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언약 교체

아빠와 함께 2025. 2. 9. 20:55

언약 교체 

2025년 2월 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2:37-41

(32:37) 보라 내가 노와 분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내어 이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32:38)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32:3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32: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32: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면서 순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작살내시고 그 다음 이어서 일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소망과 이익과 기대감을 갖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인간이 원하는 바가 근원적으로 같지 않음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전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그들은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은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살 당시에도 그들은 자신의 행복 욕망에 마음두고 살았고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치고 왔을 때도 한결같이 자기 행복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본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막상 자기 행복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약속의 땅에 들여다 보내준다고 해도 인간의 자기 내부가 바뀌지 않는 한 하나님의 연속적인 분노는 여전히 부여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직접 인간 마음들 속에 주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백성들도 다같이 ‘한 마음’화 되게 하시고자 합니다. 이것을 ‘가족’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들의 기존의 가족관으로서 하나님께서 함께 할 수 없음을 뜻입니다. 예수님과 한 가족을 형성한 요셉의 가정의 예를 들어보면 이러합니다.

예수님은 복잡한 명절 때에 부모만 헤어지게 되었고 부모는 자연스럽게 잃어버린 어린 예수님을 사흘이나 찾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모의 마음은 무겁기 한량없었을 겁니다. 어린 예수님을 만나면 단단히 나무랄 준비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예수님을 통해서 교체될 마음일 뿐입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46-50)

이 말씀에서 ‘양친은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에 유념해 보세요. 이게 인간 마음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들로 단단하게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겁니다. 즉 비록 예수님을 키워낸 부모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고 바뀌어야 하는지를 몰랐던 겁니다.

또 하나의 예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8:20-22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계관이 여기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거처할 곳은 인간들이 단결해 있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세는 이땅에서 떠돌이입니다. 여우와 공중의 새보다 못한 처지입니다. 이 세계관을 알지 못하고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해서 장례를 치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따르는 것을 잠시 지체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를 나무랍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것조차도 주님의 세계관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는 자신이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의 변화는 사망에 관한 겁니다. 고린도전 15:26에 보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이며 그 이유는 사망과 결부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들이 끝까지 달라붙어있는 사망을 척결하기 위한 힘이 된다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로 하여금 자신이 이미 죽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즉 죽음과 한 몸이 될 때만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 있게 발산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새로운 언약으로 묶으시려고 합니다. 그 언약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다시는 인간들의 무관심이 망쳐버린 그런 언약이 아닙니다. “ 인간들아 이 언약을 지켜라”가 아니라 “친히 내가 너희 속에 들어가마”를 성사시키시는 언약입니다. 이미 인간들은 서로들 하나가 되려고 작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 건립’입니다. 기존 자기들의 생각들을 생각들로 하나로 뭉치게 되면 다시는 헤어짐을 없을 것이라고 여겼고 자신들의 생각에 하나님마저 포섭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거절당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하나됨에서 나온 나라를 만들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복있는 자라고 인정하는 자에게 복음이 임하게 되는 나라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어떤 사람이 양봉 사업을 하기 위해 같은 양봉 하는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벌떼를 돈을 주고 분양 받았습니다. 그런데 벌을 분양받은 자가 자기에게 벌을 판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여왕 벌’이 없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여왕벌은 뭐지요? 바벨탑 대신 하늘에서 찾아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 성령으로 인하여 “누구든지 주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가 성립됩니다.(행 2:21) 여기서 중요한 점을 나 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찾아와 주신다는 점입니다. 즉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일’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부담에서 벗어나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소지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에게 소지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1강-예레미야 32장 37~41절(언약 교체)25020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2장 26~30절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보라 내가 노와 분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내어 이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영원한 언약의 조건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음과 한 진리로 뭉쳐지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한 몸과 한 진리로 뭉쳐지는 그 조건이 인간들이 의논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뭔가 투입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투입되는 것을 40절에 보면 ‘언약’이라고 하고, 언약 앞에 ‘영영한’ 언약, ‘영원한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언약에 의해서 하나가 되었던 언약의 마음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게 바로 41절에 “나의 마음과 정신을” 그들에게 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밧데리고, 그 밧데리 안에 주님의 에너지가 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Potential energy’, 보통 위치에너지라고 하는데 드러나지는 않지만 피어나는 에너지, 뭔가 드러나지 않아서 보이지 않지만 말과 행동을 통해서 스물스물 계속해서 발산되는 그 정신, 그 마음, 그 세계관, 그걸 보통 세계관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새로운 시공간’이 우리 안에서 피어나는 겁니다.

최근에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 지구(Gaza Strip: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를 재건하기 위해서 현지에 사는 가자 주민을 모로코 쪽으로 이주를 시키고 미국이 가자지구에 부동산을 산다는 겁니다. 사버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위협의 요소가 없어지니까 좋지요. 이게 뭐냐 하면 가자의 주민들 입장에서는 자기의 과거가 날아가요. 자기의 고향이 날아간다고요.

트럼프가 하는 이것을 보면서, 트럼프의 시공간, 거기에다가 자기의 시공간을 가자지구에 심어버리는 겁니다. 이건 가자지구의 주민들 생각이 아니에요. 사나 못 사나, 한 가족, 한 집안, 한 일가친척이 모여서 사는 것, 이게 행복 아닙니까? 여태껏 힘들게 살았는데, 모든 것이 부서졌으니까, 이것을 재건한다고 주민들을 모로코라는 남의 나라에서 살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북한 사람들을 러시아에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하는 것과 똑같지요.

‘여러분들은 이런 트럼프 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찬성입니다. 왜? 경상도니까. 뭘 따져요. 그냥 태극기 흔들면 되지. 그런데 저는 그게 잘했냐 못했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책이 이와 똑같다는 겁니다. 지금 인간들은 뭘 포기 못 하느냐 하면, 일가친척, 혈육과 가족을 포기 못 합니다. 왜냐 하면 기존의 시공간이 있기 때문에. 나의 기억속에 있는 시공간을 어떻게 바꿉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37절에 “내가 노와 분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냈다는 겁니다. 그냥 ‘정신 차려! 똑바로 해! 알았지?’라는 이런 게 아니고 이주를 시키는 겁니다. 트럼프처럼 이주 정책을 해버려요. 왜 이주 정책을 하느냐 하면, 원래 약속의 땅에는, 그들이 올 때, 원래 애굽에서 살던 사람을 주님께서 강제 이주 정책으로 애굽땅에 살던 사람을 약속의 땅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어요. 이게 문제예요. 시공간은 바뀌었는데,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여기에서 뭐가 문제냐. 여기에서 그들에게 주었던 율법을, 그들은 수행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게 문제가 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전에 있던 율법 말고, 그러니까 율법은 ‘하면, 해 줄게’라고 했는데, 새로운 율법으로 교체되게 되면, 그러니까 영영한 언약이죠.

새로운 언약으로 교체되게 되면 ‘하면 해 줄게’가 아니라, ‘안 해도 너희들 살게 해 줄게’라는 조건을 주께서 제시한 겁니다. 조건을 제시한 이유는, 그 조건이 전에처럼 ‘내 조건 어때?’라고 하면 ‘오케이, 지키겠습니다’라는 식이 아니라, 네가 지키든 말든 상관없이 무조건 헤집고 강제로 네 마음속까지 완전한 최종 언약을 우리 속에 밧데리를 채우듯이, 우리 안에 에너지를 언약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 들어온 언약이 뭐냐?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심성, 예수님의 보고 있는 시공간인 예수님의 시공간입니다. 앞으로 가자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신과 마음을 담고 살게 될 판입니다. 나를 새롭게 이주했다면, 이주시키신 분의 마음과 똑같은 마음을 해줘야, 그 하나님 약속의 땅에, 하나님도 살고 너도 살고 같은 백성으로 산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가족이라고 합니다. 패밀리(Family).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전에 있던 가족에 문제가 있는가? 문제가 많지요. 엄청나게 많지요. 자, 예수님 같은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48~49절에 예수님께서 유월절 명절에 식구들과 함께 나들이했는데, 주님께서 일부러 부모와 헤어져서 빠졌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디 어디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사 없이, 아무 소리 없이, 아버지 어머니 품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효자입니까? 아니면 말썽꾸러기인가요? 그러니까 나중에 며칠을 찾아다녔느냐 하면, 사흘 동안을 찾았습니다. 찾아다닐 때, 아빠 엄마 마음이 찢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좀 감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서 자기만 생각하고, 요즘 같으면 ‘너는 네 종교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생각 안 하냐?’

아빠 엄마가 어린 예수님 만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왜 나를 힘들게 하느냐?’라고 했겠죠. 네가 왜 슬프게 하느냐. 사흘 동안에 네가 죽었다고 생각해 봐라. 입장바꿔서 생각해 봐라. 얼마나 이게 부모 입장에서 찢어지는 일인지. 아무리 철이 없지만 그 정도로 모르나? 그런 잔소리와 책망이 아주 심하게 주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린 예수님이 부모에게 선빵을 날립니다. 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48~49절에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진심이죠. 솔직하지요. 있는 소리 여과없이 아이에게 다 했지요. 뭐를 요구하는 겁니까? 딱 붙어있으란 말이죠.

‘너는 내 식구고 가족이니까, 딱 붙어있어서 앞으로 다시는 이런 걱정 안 하게 해라’라고 할 때, 4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이게 무슨 도발이에요? “왜 저를 찾습니까?” 찾아야지요. 부모가 되어서 자식 잃었는데, 안 찾고 있으면 그게 부모입니까?

뭔가 여기서 각자 입장이 결이 다르다는 거,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감 잡고 있지요? 부모는 일방적으로 부모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결이 어긋난 거예요. 이게 안 맞는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말을 해도 ‘사실은요, 제가 아버지 집에 있었습니다’라고 이렇게 좋게 이야기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반격합니다. 쉽게 말해서 “아버님, 어머님” ‘왜 그래?’ “그동안 저를 지켜봤을 것이 아닙니까?” ‘지켜봤지’ “아직도 내가 아버지 어머니의 자식으로 보이십니까?”라고 아주 심한 반발을 하죠. 그럴 때 아버지 어머니가 ‘아차, 네가 어릴 때 별이 따라오고, 구유에서 태어날 때부터 내가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다음부터는 네가 너무 이뻐서 내 자식인 줄 알았구나’라고 부모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50절에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깨닫지 못했습니다. 양친이 그냥 할 말만 하고 가족인 듯, 가족 같은, 가족 아닌, 가족으로 그렇게 귀가 했습니다. 사흘 동안 부모는 실컷 온 속은 다 썩어 문드러져 가면서 찾았는데, 돌아온 것은 자식에게 섭섭한 타박을 받았어요. 이 요소가 예수님 안에 요소라면, 이 요소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섭섭한 마음으로 주어져야 하는지, 그건 한 군데를 더 찾아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시공간 문제입니다. 시공간.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애굽에서 홍해 건너서 그들이 약속의 땅이랍시고 갈 때, 그들은 바뀌어야 할 것이 바꿔 지지 않았어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그들이 ‘뭘 내가 교체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전혀 생각 없이 그냥 공간적으로 주님과 바짝 붙어있으면, 주님과 같은 나라 천국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안 바뀌어 진 거예요. 뭘 바뀌어야 하는지 그조차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언약을 통해서 뭐가 바뀌어야 하는지를 제가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영화에 보면 특수부대 출신의 아버지가 부인과 이혼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열 살 좀 더 먹은 자기의 딸을 키우면서, 미국이 너무 위험한 동네이기 때문에, 뭘 가르쳐주느냐 하면 총을 쏘는 법을 가르쳐주는 대목이 나와요. 미국영화에는 그런 게 많아요. 그래서 총을 쏘는 법을 가르쳐 줄 때, 보니까 어린아이가 총을 무서워하고 서툴지요.

그때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총을 다룰 때는 총이 너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다루라고 합니다. 총이 너의 일부. 나 따로 있고, 저 딱딱한 총 따로 있어서, 만질 때만 내 손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총과 네가 한 신체인 것 같이, 네 안에 총을 넣어줘야, 그다음부터는 내가 총을 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쏜다고 생각하고 총을 다루라는 대목이 있어요.

제가 딸에게 운전 가르쳐줄 때,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도 기억 안 나지만, 지어내 보겠습니다. ‘차가 너의 몸과 같이 느껴질 때 운전을 좀 하는 것이다. 운전한다고 생각하면 사고 난다’ 그래서 나이 70 넘어서 운전해야지 하면, 사고 납니다. 차와 한 몸이 되어야 하는데, 내 몸도 내가 어떻게 못 하는데 차를 어떻게 자기 맘대로 하겠어요. 사고 나지요.

언약을 ‘믿어야지. 지켜야지. 예수님 믿어야지’라고 하지 마세요. 그게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믿는 부담에서 벗어나세요. 다시 말해서 예수 믿지 마세요. 벌써 그건 남입니다. 이걸 어떻게 바꾸느냐가 문제예요. 제가가 주를 따르면서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 치르고 따르겠습니다’라고 할 때, 그게 너무나 우리는 당연한데,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은 사람들로 죽은 자를 장례 하도록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은 너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나를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의 죽음. 총을 다룰 때 너와 한 몸이듯이, 나의 죽음은 이제 내가 늙어서 발생하고 경험하는 체험이 아니라, 지금 벌써 죽은 상황에서, 죽음이 내 안에 들어온 상황에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걸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미 죽음으로써 죽음을 유일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어렵지요?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두 번 다시 죽음이 나에게 압박을 가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15장 26절에 나옵니다. 제가 말씀드릴 테니 여러분이 이게 어떤 뜻인지 생각해 보세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정말 성경이 만만치 않지요? 이상하게 이거 모르고 그냥 넘어가려니까 찝찝하지 않습니까? ‘에이, 그거는 모르겠고, 나는 그냥 밥 먹고 돈 벌고 살면 되지’라고 한다면, 성도는 이 찝찝함이 남아 있어요. ‘왜 돈 버는데? 왜 사는데?’ 살기 위해서. 그러면 너는 계속해서 사망 편이에요. 사망 편에 속한 사람이에요. 주님 쪽이 아니고. 그럼 주님 쪽은 뭐냐.

“이미 죽었다가 부활한 분이, 네 속에 들어왔잖아”라는 이게 주님의 언약 교체 방법이에요. 우리가 교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고요. 주님의 부활이 우리 속에 들어와요. 우리 속에 들어오면 특징이 뭐냐. 주님의 사망이 내 몸의 일부가 되고, 동시에 주님의 부활이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정확하게 말해서 주님 몸의 일부가 우리예요.

부활하신 주님 몸의 일부, 보이지 않는 주님 몸의 일부가 우리 가시적인 몸이 주님 몸의 연장체이고 그것이 우리라는 겁니다. 이런 변화는 놀라운 변화라서 말을 해줘도 정확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다른 시공간인 하늘나라에서 통용되는 그런 언어입니다. 이게. 성령이 아니고서야 표현되지 않는 표현이에요. 이걸로 바꿔주겠다는 겁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 나오는 거 아시죠? 바벨탑 지을 때,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서 힘을 합쳤어요. “흩어짐을 면하자” 다시 말해서 우리 생각과 마음을 서로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 탑을 쌓고, 그 탑 끝에 하나님도 거기에 포섭해서 포함시키자.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닿게 하자고 했어요. 주께서는 “너희들 기존에 가족 패밀리인 육적인 의미에서, 나는 그 하나 됨을 하나 됨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 뒤에 창세기 12장에 보면 주께서 따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받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새로운 가족을 시작해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새로운 가족을 시작할 때, 아브람이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이고요,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 이삭이에요. 아브람이 이스마엘 낳을 때 창세기 16장이고요, 아브라함이 되어서 이삭을 낳을 때가 창세기 21장입니다. 그 5장의 텀(term)이 있어요. 그 텀이 뭐냐 하면 언약이 삽입되는 텀입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는데, 어떤 70대 노인이 60대 노인을 죽였어요.

둘 다 양봉하는 사람인데, 양봉하는 사람이 양봉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나중에 수사해서 범인을 찾아냈는데, 죽인 이유가 뭐냐 하면 여왕벌이 없어서 죽였다는 거예요. 아마 그 사람이 벌을 산 거 같아요. 샀는데 보니 여왕벌이 없었던 거예요. 조커(포커 카드게임의 으뜸 패)없는 포커를 하자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광 빼고 화투, 고스톱 치자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 사람은 ‘당신의 목숨은 내게 있어야 할 여왕벌보다 더 무가치하다’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 70대 노인을 살인자로 집어넣었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죄인 중의 괴수로 사형시켰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한 마음과 너무 이질적이었어요. 여러분의 여왕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누구든지 내 증인이 되리라.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주님이 여왕벌입니다. 여왕벌이 있는 특징 하나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내 존재는 나를 위함이 아니다’가 여왕벌이 있다, 없다로 결정합니다. 내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일은 ‘사기’라는 겁니다. 완벽한 사기예요. 주님이 자기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 속에 내 허락도 없이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왕벌을 모신 것이 아니고, 여왕벌의 일부가 되고 가족이 되는 거예요.

총을 다룰 때, 내 일부라고 생각하며 다루세요. 이제부터 주님을 믿지 마세요. 주님이 우리를 자기 가족으로 다루는 것을 매 순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매 순간, ‘내가 이런 점에서 달라졌구나. 이런 점에서 나는 세상 것보다 말씀을 더 사랑하게 되었구나’ 이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타박받지 않는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습니까? 아버지가 여왕벌이면 내가 이 집안에 여왕벌인 것을 몰랐습니까?” 이 두 개가 똑같은 말이에요.

여러분 안에 들어오신 귀한 여왕벌을 귀히 모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이 교체되어 들어온 것을 원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아니고, 우리들의 순수한 마음, 믿음의 마음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희생당한 십자가에 그 희생의 마음으로 교회가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으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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