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스가랴22강-겸손하신 예수님(슥9;9-10)이근호140119

아빠와 함께 2014. 1. 20. 07:52


겸손하신 예수님(스가랴 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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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1-19 16:24 
겸손하신 메시아 

2014년 1월 19일                          본문 말씀: 스가랴 9:9-10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시간이 멈춰진다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인간의 몸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변화되고 죽음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의 멈춤은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억지요 상상의 산물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공들여 세운 모든 것에 신께서 의미를 주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자신의 일생이 하나님의 훌륭한 작품이기를 고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용어는 인간의 가치를 담을 여지는 없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온,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 같은 용어들입니다. 이들 용어들은 평소에 인간들이 잘되기를, 그리고 거창하게 등장하기를 학수고대 하면서 사용용어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개념들이 자기에게 적용되기를 원했건만 그들은 도리어 시온과 예루살렘을 이루려 오셨던 그 메시아를 살해하고 맙니다. 

따라서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봐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셔서’ 살해당하셨습니다. 겸손하지 아니하면 살해당할 분이 아닙니다. 오로지 겸손해야만 하기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곧 성경에 나오는 참다운 예루살렘과 시온은 이런 겸손에 참여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상당히 유명한 구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쉽다고 여길만큼 만만한 구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껏 나귀 정도 타신 것으로 겸손의 진수를 보여주셨다는 것이 이상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귀 정도로 못 타시는 자들이 숱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아예 나귀 버리고 바닥을 박박 기시면서 예루살렘 입성하는 것이 더 완벽한 겸손이 아닐까요? 

바로 이런 점을 파악하는 것에서 원활하게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점을 보충하기 위해 마태복음 9:20-22의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이 여인의 행동은 전반적으로 ‘겸손’ 하에서 움직입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인간들이 따질 수 있는 모든 행동 자체를 능가하고 넘어서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나 철저하게 부인하기에 그 어떤 외부의 비난도 감수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도 합리적으로 따지지를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망가져 있음을 곱게 인수하고 인정하고 싶어집니다. 원래부터 자신은 내세울 것이 없기에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충만해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권능이 작렬할 때만 나타나는 현장입니다. 누가 뭐라 욕해도 예수님 앞에서 상관없다는 생각,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자체적인 수위 조정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낮아짐조차 무의미하게 되어버린 현상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구원이 우리에게 전달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받을 만한 능력을 자체적으로 조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겸손의 능력이 어디서 비롯되며 그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밀려오는 과정은 어떻게 유발되는 겁니까? 

에베소서 4:7-9에 보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에 보면, 구원의 능력은 인간이 지향하는 그런 방향은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바로 과정 자체에서 구원의 능력을 보여집니다. 위에 가계시면서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듯이 은혜를 베풀게 되면 이게 곧 구원의 능력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겸손에 참여케 됩니다. 이 에베소서 본문에서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다’는 대목을 유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땅 아내 낮은 곳에 내려가시지 않으시면 결코 사람들에게 위에서 선물을 줄 수 없는 입장에 곧 주님으로서의 입장이랍니다. 그렇다면 이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오기를 시도하는 인간들의 모든 시도가 메시아의 일을 모독하는 교만스러운 죄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즉 하늘에서의 선물이 없는 경우라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교만뿐입니다. 오늘 스가랴 본문10절에서,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라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서 내세울 수 있는 모든 힘을 절단내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이미 이스라엘이 멸망한 그 이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힘이 없습니다. 실은 힘은 있는 대로 다 빠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힘을 포기했고 교만을 포기했다고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왕이 오신답니다. 그 왕은 결코 그들의 힘을 보충하거나 회복한 여지를 제공하는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닙니다. 초라한 행색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의 낮은 곳’을 향해 가시는 모습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의 기개가 아닙니다. 왠지 낯설고 낮은 곳을 자진해서 찾아들어가는 모습입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기대하는 그런 의지와 정반대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방향이 서로 반대이니 호응을 받을 여지도 없습니다. 누가 와서 조금의 힘만 가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같은 허약성은 ‘힘을 뺀’ 채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긴 예수님만의 겸손입니다. 

이제 이 겸손이 시간의 터널을 뚫고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은채  현재화됩니다. 시간 속에 시간이 정지된 영역이 따로 존재입니다. 더 이상 자기를 살리겠다는 의지도 통하지 않고 그냥 하늘에서 내려주신 그 구원의 은사를 그냥 받게 됩니다. 그 은사는 곧 이 땅 제일 낮은 곳에서 퍼올려진 구원의 힘입니다. 이 뜻은, 지금보다 더 낮은 곳에 내려간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구원의 능력은 여전하다는 표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예수님만 생각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9장 9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0페이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스라엘 왕이 나귀타고 오신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란 말이에요? 여러분, 누가 나귀 탄다고 우리가 신경 씁니까? 신경 안 쓰죠.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라고 했을 때 여기 설명을 해놨어요. 9절에 보면 그분은 나귀는 타는 이유가 겸손하다는 거예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탄다는 거예요.

그러면 겸손하면 나귀를 버리고 박박 기어야죠. 해병대 훈련하는데 나귀 못타는 사람도 많은데 나귀 탄다는 정도가 겸손입니까? 나귀 버리고 이렇게 삼배 일보. 세 번 절하고 엎드려서 긋고 다시 절하고, 시위 현장에서 그 짓 하잖아요. 세 번 절하고 그것도 비가 와야 분위기가 맞아요. 비가 오고 날씨가 추워야 더 측은해 보이고 하는데, 나귀를 타는 정도가 겸손에 해당되느냐 하는 겁니다. 나귀 없는 서민들도 많은데.

나귀 타는 게 무슨 겸손에 속하는 겁니까? 그래서 이 본문에서 지금 여러 가지 난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근본적인 것은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탄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막상 문제를 던지고 보니 보통 문제가 아니죠. 누가 나귀 탄다고 구원받습니까? 누가 나귀 타서 겸손하다고 내가 구원받는다? 어떻게? 중간에 무슨 과정이 복잡하게 연결되어서 ‘저분은 나귀 탔는데 공짜로 내가 덜렁 구원이 되었다.’ 이게 어디 성사가 되느냐 이 말입니다.

특히 오늘 9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해서 여기에 나귀 타는 것을 통해서 겸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기존에 있는 시온이나 예루살렘이 아니고 새삼스럽게 시온이 만들어지고 새삼스럽게 예루살렘의 딸들이 발생된다는 이야깁니다.

기존의 예루살렘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그건 안 되고 예수님께서 나귀 타는 걸 통해서 겸손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은 새삼스럽게 새롭게 등장한 그런 시온의 딸이요, 예루살렘의 딸입니다. 물론 이 시온과 예루살렘이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늘에서 내려와요. 예수님의 신부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야!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건 유보돼 있고 그것은 무엇을 알아채느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는 의미를 알 때 그 사람이 그런 구원의 혜택이 주는데 다시 제가 원점으로 돌아가서 나귀 탄다는 이것을 겸손이라고 우기는 것도 이상하고 그걸 겸손이라 치더라도 그 겸손함이 우리에게 어떻게 구원으로 이어지느냐 하는 그 과정을 어떻게 그걸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쉬운 것부터 시작을 합니다. 아까 불렀던 529장의 찬송가 2절 가사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그 여인이 떨며 무릎을 꿇고 주 앞에 하는 말 주님의 권능이 이적이 되어 나 깨끗합니다. 너도 그 옷 가를 만져 병 고침 받으라. 그 권능이 지금 너에게 새 생명 된다.’ 이 말이죠. 권능이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성전에 보면 미켈란젤로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할 때 ET처럼 손가락 가지고 이렇게 하는 장면이 천장에 있거든요.

여인이 옷 가를 가만히 와서 옷을 만졌는데 권능이 예수님에게서 여인에게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니까 그 여인이 병 고침을 받는 동시에 그것이 곧 여인에게 새 생명이 되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요걸 우리한테 적용시키려면 일단 우리는 병이 들어야 돼요. 우리는 멀쩡한데 무슨 병이 드느냐, 물론 현대에 의하면 모든 현대인들은 정신병자니까 병자입니다. 정신병자 아닌 인간이 없어요.

성형외과 의사를 가지고 칼 든 정신병자 같다는데. 멀쩡한 애들 뜯어고쳐서 돈을 버니까 정신병자죠. 그런데 정신병 빼놓고 지금 우리가 멀쩡한데 이 여인은 병 나아서 새 생명 얻었잖아요. 그러면 병 낫는 이걸 생략을 해봅시다. 너무 지루하니까 빼고 바로 새 생명 얻는 권능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죠.

그러면 우리 다시 이 여인에게 갑시다. 이게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긴데 여인이 옷 가를 만질 때 어떤 마음으로 만졌느냐 이 말이죠. 그게 바로 겸손한 마음이 되는 거예요. 이게 겸손한 마음 이예요.

문제를 다시 처음으로 가게 되면 예수님이 하는 그 구원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의 구원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어떻게 생명이 되고 예수님의 천국이 우리 천국이 되느냐? 그 중간에 있는 메카니즘, 과정을 조사해 보니까 그걸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게 뭐냐 하면 겸손이었더라 이 말 이예요. 겸손!

겸손을 왕!왕!왕!왕! 유발시키면서 우리에게 권능이 오는 거예요. 겸손을 맞이하게 되면 권능이 오는 게 아니고 권능이 다가오는 현상이 무슨 현상이냐 하면 이상하게 겸손해지는 현상 ‘주여 저는 죽도 밥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님 앞에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나는 이상하게 겸손하게 되는 거예요.

병이 들었다고 해서 우리가 겸손해지는 게 아닙니다. 병이 들면 악착같이 ‘주여 낫게 해주셔야 믿습니다. 그동안 주님한테 퍼부은 밑천이 얼만데 병을 낫게 안 하면 저는 손해보고 이렇게 날마다 기도한 정성이 얼마인데.’ 겸손이 아니고 점점 더 교만해져요. 기도원에 가도 마찬가지고 겸손이 아니고 점점 더 교만해지는 거예요. 왜냐 하면 자기의 열성이 잊어지지 않고 기억에 남으니까.

그런데 병도 들지 않았고 집에 아무 일도 없어요. 뭐 그냥 조용해요. 그냥 1월 19일인데 왠지 겸손해지는 느낌이 와요. 권능이 오는 느낌입니다. 권능이 오는 소리에요. 왠지 겸손해지면서 ‘아! 나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때는 머리를 이렇게 두 번째 마디로 긁어야 돼요. 그때는 쌍시옷 넣고, ‘아! 씨, 나 아무것도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들 때 이건 신학을 몇 년, 독일에서 박사를 따고 집사, 장로 돼도 소용없어요. 목사 돼도 그거 갖다 버려도 괜찮아요. 그냥 겸손 이예요. 권능이 오는 게 아니고 권능이 오는 소리, 권능이 오는 현상, 그거는 나에게 겸손이 발생된다는 현상입니다.

발생이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그릇이 빈 그릇이 돼 버려요. 그걸 공백이라 하는데 그릇을 이렇게 겸손해야 되니까 그동안 내가 자랑 질 했던 것이 갑자기 다 부끄러워지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치즈 바른 빵이나 과자나 음식을 불 속에 갖다 넣으면 치즈가 처음에 딱딱하다가 다 녹아버리죠. 뭔가 나의 자존심 같은 것이 양초처럼 촛불이 되어서 뭔가 치즈처럼,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옷 가를 만질 때 여인이 겸손하지 않고 옷 가를 만져버리면 ‘주님 제가 지금 옷 가를 만집니다. 만지는 거 사진 찍어 놓으세요. 찰칵, 찍었죠? 남들은 안 만졌는데 저는 만졌습니다. 만졌으니까 반드시 제 병을 낫게 해줘야 돼요.’ 이거는 치즈 아니고 이게 딱딱한 거예요.

그런데 뭔가 만졌다는 그 사실마저도 이것도 추잡하기 짝이 없는 짓 이예요. 내가 병 낫겠다고 하는 이 짓도 더러운 짓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왠지 그분이 나를 살릴 것 같은 느낌, 느낌 알죠? 뭔가 그분이 살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때 특징이 뭐냐, 시간이 정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해석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시간에 관한 문제에요. 철학도 마찬가지지만. 시간이 그 순간 정지가 되는 거예요. 정지가 되게 되면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홍해처럼 양쪽이 벽이 돼서 스톱이 돼 버려요. 원래 홍해 물가가 흐를 때 강물이나 요단강이 흐를 때는 항상 흐름이라 하는 것은 시간을 표현하는 겁니다. 시간이 흐름처럼 또 흐름도 시간처럼 이야기할 수 있어요. A라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조금 지나면 B라는 지점에 왔다가 B에서 C로 흘러갑니다. 모를 땐 돛단배를 띄워보면 알죠. 종이배를 띄워보면 종이배가 흘러가잖아요. 어디서 어디까지.

그런데 홍해나 요단강에서 물이 스톱이 됐다는 말은 이 부분에서는 절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겁니다. 1초든지 7초든지 관계없어요. 그거 알려면 ‘별에서 온 그대’ 드라마 보면 대번 알 수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모든 시간이 정지가 되면서 외계인은 마음대로, 김 수현이는 마음대로 설치는 거예요. 그게 특수 촬영 기법으로 한 겁니다. 스톱이 돼 버린 거예요.

홍해 사건이 스톱이 되고 여인이 옷 가를 만질 때 스톱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뭐가 발생되는가? 여기 보면 시온의 딸이 발생되는 순간이요. 예루살렘의 딸이 새롭게 발생되는 순간이 그 순간 이예요. 겸손조차도 나의 겸손이 아니고 수입해야 된다는 것, 겸손조차도 수직적으로 내려주는 거예요. 흘러가는 게 아니고 과거에 겸손을 연습 좀 해놨다가 특별한 시간에 솜씨를 발휘하는 게 아니고 수직적으로 째버리고 두레박처럼 내려오는 겁니다.

겸손이 내려온다면 그 다음에 나온 것은 뭐냐 하면 “겸손하셔서 나귀를 탔습니다.”라고 여기 나와 있을 때에 이 시대에 어떤 구원받은 성도가 봤다면 그분 메시야는 나귀타고 오시고 겸손해서 나귀타고 오실 것이라는 시간이 정지되었으니까 미래의 이루어질 일이 현재의 일로 자기에게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게 너무 어려워서 안 들은 걸로 해주세요.

어려운데 이 대목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성경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7절과 8절에 보면 우리가 그렇게 교회에서 궁금했던 거 ‘우리가 어떻게 구원됩니까?’ ‘예수 십자가에서’ ‘아, 그건 인정하는데, 십자가 있다는 건 인정하고 피 흘린 건 인정하는데, 피 흘려봐야 옛날이야기, 십자가 사건 이야기해줘 봐야 옛날이야기잖아요. 옛날에 있었던 상황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구원이 됩니까?’ 누가 물으면 설명을 해야 될 텐데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궁금해 할 때 에베소서 4장 7절~ 9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요 대목입니다. 제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성경 구절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분명히 성경에 있는 그대로 읽었습니다마는 읽는 전이나 여러분들이나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요게 무슨 취지로 왜 요 말을 ‘하늘에 올라가셔서 내려줍니다.’ 우리 같으면 요걸로 충분할 것 같은데. ‘지금 주님 어디 계시죠?’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서 뭐하시죠?’ ‘하늘에서 롯데 종합선물, 해태 종합선물을 나눠줍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우리는 요걸로 충분할 것 같았는데.

뭐라고 돼 있으냐 하면 “하늘에 올라가셨던 그분이 내리셨던 것이 아니냐?” “내리셨던 것이 아니냐?” 이 말을 왜 여기다 꼭 집어넣어야 하느냐,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그 이유가 스가랴 9장 1절부터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거기에 아람나라 다메섹을 이야기했고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두로 지방이라든지 여러 이방 가사 블레셋 나라 임금들이 끊어질 것이요. 죽 이야기했어요.

스가랴에서 겸손하셔서 나귀 타셨다 하는 요 말을 어느 뒤에다 하느냐 하면 기존의 왕들, 기존의 제국들, 땅을 장식하는 땅에서 왕이라고 인정받는 자들이 무슨 짓들을 했느냐,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왕들이 나타나도록 누가 충동질을 했더냐 이 말입니다. 바로 그건 우리입니다.

우리는 힘만을 원해요. 지상의 힘이 하늘에 도달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그냥 공짜로 선물을 주는 이유는 우리 지상에서도 가만있지 않고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그러한 노력들을 쉬지도 않고 하는데 그 노력들을 하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보고 어떤 교회를 볼 때 저 교인 수가 얼마냐, 항상 힘의 집합체로 보는 거예요. ‘저 집은 자녀가 몇 명이지? 애들이 다 잘됐을까? 세상에 여섯 자녀가 다 잘됐어.’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여섯 자녀가 다 힘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힘을 갖고 있으니까 그 힘들을 모으면 얼마나 대단한 힘이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존의 왕들은 뭐냐 하면 전부 다 힘을 앞장세우고 ‘너희들 갖고 있는 힘으로 한번 천국에 가봐라. 하나님 만나봐라.’ 하는 식으로 이미 그들은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고 훈련을 받았고 그런 인식이 팍 젖어있어요. 힘을 뺀다는 건 없어요.

그러니까 그들의 왕이 대단하다는 건 중요하지 않고, 오늘 설교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요 시간만큼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어떤 왕 같다는 말이 아니고 그 과정 자체가, 방향 자체가 힘을 높아지려고 하는 방향 자체가 그들은 그게 교만이 되는 겁니다. 현재 힘이 있느냐 없느냐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노숙자들도 심지어 나이 80넘은 ‘아이 허리야’ 하는 노인네들도 서울에 있는 탑골공원의 노인들도 기껏 하면 장기두면서 내기 장기해서 돈 다 잃어버리고, 그것도 마찬가지, 아무리 나이 많고 뭐해도 힘 이예요. 노인네들도 인물 관리하는 이유가 부인 잃고 새 장가 가고 싶어 눈이 번쩍번쩍하잖아요. 젊은 사람, 데미무어는 35살인가 스물 몇 살인가 연하의 남자와 사귄다니까 그게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는 거예요.

아까 어떤 분이 이야기하데요. 5살 연하하고 한다 하는데 아이고, 대단하다. 축복이다. 이야기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힘을 발휘하고 발산하고, ‘공짜 싫어, 내가 가진 힘으로 뭔가 나다운 것을 보겠다.’는 것이 이 땅의 세계에서 우리가 푹 젖은 겁니다. 마치 스폰지에 물이 젖은 것처럼 스폰지 짜면 물이 뚝뚝 떨어져 흐르는데 전부 다 뭐냐 하면 ‘누가, 누가 잘났나.’ 하는 이 방향성이 달라요. 땅에서 하늘까지.

그러니까 나귀 탄다는 자체가 겸손이 아니고 나귀 탄다는 말은 방향성을 이 세상과 정반대로 거꾸로 행하신다는 말 이예요. 거꾸로 행하시면서 그 거꾸로가 우리에게 구원의 권능으로 다가올 때 우리도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게 뭐냐 ‘나도 거꾸로 살아야 되는 게 아니야? 내가 그동안 힘 모은다는 것이 구원이 안 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구원은 뭐로 돼? 그럼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어야 하잖아. 아이씨, 왜 그걸 몰랐을까.’ 이게 뭔가 방향이 거꾸로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뭐냐 하면 ‘에이 나도 밑지지 않아. 잘났어.’ 하고 남들처럼 경쟁하고 남들처럼 위로 올라가고 더 높게 더 높게 더 크게 더 크게 더 멀리 더 위대하게 은밀하고 위대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는데.

이 메시야의 왕은 오히려 방향을 반대로 합니다. 방향을 바꾸어요. 그러니까 에베소서를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그분이 하늘에 올라가셨던 분인데, 하늘에 올라가셨던 분이 한 두 분이 아니거든요. 전부 다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만나고 악수했다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분은 어떤 분이냐 하면 땅에 내리셨던 분이예요. 위에 계셨던 분이 방향을 바꾸어서 역으로 방향을 반대로 땅으로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저 낮은 곳으로 가셨던 분입니다. ‘이 낮은 곳으로 가도 괜찮아. 나 같은 인간 더 낮은 곳으로  처박혀도 괜찮아.’라는 마음으로 그 여인은 예수의 옷 가를 만진 겁니다. 본인의 의사 아닙니다. 인간은 땅의 존재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런 의견이 나올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의 행동으로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원하지 더 꼴아 박기를 원하는 인간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장차 날 구원할 주님의 권능이 오게 되면 ‘나는 애초부터 쪼다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못해도 상관없어.’ 라는 마음이 ‘아! 이 마음 왜 생기지? 이거 뭐지?’ 그동안 나를 사수하고 나를 관리하고 나를 대단한 존재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온갖 신경을 다 거기다 퍼붓던 내가 주님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 당해버렸어요. ‘치려면 치시고 망하면 망하시고 그냥 조지면 조지세요.’ 이렇게 나올 수 있는 힘, 그게 예수님께서 나귀 타시고 오시고 우리에게 전달하는 그 구원의 권능이 바로 그런 겁니다.

약해져라. 약해져라. 네가 약해지는 그것이 구원의 힘이다. 강해지면 안 돼. 이건 노래 가사와 반대입니다. 여자야 약하면 안 된다 하는데 약해지면 안 된다 하는데 반대로 강해져라 하는데 약해져야 돼요. 나한테 세상 수모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 나는 낮아져야 되고 약해지는 것.

그럴 때 우리는 시간이 스톱이 되는 겁니다. 시간이 스톱이 되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자기 시간 가지고 나의 시간을 뭐라, 뭐라 말할 수 없는 이렇게 벽이 생겨버려요. 야, 별에서 온 그대 좋은 드라마라. 완전히 아무리 해도 간섭할 수 없는 특수한 공간이 발생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오신 의미가 그 자리에서 발견되는 순간 이예요. ‘아! 왕이신데, 아휴, 비천하게 나귀 타셨습니까? 아유, 저렇게 낮아졌어요?’ 그걸 낮아지심으로 이해된다는 거. 그거는 지금까지 올라온 시간이 스톱될 때야 가능한 그러한 고백입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순간을 찾아올 때에 그것은 바로 위에서 선물을 줬다 할 때 그 밑에서 뭔가 나름대로 노력한다는 그런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와서 “시온의 딸아, 예루살렘의 딸아” 하는 것은 이게 어디부터 이야기하느냐 이미 시온과 예루살렘이 망했다는 그걸 기본으로 해서 하는 겁니다. ‘망해라.’ 그래도 망해도 네가 땅에서는 분명히 망한 건 맞는데 하늘에서는 구원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땅에서는 이 나라 망했거든요. 예루살렘 망했습니다. 지금 망하고 난 뒤에 스가랴 주신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망했다는 그 자리가 구원이 새로 시작하는 자리일 줄이야. 아무도 생각 못했죠. 예루살렘, 시온.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그 예루살렘이 그 예루살렘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닙니다. 나귀의 의미를 아는 사람, 예루살렘 근처도 안 가본, 예루살렘을 구경도 못한 병든 여인이 바로 예루살렘 이예요. 그 자리가 스가랴 9장 9절이 성취되는 그 자리가 여인이 예수의 옷 가를 만지는 그 순간에 그 시간이 끊어진 그 순간이 바로 새로운 예루살렘이 발생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 겸손이란 말은 다른 말로 쉬운 말로 세 자로 하면 ‘아니다.’ 하는 말입니다. 겸손하신 주님을 보면서 우리는 발견합니다. ‘나? 나는 아니야. 나는 이런 인간은 아니야. 나는 무조건 아니야. 주님은 무조건 ’예’고 나는 아니야. 주님은 모든 가치가 있고 나는 ‘아니야’라는 그것만 갖고 있어야 돼. 그렇게 되면 그 다음 소원은 뭐냐, 죽는 겁니다.

사람이 내가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순간 시간이 정지되면서 그건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입니다. ‘나 더 안 살아도 됩니다. 주님이여 저 안 살려줘도 돼요. 그냥 죽게 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하는 그 짧은 순간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순간입니다. 그게 바로 예루살렘의 딸, 시온의 딸만 누릴 수 있는 느낌 아니까. 우리끼리의 느낌, 우리끼리의 행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겸손을 유발시켜 그 안에서 선물을 이해하게 하시는 하나님, 겸손 아닌 상태에서 교만한 상태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선물,  그것 갖고자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다 부질없는 것, 주께서 죽어도 괜찮은 마음 주셔서 비로소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저희를 통해서 뽑아내게 하시는 주님의 일에 저희들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