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이런 취지로 해서 예수님 부활의 영, 곧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인간은 비로소 과거를 새롭게 보게 됩니다. 아무리 길게 인생을 살아도 몽땅 다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이미 자신은 ‘죽은 자’가 됩니다. 죽어 있는 상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 있기에 살아닜는 겁니다.
십자가 관 속에 누워서 세상의 소리를 듣습니다. 웅웅거리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들 어두운 그림자일 뿐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처소는 피가 있는 바로 그곳입니다. 성도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살려내기에 하루하루 계속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처지에서는 그 어떤 심각한 일은 없습니다. 그저 당연한 일들만 연속될 뿐입니다. 이미 죽은 자이기에 영원한 고정성인 예수님의 피의 효력에 둘러싸여 삽니다. ‘나’라는 육신이 뿜어내는 모든 것은 거짓이 아닌 게 없고 가짜가 아닌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엉터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현상이 늘 새롭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즉 하늘 은사의 새로움이란 이 지상 삶은 기껏 그림자에 불과함을 반복해서 파헤쳐질 때마다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란 지옥의 삶의 초입이요 매표소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선과 악을 아는 티를 마음껏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선이 곧 악이요, 악이 곧 선이었습니다. 서로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선이란 죽음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 확고한 십자가 피 앞에서 성도는 비로소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즉 “나는 무얼해도 거짓이요 가짜며 특히 바르게 살고 바르게 믿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바로 그 자체가 천국을 가로막은 장애물이다”는 겁니다. 교회가 천국을 막고 구원의지가 천국을 막은 겁니다.
이런 사실을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자신의 하는 짓을 매일 새삼 바라보게 됩니다. 마치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자부하는 가운데 바벨론 대신에게 유다나라의 창고를 보여주는 태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사 39:4)
성도는 자신의 과거를 심판하는 권한을 성령을 통해 부여받았습니다. 자기 부정의 연속과 반복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효력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