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피
2014년 1월 26일 본문 말씀: 스가랴 9:11-13
(9: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9: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9:13)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언약에서 피’가 나오면 내가 너희들을 힘들게 한 원수들을 향하여 배가 보복하도록 조치해주겠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간추린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나 그 이후의 사람들은, 말씀의 구체화를 ‘헬라 제국의 후손들에 대한’ 전쟁을 통한 승리에서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말씀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상황이 맞다면, 그리고 오늘 본문이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실제 예언이라면, 그리고 세계의 모든 역사라는 것이 예언된 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맞다면, 이스라엘은 참으로 최종 승리를 낚아채는 유일한 민족이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마음 준비를 갖출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믿음에 속한 자인 바를 티를 내려면, 이스라엘 국가가 연합해서 군사력으로 헬라 제국에 뿌리를 둔 현 모든 제국들에 대한 군사적 보복하는 장면을 통해서, 과연 하나님 말씀은 빈 말일 수가 없음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덩달아 신앙인의 반열에 소속되어 있음도 확인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놓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의 피’입니다. 언약에서 피가 나와야 될 이유를 인간들은 하등 갖지를 못하게 됩니다. 언약은 율법입니다. 율법이란 법입니다. 법의 실효성 있는 실제성이란 피로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고 있는 인간 존재’의 실제성에서 검증된다고 알고들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어긴 자를 돌로 치라”고 했을 때, 참으로 법이 법대로 이스라엘에서 성취되는 순간은, 이 법령을 외워서가 아니라 안식일을 어긴 자가 발생되어야 하고, 그 발생된 자에 대해서 돌이란 딱딱한 물체를 통해 숨을 끊어놓는 태형이 벌어져야만 하는 겁니다.
아무리 안식일 금령이 무엇인지 이해한다고 해도 자기 일가친척이 안식일을 범했을 때, 돌을 들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모면시키느냐를 걱정한다면 이 사람은 안식일이라는 율법은 어긴 사람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언약의 완성에서는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다 지킨 사람이나 사람들의 출현을 두고 말한다고 믿게 됩니다.
물론 율법 제사법에서 제물의 피가 흐르게 되지만 이는 전체 율법의 일부에 해당되는 사항이라고 보는 겁니다. 제물의 피가 흐르더라도 그것만으로 ‘언약 전체를 대변한 그 피’라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까먹지 않고 꼬박꼬박 성전에서 양의 피로서 제사드리는 그 행위를 하는 자들의 존재와 행함이 진정한 언약의 완성의 일부를 점하고 있다고 믿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언약의 피’는, 전체 언약을 전체 다 준수해야만 자부하는 자들에 의해서 무시당하고 배척당한 식으로 ‘언약의 전체성’이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겁니다. 이는 언약이란, 인간들에 의해서만 지켜져야 하는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제정자가 법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에 대해서 얼마나 크나큰 오해를 유발하는 여부를 보이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스가랴 말씀을 주던 그 시기가 이미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본질이 무참하고 모욕받는 때가 되면 이스라엘은 다시 통합되어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제국들에 대한 보복 전쟁이 벌어지고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한다는 스토리가 성립됩니다.
즉 어린양이라는 제물의 피가 전체 언약 완성을 대변하는 피인 것을 밝혀지려면 율법이라는 언약이 어떤 전개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율법대로 제사드림으로 모든 법의 완성이 종결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린아이가 젖을 먹고 싶으면 운다. 울면 젖을 준다는 규칙을 엄마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간이 지나고부터 아이가 울어도 엄마는 젖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더 크게 웁니다. 아이가 더 크게 우는 것은 아이 나름대로 확정적으로 결론 내린 바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울면 젖 준다’ 원리입니다. 아이는 이 원리를 절대로 깨뜨리고 싶지 않고 그것을 깨뜨리고 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알 길이 없고, 이 법을 대신할 방식도 미리 알지 못합니다. 그 주도권은 엄마가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기껏 할 수 있는 바는 더 크게 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이에게 젖을 주지 않고 더 화를 내는 엄마는 그 아이로 하여금 본인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 원칙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언제까지 젖이나 먹고 살 겁니까? 밥을 먹을 밥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의 화내는 것을 통해 결국은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역설을 통해 배움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역설과 모순이야말로 진리의 나타남입니다.
율법의 경우, 애를 때리고 화를 내는 식이 같이 도리어 아이에게 엄마가 죽어버리는 일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겁니다. 즉 율법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지뢰 밟은 것처럼 무너져내려버립니다. 즉, 양을 매일 잡아 언약의 피를 내는 그 작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당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외쳤습니다. 이 “다 이루심”을 정답해서 모든 율법 준수의 상황을 소급시켜서 점검에 나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온통 지뢰밭이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게 만들기 위해 촘촘히 놓여있는 지뢰밭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0:9에서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첫째 것의 폐함이 없다면 율법 완성을 언급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율법 안에서 하나님도 죽고 모든 인간도 다 죽었기에 결코 인간의 몸에 의한 ‘율법 완성’은 더 이상 없는 겁니다.
율법 완성은 오직 ‘언약의 피’로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헬라자식들에 대한 보복전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약성경에 와서는 ‘언약의 피‘를 받아드리지 못한 자들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복을 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브리서 10:28-29)
『하나님 아버지, 말씀 안에서 우리가 날마다 무너지고, 그 완성의 피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