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성전과 말씀

아빠와 함께 2025. 2. 2. 22:25

성전과 말씀

2025년 2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2:26-30

(32:26)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32:28)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 성을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일 것인즉 그가 취할 것이라
(32:29) 이 성을 치는 갈대아인이 와서 이 성읍에 불을 놓아 성과 집 곧 그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나를 격노케 한 집들을 사르리니
(32:30)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예로부터 내 목전에 악만 행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은 그 손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나를 격노케 한 것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인간에게 있어 신은 없습니다. 신이란 인간이 제조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신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래는 없지만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신을 만들고 골라 잡으면 되니까요. 이 세상의 신들은 골라 섬기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없는 신을 인간들은 왜 필요로 할까요?

그것은 인간들의 마음의 불균형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이 일단 선택한 것의 부정적인 면과, 선택하지 않고 버린 것들에 속 있는 긍정적인면 사이의 갈등으로 늘 평화롭지 못하고 흔들이게 됩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니 인간은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행복을 위해서라도 신을 자기 속에 끌어당기므로서 부조화를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비록 현재 나의 삶은 부정적이지만 이것마저 원대한 신의 뜻의 일부인 것을 내가 받아들이면 나의 마음에 평정을 찾을 수 있어서 나는 다시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인간이 골라잡은 신을 성경에서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과 참 하나님의 출현성이 다릅니다.

참 하나님은 불가운데서 나왔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여기서 참 하나님께서는 ‘질투심’을 띠고 나타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 질투란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감정을 갖고 이스라엘에 나타났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생각하는 신과 지상에서 경쟁관계을 띠고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간적인 면’을 띠고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질투란 3각 관계에서나 나올 이야기가 아닙니까? 대범하지 않고 집착하는 경우에서나 성립되는 개념이 아닙니까?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감정 수준에 섞여들어오셨다는 말입니다. 즉 참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사랑’으로 나타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해서 나타난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다음 세 가지를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없으신 것이 아니라 분명코 있다는 겁니다. ‘이름’을 지니고 나타났다는 겁니다. 둘째, 그런데 그 이름은 천상에 속한 본질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는 이름(출 3:14)입니다. 셋째는, 그 하나님께서는 질투심을 지니고 계시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20:4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상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개별적 사고방식으로 살기에 타인의 잘못과 자기와 무관하다고 여깁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죽었고’고 하니 자기는 안 따먹었기에 때문에 자기와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겨 이스라엘 성전이 불탔다고 하니, ‘나는 단군의 자손이라서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혈육관계가 내가 선택한다고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관계입니다. 부모 자식 관계가 그러합니다. 이와마찬지로 하나님의 나타남도 이와같습니다. 일방적으로 찾아오시고 일방적으로 나를 질투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질투케 하는 것이 어떤 게 있을까요?

에스겔 8:3에 보면,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전에서 우상, 곧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질투심을 자극했다는 겁니다. 이 질투심에 대해서 ‘불같이 일어난다고’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필경은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되”(신 20:29)

바로 이 불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전소시킨 바벨론 군대에 이한 불길입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은 곧 ‘성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상주하시는 곳으로 이스라엘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필히 불타는 질투심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인간들 세계는 신은 애초부터 없고 오로지 자신의 마음평정과 행복을 위해 신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로지 자신만 사랑하는 인간들이 자기 말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형성되는 사랑에 과연 끼들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질투를 극복하는 사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요한계시록 10:9-10에 나옵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즉 특정 인물을 성전화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름께서 인간 속으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인간 내부에는 말씀으로 인하여 속쓰림 현상이 일어납니다. 인간에게는 야심과 야망이 가득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본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즉 이미 인간에게 사랑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온 사랑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사랑입니다. 결국 인간이 천국 가서 하는 역할은 예수님 홀로 다 이루신 그 하나님 사랑의 성과에 천사처럼 찬미로 참여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만을 최종 사랑하는 우리들의 욕망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고 있는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0강-예레미야 32장 26~30절(성전과 말씀)25020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2장 26~30절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 성을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일 것인즉 그가 취할 것이라, 이 성을 치는 갈대아인이 와서 이 성읍에 불을 놓아 성과 집 곧 그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나를 격노케 한 집들을 사르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예로부터 내 목전에 악만 행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은 그 손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나를 격노케 한 것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는 안 했어요’라는 생각이 들지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희들은 선악과 구경도 못 했어요. 나는 안 따먹었어요’라고 하지요. 나는 안 따먹었다는 생각이 개별적 생각입니다. 아담이 없으면 우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에게 일어난 일은 따라고 내 일은 순수하게 영으로부터 새로 시작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 아담에게 일어난 것은 나와 상관없다고 하고, 나와 관련 없다고 하지요. 아담에게 일어난 일을 내가 왜 책임져야 하느냐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요. 이것이 바로 처음 지으신 순수한 아담과 다른, 오염되고 이미 고장 난 아담, 아담에게 저항하는 아담, 하나님께 대드는 아담, 가짜 아담으로 계속 그렇게 아담의 자식들로 번식된 그러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일이 오늘도 마찬가지죠.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성전이 지어졌는데, “이 성전에서 너희들은 바알을 섬기고, 우상을 섬겼다. 그래서 이 성을 바벨론 사람, 갈대아인 느부갓네살에게 다 불 지르라고 내가 넘겨주겠다”라고 본문에 나와 있잖아요. ‘나는 안 그랬어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고 단군의 후손이에요. 왜 단군의 후손이 굳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까지 신경을 쓰고 관심을 써야 합니까?’라는 이런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것도 개별자 의식이에요. 차라리 성전이 불타버린 이스라엘은 그런 의미에서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성전이 불태워질 때, 세상 사람들은 바벨론 나라가 와서 이스라엘을 불태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선지자를 보낸 겁니다. “내가 불태웠다. 이 하나님이 불태웠다”라는 이게 왜 다행스럽고 축복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없잖아요. 있다고 여기고 교회가 섬기는 것은 자기들 자유고, 하나님이 없다는 식으로 우리는 줄곧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과학이란 것은, 하나님이 떠난 그 현장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인간의 지혜로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과학입니다. 그리고 그 과학은, 과학적 사고방식은 이미 인간세계에 누구나 동의하는 진리처럼, 그렇게 행사하는 이런 데서 우리는 출발을 한 겁니다. 과학적인 거.

과학적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궁극적으로 내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만 따지는 사고방식이죠. 왜? 하나님은 없으니까, 하나님은 안 계시니까, 하나님은 안 계시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면 내 마음이 편하니까. 내 마음이 편하다는, 평안하다는 이익을 나에게 제공하니까, 신은 없지만 신이 믿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속에 안정을 취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겼다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은 우상을 선택한 거죠. 말이 잘못되었는데, 우상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드는 신을, 하나님을 선택한 거죠. 인간의 모든 선택은, 선택을 하고 난 뒤에, 내가 선택한 것에 들어있는 부정적인 면과 내가 선택을 안 하고 버린 긍정적인 면으로 인해, 인간 속에 부조화가 발생 됩니다. 갈등이 생겨요.

‘그거 살 걸. 주식이 그게 오를 줄 몰랐지. 살 걸. 펀드를 거기에다 하는 건데...’라고 이미 선택해 놓고 있는 부정적인 것과 선택을 하고 버린 데서 오는 긍정적인 것을 볼 때, 뭔가 나에게 손실이 왔다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 남자랑 결혼 할 걸. 괜히 튕겼어. 튕길 주제도 못 되면서 튕긴 거야’

그러면 튕긴 쪽에 남자의 여자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한번 내 남편 데려가서 살아보지. 네가 아직 지옥을 경험하지 못했구나. 그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을 뻔했다고? 행복하다고? 가져가. 가져가. 내가 당근마켓에 내놨으니까 그냥 가져가서 한번 살아봐. 어떤 남자인지’ 그러니까 인간은 내 선택이 안 되는 것에 완전히 메여 삽니다. 가장 선택이 안 되는 결정적인 대상은 자식입니다. 이건 자식이 아니고 ‘자슥’이죠.

내 맘대로 안 돼요. 내 맘대로 될 수가 없어요.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자식 입장에서는 짜증을 내는 이유가, 부모가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거죠. 둘 다 부조화죠. 부조화. ‘아, 내가 왜 저런 아버지를 만나서’ 이게 내 선택과 상관없지요. 그리고 자식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아픈 자식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좀 건강하게 태어나지. 나도 내 나름의 행복이라는 것이 있잖아. 네가 뭔데 내 행복을 다 망쳐버려’라고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부조화는 갖고 있으면 안 되겠죠. 해결해야 하겠죠. 그 방법이 뭐냐. 신을 찾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잘못된 선택을 무산시킬 수 있는 제대로 된 선택은,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없어요.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왜? 내 안에 갈등과 정신적 부조화를 신을 끌어당겨서 종교라는 것을 갖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이 없는 게 아닙니다. 무신론자가 아니고, 내 마음에 드는, 내가 원하는 신을 골랐다는 것이 하나님이 성전을 불태워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무엇인가. 이걸 다시 생각해야 해요. 하나님이 사랑해서 성전을 세웠다는 것이 바른 이야기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거기에 성전을 꽂아 넣은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해서, 신약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해서 이스라엘에 미리 거기에 성전이라는 부동산을 잡고, 성전을 세운 겁니다. 성전이 세워지고 불타는 과정, 그것이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을 방문하고 소실되는 과정, 그 동일한 원칙과 취지가 거기에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지고, “내가 너에게 꽂아준, 내가 너와 동행하는 그 하나님 잘 관리해라. 잘 섬겨라. 그리고 만일 너희가 관리를 잘 못한다면,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개념들이 나오는데, 그중에 하나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질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감정 아니겠습니까?

인간 있음과 인간 있음 사이에 질투라는 것이 성립된단 말이죠.
일단 첫 번째는, 있다는 거. 내가 있고 네가 있다는 거.
두 번째는, 그 있는 너를 내가 사랑했다는 거.
세 번째는, 내 사랑이 훼손되지 않게 너는 주의하라는 거.

이 세 가지가 질투 안에 담겨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없는데, 하나님 쪽에서는 바빠요. 뭔가 한 보따리, 가방에 가득 담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덤터기로 확 쏟아부었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고 하시는 거죠. 신명기 4장 24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널 사랑한다. 사랑했겠지’라는 식으로 약간은 납득갈 것 같고 아닐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느낌인데, 여기서 질투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불이에요. 질투와 불의 만남.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죠? 질투와 불의 만남. 질투와 불과의 연결. 이 연결을 여러분이 아시려면, 여러분이 하나 더 집어넣으셔야 합니다. 질투와 불과 그리고 사랑.

사랑을 거기에 집어넣어야 해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는 분을 하나님이 사랑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누구 소유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했던 하나님, 그걸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과 동행하기 위해서, 지상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없어도 되는 이름으르 부여받고 일하시는 분, 그 이름에는 지상에 이름이 있다는 지상의 요소와 이름이 없어도 된다는 하늘의 요소 둘 다를 포함한 이름이에요.

그 이름이 뭐냐. “나는 스스로 있다”(출3:14) 스스로 있다는 말은 나의 사랑에 대상은 나라는 의미예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 하나님이라는 ‘나’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나’를 서로 사랑하고 주고받는 그 관계가 사랑의 관계이고 너희들은 그 사랑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하나님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죠.

하나님 자기 사이에 게임이 되고 만 겁니다. 자, 인간은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나타났는데, ‘야, 인간 속에 하나님이 나타났으니까, 이제 하나님이 인간과 섞이겠지’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요. 섞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 인간들에게만 그걸 나타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타내게 되면 이스라엘의 역할은 뭐냐. 증인입니다. 증인. 하나님은 이런 분인 것을 증거하는 그 역할이 바로 처음부터 인간을 만드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과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너무나 대단한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관객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된 사실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참여하는 조건이 뭐냐. 인간이 선택하는 신은 일체 못 들어가요.

인간이 선택하는 신은, 저번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나를 위한 신이에요. 나를 위한 신을 하나님은 두 자로 ‘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가서 8장 6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여호와의 불이 나오는데, 여호와 불 안에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인간에게 도착하면 뭐가 되느냐. 질투가 됩니다. 질투가 된다는 말은 뭘 염두에 두느냐. 인간은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의 참된 신은 줘도 모르고 그저 본인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질투의 대상으로서, 질투당 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인간이 출발해야 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찾아옴으로써 비로소 밝혀지는 일이에요.

내가 평소에 얼마나 잘 살고, 그 잘 사는 덕분에 얼마나 훌륭하냐고, 자기를 점검하고 자기를 측정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무서움에 떨며, 무서움에 짓눌리면서, 벌벌 떨며 산다. ‘하나님이여, 이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너는 공포에 떨 자격조차 없다”

그래서 해방할 자격도 역시 없지요. 홍콩에 집값이 비싸요. 24평짜리 집이 26억 합니다. 그런데 홍콩에 있다 보면 저렴한 주택이 나와요. 3분의 1 정도의 가격으로 나오면, 24억짜리가 8억으로 구매가 가능한 팁같은 것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24억 집을 8억에 살 수 있느냐. 그게 조건이 있어요. 귀신 나온 집, 또는 누가 자살한 집, 또는 살인사건 일어난 집, 8살짜리 아이가 화장실에서 까불다가 창문으로 추락한 집은 3분의 1의 가격으로 나옵니다.

귀신이 머물러서 나를 힘들게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사실, 어떤 가정에 사고 일어나면, 그 가정은 이사를 제일 먼저 하고 싶어요. 왜? 그 기억 때문에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급하게 내놓는 거예요. 그러면 아파트라도 헐값에 살 수 있는 거죠. 사는 사람이야, 자기 기억이 아니니까 그냥 새로 살면 되죠. 이처럼 인간은 무서움에 대해서 아주 질겁을 하고 싫어합니다.

대단히 인간은 겁을 내요. 겁이 나기 때문에 나를 지켜주는 우상을 안 섬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전이 불탔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너는 어느 신을 믿나?’ ‘여호와요’ ‘여호와가 너희를 버렸다. 됐냐?’ 너희들이 원하는 여호와가 진짜 여호와가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버렸다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낸 겁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성경을 보겠다는데 이게 소통이 되겠습니까? 나를 포기하기 위해서 성경 보는 게 아니고, 나 잘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데, 성경이 그 뜻을 전달해 줍니까? 중간에 사이비기독교만 와서 긍정적 마인드를 심어주고 있지요.

에스겔 8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하나님은 성전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해 줘요.

성전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데, 그냥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를 데리고 설명해 줍니다. 이제 오후 설교에 핵심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핵심 부분입니다. 요한계시록 10장 9~10절에 보면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이 선지자의 육신은요,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는 성전이 불타버리게 된 경로와 절차를 인간 속에다가 집어넣어 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가 우리 안에 들어가서 십자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되는 겁니다. 그냥 십자가 밖에 있으면, 이제는 십자가 이용해서 내 미래를 천국에 들여보내려고 그런 수작을 부릴 거예요.

‘십자가 좋지. 그 피로 용서받으니까’라고. 그러면서 자기는 십자가 안에 안 들어가 있어요. 십자가를 그냥 바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선지자는 아예 말씀을 보는 게 아니고,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꿀같이 달지요. 단데, 문제는 이 죄 많은 육신과 내부에서 섞이게 되니까, 말씀이 말씀 되기 위해서 고집을 부리니까, 사랑이 사랑답게 고집을 부리니까, 내가 아파요.

너무 아픈 거예요. 우리의 본성과 너무 차이 나니까, 차이남의 간격으로 인해 내가 너무 아픈 거예요. ‘그럼, 목사님, 사랑은 뭡니까?’ 사랑은 간단해요. 뭐든지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사랑이죠. 그러면 내 뜻을 안 내세우면 되잖아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 욕망이 자기 뜻을 앞장세우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욕망이. 그게 요한1서 2장에 나옵니다.

우리 욕망의 구조를 살펴봅시다. 요한1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그러니까 육신입니다. 육신 속에서 계속 내 뜻이 나와요. 내 뜻이 뭐냐. 내가 세상에서 보고 부러워했던 거, 내가 보면서 나는 저렇게 되고 싶어 하는 거. ‘나도 손자 둘이 다 의대 가면 좋겠다’라는 그런 거. ‘딸 하나 있으면 그거는 변호사 시키면 좋겠다’라는 이런 거.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면, 내가 들었거든요. 내가 보았단 말이죠. 살아가면서. 그러니까 그걸 사수하고, 수비하고, 지켜내고, 그걸 달성하고 싶죠. ‘홍콩의 아파트가 24억? 홍콩에 나도 집 하나 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왜 합니까? 들었거든요. 홍콩이라는 곳을. 미국에 맨해튼의 집값이 얼마나 비싼지 들었단 말이죠. 펜트하우스가 수백억 넘는 것을 들었단 말이죠.

없으면? ‘하여튼, 도둑들이 그런 것을 사는 거야’라고 하지만, 그런 도둑이 못 되는 나에 대한 자괴감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너는 그런 200억 되는 도둑질도 못 하고 이게 뭐야. 내 인생 이게 뭐야. 자기 인생의 선택에 부정적인 것과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서 생기는 긍정적인 것에 의해서 나는 ‘이게 뭐~야~~이 인생 꼬라지가 뭐~야~’라고 자기에 대해 정서적 불안정인 부조화가 발생하죠.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제가 연속극 잘 안 보는데, 우연히 보니까, 임금과 중전이 어두컴컴한 궁궐에서 식사하는 장면이 나왔어요. ‘원경’이라는 드라마 7회에서 나왔어요. 제가 그걸 보면서 ‘전기도 안 들어오는 무식한 시대에서, 그게 사랑이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두컴컴한데 촛불 켜놓고 밥 먹으면, 그게 밥맛이 나겠어요? 중전이랑 임금이?

주위에는 후궁들이 질투하며 지켜보고 있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시대에 어두컴컴한 데서 밥 먹는 중전 될래, 아니면 대낮같이 가로등 확 들어오는 전기가 있는 이 시대에 살래? 당연히 전기 들어오는 시대에 살죠. 과학도 미개발된 무식하고 무지한 시대 말고. 우리는 이 시대가 얼마나 분에 넘치게 호사스럽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욕망의 수준이 너무 위로 오버했어요.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일하기 싫거든 먹지 말라. 물론 젊은 사람들은 이 구절 보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차라리, 안 먹고 일 안 할래’라고 해요. 아버지 엄마가 먹을 것을 주니까, 그렇게 배짱 튕기죠.

그러나 하나님이 볼 때는 뭐냐. 너는 살 가치도 없다는 거예요. 너의 보물을 땅에 두는 이상은 너의 존재 자체가 하늘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전이 불탔다는 말은 하늘나라에 너같은 존재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뭐냐. 해결책은 아까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인간 속에다가 ‘너같은 인간은 애초부터 하늘나라 갈 가치도 없어’라는 내용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오게 되면 쓰이는 겁니다. 선지자처럼. 뭘? 아버지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사랑에서 우리는 시녀처럼, 또는 신부처럼, 같이 박수치고 찬미하는 거, 예수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그 천사의 기능처럼. 하나님의 주를 향한 그 사랑, 그 사랑다운 사랑이고 유일한 사랑, 오직 자식만 몸을 바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룬 그 사랑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그 증인,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 초청장을 보내왔는데, 그 초청장이 바로 성령이라는 사랑입니다.

끝으로 베드로 전서 4장 14절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성령을 받았냐, 안 받았냐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를 위해서 고난받는 거 말고, 그리스도 이야기한다고 고난받을 때, 땡잡은 거죠. 영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토록 나 자신을 위해 살다가 어느 날 성령이 오셔서, 너를 위해 사는 것이 우상이며,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께 찬미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 나라의 일인 것을 알려주시니 이 영광, 이 고마움을 영원토록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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