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미움
2013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스가랴 8:14-17
(8:1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
(8:15)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8: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8:17)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서 노를 격발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는 왜 이제 와서는 은혜를 베풀기로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은혜라는 배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은혜받는다 는 당사자를 입장에서 봐서는 하나님의 뜻의 일관성이 갖추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제시된 것은 바로 법입니다. 이는 율법 없이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 상대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나아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시고 무엇을 좋아하시는 지를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못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바라는 사실은 은혜를 받지 아니하면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흔히들 은혜라고 한다면 아무런 대가 없이 무상으로 받은 것이기에 누리면 된다는 여깁니다. 그런데 은혜받은 자들이 무엇을 가지고 누려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는 바로 그점을 하나님께서 대단히 대노하시고 미워하는 일이라는 사실 속에서 누려야 하는 겁니다.
이처럼 법을 통해서 신과 접촉하는 것은 택한 백성들의 특징입니다. 기원후 200-900년에 걸쳐 현재 멕시코 지역에서 융성했던 마야 문명에서의 신과의 접촉은 40m 높이의 제단을 쌓아놓고 그 위에서 사람의 심장과 피를 바치므로서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약 2만명의 포로들이 이 제단에 희생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도 그 시대에, 그 지역에 살았다면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시대가 낳은 자식들입니다. 자기 시대의 문화관과 세계관에서 못벗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눈에 뜨이는 모든 사람들의 진리관이나 인생관은 곧 지금도 지배하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신약 성도는 어떨까요? 신약 성도를 파악하기 위해 구약에 나오는 말씀 한 군데를 더 살펴봅시다. 시편 15편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의 장막은 하나님의 많은 말씀을 달고 들어오는 이들로만 채워질 것입니다.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자는 천국에 들어올 수 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이 말씀을 대한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지켜보겠다고 나서게 되면서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시도하면서 필히 드러나는 것은, 자신을 선한 존재를 탈바꿈 시키는 작업도 같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개입되는 것은 인간들의 시간관입니다. 인간들은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흘러서 현재를 거쳐 미래쪽으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여기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놓게 되면, 과거에 못 지킨 것은 앞으로 잘 지키면 상쇄가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나나, 오늘날의 나나 앞으로 미래의 나가 동일한 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서 있는 나에게서 그런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체계가 나온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시간이 어떻게 되었던 그 시간조차도 여기 존재하는 자기 자신에게서 도출된 것이라고 여깁니다. 아직 살아있어 죽지 않을 때까지 죄를 상쇄해줄 의를 양적으로 더 많아지게 할 여유가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이런 인간의 시간과 다릅니다. 요한복음 1:15에 보면,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인간의 시간관으로서 포착되거나 저촉된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의 시간은 이처럼 과거-현재-미래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미움의 전개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9:11-13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일단 사랑받거나 일단 미워하기로 작정되어 있다면 인간들의 시간 속에서 대상자가 어떻게 진행되든지 그 결정난 점은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 도리어 시간에 따라 바뀌어지는 것처럼 보이게끔 진행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세상에 침투하시므로서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이 만나고 충돌하는 그 지점으로 인간의 마음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
구약 때의 율법은 마음 밖에서 압박하는 지경이라면 신약에서 아예 마음 속까지 율법이 침투하여 압박을 가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이 율법을 제대로 지켜서 기어이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분투 노력하면 할수록 인간은 여전히 미진한 의로움이 항상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에 의한 절망은 말씀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오늘 본문 말씀이나 시편 15편의 말씀을 아예 성도의 말씀 속에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께 미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열심히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더욱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절망적인 입장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런 작업과 더불어, 인간이 미처 예상 못한 경우도 같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신비로운 소식입니다. 성도 본인과 사전에 의논한 적도 없이 일방적으로 성도의 모든 죄를 다 가져가서 ‘자신의 저주받음으로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4-25의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시간대가 모두 예수님의 피 희생으로 채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