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버려야 될 세상

아빠와 함께 2023. 12. 16. 08:52

서울강의20231214a 요한일서 2장 17절(버려야 될 세상)-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2장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 대목을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가 함축이 너무나 많이 되어 있어요. 함축이 되어 있는데, 처음 출발이 생명부터 시작해서 생명이 가 되고, 그 생명이 피가 되면서 그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말씀이고, 그 말씀을 구현화 시킨 것이 사랑이에요. 단어 자체가, 보세요. 그게 내내 반복돼요. 3장, 4장, 5장 반복되는데 방금 한 단어들을 나열해볼게요.

사도 요한이 쓰는 단어를 나열해보겠습니다. [생명 → 피 → 말씀 → 사랑]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생명→피→말씀→사랑, 다시 생명→피→말씀→사랑,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해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 보세요. 얼마나 추상적입니까. 얼마나 추상적이에요. 추상적인데 사도 요한은 대범하게 이것을 현실로 봐요. [현실 되어짐].

생명, 피, 말씀, 사랑, 이걸로 전부다 설명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현실 되어짐은 뭐냐? 생명에 대한 방해, 피에 대한 방해, 말씀에 대한 방해, 사랑에 대한 방해. 요한일서 끝났어요, 이렇게 되면. [현실 되어짐은 방해, 방해공작]. 생명, 피, 말씀, 사랑, 이러한 것으로 형성되어있는 주의 세계에서 현실은 꼭 필요한데 어떤 이유로 필요하냐 하면 방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거예요.

그중에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사랑이 저기(주의 세계)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고 우리는 현실에 속해요. 우리 또는 나가 현실에 속한다고요. 우리, 나가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 사랑을 방해할 때 비로소 사랑이 등장하는 거예요. 사랑을 방해할 때. 우리의 기능은 방해하는 것밖에 되질 않습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죠. 생명 아닌 것을 생명이라 하는 것, 생명의 반대말은 육신 또는 육이라 할 수 있어요. 더 쉽게 얘기해서 목숨이죠. 목숨생명의 반대말인데 생명을 방해하고 있어요. 반대말 정도가 아니고 아예 생명을 방해하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6절에 유명한 말씀 나오죠.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이란 뭐라고요? 목숨마저 버려도 괜찮은 게 사랑이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사랑을 누가 방해하느냐? 목숨에 연연하는 자들, 자기 목숨을 못 내놓는 자가 계속해서 못 내놓는 그 순간 순간이 사랑에 대한 훼방이고 방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요한일서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말들만 나열한 거예요. 지킬 수 없는 것.

그 다음 피의 반대말은 요한일서에서 했습니다. 의 반대말은 입니다. 죄. 피는 누구 행위냐 하면 예수님의 행위잖아요. 우리 피는 소용없잖아요. 예수님의 행위죠. 예수님의 행위를 방해하는 것은 죄가 되는데 그 죄는 결국 예수님의 행위를 방해하는 나의 행위죠. 나의 모든 행위가 예수님을 방해하는 거예요.

말씀을 방해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입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에 집중할 거예요, 인간의 언어. 사랑의 반대말은 우리들의 세상 사랑. 그게 요한일서 2장 17절 또는 15절, 16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세상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방해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어디에 놓여있다 했습니까? 이 세상, 현실 세상에 놓여있어요. 세상에. 이 세상에 놓여있기 때문에 요한일서의 이야기에 의하면 세상에 놓여있는 우리가 세상을 헤집고 가서 ‘세상 싫어! 나 세상 안 살 거야. 나는 주님의 세계에 살 거야.’ 이렇게 해야 요한일서가 성취돼요.

그런데 이 세상은 보다시피 언어와 우리들의 세상 사랑, 우리의 행함, 우리의 육신, 우리 목숨에 대한 연연인데 여기서 우리가 빠져나오고 싶을까요? 전혀 못 빠져나오죠.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도대체 요한일서가 이야기하겠다는 게 뭐냐? 안되죠. 안되는데 요한일서에서 이 네 가지 이념, 천국, 하나님 뜻을 구현하기 위해서 이 네 가지 다 안 되는 걸 아시면서 주신 게 있어요. 이게 뭐냐? 성령.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그다음 뭡니까?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거한다.

그러니까 이 요한일서가 성경적으로 굉장히 불친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성령을 기름 부음과 연계시키는 것은 어떤 경우에 한하느냐 하면 구약 성경 전체를 통달한 사람에게나 이해가 돼요. 왜냐하면 구약성경 전체는 기름 부은 자의 지시와 명령과 통제를 받는 그런 시간들이었기 때문이에요.

왕, 제사장, 선지자 전부다 공통점이 뭡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죠. 기름 부음을 받았어요. 기름 부음이 성사가 되려면 구약 때 같은 인간들이 서로 서로에게 기름 부어주고 이런 것은 곤란해요. 선지자가 왕이나 제사장에게 기름 부어줄 때 그 선지자 본인의 기름 부음은 누가 줄까요? 왕이 줍니까? 안되죠. 제사장이 안줘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야 돼요. 성신이 임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구약 때 기름 부음의 구조, 시스템이 사도 요한에 의하면,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어려워요, 모든 죄를 까발리고 활성화시키는 요소였다고 보는 거예요. 구약의 체계가 있고, 왕, 제사장, 선지자 체계가 있는데 그 체계가 이스라엘을 구원치 못했다는 겁니다. 구원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서 구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 하나로 통합되죠. 어디 하나로 통합되어야 되겠죠. 구약의 백성들은 율법을 뭐로 보겠습니까? 아까 질문한 것처럼 필연으로 봤죠. 필연인데 인간의 그 필연이 자기가 죄일 수밖에 없다는 걸 드러내는 필연이라면, 율법을 통해서 의로운 필연이 되려면 인간들이 그 필연에 대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다른 요소가 율법으로부터 나오는 거예요. 다른 요소가. 율법인데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의롭다는 것을 끄집어내지 못한 무능력한 모습으로 율법을 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에요.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이 제대로 했으면 예수님이 피를 안 흘렸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구약의 제사장이 제대로 했으면? 그건 틀린 말이죠. 구약의 선지자들이 제대로 말씀 따랐으면 메시아가 올 필요 있다, 없다? 없죠. 그게 사실이라면 그럼 구약의 제사장은 왜 있어야 되느냐는 질문이 또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어요.

왜 일을 번거롭게 하시느냐 이 말이죠. 안 된다 하지 마시고 단박에 되는 식으로 메시아 오셔서 피 흘리시고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면 되잖아요. 왜 중간에 실패의 경우를 밑에 깔아놓느냐? 더 나아가서 왜 실패가 없으면 메시아는 안 오는 것이냐? 인간의 실패가 있어야만 메시아가 오는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요한일서는 성령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이렇게 결론내립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요한일서 4장에 보면 1절, “사랑하는 자들아” 그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돼요. 망하는 선지자가 나타나도록 허락하지 말고 단박에 제대로 된 선지자, 거짓 영을 허락하지 말고 적그리스도의 영을 허락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을 단번에 보내고 메시아도 단번에 보내면 일이 깔끔하게 잘 정리될 건데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시냐 이 말이죠.

요한일서 4장에 보면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똑같은 질문 나와요. 우리 사랑을 하나님이 인정해주면 될 게 아니냐? 왜 우리 사랑을 안 받느냐는 거예요. 거기 보면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라고 나와 있어요. 여기 죄가 나와요. 죄가. 그러면 죄와 관련되어 있는 용어가 적그리스도의 영이죠. 거짓 선지자죠.

결국 사도 요한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세상을 모르면 하나님 나라 모른다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 표정이 아는 이야기인지 모르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그냥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게 아니고 이 현실 속에 인간이에요, 우리가. 이 현실 속에는 천국이 없는 거예요. 천국 자체가.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천국이 없다는 말은 천국에 갈 사람도 없다는 거죠. 그럼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을 만들었다는 말은 천국 갈 사람이 없는데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그제야 천국 갈 사람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 세상에 천국이 없는 이유가 뭐냐? 인간들은 서로 사랑하죠. 인간들의 사랑이 뭐를 방해한다 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하죠. 인간세계는 뭘 생각합니까? 구약이 있으니까 율법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부르면서 천국을 생각하고 만들죠. 그 천국이 진짜 천국을 방해하는 거예요. 이게 이 현실세계가 해야 될 일이에요. 이게 기능이라니까요. 이게 세상의 기능이에요. 이제 눈이 좀 뜨이십니까?

여기 오늘 해야 될 요한일서 2장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영원히 거하는 세계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따라서 이 세상에는 영원히 거하는 게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뭐를 부정하느냐 하면 이 세상도 정욕도 지나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이 세상은 계속 가는 거예요. 우리의 정욕도 계속 있는 겁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뭐냐? 이 세상 있고 내가 여기 있고 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이 세상 현실 속에 있는 인간들은 그걸 포기한 적이 없다 이 말이죠. 요한일서 2장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느 출신입니까? 이 세상 출신이잖아요. 인간이 자기 출신을 자기가 부정해버리면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을 의미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근원적인 부정이 뭐냐 하면 “여러분 내가 보여요, 안 보여요? 보입니까? 그러면 아, 또 실패했네.” “여러분 내가 보여요, 안 보여요? 안 보여요?” 그러면 성공한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내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있는 것 중에 내가 여기 있으니까요. 있음은 동일한 있음이거든요.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까 인간의 행함으로 인간들은 요한일서 자체에 접근 불가능입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이 있죠. 말씀을 반대하는 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언어죠. 인간의 언어. 피를 반대하는 것은 인간의 죄. 그러니까 생명, 피, 그리고 말씀, 사랑 이것이 하나로 뭉쳐 있다면 예수님께 통합되어 있다면 거기에 대비해서 인간도 죄, 목숨, 그리고 인간의 언어, 인간 자기들끼리의 사랑 이걸로 똘똘 뭉쳐있는 거예요. 그게 뭉쳐있고 그 뭉쳐있는 안에서 인간은 본인을 규정할 수 있습니다. 나 이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럼 여기 나오는 2장 12절에 “자녀들아” 13절에 “아비들아” 14절에 “아이들아” 그리고 “청년들아” 이것은 전부다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에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왜냐하면 이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거두어내면서 비로소 이들이 등장하거든요.

예를 들면 14절 끝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게 된 청년, 그 청년은 어떤 경험을 해야 되느냐 하면 흉악한 자의 존재를 인정해줘야 되고 우리 힘으로 흉악한 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수용하는 자만이 주의 말씀이 있는 청년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 청년은 우리가 예상도 못한 거죠. 그런 청년.

그러니까 주의 말씀이 있는 청년, 아이, 아비 이걸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나의 나에 대한 인식, 내가 여기 있다는 인식이 늘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14절에 “청년들아” 하니까 대번 여러분들 생각나는 거 뭡니까? 교회 청년부 청년들이 생각나죠.

자, 교회 청년부 청년 이야기합시다. “너 구원 받았냐?” “구원 받았어요. 목사님 말씀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네가 청년이니까 나이 얼마 안 되었는데 흉악한 자를 언제 만났지?” 청년이 “무슨 소립니까? 난 흉악한 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요.” “네가 만나 이겼잖아.” “제가 언제 만나서 이겼습니까?”

아니, 도대체 흉악한 자가 누구에요? 교회 와서 돈 달라고 하는 동네 부랑배인가요? 안 그러면 교회 청년이라고 서울말 쓰며 사기쳐가지고 경상도 와서 돈 빼내는…,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에요. 경상도 교회에 서울 말 쓰는, 완전히 대구 사람인데 서울 말 쓰는 아가씨가 와가지고 돈 확 긁어내고 도망가는….

청년들은 잘 속아요. 청년들은 서로 사랑 못해서, 못 도와줘서 환장하거든요. 왜냐하면 청년들의 생각은 말씀을 지켜줘야 자기에게 주어진 두 가지의 거대한 목적, 취직과 결혼 이게 되거든요. 조금이라도 삐꺽해서 말씀 어기면 이 두 가지가 사달 나요. 성립 안 되면 그 책임을 몽땅 자기가 짊어져야 된다는 심적 부담이 굉장히 커요. 그래서 교회에서 청년들에게 봉사시키기가 쉬워요. 봉사의 대가로 자기가 원하는 것, 취직과 결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 결혼 못한 것은 봉사를 덜해서 그래요.

흉악한 자가 뭐냐 하면 방금 예를 들었던 교회 청년회, 그게 바로 흉악한 자에요, 흉악한 자. 그러니까 흉악한 자가 누군지 모르죠. 흉악한 자는 누구하고 대비되느냐 하면 피 흘린 예수님 곁에서 비로소 발각되는 게 흉악한 자거든요. 그런데 이 현실세계 인간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고 자기 행함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끼리 사랑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끼리 언어를 통해서 단결하고 협력해요. 단결하고 협력할 때 뭐로 단결하고 협력해요? 말이죠, 말. 언어죠. 언어로 해서 하나가 될 때 기꺼이… 그럼 이거 안하면 뭘 한단 말입니까? 이거 안하면 어떻게 돼요? 자기의 목적이 다 날아가 버리는데요.

그런데 그 목적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일서 2장에서는 15절, 누구든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16절은 노골적이에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런 것은 어디로부터 왔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세상으로부터 왔다는 말은 세상 자체가 누구와 원수 관계라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대립 관계가 세상이고, 그 세상에서 네가 태어났고 살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제 좀 이해되십니까? 이 필연. 우연.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언어로 필연을 조작하고 조성해내고 있어요. 이제부터 그걸 이야기할 겁니다. 이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야 될 순간이 왔어요.

언어가 발달하면 쉽게 이야기해서 서류가 돼요. 책, 책자 또는 편지 다 해당되는 겁니다. 이 언어가 아버지의 언어에요. 아버지의 언어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대장이잖아요. 동일한 언어를 써도 엄마 언어보다 아버지의 언어가 권위가 있어요. 그래서 자식은 아버지의 언어 밑에서 그 영향력 아래에서 살기 때문에 [자식은 아버지의 판본]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이죠. 육신만 아버지의 유산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 그대로 대물림 받는 거예요. 아버지라 해도 되고 기성세대라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 아버지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면 아담입니다. 아담은 뭘 상실한 자에요. 뭐를 상실했는가? 쾌락을 상실했어요. 성경에서 이것을 낙원이라 합니다. 낙원을 상실했어요. 아담은 낙원을 경험했어요, 안 했어요? 경험했죠. 경험했는데 거기서 추방되었잖아요. 그러면 아담의 정신세계에서 상실이라는 게 발생되었어요. 상실이 발생되면 상실은 필히 보상을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정신병이라 하는 것은 낙원을 기본으로 해서 상실된 낙원 부분만큼 정신병이에요. 에덴동산이 낙원동산이에요. 그것도 극상의 낙원이에요. 극상의 낙원에서 상실된 그 부분만큼 정신병이 되는 겁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갈구하니까 그게 확실한 정신병이잖아요. 있지도 않은 걸 갈구해요.

다시 낙원으로 갈 수 있어요, 없어요? 못 가죠. 못 가니까 자기의 상실은 상실대로 남았고 그걸 그대로 메꿀 수 있는 보상체제는 없으니까 메꿀 수 없는 보상체제에 대해서 대체물을 찾기 시작해요. 대체물을. 그 대체물을 안 찾으면 진짜 정신병 걸린 거예요. 정신병을 완화하기 위해서 대체물을 계속 찾는 거예요.

그 자가 누구냐 하면 아버지의 아버지거든요. 아버지의 아버지, 궁극적인 아버지, 아담이에요. 그럼 아담으로서 계속 내려가면서 어린애가 태어나면서부터 맞닥뜨리고 온몸으로 적셔드는 것은 아버지의 몸부림이죠. 아버지의 정신병.

아버지가 무슨 말을 내뱉는데 언어를 내뱉을 때 그 언어에 뭐가 섞이느냐 하면, 잃어버린 쾌락, 상실 부위를 다소나마 채우기 위해서 그걸 채울 용도로 다른 것을 추구하는 데에 필요한 말들을 그 자식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본받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겁니다. 물론 술 먹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술 안 먹고도 늘 아버지의 일상은 그거죠.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고’ 시조가 있잖아요. 정철의 시조. 정신병자가 날 낳으시고 정신병자가 날 기르신 거예요. 그리고 내가 결혼해서 자식 낳으면 또 마찬가지고.

자, 뭐로 보상할 거냐? 이 정신병 이론이 그냥 이론이 아니고 실제가 되는 이유가 실제로 현실세계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실제로 현실세계의 모든 구성과 조직과 시스템은 잃어버린 낙원의 대체물들이에요. 낙원의 대체물들. 어떻게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극상의 즐거움과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거리가 없냐는 거예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하나님이 “너는 흙이야.” 하든 말든 그건 뒷전이고, 지금 내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즐길 거리가 뭐냐에 대해 그게 없다면 허겁지겁 그걸 메꾸는 그게 우선적이에요. 복음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고 그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오늘 또 무슨 즐거움을 찾아서 이 자리에 참석도 못했는지 알 수가 없죠. 그냥 즐거움이에요. 그냥 즐거움.

그 즐거움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대체물을 구성하기 위해 생각을 모으고 결집시키는 데에 인간의 언어가 동원됩니다. 그게 정치 공동체, 경제 공동체, 사회 공동체에요. 이게 실제로 있잖아요. 빨간 불엔 서시고 파란 불에 가세요. 만약에 빨간 불에 건너가시면 당신은 쾌락의 반대말, 고통이 오죠. 왜? 달리는 차에 치이면 아프니까.

따라서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켜줄 때 고통은 줄이고 즐거움은 늘어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인간들마다 사회 공동체가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게 규례에요. 법도에요. 이게 언어로 되어 있다고요.

그 언어의 법의 기본 정신은 아버지의 법이에요. 아버지의 법. 아버지의 법은 ‘아버지를 따른다.’가 아니라 ‘옛날 아버지가 누렸던 것이 나의 욕망의 최종 목표가 된 채 자식은 성장해 왔다.’ 이 말이에요. 아버지가 욕구하는 것을 내가 따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남인수 노래 부른다고 나도 남인수 좋아하고 이런 건 아니고, 남인수를 대체하는 방탄 소년단 노래로 바꾸는 거예요. 바꿀 때, 아버지가 했던 것과 늘 대조가 되고 비교가 되는 겁니다.

그게 역사와 전통이라는 거예요.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나의 즐거움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거기서 뽑아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믿었잖아요. 믿었죠? 그런데 그 자식들, 가인과 아벨 보세요. 가인과 아벨. 가인은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믿었죠. 제사를 드렸으니까. 아벨도 믿었죠. 그 아버지의 그 자식들이에요. 아버지가 하는 그대로 해요.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그런데 여기에 흉악한 자가 가인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게 돼서 생긴 결과가 뭐냐? 아벨이 죽고 가인은 살아요. 그리고 가인은 번창합니다. 가인이 번창해요. 왜 번창해야 되는가? 가인의 나라가 만들어져야 돼요. 가인의 7대손이 라멕이죠. (창 4:18)

그 가인의 나라가 만들어질 때 가인의 나라 의미는 뭐냐? 낙원에서 추방된 자가 땅에서 조성해내는 낙원은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요한일서에서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요한일서에는 구약이 다 들어있어요, 이 안에. 너무나 추상적인 단어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냥 쉽게 접근하면 알 듯 모를 듯해요. 사실은 모르죠. 알 듯 모를 듯은 모른다는 거예요. 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자기가 이걸 행하려고 할 땐 내가 아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완전히 무지한 거예요.

그럼 왜 가인을 번창케 하는가? 그 이유가 뭐냐?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선보는 프로그램에서 남자 여섯 명, 여자 여섯 명 있다 합시다. 상철이, 정수, 광수 뭐 여러 가지 있겠죠. 프로그램 피디가, 남자 여섯 명에게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1분간 눈으로 교제하고 난 뒤에 이행시 지어서 들려줘라. 다 나가지 말고 한 사람씩 차례로 나가서 해라. 쭉 쭉 나가서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첫 인상이 좋았습니다, 뭐 이렇게 한 명을 선택해서 하는 거예요.

그럼 여자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자보고 여섯 명의 남자 전부 다를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으라 했어요. 프로그램에서 사진을 찍으라고 했어요, 여섯 명 다. 사진을 찍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자 한 사람당 여섯 개의 사진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혐오하는 남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다 없애버리라 했어요, 사진을. 진짜 쟤는 내 답 아니다, 하는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를 없애라 했어요.

그럼 여자는 최악의 선택을 했고 남자는 최선의 선택,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선택했죠. 그리고 난 뒤에 피디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제 그 장소를 떠나면서 같이 동행하는데 ‘여자의 사진에 있는 남자가 가서 그 여자의 소지품들을 들어주면서 숙소로 같이 떠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영숙이한테 상철이 사진만 딱 있으니까 다른 남자들이 상철이 보고 부러워 죽는 거예요. 아휴, 너는 선택되었구나. 맞아요. 선택된 거 맞아요. 여자는 미안해서 말을 못하죠. 피디 쪽에서 이렇게 할 줄은 생각도 못했죠. 제일 혐오스러운 남자 사진만 남기고, 그 혐오스러운 선입관을 없애기 위해서 같이 가라고 했는데, 어떤 남자는요, 세 표 몰표가 왔어요. 몰표가. 그러니까 자기 딴에 내가 인기 있다고 자부했는데 나중에 알고 실망을 했죠. 다른 남자는 혼자 가야 돼요. 왜? 그 사람은 아무도 혐오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좋게 생각해가지고요. 그런데 본인은 아무도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일 혐오스러운 나라를 이 세상으로 선택해버린 거예요. 이게 솔로 나라에요. 솔로. 이게 선택이에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택 이전에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어떻게 선택하는지 선택권을 줘버려요. 가인에게 하나님의 선택권을 줘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아벨은 그 선택에 의해서 어떻게 됩니까? 아벨이 없어지죠.

아벨이 없어지면 이 세상은 뭐만 남아요? 하나님을 혐오하는 사람의 집단이 남죠. 그럴 때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들의 속성과 생리가 고스란히 유지되는 겁니다. 그게 보편성이에요. 그게 오늘날 과학의 세계이고 철학의 세계이고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하루 일상을 사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하죠. 은혜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 보기에 네가 얼마나 혐오스러운 존재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고 있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인간은 하나님을 믿든 뭘 하든 자기 선택이 혐오스럽단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 물어보겠어요. 아벨은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겁니까, 아니면 가인이 아벨을 죽여서 아벨이 구원받은 거예요? 죽여서 구원받은 거예요. 죽여서. 여기에 광수란 사람이 인기가 있다고 합시다. 그럼 광수는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진 중 아무에게도 자기 사진이 없어요. 자기가 좋아했던 그 사람에게도 광수 사진이 없어요.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이게 광수의 죽음이에요.

내가 선택한 것이 도무지 먹히지 않는 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는 거예요. 내 선택이 도무지 먹히지 않는 식으로. 이게 아버지의 문제 때문에 그래요. 아담 때문에 그래요. 아담 때문에. 아담의 후손이 구원받는다? 없습니다. 아담이 천국 간다? 없습니다. 아담의 후손에겐 아예 천국도 없고 구원도 없어요.

그럼 어디에 있느냐? 마지막 아담에 있죠. 마지막 아담의 선택이 구원이고 천국이죠. 그런데 마지막 아담은 언제 옵니까? 마지막에 오죠. 마지막에. 오늘 제가 강의에서 지금 조심스럽게 하면서 깊이 생각하고 싶은 것은 이 차이점이에요. [말세와 영원함의 차이]. 이 둘 사이의 차이입니다.

말세라 하는 것은 시간이 쭉 있다가 시간이 끝나는 걸 말세라 하잖아요. 그럼 영원한 것은 말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원함은? 처음부터 영원함이고 중간도 영원함이고 나중도 영원함이죠. 그런데 여기 오늘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영원히 거한다.

그러니까 ‘마지막 말세에 우리가 구원받는다.’ 그 뜻이 아니죠. 말세에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영원히 거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요한이나 사도에게 있어서 말세는 언제냐? 말세는 성령이 올 때가 말세에요. 사도행전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성령이 온다는 자체가 이게 언제냔 말이에요. 세상 끝에 오죠. 그럼 하나님이 인정하는 시간은 이스라엘 시간만 인정하고 이방 시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끝나면 세상 끝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실이 들어가서 실을 마지막 뽑아내듯이, 시간도 이 땅에 들어와서 시간 속에 언약이 들어와서 언약이 시작했다가 언약이 마지막에 끝-! 하고 끝나는 순간, 시간의 용도는 마감이 되는 거예요.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시간이 흘러가서 2024년이 되든 2025년이 되든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달력이라는 것은 인간 세상에 필요한 것이지, 하늘나라에는 달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아가씨들은 여섯 번째 순위 남자와 같이 가는 거예요. 못 간 사람들은 ‘나 초반부터 완전히 버림받았구나.’ 생각하죠.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여러분, 마리아가 예수님 임신한 것 아시죠. 마리아가 임신한 자가 [버림받은 자]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에요. 그걸 내어주심을 당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8:32). 아버지께서 아들을 내어 주신 거예요. 또 다른 구절에서는, 버리신 거예요. 버림받은 자를 덥석 누가 받았어요? 처녀 마리아가 받은 거예요.

그와 동시에 마리아는 졸지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과 연결된 거예요. 속하지 않는 것.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되죠.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버린다고 되어있죠. 그러니까 마리아는 하늘의 것을 받은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본인이 이 세상 방식으로 임신이 안 되었으니까 하늘과 땅 사이 틈에 뭐가 발생되었어요? 마리아의 존재가 발생되어버린 거예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요한일서를 지켜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거예요. 마리아가 메시아 임신하려고 사전에 기도한 적 있습니까? 없죠. 기도한 적 없죠. 더 쉽게 하겠습니다. 아벨이 이 땅에서 죽었죠. 아벨이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아벨이 알던 하나님은 아벨 본인에게 무슨 조치를 했습니까? 이 땅에서 버림받도록 하는 조치를 했죠.

아벨은 섭섭하죠. 섭섭하지만 지금 이 세상이 뭐로 변해야 되느냐 하면 완전히 악한 악마의 세계, 가인의 세계로 바뀌어야 될 입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거기에 참여시키지 않고 빼돌린 셈이 되죠. 빼돌린다는 것이 이 땅에서는 죽임당한 거예요. 이 땅에서 죽여버린 거예요. 가인이 아벨을 안 죽였으면 가인의 세계가 형성되지 않아요. 가인의 세계, 악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희생 제물로 사용한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낙원에서 추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되었을 때 그 흉악한 악한 자들이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것이 무르익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무르익어야 돼요. 무르익어줘야 생명, 피, 말씀, 사랑 비로소 그것이 방해받는 식으로 이 세상에 우연적 모습으로, 하나님 보시기엔 필연이죠, 인간에게는 우연적 모습으로 이게 등장하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 조성한다 했어요? 생명, 피, 말씀, 사랑을 성령께서 조성하기 때문에 성령이 기름 부은 자만이 이 사실을 아는 거예요. 성령이 기름 부은 자. 그러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 마리아처럼 없는 존재죠.

생각해보세요. 마리아가 있는 건 맞는데, 남자 없이 임신한 여자는 마리아밖에 없잖아요. 마리아밖에 없죠? 그 마리아에게서 마리아 고유의 생명과 말과 피와 사랑이 나온다면 그 네 가지는 마리아가 성장했던 이 세상과 통용되는 언어입니까, 아닙니까? 통용 안 되죠. 그럼 이 세상은 있죠. 그럼 마리아는 이 세상에 있다, 없다?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마리아는.

그런 식으로 해서 “이 세상을 본받지 마라.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 할 때 도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그건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서울강의20231214b 요한일서 2장 17절(버려야 될 세상)-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마지막 때와 영원함의 차이점은 뭐냐? 마지막 때라는 것은 폐기처분되어야 될 이 세상을 말합니다. 말세와 영원함의 차이는, 말세가 있는 한 영원함은 없어요. 과학자들도 세상의 마지막엔 지구 온난화 때문에 망한다는 이야기를 하죠. 영원함을 이야기하진 않아요.

말세가 있는 한 영원함은 없어요. 말세는 자연을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자연 세계에서 나온 거예요. 시간도 자연이거든요. 그러나 영원함은 자연폐기에요.

성령이 왔다. 성령이 어느 별에서 왔죠? 안드로메다에서 성령이 옵니까? 성령은 어디서 오죠? 주님에게서 오죠. 성령은 주님에게서 오잖아요. 그럼 주님이 어디 있어요? 이 세상에서 추방되고 없잖아요.

지금 인간들은 어디 있어요?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본인들이 추방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대로 산다고 봅니까? 그냥 살죠. 주민등록 있으니까. 그냥 살잖아요. 그냥 사니까 인간들은 이 세상을 부정 못하는 거예요. 이 세상이 다 없어지고 지나간다고 하니까, 무슨 소리하고 있느냐? 이 세상이 왜 지나가는데? 자연이 왜 없어져? 자연이 없어질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기존의 것+과잉 쾌락을 추구해요. 과잉 즐거움, 희열을 추구한다고요. 기존의 것을 그대로 유지한 채 거기다 플러스 추가적인 쾌락을 추구해요. 플러스라니까요. 기존의 것도 즐겁지만 기존의 것이 더 즐겁기 위해서 과잉 쾌락을 추구하는 거예요.

폭포가 흐른다. 그런데 비가 안 오면 어떻게 되죠? 폭포 물이 마르죠. 폭포치고 제일 추잡스러운 폭포가 물 없는 폭포에요. 얼룩덜룩 물 흐른 흔적만 있는 폭포가 아주 한심스럽죠. 그래서 인간의 생각은 뭐냐? 기존의 것은 두고 과잉 또는 잉여, 여분의 것으로 가득 가득 채우기를 소원하는 겁니다.

잉여, 여분의 것이 들어오고, 들어온 것이 지켜지고, 거기다 여분의 것이 또 들어오고. 이걸 계속 하는 거예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자연의 힘을 계발하고→부를 얻고→더 큰 욕구를 충족하고. 과학적 지혜와 기술을 보태서 자연의 힘에서 부를 얻는 거예요. 노동의 대가를 얻는 거예요. 그럼 더 큰 욕구를 충족하죠. 이 구조를 ‘경제구조’ 또는 ‘경제 공동체’라 합니다.

이게 경제 공동체에요. 경제가 상당히 신사 같죠. 순해 보이죠. 자연+인간의 기술을 주입해서 거기서 원자를 뽑아내든지 전기를 뽑아내든지 가스를 뽑아내든지 부를 생산한다 이 말이죠. 부를 생산하는 것을 더욱더 큰 욕구로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 한다 이 말입니다.

순진한 경제구조에요. 아주 순진해요. 이게 자연에 대한 가공. 자연을 가공하는 겁니다. 가공해서 삶의 풍요를 얻는 거예요. 이런 경제 공동체에 살면서 그들이 바라는 천국 개념은 별장 개념이에요. 세컨(second) 하우스에요. 도대체 이 세상에 대한 부정성이 없어요. 오직 자연에 대한 경쟁. 부정성이 없습니다. 이 순진한 경제구조에서는.

그런데 1차, 2차 대전 때 이게 다 깨져요. 이 순진한 경제구조가 깨어집니다. 어떤 식으로 깨지느냐? 이 경제구조가 자연에서 기술을 보태어 개발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고, 돈이 돈을 버는 거예요. 자본이 자본을 벌어요. 취직해서 돈 버는 게 아니고, 근무시간에 주식투자해서 돈 벌어요. 부장 몰래 주식투자해서 돈 버는 거예요. 자본이 자본을 버는 거예요. 이게 내 한 달 월급보다 더 많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요한일서에 의하면, 인간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순진한 경제구조이고 인간이 돈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해서 돈을 번다는 건 순진한 이야기이고, 돈을 사랑해서 돈에 자기 전부를 갖다 바친 거예요. 목숨 걸고 돈을 사랑하는 거예요. 목숨 걸고.

그런 사람을 자본가라고 이야기하고 이 자본가가 주도했던 전쟁이 1차 대전, 2차 대전이에요. 그 1차 대전, 2차 대전이 전 세계 대전이에요. 아프리카, 아시아 다 동원되었어요. 거기서 전 세계 사람들이 뭘 배웠느냐 하면, 지하자원으로 돈 버는 게 아니고 금융자본이 돈을 번다는 사실에 눈을 뜬 거예요.

외국에서 투자가 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투자가 막혀버리면 그건 나라가 아니고 일종의 감옥이에요.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하마스의 가자 지역. 이스라엘이 투자를 막아버리면 그 나라는 그냥 짐승들의 우리에요. 철장이에요. 전쟁나기 전까지도 철장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돈을 사랑하지 않고 알라신을 사랑해요. 그래서 맨날 알라는 위대하다는 거예요. 가난에서 오는 쾌락의 손실분을 뭐로 때웁니까? 신에게 미침으로써 나머지 모든 세계가 돈에 미친 것을 그들은 알라라는 귀신에게 미쳐버린 거예요. 교회에 그런 사람 있잖아요. 돈 하나도 없으면서 교회 봉사에 미쳐있는 사람들, 교회에. 그야말로 광신도죠.

요한일서에서 흉악한 자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욕망거리를 발생시켜주는 주체에요, 흉악한 자가. 따라올 테면 따라와. 계속해서 욕망거리를 발생시키는데 이 세상 자체가 ‘자연을 개발해서 기술 보태고 소박하게 산다’ 이게 아니라 어떤 구조가 되어 있느냐 하면… 이것은 약간 어려운데요.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리라 생각됩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이게 어려우니까. [욕망은 형식을 만들고, 만든 형식에 자기의 잉여, 여분의 쾌락, 즐거움 또는 희열을 담는 구조를 생산한다. 이 구조가 자기만의 세계]에요.

욕망이 형식을 만드는데 형식을 만들고 구조를 생산할 때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언어에요. 말.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는 겁니다. 나만의 행복을 위해서 단어들을 동원해서 자기만의 가상적인, 실제가 아닌, 머릿속에 가상적인 자기만의 시스템을 형성해내요.

그 안에 부정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부정성이 없죠. 사회 공동체 따로 있고 사회 공동체 안에 나만의 세계를 만든다고요. 나만의 세계를. 작으나마. 애들 놀이할 때 보면 아지트 만들고 자기들끼리 놀이하는 거 있죠. 그처럼 자기만이 즐길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인간의 언어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각자 그걸 갖고 있는 거예요. 이걸 이스라엘이 해서 망한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 가지고 자기가 율법을 지켜 주리라 생각하고 그런 걸 만들었는데 하나님이 그걸 불태워버렸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만날 때 말을 하죠. 말할 때 그 말이 실타래에서 나오는 말인데 그 원형 실타래가 뭡니까? 나만의 세계에서 나오는 말, 나만의 세계를 지키는 데에 필요했던 말들이 타인의 말을 통해서 교류가 된다니까요. 교류가 돼요.

‘요새 필드에 좀 나가십니까?’ 이게 뭐에요? 나 골프치고 있다 이 말이에요. ‘나 요새 재밌는 게 골프야. 나 이거 아니면 골프 선수될 뻔했어. 너무 잘 쳐.’ 이게 뭐냐 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에서 즐거운, 향유할 수 있는 그러한 돈과 시간과 여건을 자기가 따로 만들어놨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에버리지 얼마 칩니까? 언더 치십니까? 나 준 프롭니다.’ 나오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에요? 골프 즐거움을 같이 향유할 수 있는 대상자를 포섭할 때 주고받는 말들이에요. 그 단어들이라니까요. 언어가. 그게 주의 말씀을 방해해요. 주의 말씀을. 나는 나만 즐거우면 되죠.

그러면 이 나만의 즐거움 안에 구조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나만의 세계. [나만의 세계 안은 믿음체계로 형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믿습니다. 믿음을 갖고 있어요. 내 것을 내 것으로 지키는 믿음이에요. 아, 요지부동이죠.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상실된 낙원을 대체할 소박한 나만의 낙원. 거기서 누에 실처럼 언어가 나오죠. 말이 나오고 행동이 나오는 거예요, 거기서.

이것을 경제용어로 바꾸겠습니다. 믿음체계는 경제용어로 ‘신용체계’입니다. 이 신용체계에서 나온 것이 드디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자본주의 사상’이에요. 신용체계에서 자본주의 사상이 나와요.

자본주의 사상이란 것은, 물건을 다 안 팔아도 팔았다 치고 계속 밀어붙이는 게 자본주의 사회에요. 맞죠?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주문받아 파는 게 아니고 물건부터 쟁여놓고 손님이 와서 다 팔아줄 거라 생각하고 계속 물건을 갖다놓는 거예요. 그 물건을 대주는 도매상은 뭐냐? 갖다 놓으면 팔린다는 믿음체계 때문에 갖다놓는 거예요, 그게.

그럼 거기 왔던 손님은 옷 하나 고르러 왔다가 두 개, 세 개 사죠. 왜? 자기가 생각지도 못한 잉여의 즐거움을 주는, 그걸 고급용어로 신가라(새로 고안된 무늬), 신가라 옷이 나왔다 하는 거예요. 앞선 가라가 나왔으니까 이건 내게 없던 거죠. 없던 것이기 때문에 나의 잃어버린 상실된 낙원의 기쁨을, 새로운 것이 오게 되면 충족시킬 수 있는 겁니다. 믿씁니까? 한마디로 이 세상은 개판입니다. 개판이에요.

끊임없이 욕망거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세상은 앞으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이빨 하나 빼고 가실게요. 아니에요. 있는 이빨 두 세 개 다 뽑아야 돼요. 그래가지고는 발전이 안돼요. 소박한 나만의 세계를 만드는 비용 조달이 안 됩니다. 인간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광고나 소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다~ 잘되리라는 믿음체제, 신용체제가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환율이 떨어져도 언젠가는 오를 것이라는 것, 땅값, 집값이 내려가도 언젠가는 오를 것이라는 신용 체제. 이건 올라서가 아니라, 내가 용납을 안 해요. 내려가는 건 부정성이잖아요. 부정성을 용납하지 않는 내 세계, 나를 위한 믿음체계가 따로 있기 때문에 이 체계를 위해서 부정성이 있으면 안돼요. 그래서 무엇인가 계속 생산해내고 나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지금 마리아는 뭐하고 있습니까? 따라잡아야죠. 마리아도 경쟁해야지요. 못합니다. 왜? 마리아에게는 아기 예수의 임신이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어요. 임신이 되어버렸어요. 인생 조져놨습니다. 인생 조져버렸습니다. 말세를 대비해서 말세를 이겨내야 될 마리아에게 영원한 것이 와버렸거든요. 영원한 것.

아, 영원한 것이 말세에 와야 되는데, 말세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영원한 것이 와버렸어요. 성령이. 마지막 때, 인간세계란 마지막 때에 영원한 것이 여기에 투입되어버린 거예요. 성령이란 이름의 영원한 것. 그것은 이 자연의 힘을 능가합니다. 이 세상이 불타도 괜찮아요. 영원하기 때문에.

그동안 인간은 자연의 힘에 주눅 들었고 자연을 이용해야 겨우 목숨이 부지되는 세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이 자연세계는 없어도 돼요. 자연세계는 없어도 됩니다.

자, 그러면 인간세계의 신용체계에서 마리아는 이탈되었죠. 이걸 뭐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내가 원치 않는 타인의 출현]이에요. 내가 원치 않는 타인의 출현이에요, 마리아에게. 내가 요청하지 않는 타인의 출현이에요.

인간은 어떻게 나라는 게 형성되느냐 하면 타인에 둘러싸여서 나가 돼요. 남한테 인정받으면서 내가 된다고요. 그런데 그 타인은 나와 경쟁관계에 있어요.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예요. 싸우면서 똑같이 동일한 성품을 갖게 되는 겁니다. 서로 욕하면서 똑같은 존재가 돼요. 경쟁관계에 있다고요. 경쟁관계란 시합하는 거예요.

시합하는데 이걸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게임’입니다. [이 세상은 게임판]이에요. 자진해서 자기는 이 게임에 종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어요. 자진해서. 이 도박판, 이 자본주의 신용체제에서 돈이 말을 하는 그 세계에서 나도 거기 끼어들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너 돈 없지? 돈 없거든 투자하지 마. 너 같은 것이 뭐 여기서 고개 끄덕대고 있어? 너는 붕어빵이나 먹어라. 여긴 돈 십 억대에서 노는 사람만 오는 데야.’ 이게 사람을 자극한다니까요. 은행에서 돈 빌려주지도 않아요. 은행 자체가 신용체계 아닙니까. 은행이 무슨 자기 돈이 있어요? 고객들이 맡긴 돈이죠. 계속 부풀려줘야 은행은 살아남아요. 안 그러면 은행 파산하니까. 대출하는 것도 이 게임에서 승자가 될 가능성이 있을 때나 대출이 되지, 집에서 노는데 대출해주세요, 하면 돈 날릴 일 있습니까? 안되죠.

한번 정리해봅시다. 이 세상은 에덴동산에서 낙원을 잃어버렸어요. 인간은 잃어버린 것, 상실한 것이 보충되지 않으면 정신병 돼요. 내가 돈 없는 건 다 너희들 탓이다, 이러면 정신병 돼요. 너도 들어와. 들어와. 이 게임판에 들어오란 말이죠. 지금 캄보디아 개발하는데 돈 투자해. 인도네시아에 농장, 큰 농장 있는데 그거 동영상 봤지? 헬리콥터 타고. 그거 투자하라고. 10프로 줄게, 이윤. 이윤 10프로 줄게.

인간은 본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게임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흉악한 악마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이제 게임판에서 타인을 만나야 비로소 내가 규정돼요. 게임을 하지 않는 나는 나 취급, 인간 취급도 못 받습니다. 어느 게임에 들어가야 돼요. 그래야 사람 취급 받아요. 게임을 중단해버리면 그것은 게임에서 죽은 자로 간주해서 퇴출시켜버립니다.

자, 여기서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을 정의내리겠습니다. 사랑이란 쉬우면서도 참 너무 이상적으로 보일 거예요. [사랑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주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목숨도 들어있죠, 목숨도. 아까 요한일서 3장 16절 봤죠? 형제를 위해서 뭘 바친다고요? 목숨을 바치는 그게 사랑인 거죠. 사랑은 모든 것을 넘겨주는 거예요.

사도 요한이 말한 사랑은 예수님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 가진 모든 것을 예수님께 넘겨주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나를 위한 게임에서 내가 나가버리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게임하지 마라. 게임판에 들어가지 마라.”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것은 아버지께로 온 게 아니다.” 잃어버린 낙원을 대체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벌인 인간의 게임판이에요.

그러면 이 사랑, 주님이 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목숨까지 버리려면 그럼 어떤 자리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대비하고 있어야 되는가? 이게 참 의외에요.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 돼요. 자신의 일에.

성령이 개입하면, 자신의 일에 목숨 걸고 충성을 할 때 거기서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게 있을 거예요. 잃어버린 낙원을 대체하는 희열, 기쁨을 얻고자 하는 거예요.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깨어지고 멈춰집니다. 내가 원했던 감사가 멈춰지는 그 순간, 내가 예상도 못한 다른 감사가 드디어 나오죠.

이걸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까 제가 언급했던 마리아를 생각해보세요. 마리아가 임신하기 전에 자기 나름대로의 포부와 꿈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많았겠죠. 참 많이 있었을 거예요. 많이 있는데, 갑자기 여기에 자기가 원치 않는 타인이 등장했죠. 임신이 된 거예요. 자기 안에 예수님이, 메시아가 자기 안에서 자리 잡고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타인 아니죠. 기존의 타인과의 관계가 이제는 끊어진 겁니다. 기존의 타인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기존의 나는 나가 아닌 거예요. 나가 아니면 타인과의 시합이나 경쟁이나 게임을 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못하죠.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어디 가서 말을 끄집어내요? 못 끄집어내죠. 그러면 내가 원했던 나의 감사는 다 끊어진 셈이 되죠. 그런데 그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구경도 못하고 도저히 상상도 못한 감사가 되는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감사가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누가복음 보면 나와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 나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 조상에게 약속한 언약이 내 몸에서 드디어 이루어지는군요. 이루어진 결과가 이 게임판을 어떻게 덮는지 한번 보세요. 누가복음 1장 봅시다. 게임판을 덮는 장면이 나와요.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가 찬양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1장 48절에 마리아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한번 보세요. “그 계집종의”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비천함”. 하나님께 버림받은 비천함을 임신했으니까 같이 비천해지는 거예요. 비천한데 46절에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뭘 찬양하죠? “주를 찬양하며”. 이게 새롭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비천한데 감사하고 고마울 세상이 아니에요. 힘이 있어야 감사하고 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이 판을 뒤집는가 보세요. 보면 51절에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절에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기존 인간들의 모든 게임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식으로 새로운 타인의 등장을 말합니다. 마리아가 임신해서. 인간들이 믿는 거기에 마리아도 속했었겠죠. 그런데 마리아가 속해있던 그동안의 믿음체계, 신용체계는 아기 예수로 인하여 아무짝도 소용없는 게 되었어요. 아무짝도 소용없이 되었어요.

이걸 요한복음에서는 ‘자유’라고 합니다. 타인의 평가가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중요한 것은 나타난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고 그 타인이 내 속에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4절에 보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그다음 뭐에요? 뭐가 너희 속에 거하신다고 되어 있죠?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한다는 거예요. 쓰잘데기 없는 거 가지고 남하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졌니 이겼니, 너는 승자고 나는 패자다, 그따위 실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거예요.

언제까지 그렇게 흉악한 자에게 농락당할 거냐. 그래서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겼다는 말은 흉악한 자가 그동안 말씀이 오기 전까지는 완전히 청년들을 장악했다 그 말이거든요. 흉악한 자를 알 것 같으면 우리가 흉악한 자를 이기죠. 그러나 우리는 이 게임판 자체를 우리는 긍정하고 싶은 거예요. 거기서 나의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쁨의 요소와 쾌락과 즐거움,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이 세상이 제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등장하면서 그걸 ‘문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어요. 문명. 참 좋은 말이죠, 문명. 인간의 지혜가 돋보이는 표현 아닙니까? 원숭이 너는 못했지, 문명을? 돼지야, 너는 문명을 못 이뤘지? 우리 인간이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죄악 된 인간, 마귀의 인간 문명을 번창하게 하시는 이유는 아까 여섯 번째, 혐오스러운 남자를 선택한 법칙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죄를 번창케 하시는 거예요, 죄를.

그럼 아벨은 어디 있는가? 아벨은 없다 했죠. 아벨은 없는 게 아니고 있어요. 아벨이 새로운 판본으로 드디어 들어오게 하는데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죽은 아벨이, 아벨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까지 연결되는 통신선을, 지하에 한 전선을 깔아버렸어요. 이 세상, 사탄의 세계, 악마의 세계에 몰래 전선을 깔아놨어요. 아벨의 피가 예수님께 흐르도록 깔아놔 버려요. 그것 때문에 이 세상 역사가 필요하고 이 세상 모든 문명이 필요한 겁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주지 않는 세상 것으로 마음껏 즐기게 하라는 거예요. 세상을 사랑하는데 거기엔 하나님의 사랑이 없거든요. 하나님 사랑이 없는 것들을 마음껏 사랑하게 만들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거기에 푹 빠져 정신없게 만들어버려요.

아벨이 가인에게 죽었잖아요. 일종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거잖아요. 버림받은 요소들이 그 가운데 조용하게 계속 묵묵히 차질 없이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아벨의 피에서 사가랴의 피가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마 23:35). 그리스도의 피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이 나타나는데 생명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게 피다. 피가 나타난 다음에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고 그 말씀의 내용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요한일서 4장 17절에 보면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무슨 날에?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심판 날에 담대함. 쉽게 생각해서 마리아가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임신했잖아요. 마리아가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임신했는데 그 마리아가 심판 날에 대해서 걱정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하죠. 왜냐하면 심판주가 된 타인이 미리 자기한테 찾아왔으니까. 영원한 것, 최종적인 것이 자기 안에 아기 예수로 쑥 들어와 버렸으니까. 다른 세계에 소속된 거예요, 마리아가.

제가 마리아를 자꾸 예로 든 이유가 천주교가 좋아서 마리아 예를 드는 게 아니에요. 마리아의 특징은 타인이 마리아 본인 허락 없이 마리아 속까지 들어왔던 일을 발생시켰다는 그게 너무 또렷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마리아를 언급한 거예요. 오늘날 성도가 그 마리아 신세와 똑같다 이 말입니다. 허락도 없이, 믿습니다,도 없이 그냥 들어와버린 거예요, 우리 속에.

요한일서 4장 9절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독생자가 오신 것은 이 땅에 죄로 인하여 버림받기 위해 오셨어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냈다는 것은 세상에 섞이기 위함이고, 섞였다는 말은 세상은 버림받는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통해서 모든 것이 확연하게 진리로 다 드러나 버렸어요, 십자가에서. 끝을, 감히 우리가 인생을 몇 년 안 살아도 끝을 알게 되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보내심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을 임신했다고 보면 돼요.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임신한 것처럼 우리가 사랑을 임신해서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심판 날을 걱정할 필요 없죠. 그래서 4장 18절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되어 있죠.

자, 이거 설명이 필요하겠습니다. 아까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죠, 아버지의 아버지 아담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에덴동산에 상실감이 계속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 대해 상실감이 있으니까 두려움이 발생될 수밖에 없어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사건이 있으니까요. 어떻게든 하나님과 합류하려고 아주 애를 쓰죠. 합류하기 위해서.

그런데 문제는 뭐냐? 기존의 것을 버린다, 못 버린다? 기존의 것을 버릴 수가 없죠. 자기를 버리고 자기 구원, 이건 말이 안 되죠. 내가 있어줘야 내 구원이 있으니까. 그러면 기존의 것을 버릴 수 없는 입장에서 해결책은 뭐냐? 내가 있는 곳 말고 내가 없는 곳에서 누군가 나에게 찾아와야 되죠. 그런데 그 분은 인간세계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인간세계에는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없어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서 추방되었으니까요.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없어진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게 하얏트 호텔 광고 문안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있을 곳, 집이 없다면 난 갈 곳이 없어.’잖아요. 이게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두려움이거든요. 어쨌든 간에 땅이 있어서 살아야 될 이유가 갈 곳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 아니면.

그런데 마리아 같은 경우에 임신이 되어버렸단 말이죠. 마리아가 임신한 그분은 어디서 온 거예요? 이 땅에 없는 분이죠. 그러니까 ‘어디로 갈 것인가?’ 여기에 대한 정답은 뭐냐?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으면 되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그렇죠? 그걸 요한일서 4장에서는 ‘사랑 안’ 또는 ‘성령 안’이라 하는 거예요. 성령 안에 있는 자만이 사랑을 알고 사랑은 두려움이 없나니 모든 사랑은 이미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에 보면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눠요. 이 세상에 속한 사람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이 세상에 속한 사람과 속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언어가지고 구분해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속한 말을 못 알아듣게 되어있어요. 언어를 못 알아들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요한일서를 쓴 사도 요한이 자기 말에 대해서 불신자는 제발 못 알아들으란 식으로 이 말씀을 준 거예요. 안양강의에서 말한 장벽의 기능이에요. 알아듣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알아듣지 못하게. 그걸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어요.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그래서 여기 못 알아듣는가. 아예 못 알아듣겠다고 안 오셨는가.

여기 요한일서 2장에 보면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이런 말도 못 알아들어요. 우리는 노력해서 얻은 것만 내 안에 있어요. 그것도 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서 내 욕망을 만족시킬 것을 내가 원해서 내 것이라고 소박하게 나의 세계를 따로 구성한 겁니다. 나의 말로써 그걸 지켰고요. 나의 체계를 잡고.

여기서 마리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마리아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불쑥 아기 예수가 임신되었잖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그럼 우리도 아기 예수 임신해야 됩니까? 해야죠. 그게 기름 부음인데. 성령의 오심이 그거에요. 성령은 우리 허락도 없이 왔어요. 선물로 준 거예요.

받은 지 안 받은 지 어떻게 압니까? 요한일서 이해되면 받은 거고, 요한일서 이해 안 되면 못 받은 거예요. 말은 참 굉장히 쉽죠. 이게 무슨 말인지를 알아먹는다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 일에 충실하시고 충실함에서 오는 모든 감사와 고마움이 성령에 의해서 깨어짐을 더더구나 큰 감사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아니면 이 세상 것만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아니면. 따라서 이 세상 것만 추구하긴 추구하는데, 추구 안할 수는 없어요, 타고난 육신이 그거밖에 안하니까 하긴 하는데 중간에 주께서 그게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이며 “너는 이걸 추구하는 것이 네 두려움을 너 스스로 해결하려는 해결책으로 그걸 얻고자 하잖아.”라고 우리에게 그대로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서 “네 목숨을 버릴 데가 그렇게 없더냐?” 이런 식이에요. 네 목숨과 바꿀 게 그렇게 없더냐? 없죠. 이 세상에서 뭐하고 우리 목숨을 바꿉니까? 그 말은 아직도 우리가 사랑할 대상을 우리 힘으로서는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아까 말한 대로 생명 오죠. 성령이 옵션 다 챙겨줘요. 생명 챙겨주죠. 죄를 사해주는 피 챙겨주죠. 거기다 우리 속에 말씀 거하게 해주죠. 그다음에 우리에게 담대할 수 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사랑 있죠. 도대체 굳이 이 세상 것을 사랑할 이유가 없어요. 사랑할 이유가 없다고요.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아, 재수 되게 없다. 좀 취소하면 안 됩니까? 이게 취소가 안돼요. 마리아가 아까 찬양하는 것 봤죠? 찬양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판을 엎어버리는 찬양.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우리 속에 성령이 오시면요. 여러분들이 거하는 직장이나 여러분 가정이나 여러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주변의 판을 엎어버려요. 성공한 사람, 그거 순위가 제일 낮은 여섯 번째 남자에요. 인간이 선택하는 것,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을 우리가 선택했었음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만들고 깨닫게 만들어요.

지금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여기 나오는 12절에 “자녀들아”, 13절에 “아비들아”, 14절에 “아이들아”, 그리고 14절에 “청년들아” 이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어요. 없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바로 여기 자녀에 해당되고 아비에 해당되고 아이에 해당되고 청년에 해당되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나타나는 신분들로 우리가 이렇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이제 끝으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구약에도 있습니까? 있어요. 구약에 있습니다. 그것도 구약의 중심부에 있어요. 그게 바로 열왕기상 11장 36절, 찾고 한군데 더 찾겠습니다. 15장 4절도 찾고요. 11장 36절부터 먼저 찾고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여기 등불 나오죠. 모든 걸 꺼도 주께서 등불만큼은 꺼뜨리지 않게 하겠다. 이스라엘 다 망해도 다윗의 등불은 건재하게 만들겠다. 열왕기상 15장은 유다 왕 아비얌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15장 4절,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

아무리 인간이 범죄하고 망해도 주께서 세운 다윗 언약의 등불은 유지하겠다. 이미 구약이라는 세상 속에 견고한 등불을 주께서 지켜주시는 겁니다. 이 등불이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다윗 언약의 완성, 결과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등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감사할 것은 뭐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흔적으로, 우리들의 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포부가 수시로 작살나고 깨지면서 그것이 감사로, 내가 예상 못한 감사로 계속해서 나오기를 바랍니다. 뭐 부탁하지는 않아요. 인간이 해서 될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 현상이 계속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나오는 말씀, “네가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마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세상에서 온 것이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 실감나게 되어야 돼요. 우리 속에 말씀이 있다면 이게 실감나야 돼요.

실감난다는 말은, 그 말씀에 우리 목숨을 버린다, 안 버린다? 아낌없이 우리의 목숨마저 이 말씀과 맞바꾸기를 주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안 되지만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실 거예요. 지켜보시고 두고 보세요. 주의 말씀이 우리의 고집보다 더 세니까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 그냥 말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알아듣지도 못한 하나님의 실천 설계도였고 진행하는 과정들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하늘나라 양쪽을 다 비교할 수 있는 눈이 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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