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성경 구절도 인간은 못 알아듣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24을 통해서 인간들이 이 대화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즉 인간들이 떨어져 나간 것은 생명에서 떨어져 나간 겁니다. 이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여기는 한 생명과는 결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언어는 하늘 언어와 벌써 끊어진 상태에 있습니다. 그 예 중의 하나가 바로 ‘생명책’에 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나’는 ‘생명’과 만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입니다.
인간과 하나님과 끊어진 사이라는 점을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 5:43)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여호와를 믿는데 철저한 그들 손에 자기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쓰는 용어나 의미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생명책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사람이 낄 자리가 못됩니다. 이스라엘도 망했으니 이스라엘도 이 생명책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생명나무의 통로는 오직 하나 ‘야곱’입니다.
진정한 야곱, 진정한 이스라엘이 생명책의 입구가 됩니다. 이 유일한 이스라엘로 오신 분이 자기 백성을 불러내는 형식으로 이 생명책 안으로 들어설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아는 내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나가 되도록 불러내십니다. 내가 찾아가는 식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불러내는 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불러내는 식입니다. “어떻게 (그대가) 나를 아시나이까?”(요 1:48) 즉 내가 아는 나는 주님으로 인해 죽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더는 할 말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알 것은 안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뜻과 늘 반대가 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그 예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4-15) 베드로는 마음 속에 분명히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을 그르다는 판단에 문제 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겨냥하여 주님께서 오히려 찾아오시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는 각자 자기 존재를 지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 존재가 깨어져 버리고 ‘십자가 사건’이 되셨습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다 이루었다’가 됩니다.(요 19:30)
사건이란 하나님의 일이 동결되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의 실정을 충분히 경험케 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그 어떤 판단을 하든지 간에 더러운 귀신의 지배를 받으면서 함께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항상 자기 행함을 자랑할 마음 태세를 갖추면서 삽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동결할 생각이 없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의 행위의 결과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모든 작업이 동결되었다면 이는 인간의 그 모든 행위도 마귀일로 드러내면서 동결(굳어졌다)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남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이유는 모든 일을 죽여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이 된다면 더는 ‘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구원작업은 사건화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만 성취된 유일한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 내용은 아가 4:12에 나옵니다. “You are garden up, my sister, my bride. You are a spring enclosed, a sealed fountain” 즉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입니다.
신랑의 단독 이름을 갖게 되면서 신부의 자기 이름, 자기 존재성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신랑과 더불어 가족이 되는 사건으로 충분합니다. 신랑에 의해서 생산된 신부는 안에 공백의 장소를 갖게 됩니다. 과거의 충분히 죄인이었기에 중생, 즉 거듭남 이후에는 충분한 의인이 됩니다.
이 사실을 햄버거의 아래 위 두 조각을 빵으로 여겨봅시다. 두 빵 조각은 중첩되고 그 안에 패티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 패티에서 ‘씻음’의 작업이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샘이 터져 나오듯이 말입니다. 씻음을 신랑의 ‘피’로서만 성립합니다. 육즙이 흘러 넘치듯이 피만 드러내는 기능을 성도가 보여주고 말하게 됩니다.
이 말이 곧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됩니다. 하늘의 언어이거든요.
마르다,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는 자진해서 자신의 목숨같은 향수를 예수님의 발 앞에 붓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해설해주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 12:7)
마리아는 스스로 예수님의 시신을 담는 관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구원’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외형입니다. 곽잡힌 형식입니다.
성도가 외치는 말 중에 세상 사람이 가장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은 ‘범사에 감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대해서 더는 흥미를 갖지 않게 해주옵소서.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운 것들이 차갑게 동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