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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20강-금식 속의 구원(슥8;18-23)이근호140105

아빠와 함께 2014. 1. 5. 16:59

2014-01-05 14:58:20 조회 : 4         
   금식 속의 구원 140105 이름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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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1-05 15:49 
금식 속의 구원

2014년 1월 5일                         본문 말씀: 스가랴 8:18-23

(8:18)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8:2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8:21)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8: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8: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이 다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남을 성사시키는 도성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와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간들이 포착이 됩니다. 그들은 파괴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통곡하고 금식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경건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금식 덕분이었을까요? 예루살렘은 평화를 찾고, 그동안 예루살렘을 얕잡아보면 다른 나라들이 그 때가 되면 예루살렘의 존재를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대상은 관찰하므로서 그 대상을 자기 것으로 삼고자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번창한 예루살렘을 목격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예루살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의 집결은 땅에서 하늘로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몸을 향하여 쏠리듯이 모든 말씀이 향하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인간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어두움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빛이었습니다. 모든 말씀은 그 빛에게로 향해지는 쏠림현상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인간이 시도하는 ‘대상 갖기’는 성사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납니다. 인간들은 예언에 의해서 완성된 그 예루살렘을 갖지 못합니다.

닭 쫓던 개 입장이 됩니다. 그 뒤 ‘유사 예루살렘’, ‘유사 예언완성체’를 꾸미기 시작됩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금식 전문자 집단입니다. 4월의 금식은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성이 멸망당하는 때를 생각하면서 드리는 절기입니다. 5월의 금식은 그 예루살렘에 화재가 일어나면서 하나님께서 드리는 모든 제사 기구가 불타버린 것을 기억하면서 드리는 금식입니다.

예루살렘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은 일반 가정에서 불나는 것과 다릅니다. 제사 기구가 불탔다는 것은 곧 율법이 불타버렸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붙타버렸다는 말은 인간이 행하는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하나님과의 접촉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핵은 제사실시입니다.

제사를 날짜를 지정해서 드리기 위해 주어진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는 곧 안식일 자체가 불탔다는 말입니다. 어떤 날을 잡아서 제사드려도 하나님께서는 안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란 이 제사일에 종사하라고 생활비 차원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 제공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사의 소멸은 곧 제사 행위의 소멸로 이어지고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할 일도 같이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즉 십일조 받을 인물들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그 한 사건으로 다 이룬 것이 됩니다. 안식일 지키지도 못해도 , 예수님의 죽으심이 곧 안식일이 완성된 상태임을 알아채는 자들에게는 인식일을 지켜야 받을 수 있는 복을 받아 챙기는 자들이 됩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다 이루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십일조를 온전하게 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일조를 다 행하셨는데 거기에다 십일조랍시고 돈을 교회에 바치는 것은 십일조 위반 죄가 되어 스스로 저주를 유발하는 바가 됩니다.

‘십일조 안해도 된다’가 아니라 ‘십일조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안식일 안 지켜도 된다’가 아니라 ‘안식일이나 주일이라고 특정날을 지키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모두다 예수님의 행하심에 대한 모독적 발상에서 비롯된 행위들입니다. 7월 달 금식은,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의 인재들을 임했다는 점에서 드리는 금식 절기입니다.

10월 달 금식은 기원전 588-589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포위당함’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런 슬픔의 절기가 도리어 기쁨의 축제날이 된다는 것은 예루살렘 자체에 새로운 변화를 통해 예언이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로마서 3:23-24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쉴새없이 금식일 일이 일어납니다. 밥 먹고 싶지 않는 상황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편치 못해 밥먹고 싶지 않다는 것은 따로 은근히 기대하는 상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기 만족스럽게 이루어지면 그때에 실컷 밥을 먹게 되겠지요.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늘 자랑스러운 거룩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성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금식은 바로 기대가 여지없이 수치를 품고 무너져내리면서 발생됩니다. 하지만 이런 금식날을 후대에도 계속 되풀이한다는 것은 단순한 심적 괴로움의 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이벤트가 됩니다. 다같이 같은 주제를 두고서 밥을 굶어가면서 금식한다는 것은 그들 공동체를 결속하는 힘을 다지고 다시는 시간이 되는 겁니다.

즉 금식을 통한 ‘힘 모으기’를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일이 자기 마음먹은대로 알 때, 금식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선한 동기의 행위가 신으로부터 동정을 따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8:12에 보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되어 있습니다.

즉 금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성의 있는 예언성취를 촉구하고 싶은 충동을 품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금식자로부터 배격당하시는 형식으로 예수님은 살해당했습니다. 즉 ‘힘  없음’을 위한 금식을 그들은 해내지를 못한 겁니다. 반성과 회개가 곧장 ‘잃어버린 힘 축적’과 공동체의 결집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속성을 보이게 됩니다. 즉 기대한다는 것 자체로 인하여 온전한 ‘힘빼기’를 성사시킬 수 없게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바로 그 힘빼기의 자리에서 새로운 예언의 층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유일하게 받아주시는 금식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이로서 그 예수님을 따라 땅에서 하늘로 이동한 겁니다. 오늘날 수많은 나라와 민족과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추방시키는데 있어 불의한 조력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루살렘보다 더 즐겁고 기쁜 일들을 고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즐겁고 신나고 흥겨운 일을 찾아다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도 예외없이 예언 자체로서의 예루살렘은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실정에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싫어된 바된 그 자리에서 출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만나는 사람마다 배격당해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8장 18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19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예언된 바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그 일은 뭐냐 하면 그동안 고생했던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이 되면서 다른 사람들이 시기를 하고 부러워해서 ‘나도 너희 하나님 믿을게. 나도 너희 하나님 믿을게.’ 하고 몰려온다는 겁니다.

‘그때는 금식했던 날이 축제일이 되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함께 즐거워하면서 다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하는 예언을 스가랴 8장을 통해서 이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이 땅에는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루살렘이 바뀌게 되면 예루살렘의 위치가 이 지상의 예루살렘 같으면 현재 이스라엘 거기로 우리는 이사를 가야 돼요. 주민등록을 옮겨야 됩니다. 주소 새 주소로 바꿨습니까? 주소를 바꾸는 게 아니고 예루살렘에다 우리의 주거지를 정해야 돼요.

그런데 여기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위로 올라가게 되면 예루살렘을 겨냥해서 예언된 말씀도 같이 위로 올라가야 돼요. 비행접시(UFO)가 내려왔다. 지상에 안착했으면 UFO 뜸으로 말미암아 거기 납치된 사람도 같이 떠서 올라간다는 그런 UFO와 관련된 일이 있는 것처럼, 새로운 민족이 되면 같이 올라가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올라가게 되면 예루살렘을 향하여 집중했던 모든 예언이 이 지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지상에 있는 것은 존재 의미가 없지 않느냐? 우리는 있으나 마나한 게 아니냐? 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런 게 아니에요. 예루살렘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 당시 이스라엘과 모든 202국의 나라, 현재 월드컵에 가입된 나라가 202개국 나라입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거죠. UN에 가입된 나라보다 많은 게 월드컵이고 월드컵보다 더 많은 나라가 따로 있으니까.

그 모든 나라들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옛날 예루살렘을 멸망케 했던 이스라엘의 기능을 그대로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니까 진짜 예루살렘을 쫓아내는 기능으로서의 존재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냥 무의미한 게 아니고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온 예루살렘을 ‘저리 가. 저리 가. 꼴 보기 싫어. 그런 소리 하지 마.’라고 후쳐 내는 역할로 이제는 이스라엘이고 모든 나라가 합세해서 동일하게 그 작업을 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나라와 이 국가를 통해서 이것이 이런 나라에 소속돼 살면서도 그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께서 괜히 유지시주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이제 좀 있으면 소치 동계 올림픽이 있고 6월 달에는 월드컵이 있습니다. 4월 달 되면 류 현진이 야구한다고 던지고 추 신수 치고 난리 납니다. 예루살렘? 흥미 없습니다. 올해는 줄줄이 소치 올림픽에서 김연아 픽픽 돌면서 트리플 하고 있고 6월 달에 월드컵 하는데 거기서 우리가 왜 예루살렘을 찾아봅니까? 기다리는 스케줄이 꽉 차있는데. 죽이면 당할게. 그 기능을 해줘야 된다니까요.

2월 8일 날 김 을수 집사님 딸이 결혼식을 하는데요. 저한테 온 순서 지를 보니까 그 결혼 주례를 제가 합니다만 제가 해야 될 주례 본문이 벌써 와 있어요. 보니까 로마서 3장 23절에 보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게 결혼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 이게 결혼식하고 관련 있다는 사실을 제가 알죠. 죄 속에 결혼식도 포함되거든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는 것이 주례사로서 등장돼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은 예루살렘을 후쳐 내는 그러한 작업에 우리가 이미 놓여 있다는 겁니다. 즐거울 거리가 있기 때문에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칠 수밖에 없는 그런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금식이라는 거예요. 여기 1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이 변하여” 여기 4월의 금식이라 하는 것은 기원전 588년 10월 달에 예루살렘이 2년 동안 포위를 당합니다. 그게 10월 금식이고, 그 다음에 나온 게 4월, 5월, 7월이 나오는데 4월 달은 예루살렘이 점령을 당해요. 588년 10월 달에 포위됐다가 586년 4월 달에 점령이 되고, 5월 달은 화재가 일어납니다. 다 타버려요. 예루살렘이 불났다는 의미는 집에 불나는 의미와 달라요. 불 이야기하니까 가슴이 내려앉습니다. 가스 불, 걱정스러운데. 화재가 일어난다고 할 때 우리 집에서 화재 일어나는 것은 그냥 가스렌지 몇 개 타고 이런 게 타죠.

예루살렘에 불이 나게 되면 거기에 법궤 타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지시한 모든 것이 다 타버립니다. 모세 율법이 탄다. 이렇게 보면 돼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불이 탈 때 모세 율법도 홀라당 다 탄 거예요. 무슨 안식일이 있고 십일조가 왜 있습니까? 불 타버렸는데. 여러분, 십일조 안식일은 무엇을 위해서 있는 거냐 하면 지상에서 하늘로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 있는 법 조항입니다. 특정한 장소를 지정했고 특정한 날짜를 정해서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금요일과 일요일 그 사이를 안식일로 정해놓고, 왜 정해놨는가? 그날은 특별한 날로 정해서 제사하는 날 이예요. 하나님의 율법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자기가 안식일의 주인공이라 했다 이 말이죠. 안식일의 주인공이 와서 안식일을 지킨 게 뭐냐 하면 ‘십자가로 모든 걸 이루었다.‘가 지킨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믿으시면 안식일 없는 거고, 십일조 없는 겁니다. 십일조를 10% 내라 하는 것은 그 당시 농사짓지 않고 자기 직업이 없이 제사해야 될 그 일에 종사한다고 다른 생활비가 충당되지 않는 자에게 생활비 주라고 각출한 게 10%에요. 그래서 제사장 없는, 안식일 없는 제사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져버린 거예요.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 다 이루어진 겁니다. 무슨 제사를 새삼스럽게 제사를 드립니까? 아직도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제사라 하거든요. 아직도 제사를 드려요. 제사에 환장을 했어요.

제사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신앙생활 하는 자체도 없어요.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이라는 거 없습니다. 하여튼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거 전혀 없어요. 없으면 신앙생활 어떻게 하느냐? 제공되는 거예요.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제공되는 겁니다. 누가 내 이름을 도용해서 대신 연금을 들어놓고 난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매달마다 연금이 은행에서 송달되는 거예요. ‘자, 너 밥 먹어라. 십일조 잘한 덕분이다.’ ‘제가 언제 십일조 했습니까?’ ‘네 대신 예수님이 다 했거든.’ 그게 십일조에요. ‘얘야 맛있게 먹어라.’ ‘왜요?’ ‘네가 안식일 지켰거든.’ ‘제가 안식일 지킨 적 없습니다.’ 예수님이 네 주인인데 안식일 다 지켰기 때문에 그 율법 잘 지켰다는 뜻으로 너에게 모든 것을 공짜로 주시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돼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든 율법을 지키든 어떤 인간도 제사 드린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제사함으로써 제사 짓는 죄를 또 범한 거예요. 십일조 함으로써 십일조 지은 죄를 범하는 겁니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 제가 지금 말합니다. 십일조 하면 그것이 십일조 한 죄를 지은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 믿은 죄가 그 죄에요. ‘안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하는 자체가 죄가 된다니까요. 안식일 지킨 자체가 죄가 돼요.

어쨌든 우리 쪽에서 어떻게 꿈지럭거려서 갈 수 있는 방법은 완전히 없어요. 그냥 누리는 거죠. 그런 복음의 은사를, 호사를 누립시다. 누려! 그걸 누려야 돼요. 복음의 자유를! 뭘 해도 죄가 되면서 동시에 뭘 해도 그게 의가 된다는 사실. 죄가 되는데 어떻게 의가 되느냐, 그건 세 가지의 바탕을, 한 장소에서 사건이 세 가지 사건이 중첩돼서 그래요. 예루살렘 사건에서 포위됐다. 점령됐다. 화재 났다. 한 가지 더 있는데요. 7월 달 금식은 뭐냐, 학살당할 때. 그래서 포위된 건 빼버리고, 점령됐다. 화재 일어났다. 학살 됐다. 또는 포위 된 것까지 합치면, 포위됐다. 점령, 화재 일어났다. 학살됐다. 이 세 가지 사건이 한 예루살렘에서 세 가지 중첩되는 겁니다.

세 가지가 중첩되면서 세 가지 중첩된 층을 통해서 그 자리에 합류된 사람은 엘리베이터처럼 올라오게 되면 죄인이었다. 우리는 잘난 인간이다. 그런데 마귀한테 포위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의인을 죽였다. 죽인 의인을 예수님께서 살려냈다. 살려 낸 것을 우리를 심판했다. 심판 속에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이런 작업들이 옛날 예루살렘의 작업과 동일한 작업으로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천천히 다시 할게요. 처음에 인간은 인간의 만남 이예요. 예수를 만나든 누구를 만나든 똑같은 인간 이예요. 인간인데 그쪽에서 복음을 듣는 순간 졸지에 내가 죄인 돼 버렸어요.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도 죄인이고 듣는 여러분도 죄인이다. 우리는 다 같이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한분 그리스도 은혜로 값없이(십일조 필요없어요.)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로우심을 받았습니다.‘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인간에서 뭐로 변하느냐, 죄인으로 변합니다. 죄인으로 변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은혜를 받는 입장에, 수혜자 입장이 되면서 새로운 층으로 달라지죠.

죄인이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자체적인 메카니즘에 의해서 죄인이 의인이 돼버린 겁니다. 그 가운데 매개로 등장하신 분이 누구냐, 바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피가 매개가 돼서 죄인도 의인으로 되어서 천국 간다는 사실이 복음으로 살펴지는 거죠.

이것이 로마서 3장에서는 짧은 문장으로 돼 있지만 스가랴 8장에서는 이거는 하나의 놀라운 전쟁 사건으로 사건화 되어서 역사적 현장으로 남아있는 겁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그 전쟁의 흔적, 잔재가 남아있다는 거예요.

돌이 있음이 현실이 아니고 저 돌이 왜 깨져있는가를 보는 그것이 의미의 현실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돌이 깨진 걸 볼 거예요. 하지만 ‘깨졌네.’ 라고 끝나면 안 돼요. 현실을 못 보고 온 거예요. 왜 깨졌을까? 하나님에 의해서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깨졌다. 불 타버렸다. 그럴 때 그거는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 체계를 구성케 하는 겁니다. 요소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현실이 되려면 우리 자신도 그 새로운 사건에 의해서, 성령의 역사죠. 성령의 역사에서 우리 자신도 바뀌어 지고 달라져야 되는 겁니다.

금식을 이야기해야죠. 그러면 여기 4월의 금식은 점령된 것이고 5월의 금식은 이건 화재로 인해 완전히 불타버린 것이고 7월의 금식은 이제 하나님께 심판받는 것이고, 심판받는다는 것은 그 당시 예루살렘의 고관대작들이 다 죽었어요. 화재 일어나고 그 다음에 다 죽었거든요. 그걸 의미하고 10월의 금식은 포위된 것이고, 10월의 금식이 제일 앞 선 것입니다. 나중에 줄줄이 4월, 5월, 7월 이렇게 처참하게 예루살렘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죠. 하나님과 매치가 되는, 하나님과 접촉이 되는 그 장소는 사라져 버렸어요. 하지만 사라졌다는 그 흔적이 우리에게 의미로서 새로운 현실로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금식하느냐? 금식이란 뭐냐 하면 금식은 잃어버렸기 때문에 금식하는 겁니다. 그런데 금식이 하나의 반복적인 행사가 돼 버리면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하나의 행사가 돼 버려요. 처음에 금식할 때는 밥  맛이 없어서 금식하죠. 뭘 잃어버렸으면 밥맛이 없어요.

저도 그런 일이 많은데 지갑을 잃어버린다든지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밥맛이 없어요. 그런데 잃었다가 지갑을, 실제로 서울에 책 사러 가서 지갑을 공중전화에 놔두고 왔는데 나중에 파출소에서 전화가 와서 가보니까 어떤 여학생이 돈 7만원 들은 그 지갑을 그대로 찾아준 거예요. 아직도 그런 여학생이 있다는 사실에, 과연 죄를 범했으매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착한 사람이 있다는 게. 그래서 너무 고마워서 경찰들에게 오뎅 사먹으라고 2만 원 주니 안 받데요. 지금 생각하니 너무 짰어.

잃었다가 찾고 난 뒤에는 기분 좋다고 금식해도 괜찮은 거예요. 금식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이 금식한 것 자체가 실수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실수가 되는 이유가 뭐냐, 금식함으로서 행여  잘 보여서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죄 지은 걸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옛날로, 옛날로 다시 돌아가게 하옵소서.’ 하면서 금식하는 것, 이거는 일종의 힘을 집결시키는 그러한 행사가 돼 버리는 겁니다.

금식한다고 구원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기껏 할 수 있는 한계가 그 정도에요.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기념일이라 해요. 기념일, 교회 기념일이 뭐냐 하면 유대인을 금식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고난 주일, 고난 기념일, 부활절, 맥추절, 추수 감사절, 그리고 성탄절, 다섯 가지 특징은 전부 다 봉투 돌리는 특징이 있죠. 예산 펑크 나면 메우는 거예요. 보통 맥추절에도 예산이 펑크 나면 맥추절에서 한번 건지고, 그게 추수감사절까지 견디기만 하면 여분의 것은 성탄절에서 여분의 것으로 건지고 내년 예산에 여분의 돈을 마련하는 그 방식을 하는 거예요. 이거는 힘을 모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하는 이 자체를 없애버립니다. ‘금식하지 마.’ 라고 없애는 것이 아니고, 요런 점이 어려워요. 제가 복음 전하면서 참 어려운 점이 뭔가 명령으로 ‘해, 하지 마라.’ 나타나는 게 아니고 그런 것을 하지 마라. 금식을 하게 함으로서 금식하는 쪽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오히려 죽음을 당하는 어떤 새로운 사건을 금식 가운데서 새롭게 발생시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갔을 때 그때 바리새인이 자랑 질하기를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다.’ 했어요. 금식하는 사람들의 집합은 힘을 모으는 거예요. 금식 빼버립시다. 나머지 남는 게 뭐냐, 우리는 이만큼 힘 있다. 어느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 뜻이라면 얼마든지 금식할 정도로 우리는 자기를 낮출 정도로 대단한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고난주일? 3월 말 되면 맨날 고난주일 해요. 고난주일 하게 되면 직장 없이 집에 노는 주부들 거기 매달립니다. 교회가 직장이거든요. 맨날 불러내니까. 맨날 가서 그냥 노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이벤트가 되면 힘이 생기면서 내 힘으로 순적하게 이렇게 자식을 잘 키웠다는 겁니다. 아, 지금 누굴 의식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내 힘으로, 내 기도 힘으로, 다른 사람은 돈, 돈해서 키웠지만 나는 기도해서 이만큼 자식을 잘 키웠다는 거예요.

아! 그 힘, 무채색으로 바뀌어야 돼요.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종교의 힘을 무채색으로, 없는 걸로 바뀌는 거예요. 모든 물질의 중심에는 원자로 돼 있는데 원자는 핵과 전자가 구름처럼 형성하고 있다 보거든요. 그 전자가 양성자 중성자로 돼 있다 했습니다. 학자들은 양성자 중성자로 돼 있는데 그게 끝이라 했는데 그 소립자가 과속으로 입자를 때려보니까 거기 코르크란 세 가지로 돼 있어요. 학자들은 여기서 고민했습니다. 왜 세 가지냐 하는 거예요. 그게 나중에 밝혀지기를 빛을 옷으로 입기 때문에, 빛으로 옷을 해 입으면 빨강색, 노랑색, 초록색이 돼서 이게 무색이 돼 버려요. 아주 신기해요.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근원은 빛이라 했습니다.

지금 대전 강의를 미리 앞당겨서 하는 겁니다. 거의 참석을 하지 않으니 답답해서 내가 해야지, 모든 것은 빛으로 시작해서 빛으로 끝나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빛이 있는데 실제는 모든 게 무색 이예요. 빛이 무색 이예요. 빛은 무색인데 우리는 지금 검은색, 파란색을 갖고 있습니다. 요게 가짜에요. 검은색, 파란색, 빨간색, 요게 가짜라니까요. 사실은 색이 없는 것이 받쳐줘서 색깔이 있다는 말은 색깔은 사라져야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져야 돼요. 요기까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금식을 시키는 것은 가봉하기 위함입니다. 가봉, 가봉이란 나라 이름이 아니고 옷 해놓고 가봉하러 가잖아요. 가봉을 왜 하느냐 하면 옷을 맞출 때에, 요새는 옷을 그냥 사니까 가봉을 안 하는데, 옷을 맞출 때 맞는지 가봉하잖아요.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가봉을 하는데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답답해서 금식하게 합니다. 이거는 밥 먹고 싶어도 밥이 안 먹힐 정도로. 왜, 너무 충격이니까. 항상 우리 인생에는 매일같이 파도처럼 밥이 안 먹힐 일들이 계속 일어나요. 밥 좀 먹고 싶다 하면 뭔가 또 일이 일어나요. 왜 사람들이 스스로 이렇게 밥 안 먹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느냐 하면 은근히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 연아가 돌 때 넘어져 보세요. 밥 먹다 넘어지면 밥이 안 먹혀요. 온 국민이 성원하는데 넘어지면 안 돼. ‘가산점이 없습니다. 감점 있습니다. 아사다모에게 집니다.‘ 이렇게 나오면 밥이 안 먹히는 거예요. 요거는 조그만 거지만 우리의 모든 인생은 반드시 고대하고 기대하고 은근히 노리는 게 있어요. 그게 될지 안 될지 모를 때는 밥이 안 먹히다가 일단 되면 밥이 먹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갑니다. 이걸 가봉을 해야 돼요. 가봉을 해서 이제는 얼음판에 넘어지든 어떻게 되든 월드컵 16강 못 나가도 관계없이 나라가 망하든 석유 값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관계없이 늘 밥 잘 먹히는 사람으로 가봉하기 위해서 먼저 금식을 유발하는 사태를 해놓고 ‘네가 금식했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미래의 계획은 모르고, 네가 경험했던 과거에 누적된 것을 가지고 네가 은근히 뒤에 꽁무니 붙어서 은근히 구원받고자 하는 그 시도 자체가, 그 구조를 네게 그걸 놔버리란 말이죠.

'내가 이만큼 행했습니다.’라는 것에서 네가 손을 놔버려야 돼요. ‘하나님이여, 과거에 이만큼 내가 열심히 주를 위해서 봉사했습니다.’ 그걸 놔버리세요. 처음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그게 똑같이 되는 무채색, 나는 빨간색, 너는 노란색, 빨간색, 노란색 없어요. 우리는 원래 색깔이 없는 사람이라고 놔버리자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금식을 해봐야 돼요. 금식을 하고 난 뒤에 은근히 금식했으니까 좋은 일 있을 거라고 기대하다가 좋은 일은 개 코, 금식하나 뭐하나 참, 금식 괜히 했어. 해도 소용없는 걸 가지고, 그걸 느끼면서 아! 구원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봉하는 그러한 계기가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매일같이 밥 안 먹히는 짜증나는 일이 벌어지면서 짜증나는 일을 통해서 매일같이 아! 괜히 엉뚱하게 은근히 노렸기 때문에 내가 말려들었구나. 그런 되도 않은 세속적인 일에 내 마음을 다 빼앗겼구나. 하는 후회스러움과 함께 새로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깨닫게 하는 그것이 이런 가봉되는 일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매일의 금식이고 금식 안 해도 되는 금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 선배들 금식했습니다. 울었습니다. 다시 힘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힘은 이미 왔습니다. 온 힘도 감당 못 하는 저희들, 어리석은 저희들 세상에 살면서 어려움 당하면서 구원의 죄 용서 힘은 다른데서 온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