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과거 교체

아빠와 함께 2024. 9. 2. 21:17

[24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3 - 과거교체

24,07,15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5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제가 신학생들과 대화한 내용이 나오는데, 제가 그래도 약 20년 동안을 총신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겁니다. 물론 과외수업이었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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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 왜 교회를 하려고 하십니까?
* 신학생 :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 이근호 : 교회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교회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만듭니다
* 신학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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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들이 왜 당황하는고 하니, 제가 하는 말이 맞기 때문인데, 교회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만드신다는 겁니다. 신학생들은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들이 만듭니다" 라고 하고 싶은데, 그래서 신학교에 왔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만든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즉 믿음이 없다는 것이죠.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교회를 만드시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머리가 있다고 하면, 그 지체는 어떻게 됩니까? 저절로 자라는데, 즉 교회는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엡 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다가 사람을 치었는데, 그러면 그냥 갈 수 있습니까?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준다는 겁니다. 물론 그냥 가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다친 쪽에서 뺑소니범으로 신고를 해서 경찰이 출동하고 난리가 난다는 말이죠.

* 사람이 예수님을 치고 그냥 갈 수 있습니까?

그러면 "차가 사람을 치고 그냥 갈 수 있습니까?" 라는 문장을, "사람이 예수님을 치고 그냥 갈 수 있습니까?" 라고 바꾸어보자는 겁니다. 여기 사람을 인류라고 보면, 이 인류는 이스라엘과 그 외의 민족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방인의 대표로 본디오 빌라도를, 유대인들의 대표로 바리새인들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치고 갔다고 하면, 예수님 쪽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냥 참고 있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보고 입을 다물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이미 죽었으니 그냥 넘어가고, 우리에게 복이나 주세요"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사람들에게 치어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나온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내 아들을 왜 죽였지?" 라는 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리 인간에게 들이민다는 겁니다.

* 당신이 그 날 사람을 치었지?

만약 여러분이 음주운전을 해서 사람을 치고 뺑소니를 했다고 하면, 그러면 집에 가면 마음이 편할까요? 그렇지가 않은데, 언젠가는 경찰이 들이닥친다는 말이죠. 경찰이 찾아오는 이유는 간단한데, "당신이 그 날 사람을 치었지?" 라는, 그것이라는 겁니다. 신호위반을 했다고 오는 것이 아니데, 부부싸움을 했다고 오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하늘나라에도 경찰이 있는데, 바로 천사들이라는 겁니다. 마지막 때는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이 세상의 국가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가 있고, 그리고 형무소가 있다는 말이죠. 이런 것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마지막에는 천사가 심판을 하는데, 그래서 꼼짝달싹도 못한다는 겁니다. 천사들 앞에서 완전범죄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라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봐주고 말고 하는 것이 일체 없다는 겁니다.

(마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 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 13:42)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러면 천사들이 심판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니 그냥 갈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물어보겠는데,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려주려고 했지만,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빌라도의 부인도 예수님을 죽이면 안 된다는 꿈을 꾸었는데, 그래서 죽이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죠.

* 믿음을 이용한 죄 !!

그런데 빌리도가 왜 결국 죽이고 말았습니까?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서 죽이고 말았는데, 그들은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무엇을 믿는 자들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데,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 즉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인데, 그러면 천사들이 유대인들을 마지막에 심판할 때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믿음을 이용한 죄를 끝까지 심판하겠다는 겁니다.

* 미리 심판을 받은 사도바울 !!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나는 하나님과 한편이다" 라고 여기면서 저지른 죄를 끝까지 심판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죄를 지어서 미리 심판을 받은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사울' 이라는 겁니다.

그 사울이라는 이름이 바울로 바뀌게 되는데, 그가 사울로 있을 때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런데 바울이 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이죠. 즉 여호와 하나님을 믿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즉 신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믿음체계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태어나서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믿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 복음과 반(反)복음 !!

그런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에서, 그 하나님에서 자기 차에 치인, 즉 자기에게 죽임을 당한 분으로, 그렇게 바꾸어지는 것이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의 특징을 보면, 복음과 필히 반대가 되는 반(反)복음을 겸해서 전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질문을 할 때도, "권사님은 어떤 책을 보십니까?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권사님은 어떤 책을 버리시겠습니까?" 라고, 이것이 똑같은 질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두 번째의 질문은, 뭔가 얻게 되면 버리는 것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집사님은 누구를 믿습니까?" 라고 하는 것과, "집사님은 누구를 믿지 않습니까?" 라는 것도 역시 같은 질문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복음과 반복음을 같이 제시하면서, 한 쪽을 믿는다고 하면, 그 반대쪽은 반드시 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복음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아닌 것에 대해서 치임을 당하는 사건을 통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냥 "나는 예수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은 경찰이 특정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찾아오는 것과도 같은데, 즉 "네가 어제 사람을 치었잖아" 라고 하면서 온다는 겁니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 이전에 사울은 사건이 없었는데, 어릴 때부터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섬겼던 여호와를 열심히 섬겼다는 말이죠. 그것이 진리이고, 그렇게 하면 구원이 보장된다고 믿으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반대하는 것이지, 자체 내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드디어 자기가 믿어왔던 믿음을 버릴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하면, "누구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버리겠습니까?" 라고, 그렇게 질문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라고 하면 안 되고, "당신은 자기 자신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면 인간은 왜 자기를 버릴 수 없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과거가 너무나 찬란하기 때문인데, 물론 모든 인간이 나름대로 다 찬란한데, 그리고 너무나 진지했다는 겁니다. 순간순간 거기에 몰입하고 열중했다는 것이죠.

자기의 과거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겁니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해야했고, 그리고 손과 발은 터서 엉망인데, 그런 고생한 것을 아까워서 어떻게 버리느냐는 말이죠.

* 냉차를 아시나요?

최근에 TV를 보는데 단어가 하나 나오는 바람에 저의 과거가 한꺼번에 다 떠올랐는데, 그게 바로 '냉차' 라는 겁니다(ㅋㅋ). 아시는 분은 아시지 싶은데, 옛날에는 마실 것이 이 냉차밖에 없었는데, 그동안 잊어버렸던 단어라는 말이죠.

그 맛이 보리차에 설탕을 탄 것 같기도 하고, 그때는 먹을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겁니다. 아이스깨끼는 있었던 것 같은데, 옛날에는 이 냉차가 전부였다는 말이죠. 리어카에 둥글게 생긴 투명한 통을 싣고서, 그 안에 냉차를 넣어서 파는데,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죠.

아무튼 '냉차' 라는 그 단어와 함께 자기의 모든 과거가 다 떠오르는데, 그것은 자기가 자기 과거를 버리고 않고서 고이 간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과거를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자기 과거는 과거대로 살리고, 거기에 자기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하나 더 붙인다는 겁니다. 마치 파스를 붙이듯이 말이죠. 그런데 파스는 8시간이 지나면 떼어내야 하는데,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나오면서 떼어낸다는 말이죠. 그래야 찬란한 자기 과거가 드러난다는 것이죠.

* 과거를 교체하라 !!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과 반복음은 자아를 거부하는 것, 즉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자기를 믿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과거를 교체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찬란한 과거를 예수님의 과거로 바꾸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생애로 말이죠. 그러면서 구원을 받는 노선으로 가입이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는데, 그렇게 해서 거의 결정이 되고 나면, 그 사원을 인사담당이 부른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네 아버지는 무엇을 하시지?" 라고 묻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회사의 일을 하다가보면, 여러 가지 유혹이 생길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고의든 아니든 그런 유혹에 넘어가서 사고를 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죠. 그럴 때 그 신입사원의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든지 큰 회사의 임원이라고 하면 그래도 마음이 좀 놓이는데, 만약에 전과자라고 하면 불안해서 일을 맡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신입사원을 뽑을 때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현실이 그렇다는 말이죠. 신입사원은 아무리 착실하더라도, 집안의 문제로 인해서 횡령을 한다든지, 그렇게 무리수를 둘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안환경을 따진다는 말이죠.

* 아가씨의 집안은 어떻노?

그것은 자식이 누구를 사귈 때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말로는 "네가 좋으면 우리는 모두 찬성이다" 라고 하지만,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딱 한 가지만 묻겠는데, 그 아가씨의 집안은 어떻노?"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자기의 지나온 과거를 배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집을 와서 무슨 잘못이라도 하면, "네 집구석을 보니 그럴 줄 알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무 못돼먹은 소리인데, 하지만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성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과거가 그만 자기 믿음의 대상이 되고 말았는데, 즉 자기의 과거를 정당한 것으로 지켜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한다는 말이죠.

자기 과거는 멀쩡한데, 그래서 "내가 어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었으니, 그만큼 나의 과거는 더 찬란해졌어"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자기 과거는 전혀 바뀌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가야할 길에 대해서 제가 프린트를 해왔는데, 이것을 한 장씩 나누어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가스펠 송의 가사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성경을 압축해놓았기에 여러분도 다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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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하라 주의 크신 사랑 ]

1. 찬송하라 주의 크신 사랑 놀라우신 주의 큰 은혜
저 천국서 우리 쉴 곳 예비하고 계시네
우리 다 천국에서 그리던 주를 만나 뵈올 때
기쁜 맘 넘쳐서 승리의 노래 부르리
2. 이 세상의 나그네길 갈 때 구름 잠시 하늘 덮어도
머지않아 어둠 가고 슬픔 다시 없겠네
우리 다 천국에서 그리던 주를 만나 뵈올 때
기쁜 맘 넘쳐서 승리의 노래 부르리
3. 우리 앞에 상급 바라보고 주가 맡긴 일을 행하세
영광의 주 만나볼 때 모든 수고 끝나리
우리 다 천국에서 그리던 주를 만나 뵈올 때
기쁜 맘 넘쳐서 승리의 노래 부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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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방금 강의한 것과 관련해서 생각을 해보면, 여기에 "찬송하라 주의 크신 사랑 예수 우리 대신 죽으사 저 천국서 우리 쉴 곳 예비하고 계시네"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모두 다 맞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천국에 가려고 하면, 지상에 살면서 노선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천국이 좋기는 좋은데, 그런데 우리가 자기 과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천국은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말이죠.

천국에 가려고 하면 예수님의 과거로 바뀌어야만 하는데, 그래야 예수님이 먼저 가 계신 그곳에 합류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이 잘 아는 사이라고 해서 좋게 좋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ㅋㅋ).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의 과거를 탑재하지 않으면, 주님이 현재 계신 그곳에 갈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슨 내용으로 가득한고 하니, 우리의 과거가 그 얼마나 지저분한지, 그것을 모두 들추어낸다는 말이죠.

*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 교재 16페이지에 보면,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 즉 '나' 라는 것인데, 그 우리가 과거부터 줄기차게 밀어 부친 업무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구원에 골인되는 것, 그것이란 말이죠.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골인지점에 도착해야 그 맛이 난다는 겁니다. 그만 중도에 포기해버리면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교재 18페이지에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질문을 할 때는 몰라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에 보면, "목사에게 신론을 배우기 전에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신론이 있는데, 즉 신은 용서해주시고 천국에 보내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냥 백지상태가 아닌데, 이미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교인들이 목사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 묻기 이전에, 이미 천국이 무엇이고 용서가 무엇이고 하는, 그런 것들이 이미 구축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기가 살림도 살고 직장에 나가서 돈을 벌고 하면서도, 이미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라는 것을 구축해놓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도 자기의 과거에 속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사도바울의 복음에 의하면 핍박의 대상인데, 즉 예수님을 핍박했던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을 핍박하는 인간의 구원관 !!

다시 말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구원관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이유가 된다는 말이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냥 핍박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이 고민고민해서 내린 결론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죽어야 한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그들이 왜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까? 그것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구원관이 엄연히 따로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똑같은 일들이 교회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 충격적인 성경내용 !!

이제 교재 1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목사가 성경을 이야기하는데, 그 성경 속에 들어가면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과거가 건전하다고 보았는데,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겁니다.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여성성이 여성이라는 껍데기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이죠. 그래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연결된다는 겁니다.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여성성이 구체화되니 여자로 태어나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마지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은 죄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데, 즉 사람보다 죄가 먼저라는 것이죠. 그런 내용이 성경이 나오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 예레미야서 36장을 보겠는데, 21절에서 23절입니다.

(렘 36:21)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렘 36:22)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렘 36:23)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이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왕 때 있었던 일인데, 이 여호야김은 악한 왕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자, 예레미야가 말을 하고 그것을 서기관인 바룩이 받아서 적었다는 겁니다.

* 장난삼아 말씀을 !!

물론 유다에 대한 경고가 담긴 내용인데, 그것을 성전에서 백성들이 듣도록 낭독을 했다는 말이죠. 그러자 이것을 신하들이 왕에게 고하고, 그러자 여호야김 왕이 신하 여후디를 보고 그 두루마리를 가지고 오게 해서 읽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읽은 족족 그 두루마리를 작은칼로 잘라서 화로에 넣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로 태운다는 말이죠. 그것을 말리는 자들이 있었지만, 왕과 신하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장난삼아 계속해서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35장 15절에 무슨 말씀이 나오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나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이때 북이스라엘은 망하고 난 뒤인데, 유다도 망하기 직전이라는 겁니다.

(렘 35:15) 나도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좇아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거하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나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 하나님이 다시 예레미아에게 임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그 불사른 내용을 또 다시 기록하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불로 태울 줄로 알고, 그 불태운 것을 근거로 해서 다시 새롭게 하신다는 것이죠.

(렘 36:27) 왕이 두루마리와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으로 기록한 말씀을 불사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렘 36:28)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 왕 여호야김의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이것은 무엇을 연상시킵니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돌판을 가지고 내리고 오는데,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자 그 돌판을 깨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돌판을 제작하기 위해서 모세를 다시 시내산으로 부르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새롭게 만들어서 내려오는데, 그러면 그 돌판은 무엇을 그 밑에 깔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본성을 가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다" 라는 취지가 결합된 것이 언약궤라는 겁니다. 그 돌판이 언약궤 안에 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 인간들이 본성이 어떠한지 몰랐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오히려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사람들에게 맞아죽으라고 보내셨다는 겁니다.

* 인간은, 자기를 너무 몰라 !!

물론 우리 인간은 모르는데, 자기 속에 하나님을 죽이려고 하는 본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말이죠. 물론 마귀가 들어와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것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죠.

어제 오후시간에 요한복음 13장 2절을 했는데, 가룟 유다는 마귀가 자기 속에 들어와서 자기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죽을 때까지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는 끝까지 자기를 믿었다는 말이죠.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그러니까 가룟 유다처럼 "나의 모든 선택과 결정은 내가 내린다" 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믿는 것, 그것은 바로 악마가 인간의 마음을 조종해서 생긴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게 성경의 내용에 다 기록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 신학생들의 착각 !!

그래서 강의처음에 했던, 즉 "교회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교회는 예수님이 만드신다" 라는 것을 신학생들이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 마귀가 들어있으니, 그 마음을 조종하고 있으니 말이죠.

제가 신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하고 나서, 또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는 겁니다. "여러분을 보고 목회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목회를 하시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아시면 됩니다.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의 인생을 꾸며나가십니다" 라고 말이죠.

계속해서 "목회를 하면서 '나는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그것을 깨달으시면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만드시고, 우리는 주님이 교회를 만드는데 있어서 방해꾼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준다는 겁니다. 물론 그때그때마다 잘라서 내다버리지만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던데? 나는 큰 교회의 당회장이 되고 싶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목사가 되기 위해서 고생한, 그 자기 과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죠.

아까 가스펠 송 가사에서 "찬송하라 주의 크신 사랑, 놀라운 주의 은혜" 라고 했는데,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을 느낀 적이 없는데, 그러니 주님의 은혜도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 과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자기 사랑에 미쳐있는데, 거기에서 무슨 주님의 사랑이 나오느냐는 말이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자기 노력이고 자기의 찬란한 과거인데, 거기에 무슨 주님의 은혜가 있느냐는 겁니다. 자기의 고생만 가득히 담겨있다는 것이죠. 물론 저도 손자를 본다고 고생이 많은데 말이죠(ㅋㅋ).

그리고 "저 천국서 우리 쉴 곳 예비하고 계시네" 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의 과거를 경험한 자들만 쉬는 곳이지, 자기가 잘남을 위해서 고생한 자들은 지옥에 가서 고생을 한다는 말이죠. 자기를 버리지 못한 자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지옥은 지옥대로 간다는 겁니다.

* 융통성이 전혀 없는 천사 !!

여기에 대해서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알아?" 라고 하면 곤란한데, 심판은 천사가 한다는 말이죠. 천사들은 전혀 융통성이 없는데, 그래서 유월절에 딱 하나만 본다는 겁니다.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렸는지, 그것만 본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옆집에 애굽 사람이 사는데, 인사성도 좋고 겸손하고 착하고 훌륭하다는 겁니다. 이웃을 위해서 봉사도 하고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의 집은 장남이 죽는데, 왜 그러한 저주를 받습니까? 유월절의 피가 없기 때문인데, 그러니 그들의 과거가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인데, 피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 어린양의 피와 여러분의 과거를 대조해보면, 과연 어느 것이 더 소중할까요? 여러분이 죽을 때,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하실 겁니까? 아니면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실 겁니까? 여기서는 자신이 있을지 몰라도, 그런데 치매에 걸리면 그 모든 것을 무효화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니 정신이 살아있을 때,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살면 된다는 것이죠.

* 모든 것이 성경으로 돌아간다 !!

다시 교재로 돌아가서, 자기가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어도 소용이 없고, 또한 교회도 주님이 만들고,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겁니다. 교재 20페이지를 보면, "모든 것이 성경으로 돌아간다" 라고 하는데, 구원받을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즉 "사랑을 받을 자는 사랑을 받고, 미움을 받을 자는 미움을 받는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면 왜 성경을 믿지 못하는 겁니까? 구원은 예수님의 권한인데,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임하면 천하의 죄인이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반면에 아무리 착해도 주님의 긍휼하심이 없으면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과거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자아는 과거의 응집체인데, 지금의 자아가 있기까지 얼마나 대단한 과거가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또한 그런 자아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왜 나를 보고 사람을 치었다고 해?"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그렇게 여러분의 과거가 예수님의 과거로 바뀌었다고 치고, 제가 조금 전에 나누어준 가스펠 송 가사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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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하늘에 오를 때 그 날이 얼마나 기쁜 날일까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보고 찬송하며 승리를 외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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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고 찬송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이미 자기 안에 예수님의 과거가 있어서, 그리고 그 과거가 밀고 올라와서 지금의 자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나 반갑다는 겁니다.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인데, 잘난 자기가 그리운 게 아니고, 못난 놈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이 그립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원이 빨리 죽어서 주님을 마주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미 과거가 바뀌어졌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과연 어떻게 하면 과거가 바뀔 수 있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갈라디아스 3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너무나도 이상한 말씀인데, 25절에서 29절을 보겠습니다.

(갈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여기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26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27절에 "세례를 받은 자는", 28절에 "하나이니라", 그리고 29절에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라고 하는데, 즉 약속이 응결되면, 그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이죠.

* 믿음이 온 후로는 !!

먼저 25절에서 "믿음이 온 후로는" 라고 하는데, 그러니 믿음은 외부에서 왔다는 겁니다. 믿음은 외래종인데,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만들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그래서 자기를 지키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마치 파스를 붙이듯이,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은 것을 붙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것은 그대로 있고, 거기에 믿음을 덧붙여서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변한 것이 아니고, 마치 예수님이 천국에 가는 티켓과도 같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옥행인데, 왜냐하면 심판을 누가 한다고 했습니까? 융통성이라고는 일도 찾아볼 수 없는 천사가 한다는 말이죠. 그 기준이 어린양의 피인데, 즉 "너는 예수님을 죽인 자야" 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과거, 그 잘남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이죠.

"이렇게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겠습니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이고, 정작 심판을 하는 당사자는 채점을 할 때, 정답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거기에 개입할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것도 모르고 교회에 가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교회에서 엉뚱한 정답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르게 삽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바르게 살기는 무엇을 바르게 사느냐는 말이죠.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천국백성이 됩니까? 무슨 공자의 가르침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교회가 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시선을 마주치면서, 거기서 상대방의 시선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 쪽의 시선을 철거하게 되는데,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나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하고",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 갈라디아스 4장 28절에 보면 "하나이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이죠. 믿음이라는 외래종이 와서, 그냥 무엇을 하나 붙여놓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마구 덮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 안에 속하게 된다는 말이죠.

옛날에는 여름철이 되면 방역차가 돌아다니곤 했는데, 그러면 아이들이 그 뒤를 따라다닌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 연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방역차의 연기는 그 아이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란 말이죠.

왜 외부에서 주어지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될 수는 없는데, 반드시 외부에서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교회에 가면, 모두가 다 자기가 자기를 치료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교회는 제외지만 말이죠(ㅋㅋ).

그러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종의 의학서적과도 같다는 겁니다. 즉 "주님, 제가 어디를 고치면 됩니까? 가르쳐주시면, 제가 알아서 고치겠습니다" 라는 식이라는 말이죠.

성경은 "네가 하나님을 치고 뺑소니를 쳤잖아?"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삶의 기술을 배워서, "엉망진창의 인간에서 괜찮은 인간으로", 그렇게 고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을 "도를 닦는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모조리 다 가짜인데, 이제는 이단이라는 말도 식상하다는 것이죠.

*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해 !!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교회는 주님이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만든 교회는 사람을 구원해주는데, 물론 사기지만 말이죠. 아무튼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과거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새로운 과거가 인정되면 예수 안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들이 왜 방역차를 뒤따라갑니까? 그 냄새가 좋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그렇게 덮어 씌어진 것을 세례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과거까지 주님의 입김이 작용해서, 이전에는 자기가 고생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이제 그런 고생의 현장을 주님이 의도적으로 만들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때 아이를 2명만 낳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출장 중이라서 미처 수술 날짜를 잡지 못해서 그만 아이가 하나 더 생기고 말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의 뜻이구나" 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과거, 그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주님이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서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되어진 그 모든 일들이, 주님의 언약법칙에 의해서 일어났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되어진 것인데, 그 언약을 인간이 지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켜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였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예수님을 죽여놓고 시작을 한다는 말이죠.

* 우리가 어찌할꼬?

그래서 "네가 나를 죽였지? - 어찌할꼬? - 천국에 가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나오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된다는 말이죠. 이미 차 사고는 났고, 그것은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러니 그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이죠.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 라고, 그 따위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천사가 우리의 과거는 보지 않는데, 융통성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데, 그러니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 두려워 말라 !!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는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도 말씀하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사야서에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왜냐하면 "네가 하는 언약법칙, 즉 진리다" 라는 겁니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진리가 우리와 함께 한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인데, 즉 "네가 하는 말을 누가 듣든지 말든지, 그것은 네가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다" 라는 것이죠. 그것이 직장이든 가정이든 간에, 그 어떤 일이 생겨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진리로 인해서 우리의 과거가 언약법칙대로 움직였다는 것인데, 그 언약법칙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미 다 이루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속에는 거룩이 있고 의가 있다는데, 그러니 누구에게 기가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소원대로 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죠. 모든 것이 성경말씀대로 되는데, 즉 언약법칙대로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중력법칙대로 움직이듯이 말이죠.

계속해서 가사를 보면, "이 세상의 나그네길 갈 때 구름 잠시 하늘 덮어도" 라고 하는데, 그러니 아등바등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 세상이 나그네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그것이 새삼 반갑고 기쁘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머지않아 어둠 가고 슬픔 다시 없겠네. 우리 다 천국에서 그리던 주를 만나 뵈올 때" 라고 하는데, 주님은 만나는 것이 기쁩니까? 자기 쪽의 모든 것을 다 철거했기 때문에,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비록 암에 걸려서 거동조차 힘들어도, 그것은 자기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으로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자기 과거가 바뀌지 않으면, 자기 지식으로 천국에 간다고 착각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믿고 있다는 겁니다.

* 자기 자신을 버렸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어떤 책을 봅니까?" 라는 것은, "어떤 책을 버립니까?" 라는 것과도 같은 질문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렸습니까?" 라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자기를 얼마든지 버려도 되는데,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을 만든 것은 주님의 작업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작업이 아닌데, 그러니 버리는 것도 역시 주님의 소관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곧 자유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일을 하는 게 좋은데, 왜냐하면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를 챙기려고 시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일을 하면, 그 일에 집중하기 때문에 자기를 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 순간뿐이지만, 자기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죠.

* 육신은 짐이다 !!

그리고 나중에 힘이 없어서 일을 못하게 되면, 그때는 고생이라는 겁니다. 물론 힘이 있던 없던 간에 산다는 것 자체가 고생인데, 그것을 두고 "육신은 짐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건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죠.

이것은 놀랍게도 예수님도 경험하신 것인데, 예수님의 육신도 고생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육신을 우리가 따라간다는 것이죠. 마치 방역차 뒤를 따라가듯 말이죠. 물론 예수님은 죄가 없으면서도 육신의 고통을 받았는데, 거기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교회는 거의 심방이 없지만, 아무튼 심방을 할 때 보면, 심방을 하는 목사의 입장과 심방을 받는 교인의 입장이 다르다는 말이죠. 심방을 받는 교인의 입장에서는, 목사든 전도사든 오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 치부를 보여주기가 싫다는 겁니다.

* 심방은, 쓰레기를 치우는 것 !!

자기의 부끄러운 일은 자기도 보기가 싫은데, 그런데 그것을 남에게 강제로 들킨다는 것은 너무나도 짜증나는 일이라는 말이죠. 물론 특별한 치부가 아니고, 집안청소도 해야하고 신경을 쓸 것이 생각보다 많다는 겁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권사님들이 같이 가면 궁금해서 냉장고도 마구 열어보고 했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은혜를 받을 생각을 하면서 심방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부끄러운 것을 숨기기에 급급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심방의 목적은 무엇인고 하니, 은혜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쓰레기를 치우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목사가 쓰레기통을 들고 가는 것이 심방이라는 겁니다. 물론 복음을 아는 목사의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생각이 정반대인데, 심방을 받는 입장에서는 잘 보이려고 하는데, 그런데 목사는 "당신이 치우지 못하는 쓰레기를 제가 치워드리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당신은 쓰레기야" 라는 것인데,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심방을 한다는 것이죠. 물론 치워도 쓰레기지만 말이죠.

다시 말해서, "당신의 과거, 내가 치워줄게" 라는 것인데, 어떻게 치웁니까? 말씀으로 치운다는 겁니다. "당신은 무엇을 해도 죽는 것이 합당하다" 라는 것인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을 하다가 죽는다는 것이죠. 물론 놀아도 죽고 말이죠.

자기 가정에 외래종이 들어오는데, 그것을 누가 좋아하겠느냐는 겁니다. 외래종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긴장을 하면서 지친다는 말이죠. 심지어 자기가 키우던 손자라도, 오랫동안 같이 있으면 떠나보내고 싶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외래종을 버려야 합니까? 자기를 버려야 합니까? 우리는 당연히 외래종을 버리려고 하는데, 자기를 버릴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너는 너를 치우고 싶다" 라는 것인데, 그게 복음이라는 겁니다.

* 죄와 의 !!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는데, 여기 21페이지에 보면 '죄'와 '의'가 나오는데,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라는 말이죠. 지금까지 어려운 것이 없다가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그런데 이 의는 죄가 없으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에덴동산에는 중요한 나무가 두 그루인데, 중앙에 두 개가 심겨져 있다는 말이죠. 그게 구심점을 형성하는데, 사람이 아니고 나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에게 그만 탈취를 당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죄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죄를 허용하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죄가 있어야 의가 나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제 오후시간에, 천국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지옥이 먼저 있어야, 그 지옥 속에 천국이 있다는 말이죠.

지옥으로 가다가, 그 지옥의 칸막이를 뚫게 되면 천국이라는 겁니다. 다른 길은 없는데, 좁은 길 외에 천국에 가는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을 원하는데, 그래서 인간은 자기 주제파악도 하지 못하면서 넓은 길을 고수하는 고집쟁이라는 겁니다. 자기 위치도 모르면서 편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 의인이 저주를 왜 받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경우에, 주님의 과거는 어떻습니까? 죄가 없는 의가 어디로 가는고 하니, 지옥으로 가는데, 그 지옥은 저주를 받는 자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의인이 저주를 왜 받습니까? 과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누가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 중에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란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이미 "선하면 복을 받고 악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선악체계가 구비되어있다는 말이죠.

이왕 어려운 것 조금 더 어렵게 해보면, "인간 속에 선악체계가 있다" 라고 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선악체계가 인간을 양산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죄가 인간을 양산했다는 것이죠.

그런 선악체계의 모델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악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선을 원한다는 겁니다. 선악체계이기 때문에 말이죠. 인간은 이것을 자랑스러워하는데, 그래서 바리새인이 뭐라고 합니까? "저들과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니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못한 자나 악한 자에게는 자기의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복수하려는 너를 치우고 싶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 남들보다 더 착하고 싶어서 환장한 자들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마태복음 5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남들보다 더 착하고 싶어서 환장한 자들, 그 극한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인데, 그러면 이들의 대장이 누구입니까? 그가 바로 '사울' 이라는 자라는 말이죠. 남들보다 더 착하지 못해서 환장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인간임을 전제로 하고, 예수님은 "의인이 저주를 왜 받는가?" 라고 질문을 하시는데, 그러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들이 아는 하나님은 의인을 저주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선하면 복을 받고, 악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선악체계에서 구성된 신이기 때문에, 의인에게 저주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들은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2장을 보겠는데, 32절입니다.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즉 자동차로 치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는데, 즉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가 있지만, 그런데 성령을 거역하면 용서함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영원히 지옥에 가는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성령은 십자가를 지신 분의 영인데, 그래서 성령을 십자가 사건을 앞장세우는데, 즉 융통성이 없는 천사와 똑같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는데, 즉 의인인데 저주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끝났다는 것이죠.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그 차이점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꽂혀서, 그 십자가 사건이 무엇인지, 여기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와는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히브리서 3장 1절에 보면,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라고 하는데, 여기서 대제사장을 강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제사와 관련해서 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신, 그렇게 제사를 완성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깊이 생각하라고 한다는 말이죠.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뿜는 냄새에 푹 잠겨있는 자들인데, 이들은 자기의 과거가 주님의 십자가로 물들어져 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소급해서 물이 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출생 이전부터 이미 주님이 자기 인생에 관여했음을 알게 된 자들이라는 겁니다.

* 두 종류의 의와 두 종류의 저주 !!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알려고 하면,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즉 "의인인데 저주를 받았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의인인데 저주를 받았다고 하면, 여기서 두 가지가 나오는데, 즉 두 종류의 의와 두 종류의 저주가 나온다는 겁니다.

먼저 인간들의 선악체계에 의한 의가 있고, 두 번째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데, 그 의가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저주도 마찬가지인데, 나쁜 짓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면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저주개념과,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새로운 저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것을 안다고 치고 설교를 하면, 그러면 여기서 어떤 설교가 나올까요? 이 두 가지를 비교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복음이 아닌지도 겸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야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 것인데, 그게 십자가의 방역차에 완전히 잠긴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를 설명하려고 하면, 복음, 즉 예수님이 하신 일과, 거기에 반대되는 것도 같이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주에 대해서 설교를 한다고 하면, 십자가의 저주만 이야기하면 안 되고, 이 세상에서 말하는 저주가 무엇인지도 같이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십자가의 저주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여서 자기의 과거로, 즉 자기 지식의 하나로 보태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저주가 무엇인지, 그게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같이 알려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나쁜 짓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래서 지옥에 간다" 라는 것이 왜 마귀적인 것인지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것이 왜 마귀적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나쁜 짓을 하지 않은 자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나쁜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없다는 것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오늘 했던 강의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의 과거가 바뀌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의 살아온 것이 바뀝니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식, 즉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착하고 바르게 살았던, 즉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살아온 자기의 아름다운 과거", 그렇게 되면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가졌던 저주받은 과거인데, 십자가와 관계가 없는, 즉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과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영인 성령이 오게 되면, 즉 "너의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내가 치어서 죽었다" 라고 하는 분을 만나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무서워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을 쓰레기차에 버리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버리는 것은 진작에 버렸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주님에게 있어서는 이미 버린 자라는 말이죠. 다만 우리는 육신의 미련 때문에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백세를 넘기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빨리 내놓으라고 재촉을 하시는데, 쓰레기를 왜 붙들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버티고 하는데, 물론 주님이 더 세니까 결국은 주님의 뜻대로 하신다는 것이죠. 주님은 "이제 너의 인생은 그만 살고, 나와 같이 살자. 너도 나를 그리워했잖아?"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90년대 유익종이 불렀던 '그저 바라만 볼 수 있어도' 노래가사를 보면, "그저 바라 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그리워 떠오르면 가슴만 아픈 사람, 우리 헤어짐은 멀어도 마음에 남아서, 창문 흔들리는 소리에 돌아보는 마음"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대중가요지만,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기꺼이 사라져도 좋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마땅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거꾸로 생각하는 것도 지겹습니다. 언제까지 주님과 반대되는 생각만 하면서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시원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8,4 오후 4시에 마침.

예수님을 치인 주제에 무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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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바라만 볼 수 있어도 ]
1992, 유익종

이 밤 한마디 말없이 슬픔을 잊고저
멀어진 그대의 눈빛을 그저 잊고저
작은 그리움이 다가와 두 눈 감을 때
가슴을 스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오
그저 바라 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그리워 떠오르면 가슴만 아픈 사람
우리 헤어짐은 멀어도 마음에 남아서
창문 흔들리는 소리에 돌아보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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