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민족에 대한 경고
2014년 1월 12일 본문 말씀: 스가랴 9:1
(9:1)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일관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작업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나라 일본을 비롯해서 세상에 흩어져 있는 각양 민족들은 역사적으로나 지금 동시대적으로 온갖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많고 많은 신 중에서 어느 특정 신을 참된 신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모든 신을 허망한 우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독선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는 논리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있어 신이란 현 자기 민족의 정체성과 존재의 당연함을 보장하고 보증하는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을 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이는 곧 자기 자신은 없어져도 그만이다는 주장에 해당됩니다. 과연 자기 자신은 죽어도 그만이다고 속 넓고 주장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즉 내가 속하고 나를 태어나게 한 이 민족은 다른 민족에 의해 속히 멸망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있습니다. 여호수아 2장에 기생 라합이 나옵니다. 이 여인과 그 가족은 자기가 사는 이 고장은 마땅히 멸망당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정탐꾼을 숨겨줍니다. 바로 이 행함이 곧 믿음에 부합되는 행함이라고 신약 야고보서 2장에 나옵니다. 이처럼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든지 아니면 참된 행함에 근거한 믿음은 항상 자기 근거박탈을 당연시 하는데 기원합니다. 이는 곧 참된 신에 관한 문제와 연결된 문제입니다.
즉 참된 신은 인간의 요구로부터 차단된 세계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접속을 시도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차단막을 확장시켜 도리어 신을 찾겠다는 요구를 계속 밀어내므로서 그 차단된 경계선을 뚜렷하게 부각될 뿐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1:27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참 하나님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직면할 수 있는 바는 곧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참 하나님으로부터 여지없이 깨어졌고 멸망당했고 그 어떤 희망마저 좌절당해야만 하는 민족 속에서 비로소 인간들이 아무리 접근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그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이사야 53:1-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즉 참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로부터 도저히 못 믿을 모습으로 등장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조치하시는 이유는, 인간들이 신을 찾고자 하는 그 의도를 비켜가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이 비록 관념상 해답을 안다고 자부해도 그 해답에 이르는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보는 과정에서 그 해답에 부합되지 못하는 질문을 낳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은 어린양의 죽음이다”는 해답을 갖고 있다고 칩시다.
여기서부터 도출되는 질문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날 구원하시려고 어린양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셨구나”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어린양으로 구원하신 것은 이제부터 구원받은 자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어린양을 섬기기 위한 존재로 살기 위함이구나”입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5:15을 보면서 어느 쪽이 정답에 합한 옳은 질문인지를 파악합시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바른 질문의 내용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맨처럼으로 다시 가져가면,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지”라는 그 의식 자체가 참된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의 산물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의 연속으로서 이스라엘 역사는 줄곧 장식되어오고 있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에 대해서 아시지요.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애굽은 이방민족이기에 하나님께서 벌주시고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편에 서 있는 자들이기에 구원하셨다”고 한다면 엄청난 오해입니다. 신명기 9:5-6에 보면, “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으로 가름하는 그 경계선이 점차 이스라엘 내부로 쏠리는 쏠림현상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발톱이 자라서 살점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면 수술해야 되듯이 이스라엘에서 자라나는 하나님의 구원원칙은 점차 이스라엘 내부로 침투되면서 결국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멸망케 합니다.
이러한 원리는 이미 출애굽기 7:3-5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즉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편도 아니십니다. 오로지 예수님 편이십니다. 애굽인이든 이스라엘이든 모두 어린양을 주님되신다고 고백케 하시겠다는 것이 구원의 이유입니다. 이 원리가 오늘날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외치는 바는 자신의 곤고함과 대비가 되는 예수님의 구원능력이었습니다.
이방민족인 아람나라를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고 이스라엘은 자신의 과오를 다시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는 약한데서 도리어 예수님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에 일어나는 죄를 사용하여 주님의 용서만 빛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