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소유와 분리

아빠와 함께 2024. 3. 16. 08:37

서울강의20240314a 요한일서 2장 19절(소외와 분리)-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2장 18절,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바로 마지막 때다. 이것은 우리가 뭘 시도한다든지 우리가 추가적으로 행동을 해야 될 게 이제는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다. 마지막 때는 인간이 꾸려간다든지 인간이 개발해서 마지막 때라고 조성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에요, 마지막 때는. 마지막 때는 인간이 손을 다 놔버린, 인간으로 더 이상 할 게 없는 때가 마지막 때에요. 인간이 무능력해야만 하는 때, 내가 어떻게 조치할 수 없는 때, 이게 마지막 때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를 아주 간편하게 이야기하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 때’ 그게 마지막 때입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될 수가 없는. 모든 인간은 율법에 의해서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될 수 없는 것이 확정난 때, 이게 마지막 때에요.

그런데 그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들이, ‘많은’ 적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가 하나가 아니고 여럿 적그리스도가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는 그 현상에 대해 원인제공은 누가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적그리스도를 일방적으로 유포하고 계시다고 보시면 돼요. 예수님이 적그리스도를 유포시키는 겁니다.

사람들이, 야, 그리스도다! 어? 저 그리스도네. 그리스도가 뭐냐 하면 구원자에요.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은 구원될 수 있는 권한이나 그러한 노림수, 그런 기대를 갖고 있으면 안 됩니다.

구세주가 왔는데 인간들이 힘을 다하여 추방시켰잖아요. 그러면 인간세계는 구세주가 쫓겨난 세계에요. 구세주마저 추방된 세계에요. 구세주가 추방되었으니까 인간나라에는 구원이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구원이 있을 수 없죠. 구원이 있을 수 없는데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그 점을 감안해서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겁니다. 구원해줄게. 구원해줄게.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놓쳐버린 그 대체로서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거예요. 진짜 예수님은 믿기 싫고 우리가 믿을만한 대체물로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에요. 따라서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 예수님이 먼저 나타나지 않으면 적그리스도가 성립될 수 없는 거예요. 놓쳐버린 그리스도의 대체물로 그리스도들이 막 나타나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추방함으로써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나 권한은 없어졌습니다. ‘구원해주세요’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아요. 그게 마지막 때에요. 마지막이라는 것은 끝났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이제 끝났어요. 인간이 설쳐대 봐야 안 통합니다. 소용없어요. 열심히 믿을게, 해도 소용없습니다. 마지막 때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때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네 구원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이 확정난 때, 이것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를 저는 두 글자로 표현하겠습니다. ‘분리’.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나라가 영원히 분리되었음을 보여주는 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닭 좇던 개꼴이 된 거죠. 개꼴이 된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는 이렇게 분리했는데 인간 쪽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과 분리되고 떠났잖아요. 떠났는데 인간 쪽에서는 메시아를 고대하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 희망이 인간에게선 떠나지 않았습니다. 악착같죠. 자기 구원에 대한 집착이 아주 대단합니다, 인간은. 못 먹어도 그냥 천국은 가고 싶습니다. 짜장면 먹어도 천국은 가고 싶어지죠. 끝까지 내가 천국 한번 들어가고 만다, 이런 거. 그러한 고집 같은 게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그러한 요구에 대해서 충실하게 도와줍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인간의 구원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적그리스도를 구성하는 본질은 인간이 구원을 얻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적그리스도와 인간이 같아요(적그리스도=인간). 적그리스도들도 인간이니까. 인간도 인간이고. 인간과 인간이니까 말만 잘하면 안 통할 리가 없죠. 좀 논리가 어렵고 힘들고 하지만 다 같은 인간이니까요. 말하고 또 말로 안 되면 빌기도 하고 빌어도 안 되면 더 애착을 가지고 매달리기도 하고 하소연하게 되면 구원이 안될 수가 없죠.

그런데 그리스도는 뭐냐? 그리스도는 인간의 시도 바깥세상으로 갔어요. ‘바깥세상으로 가셨다.’ 만지지 말라 했죠. 똑같은 몸인데. 인간과 똑같은 몸이 아니에요. 그리스도는 인간이 시도하는 그 바깥으로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신 그 나라는 인간이 들어갈 수도 없고 그다음에 알지도 못할뿐더러 인간으로서는 살 수가 없어요. 인간으로 살 수가 없는 세계. 들어갈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곳.

반대로 적그리스도는 들어보게 되면 들어갈 만하고 살 수 있을 만하고 잘만 하면 내가 눈치 채고 알아먹을 수 있는 세계, 이게 적그리스도가 제공하는 천국입니다. 왜 주님은 적그리스도를 허락했을까요? 너희들의 모든 시도는 이것까~지. 인간의 한계를, 적그리스도를 통해서 장벽이 조성되게 하신 거예요. 너희가 시도하는 건 이것까지.

제가 베들레헴에 간 적이 있는데요. 그 베들레헴에 보면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사이에 높이가 굉장히 높은, 8m도 넘는 장벽이 쳐져 있어요. 제가 그걸 보고 뭘 생각했느냐 하면, 알라신을 믿는 사람은 여기까~지. 이 장벽까지가 알라신 믿어요. 알라신 믿든 어르신 믿든 하여튼 알라신 믿어요.

그들의 생업을 어디서 하느냐?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가까우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아르바이트 하든지 직장생활하고 퇴근은 장벽 안의 베들레헴으로 와요. 베들레헴은 현재 팔레스타인 땅이에요. 알라신 믿는 사람들의 거주지에요. 그러면 그들이 장벽 밖에 나가서 검문소를 통과할 때 ‘나 알라신 믿는다.’ 이렇게 하면 통과시켜줍니까? 아니죠. ‘취업증 한번 봅시다.’ 군인들이 취업증 없으면 통과를 안 시켜줘요. 그리고 검사하죠. 테러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러면 팔레스타인 알라신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혹시 이런 사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 우리 알라신은 장벽에 갇혀서 한계가 있어. 이것은 엉터리란 뜻이지. 그러나 저 장벽 밖에 있는, 저 잘 사는, 베들레헴 근처 보면 잘 사는 이태리식 저택들이 굉장히 많아요, 너무너무 잘 살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여호와는 잘 사니까 나는 이 알라신을 버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여호와를 내가 섬기겠다.’ 그런 사람 있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거의 없죠. 거의 없어요.

거의 없다는 말은 태생이 알라에서 나서 알라로 말미암아 알라로 돌아가겠다고 작심하고 있는 거예요. 비록 서러움 받고 고난 받고 역경이 있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바뀔 리가 있느냐 하는 그 생각. 하나님이 바뀔 리가 없다는 거예요.

이 점이 중요한데 팔레스타인의 알라신이 절대적 요소를 갖고 있어요. 영원한 유일한 신이에요, 알라신이. 하나밖에 없는 신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신을 바꾼다는 자체가 그들에겐 논리상 말이 안돼요. 하나밖에 없는데 뭘 바꿔요? 못 바꾸죠. 그건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예수님이 모든 인간에게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는 사실이에요. “주께서 내 주에게”(행 2:34, 시 110:1). 하나님이 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적그리스도가 자기의 정체를 팍 나타내는 거예요. 인간의 존재는 자기가 하나에요. 자기가 둘 될 수 없잖아요. 아까 질문이 그거였잖아요. 어떻게 자아가 둘 되냐, 그 질문 아닙니까. 둘이 연락체계를 어떻게 하느냐, 그 질문이 그 질문이잖아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아담 안에 있는 것과 예수 안에 있는 것, 두 종류의 인간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설명해버립니다.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아담 안에 있는 인간과 또 하나는 예수 안에 있는 인간. 로마서 5장에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5:14) 이렇게 해서.

그런데 알라신을 믿는다든지 여호와를 믿는 유대인들은 뭐냐? 내가 어떻게 둘이 될 수 있어요? 안되죠. 나는 하나에요. 내가 하나라는 말은 내가 만든 신도 절대 불가한 오직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단일신이어야 믿을만해요. 왜? 내가 하나니까. 내가 하나인데 신이 둘 나와 보세요. 어느 한쪽으로 균형 맞추기가 힘들다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하나라 하면 아버지가 하나인 것을 믿는 것에 대해서는 자식 된 도리로서 이건 하자가 없어요. 나도 하나고 아버지도 하나니까, 그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아저씨가 와서 “내가 네 애비다.” 이렇게 하면서 그냥 오는 게 아니고 “네 유전자 조사했다.”하고 나오면…. “친자 조사해보니까 산부인과에서 바뀌어서 지금 네 아버지도 아닌 사람한테 아버지라 하고. 진짜 아버지는 나다.”라고 할 때, 그 아들이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심지어 진짜 딸이 근무하는 병원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안치했는데 진짜 딸은 와보지를 못해요. 근무시간이니까. 근무시간이기 때문에 바뀐 가짜 딸이 아버지를 모시고 있단 말이죠. 병원에서 바뀌어가지고. 참…. 그러니까 인간의 입장에서는요. 어.느. 메.시.아.가. 진.짜. 메.시.아.인.가. 또는 어.느.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곤란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전혀 곤란하지 않아요. “네가 믿던 하나님, 네가 믿던 메시아와 함께 지옥가라.”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진짜 메시아는 ‘너희들이 골라잡아라’가 아니라 아예 분리를 시켜놨기 때문에. 너희들이 알지도 못하고 너희들이 들어갈 수도 없는 그 세계에서 나타나신 분이 진짜 메시아에요. 그 말은 뭐냐? 너는 너 자신에게 가짜라는 뜻이에요. 너는 네게 가짜라는 사실.

적그리스도는 여기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내가 왜 가짜야? 진짜지. 진짜니까 이 진짜 나를 살릴 수 있는 메시아나 하나님도 오직 절대적 유일신, 하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제가 적그리스도라면 이 성경가지고 적그리스도적인 복음을 전할 거예요. 그럼 어떤 설교가 나오느냐? 뭐 교회에서 다 하는 얘기 나오죠.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이게 적그리스도적인 설교입니다. 마귀가 하는 설교에요. 지금 뭐를 빼먹고 있어요? 주님께서 너 가짜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기존의 교회에서는 뭡니까? 구원받고자 하는 너는 가짜라고 누가 지적해줍니까? 아무도 지적 안 해줘요. 아무도 지적안합니다. ‘세상 살기 힘들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소를 예비했습니다. 힘들더라도 참으시고 예수님 가신 길 가게 되면 여러분께도 좋은 날 있을 겁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뭘 기도해. 뭐했다고 기도하는데요? 뭐했다고 기도합니까.

왜 분리를 이야기 안 해요? 사람들은 말하기를, 십자가가 분리라는 생각을 못하고 십자가 피 찍어 바르면 내가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피를 흘려야 되는데? 몰라요. 그건 아는 거 없어요. 그냥 피 찍어 바르면 된다는 거예요. 어디 핫도그에 찍어 바르는 케첩입니까? 왜 그걸 찍어 발라요. 그 피는 무슨 피인 줄 알아요? 너 가짜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널 구원하러 온 게 아니라 널 죽이러 왔다는 겁니다. 가짜를 가짜로 폭로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지금껏 예수님을 육체로 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들도 육체고 인간이고 예수님도 인간으로 본 겁니다.

제가 아까 했잖아요. 적그리스도 특징이 뭐냐? 인간이에요. 인간이니까 인간끼리는 안 통할 구석이 없어요. 말발만 잘하고 기적만 베풀면 내가 원하는 거 그쪽에서 제공할 거고 그러면 제공받은 만큼 잘 섬기고 찬양하고 따르면 되잖아요. 이게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및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던 동기였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예수님은 자꾸 이상한 이야기하고,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이상한 이야기하는데 그거는 듣지도 않고요.

빌립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한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예수님, 아버지를 보이소서.” 이러고 있다고요. 아, 빌립 참 고마워. 악수하고 싶어요. 자신의 허점을 거침없이 질문으로 그대로 내놓잖아요. “예수님은 봤으니 충분하게 됐고 아버지와 함께 있다니까 이제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이소서.”라고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런 이야기하죠.

14장 보기 전에 우선 요한복음 10장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되어 있죠. 12장 44절에는,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여기 예수님이 ‘나’라고 하는 것과 ‘보내신 이’라 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두 개를 제시했죠. 두 분을 제시했잖아요. 제시해놓고 보내신 이와 예수님은 서로 아는 사이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 말씀은 뭘 전제로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나를 보기는 보지만 문제는 너희들이 나는 보고 있지만 나를 보내신 이는 너희들이 지금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요. 하나님이 둘 된다든지 메시아가 둘 된다는 것은 성립이 되질 않아요. 45절에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그리고 14장에 아까 말씀드렸던 내용을 보면 8절,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말씀은 이렇게 하는데 이게 그 제자들 마음에 합치되지 않아요. 이게 와닿지를 않는 거예요. 결국은 십자가로 인하여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는 겁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분리가 일어나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분리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떠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뭘 지금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아버지하고 아들 되신 예수님 사이에 분리되었다는 이 분리, 인간 자기 자신은 이 분리가 불가능한 거예요. 내가 나와의 분리는 불가능한 거예요. 나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분리될 일도 없고 두 개로 쪼개질 일도 없다는 거예요. 나는 처음부터 하나요 나중도 하나요. 완전 알파와 오메가다. 나는 애초부터 하나고 중간에 둘로 갈라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갈라졌으면 너희도 갈라져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기독교 들어와서 모든 설교가 다 헛방이에요. 소용없는 설교를 하고 있는 거예요. 소용없는 설교를. 백날 성경 달달 외우고 성경 적고 막 요새는 성경을 아나운서 멘트로 듣고 잘 때도 듣고 그냥 졸고 뭐 백날 이렇게 퍼붓듯이 갖다 퍼부어도 내가 분리가 안돼요. 내가. 그 내가 한결같아. 하여튼 착실하기도 해요. 착실하기도. 자기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그리 착실한지.

하나같이 나는 나고 변함이 없다는 거예요. 정신분석학에서는 그걸 망상이라 하는 거예요. 그게 망상입니다. 내가 하나라는 것은 하나여서가 아니라 내 기억이 나를 하나로 기억하기 때문에 하나에요. 내 기억이. 그 기억이 약간 흐트러질 때가 언제냐 하면 술 처먹을 때. 깨고 난 뒤에,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증인이 한둘이 아닌데. 아이고, 내가 이제 술 먹으면 난 개다. 그 다음 날 또 술을 먹어요. 술 먹으면 개라며? 가끔은 개이고 싶다. 뭐 이런 거. 참내.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기가 인간이지만 무의식은 자기를 인간으로 보질 않아요. 고함을 지르고 테이블 치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다 정신 돌아오면, 내가 왜 그러지?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악마가 인간을 하나로 절대적인 신으로 계속해서 옹립해왔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가.

악마와의 관계가 없이 자기를 안다? 이것은 대한민국 교육학에서 이야기하고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이 그렇게 이야기하겠죠. 한국 교육시스템, 과학시스템에 의하면, 인간은 진화되는 존재다. 인간은 진화되는 존재에요. 무엇에 의해서 그동안 진화되었는가? 환경에 의해서.

5백만 년 전 유인원에서 원숭이, 고릴라에서 분화되어 나온 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전까지 따지면 인간은 양서류, 개구리이고 그전까지 따지면 인간은 하나의 원세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단세포에 지나지 않는 게 유구한 역사를 거쳐서 57억년인가 하여튼 역사를 거쳐서 인간은 진화된 존재들이에요. 그러면 앞으로 환경 바뀌면 인간은 달라진다.

듄2 영화. 듄1. 듄(dune)이라는 것은 큰 모래언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래에 오래 있으면 우아앙~ 모래벌레처럼 둥그런, 하수구 공사할 때 나오는 하수관처럼 생긴 모래벌레가 기어 올라오죠. SF(science fiction)영화에서 환경 바뀌면 인간의 모양도 플랑크톤의 다양한 모양 이상으로 인간은 바뀌어요. 한쪽에 촉수가 길다든지 온갖 흉측하기 짝이 없는 모양으로 바뀐다는 그걸 누가 이야기하는가? 인간 본인이 그걸 감수하고 있어요. 인간이.

인간이 진화하는 존재로 형태는 바뀌지만 영원히 바뀌지 않는 건 뭐냐? ‘나는 나다’ 하는 거예요. 나는 나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름으로 이야기해요. ‘나는 나다’ 하면, 땡! 틀렸어. ‘나는 흙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름 안에 자신의 출처가 담겨있어야 되기 때문이에요. 흙에서 나왔기 때문에 나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한국 교육이나 과학에서는 그 이야기를 못해요. 왜냐하면 출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 외부에 인간 바깥에서 인간의 처음 시작과 끝을 다 알고계시는 다른, 인간보다 월등한 지능을 가진 존재를 전제로 해야 이 말이 성립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한국의 교육, 세계 교육이 다 그렇지만 그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판정하는 교육이잖아요. 내가 나를 검토하고 판정하고 분석하고 관찰하는 그 세계 아닙니까.

그 세계에서는 서로 서로의 의견을 물어서 공통점을 끄집어내요. 인간끼리 모여 공통점을 끄집어내니 거기서 절대로 인간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대전제가 나와 버려요. 인간은 인간을 스스로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럼 뭐냐? 인간에게 필요한 것만 우리가 만들어내자. 그게 뭐냐? 신이고 알라신이고 여호와신이고 그게 메시아고 그런 거예요. 참고도서는 성경이 있으니까요. 물론 성경도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는 거예요. 성경해석도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굳이 믿을 건 없는데 굳이 믿을 게 있다면 인간은 환경 따라 달라진다는 이 진화론은 믿을만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진화론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에 대해서 반발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데에 대해서 반발로 만들었다. 그럼 처음엔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건 맞는데 그 절차를 세분화해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진화론적으로 만들었다’ 그거 하나 살짝 삽입한 거예요. 그거 하나 집어넣은 거예요.

그거 하나 집어넣으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진화론적인 그러한 체계를 가지고 만들었다’에서 나중에는 앞에 것을 떼어버렸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를 떼어버리니까 뭐가 남겠어요? 인간은 환경 따라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뭐냐? 나는, 영원히 변하는 그 자체가 바로 나다.

영원히 변하는 나는 무슨 뜻이냐?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뭐 남자가 남자랑 연애하든지 여자를 만나든지 그건 내 마음이다. 왜? 내 마음이다. 오토바이타고 음악을 틀든지 그건 내 마음이다. 컵라면 먹고 차 창문 열어서 창문 밖 길거리에 붓든지 그건 내 마음이다. 모든 게 내 마음이에요.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인간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하나 더 추가하게 되면 ‘인간과 함께 영원히’. 인간과 함께 영원하자. 이 적그리스도는 ‘나는 너희를 배반하지 않고 떼어내지 않을게. 나는 너희들과 함께 영원히 가겠다.’ 이게 적그리스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결론에 이르느냐 하면, 인간들이 믿는 그리스도가 바로 적그리스도였다. 왜? 나를 부정하지 않으니까. 내 구원을 탓하지 않으니까요. 문제 삼지 않으니까요. 나 있다는 게 가짜라는 걸 지적하지 않는 그리스도니까 영원히 함께 안할 이유가 없어요. 인간의 친구인데. 인간이 원하는 걸 다 채워주잖아요.

설교하려고 성경본문 뽑을 때 어떤 본문을 뽑든 간에 하나님은 너희들을 못 도와줘서 환장했다는 식으로 설교해보세요. 그 하나님을 굳이, 굳이 내칠 일은 없다 이 말이죠. 바빠서 교회는 안 나오겠지만. 교인들 짜증나서 교회는 안 나오겠지만. 그러나 하나님마저 내칠 이유는 없잖아요. 하나님은 우리 편이고 모든 걸 도와주고 희망을 갖게 해준다는데 그 하나님을 왜 내치냔 말이죠. 안 내치겠죠.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결정적 차이는 적그리스도에게는 성령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성령이 안 나와요. 세례 요한의 한계가 뭐냐 하면 세례 요한은 인간이 마음먹고 하려면 할 수 있는 세례를 줬어요. 그건 물속에 들어가면 되니까요. 요단강물에 들어가서 ‘아저씨, 세례 주세요.’하고 세례 받으면 돼요. ‘선지자여, 세례 주세요.’하고 세례 받으면 돼요.

그런데 문제는, 성령세례는 전 펴놔도 성령 안 오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성령세례가 인간으로서는 대단히 난처한 일입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필연적으로 전 펴면 돼요. 여기 물 있고 여기 사람들 모이고 하면 되는데, 성령세례는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거든요. 사건이 터져야 돼요. 성령이 내려오는 사건.

마치 예수님 같아요. 예수님을 붙잡는다고 붙잡힐 분이 아니란 말이죠. 부활하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에요. 딱 세 번밖에 안 왔어요. 부활하고 난 뒤에 그 친했던 제자들에게 세 번밖에 오질 않았어요. 요한계시록 빼놓고 전체 있을 때 세 번, 개인적으로 온 경우는 빼고.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왔잖아요. 50명 있을 때 온 것 빼고, 전체 있을 때는 세 번밖에 오질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느 쪽에서 어느 쪽을 못 잡는다? 인간 쪽에서 메시아를 못 잡아요. 왜? 분리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세계, 인간이 들어가봤자 살 수도 없는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이 알 수 없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실 때는 인간의 모든 기대치와 예측을 피해가면서 오시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은혜라는 거예요. 은혜는 인간이 예측한대로 오질 않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충실하게 인간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가 지은 책 이름이 그거에요, 인간적으로 충실할 때, 성령께서 오실 사람에게는 와버립니다. 인간이 충실하다는 것은 인간 자기가 충실한 영역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께선, 특히 요한일서에는 그래요, 이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역 또는 영역은 인간 바깥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 안, 그 안에서는 철저하게 인간적이죠. 철저하게 인간적이에요. 여기 메시아, 하나님, 삼위일체 다 들어있어요. 심지어 인간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 부인하는 것도 이 안에 다 들어있죠.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못났습니다. 나는 천하의 죄인입니다. 가슴을 막 치면서, 죄인입니다. 왜 더 치지, 왜? 더 치지? 막 치니까 뭔가 뜨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불 질러줘? 식용유 공장에 한번 집어넣어줘서 홀라당 타게 해줘?

인간의 어떤 행동도 이미 인간이 행동하는 그 영역을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 나온다는 그 예측 바깥에 주님이 계셔요. 그 바깥에. 그래서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이것은 하나의 겸손이고 윤리도덕적인 자기 낮춤을 위해 노력하는 건데 자기 낮춤은 결국 자기 높임이잖아요. ‘내가 이처럼 낮추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뭐?’ ‘안 봐줍니까?’ 이런 식으로. 네가 아주 용을 쓰는구나, 용을. 네 옆에 있잖아, 적그리스도.

그런데 그땐 적그리스도라는 말을 빼야죠. 인간에겐 적그리스도가 없어요. 인간은 그리스도도 본인이 선택하기 때문에 세상에 적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아니,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이단이라 하는 교회가 어디 있어요. 이단은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거죠.

이 구천지야, 너 이단이다. 벌써 오래 되었으니까 신천지도 오래 되면 구천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우리가 진실하다’ 이러잖아요. 그러한 구분, 그러한 분류가 주님하고 무슨 상관있어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우리는 진짜 교회입니다.’ 그 말하는 자체가 그게 이단이라는 뜻이에요. 주님께서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없어요.

주님께서는 “너한테 성령 갔다. 그거 받았나?” 이렇게 합니다. 성령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 보면 그 성령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1장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되어 있죠. “아들 예수의” 뭡니까? “피”죠.

자, 이제 여러분들이 답변해야 돼요. 피가 왜 생기죠? 예수님의 피가 왜 흘려졌습니까? 무엇 때문에 흘려졌습니까? 초반에 이야기했는데요. 두 자.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생긴 피거든요. 분리되었기 때문에 생긴 피입니다. 분리될 건데? 아니에요. 분리될만하다? 아니라니까요! 분리될까 말까 하다가 분리 안 됐다, 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완벽하게 분리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피에요. 완벽하게.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음이 완벽하게 명확해진 게 피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미 끊어진 그 끊어짐을 가져와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걸 들이대는 거예요. 성령께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아버지하고 함께 있었잖아요.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성령이 있었어요.

요단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오면서 명확하게 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고 이미 그 관계가, 제3 제4 누구도 끼어들 수 없고 그 관계가 그 자체로 확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어떤 자도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에요. 그걸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렇게 확정되었고 그다음부터는 예수님께 성령이 오셔요.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는 것도 누가 그렇게 지시를 내렸느냐 하면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가셨고 마귀한테 시험을 받았어요. 예수님 자기 마음대로 못했어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그렇게 한 겁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언약, 그 중간에 그걸 준비하신 분은 성령, 그 구조 그 틀을 예수님이 피 흘리시고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는 분리. 그런데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분리되었다는 그 피를 성령과 동반해서 찾아오게 되면 그것은 그다음부터 피 가운데 예수님과 서로 사귐이 생겨버려요. 피 가운데서 사귐이 생겨버려요. 이미 분리되었다는 그 사실이 재료가 되어서 사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 피 앞에서 내 구원 시도가 성립이 됩니까, 안 됩니까? 그 피 앞에서? 성립이 안 되죠. 성립이 될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라 했어요. 그때가 이미 예수님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 찾아오셨을 때에요. 찾아와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창 자국, 못 자국 만져보라 했어요. 도마가 “나는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라고 했기 때문에.

그러니 이 관계는… 예수님께서 자기 창 자국, 못 자국을 보여줄 의무는 없어요. 그러나 그 제자들에게 무엇이 주어졌다 했습니까? 성령이 주어졌잖아요. 성령이 주어졌죠. 그러니까 성령은 제자들을 구원하는 용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메시아가 참된 메시아인지를 증거해야 될 사명이 제자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진짜 메시아,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진짜 그리스도의 차이점은 뭐냐? 피를 생산한 창 자국과 못 자국과의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보인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미 예언했어요. 마지막 때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해도 나가지 마라. 모조리 다 적그리스도에요. 주께서 오실 때에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게 아니라 완전히 세상이 다 깨지면서 찾아오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가 무대 세팅한 거거든요. 무대장치란 말이죠. 무대장치를 찢어버리고 이걸 완전히 허물어버리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예상한 이상이죠. 인간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진화론에서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잖아요. 이 말은 인간만 달라질 뿐이지, 환경은 인간이 어떻게 손댈 수 없다는 걸 전제로 하잖아요. 그런데 환경 그것은 하나의 무대 세트장이었어요. 환경을 치워버리니까 환경 뒤에 누가 나타났어요?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나버렸죠. 따라서 이 자연세계라는 환경도 덫이었고 이게 트루먼쇼의 세트장 같은 거예요.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게 진실이 아니고 이것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을 흙이라 이야기하겠습니까. 무슨 흙이 밥을 먹고 흙이 운동을 하고 하겠어요. 그러니 인간이 아는 흙이라 하는 것은 진흙뿐인 흙이죠. 이 진흙뿐인 흙 속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포함시킬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자기는 흙이 아니라고 우기는 거예요. 흙인데 흙이 아니라 했으니까 악마의 형상이 인간과 만난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적그리스도가 이끄는 대로, 악마가 이끄는 대로 인간은 조종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시간 마치면서 다시 한번 중요한 것 정리해봅시다. 세례 요한은 눈에 보이는 세례를 줬어요. 그게 물세례. 물세례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성령세례 옵니까, 안 옵니까? 안 오죠. 이게 분리에요. 이게 단절된 거예요. 이게 끊어진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 세계는 뭡니까? ‘성령세례 줄 것도 아닌데 그럼 물세례 받을 필요도 없네.’ 이렇게 되겠죠. ‘물세례 받을 필요가 없지 아니한가. 물세례 받으나 안 받으나 성령세례 온다면 귀찮게 물세례를 받을 이유가 없지 아니한가.’라고 물세례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세례를 보면서 내 구원에 이익이냐, 내 구원에 보탬이 되느냐를 염두에 두고 물세례를 봤다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령세례 받아도 그건 성령세례를 안 받은 거예요. 성령세례 받아도 소용없어요. 성령세례 받으면 나 구원받을 거야.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성령세례를 줘요.

성령세례 받겠다는 이 자체도 적그리스도가 조성한 종교 내에 있는 하나의 교리로 자리잡고 있어요. 하나의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고요. 왜? 인간들이 원하고 있으니까. 적그리스도는 무조건 인간들이 원하는 걸 주는 거예요. 분리가 아니고 도와주는 거예요. 천국 가도록 서비스해주는 겁니다. 천국 가는 여행사에요. 천국 가는 여행사. 천국 갈 때 노정 필요하다고 5만원짜리 전부다 하나씩 옆에 차고 가시는 길 곱게 보내주는 보람상조 같은 거예요, 이게. 종교라는 게.

끝으로 이 얘기를 하나의 숙제처럼 남기고 두 번째 시간 넘어가겠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에게는 이항대립이 없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환청을 겪고 있는 사람은 환청이 막 들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환청이 들리는 환자보고 다른 가족들이 이야기합니다. ‘여기 아무도 너보고 이야기하는 사람 없어.’라는 말이 환청 들리는 사람에게 도움 되겠습니까, 도움 안 되겠습니까? 도움 안 되죠.

왜냐하면 멀쩡한 사람은 ‘여기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이게 이항이에요. 서로 반대되는 두 항이잖아요. 그러니까 두 개의 항, 이항대립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아무도 아까 이야기한 사람 없어. 없으니까 들리는 소리도 없다고.’라고 이항구조 안에서는 이게 멀쩡한 사람끼리는 통하는데, 환청 있는 사람은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본인이 이야기가 안 들리는 게 아니거든요.

서로 이야기하는 사람 있으면 들리고 없으면 안 들린다는 이항대립구조가 환청 들리는 사람한테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 당신들한테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안 들리지. 문제는 나한테 들린다는 게 문제잖아요. 나한테.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냐 이 말이죠. 그래. 물세례는 있어도 성령세례는 없다. 그런데 나는 성령세례 받았는데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 할 건데요? 그건 10분 뒤에.

 

 

서울강의20240314b 요한일서 2장 19절(소외와 분리)-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인간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적그리스도이고 주님께서 그걸 염두에 두었죠. 제자들과 예수님 만남, 인간들과 예수님 만남에서 사람들은 자기들 있고 예수님 있고 딱 그 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떠나고 난 뒤에 자신이 떠난 자리, 인간의 한계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을 해버렸어요.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여러 명의 적그리스도가 시대마다 다 나타나게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과 상종하지 않고 떠난 이유가 정당화되는 겁니다. 적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없어요. 인간에게는 메시아나 필요하지, 적그리스도가 필요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주님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는 필수적으로 적그리스도가 존재해야 됩니다. 적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제자들 같은 경우에 적그리스도란 존재는 아예 없고 ‘그냥 예수님 믿으면 되지 뭐,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굳이 연구해야 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만큼 자기 자신은 자신의 판단력과 선택,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본인이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인간들이.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자기 하자를 모르는 겁니다. 자기가 원래부터 고장 났다는 사실을 꿈에도 못했어요. 내가 믿을만한 그리스도는 참된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적그리스도가 한 종류가 아니고 여러 종류가 나왔어요. 어느 게 진짜인지 모르겠어요. 서로가 서로를 베끼기 때문에. 인간에게 인기 있는 메시아가 되기 위해서 서로를 베꼈기 때문에 도대체 적그리스도가 취향 따라 시대 따라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요.

한결같이 그들에게는 성령이 안 나온다는 것, 다시 말해서 피가 앞장세워지지 않는 그리스도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을 아예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그런 내용은 적그리스도에서는 나오지 않죠.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접촉점을 가져야 되는데 접촉점 자체를 없애버렸으니까 안됩니다.

그러면 이점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면 불만일 거예요. 그러나 그 불만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7장 1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 군데만 더 찾아보면 사무엘상 2장 16절,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것은 엘리 제사장 아들들이, 옛날엔 제사장이 최고 권력자였으니까 요새 같으면 재벌2세나 3세쯤 된다고 보고 제사하는 데에 가서 맛있는 고기 부위를 내가 먼저 먹겠다고 지금 먹고 싶다 해서 강제로 뺏는 이야기이고, 아간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여리고 전쟁하고 난 뒤에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쳤는데 아간이 몰래 빼돌렸죠. 삥 뜯진 않고 몰래 빼돌렸죠.

지금 이 두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어느 인간이 아간을 욕할 수 있습니까? 어느 인간이 엘리 아들들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아간 요소와 엘리 아들 요소가 모든 인간에게 다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에게. 그리고 기어이 그것을 인간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여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무식하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마치 있는 것처럼 착각해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엘리의 아들들도 마찬가지고 아간도 마찬가지고 그 바치는 물건이 이건 너무 고가의 비싼 물건이란 말이죠. 그걸 본 이상 안 빼돌리겠어요? 빼돌리죠.

한번 상상을 해봅시다. 어떤 강대상에 헌금들이 올라오고 뭐 헌금들 딱 보면 얄팍한 봉투 올라오는데 두툼한 봉투가 올라오는 거예요. 두툼한 봉투가. 비트코인 요번에 대박쳤다고 감사헌금 한번 크게 한 거예요. 9천만원 됐다고 1억 가까이 됐다고 올라온 거예요.

그런데 지금 목사 사모가 수술비가 없다. 목사 사모가 남편보고 바가지를 긁습니다. “네가 복음 전하고 뭐 이웃을 사랑한다 어쩐다 하는데 이웃사랑 말고 네 마누라나 사랑해라! 마누라 다 죽어가는데 너는 뭐 주의 종이라고 어려운 사람 심방이나 하고. 네 마누라 지금 죽어가기 직전이다. 다른 남자들 봐라. 다 아내를 위해서 남편이 헌신하는데 너는 핑계 좋~~~~다. 핑계 좋~~~다. 주의 복음 전한다고? 자기 마누라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응? 후대에 네 자식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그럴 때 그 마누라의 입을 확 막는 방법은 1번-주먹으로 친다, 2번-베개로 때린다, 3번-손수건으로 막는다, 4번-돈으로 떡칠한다. 몇 번입니까? 돈으로 떡칠해버리면 쑥! 들어가죠. 아, 목사 부인도 호강할 수 있구나. 쑥 들어가죠.

그러니까 엘리 제사장 아들들이 고기 내놓으라는 것과 그 목사 부인이 다른 식구 심방하지 말고 네 옆에 있는 나나 돌보라고 외치는 그 심정. 어떤 인간이 그 마음을 밟고 지나갈 수 있습니까. 그런 인간 있습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그 이유는 이거에요. 첫째 시간에 한 것처럼 ‘나는 영원하다.’ 나는 영원하다. 나는 영원한 겁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영원하다는 것이 내 육신, 내 마음에 확 절실하게 와닿게 돼요. 하나님보다도 내가 영원하고 하나님 아픈 건 모르겠고 나 아픈 것은 진짜 아픈 거고요. 아까 실제라는 말을 했잖아요. 내가 아픈 건 진짜 실제고 하나님이 짜증내는 그건 모르겠고. 짜증내는지 내가 뭐 아나. 모르겠고.

성경에서 아간, 이 아간의 행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돌로서 아간을 쳐 죽였잖아요. 쳐 죽일 때 아간을 뽑는 그 과정을 보세요. 아간을 뽑는 과정이 하나님께서 “아간, 너 나와!” 이렇게 뽑은 게 아니고, 전체 이스라엘을 다 모아놓고 제비뽑아서 뽑은 거예요. 제비뽑아서.

그리고 그 뽑힌 아간을 돌로 쳤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인간이 본인을 돌로 치지 아니하면 어떤 전쟁에도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나를 향하여 돌을 치지 아니하면 어떤 자도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거예요. 천국은 들어갈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곳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돌로 치지 않아서 그래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에스더 8장 7절,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하만이 유다인을 살해하려 하므로 나무에 달렸고 내가 그 집으로 에스더에게 주었으니” 하만이라는 사람, 유다인들한테는 철천지원수가 되는 거죠.

그런데 하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아하수에로 왕의 바로 밑에 그 권력을 다 한꺼번에 손에 쥔 제2인자에요. 이게 실제에요. 그러면 이 하만이라는 자의 권세가 얼마나 센지 모든 민족은 그 앞에서 바사 나라 왕에게 절하듯이 하만이 가는 곳마다 다 절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인 중의 한 사람인 모르드개는 남들이 절할 때 꼿꼿하게 직립해서 절을 하지 않았어요. 절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모르드개가 이렇게 나왔다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해낼 수 있느냐? 못해냅니다.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르드개 같은 경우는 모르드개 사촌 누이 에스더가 뭐라고 했습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했죠. 그 정신은 모르드개가 이미 먼저 갖고 있었어요.

자기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했을 때, 그때 우리 민족을 이 땅 바사나라에 심어놓은 하나님의 활동이 그때 보이는 거예요. 내가 먼저 죽을 때, 나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눈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이 죽어버린 유대 민족을 가지고 소위 살았다고 큰소리치는 세상나라 지옥나라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식으로 일관성 있게 계속 지속되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나와 나 사이를 단절시킬 때, 비-연속성이죠, 연결시키지 않고 단절시켰을 때 이게 마땅하고, 하나님만이 연속성을 지닌다. ‘하나님만이 쉬지도 않고 계속 힘차게 일하신다’가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만약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 내 하는 일이 필연이 되어버리고 내 하는 일에 대해서 소기의 성과를 자꾸 노리게 되고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다 날아가버리는 거예요.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내 소원대로 안 해줍니까? 기도응답 왜 안 해주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한테 잔소리하듯이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그런 잔소리를 해댄다는 말은, 나는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우연적 존재가 되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나는 한결같이 영원해야 만족스럽다는 겁니다, 내가.

이것을 좀 더 설명하고 싶네요. 인간은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를 분리 안 해요. 인간은 분리가 없고 대신 소외를 느껴요. 인간은 소외를 느낍니다.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 자기가 엄마, 아빠 사랑을 다 받을 때 그게 자기 자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둘째 애가 태어났을 때 먼저 태어난 애의 시기, 질투가 뭐 대단하죠. 일부러 동생을 괴롭혀보기도 하고 아빠, 엄마의 모든 사랑이 동생한테 다 가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거예요.

그럼 뭘 느끼는가? 내가 알고 있는 나로부터 뭔가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죠. 이건 분리가 아니고 그걸 ‘소외되었다’ 합니다. 소외되었다는 말은 내가 알고 있는 내 쪽에 어떤 구멍이 생겼다, 빈터가 생겼다, 뭔가 마저 채울 수 없는 허점이 발견되었다. 그게 소외입니다.

이 소외된 빈터를 인간은 뭐로 채우는가? 향락, 이걸로 채워요. 향락(享樂), 주이상스(jouissance)라 하는데 이 향락이라 하는 것은 마냥 즐거운 쾌락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 향락이란 말이 굉장히 어려운데, 이것은 내가 나로 인하여 한껏 즐거웠던 그때 그 시절의 기분, 느낌을 말해요. 내가 내 만족에 빠져가지고 한껏 즐거울 때 그때 그 기분.

그 빠진 부분, 향락이 빠진 부분을 a라 합시다. 이 a가 빠졌으니까 소외를 느끼겠죠. 이걸 어디서 찾느냐 하면 큰 어른(대타자), 큰 남한테 이걸 찾아요. ‘혹시 비어있는, 나의 나다움으로 즐거웠던 그 즐거움을 당신은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요청하게 되죠.

자, 여러분께 묻습니다. 이 큰 어른, 제일 큰 타자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바로 신이죠. 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을 왜 찾는가? 내가 나에 대해서 스스로 완벽한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나는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처음에 부모로부터 만들어졌죠. 인간의 두뇌가 아직 성숙되기 전이기 때문에 부모 손에 크면서 “아이고, 이쁜 것. 아이고, 똑똑한 것. 왜 이리 잘 생겼냐.” 부모가 흔히 말하잖아요. 내 자식만큼 잘 생긴 사람 없다고. 부모가 말합니다. “네가 어떤 일 있더라도 이 부모가, 이미 힘들었어, 너 공부시켜주고 힘들었지만, 너 원하는 거 다 해줄게. 다 해줄게.” 막 기가 살죠, 애가.

그런데 둘째 낳고 난 뒤에는 완전히 바뀌죠. “엄마, 꼭 둘째를 낳아야 됐었어?” 막 이렇게 따지는 거예요. 그때 엄마가 이성적으로 이야기해요. 애가 컸으니까. “하나 더 낳으면 1억 준단다, 얘야.” 이제 계산적으로 나오는 거예요. “하나 더 낳으면 1억 준단다. 동생 덕분에 우리도 먹고 살아야 되지 않느냐. 또 하나 더 낳으면 2억 준다는데 셋째 낳을까?”

비로소 아이는, 부모는 어디까지나 부모 개인위주라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하죠. 그때부터 부모로부터 독립, 분리라고 하는데 분리가 아니고 부모로부터 분리되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드디어 내가 아는 자기로부터 소외당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집착이 더 지독해지는 거죠. 더 지독해지는 거예요. 내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겠다든지, 내 자상했던 아빠 같은 남편을 만나겠다든지. 자상하고 잘 도와주는 그때 아빠, 엄마는 언제 적인데? 처음에. 나중 말고. 치매 걸려 빌빌거리는 그거 말고 처음에 멋있던 그때 아빠, 그때 엄마 같은 사람. 젊은 아빠, 젊은 엄마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환타지죠. 모든 인간은 망상을 만들어요.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가 망상가에요. 나로 인하여 내가 즐거웠던 향락, 내 즐거움을 어떤 식으로든 메꾸지 않으면 메꿔질 때까지 술을 먹든지 뭘 하든지 간에 어쨌든 간에 이 향락을 채우길 원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그걸 찾아보지만 세상은 각자 너하고 나하고 똑같이 하기 때문에 남들이 나한테 한계가 있고 장벽이 돼요. 그러면 장벽 없이 나한테 모든 것, 나의 나다움, 내가 괜찮은 존재임을 알려주는 그런 존재가 누구겠습니까? 큰 타자 누구겠어요? 신이겠죠.

그럼 신의 구성요건은 누가 채워요? 신이 줍니까, 내가 채우는 겁니까? 내 조건에 딱 맞는 컨셉으로 딱 맞추는 거예요. 옵션 다 넣어요. 옵션 다 넣고 하여간 내 마음에 맞는 나의 메시아,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따로 챙기면서 그걸 성경에서 여호와라 하고 그걸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엘리의 아들들이 여호와를 안 믿는가? 잘 믿죠. 좋으신 하나님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요. 아간이 하나님을 안 믿는가? 잘 믿어요.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여리고성 이겼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내 소외를 마저 채울 수 있다,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아요. 하나님은 존재만 하시고 마지막 채우는 것은 내가 적극적으로 내 행동으로 나서고 그 행동에 대해서 주님께선 뒤처리, 죄 사함만 해주면 된다는 거예요. 아, 편리하다. 편리해. 정말 편리한 하나님이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 봅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되어 있죠. 찾았습니까? 이 본문을 딱 보자 이 말이죠. 9절까지 더 보면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되어있죠.

1장 8절, 9절 딱 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믿어야지. 나 이 말씀 원합니다. 믿고자 합니다.’ 대번 나오죠. 서슴없이 그런 행동이 나오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온전한 나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온전하고 하자 없는. 그리고 고스란히 천국에 갈 수 있는 나, 거기에 대한 기쁨이 최고의 기쁨이죠. 향락이니까 최고의 기쁨이에요.

옛날 아빠, 엄마가 주던 것 이상으로, 이젠 나도 컸으니까 아빠, 엄마는 공부 잘하고 몸 건강하면 최고라 하지만 여기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을 보니까 나중에는 주의 얼굴, 천국까지 가잖아요. 하늘나라 가니까. 10절에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천국을 들은 이상 내가 놓칠 이유가 없죠. 성경에 이게 있다는 걸 안 이상은 이걸 붙잡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한번 들어보세요. 그러면 성경을 봤는데 성경을 애써 부인한다? 성경을 본 이상 소외의 빈터가 더 늘어났죠. 차라리 몰랐으면. 절에 갔으면 이런 걸 모르잖아요. 절에 갔으면 불경만 외우지, 이런 건 몰랐잖아요. 종교 바꾸고 교회 와서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 9절, 10절 보니까 야, 이거 예수 안 믿으면 작살나는 수가 있겠다. 누가 손해나는 거예요? 내가 손해나죠. 가만있지 못하겠죠. 어떻게 해야 돼요? 믿습니다. 이래야죠. 믿습니다. 누굴 위하여? 나를 위하여.

여러분, 적그리스도가 적부처가 아니에요. 적부처가 아니죠? 가짜 부처 아니에요. 뭡니까? ‘적’ 그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죠. 그리스도. 나를 기쁘게 하는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데살로니가후서 2장 3-4절,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방금 2장 4절 보셨잖아요. 1장 8절, 9절 보셨잖아요. 2장 4절 같이 봤죠? 그럼 딱 보는 순간, 뭐는 거부하고 뭐는 받아들이고 딱 계산 섰죠? 1장 8절 복음은 받아들이고 뭐는 거부한다? 적그리스도 이것은 거부하면 된다, 딱 섰죠. 그런데 2장 9절을 봅시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나타나죠.

그러니까 1장 8절, 9절, 2장 4절, 그리고 2장 9절, 모든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더불어서 나타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예언에 의하면 적그리스도, 거짓 기적들이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마구 마구 채워줬다고 한 거예요. 채워준 거예요. 그러니까 2장 9절 같은 사단의 역사는 피해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그런 논리가 등장하죠. 문제는 피할 길이 없다는 거예요. 왜? 내가 원하는 걸 주는데 내가 그걸 피해요? 내가 원하는 걸 주는데.

그 제사 고기가 맛이 없으면 우리는 그렇게 안해요. 맛이 있으니까 그러죠. 내가 재벌 3세인데 맛이 있다. 그럼 강제로 그걸 먼저 빼앗아 먹는 겁니다. 사람이 이미 내가 나를 위해서 살겠다고 굳어져버리면 악마의 유혹과 악마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그걸 거부할 능력은 상실되어 있습니다. 없어요.

왜냐하면 악마가 인간보다 더 똑똑하기 때문에. 악마는 천사입니다. 인간보다 더 똑똑해요. 우리가 뭘 원하고 있는지, 소외를 채울 빈칸 향락을 원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 악마가 알고 있다고요. 알고 있으니까 이걸 채워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큰 어른, 우리는 신을 믿잖아요. 신에 대한 복음을 믿잖아요. 큰 어른을 왜 믿습니까? 내가 소외되었으니까.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니니까 소외되었으니까 큰 타자에게 기대고 나중에 천국까지 보장 받겠다 하잖아요. 이 사항을 사탄이 모르겠습니까? 적그리스도가 바보입니까? 인간들이 이걸 원하고 있다는 걸 적그리스도가 모르겠어요? 아니, 뱀 같이 지혜로운 악마가 인간의 속셈을 모를 리 있습니까? 인간의 속을 장악하고 있는데. 다 알죠. 아니까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거예요. 성경구절가지고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겁니다. 성경 어느 구절에 뭐 있고 어느 구절에 뭐 있고 믿으면 된다 다 해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이 어떻고 666이 어떻고 다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이 적그리스도가 못하는 게 하나 있어요. 모든 기적과 원하는 걸 다 해주는데 인간이 원하는 성령은 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원하는 영을 주는데 그건 악령이 되겠죠. 하나님이 원하고 예수님의 피를 앞장세우는 성령은 악령의 힘으로도 그걸 주라 마라 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 바치겠다 할 때에 악마는 충분히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끼어듭니까? 악마하고 인간 사이에, 베드로가 악마한테 안 붙잡히려고 몸부림을 쳤습니까? 아니에요. 칠 수도 없고 쳐도 소용없어요. 그냥 끌려가는 거예요. 악마가 베드로보다 더 세니까.

그런데 악마보다 더 센 분이 개입했죠. “사탄이 너를 알곡삼기 위해서 요리조리 요리를 하고 있는데 내가 내 기도를 함으로써 너는 거기에 끌려가지 않게 되었다. 예수님 내가 너를 지켜준다.”라는 말을 누가복음에서 하고 있습니다. (눅 22:31-32)

그러니까 아담으로 태어나서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정신분석학적으로 자기 소외된 것, 자기의 영원한 기쁨을 찾고자 하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누가 극복해주십니까? 예수님이 피의 능력으로 이걸 극복해주시는 거예요. 피의 능력으로.

네가 예상 못한 기쁨, 네가 예상 못한 감사, 네가 상상도 못한 세계가 예수님의 피와 사귐 가운데서 이미 마련되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내가 나로부터 소외가 아니라 내가 나로부터 ‘분리’되는 거예요. 아담 안에 있는 나와 예수님 안에 있는, 창세 전부터 택하신 예수 안에 있는 나와 분리되는 거예요.

야곱 같은 경우에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야곱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태어나지 않았는데 창세 전에 야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있어요. 그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야곱이 선택을 받은 거예요. 예수 안에서. 아, 정말… 정말 무지무지하게 신기한 일이에요, 이게.

자, 인간과 인간의 분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와 나의 분리의 원형은 인간 속에서 인간이 나온 분,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리고 인간 속에서 나온 그 인간, 인자죠, 인자,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님을 인간과 분리시켜버렸어요. 그러니까 잉태되고 그다음에 분리되고요. 잉태되고 분리되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그다음 부활하시고 하늘 우편에 앉으시는 승천되시고.

잉태→분리→죽으심→부활→승천. 잉태되고 죽으시고 죽었는데 빈 무덤 되고 부활하시고 승천했다 할 때 필수적으로 중간에 들어가는 게 뭡니까? 인간에게서 나와서 인간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나 우리나 같은 인간이라는 뜻이거든요. 인간은 인간이로되 인간은 아닌 것,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이항 대립이 아니라 했죠. 이항 대립은 뭐냐 하면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이런 거예요.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이게 이항 대립이에요. 이 이항 대립은 동양 철학에서도 음양론으로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하는 ‘나는 빛이고 너는 어둠이라’ 할 때, 이 이항 대립은 누구 편에서 이야기했느냐 하면 인간에서 인간으로 분리된 예수님 쪽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이 빛이고 너는 어둠이라 하니까 난 예수 믿어서 빛 되고 어둠 안 될래,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에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그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에게서 나왔지만 인간에서 분리된 예수님이 이런 빛과 어둠과 낮과 밤을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고 나쁜 고기, 좋은 고기, 양과 염소를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지옥 갈 사람과 천국 백성은 달리 분리시키고. 누구 입장에서요? 예수님 입장이에요.

여러분들이 이걸 이해했는지 제가 한번 질문해보겠습니다. 양이 100마리 있는데요. 99마리가 중요합니까, 한 마리의 양이 중요합니까? 솔직하게 인간들 입장에서. 99은 1의 99배에요. 하나, 하나, 하나,… 99배라고요. 99과 1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하냐? 당연히 99마리가 1마리의 생명보다 99배나 중요하죠.

그런데 주님은 뭐가 중요하냐 하면 그 1마리 양이 99마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왜? 분리를 보여주거든요. 분리. 예수님 자신을 보여주거든요. 예수님 자신을. 99마리는 분리가 없어요. 분리를 체험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1마리 양은 잃었다가 얻는 과정이 있어요. 절차를 보여준다고요. 잃었다가 얻는 것.

누구든지 잃었다가 얻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에 못 가요. 듣지 말고 전부다 집에 가서 잃어버리세요. 잃어버리세요. 내가 나한테 잃어버리는 것을 성령세례라 합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릴 때, 그것도 기쁘게 잃어버릴 때 그것이 성령세례에요.

물세례는 동일한 나가 물속에 들어갔다가 동일한 인간이 물에서 튀어나온 거예요.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인간은 그 인간이나 그 인간이나 동일한 인간입니다. 어떤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성령세례는 성경 뭐 이거 찾을 필요도 없어요. 워낙 많이 나오니까. 너는 죽고 그다음에 너는 죽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는 죽고 너는 죽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를 살려줬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면 나와 분리된 분이 내 바깥에 계신 분이 죽은 나를 바깥에서 건지는 거예요.

주께서 바깥에서 건지는데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막 5:41)하는 그 대목을 예로 들어봅시다. 소녀가 지금 죽었어요. 죽었는데 예수님이 딱 들어오시는 거예요. 소녀가 실눈을 살짝 떴습니까? 아니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을 때, 못이기는 척 손을 내밀었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잔다.” 하는 것은 인간과 분리된 예수님의 일방적 주장이에요. 일방적 주장. 말씀은요,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 그냥 밀어붙이기에요. “얘는 구원받고자 얼마나 애써도 소용없고 내가 창세 전에 예정했기 때문에 너를 백성으로 데려간다.” 하는 것은 우리보고 납득하라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거예요. 일방적인 것.

그러면 ‘아닌데? 내가 예수님을 선택했는데.’ 하죠. ‘물론 주님도 선택했겠지만 나도 엔간히 선택했는데.’ 이렇게 나올 거 아니냔 말이죠. 그러면 한평생 살아가면서 무엇과 무엇이 나누어지겠습니까? 분리되겠습니까? 교체되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선택했다’는 사실과 ‘아니다. 그전에 주님께서 먼저 나를 선택했다.’는 두 가지 사실 가운데서 그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태와 사건들, 길가다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까지 합해서, 집에 오는데 갑자기 배가 아픈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태가 나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고 전에 배 안 아플 때도 주께서 선택해서 배 안 아프게 했다는 것을 순간순간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깨닫게 하죠.

그러면 사나 죽으나 우리의 몸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약간의 내 것? 아니죠. 그 순간만큼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죠. 살아질 때 주의 것, 이건 쉬운데 문제는 죽을 때 주의 것으로 죽는다는 이것은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하기에는 굉장히 난해해보이지만, 막상 또 주께서 은혜주시면 ‘주의 것 데려가는구나.’ 하고 가뿐하게 주님께 넘길 수가 있습니다.

매일 성도의 삶은 주께 넘겨지는 삶이에요. 그런데 넘겨지기 전에 우리가 한고집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이 내가 소외되지 않기 위해 나의 기쁨, 사는 즐거움 이걸 우리는 안 놓으려고 해요. 이게 우리의 옛사람, 육신 때문에 그래요.

육신적으로 고집이 있어가지고 “나도 이왕 인생사는 거 나도 재미나게 나답게 한번 살아보자. 나다운 게 뭔지 모르겠지만 나답게 한번 살아보고 주께서 부르시면, 앗싸! 주님, 가겠습니다.” 이렇게 깔끔하게 가면 되잖아요. 주께서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을. 세상에, 진짜 네 마음대로구나. 그래놓고 네가 잃어버린 양 맞아? 내가 보기에는 너 지금 99마리 양 중에 하나 같은데. 살아서 펄펄 뛰어, 완전히.”

감사한 것은 모든 것이 결국은 말씀이 승리한다는 것. 내 고집보다도, 나의 소외보다도 말씀이 승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한 텀(term), 한 텀만, 짤막짤막한 에피소드, 그걸 일화라 하는데, 에피소드만 보여주는 인생이지만 그 에피소드와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것은 주님의 영원한 살아계심입니다.

이것을 늘 에피소드 끝날 때 알아요. 끝날 때 복기해서 알아요. 되돌아보면서 아는 겁니다. 아, 천국은 내가 미리 살 수 없는 곳이고 미리 들어갈 수도 없고 내가 알지 못하는 나라, 그 나라에 가게 하시는구나.

자, 그렇게 해놓고 2장 19절 봅시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여기서 ‘우리’라 하는 것은 바로 요한일서 2장 27절에 나오는 그 사람들을 말합니다.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그다음에 뭡니까?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우리보고 지키란 말입니까, 아니면 지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일방적으로 줬다는 이야기에요? 일방적으로 줬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할 것은 내 고집과 피를 앞장세우시는 성령, 기름 부음이 성령이니까, 성령과 일처리가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매일같이 경험하면 되죠. 그건 뭐 어렵지 않죠. 내 뜻대로 되었는데 전혀 기쁘지 않고 모든 게 만사형통했는데 전혀 내 향락, 내 욕구가 만족스럽지 않아요. 분명히 내 기분이 좋아야 되는데 기분이 안 좋아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뭔가 찝찝해.

이유를 알아보니까 말씀 앞에 보니까 내가 오만했어. 내가 교만했어요. 하나님의 성도니까 이제는 내 기도 응답되고 내 뜻대로 주께서 내 편에 서니까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잠시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한 거예요. 절대로 주님은 우리 뜻대로 하지 않고 성령의 뜻대로 하고 성령은 누구 뜻대로? 예수님의 뜻대로 하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거예요.

마치 옛날 예수님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그것을 그대로 우리 인생에다 새겨 복사를 하고 박아 넣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뭘 해도 우리는 내 만족을 위해서 내 소외를 만회하고 내 빈칸을 마저 채워서 나도 룰루랄라 즐겁게 사는 보람을 느끼고자 하는 일에 우리가 매진하는데 그 일의 진행과정에서 나 말고 성령의 개입을 우리가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적그리스도와 무관한 진짜 주님과 함께 관계있는 성도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러니까 매일이 성경적인 삶이에요. 그거는 매일 성경 보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말씀과 턱없이 나밖에 모르는 인간과 늘 매치시킵니다. 삶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어디에서도 늘 그걸 맞닥뜨리게 하는 거예요.

자, 끝으로 아까 권사님 질문하신 것 다시 한번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서수남 키다리 아저씨. 이 역사세계, 우리가 여기(키다리 아저씨의 몸통부분이 놓여있는 땅) 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다 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했죠. 히브리서 12장 22절, 하늘에 있는 시온산에 가면 천군 천사와 많은 교회들이 같이 살고 있어요. 이미 같이 살고 있어요.

여기(하늘)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흐르지 않아요. 그러나 이 밑에는 시간이 흐릅니다. 이 자리(하늘과 땅의 경계)에 스데반 집사를 집어넣어봅시다. 스데반 집사의 특징은 성령을 받은 거예요. 성령을 받았으니까 스데반 집사의 팔다리에 돌멩이들이 날아와요. 이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왜 던집니까? ‘너 곧 죽을 거야. 너 죽을 거야.’ 때문에 죽이는 거예요. 돌을 던지는 거예요.

그들이 돌 던지는 것은 물론 종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 이단이기 때문에 던지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스데반 집사의 이 순교는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당한 순교를 되풀이하는 거예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와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하늘에서 일어서서 스데반 집사를 기다렸죠. 그러니 예수님이 함께 있는 거예요. 이 말은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의 긴 사지, 지체가 되는 거예요. 지체. 이름은 스데반 집사이지만 스데반 집사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 시대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손이고 팔이고 사지라 보면 돼요. 하나의 코고 눈이고 그렇게 보면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인 줄 알고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한 거예요.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은 이 시대, 역사시대가 변함없어요. 예수님보고 죽어라, 죽어라 한 것하고 똑같은 겁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라 할 때 이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죽게 한 그 힘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스데반 집사에게 돌 던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돌 던진 자가 누구죠? 어디에 속합니까? 너희 아비는 악마죠. 마귀에 속한 자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 바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는 적그리스도 메시아, 메시아도 아닌데 가짜 메시아를 여기에 유포시켜서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있는 이 세상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하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지금 성도들과 함께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께서 살아있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만족에 빠질 거예요. 자기만족에.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천당은 갔고 슬슬 기도해서 복이나 받아 부자나 될까. 아간의 모습, 딱 내 본모습이네. 엘리 아들 모습. 나도 권세 있어서 하만처럼 권세 좀 부렸으면 좋겠다. 모르드개 이 사람 좀 이상한 사람이네. 죽으면 죽으리라. 태어났으면 뭐 한가닥 해야지, 왜 죽으려 해. 납득이 안되네. 스데반 집사는 그거 좀 양보해가지고 예수 안 믿는다 하면 되고 나중에 산에 가서 ‘예수 믿는다~ 난 자연인이다~’ 하면 될 거가지고 괜히 보는 데서 예수 믿는다 해서 왜 얻어터지고 그래.

자, 이런 이야기가 뭐냐 하면 이중성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하나님과 지상에 아들을 보냈죠. 그러면 신이 두 분이에요. 성령 빼놓고. 하나님 계시고 이 땅에 예수님 계시고. 하나님이 둘로 나누어졌다는 것은 악마와 함께 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도저히 도저히 상상도 못한 진실입니다.

예수님이 두 분이기 때문에 성도도 두 개의 자아가 되는 거예요. 돌 맞는 스데반과 이미 예수님 안에 있는 스데반과 둘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주위에서 때리라고 부추겨야 되는가? 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나에게, 이 육신이 우리를 자꾸 유혹하죠. 육신이 타고났으니까. 그러면 위에 있는 사령부에서 가만두지 않고 떼찌 떼찌를 하는 거예요. 일이 그렇게 안 되도록 하는 거예요. 일이 그렇게 안 되도록.

예를 들겠습니다. 이 예 안 들면 찝찝해서 못 마쳐요. 찝찝해서 해답 없는데,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은행 다니면서 돈이 급해가지고 한 천 만원 다음에 메꾸면 된다 하고 천 만원 횡령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네가 왜 나쁜 짓을 했느냐?’ 이렇게 물을까요, 아니면 ‘네가 십자가가 기쁘냐?’ 이렇게 물을까요? 어느 쪽을 물을까요? ‘네가 예수 믿는 자인데 왜 돈을 탐내? 돈이 일만 악의 뿌리인 것을 알아, 몰라?’ 이렇게 할까요? 아니면 ‘십자가가 기뻐, 안 기뻐?’를 묻겠습니까? 어느 쪽을 묻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와가지고 나한테 벌 내리면서 ‘천만 원 횡령했으니까 네 집에 이천만 원 날라가라!’ 이런 식으로 할 거라는 예측은 누가 해요?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 있음, 없음을 내가 알아채려는 그 시도를 주께서 무산시켜버립니다.

그거 말고 ‘네가 지금 기쁨이, 주님 십자가 죄 용서 기쁨이 없기 때문에 네 생각이 엉뚱한 데 가 있구나. 다시 한번 네가 십자가를 알아봐. 그 돈 훔치고 안 훔치고 그게 아무 의미 없어. 너는 애초부터 네가 무의미한 것을 기뻐해라.’ 이게 바로 복음이 주는 기쁨입니다. 주께서는 그렇게 인도해요.

‘상관하지 마. 내 피로 이미 네 죄 용서했다.’라는 이 기쁨이, 알고 있지만 상상도 못한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은 주께서는 우리 행동을 보고 딱 찾아오는 겁니다. 나는 잃어버린 너를 얻었다. 어깨에 메고 “기뻐, 안 기뻐?” “기뻐요.” “그럼 돈은 너 먹어라.” “(울상 지으며) 이거 돈 횡령 재미 하나도 없어.” “그렇지 그럼. 재미있는 게 있는 줄 알았어? 죄 사함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는데.” 이렇게 되겠죠. 해답됐죠. 이제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가지고 우리가 예측하지 않게 하옵소서. 내 인생을 미리 재단하지 않게 하옵소서. 단정 짓지 않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께서 이끄는 그것이 잃어버린 것을 얻는 주님의 살아계심의 흔적인 것을, 저희들 이제 그 흔적만 보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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