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스가랴18강-저주에서 구원(슥8;9-13)이근호131222

아빠와 함께 2013. 12. 22. 19:02

저주에서 구원(스가랴 8:9-13)

음성                 동영상

 이근호 13-12-22 15:28 
저주에서 구원

2013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스가랴 8:9-13

(8: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8:10)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8:11)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8:12)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8:13)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축복이나 저주란 짝을 지어서 등장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저주는 저주 홀로 등장되지 않고 축복이 무엇이라는 것을 소개하면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축복이나 저주에 대해서 인간이 나서서 마음대로 골라잡을 대상은 아닙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축복이란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담겨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는 그 가능성마저 사라져 없습니다.

따라서 저주를 원치 않고 축복을 원한다고 해서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건이 제공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이 성전 건축입니다. 성전을 완공하면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은 축복의 바탕은 성전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고 곧 이 말은 인간에게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리에서 축복이 시작된다는 그 성전의 자리로 옮겨가기란 인간의 기존 몸 가지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나아가면서 밝혀집니다. 신약에서는 구약의 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몸을 요구하게 됩니다. 성탄이란 바로 이 새로운 몸의 출현을 두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몸 가지고 그 몸으로 복 받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강도 만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강도는 이미 떠나고 없고 주변에 여럿 사람들이 몰라들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폭력을 당해 정신이 없는 상태이고 주변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소지품에서 가져 갈 것을 강탈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는 지갑을, 어떤 이는 목걸이를, 어떤 이는 고급 시계를, 어떤 이는 모피 옷을 들고 갈 수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강도만난 사람으로 칩시다. 주변에 여럿  교회들이 둘러 서 있다고 해봅시다. 어떤 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돈을, 어떤 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방언을, 어떤 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가정 화목을, 어떤 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건강을 얻는다고 광고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라면 예수님에게 무엇을 가져 가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게 진정한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전혀 탐낼 말한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축복이라는 하는 것은 그 바탕에 기존의 자기 몸을 염두에 두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 몸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게 되면 축복을 주시겠다는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12절에 보면,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왜 우리에게 포도나무의 열매와 하늘의 이슬이 필요한 겁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음식물과 공기와 물과 햇빛이 왜 우리에게 필요하단 말입니까? 안 주어져도 상관없는 게 아닐까요? 흔히들 하나님과 자신은 전혀 상관없이 혼자 살겠다고 주장하면서 왜 그들은 음식물과 공기와 햇빛과 단비에 대해서 탐을 내는 겁니까?

앞 뒤 안 맞는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우리 몸 자체에서 우리의 자아나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 논리적 길이 차단되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이 몸에서 우리의 자아나 주체를 부르짖는 것을 옳지 않는 주장이다 는 말입니다. 결코 우리 몸은 우리 (자아의)것이 아닙니다.

신약에 와서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이 몸을 위해서 햇빛과 공기와 단비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 말고 다른 몸을 겨냥해서 햇빛과 공기와 비를 내십니다. 그 몸이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신약에서는 기존의 몸이 원하는 축복을 축복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교체되는 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주는 무엇입니까? 바로 기존의 몸을 위하여 신을 찾고 예수를 찾는 그 모든 행위가 곧 저주스러운 행위요 저주가 와서 영글어낸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새 몸에 합당한 성전은 결코 기존의 몸으로 만들어낼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몸을 부정으로 새로운 몸을 기대하게 만들기 위해 신약 성경이 주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에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려면 ‘일하기’ 좋아해야 하는데 이 세상 누가 일하기 좋아할 사람이 있습니까? 더구나 그냥 취미로 일하는 것 말고 돈이 나오도록 일을 하는 일은 모든 일이 짜증나고 귀찮고 힘들고 쉴 틈 없는 경쟁적인 요인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주부가 가사일을 하는 것도 물론 힘듭니다. 하지만 가사일 했다고 누가 월급주지는 않습니다. 그냥 자신이 해야할 일이기에 하는 겁니다. 만약에 가사일을 댓가로 해서 남편이 아내에게 월급준다면 그것은 아내의 노동에 대한 심한 모욕적인 태도가 됩니다. 즉 사랑으로 한 것을 값으로 친다는 것은 가치에 대한 훼손이 됩니다.

이처럼 신약에서의 축복은 인간이 말씀을 지켰다고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일방적인 자애로움과 불쌍히 여겨주심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축복이라는 것도 기존의 몸을 계속 붙들라는 차원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잊어라는 차원에서 주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2:14-15에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방법은 자기 몸을 죽음에 내놓은 것 뿐입니다. 죽기 위해 사는 겁니다. 안 죽으려고 하면 할수록 두려움을 더욱 증강됩니다. 마귀에게 항상 질질 끌려가는 생을 살 뿐입니다. 하지만 성령받은 성도는 이 육신은 매일같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저주받아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축복답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안중에서 치워버리는 겁니다.

날마다 죽음에 넘겨짐으로 날마다 새 몸이 귀하게 느끼집니다. 이게 새 성전의 효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기존의 몸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슥8장9-13(저주에서 구원)1312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8장 9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19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그렇게 기다렸던 축복은 저주라는 바탕이 먼저 선행돼야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선행된다는 이 구약 이야기는 그걸로 이야기가 끝나면 모르겠는데 또 신약 성경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와서 우리 몸이 여기 있는데 우리 몸을 축복해 주겠다고 우리는 철석같이 유대인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신약 성경에 오게 되면 이 몸 자체가 바뀌어져야 되는 거예요. 새로운 탄생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크리스마스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새로운 몸을 탄생함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몸을 잊으라는 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에 의해서 이삭이 새로 태어납니다. 그러면 이스마엘은 태어나나 마나한 것이 아니냐, 할 때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저주라고 이야기하고 이스마엘 저주가 먼저 있고 난 뒤에 축복이라는 이삭의 축복된 노선이 새롭게 거기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저주가 먼저 등장하고 ‘이것 아니거든, 저거 아니거든, 이거거든.’라고 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축복의 노선 이예요. 그러면 축복의 노선이 나타날 때 비로소 저주가 ‘아! 저주가 맞구나.’하는 걸 알게 되지, 축복이 없으면 저주는 자기가 저주인 줄 몰라요. 축복과 저주를 대조하고 대비하면서 이쪽은 저주로 저쪽은 축복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가라지가 그냥 있을 때는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나 알곡이 등장되면서 ‘아!’ 이쪽이 가라지고 이쪽은 알곡인가를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살아가는 것은 이처럼 짐승들이, 마귀의 자녀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여러분들의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났을 때 침례교인도 그냥 가고 장로교인도 그냥 갔는데 여호와증인이 와서 타이어를 고쳐줄 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리고 같은 교인들이 여러분이 생활 어렵고 생활비 떨어져서 형편이 어렵다고 같은 우리교회 교인들이 여러분 안 도와줍니다.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아예 기대하지 마시고 누가 도와줬느냐 하면 절에 가는 가까운 일가친척이 옛정 보고 다 도와주게 돼 있어요. 교회 가는 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와줍니다. 우리는 짐승이 안 도와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어요. 얼마나 도와줘서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그걸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70이레라는 게 있거든요. 7+62+1, 합쳐서 두 개의 관절, 7과 62의 관절을 가진 70이레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를 그렇게 한 시간대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나오는 7이레는 짐승의 도움으로 성전을 짓게 돼 있어요.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전 짓는 이야기도 그 당시에 바사나라, 페르시아 나라에서 물자를 다 대주고 그들의 왕에 의해서 일꾼들을 다 대줬기 때문에 그렇게 ‘너희 본토 집에 가서 여호와 전 지으라.‘고 허락했기 때문에 그들은 도움을 받아서 성전을 짓는 겁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성전을 지을 때 짐승의 도움으로 성전을 지어놓고 그 다음에 62이레 동안 지어진 성전이 다 깨어집니다. 그거 누가 깨는가? 그거 짐승이 다 깨버립니다. 짐승에 의해서 지어진 성전을 짐승의 손으로 깨는 거예요. 이걸 아주 쉽게 요즘 말로 이야기한다면 나는 비록 절에 가고 너는 비록 교회 나가도 나는 네가 사촌간이라는 그 정 때문에 네가 대학 공부할 때 공납금 다 대줬다. 분명히 우리는 짐승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랬는데 ‘너 왜 제사 안 드리노?’ 이래서 헐뜯기 시작한다면 짐승에 의해서 도움 받은 것이 짐승에 의해서 핍박받는 요소로서 우리의 운명은 그렇게 돼 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인생을 눕혀 봐버리면 우리 인생 자체가 70이레가 되는 겁니다. 남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렇게 돼 놓고 다시 우리에게 도움 준 사람이 도움 준 값을 하라고 우리가 외칠 때 우리는 거기서 핍박을 받게 되고 마지막 끝에 1이레, 예수님의 십자가가 직접 개입해서 기존의 우리의 몸을 예수님의 몸으로 교체시켜 버리는 새로운 탄생을 우리에게 발생시키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은 약속에 의한, 축복 약속에 의한 새로운 인물의 탄생, 새로운 노선의 탄생, 축복 노선의 탄생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위에 일어나는 이 모든 상황은 그냥 있어버리면 해석이 안 되지만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면 모두 다 해석이 다 되는 거예요.

어제 시민대학 마지막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한테 설교하기 힘든데 마지막으로 설교하겠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했는데 제발 예수 믿고는 죄를 좀 지으라고 했습니다. 부탁하는데 죄를 좀 지으라고. 죄를 좀 지어줘야, 죄를 사람이 안 짓게 되게 되면 남들의 도움으로 산다는 생각이 안 들고 내가 착하게 살아서 착한 값으로 내가 자꾸 상을 받아서 내가 착한 일 할 때마다 복이 오니까 나는 내 힘으로 내가 사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만약에 죄를 짓게 되면 죄를 지어도 아무 일이 없고 아무 탈이 없잖아요. 아무 징계도 없고. 징계도 몇 번 받아봐야 맷집 생겨버리면 징계도 이길 수가 있어요. 어지간히 맞아도 티가 안 나요.

그러니까 사람이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 일이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은 다른 분의 희생 덕분에 내가 산다는 것을, 주님의 희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날마다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일단 ‘나는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먼저 설정을 하세요. 그리고 축복은 저주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다른데서 우리에게 그냥 은혜로, 선물로 그냥 안겨주듯이 우리가 복을 받게 된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소유권 등기를 내 쪽으로 하지 말고 날 위해서 희생하신 그분의 등기로 모든 걸 넘어갈 수가 있어요. ‘예수님 덕분입니다. 예수님 덕분입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경은 바로 그 예수님의 덕분으로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주셨는데 그중에 제가 예를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의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어디서 들은 듯한 느낌이 들 거예요.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저는 이 말씀을 무슨 뜻인지를 몰랐는데 최근에 이 말씀을 알게 되었어요. 왜냐 하면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난 뒤에 아! 이 본문 말씀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했잖아요. 그런데 이 말씀 지키려면 일하기 좋아야 한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의 소원은 남북통일이 아니고 일 안하고도 연금 받는 거거든요. 일 안 하고도 이 순재 보험 들어서 보험 갱신 안 해도 계속 나오는 것, 보험 타먹고 계속 연금 타고 계속 일 안 해도 즐기면서 사는 것.

그런데 성경은 그러려면 먹지도 말라고 했다 말이죠. 그러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를 지키려면 일이 좋아져야 되는데 어떤 인간치고 일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적어도 돈 벌 정도로 일하려면 그 일은 힘든 일 이예요. 즐기면서 돈 벌 일은 없습니다. 결국은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먹지 말라는 거예요. 먹지 말고 네가 지금 죽어도 ‘왜 죽이십니까?’ 그렇게 나한테 대항하지 말라는 겁니다. 성경 본문 하나도 못 지키면서 ‘왜 죽이십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 마라.

그러면 반대로 질문해야 돼요. ‘주여, 왜 살려놓습니까? 일하기도 싫은데 왜 살려 놓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희생으로 지금 살려주고 있는 거예요. 이 말씀은 주님이 지키고 그 주님 지킨 대가로 우리는 이 말씀 못 지키는 우리에게 공짜로 사는 혜택을 지금 누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항상 모든 성경을 해석할 때 예수님의 희생을 경유해서 해석이 돼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여기 오늘 본문 12절을 봅시다.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이사야에 구약에 나오는 BC 520년 있던 그때 나온 계시에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9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BC 620년 2월 달 이예요.

그렇다면 여기에 보면 네가 만약 옛날에는 저주를 받았지만 지금 축복을 받아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린다. 라고 돼 있습니다. 요 대목을 제가 한번 분석해 보겠습니다. 음식물과 그리고 공기와 물, 햇빛, 이게 왜 우리한테 있어야 합니까? 그 질문을 스스로 해본 적 있어요? 본문에 보면 너희가 열매를 맺으며 땅의 산물을 내며 이렇게 해서 너희들이 여유있게 산다고 했는데 우리가 이 몸은 구약 때 몸이고,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은 신약 때는 몸이 바뀝니다. 포도 쥬스 많이 먹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아침에 새벽이슬 많이 먹는다고, 그 이슬 말고 딴 이슬도 있지만. 이슬 많이 마신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지금 구약 이예요. 기존의 구약 때 몸이고.

신약 때 몸은 그리스도 몸으로 바뀌기 때문에 이게 필요 없는데, 원리는 같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왜 사람은 햇빛과 공기와 비와 음식물의 영양소가 왜 필요합니까? 우리는 평소에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마땅히 내가 살아야지,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살기 위해서는 먹을 걸 챙겨야지.’라고만 생각했지, ‘주여, 이 햇빛과 공기를 안 줘도 되는데 왜 주십니까?’라는 그런 질문을 우리는 생전에 한 적이 없어요. 평소에.

성경은 우리를 다시 한 번 우리를 원 바탕으로 다시 내려가게 합니다. 그 질문을 하게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옛날에 제가 비산동에 살았는데 비산동 144번지, 번지수는 잘 모르겠죠. 서문시장 근처 내당동 건너가는 고갯길에 살았는데 대성백화점이 대성초등학교 앞에 있었는데 컸어요. 거기에 학교 마치고 학원도 안 가고 서중학교에 빈터가 있었습니다. 그 빈터에서 학교만 끝나면 삼촌 둘하고 우리 형님 하나하고 나하고 동생하고 옆에 있는 동네 애들하고 야구게임을 늘 했어요. 우리 형은 야구 잘했습니다. 경상중학교에서 야구선수까지 나갔어요. 우리 삼촌도 야구 잘했는데 그 야구를 하면서 어릴 때 생각에 그 빈 공터가 부동산으로 그때 시가로 얼마인지를 야구하면서 도저히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할 줄을 몰랐어요. 지금 야구게임에서 누가 이겼느냐가 문제지, 7살, 8살, 9살 먹은 애들이 야구하면서 ‘여기를 개발할까? 여기다 원 룸 질까?’ 이런 생각을 전혀 못했다 이 말이죠. 지금은 원 룸 다 들어섰지만 나중에 커서 만약에 거기 가게 되면 ‘야, 이 공터 괜찮은데 여기다 집 지으면 세 나오겠다.’라는 생각을 커서 하는 거예요.

여러분, 드럼통에 구멍을 뚫어보세요. 구멍을 제일 위에 뚫고 밑에 구멍을 뚫으면 물줄기 세기가 달라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상 보는 눈을 높이게 하는 겁니다. 이제는 공터에서 야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부동산 투기할까 해서 그 자리 서서 이 이야기를 한다 말이죠.

구약이 그래요. 구약은 살기 위해서는 이런 포도와 이런 음식의 영양분이 있는 걸 먹어야 된다는 수준이 초등학교 야구게임 하는 수준 이예요. 그런데 그건 새 생명 아닙니다. 이건 있는 몸 밥이나 먹고 어떻게 버텨볼까 하는 그쪽 수준 이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가 신약시대인데도 수준이 어떤 수준이냐 하면 구약 수준입니다. 구약 수준에서 딱 맞는 게 뭐냐 법이예요. 율법입니다. 법 지키면 복 받고 법 어기면 저주 받는다. 딱 수준이 그 수준 이예요.

그러니 교인들은 복 받으러 왔으니 ‘목사님이여, 말씀만 하옵소서. 제가 순종해서 복 따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는 겁니다. 특히 신약성경은 일체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네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어떤 말씀이 있더라도 그 모든 말씀은 하나로 이미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그 하나가 뭐냐 하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말은 사랑할 자격도 없는 자에게 내가 사랑을 베풀음으로써 구약에서 이야기한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 완성하였느니라.’ 라고 돼 있거든요.

그래서 이 구약 본문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항상 신약을 염두에 두고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성경 본문 하나 더 찾아드릴게요. 히브리서 2장 14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 모든 자를 놓아 주려 하심이라. 요 본문이 구약에 가게 되면 성전 지으면 내가 너희 몸에 필요한 먹을 것 줄게. 포도송이 열리게 하고 땅에서 소산물이 내고 하늘은 이슬을 내리게 할게,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성전 지으면.

그런데 신약에 오면 죽기를 무서워하고 종노릇하는 것은 이미 내가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구약은 앞을 내다보지만 신약은 손을 털어버리는 거예요. 이젠 아무것도 할 게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늙어가는 몸을 죽는데다 그냥 내놓으세요. 살려고 하지 마시고 이 몸은 자연적으로 죽어가기 때문에 죽은 몸을 그냥 죽은 채로 내놓으면 되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내놓게 되면 이미 산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성전이 완성되면 우리에게는 새 몸에 합당한, 옛 몸에 합당한 것은 이슬이나 단백질, 탄수화물이지만 새 몸에 합당한 것을 하늘의 영생을 누리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옛 몸 가지고 이렇게 새로운 사랑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 새 몸의 입장에서 볼 때에 먹을 거, 입을 거, 이런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예요. 그것 가지고 축복, 저주를 구분하지 맙시다. 먹을 거 없다고 저주받았다. 먹을 거 생겼다고 복 받았다. 그러면 안 돼요.

강도 만난 사람이 있거든요. 강도 만난 사람이 있을 때 강도 만났다. 그런데 옆에 누가 지나갔다. 강도는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이 넘어져 있을 때 그 사람의 소지품 가운데 뭘 가져가겠습니까? 그 사람의 음식이라든지 귀중품, 목걸이 시계, 이런 걸 막 가져간다 이 말이죠. 그렇게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서 강도만난 사람에게 귀중품을 뺏어서 휴대폰 같은 것을 가져가는데 그들이 가져가는 것이 그들에게 복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자,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한국교회는 죽 둘러서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죽으심을 믿으시면 여러분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하고 예수님께 돈을 뺏어가는 교회가 있고, 어떤 사람은 ‘병이 낫습니다.’ 하고 병을 빼가는 교회가 있고 어떤 사람은 ‘방언 터집니다.’ 해서 방언을 빼가는 교회가 있다면 우리교회는 예수님 죽은데서 뭘 빼 가면 될까요? 죽음에 동참하면 됩니다. 그 피! 그 피 속에 피를 묻혀야 되죠. 그 죽음이란 의미를 알 때 그것이 새 몸에 합당한 축복입니다.

성전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렇게 성전은 희생물을 계속 매일같이 갖다 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하나님과의 연결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전을 지으라는 이유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교제할 수 있는 장소인데 거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생명으로 교류하는 거예요. 그 성전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예수님 몸이 성전 되었습니다. 딴 거 줄 게 없어요. 죽어도 산다는 것을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약속으로 제공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이용해서 복 받기를 원하고 고부간의 갈등, 결혼 문제, 사업문제, 취직문제, 그런 것을 기도하면서 예수님께 빼낼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되죠.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에 제가 답변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질문 내용이 뭐냐 하면 평소에 상당히 교인들이 궁금했던 질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 할 때 한 사람이 대표로 믿으면 다른 사람도 덩달아 구원받을 수 있느냐, 그 문제인데 기존 목사들은 가장만 나오면 나머지는 덩달아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본인은 그게 아닌 것 같고, 그러면 진짜 뜻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했어요.

그 질문을 받으면서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공짜로 주님이 저쪽에서 공짜로 주는 건 맞는데요. 내 쪽에서 공짜로 가져가는 것은 구원이 아니거든요. 말이 어렵죠. 주시는 건 되는데 내 쪽에서 공짜로 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우리한테 없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이 주께서 주시는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느냐?’가 구원 이예요. 그런데 그걸 먼저 남편이 먼저 구원을 받아서 주님과 죽겠다 하는데 그걸 탐을 낼 여편네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만약에 남편이 내가 교회 가서 취직됐다. 교회 가서 건강해졌다. 이러면 같은 여편네도 ‘나도 몸 아픈데 가겠다.’ 이건 되는데 예수님한테 빼먹을 것이 병 낫고 돈 잘 벌고, 이걸 빼먹는 것이 아니고 진짜 주님께서 축복을 준 것은 이제는 네 생애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죽어도 다시 사는데 왜 자꾸 너 자신에게 미련을 갖고 집착을 갖고 이 세상에 대해서 성공 그런 걸 기대하느냐, 차라리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영광스럽다.‘라는 것이 구원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제대로 안다면 그걸 주변에 있는 가족이나 자식이나 누가 그걸 탐을 냅니까? 탐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선물로 받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은 좋은 점이 우리가 받은 이 복음에 대해서 누가 치근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 그런 구원 나도 좀 줘.‘ 이렇게 누가 치근대지를 않아요. 왜, 아무 탐낼 게 없기 때문에.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 절대로 안 합니다. 절대로 안 해요. 자기 살기도 바쁜데 뭐 자기 외에 예수를 위해서 우리가 목숨을 바쳐?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역시 우리에게도 말이 안 돼요. 따라서 우리는 반발하고 반항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본성은 항상 예수의 뜻이 뭐든 간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했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서 억지로 일하면서 일하기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억지로 이걸 하는 게 우리의 본성 이예요. 하지만 성도에게는 계속해서 공짜로 주는 구원이 주어집니다. 요구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주시는 겁니다. 그러한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어느새 주님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주객이 바뀌어요. 나를 위해서 주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내가 소집되었다는 거예요. 군에 오라고 소집하듯이, 주께서 우리를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입니다. 구약은 네가 저주받았는데 복 받기 위해서 네 몸! 몸 잘 되기 위해서 ‘네가 성전 잘 지면 먹을 거 줄게.’라는 것이 구약이라면.

신약은 이제는 해와 공기 그거 잊어버려라. 어차피 일광욕 쪼여도 늙으면 죽기 마련이고 맛있는 거 먹어도 돌아서면 나중에 똥 되고, 그러니까 솔로몬의 입은 옷도 들풀보다 다 못하고, 그러니까 그런데 신경 안 써도 이미 살았잖아. 그것도 공짜로. 그게 누구한테 왔습니까? ‘나한테 왔지.’ 라고 예수님의 공로를 우리가 생각해 볼 때 그러한 사랑이 주는 자유를 이제는 마음대로 만끽하는 그 사람이 주께서 친히 지으신 성전입니다. 성전은 주님이 지었지, 구약처럼 우리가 짓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담 갖지 않고 살게 하시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세상 살게 하옵소서.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고 죄 안 짓겠다 하는 것도 죄고 죄 짓겠다 하는 것도 죄고, 십자가 늘 바라보면서 버려야 될 것이 무엇인 걸 깨닫게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