 나오는 걸까요? 마태복음 3:11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나 예수님이 주시는 분인데 본인은 물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 하나 몰랐던 것은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주시는 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 세례 속으로 투입시키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12:49-50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방화범이라면 자신이 흩뿌려놓은 모든 불 지평에 자신도 집어넣으신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레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 요청되는 자들만 그 물세례를 참여했지만 예수님의 불세례는 동네방네 다니시면서 온 천지에 불을 질러버리십니다. 인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세와 엘리야나 예수님은 모두 불붙는 세상을 전제로 깔고 그 위에 말씀을 날리신 분들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스스로 반성하므로서 정립되는 그런 죄개념이 아니라 그 대신 의도적으로 죄개념을 유발하시겠다는 뜻을 펼치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 말씀으로 인하여 죄가 감해지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반대로 죄가 전반적으로 확대되는 효과를 보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희망’입니다. 인간들이 희망을 느끼는 것은 결핍 때문입니다. 이 결핍은 그동안 자아 구축을 위해 퍼부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돈’과 ‘시간’과 ‘정력’입니다. 이러한 정성이 쌓이고 쌍이게 되는데 그러면 마음 속에 생겨나는 것이 ‘한맺힘’입니다.

즉 오늘날 유대교는 이 한맺힘을 기도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한맺힘이란 그 내부에 담겨있는 결핍에 대한 분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분노하는 본심을 간절한 기도로 감추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율법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들고 나와서 이 약속대로 속히 이루어달라고 떼쓰는 겁니다.

바로 이 모습이 ‘최종성’이 누락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심”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희망을 붙들고 사는데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언약을 받았지만 이들은 이 언약을 종교화시켰습니다. 즉 한맺힘을 푸는 체계를 갖춘 겁니다. 그들이 이것이 죄인줄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약속한 이 말씀은 다시 ‘언약 제공’으로 해결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 완성’으로 그 해결의 최종성을 나타내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2-3에 보면, “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자 인간들 각자 본인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믿음의 대상자는 여느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한 분 예수님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자기 한맺힘에 기초를 둔,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십자가 앞에서 죄로 드러납니다. 자기 한맺힘에서 못 벗어나는 그 죄인과 ‘다 이루신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복음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늘 ‘죄인’되고 예수님은 늘 ‘다 이루신’ 최종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 죄사함을 받은 자만이 하늘의 약속의 땅으로 소집됩니다. 이 복음 안에서 나의 결핍성과 한맺힘과 나의 소망마저 죄가 됨이 드러납니다. 이 관계 속에서 성도는 비로서 주님을 ‘위해’ 제시된 말씀이 주님에 ‘의해서’ 성취된 것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을 올리게 됩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의 결핍을 종교행위로 은밀하게 감추고 사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2강-예레미야 33장 6~9절(종교와 복음의 차이)25021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3장 6~9절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구약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지평으로써 설명하게 되면, 현재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겁니다. ‘봐라. 예레미야 33장을 한 번 봐.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지켜주잖아. 우리 돌아온 모든 흩어진 민족들이 나라에, 이 시온성에 모여들 때, 너희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너희들은 알게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지금도 우기고 있습니다.

기존의 시공간을 유지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거기서 버티고 해석할 수 있다면, 그들의 생각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한번 봐요. 예수님이 마주침을 통해서 제시한 것은 최종성입니다. 시공간이 나이아가라폭포가 되고 말았어요. 절벽이 되고 말았어요. 단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에 있는 이 예언의 말씀이, 이것이 예레미야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 안에 예수님이, 장차 사람들에게, 유대인에게 버림받을 예수님이 이 말씀을 미리 당겨서 하신 거예요. 그러한 내용은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데, 엘리야 나오고, 모세 나오고, 예수님 나옵니다. 그게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뭐냐 하면, 불입니다. ‘불 속에서 못 빠져나오면, 너희들 구원은 없다’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불 속에서. 왜? 지옥이 불바다이기 때문에. 불 세상이기 때문에. 모세 같은 경우는 화산속에 들어갔다가 나왔어요. 불 속에 40일 동안 있다가 나왔어요. 엘리야 같은 경우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돌아가실 때, 불 수레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거 뭐, 뜨거워서 마차 타겠어요? 불 마차 타고 하늘로 갔습니다.

예수님 같은 경우는 이미 세레요한을 통해서 예언했었어요. 장차 오실 그분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몰랐던 것은, 예수님이 불과 성령으로 주시는 분으로 생각했는데, 자기가 내리는 불과 성령 안에 주시는 본인이 스스로 받는 분으로 오신다는 생각은 세례요한 입장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왜? 세례요한은 구약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에.

구약의 한계는 시공간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아직 최종성에 이르지는 못해서 기존의 시간과 공간을 그냥 밀어붙이는 가운데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9절에 보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이 온 것은 온 천지에 불을 싸지르려고 온 거예요. 방화범이죠. LA 산불 방화범.

그냥 온 천지에 가는 곳마다 불을 싸질러버리는 거예요. 말씀을 통해서 불을 싸질러버려요. 전에 세례요한은 뭐냐. ‘받을 사람만 받으세요’라고 하며 물세례를 받았어요. 물세례는 들어올 사람만, 세례요한을 인정하는 사람만 왔을 뿐이고 나머지는 구경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찾아가는 세례, 찾아가는 불세례, 나에게 오든 안 오든 불 싸질러버리고, 그 불 속에 예수님 자신이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아직 남아 있다”

전체를 불 세계로 만들어 놓고, 그 세계 속으로 자기도 같이 끼어들어서 자멸하십니다. 이런 아이디어, 이런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어떤 근거에 의해서, 도대체 어떤 원칙에 의해서 이렇게까지 인간의 모든 생각을 차단시키고 오직 하나님만 아는 방식을 유난히 드러내시는 이유가 뭐냐.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거기에 구원받는 기준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3장 13절에 사람들이 터 위에 뭐를 자꾸 쌓고 쌓고 하면서 뭘 세우는데,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라고 나옵니다. 인간은 이미 불판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최종성이 불을 밑에 깔아놓는 거예요.

불을 깔아놓는 것은 레위기 1장에 보면, 제단을 이야기합니다. 제단 위에서 하나님이 지정한 제물이 홀라당 탈 때, 비로소 하나님은 흐뭇해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흐뭇해하시는 것은, 불을 과연 통과했을 때, 무엇이 남아있느냐를 보자는 겁니다. 불을 통과했을 때, 무엇이 남아있는가. 오직 남아있는 것은 예수님의 공력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어야 해요.

다 타고 예수님의 공력만 남아야 해요. 이게 천국의 기준입니다. 이런 신약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준 최종성의 관점에서 다시 예레미야를 돌아와서 보게 되면,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를 알 길이 없지요. 예레미야 본인에게도 희미하기 때문에. 자기가 외치면서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십자가의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아직도 모자랍니다. 아직도 거기까지는 알지 못하죠.

나중에 십자가 지시면, 예레미야는 이미 고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면, 그때는 십자가의 공력이, 십자가의 의미가 죽은 자기 성도들이 있는 음부에 전부 유포가 되기 때문에, 다 알려지기 때문에, 가짜뉴스가 아니고 진짜 뉴스로써 “다 이루었다”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모세와 엘리야의 의논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돌아가시면 그 소식을 이미 죽은 우리에게 알려주실 거죠?”라고 모세와 엘리야는 오실 주님의 하실 일을 바라보면서 그들 시대에 예언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미 예수님이 다 이루었어요. 다 이룬 입장에서 아직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주께서 다 이루어진 것이 우리를 통해서 전달되기 위해서 살아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 같이 신학교 가고, 다 같이 목사 되고, 전도자 되어야 하는가. 그건 아닙니다. 아닌 이유가 뭐냐 하면, 구약 때는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약간 골치 아프기 시작하죠. 구약 때는 언약이 주어졌는데, 그 언약을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로 바꿨느냐 하면, 종교로 바꿨어요. 이게 좀 골치 아픈 일이에요. 언약은 주어졌는데, 말씀이 주어졌는데, 그들은 그것을 종교화시켰습니다.

그러면 언약은 뭐고, 종교는 뭐냐. 이걸 구분해야 하지요. 오늘 우리도 그걸 구분해야 해요. 언약은 주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거예요. 근데 종교는 뭐냐 하면, 우리가 이런 더럽고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탈출할 때는 주인공이 있어요. 내가 탈출해야지, 남이 탈출하면 그건 화나지요.

내가 탈출하기 위한, 내가 나를 건지기 위한 용도로 언약을 활용했던 것이 유대인의 실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선지자의 모든 말씀을 해석한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불 질러놓고 불속에 들어가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고, 자기가 망하는 길로 들어가지 않고, 자기는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활용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거예요.

제사 지내라면 제사 지내고, 어린양 피 바르라고 하면 피 바르고, 또, 또 뭐? 또 뭘 할까요?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자신을 망하는 자리에 들어서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계속 이야기했지요. 그러면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은 언약을 줬는데, 하나님 자신마저 그 언약의 피해자가 됩니다.

언약을 줬고, 인간들은 자기가 피해자가 되기 싫어서 그걸 종교화시켰어요. 자기는 멀쩡하고, 멀쩡한 나를 계속 천국으로, 하나님께로 가겠다는 거, 또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겠다는 식으로 지금도 유대인은 종교화하지요. 메주자(Mezuzah)라고 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큰 회당이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냥 빈 체육관 비슷하게 생겼어요.

체육관에 의자만 쭉 있는데, 예배당이랑 똑같아요. 다만 차이점은 입구에 메주자라고 해서 신명기에 나온 성경 구절을 담아서 문 옆에 걸어놓은 액세서리 같은 것인데, 그걸 착용하고 들어가요. 거기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주로 하는 것은, 거의 인간이 할 수 있는, 회중들이 할 수 있는 거의 100%가 기도입니다. 회당 앞에 보면 홈이 있고, 그 홈 안에 책이 두 권 들어있는데, 그 두 권 모두, 기도에 관한, 기도를 그대로 해요.

기도문이 적혀 있고 그걸 그냥 따라 하면 되게 되어 있어요. 인질이 잡히면, ‘인질이 잡혔을 때의 기도’, 누구 생일이면, ‘생일 기도’, 결혼 기도, 장례 기도, 이 기도문이 공통으로 하면, 그 기도문에 같이 동참해서 하는 거, 그게 예배이고 또는 설교자는 성경 본문 신명기 읽고, 모세오경 읽고, 그거 설명하고, 그러면 한두 시간 금방 가고 예배 끝이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기도가 추가 돼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합심해서 기도하게 되면, 응답 되는데, 그 기도가 메주자(Mezuzah)라고 하는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자리에 예수님이 만약에 계시고, 그 자리에 사도바울이 있다면, 사도바울과 예수님은 그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했겠습니까? ‘우리가 뭐 압니까?’라고 할 수 있는데, 알아야 해요. 모르면 안 돼요.

갈라디아서 3장 2절의 말씀을 하실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는 너의 행함, 기도한 거, 금식한 거, 이런 걸 믿느냐, 아니면 너 말고 다른 분이 한 것을 믿느냐?’라고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 유대인 보고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너를 떠나지 못하느냐. 왜 자꾸 너 자신을 구원의 대상으로 포함을 시키느냐는 말입니다. 그건 유대교적 상황이고 예수님의 최종성을 그 안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은 거예요. 불신자가 뭐냐? 주님의 최종성이 들어있지 않은 사람이 바로 불신자예요. 그러면, 들어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이 되죠. 그러면 나는?

나는 ‘산다’가 아니고 죽어가는 거죠.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한 걸음 한 걸음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죽음이 당기고 있는 거죠. 주님이, 어디로? 주님이 이루신 최종성, 기존의 시공간은 무효가 되고, 새로운 시공간이 마중 나오는 그 지점까지 성령이 우리를 당겨주고 당겨주는 거예요. 당길 때 그냥 당겨가느냐. 아니지요. 모든 말씀의 튜브, 모든 말씀의 지평을, 말씀의 벌판을 걸어가죠.

말씀의 벌판을 걸어가면, 그 말씀에서 뿜어나오는 그런 새로운 의미를 맛보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언약에서 종교로 바뀐 것을 종교에서 언약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죄 사함이 뭐냐 하면, 종교에서 복음으로 가요. 그러면 앞에 있는 언약과 이 복음의 차이점은 뭐냐?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반응으로 호응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반면에, 인간은 그것을 종교로 바꿨지요. 종교로 바꾸고 종교로 바꾼 그것을 주님께서는 뭘 하느냐. 복음으로 바꾸는데, 복음은 뭐냐? 의로운 주님과 그다음에 필수적으로 죄인인 인간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건 언약에 없는 겁니다. 언약의 본래 목적이 뭐냐? 인간을 죄인 만드는 데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유대인을 다시 포로 잡혀가게 함으로써, 그들이 다시 돌아올 때는 그냥 언약맨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죄인으로 돌아오게 만들죠. 그게 오늘 예레미야의 본문 내용입니다. 내가 돌아오게 할 때는, 언약을 위반했으니까, 언약을 다시 주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주어서, 복음으로 다 이루었다는 그 속에 우리는 확정된 죄인으로 돌아오게 해서, 죄인의 입을 통해서 우리 주님만 마음껏 찬양하고 영광 돌리도록 그런 시스템으로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마지막 이야기할 것은 뭐냐. 그러면 우리의 죄인 됨을, 어느 정도로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하는가. 죄가 뭐냐는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죠. 죄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직도 우리는 죽고, 살아있는 것은 주님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까, 내가 살아있으니까, 죽어가고 있어도 그건 생각 안하고, 내가 살아야 한다고 이러고 있으니까, 여기서 인간은 뭘 품게 되느냐 하면, 희망을 품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죄 사함의 기쁨 대신,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희망의 기쁨으로 그걸 대체하는 거, 자꾸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거, 그게 바로 우리가 매일 같이 나타나는 죄입니다. 자꾸 어떤 희망을 갖고자 하는 거예요. 이미 주님의 최종성은 우리가 희망을 안 가져도 되는데, 우리 나름대로 희망을 갖는 거예요. 제가 아까 기도할 때 언급했잖아요.

인간은 세 가지를 직접적으로 자기에게 투자하는데, 시간과 돈과 정력을 투자해요. 그래서 제가 아까 기도할 때 말씀드렸지만, 시간과 돈과 정력을 투자하게 되면 나오는 결과는 뭐냐. 한 맺힘입니다. 한 맺힘이 있어요. 라이먼 프랭크 바움(Lyman Frank Baum, 1856~1919, 극작가)이라는 사람이 썼던 동화가 있어요. ‘오즈의 마법사(The Wonderful Wizard of Oz)’라는 건데, 저는 그걸 뮤지컬로 봤습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보게 되면 거기에 도로시라는 아가씨가 집을 나갔는데, 다시 돌아오고 싶은 희망이 있는데, 거기에 동행하는 세 사람이 나와요. 그 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싶은 양철 나무꾼, ‘갖고 싶은’, ‘싶은’, 아직 가진 것이 아니에요. 결핍이에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싶은 양철 나무꾼’. 그다음에 지혜를 갖고 싶은, 아직 지혜를 가진 게 아니에요, 지혜를 갖고 ‘싶은’ 허수아비. 또 한 사람은 용기를 갖고 싶은 겁쟁이 사자.

도로시는 이 세 존재와 같이 동행하고 있어요. 동행하면서 그들이 부른 노래가 뭐냐.
‘over the rainbow’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무지개너머 하늘 높이 어딘가에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옛날에 자장가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나라가 있어요

그러니까 마음으로 뭐든지 빌면, 아까 종교의 기본이 뭐였죠? 비는 거죠. 종교라는 것이 비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이 망한 거예요. 계속 비는 거예요. 왜? 내 결핍 때문에. 갖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왜? 한 맺혔거든요. 돈, 청춘, 정력, 이 한 맺힘이 있으니까, 이걸 채워야 내가 만족스러우니까요.

One day I'll wish upon a star
언젠가 나는 별을 보며 소원을 빌고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
저 하늘 위에 겹겹이 쌓인 구름 위에서 잠 깰 거예요.
(구름인데, 이게 뭘 말하냐면 무지개 위를 말해요. 무지개너머 푸른 하늘이죠)

Where your troubles melt like lemon drops
거기에 가면 모든 근심 걱정은 레몬 사탕처럼 녹아버려요.

이제 그다음 구절이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합니다.

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굴뚝 꼭대기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거기에서 날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게 종교의 절정이잖아요.

Oh,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they fly
무지개 너무 어딘가에 파랑새들이 날아다녀요

If birds can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why can't I?
그러니 왜, 왜, 나라고 날 수 없겠어요?

One day I'll wish upon a star
언젠가 나는 별을 보며 소원을 빌거예요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
그리고 구름이 멀리 사라진 곳에서 눈을 뜨겠죠

Where your troubles melt like lemon drops
모든 근심 걱정은 레몬 사탕처럼 녹아버리는 그곳에

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굴뚝 꼭대기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거기에서 날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게 바로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이게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종교를 안 믿잖아요. 왜 그러냐. 종교가 이미 이 세상에 뮤지컬로, 동화로 이미 다 확산이 됐어요. 그런데 이 오즈의 마법사에 근본 취지는 금본위제에서 은본위제로 돌아가자는 미국의 경제 사정을 비틀어서 만들었어요. 사실 오즈(OZ)의 마법사는 온즈(oz=ounce)의 마법사로, 금값에 비해서 은값도 좀 쳐주자는, 그래야 나라 경제가 산다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경제고 정치고 간에 이미 인간의 한 맺힘을 어떻게든 충족하는 세상이 되어달라고 하는 그것을 이미 유대인들이 언약을 통해서, 여호와를 통해서 시도했는데, 그게 바로 죄였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성경을 똑같이 보면서도, 이걸 오늘날 최종성이 마음속에 없는 사람은 이 모든 신약성경의 말씀을 기독교라는 또는 천주교라는 종교화를 시키고 말았어요.

내 결핍을, 한을 들어주는 그러한 시스템으로 전환 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 종교가 있는 더러운 세상을 빨리 탈출해야 한다고 하면 그래봤자 종교죠. 정답은 뭐냐. 퇴출당하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종교인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 절대로 양보 못 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세상으로부터 모욕받는 거, 모독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기고 너희는 저라’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갔던 그 길과 사도바울이 갔던 그 길과 열두 제자들이 갔던 그 길을 한번 보세요. 그들은 세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산 것이 아니고, 예수님처럼 똑같이 퇴출당했습니다. 이 세상 공동체에서 퇴출시켰어요.

그럴 때 그들은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이게 어떻게 성령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될 수 있습니까. 신약성경 보면서, 복음 들으면서 짜깁기해서 내가 구원받을 그러한 논리체계 만들지 마시고, 그냥 사시면 주변에서, 심지어 우리교회에서도 ‘나가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죠. 이제는 주께서 퇴출시켜 주는 것을 여러분이 몸소 경험하면서 이미 그리스도와, 퇴출당한 주님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게 하옵소서. 강제로 스스로 순교한다고 나서지 말게 하옵시고, 고난받겠다고 티 내지 말게 하옵소서. 그냥 원하는 대로,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대로, 살다 보면 항상 주님이 우리 곁에서 이끌었다는 것을 깨닫는 그러한 느낌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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