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기표와 기의

아빠와 함께 2025. 2. 24. 09:20

기표와 기의 

2025년 2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3:10-11

(33: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33:11)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로 돌아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구원이란 심판의 유효화를 장착하는 것으로 한 법칙입니다. 즉 인간들은 구원에 실패하게 되면 결코 구원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말씀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실패하지만 이 실패성을 포함시키므로서 구원이 성공적으로 성사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위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것을 ‘자기 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말씀도 자기를 위하여 일어나는 일로 이해합니다. 이게 바로 오류입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기뻐하시려고 만든 상황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왜 이런 상황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의아해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은 나름대로 자신이 기뻐하는 경우를 따로 생각해두면서 살아갑니다. 인간들은 자기만의 기쁨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여 같이 기뻐하라하지만 인간들은 혼자만 기뻐할 것은 따로 갖고자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말씀은 하나님 홀로만의 기쁨으로 전락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표면적으로 제안한 이 기쁨의 기준들은 이미 포로잡혀간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매력거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대국의 사람들로 살아가면서 신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산 시절이 마치 우물 속에 개구리같은 생활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여호와도 없이 사는 나라에서의 삶은 인간 본성에 부합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기쁨과 스스로 구축해나가는 것에 이방민족들은 도가 튼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재량껏, 역량껏 돈많이 벌면, 종교나 국적을 불문하고 대우받는 세계였던 겁니다.

즉 율법 대신 돈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해주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감안해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보다는 자기만의 행복이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나 예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자신의 만족입니다.

포로잡혀 떠난 자들이 다 돌아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소수만 돌아왔지만 그 돌아온 사람들 끼리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방나라로 포로잡혀가면서 잃었던 것을 얼른 만회할 생각으로 돌아왔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곳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사람은 (에스라. 느헤미야)는 철두철미한 율법 준수자되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동안 율법으로부터 멀어졌던 자들은 재교육시켜 율법중심 생활로 강제 변경시키고자 했습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호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기득권자와 배제된 자들 사이의 갈등,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 율법에 진지함을 보이는 사람들과 율법에 냉소적인 사람들의 차별이 사회적인 괴리현상을 낳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예레미야 이 말씀에 대해 역사적 프로젝트는 결국 실패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고 하나님의 기쁨도 얻을 수 없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실패성을 구원의 필수적 요소로서 개입시키십니다. 즉 하나님의 기쁨은 사람들이 도저히 예상못하는 방식으로 제공되는 겁니다.

시편 126:1-3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뭐 어떻게 조치하셨기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자들이 하나님의 기쁨과 같이 기쁨을 갖추게 되는 겁니까? 이사야 65:17에 보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기존의 약속의 땅은 잊으라는 겁니다. 모든 판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짭니다.

이사야 62:4-5에 보면,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등장된 인간들의 취지는 무엇입니까?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되어 있습니다. 기표(記表)라는 것은 ㅂ,ㅓ , ㅅ , ㅡ  같은 것이며  ‘버스’가 품고 있는 의미는 기의(記意)는 품고 있는 뜻, 곧 대중교통 수단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기호적 기능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13:18에 보면,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666은 인간세계에서 그냥 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안목에 의한 기의는 ‘짐승의 수, 곧 인간의 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배후에 짐승에 의해서 놀아나는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6이라는 숫자 세 개를 겹치게 하므로서 결코 7이 될 수없음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흐뭇해 하시고 기뻐하는 경우는 7로 나타납니다. 7일째 날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시고 안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창 2:2)

따라서 짐승에 의해서 짐승과 결탁되어 있음을 모르고 사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기쁨도 참여 할 수 없는 대상자들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요한계시록 7:3-4에 나오는 사람은 숫자 기표는 144,00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144,00은 12×12×1000에 해당됩니다.

12란 인간들 세계에 야곱을 통해서 언약이 투입된 경우를 말합니다. 야곱(=이스라엘)을 통해서 12자녀가 일방적인 하나님의 언약의 결실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적 관여가 12의 원칙을 유지하면서(×12)그 수의 꽉 채울 때까지(×1000) 책임지는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완전한 구원된 자의 수는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에 해당됩니다. 누가  과연 선택된 자일까요? 자신이 결코 구원될 수 없는 실패한 자로 인정하는 그들입니다. 구원이란 실패의 요소를 장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하나님은 멀리하고 인간 세계를 가까이 하고자 하는 악마의 술책이 늘 말씀으로 들통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3강-예레미야 33장 10~11절(기표와 기의)25022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3장 10~11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로 돌아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또는 소감, 하나님 마음의 품은 뜻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될 경우에 내가 기뻐한다는 것과 내 기쁨과 동일하게 기뻐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께 돌아온 자라고 이렇게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오늘 본문에 나왔던 말씀대로 돌아와도 우리가 안 기쁘다면 어떻게 할까요? 안 기쁘다면.

하나님은 기쁜데 우리는 전혀 기쁘질 않아요. 실제로 그런 일이 역사 속에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포로 잡혀가서 처음에는 ‘약속의 땅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했는데, 막상 포로 잡혀가서 살아가 보니, 옛날에 약속의 땅에 살던 때가 구질구질해요. 그때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약속의 땅에 오게 했다, 애굽에서 건져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고 이곳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밖에 나가보니까 더 행복하고 더 기쁜 일이 많아요.

우물안에 개구리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만 이게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하나님 율법 없어도, 약속의 땅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이방 나라에서 풍족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것을. 그건 바로 돈이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세상에 어떤 구석에 가도 복 받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거.

인간의 야망과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는 것을 그들이 체험했어요. 그래서 안 돌아옵니다. 맛을 봤어요. 세상맛을 봤다고요. 막상 나가보니까 하나님 말씀 지키는 것도 귀찮고, 짜증 나고, 하나님의 존재도 모호하고, 차라리 인간들과 경쟁해서 그들에게 승리하여 그들보다 더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상대적으로 성공한 느낌을 받는 그런 행복감이 넘칠 때, ‘아, 사람 사는 것이 이런 맛이구나. 율법 찾을 때는 몰랐지. 이런 좋은 세상이 있는 줄을’

이렇게 나온다면, 예레미야 33장이 그들에게 먹혀들어 가겠습니까? ‘너나 많이 하세요. 이런 구질구질한 생활 너나 많이 해요. 우리는 안 갈랍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기껏 포로 잡혀가도 돌아온 사람이 안 돌아 온 사람보다 적었어요. 10분의 1도 안 돼요. 거의 태반은 그냥 살던 대로 살래. 여기서 인간 대우받고, 돈만 벌면 얼마든지 하녀도 부리며 사는데, 그 약속의 땅 안 가도, 이곳도 거기 못지않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이죠.

쉽게 말해서 ‘하나님 너나 즐기세요. 우리는 따로 나의 즐거움을 챙기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에 돌아온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실패작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돌아온 사람이 있는데, 돌아온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에 나옵니다. 그런데 에스라나 느헤미야에 보면, 돌아온 사람들끼리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율법 지키자’, ‘너무 힘들다. 못 지킨다’라는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철저하게 지키자. 그리고 혹시 포로 잡혀가서 이방 여인과 연애해서 결혼 한 사람은 여자랑 아이는 돌아가라고 하고 너는 파혼해라. 이혼해라’라고 나온 거죠. 뭐, 이혼이 그렇게 나쁜 소식은 아니지만, 서로 사랑한다면, 이것처럼 끔찍한 이야기는 없잖아요. 안 그래도 헤어지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 같으면, 하나님의 법대로 하는 것이 신난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다시 재혼한다는 것은 이혼하는 것보다 더 힘든 삶이에요.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혼하라고 하면서, 이혼하고 혼자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고, 결혼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한 거예요. 그때 사람들이 에스라, 느헤미야에게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너나 하세요. 너나! 힘들어 죽겠는데, 먹을 것도 없는데 무슨 율법을 왜 거론해, 먹을 것도 없는데’ 이스라엘의 역사는요, 우리가 꼬깃꼬깃 감춰놓은 우리의 본심,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지만, 한쪽에, 하나님에 대한 미운 감정이 섬기면서 더욱더 짙어져 가는 우리의 악마적 본성도 아울러서 드러내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뭐 나는 14년이 어쩌고 어쩌고 하지 마세요. 교회는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하나님 안목으로 지적받는 곳이에요. 하나님의 안목입니다. 말씀의 안목으로 지적받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말씀대로 사는 곳이 아니고, 교회는 말씀대로 사는 곳이 아니라, 꼬깃꼬깃 감춰놓은 하나님에게도 안 들키고 싶은 우리 본성, 우리 본심, 나는 하나님의 기쁨보다 내 기쁨이 우선이라는 그 본심, 그걸 하나님께서 기어이 말씀으로 성령으로 다 뽑아내는 곳, 그것을 발굴해 내는 곳, 그곳이 바로 진정한 성령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예레미야에 이스라엘 역사는 백날 이야기해 봐야 실패한 역사입니다. 실패한 역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들은 실패했는데, 과연 이 말씀은 실패했겠느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면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감춰진, 하나님을 얼마나 역겨워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하고 미워하는지를 들춰내는 그것부터가 우리는 상상도 못 한 기쁨의 시작이에요.

내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감당하지 못할 무거운 짐입니다. 그 짐을 우리가 무슨 힘으로 벗어냅니까? 말씀은 지키라고 하고, 우리는 주님 자체가 싫은데요. 어떻게 그 거리감을 좁힐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은 이러합니다. “거리감 좁히지 말고, 솔직하게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 내가 알아서 데려올게”

시편 126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인데요.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꿈꾸는 것 같은 이유가 뭐냐. 이건 내 뜻이라면 절대로 안 돌아오는데, 주님 계신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핵심 되는 것은, 주님 계신 곳이 구약에서는 예루살렘이지만, 신약에는 어디냐 하면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 우편이에요.

우리가 드론입니까? 무슨 수로 하늘로 올라가요? 주님이 기다리는 곳이 하늘나라란 말이죠. 하나님 우편이잖아요. 그곳으로 가면서 예레미야 오늘 본문이 완성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을 다시 데려와서 기쁘게 하겠다. 신랑 신부가 기쁘게 하겠다”라고 할 때, 그 장소가 실패한 지상의 장소가 아니고 하늘나라에 혼인 잔치를 의미하는 겁니다.

이거는 절대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무슨 문제냐 하면, 이게 기뻐해야 하는데, 기쁠 마음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어요. 몸이 아프든지, 배가 고프다든지, 잠이 온다든지 이러면 더욱더 기쁠 마음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이사야 65장 17절에 보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그러니까 이게 왜 기쁘냐 하면 옛날 구닥다리 약속의 땅, 예루살렘 있는 그 동네 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또 마련해요.

제가 젊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신랑 신부가 결혼하게 되면 시집에서 새로 산 깨끗한 이불과 요를 마련해 준다는 거예요. 어릴 때예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때 우리 집안 식구가 15명이었거든요. 새 이불은 위에 삼촌들이 덮지, 밑에 있는 우리 같은 신참, 늦게 태어난 사람들은 그게 없었단 말이죠. 그런데 결혼식하고 집에 오게 되면 새 이불을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신혼생활 마치고 저 대명동에 새집에 가니까, 진짜 할머니가 세상에 새 이불과 새 요를 서문시장에서 사 와서 자라고 깔아줬어요. 그때 분명히 우리가 안 깔았어요. 깔아져 있었어요. 그게 무슨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주님께서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자꾸 안 기쁜 이유가 헌 하늘, 헌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려고, 살아오면서 우리가 배운 가락이 우리 안에 잠복 되어 있고, 온몸에 스며든 그 의식 자체가 이 땅에서 성공해서 보란 듯이 살라는 그게 남아 있기 때문에, 주께서 새 이불에 새 요를 주는 게 별로 와 닿지 않는 거예요.

새 하늘과 새 땅을 쫙 깔아놓는다는 겁니다. 이사야 65장 그다음을 계속 보면, 그때는 신랑이 웃고, 신부가 같이 웃는다는 거예요. 이게 이사야 65장 17절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바깥에 나오면 뭐가 있느냐 하면, 25절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에 성산이 나옵니다. 여기에 뱀이 흙으로 식물을 삼는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드디어 뱀도 그 성산의 일부로 같이 기거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어떤 뜻이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제가 문장을 하나 말할 테니, 잘 들어보세요.

‘구원 안에는 심판을 유효화하는, 심판을 부착한 그것을 구원의 원칙으로 삼으셨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기쁨인데, 왜 기쁘냐 하면, 나는 이런 대우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기 때문에, 천국에서 어느 것 하나 안 기쁜 것이 없고, 안 고마운 것이 없고, 안 즐거운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서, 돈으로 살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으로 어떻게 하느냐. 철저하게 그게 바로 지옥 갈 일인 것을, 매 설교 시간에, 매 말씀을 통해서 그걸 우리가 지적받아야 하죠.

세상에서 따로 행복을 얻겠다는 그 자체가, 딱 그게 지옥행이라는 것을 늘 지적받아야 해요. 지적을. 무슨 행동을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의식 자체가 너무 세상적이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이 땅에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싸우고, 이겨서 살아남고자 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천국과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상관없는 말씀을 성경 자체가 어떻게 적용을 시키느냐. 어떤 것으로 풀어내 주시는가. 그걸 위해서 말씀은 기표(記標)와 기의( 意)로 되어있습니다. 잘 안 들어보던 용어죠. 기표라는 것은 글자가 ‘ㄱ, ㄴ,...’ 이렇게 있으면 그걸 기표라 합니다. 예를 들면 ‘ㅂ,ㅓ , ㅅ , ㅡ’ 이런 한글 자음과 모음의 각각을 기표라고 하고 ‘버스’라고 하면 이건 초등학생도 알아요. ‘아,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차의 한 종류’ 이걸 기의라고 해요.

기호에 달린 표시는 ‘기표’, 그 기호에서 품고 있는 의미는 ‘기의’라고 하는 겁니다. 그 기표와 기의를 왜 설명하느냐. 성경에서 그걸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사용한 대목이 어디에 나오느냐. 요한계시록 13장과 14장에 나옵니다. 13장 18절에 먼저 보면,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육백육십 륙, 숫자로 666이죠. 이게 기표입니다. ‘6’은 누구나 알아요. 5 다음이 6이고, 7 앞에는 6이고 다 알아요. 하지만 의미는 모르는 거예요. 의미. 하나님께서 성경이라는 기표는 줬는데, 문제는 인간이 짐승에 속했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이 기표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기의, 의미를 모르는 거예요. 알지를 못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3장 1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라고 했어요. 이게 어려워요. 짐승의 수입니다. “짐승의 수인데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이게 무슨 말이냐는 거죠. ‘사람의 수인데 사람의 수’라고 하면 이건 이해되는데, ‘짐승의 수는 짐승의 수’라고 하면 이것도 이해되는데, 짐승의 수인데 이게 사람의 수가 된다는 거예요.

여기는 순서가 있다는 거예요. 순서. 기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인간들이 모르는 것은, 인간이 짐승이라는 거, 악마라는 쪽으로 인간이 감각이 없도록 악마가 차단해 놓았기 때문에, 악마는 영적 존재이니까, 영적 존재가 인간으로 하여금 악마 쪽에 내용을 모두 끊어놨기 때문에, 인간은 평생 태어나서 살면서 그저 누구만 상대하는가. 같은 사람만 상대하는 거예요.

사람만 상대해서 사람들은 숫자를 세는데, 그게 뭐냐 하면 ‘1, 2, 3, 4, 5 다음은 6, 6 다음은 7이다. 666도 알지. 6이 세 개 있는 거. 뭐 어쩌라고?’ 끝. 그뿐이에요. ‘666’을 이야기해도 그게 짐승의 수인 줄 모르는 거예요. 인간이 그저 아는 ‘육백육십 륙’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이걸 풀 때는 반드시 짐승의 뜻을 알아야 풀 수 있다는 겁니다.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다른 말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배후에 짐승이 활동하는데, 뭘 가지고 노리개 삼아서 앞장세운다? 인간을 기표로 사용해서 짐승은 자기의 의미를 뒤에 감추고 있다는 거예요. 조종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의’가. 인간이라는 기표를 사용하는데, 인간들의 모든 움직임이 ‘666’ 안에 포함되었다는 겁니다.

이제 풀어야죠. 여러분은 총명이 있잖아요. 지혜가 있잖아요. 풀어야죠. 성령이 있는 사람은,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는데, 이걸 풀어내야 합니다. ‘육백육십 륙’을 어떻게 푸느냐. 성경 전체가 기표니까, 성경 전체를 창세기 1장부터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것이 언제냐 하면 ‘7’이 등장할 때예요.

일곱째 날에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면서 뭐라고 하시느냐, “복 줄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에 들어갈 때 나오는 숫자가 있어요. ‘6’ 다음의 숫자인 ‘7’이에요. 6은 7이 아니고, 7보다 하나 모자란 거예요. 6으로 기뻐한 것이 아니고, 6에서 안식이라는 7을 보태야 하나님이 흡족하시고 기뻐하시는 거예요. (창2:2~3)

오늘 예레미야의 말씀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내 기쁨에 참여하라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주는 기표거든요. 그러면 그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되면 그것은 6에서 탈피가 되는 겁니다. 악마로부터 벗어났을 때나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을 받는 사람 쪽으로, 이미 그쪽 동네로 넘어섰다는 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7’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가 되는데, 그 7은 어떻게 달성되는가.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역시 또 기표가 나옵니다. 4절에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여기에 십사만 사천 나와요. 숫자라는 기표로 하여금, 또는 숫자 ‘144,000’이 나오면 이것 또 풀어야 해요. 왜? 기표니까.

십사만 사천이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도장 찍은 것과 십사만 사천과 무슨 관련성을 찾아야 하겠죠? 십사만 사천은 ‘12 x 12 x 1000’입니다. 그러면 ‘12 x(곱하기)’ 그다음에 12에서 똑같은 12가 나오는데, 뒤에 1000이 나왔다면, ‘x 1000’이라고 하는 것은, 1000은 갈 때까지, 완성될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의 도장 맞은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뜻이에요.

1000은 마지막 숫자이니까. 하나님 보기에 궁극적인 숫자가 1000이니까요. 1000 대까지 간다고 하죠. 1000은 인간의 숫자를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일이 마무리된 것을 1000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x(곱하기)’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하나님께서 책임지겠다는 말은, 끝까지 하나님의 완성 쪽으로 계속 이끌어내겠다는 겁니다. ‘x(곱하기)’로.

따라서, 처음에 이스라엘 지파가 열두 지파예요. 열두 지파인데 열두 지파가 열두 명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십사만 사천이 나오니까, 열둘부터 출발해서, 열둘, 열둘 해서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을 ‘1000’이라는 완료된 기표로써 마감시키겠다고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 열둘 할 때 열둘이 어디서 나왔는가. 열둘은 야곱을 택했을 때, 야곱에게 적용되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실시 되게 되면, 열두 명의 아들이 나와요. 언약에서 새끼 치는 겁니다. 언약에서 새끼 쳐서, 그 새끼 친 것이 새끼 쳐서 하나님의 마무리되는 곳까지 새끼 치게 되면, 모든 구원받은 총수가 숫자라는 기표를 사용하게 되면 십사만 사천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옵니다. 아까 13장 18절 이야기하고요,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라는 것을 바꿔서 이야기하면, “사람이 곧 짐승의 하수인이다. 짐승의 노리갯감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뭐가 중간에 끼어야 하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끼어들면 됩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이 끼어들면, 새 언약은 기어이 하나님의 천국 백성 숫자에 모자람이 없이 마무리 짓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오늘 예레미야가 이야기한 이사야 42장으로 적용시켜보면, 하나님께서는, 아까 말한 문장을 다시 적용하면 ‘구원 안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유효화하는 그런 의미를 부착시켜서 구원하신다’

너희들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이다. 왜? 배후에 악마가 꽉 잡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새 언약을 이루시는 예수님이 예레미야에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오셔서, 주께서 십자가 지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모든 죄, 천국 갈 수 없게 만드는, 악마가 했던 모든 죄를 주께서 혼자서 다 처리하시고, 없애시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은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지, 택하지 않는 사람에에는 그것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택함을 입었다는 거, 늘 듣는 질문이지만, 내가 택함을 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는 질문이 나오는데, 그건 제가 아까 말씀드렸어요. 내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이 특이한 ‘기의’, 나는 기표인데, 어떤 기표냐 하면, 하나님이 너 같은 기표는 심판받고 지옥 가 마땅하다는 기표를 이해하는 사람, 새로운 영적 의미, 우리는 악마와 결부된 존재이고 그래서 지옥 가야 마땅함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깨끗한 이불과 요에 대해서 한없는 기쁨과 감사를 드릴 거예요.

이 ‘요’도 새롭고, 내 몸도 새롭고, 모든 것이 새롭고, 새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마귀에게 당하든지, 주님에게 당하든지, 당하게 된 인생이지, 홀로 내가 남과 상대해서 돈 좀 벌고, 성공하고, 공부 잘해서 출세하고, 그런 거를 자랑질하고, 이런 것은 악마도 배제하고, 주님도 배제하고, 그저 사람만 상대해서, 하나님 싫어하는 마음은 꼬깃꼬깃 집어넣어서 안 들키게 하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 주께서 그거 다 아십니다. “이 666아! 이 꼴보기 싫은 666아!” 주께서 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택함을 받은 여러분들이 발견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은 우리 인간 쪽에서는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한 것이 곧 성공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주님은 성공하셨다는 이 원칙과 법칙이 구원의 법칙인 것을 우리는 발견하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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