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복과 저주 사이

아빠와 함께 2025. 3. 2. 17:33

복과 저주 사이

2025년 3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3:14-17

(33: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33: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33: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33: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구원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제시하신 기준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브라함에서 ‘아브라함 자손’이 이어지면서 복이 무엇인지 저주가 무엇인지 그 정황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의 자손’, 즉 ‘다윗에서 한 의로운 가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오기까지 많은 가지치기가 일어났습니다.

이 가지치기를 통해서 인간들이 예상 못하는데 전혀 다른 복과 저주가 새롭게 정립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 같은 경우에, 자신들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혈족 이외의 모든 종족들은 당연히 저주받을 민족이라고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오기까지 모호한 복의 노선이 점차로 뚜렷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해서 다 복의 민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기준이 뭐냐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과의 차이를 파악해야 합니다. 구약 사람들은 구원받는 데 있어 결코 정규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추후에 새로운 기준의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시대까지 주어진 원칙에 준해서 마치 구원에 합격한 사람들이요 그리고 중도 탈락이 전혀 없을 것 같아 보였지만 계속 이어지는 가지치기에 의해서 그들은 어느새 복의 노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저주의 노선에 속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소규모 지진이나 산사태에서 덮쳐진 범위에 포함되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다가 자기 범위보다 더 넓은 범위의 지진이나 산사태가 일어난다면 자기 방어책이 아무짝도 소용없게 되는 겁니다. 축복노선이 보다 세밀해지면서 기존의 복/저주 기준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결국에는 ‘인간 가운데 아무도 구원받을 없다’로 마감됩니다.

근본적으로 구원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데서 비롯됩니다. 구원이란 현 세상에 살던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구원될 자격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냥 저주받고 멸망받으면 그만입니다. 더 다른 것을 요청하거나 억지부릴 처지가 아닌 것입니다.

구원이란 ‘내가 구원’이 아니라 구원될 수 없는 이 세상에 의도를 가지고 오셔서 자기 세상이 아님에도 이 세상의 온갖 시련을 다 겪고 다시 원래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신 어떤 분에게만 해당됩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요 3:31-32)

이 세상에 속한 자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속하기에 딴 데 간다는 것 자체가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탐욕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떻게 해도 자신의 지니고 있는 본질로 인하여 이 세상의 품성에서 탈출이 불가합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이 세상을 다녀감에 성공하신 분의 몫입니다. ‘구원자’란 먼저 자신부터 구원이 성사되는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부활의 첫 열매란 에녹이나 승천한 엘리야가 아닙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도 아닙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살아나더라도 예수님처럼 살아나야 제대로 된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잃어버렸다’가 얻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버려졌다가 찾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나오는 동전 비유나 한 마리 양 비유가 이런 경우입니다. 탕자가 스스로 아버지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으로 아버지가 마땅히 자신을 아들로 받아줄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계속 잃어버린 자’로 남는 것이 자기에게 합당하다고 여겼습니다.

참으로 진정으로 돌아온 자에게 대해서 구약 때부터 그 원칙이 나와 있습니다. 아가 8:7에 보면,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즉 사랑이 오고부터는 모든 가산이나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라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구원은 먼저 구원된 자의 사랑과 자의에 의해 선물이 제공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인간들이 고대하고 기대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다윗의 가치에서 나온 자들을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인’이라고 지칭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살해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를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요 8:44) 다윗으로부터 가지치기를 할 때, 미리 다윗에게 주어진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 예언에 입각해서 비로소 구원받은 백성이 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이 제공되는데 그 선물을 시편 23편에서 ‘기름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점은 오늘 본문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의로운 다윗의 가지가 나타나면 제대로 섬기는 레위지파도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것은 성령의 기름부임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시편 23:5에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인 인간의 목적과 다릅니다. 목자되시는 분에게 다 맡기고 자신에 대해서 존재감을 갖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신약에서는 십자가 앞에서나 발생되는 상황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을 잃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상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무리 큰 소리쳐 봤자 세상 권세 앞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버림받아 마땅함을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기쁨을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4강-예레미야 33장 14~18절(복과 저주 사이)25030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3장 14~18절입니다. 구약성경 1108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것이며,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다윗은 예수님이고, 레위 지파는 예수님에 속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왕같은 제사장이 된다고 했으니까(벧전2:9), 구약의 예언이 오늘도 성취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했던 예레미야는 구약에서도 중간 부분에 속하지요. 중간 부분의 초반에 속할 때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초반에는 누구를 언급했느냐 하면 아브라함을 언급했어요.

그러면 다윗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아브라함에서 나왔어요. 창세기 12장 2~3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여기서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등장되는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으로 시작했던 이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에 의해서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 중도에 포기한 적이 없다. 줄기차게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성취 되어왔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차이점은 뭐냐. 아브라함은 ‘너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구체화 됩니다. 아브라함이 구체화 되면, 메시아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는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씨, 다윗의 자손이 바로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중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손에서, 더 정확하게 다윗이 자손으로 바꾸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조치가 뭐냐면, 그 굵은 노선을 세밀하게 뽑아내는 작업을 했어요. 굵은 것 가운데서 제끼고, 제끼고 하면서, 알짜배기만 쏙 뽑아내는 작업을 주님께서 충실히 해왔던 겁니다. 그러면 뽑아내면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원칙은 뭐냐.

여기 창세기 12장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고 했어요. 그 뭉텅한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가지치기할 때, 가지치기하는 방법은 뭐냐. 단순히 가지치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저주받을 노선, 이것은 복 받을 노선임을 가지치기하면서 뽑아내는 작업을 했어요. 이걸 제가 오전 설교 때 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정규직이라고 착각했지요. 사실은 비정규직인데. ‘오늘부터 회사 나오지 마’라고 하면 끝나는 거예요. ‘이제부터 너 저주야’라고 하면 끝나는 겁니다. 혼자 괜히 헛꿈을 꿔가면서 ‘나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라는 것은 본인 생각이고, 아직 가지치기하는 것이 끝나지 않았어요.

정규직원은 신약에 와서 확정되는 것이지, 구약은 확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 당시에 다윗의 자손의 메시아 온다고 하니까, 누가 깨춤을 추면서 좋아했느냐 하면, 혈통적으로 다윗의 유다 지파 사람들이 굉장히 희망을 걸었던 거예요.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목적을 이룬 것처럼 여겼던 겁니다. 그러나 목적은 하나님이 이루시지, 저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죠.

그들은 목적을 가지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들은 목표를 가져야 해요. 목표는 뭐든 중간 과정을 이야기하고, 목적은 최종상태를 이야기하거든요. 최종상태에 도달될 때, 그 유대 자손들은 자기가 정규직, 복 받은 정규직으로 알았는데, 주님께서 그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뭡니까? 그들의 아비는 악마였죠.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하나님의 관심사는 가지치기하면서, 복과 저주에 대한 기준을 점점 더 명확하게 가져갑니다. 복과 기준은 네가 생각하는 복과 기준이 아니다. 이 말은 ‘너희들은 복이 뭐고, 저주가 뭔지 규명할 능력이 없다’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을 지키면 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말씀을 알기는 아냐? 네가 ‘말씀을 지키면’이라고 했는데, 말씀 자체를 네가 내용을 모른다. 말씀 자체를” 말씀 자체도 모르면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되겠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친히, 우리가 알고 있던 말씀의 내용과 주께서 가르치는 말씀의 내용이 같지 않다는 것을 계속 해서 구약 내내 알려주시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라고 14~15절에 나와 있지요. 이 말씀을 예레미야에게 할 때가 언제냐 하면 바로, BC 586년에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망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몽땅 망하는 것이 없으면, 진정한 말씀의 취지를 너희가 알지 못한다. 잃어버림이 없으면 찾음도 없다. 집 나감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의미가 없다. 집에 같이 있다고 해서 내 사람 아니고, 나갔다가 돌아오라. 탕자처럼이요. 잃어버렸다가, 네가 알아서 오지 말고, 내가 얻었다고 할 때 너는 얻은 것이 된다. 잃어버린 동전 비유도 그렇고, 잃어버린 양 비유도 그렇습니다.

탕자는 돌아왔지만, 탕자는 아버지가 나를 받아줄지 아닐지, 자기는 아무런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어요. 탕자의 특징은 목표도 없고, 목적도 없었다는 사실. 내가 뭐가 되겠다는 것은, 내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내 주제 파악이 된 겁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는 말이죠. 어떻게 죄인이 구원을 넘봅니까. 지난 수요일 날 설교에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 죄인 주제에, ‘못났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하면서 어떻게 구원을 바라냐는 겁니다.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거짓말하고 있어요. 못났으면 못난 대로 그렇게 마땅히 지옥을 가야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을 어떻게 뽑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에 다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15절에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은 육신을 가진 인간입니다. 거기서 가지가 난다고 했으니까, 일단 다윗은 땡이죠. 왜냐 하면 다윗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이게 참 어려운데요, 구원받을 자는 없어요. 구원자가 구원받게 되어 있어요. 구원자가 이 땅에 와서, 구원받습니다. 왜냐 하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구원이거든요.

그러면 구원이라는 의미가 있으려면,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이, 일단 이 땅에 살다가, 이 땅에서 빠져나올 때, 그때 구원이라는 의미가 정립되는 거예요. 그냥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이건 구원이 아닙니다. 그냥 이 세상에 살아. 따라서 최초 부활의 열매는 예수님이지, 에녹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에요.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바깥에서 왔다가 다시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

이 세상 사람이 바깥에 나가는 그런 것은, 오히려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되죠. 이 세상 사람은 끝까지 이 세상 사람이어야 해요. 이 세상 사람은 개뿔도 아무것도 몰라야 해요. 알아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애초에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구원이고 뭐고 하나님이고, 아는 것은 전혀 없어요.

메시아니 다윗의 자손이니, 성경 말씀이니,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육으로 났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우리 집안에 어떤 치매 노인이 있었는데, 본인이 치매 걸렸다는 것을 전혀 몰라요. 주머니에 돈 좀 있으니까, 자꾸 바깥에 나가서, 차 타고 옛날 살던 동네로 가버려요. 그래서 그 노인의 며느리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돈을 빼앗아버렸습니다.

빼앗김이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받겠다는 이 의지가 하나님을 죽였다면, 하나님이 우선 구원받을 자에게 해줄 것은 구원받겠다는 것부터 빼앗아버려요. 자꾸 자율적으로 돌아다니면 안 되니까요. 손자가 저에게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편지를 쓰면서 선물을 줬어요. 선물을 받고 보니 티니핑이에요. 티니핑은 요즘 유행하는 아이들 애니메이션 캐릭터예요.

그리고 가락지를 주는데, 플라스틱 가락지예요. 손가락도 안 맞아요. 맞는 구석이 없어요. 그걸 선물로 줬을 때, 내가 뭘 느꼈느냐 하면, 선물은 선물 주는 사람 본인이 좋아하는 걸로 주는구나.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게 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는 거예요. 선물을 줄 때, 우리가 행여나 하나님께 기대한 그런 선물이 오질 않아요. 다른 선물이 와요.

이건 인간들이 전혀 좋아하지 않는 선물이에요. 하나님은 좋아요. 하나님은 좋은데, 받는 인간들은 ‘이게 뭐야?’라고 가져다가 버리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복과 저주를 구분하는 방식에 대해서, 시편 23편 5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줬는데, 선물 내용을 읽어드릴 테니, 이 내용이 굉장히 함축적이고 어렵고 복잡해요. 그리고 선물 같지도 않아요. ‘이게 무슨 선물이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게 무슨 선물입니까? 이걸 언제 우리가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기름부음을 언제 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 성령으로 기름 부어주세요. 저는 딴 거 다 싫어요’라고 우리가 요청한 적 있습니까? 시편 뒤에 나오는 아가서에 보면 거기에도 역시 주께서 주신 선물이 나옵니다.

그 선물에 대해서 비교를 하면서 이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줍니다. 아가 8장 7절에 보면,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사랑을 받은 사람은 내가 있는 재산 다 가져가고, 내 목숨 가져가도, ‘가져가! 가져가! 하지만 이 사랑은 못 내놓겠다’라고 이 사랑에 대해서 절대적인 신뢰를 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무엇보다 세냐 하면, 내 목숨 가져가도 사랑은 안 빼앗기겠다는 이유가, 사랑이 죽음보다 세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내 마음에 도장을 찍었다고 했어요. 도장을. 사인처럼 도장을 찍었다고요. 이렇게 되면, 사랑은 뭐냐. 일단, 나를 휘젓고 다니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우울증 걸리게 하고, 나를 늘 공포와 근심, 걱정하게 했던 이 자아라는 것을 주께서 빼내는 작업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 초반을 다시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건 잘 아실 텐데,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의 존재만으로 나의 존재와 대비되면서, 목자라는 존재의 등장으로 내 존재는 이제 힘이 없고 있으나 마나 한 게 되는 거예요. 그래야 부족함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야. 목자에게 이거 달라, 저거 달라,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 존재가 자꾸 부각이 되니까. 주께서 까라고 하면 까고, 가라 하면 가고 그런 거예요. 그냥.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는데, 이건 목자의 안목과 공유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에요. ‘주님, 저기가 푸른 초장인데’라고 내가 지시한다고 목자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이게 주객이 바뀌어야 해요.

인도하시고 보니 푸른 초장이고, 쉴만한 물가가 된 거예요. 이건 내가 전에 내 영혼을 쉬기 위해서 계산했던 모든 어떤 상황들과 전혀 다른 상황이에요. ‘돈푼이나 있고 자식들 잘되고 화목하면, 나는 편히 쉬겠다’라는 이게 나의 노림수인데, 그 노림수를 완전히 묵살해버리고, 목자가 친히 마련했고, 목자가 함께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게 어디든지 쉴만한 물가가 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 취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미리 생각하면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나 이제 종교 바꿀까? 이건 이제 물렸어. 물렸어.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하나님이여, 내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되겠지요. 그런데 3절에 보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이름이라는 것은 벌써 작살났어요. 소용없게 되었어요.

생물학에서 이런 점을 생물학 내용을 가지고 연관시키면 이렇습니다. 체세포가 있고 하나는 줄기세포가 있어요. 성인은 줄기세포가 얼마 없어서 골수나 혈액 안에 소량만 남아있어요. 그런데 줄기세포가 뭐냐 하면, 어떤 역할도 아직은 맡지 않은 상태로 있다가, 그렇게 대기하고 있다가, 기존의 체세포가 노화되면 거기에 대타로 들어가서 그 기능을 대신하는 세포가 줄기세포예요.

줄기세포가 많을 것 같으면 우리 인간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겠죠. 그런데 생물에 보면 히드라 불가리스(Hydra vulgaris)라는 종은 전체가 줄기세포예요. 전체가. 안 죽어요. 늙지도 않고요. 그때, 그때마다 짜잔! 하고 변신하면 되니까. ‘미키 17’이라는 봉준호 감독 영화에, 초반에 3분쯤 지나고 이런 대사가 나와요. 미키 17이라는 사람이 낯선 행성에 있는 얼음동굴에 빠졌는데, 그를 구출하러 오면서 구출자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초반 대사부터 아주 충격적이에요. ‘미키 17! 아직 안 죽었어? 아~ 아직 안 죽었구나. 너의 모든 정보는 벽돌같인 생긴 저장소에 다 있으니까, 그냥 죽어! 우리는 너 놔두고 그냥 간다~’라고 나와요. 다시 미키 18로 프린트하면 되니까요. 일종의 윤회죠. 그러다가 도중에 기계가 잘못되어서 미키 17이 살아있는데도 복제가 되어서, 미키 17이랑 18이랑 난리도 아니에요.

그 영화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Thema)가 나오는데, 그것은 케첩 같은 붉은 소스(sauce)입니다. 이 세상은 그 대장 빼놓고는 나머지 존재들이 다 음식 첨가물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누구 하나 맛있게 잡수는 음식을 위해서, 나머지는 첨가물이에요. 트럼프 대통령 하나를 위해서 나머지 국가들은 하나의 첨가물, 케첩 소스와 같다는 거죠. 그 영화의 핵심이 바로 그 소스(sauce)입니다. 그냥 짜서 쓰는 소스지요.

외계물이든 인간이든 소스로 하면 된다는 거예요. 시간이 좀 가더라도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제가 빨리 읽어볼게요. 1632년 갈릴레오(이름) 갈릴레이(성)가 재판받으면서, 갈릴레이가 이야기한 그대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고 빈센쪼 갈릴레이의 아들이며, 70살의 플로렌스 출신인 본인 갈릴레오는
이 법정 앞에서 심문을 받으며,
숭고하고 거룩하신 대재판관님 앞에 무릅을 꿇고,
이교도적 사악함에 반대하고 기독교적 가치를 숭상하면서,
제 앞에 놓인 성서 위에 손을 얹고 맹세하나니,
저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었으며 지금도 믿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앞으로도 성스러운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과 전도하심을 믿을 것이옵니다.
이 성스러운 법정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생각,
즉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이 잘못된 생각을 완전히 버릴 것과
말이든지 글이든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런 잘못된 사상을 옹호하거나 설파하지 말 것을 내게 선고하고,
이런 잘못된 사상이 성서에 위배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유죄판결이 내려진 이런 새로운 사상을 다루는 책을 써서 발간하여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런 사상의 타당성을 설득하는 논지를 제시하였기 때문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돌고 있으며, 움직이지 않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믿고 있는 이단자의 의혹이 있다는 것을 선고받았사옵니다.

제가 아까 기도할 때, 기도 제목이 뭐냐 하면 말씀 따라 움직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힘 따라 움직입니다. 힘이 이득이니까. 내게 무엇이 이득이냐가 우선 가치이지, 말씀이 우선 가치가 아닙니다. 나에게 이득이 되고 힘이 된다면 교회도 안 나오고 그래요. 교회고 뭐고, 말씀도 안 믿고 하나님도 안 믿어요. 이게 인간이고 그게 갈릴레오입니다. 갈릴레오가 나오는 그런 노래도 있어요. (노래 제목: Bohemian Rhapsody, 가수:Queen)

아직 남아있는데, 조금만 더 할게요.

따라서 숭고하신 대재판관님과 모든 진실된 기독교인의 마음속에서 저에 관한 이러한 강한 의혹이 불식되기를 앙망하오며, (나에게 있는 불신, 재판과의 고매한 재판으로 인해 나에게서 그게 없어지길 바란다는 뜻이죠)
진실한 충성심과 진정한 마음으로 앞서 고백한 잘못과 이단의 견해,
그리고 모든 잘못과 이단과 성스러운 교회에 반하는 어떠한 종파도 버리고 저주하며 혐오하옵니다. (이건 베드로가 예수님 저주한 것과 똑같아요)
앞으로 다시는 저에 관한 이러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떠한 것도
말로든 글로든 절대 언급하거나 주장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또한 어떤 이단자나 이단의 의심이 있는 자를 알게 되면,
즉시 그를 이 법정에 고발하겠사옵니다.

‘뭐? 지구가 돈다고? 태양이 돌아. 지구는 그냥 있어’라고 이야기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이 안 왔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마치 자기가 믿는 자처럼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구원은 이렇게 말씀을 보는 즉시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라고 들춰져야 하고, 그게 들춰질 때, 그것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바로, 어떠냐 하면 다윗에서 갈라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나, 십자가가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그동안 믿은 것이 믿은 것이 아니고 장난치고 있었다는 사실, 사실은 세상 권력을 얻고자 탐하면서, 아닌 척 그것을 억지로 누르면서, 신앙인인 척했던 이거, 이걸 이제부터는 기분 좋게 고백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후벼파서 우리의 실상을 날마다 들춰내는 이 은혜가 구원의 능력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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